오피니언Home >  오피니언
-
[기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⑹- 장두노미(藏頭露尾)
필자는 지난 ?월 ?일 모 신문에 총장 선임의 불법성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고신총회와 고려학원 이사회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응이 없어도 되는 걸까요? 박영호 목사님이 총회장으로 있을 때모 신문에 나온 기사를 가지고 신문에 나온 사건이기에 조사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당시 총회 임원회의 강력한 의지와 결단에 따라 총회는 격론을 벌이고 투표까지 하여 조사위원회를 만들었던 전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도 그 결정의 정신을 존중하여 총회와 관련하여 신문 기사에 난 사건에 대해서 조사위원회를 만들든지, 아니면 운영위원회에서라도 살펴야 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겠습니까? 자기편이면 덮고 다른 편이면 조사위원회를 만듭니까? 총회 임원회의 결정이 이렇게 사람에 따라 수시로 바뀌어도 괜찮은 겁니까? 다시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고신대 총장의 논문표절문제 아무 문제가 없습니까? 개인적으로 이사장이나 총장의 두터운 신뢰와 사랑을 받는 당사자 대해 그 대학이 공정하게 심사하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하지만 결과가 너무 느립니다. 이번에도 시간 끌기로 할 것 같습니다.“오래된 일이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등으로 적당히 넘기려고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결과를 지켜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사회가 바르게 하려고조속한 결론을 내자고 회의 한 일이 한번이라도 있습니까?어쩌면 이사회는 이 일에 대한 답변이 나오지 않길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고려학원은 이사들의 개인 전유물이 아닙니다. 고신총회 산하 성도들과 총회에서 파송한 이사들로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총회와 성도들의 뜻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그런 노력도 의지도 없다면 이사회는 직무유기입니다. 알고도 문제없다고 강행한 이사회에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이사회에 속한 목사들이 자신의 교회에서 설교할 때 그렇게 가르치고, 장로들은 대표 기도할 때 그런 자세로 기도하는지 궁금합니다. “주님, 이건 불법이지만 급한 불부터 끄고 봅시다.” 과연 이런 설교와 기도에 성도들이 얼마나 공감하며 은혜받을 것인지 심히 궁금합니다. 절차위반과 위조문서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총회의 ‘절차위반, 문서위조’, 이런 일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받아들여지다니 참 신기합니다. 노회 구역조정 문제로 시끌벅적할 때 당회도 노회도 거치지 않는 괴문서를 총회장이 운운하는가 하면, 총회 서기가 임원회의 결정과는 다른 문서를 노회에 보내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니 이사회도 그런 불법을 보고 배운 것이 아닙니까? 지난 73회 총회에서 고려학원 이사회가 총장 인선을 위한 고려학원 정관을 개정했습니다. 총장선임을 위해 ‘1차는 3분의 2 찬성을, 2차는 과반 찬성’으로 선임할 수 있도록 개정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 이런 절차가 진행되려면 이사회에서 먼저 결정하고 수정안이 총회에 상정되어야 합니다.그런데 지난해 총회가 파한 후 3개월이 지난 12월 말에가서야이사회가 총회가 결정한 정관개정을 ‘추인’하는 형식으로 개정을했다 하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입니까? 정말 이래도 괜찮습니까? 이일을 누가 주도했으며 누가 진행했습니까? 반드시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이런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되며, 고신 총회와 500여 총대를 속인 일이고, 고려학원 이사회와 고신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기만한 일입니다. 총장은 거짓과 불법으로 세움을 받았으니 주도 세력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하수인 역할을 톡톡히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고신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논문표절, 절차위반, 부정 정관개정 등,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이렇게 선임된 총장의 지도력이 서겠습니까? 정관개정도 불법이지만 불법적 개정안을 불법으로 총회에 상정 해서 총대를 속이고 총장을 선임했습니다. 총장 모집 공고를 낼 때의 법은 분명 3분의 2 이상으로 선임해야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공모를 보고 지원한 지원자들은 공고한 정관대로 선임해야 한다. 그런데공모한 후에정관을 ‘과반수’로 개정해서 뽑는 것은 누가 봐도 특혜입니다. 공모가 나갔다면, 공모한 정관대로, 기준대로 선임해야 합니다. 공모한 정관과 다른 정관을 만들어서 지원자 중에 총장을 선임한 것은 누가 봐도 특혜를 주기 위한 일종의 모략에 불과합니다.처음부터 과반수 개정된 정관으로 공모를 했다면, 더 많은 지원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3분의 2보다 과반수가 훨씬 당선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특정인에게 유리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이사회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부당하게 일사천리로 진행했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의 이런 행위에 대해 ‘선거운동의 의미와 금지되는 범위’와 관련한 대법원의 판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법원 2016. 8. 26. 선고 2015도11812 전원합의체 판결 [공직선거법위반, 정치자금법위반]’을 예를 들어 살펴봅시다. 이때 판시사항은 ‘선거운동의 의미와 금지되는 선거운동의 범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며, 판결 요지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거운동은 대상인 선거가 특정되는 것이 중요한 개념표지이므로 문제 된 행위가 특정 선거를 위한 것임이 인정되어야만 선거운동에 해당하는데, 행위 당시의 상황에서 특정 선거의 실시에 대한 예측이나 확정 여부, 행위의 시기와 특정 선거일 간의 시간적 간격, 행위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 행위자와 후보자의 관계 등 여러 객관적 사정을 종합하여 선거인의 관점에서 문제 된 행위가 특정 선거를 대상으로 하였는지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특정한 선거를 목표로 하여 선거에서 특정인의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하는 목적의사가 표시된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 한 선거운동이라고 볼 것은 아니다.” “...특정 선거에서 특정인의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하는 목적의사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는 점이 당해 선거인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인정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세 가지 판결 요지에 따르면, 고려학원 이사회가 시도한 정관 개정은, ‘행위의 시기와 특정 선거일 간의 간격, 행위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 등을 종합해 볼 때, 분명 ‘특정인의 당선’을 도모하는 ‘목적 의사’가 분명한 ‘선거운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회는 총대들을 무지하게 보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필자는 몇 차례에 걸쳐서 바르게 하자고 강력하게 호소하는데, 이사회나 총회 임원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답을 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까? 잘못이 없으면 없다고 밝히고, 잘못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안에서 이것이 다루어지고 해결책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글로 표현하지만, 답이 없을 땐, 똥물을 뒤집어쓸 각오로 문제를 삼아도 저의 책임이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후의 모든 책임은 그렇게 행한 당사자들에게 있음을 알립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얹어봅시다. 월간고신과 기독교보에 발행인은 현직유지재단 이사장, 총회장이 맡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현 총회장은 어디를 가고, 전례 없는 전 총회장이 발행인을 계속하는가?외국인이라 안된다면, 이에 관해 아무 문제 없다는 사람들이나 당사자가 답할 차례입니다. ‘장두노미’(藏頭露尾)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 원나라의 문인 장가구가 지은 <점강진·번귀거래사>에 등장하는 이 말은 쫓기는 타조가 머리를 덤불 속에 숨기지만 꼬리는 미처 숨기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장두노미(藏頭露尾)는 “진실은 감춰도 언젠가는 밝혀 진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회는 장두노미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6) (민12:1-3, 마5:5)
