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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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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4-02-23
  • [황권철 목사] 유다 다대오(Jude Thaddaeus'Behind Stories)-동역의 사도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요14:22). 성경에 유다란 이름을 가진 자가 많으나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은 세 명이었다.  첫째, 예수의 동생 유다이다. “이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마13:55). 그는 초기에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다. 예수님과 한 형제이지만, 같은 배에서 나왔으나 씨가 다른 형제였다. 그가 어린 시절에는 형 예수에 대해 잘 몰랐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위해 집을 나갔을 때 많은 박해를 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후에 형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믿었고 비록 사도는 아니었지만 명분상 사도적 반열에 참여하여 예수가 메시야라는 언약의 복음 유다서를 기록했다.  둘째, 예수를 판 가룟 유다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유다의 이름 앞에 꼭 붙이는 한 단어가 있는데 예수를 판 자 라는 말이다.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마10:4),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막3:19),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눅6:16). 요한은 가룟인 아닌 유다가 라고 하였다(요14:22). 가룟 유다는 이 땅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남긴 불행한 자였다.  마지막 셋째, 본문에 나오는 다대오 유다이다. 마태와 마가는 다대오라고 불렀다. 요한은 왜 유다를 가룟이 아닌 유다라고 불렀을까? 신약성경이 쓰여 질 때 예수를 판 가룟 유다 때문에 유다란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 이전 구약에서 유다 