지면을 통하여 제가 목회하는 고신교회에 대해 잠깐 예로 언급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고신교회도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370 용사는 못되더라도 37 용사는 있어야 합니다. 고신교회 목회자로서 오늘까지 우리 고신교회의 선교를 돌아보면 고신교회 성도들이 다윗의 37 용사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교회 분열의 아픔과 담임목사, 부목사들이 면직을 당하는 일 앞에서도 선교를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의리가 있는 용사들이었습니다. 코로나19 기간에도 15개 정도의 교회를 필리핀과 네팔에 건축했습니다. 순간순간 어려움이 생겼을 때 구제하고 돌아본 것은 말할 수도 없이 많습니다.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우리 교회 선교비가 1억이 더 지출되었습니다. 경상비 전체 25-30%가 선교비로 지출되고 있습니다. 일단 빚을 내서라도 선교비는 지출하고 봅니다. 돈의 액수를 떠나서 선교를 바라보는 시각과 선교를 하는 실천에 우리 고신교회와 같은 교회가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고신교회 담임목사로서 우리 교회는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일에 전 성도가 다윗의 37 용사와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성도들을 좋아하겠습니까? 잘은 몰라도 고신교단 안에서 저만큼 성도들 좋아하는 목사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 장면에서 목회자는 매우 위험한 신호를 감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고 좋아해야 합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성도들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이 부분이 목회자가 감지할 줄 알아야 하는 위험한 신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가 하나님 외에 그 어느 것도 의지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눈곱만큼이라도 하나님 의지하는 것을 성도에게로 돌리고 기대를 거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목회자에게 즉각 응징하십니다. 그러니 목회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성도들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절대로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로 하여금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목회자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성도들은 반드시 목회자의 37 용사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시도 때도 없이 풀무불 앞에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온유한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풀무불에 던져 넣으십니다. (욥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 결과 목회자는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당한다 하더라도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온유한 자가 되어 순금같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온유하게 된 목회자는 정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아론과 70장로들을 규합하여 백성들을 선동합니다. 어느 정도 새가 결집 되니 미리암은 공개적으로 모세의 통치에 비방과 반역을 시도합니다. 아직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감동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때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증언합니다. 악한 무리들이 거짓된 계획을 세워 공격했습니다. 무시무시한 공격 앞에 제자들과 함께했던 무리들은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홀로 지시기도 힘든 십자가를 지시고 묵묵하게 끝까지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목숨까지 위협하는 거짓된 계획으로 공격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른말,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온유한 자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온유한 자의 완성을 이루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약속하신 대로 땅을, 약속의 땅을, 교회를 주셨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약속하신 최고의 복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교회인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미 복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교회가 아닌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 아닙니다. 교회와 한 몸 되지 못하고, 교회와 거리가 있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도 아니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복음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모든 말을 듣고 계십니다.
-
[기고] 이현령비현령(5) -전관예우(前官禮遇)
두런두런 둘러앉은 장로님들의 담소 가운데 20만 원짜리 봉투 하나면 “총회에서 발언해 줄 목사들 많다” 아니 “발언 안 할 사람 거의 없다”라는 말로 폭소가 터져 나옵니다. 참 검소한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상임위나 특별국의 자리 하나면 평생 다져왔던 인간관계나 의리는 배설물처럼 여기는 결단력 있는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이렇게 다루기 좋은 목사 장로이니 계파나 진영의 의도를 가지고 매관매직하면 오늘날 고신에 만연되어있는 계파와 진영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 자명합니다. 아니 혹자는 이미 보수는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보수를 만들어 개혁을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자고 주장합니다. 뼛속까지 개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총회 임원으로 만들어 죽어가는 보수를 살려야 한다고 평생 개혁에서 쌓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작금의 정치행태에 발맞추어 가능한 봉투가 되는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서 천년만년 누리고 싶어 하는 형국입니다. 20만 원짜리 봉투와 자리의 맛을 봐 버린 소위 보수라는 자들은 아예 정치적인 의리와 명분은 상실되어버렸고, 보수라는 가면만 쓰고 있을 뿐 언제든지 개혁도 되고, 진보도 되어 그동안 누리던 봉투의 자리를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그 신보수라는 새 배에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최근 들어 고신교단 내에 계파와 진영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커진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서울의 L 목사님께서 열변을 토하신 것처럼 총회 서기 출신 카르텔입니다. 총회 부회록 서기가 되기 전에 총회 준비를 위한 총회 서기부 MT라는 명목으로 그 해 부회록 서기 후보의 물망에 오르는 사람을 부부 동반 모임에 참여시킵니다. 그러니 총회 임원에 입성하기 위해서 그 계파 사람이 아니면 시작부터 불가능합니다. 지금 총회 서기부에 포진한 분들을 보십시오. 계파 색채가 엷고, 계파를 싫어하고, 보수성향이 있는 사람도 일단은 그 진영에 몸을 기대고 양다리를 걸쳐야 시작이 됩니다. 균형 있는 총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으로 다리만이라도 걸치고 시작했는데, 회록 서기를 지나면서 하체가 들어가고, 부서기를 지나면서 몸통이 들어가고, 서기가 되면 총회를 손에 쥐고, 서기를 마치면서 그 영향력은 한국교회로 확대됩니다. 사욕에 치우친 사람이 총회 임원, 특히 총회장이 되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년 동안 총회 서기부를 거치면서는 구석구석을 너무도 잘 알게 된 서기부 임원들이 총회장단이 되었을 때, 유익한 점보다 작금의 현상처럼 위험하고 무법천지가 될 위험성이 훨씬 높습니다. 소위 서기 카르텔이라는 것을 반드시 총회적으로 다루어 이 카르텔로 인한 계파와 진영을 넘어 안하무인의 정치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서기부를 거치지 않아도 총회장단에 오를 정도의 사람이면, 이미 노회와 목회에 상당한 경험과 식견을 가진 분들로서 충분한 자질이 검증되었고, 사무총장 이하 직원들의 훌륭한 보좌가 있기에 1-2년의 총회장단 사명은 충분히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한국교회에서의 우리 교단의 몫이 있습니다. 교단의 위상을 생각해서 대부분이 총회장을 역임하신 분들이 이사로 가십니다. 총회 서기부를 마치고는 특별국이나 상임위에는 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총회 임원회에서 의논이 있었다지만 관례처럼 총회 서기를 마치면 총회를 잘 안다는 빌미로 감사국에 들어갑니다.(현재 감사국원 3명은 최근 총회 서기역임) 총회 감사국인지 총회 서기 지내신 분들의 친목회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입니다. 총회 감사국이 총회 서기부의 연장선 조직입니다. 총회 감사국은 별정직처럼 그 기능상 법적 전문가, 재정 전문가, 행정 전문가 정도는 배치해야 합니다. 차라리 총회를 잘 아는 서기부 출신들로 총회를 하나 만드시지요. 총회 총대로 나올 정도가 되면 기본적인 자격과 능력을 갖춘 분들인데, 총회 서기 출신들이 꼭 해야 한다는 논리는 총대들을 얼마나 무시하는 처사인지 총대들은 알아야 합니다. 총대들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근 하나 던져주면 입을 다무는 총대들이니 무시당하는 줄도 모를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서기를 마치고 임원회에서 의논한 대로 그 어느 상임위도, 틀별국도, 이사도 가지 않은 분이 고 신수인 총회장이십니다. 최근 총회 서기를 지낸 분 들 중 유일하게 보수진영의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 약속을 지켰습니다. 소위 개혁진영의 서기들은 단 한 명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너무 개혁을 잘하셔서 말입니다. 처음 시작할 땐 훌륭하셔서 선출되셨습니다. 그런데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엔 그 어떤 사람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총회가 훌륭한 분들로 보호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총회장의 사역이 끝날 무렵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는 당신의 몫인 “CBS이사”를 제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총회장님께서 가셔야 교단 권위와 위상이 서게 된다고 고사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전달하여 CBS에서는 제가 이사로 갈 것 다 알고 전화까지 왔었습니다. 물론 개혁에 몸을 담았던 총회장 출신은 선배 총회장 출신 목사님의 이사 자리를 빼앗아서라도 반드시 그 자리에 갑니다. 말 그대로 개혁 정신이 투철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고 신 총회장님께로부터 “미안하다”고 하는 전화가 왔습니다.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힘들게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래 그 자리는 제자리가 아닙니다. 총회장님 자리니 총회장님 편하신 대로 하시라”고 대답했고, 현제 이사로 있는 당시 총회 서기가 고집을 부려 그 자리로 갔습니다. 사욕에 눈이 뒤집히면 세상이 말하는 윤리도 도덕도 질서도 없습니다. 현재 우리 고신총회가 한국교회에 파송하는 이사는 CBS, 성서 공회, 찬송가 공회, CTS, 군선교 위원회입니다. 현재 이사를 하고 있는 분들은 다 총회 임원 출신이고, 목사인 경우는 다 총회 서기 출신입니다. 고 신수인 총회장님을 분기점으로 해서 그동안 관례로 총회장을 역임했던 분들이 가던 이사를 총회 서기를 마치고 가는 아주 개혁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총회를 잘 아는 것을 넘어 총회 울타리 밖에 있는 이권도 잘 알게 된 것입니다. 총회장단이 갖는 위엄과 일반 목사와 비교할 수 없는 혜택에 눈이 멀어 목사의 정년까지 희생해 가며 자리에 오르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그동안 꿈꾸어 왔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됩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런 세월이 가는 동안 고신의 신앙과 정신은 오물통이 되어 썩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기가 아니라고 했다가 집권을 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위기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 역시 진영논리로서 총대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속임수입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고신의 교회들에게 떠넘기는 기가 찬 술수이지요. 그리고 뒤에서는 몇 년 세월을 통해 달인의 경지에 오른 실력으로 소위 봉투가 되는 일에는 탁월한 안목으로 몇 수를 내다보는 행보를 하게 됩니다. 총회 서기부는 총회 서기단 활동으로 총회 임원회 자리를 끝내야 합니다. 총회장단은 시대 시대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바라보며 영적으로 한국교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장자 고신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을 세워야 합니다. 총회가 평안하고 태평성대일 때는 농어촌에서 목회하시는 훌륭한 목사님도 총회장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고신이 위기라고 특별기도회를 하는 상황이라면 총회장 되기 위해 몇 해 동안 수천, 수억을 쓸 것이 아니라 총회장에 된 후 수억을 총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을 총회장으로 세워야 합니다. 고신이 위기라고 기도회를 하면서, 1) 눈 감고 아웅 하지 말고 2) 순수한 교회들과 성도들의 주머니를 갈취하지 말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 이미 그 자리에 오르신 분이라 해도 위기의 총회를 위하여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정말 고신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전관예우(前官禮遇)’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장관급 이상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 사람에게, 퇴임 후에도 그의 공직에 대한 헌신을 기려 예의를 갖추어 존중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리는 개인의 행복에 우선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바쳤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로 일한 관리가 퇴직했을 때 그를 예우함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전관예우라는 말의 뜻은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장 잘못된 사례가 법조계의 전관예우입니다. 전직 판사와 검사가 퇴직 후에 변호사가 된 사람을 현직 검사나 판사가 예우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변론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관(前官)이라는 이유로 유리한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공정을 생명으로 하는 법정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총회 감사국은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총회 피감 기관들을 공정하게 제대로 감사할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관예우 받았으니 밥값을 해야겠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신을 대표하는 한국교회의 자리도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자리매김해 버렸습니다. 당연히 사리사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릅니다. *묻고 싶습니다. 앞서 언급한 총회를 대표하여 파송하는 이사직에 어떤 근거로, 어떤 기준으로 파송하는지, 서기 출신이 총회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총회 임원회는 총대들이 납득 할 수 있는 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5 : 성경에서의 용납과 용서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데 먼저 감사를 드리면서 문득 그게 용서인가 용납인가? 두 단어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라는 용어적 의미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많은 교인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찬송가 569장 3절에도‘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가 있다. 하지만 엄격히 보면 같은 듯 다른 말이다. 본 호에서는 그 차이점이 어떤지를 분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용납(容納)과 용서(容恕)의 단어 분석 1. 용납이란? : 헬라어로는 ‘아네레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바칠 납(納)이다.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임’이라 했고, 금성사 국어대사전에는 ‘부정적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했다. 국문학 교수를 역임한 최태영 장로는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란 그의 저서에서 ‘이 용납은 허용(許容)과 거의 같은 뜻으로 부정적인 요소, 모자라는 점이 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의 죄는 용납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지 이를 긍정적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라고도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어떤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일에 대한 회개 기도가 필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용납은 죄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후11:1).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구나’(고후11: 19).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라’(엡4:2)고 했다. 여기에서의 용납이란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너그럽게 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2. 용서란? : 헬라어로는 파레시스 로서 ‘놓아줌’, ‘해산’, ‘처벌의 보류’등의 뜻이 있고, 로마서 3:25절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지은 죄를 용서함’이란 뜻으로 말씀하고 있고 수많은 용서에 대한 말씀도 거의 동일하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이며,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이라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성경적 의미나 각종 사전적 의미로 볼 때도 용서의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또 스스로 죄를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 기도할 때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용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인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찬송가 569장 3절에 ‘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면, 용서와 용납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다소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논한 대로 실제로는 같은듯하나 다른 의미이다. 여기서는 용납이 아니라 용서로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이 두 단어 외에도 관용(寬容)(사전적 뜻: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란 용어도 있다. 어쩌면 용납과 용서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고민과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문자적인 구분을 지나치게 하다 보면,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기 때문에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용어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
[최호숙 목사] 삶의 현실에 대한 인간의 태도
인생의 삶을 사는데 현실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 태도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태도(attitude)가 고도(altitude)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비행기가 아래로 향하느냐 위로 향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고도가 결정되듯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방향과 높이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누구나 높이 오르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높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를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본다고 한다.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값이 비싸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값이 싸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다. 항상 높이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려움이 있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 내려가는 자들이 있다. 어려운 시기에 갈렙은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믿음의 태도를 가졌던 사람이다. 그는 85세의 나이에도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땅에 잔류하고 있는 아낙 사람들이 사는 산악지대를 정복하고자 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분명 함께 하실 것이니, 내가 반드시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수 14장 12절)” 갈렙의 신앙은 능동적 신앙의 삶이었다. 45년 전에도 다른 사람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후퇴 반응을 보였지만 갈렙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자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벌써 85세 고령인데도 여전히 적극적인 Next Vision 성취를 지향하며 살았던 것이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창업하기 전 레이 크록은, 53세 나이에 겨우 밀크쉐이크와 함께 30년 동안 종이컵을 파는 세일즈맨으로 반평생을 보냈다. 그래도 그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30년이라는 기나긴 밤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서 성공을 한 것이다. 인도의 벵골 호랑이는 먹이 사냥에서 사냥감을 잡는데 약 스무 번의 시도 끝에 한 번 성공한다고 한다. 그는 실패 앞에 포기가 아니라 도전의 태도를 가져 그 도전이 성공을 이루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 번 실패하면 쉽게 단념하고 한탄한다. 잃은 것 때문에 원망하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이 자산이 되어 다시 도약해야 한다.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음악가였다. 31세로 죽을 때까지 방 한 칸 없었고, 그토록 필요한 피아노 한 대 없는 불우한 음악가였다. 어느 날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데 악상이 떠올랐다. 그는 오선지를 찾았다. 친구가 레스토랑 메뉴판에 오선지를 그려주었다. 그것이 유명한 아베마리아 세레나데이다. 환경에 낙심할 필요 없다. 주위 시선에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폭풍이 일어도 지구는 돌고 있는 것이다. 고난 속에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가면 길이 열린다. 신앙의 열정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고 그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나니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
[조희완 목사] 자유의 축복 (요8:31-36)
1997년 북한의 권력서열 제3위(노동당 국제담당비서)였던 <황장엽>씨가 주중 한국 대사관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 망명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북한에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나라로 망명함에 따라서 그의 가족들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북한 권력층의 실세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남한으로 망명을 할 경우 남아 있는 가족들이 얼마나 비참해 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남한으로 망명을 감행한 이유는 바로 체제의 자유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고, 너무나 잘못되어 있는 북한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무모한 망명을 한데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의 행동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역사가 평가를 할 것입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 소중함”입니다. 체제의 자유, 정치적인 자유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억압이 있는 나라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기꺼이 몸을 던지고, 민주화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유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억압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애타게 목말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정치적인 자유보다 더 필요하고 소중한 자유가 있는데 바로 영적인 자유(신앙의 자유)입니다. 그 영적인 자유에 대해서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를 취하는 방법을 알아야합니다.(요8:32,36) 둘째는, 자유를 빼앗기지 않게 지켜야합니다.(갈2:4) 셋째는,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갈5:13)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소중한 자유를 잘 지키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 오피니언
- 설교/강의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 오피니언
- 칼럼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 오피니언
- 기고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
- 오피니언
- 성경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 오피니언
- 기고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
[박동철 장로] ‘팬덤 문화’가 교회와 사회에 주는 폐해
- 요즘 세상에 ‘팬덤’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다. 팬덤(fandom)은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단어로 요즘 온·오프라인에서 생겨나는 지나친 팔로어(follower)를 지칭하고 있다. 팬(fan)과 지역(dom)의 합성어로 팬의 집단을 말한다. 어떤 인물을 따르는 팬의 현상은 나쁠 게 없다. 스포츠계나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소위 ‘오빠부대’가 지난 70·80년대 크게 유행했다. 나훈아, 남진, 조용필의 오빠부대는 크게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80년대 이후 스포츠 문화가 대중을 탈 때도 팬 문화가 생겼으며 사람과 사람들의 좋은 관계를 형성해갔다. 한데 최근 들어 정치권에서 회자되는 팬덤 현상은 그 정도가 넘치고 왜곡 돼 새로운 사회 병리현상이 되고 있다. 스타급 정치인들을 따르는 팬덤이 지나치게 경쟁화하고 나아가 맹목적 대립화하는 경향이 있어 개선 돼야 할 현상으로 대두된다. 정치이념에 대한 선택권으로 자연스러운 지형이 형성되는 수준을 넘어 무조건 지지와 함께 선거판에 ‘묻지 마’ 투표현상의 사회적 역기능이 생겨나고 있다. 한국 정치의 병폐인 지역 감정 선거에서 나아가 연대의 진영, 성별 진영으로 나뉘어 폐해를 만들어 내는 현상들이 큰 걱정으로 보인다. ‘개딸들’, ‘이대남’등 남녀 대결이라도 하듯 분열 팬덤화하는 사회현상을 어떻게 봐야할까.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 시대도 팬덤 현상이 있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12제자를 찾을 때만 해도 많은 사람이 따르지 않았다. 예수님이 이곳저곳에서 배척을 당하시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병자를 고치실 때 갑자기 예수를 따르는 팬덤 현상이 생겨났다. 마태복음 14장 13절 “예수께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따라간지라”했고, 14절에 “큰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중 병자를 고쳐주시니”라고 했으며, 이후 저녁이 돼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사하셨다. 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의 떡이 남았다고 기록되어있다. 이후 또 두루 다니시며 병자를 고치시고 칠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팬덤 현상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큰 무리의 팬들은 갈수록 떨어져 나갔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는 십자가 도의 행사 앞에는 애제자 열두 제자마저 떠나버리는 비극을 만들었다. 오늘날 사회현상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그림인 팬덤 문화를 지적하는데 예수님 시대상을 대조함이 적절한지는 의문이 갈 수도 있지만 우리들의 인간 군상(群象)에서 교훈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특별히 정치문화의 팬덤 현상은 사회 공동체를 왜곡시키고 건강한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일이다. 무엇보다 맹목적 진영의 편가름에서 팬덤으로 왜곡 확산되는 기이한 사회현상이 정작 한국의 정치발전을 이끌 수 있을까 짐작이 충분하다. 이러한 저급한 정치문화가 교회에도 침투, 예수님의 십자가 도만을 바라봐야 하는 복음의 본질을 뒤로하고 목회자나 한지도자에 팬덤화하는 교회 공동체도 생기고 있다는 진단이 있다. 그리고 이단종교화의 큰 문제도 보고 있다. 복음의 진리만이 영원히 죄인인 우리를 자유케 할 권능이 있을 뿐이다. 사회 한 분야의 병폐가 여러 곳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특히 정치권의 문화현상이 사회 여러 분야에 파급 영향을 줌은 불문가지다. 오늘날 진단되고 있는 정치권의 잘못된 팬덤 현상이 사회 저변에 확산되지 않았으면 한다. 특히 한국 기독교 교회 공동체가 대형화하고 유능한 설교가의 인기몰이가 사회 팬덤 현상에 편승될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것이 기우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복음 앞에 선 구원의 백성, 우리들은 주님 십자가 죽음 앞에는 말할 수 없는 팬덤이 일어나도 좋을 것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팬덤 문화’가 교회와 사회에 주는 폐해
-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6)
- 하나님을 아는 자는 사랑한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미움은 사단에게 속한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아는 자는 사랑하면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사랑하지 못하며 미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알고 거듭난 자, 은혜받은 자는 사랑의 중요성을 알고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것이 미워하는 것보다 더 쉽고 즐겁습니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고 필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고 하나님 자녀의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거짓말하는 것이고 거짓 된 신앙인격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의 사랑은 지식적으로만 아는 사랑이 아니고, 마음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행동하는 사랑, 실천하는 사랑, 행함과 진실함으로 실천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한다고 하고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거짓 사랑이요 위선입니다. 잘 가르치고 설교를 잘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위선이요 가짜입니다. 참된 사랑은 행동으로 보여주고 실천에 옮기는 사랑입니다. 리더는 사랑의 불을 붙여주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움은 살인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요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미움은 사망이요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은 자신도 살고 남고 살리는 생명 사역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는 자요 미워하 는 자는 어둠에 있는 자입니다. 말세는 사랑이 식어진다 예수님은 말세의 여러 가지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말세는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고 예언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이루어집니다. 미움으로 가득차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말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이 없습니다. 냉정하고 마음이 따뜻하지 못합니다. 말세는 자 기를 사랑합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말세는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이 식어지고, 세상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합니다. 이기주의 자신만 사랑할 때 삶이 삭막해지고 관계가 깨어집니다. 사랑이 식어지고 사람들이 사납고 악합니다. 정죄하고, 고소하고, 죽이는 일까지 행합니다. 사랑이 식어진 가정과 교회는 행복하지 못 합니다. 사랑이 부흥과 화목, 행복의 열쇠가 됩니다. 말세의 징조, 사랑이 식어진 시대에 첫 사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령 받아 사랑의 열매 맺고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삶, 미움이 가득 찬 삶은 잘못된 영, 악령의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이단의 특징 중의 하나가 악하고, 사납고, 거짓되고, 미움이 가득하고, 사랑이 없습니다. 이단의 잘못된 점을 알고 빠져 나올려고 할 때 협박합니다. 만물의 마지막때, 말세에 정신 차리고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말세에 적극적으로 더욱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사랑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 열쇠입니다. 사랑이 제일입니다.
-
- 오피니언
- 논문/책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6)
-
-
[김성수 총장] 시대정신과 기독교교육
-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믿음의 용사로 양육하는 것은 모든 신자 부모들과 교사들이 소원하며 바라는 기도의 제목일 것 입니다. 언약의 자녀들을 하나님 나라의 승리하는 군사로 잘 양육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들이 어떠한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고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교육’은 언약의 자녀들을 온실 속에서 양육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을 세상 속으로 내어 보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 부모와 교사들은 우리의 자녀들이 자라면서 영향을 받고 있고, 또 이들이 앞으로 나아가서 살아야 할 세상이 어떤 시대 정신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무엇보다도 세속적 인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본주의란 인간자율성을 절대화하고 인간의 무한정한 가능성을 강조하는 사상입니다. 인본주의는 피조물인 인간을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독립적인 존재로 상정합니다.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스스로 법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본주의 사상은 21세기 사회에서 세속주의와 강하게 결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속주의란 기독교복음의 능력과 범위를 주변화 시키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신앙은 정치나 과학, 그리고 교육과 같은 인간 삶의 핵심 영역에서는 반드시 말해야 할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받고 있는 현대 학교교육은 철저하게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인 교육입니다. 이런 교육을 통해서는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 인격자로 함양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시대의 또 다른 한 사회문화적 특징은 이미 진부한 용어가 되어버린 용어이기도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로 설명 될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보편적 진리를 부인하며, 해체주의를 표방합니다. 해체란 무조건 파괴해 버리는 혼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경직되고 획일화된 사고를 반대하고, 그동안 이성에 밀려서 무시되어 왔던 감성, 비주류 등의 요소를 재조명하자는 것입니다. 이론화, 수식화에 치중하는 경향에서 벗어나서 좀 다른 요소들도 고려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성을 찬양합니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한번 유행했다가 사라져버리는 일시적 현상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 사상이 우리 시대를 어떠한 방향으로 인도해 갈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마치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절대적 조건인 것처럼 생각해 온 현대인들에게는 분명히 크나큰 의미와 도전을 주고 있는 사상적 흐름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결국 상대주의를 표방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세계관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관용하는 것은 상대주의라는 대가를 지불함으로서 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관을 순수하게 사회적인 구성물로 이해하기 때문에 모든 소리와 이야기들을 존중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진리를 주장하는 입장은 본질상 오만하며 억압적이며 타인에 대한 지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절대적인 진리이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육의 전제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오늘의 시대 정신입니다. 이렇게 모든 가치가 상대화되어 버리고 초월적, 절대적인 가치가 사라진 자리에 가장 쉽게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은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라는 가치관입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 사회의 문화는 물질주의와 현세적 쾌락주의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대사회는 폭력성과 퇴폐성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또한 정보와 지식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는 지식정보사회입니다. 지식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라는 점에서 ‘지식경제’라는 용어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지식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정도를 넘어 지식의 폭발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비스럽게도 현대사회는 과학과 지식정보의 사회이면서도 동시에 이와 상반되는 주술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생활양식이 혼재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모습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 그리고 진보에의 신념 등이 도전을 받기를 하지만 그렇게 쉽게 감성과 주관성 등에게 모든 자리를 양보해 버리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기는 한편으로는 과학기술의 힘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동시에 신비주의적인 생활양식에 관심을 가지는 사회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 정신은 전통적 가정을 중심으로 한 삶의 양식까지도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전통적 가치관이 도전을 받으면서 이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삶의 방식들이 여기 저기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이미 그룹결혼을 포함해서 임시 “동거”, “시험결혼”, 혹은 “계약결혼”, 개방결혼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으며 동성간의 “결혼”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독신주의와 딩크족의 증가, 그리고 성개방의 풍조는 불안한 가정, 병든 가정, 가정의 붕괴와 해체의 위험성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징조들입니다. 이러한 가정의 위기는 21세기 사회에 더욱 심각한 형태로 나타나면서 기독교교육이 직면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사고하고 행도하도록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우리 사회를 감싸고 있는 시대 정신을 분별하면서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자녀들로 잘 양육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
- 오피니언
- 설교/강의
-
[김성수 총장] 시대정신과 기독교교육
-
-
[하수룡 장로] 존재감
- 2010년경부터 빛나는 조연이 등장하면서 장면마다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는 바람에 갈수록 이들의 가치는 커지고 있다. 폭발력 있는 개성적 캐릭터는 주연보다 조연이 매력적으로 구현되어 환호를 낳게 된다. 식상함이 없는 신선함으로 주연과 주변 인물을 섬기는 자세로 연기할 때 그 존재감으로 명품조연이 탄생되는 것은 틀림없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개성과 자존감이 남다르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을 ‘인싸’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존재감이 남다른 사람이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받아 선택받은 자로 구별되게 선민이 된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은 내가 잘나서 결코 아니다. 왕이신 주님이 최고의 주연이 되셔서 우리를 조연으로 뽑아 잘 받들며 섬기라고 명하였기에 존재감이 있는 사람으로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구원받은 주의 자녀로 천국을 갈 수 있다는 자긍심은 있지만 하나님이 선택한 가장 귀한 존재라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다. 종종 기독교인들이 당당하게 존재감을 자랑스럽게 드러내지 못하고 선한 영향력을 펼치지 못한 상태로 살아가는 모습을 목격할 때가 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어 성할 때 ‘그래도 예수쟁이는 믿을 수 있어.’라는 말로 불신자에게서도 존재감을 인정을 받았다. 선진국이 된 오늘날 모든 것이 풍족해서인지 나의 정체성과 존재감마저 망각하고 소명감 없이 살고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분명히 나라는 존재가 그리스도의 조연으로 주와 남을 섬기고 산다면 존경심이 담긴 존재감이 드러날 사람이 될 것이 틀림없는 사실인데 말이다. 요즘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나의 존재감은 어떠한지 자문해보자. 물론 존재감을 키우기 위해 학력의 스펙, 각종 자격증과 세상 지위로 무장할 수 있지만 이런 것들을 무조건 쫓아가면 나중 될 자가 많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진정한 성도의 존재감은 그리스도를 주연으로 모시고 기꺼이 자신을 모든 사람의 종으로 섬기기 시작할 때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
- 오피니언
- 초장칼럼
-
[하수룡 장로] 존재감
-
-
[조희완 목사] 무익한 염려 (마6:25-34)
-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큰 마을에 어느 날 하나님이 보낸 죽음의 사자가 내려와서 그 마을 대표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보낸 죽음의 사자인데 내가 내일 중으로 이 동네에서 열 명을 데리고 가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무서운 소문은 삽시간에 온 동네 사람들에게 퍼져나갔고 온 동네 사람들이 큰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드디어 그 다음 날 그 동네에서 여러 사람들이 죽었는데 무려 100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대표가 죽음의 사자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아니 열 명만 데리고 가겠다고 하더니 왜 백 명이나 죽었습니까?” 그러자 죽음의 사자가 펄쩍 뛰면서 “나는 결코 백 명을 죽게 하지 않았다. 나머지 90명은 무서운 소문을 듣고 염려하고 두려워 하다가 스스로 죽은 자들이니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죽을 일이 있어서 죽은 사람보다 두려움과 염려로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았던 것입니다. 염려라는 것이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염려(念慮)라는 말은 헬라어로 “메림나오”(μεριμνάω)라고 하는데 “나뉜다.” 혹은 “혼란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나뉘고 혼란스러우면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악한 사탄이 사람들을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서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무기가 바로 “염려”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염려를 통하여 우리를 곤경에 빠트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망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수도 없이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염려를 하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염려를 극복할 수 있는지 성경은 명쾌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염려는 불신앙에서 오는 것입니다.(마6:30,31) 둘째로, 염려는 신앙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마13:22) 셋째로, 염려는 믿음의 기도로 이길 수 있습니다.(빌4:6,7) 모든 염려를 이기고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조희완 목사] 무익한 염려 (마6:25-34)
-
-
[박봉석 목사] 이 기쁨!
- 이 기쁨! “제자입니까?”라는 제목의 책을 쓴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언제나 자신의 언행심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괴로워했습니다. 성격을 보아도 형편이 없고, 그 성격 때문에 자기가 지은 죄를 생각하면 더 어이가 없어서 ‘나는 왜 목사이면서도 이럴 수밖에 없을까?’라며 늘 자책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것 때문에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목사님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문제가 뭔지 아니? 너의 가장 큰 문제는 네가 걱정하는 성격이나 허물이 아니야. 더 큰 문제는 내가 받아들인 너를 너 자신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야. 너는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 않았니? 그래서 목사가 되지 않았니? 그런데 내 아들 예수의 피가 나에게는 충분하고도 만족스러운 것인데 너에게는 아직도 불만족스러운 것 같구나. 그렇다면 네가 나보다 더 거룩하다는 말이냐?” 바로 그런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계기로 자신 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완벽주의 성향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스스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서 죄인 된 자신을 온전히 씻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자신의 삶 속에서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신앙생활과 사역에 기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 하나님의 음성에 큰 깨달음을 얻고 이제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죄와 허물을 온전히 씻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제 모든 죄책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바로 이 진리를 깨닫고부터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평을 경험하고 비로소 말로 다할 수 없는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고, 그리고 그로부터 신앙생활과 사역에 기쁨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어떤 외국의 목사님이 한국교회를 방문하고서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왜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예배하는 데 얼굴 표정이 다 어둡습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아무리 봐도 구원받은 감격이 얼굴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 외국 목사님을 안내한 한국 목사님이 변명할 말을 찾다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우리 한국의 성도들은 예배당에 들어서면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은 그 외국 목사님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요. 한국 크리스천들에게는 아직도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셨는가보군요.” 독자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제목으로만 즐거워한다면 예수님 믿는 의미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즐거워할만한 세상의 조건이 혹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받은 그 놀라운 구원의 감격으로 날마다 즐거워하며 기쁨으로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과 똑같은 것만을 즐거워하고 세상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을 똑같이 슬퍼하고 세상 사람들이 근심하는 것을 똑같이 근심한다면 예수님 믿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며, 우리가 무엇으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위대함을 세상에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12장 28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은 미래가 아니라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이미 이 지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사탄의 결박과 종노릇하는데서 해방 되고 자유를 얻은 그것이 이미 내게서 구원이 시작되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당연히 기쁨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인 구원을 받고 이미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되었으니 지금부터 그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 바로 그것이 구원 받은 자의 삶입니다. 독자 여러분, 지금 이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
- 오피니언
- 칼럼
- 신앙과 삶
-
[박봉석 목사] 이 기쁨!
-
-
[오성한 목사] 예수 믿는 것
-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를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것은 내 몸이 성전 됨을 믿는 것이다. 임마누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모두 청산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이유는 내 몸에 좌정하시기 위함이셨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다 청산하시고 나를 성전 삼으셨다. 나를 성전 삼으셨다는 말은 내 몸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이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이다. 이제 실수하는 모습에 집중하지 말고, 예수님의 하신 일에 집중하여 경건의 훈련을 해야만 한다. 말씀대로 믿고 기도해 보라. 말씀과 기도의 믿음으로 거룩해 짐을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의 행함을 고쳐서 완벽해 지려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해 놓으신 것을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자신의 행위를 고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이 이루신 것을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행위를 고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조심하고 열심을 내면 말씀을 완벽히 지켜 낼 수 있는 줄 안다. 아니다. 속은 것이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라고 했다. 율법을 몰랐을 때는 자신이 대단한 줄 알고 살았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살아야 하는데 율법을 모를 때는 자신이 살았다는 말이다. 계명을 알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되었다고 하는가? 죄가 살아났다고 한다. 율법을 알고 보니 죄가 살았다고 했지 그리스도가 살았다고 하지 않는다. 율법을 알게 된 결과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7:10)라고 한다. 율법을 지키려는 것은 불가능함을 말씀하고 있다. 율법을 아무리 지키려 해도 결과는 사망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속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7:11)고 선언한다. 죄가 기회만 있으면 우리를 속인다. “너는 계명을 지킬 수 있어. 왜 못 지켰어. 좀 더 노력했으면 되는데. 더 노력해”라는 생각을 주는 것은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계명을 지킬 수 없다.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지키려 하는 것은 속는 것이다. 지킬 수 있는데 못 지켰다는 자책감과 자괴감과 죄책감은 나를 죽이는 자리로 이끈다는 말씀이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오래 속아 왔다. 내가 열심을 내고 인내하고, 온유를 발휘하면 선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늘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솔직히 한 번도 완벽하게 의롭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보혈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간다고 믿었지만 완벽하게 믿고 나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은혜를 많이 받고 회개가 잘 된다고 생각할 때에만 가능했다. 죄는 나를 속였다. “너는 그것 밖에 안 되는 녀석이야. 아직 멀었어, 더 자신을 수련을 해야 해.”라는 의식을 넣고 있었다. 미래의 언젠가는 더 좋아질 나를 바라보며 끝없는 수련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을 했다. 나는 보수교단에서 성장을 했고 보수교단의 신학을 했다.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배웠다. 그래서 믿음으로만 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고만 알았던 것이다. 믿음을 말하고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알고 있었지만 완전히 믿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하나님께 죄송하고 아프다. 오늘도 좋은 날이다. 주님과 풍성함을 누린다. 임마누엘로 풍성하다. 임재 속에 있으면서도 모르고 살아온 날들이 아깝기만 하다. 오늘도 주님의 임재로 충만하다. 임마누엘의 영광이 넘쳐난다.
-
- 오피니언
- 칼럼
-
[오성한 목사] 예수 믿는 것
-
-
[신재철 목사] 조롱을 당하다
- 「'공동주택 관리법 제30조'에 근거하여 소유자에게 부과 적립하여야 하며 '시행령 제31조 8항'에서 임차인이 대신 납부한 경우 이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동주택 관리비 청구서에는 “장기수선충당금”이라는 항목이 있다. 건물이 노후화됨에 따라 필요비용을 미리 적립하는 것이다. 도색, 배관 수리 및 교체, 승강기 교체가 대표적인 내용이다. 워낙 큰 금액이 들기에 매달 적립을 한다. 또한 장기적인 관리 영역이라 의무자는 세대 소유자가 된다. 즉, 집주인이 납부해야 할 항목이다. 하지만 매달 집주인에게 직접 받기가 쉽지 않아 관리비에 포함해서 청구하게 된다. 그러면 조금 문제가 생긴다. 상당수의 세입자가 미래의 관리비를 주인 대신 지불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주택 관리법에서는 세입자가 이사 갈 때 관리실에서 정산받은 내역을 기준으로 집주인이 돌려주게 되어 있다. 40세대 작은 아파트이기에 전출입이나 매매가 흔하지는 않지만 종종 있다. 그러면 관리소장의 카리스마를 뿜으며 내역을 정리하고 설명한다. 필요 시 적당한 중재를 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장기수선충당금 정산으로 큰 갈등은 한 번도 없었다. 숫자를 정리를 돕는 아내 입장에서는 조금 번거로운 일이지만 내역서를 보면 누구나 수긍하는 부분이라 마음의 고단함은 없는 업무다. “아이고, 이사 가신다고요. 다음 가시는 곳은 조용한 집이면 좋겠습니다.” 늘 층간소음으로 고생하시던 세입자 한 분이 이사 가신다는 연락을 주셨다. 이사 가는 사유를 들어보니 층간소음은 아니고 집주인이 바뀌면서 새 주인이 직접 거주하게 되어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늘 술에 취해 인생 한탄하시는 독거 어른이다. 가끔 노동판에 나가 생활비를 벌어오는 것 같은데 이미 퇴근길에 얼굴이 붉다. 어느 날은 전화해서 성경책 한 권만 구해줄 수 있냐고 해서 교회에 있던 깨끗한 중고 성경책을 전해 드리기도 했다. 이래저래 정이 들었던 분이었기에 조금 섭섭한 마음도 인사를 나누었다. “장기수선충당금? 그게 뭔 소리입니까? 당신 주택관리사 자격 없죠?” 소유자가 바뀔 때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통화가 된 집주인. 전세로 살던 입주자에게 돌려주어야 할 장기수선충당금에 관해 차근히 안내를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조롱이다. 나의 자격이나 무지함을 탓하기 시작한다. 거듭 설명을 드렸더니 본인이 세를 주는 주택이 여럿이고 부동산 중개 일을 하는데 장기수선충당금 내용은 처음 듣는다고 한다. 지금까지 3년간 전출입 간에 한 번도 이런 내용으로 분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웠다. 내가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었을까? 조롱 섞인 소리에 화가 났지만 일단 꾹 눌러 참고 통화를 마쳤다. 지인 중 공인중개사가 두 분 있어서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그 사람은 엉터리 공인중개사이거나 돈을 세입자에게 내주기 싫어서 관리실에 으름장을 놓은 것이라고. 관련 법규를 찾아보니 장기수선충당금은 정산 후 세입자에게 돌려줘야 할 내용이 맞다. 이제 어떻게 할까? 어차피 집 팔고 사람이기에 다시 볼 이유가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정들었던 세입자 아저씨가 분명 피해 보는 상황이다. 연체 한번 없이 냈던 관리비에서 돌려받을 수 있는 돈이다. 그 돈이면 좋아하는 술도 편하게 마실 수 있을 정도는 된다. 그리고 무시 받았다는 사실에 지금 너무 화가 난다. 전화기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며 고민이 깊어진다. 그냥 확 한번 퍼부을까?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신재철 목사] 조롱을 당하다
-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4: 하기수련회인가? 하계수양회인가?
- I. 서언(序言) ‘하기 수련회’와 ‘하계 수련회’. 어떤 말이 올바른 말일까? 또 ‘수양회’와 ‘수련회’. 둘 중에서 어떤 말이 올바른 표현인가? 때로는 이런 질문을 받아보기도 하고, 필자 스스로도 다소 혼란이 되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여러 교회들이나 단체들이 여름과 겨울행사를 하면서 이 용어들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휴가철 용어들도 여러 외래어들과 함께 사용함으로서 정확한 구분이 잘 되지 않는 경향들도 많이 있다. 본격적인 여름방학과 휴가철을 맞이하여 진행되는 교회내의 각종 교육행사가 시작되고 있고 또 저마다의 휴가 계획을 세우고 있는 시점에서 올바른 용어 사용과 그 뜻과 정의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하기와 하계, 수련회와 수양회의 구분 1.하기(夏期)와 하계(夏季)의 차이 : ‘하기’란 말의 사전적인 뜻은 여름 기간이다. 계절별로 본다면 춘기(春期), 추기(秋期), 동기(冬期) 등과 계념이 같은 말이다. 하계의 경우는 여름의 시기란 뜻이다. 거의 같은 의미로도 볼 수 있고 또 그렇게 쓰여 질 때도 많이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하기는 여름의 처음과 끝의 기간(期間) 동안을 의미한다. 반면 하계는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여름철 자체의 특징을 내포하는 말로 볼 수 있다. 또한 본 연제 11회에서 논한바 대로 기(期)란 용어의 사전적 뜻은 시절, 시기, 기간 등을 뜻하는 말로서 “일정한 기간씩 되풀이 되는 일의 하나하나의 과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다시 이를 논한다면, 기(期)는 중, 고, 대학교 같은 정기 학제가 아닌, 사회교육원 같은 데서 주로 행해지는 일정기간의 교육을 수료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즉, 기(期)는 회기 연도적 학제(學制)개념이 아닌 연(年)단위 속에서 단기적기간의 수료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오래전에 여름성경학교를 ‘하기 학교’라고 한 것이나 오늘날의 학생회나 청년회의 하기 수련회 등의 말은 바른 용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하계는 사전적 뜻 그대로 여름철에 행하는 행사를 의미하기 때문에 사용해도 무방하지만, 교회의 행사는 일정한 기간이 있기 때문에 하계보다는 하기란 말이 더 합당하다고 볼 수 있다. 2. 수련회(修鍊會)와 수양회(修養會)의 차이 : 이 두 용어의 사전적 뜻은 다음과 같다. 수련(修鍊)의 뜻은 “정신수양이나 운동 따위를 통해서 몸과 마음을 힘써 닦아 기르는 것”, 또는 “기술이나 학문 등을 힘써 배우고 익힘”을 의미한다. 그다음 수양(修養)의 뜻도 역시 “몸과 마음을 닦아 기르는 것”이기 때문에 두 단어의 차이도 별로 없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보통 수련회는 나름대로의 땀 흘리는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몸과 마음을 한 층 더 높은 단계로 이끌어 올리는 모임을 일컬어 말한다. 반면 수양회는 고된 훈련이 아닌 휴식과 휴양을 통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모임을 의미할 때가 많다. 이로 본다면, 교회의 여름 교육 행사들은 ‘하계’보다는 ‘하기’로, ‘수양회’보다는 ‘수련회’로 하는 것이 더 그 뜻에 부합된 말이 된다. III . 결 어(結語) 이상에서 살펴 본 것 같이 서로 엇비슷한 것 같아 보이지만 그 개념상으로 보면 이런 미세한 차이가 있다. 물론 이런 용어를 잘 못 사용했다 해서 행정 질서에 문제가 생기거나 법적인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용어가 통일되지 않고 때에 따라서, 또 사람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사용된다면 우리 스스로의 모순을 드러내는 격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미세한 작은 부분이라도 간과하거나 무시할 것이 아니라 통일된 용어들을 바로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은 여름철 교회 행사의 소중한 각종 교육행사를 진행하거나 곧 행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휴가를 가거나 쉼의 시간들을 가질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바르고 적절한 용어 사용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문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4: 하기수련회인가? 하계수양회인가?
-
-
[박동철 장로] 교회 보란듯 미신 무당이 미화되는 세상
-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은 혁명가이자 탁월한 혁신가였다. 무장 이성계를 등에 업고 망해가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한 일등공신이다. 정도전이 조선을 세우고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혁신적으로 단행한 적폐 청산은 타락된 불교에서 파생된 미신타파였다. 오백년 고려가 당시 망조(亡兆)에 들게 된 것은 고려의 국교 불교가 너무 비대하여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그리고 일부 불교세력은 타락하여 미신 문화화하여 백성들을 혹세무민했다. 정도전은 이 시대상을 정확히 읽고 쿠데타로 새 나라를 세울 것을 설계했다. 정도전은 개국 후 불교를 국교에서 지우고 절을 줄여나갔다. 개국 후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 때 태조 이성계마저 무학대사의 말을 듣고 왕궁의 방향을 정했으나 정도전은 이를 무시하고 과학적 근거에 가까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경복궁 터를 택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정도전의 개혁과 혁신이 조선 오백년의 역사의 맥이 되었다고 사가(史家)들은 말하고 있다. 이후 조선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유교의 국가가 되었지만 긴 역사 속에서 유교 또한 온갖 사회 폐해를 낳았다. 양반과 상놈의 반상계급 고귀한 선비정신이 되려 타락하여 게으르고 나태하고 그리고 나라의 먼 미래를 찾지 못하는 갇힌 나라가 되어 일본에 먹히면서 망하게 된다. 한 나라의 정신세계에서 우러나오는 에너지가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의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 조선의 말기 어지러운 조정과 백성의 정신문화 속에 파고들어 개혁과 혁신을 일으킨 데는 우리 자체의 에너지가 아니었다. 130년 전 이 땅에 복음을 들고 들어온 기독교 선교사들의 십자가 희생이었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이 땅에 들어왔을 때 타파해야 할 문화는 유교문화에서 나온 나태 게으름 남존여비의 천대 문화 그리고 철저한 미신과 우상 문화였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정신세계의 적폐 청산이 교회에서 파생되었지만 당시 많은 선각의 마음을 가졌던 나라의 인재들이 복음을 잘 받고 나라의 문화 근간을 바꾸는데 큰 활약이 있었다. 복음을 받은 우리의 교회 지도자들 또한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속에서 나라를 지켜내고 백성의 정신세계를 바꿔나갔다. 특히 교회중심의 3.1운동 애국정신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끌었으며 나라발전을 이루는데 거름이 되었다. 당시 시대는 온 백성들이 굿을 즐기고 조상을 섬긴다는 제사에 열을 올려왔다. 그러나 교회 부흥과 함께 무당들이 현저히 줄어들고 미신 문화가 거의 사라지는 듯 건강한 사회로 발전했다. “너희가 주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2) 교회는 철저히 말씀대로 복음을 전했으며 많은 신내림 등 영적 질병에서 힘겨운 자들이 교회서 치유받는 놀라운 일들이 있었다. 교회 주변에는 아예 점집과 무당집이 안되는 은혜도 임했다. 그러나 요즘의 세태가 크게 변하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 무당을 찾고 점집을 좋아하는 풍조가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원인에는 청년들이 취업이 힘들고 결혼이 어려워 호기심과 함께 점집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영국 시사잡지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의 점보는 시장이 4조 원이라는 보도를 했다. 지금껏 부끄럽게 여기던 점집 무당들이 공중파 방송에서 토크쇼를 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단순한 사회풍조로 볼 수 없다. 교회 보란 듯 공개방송에서 어떤 유명 배우 출신이 무당이 되어 그동안 숨어서 고뇌했던 개인적인 이야기의 미신을 미화시킨 프로도 있었다. 이렇게 미신의 사회화가 확산된다면 크리스천의 눈으로서만 바라봐야 하는 걱정의 차원이 아니다. 나라의 흥망성쇠 역사에서 미신과 우상숭배가 어떤 결과를 이끌었다는 사례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교회 보란듯 미신 무당이 미화되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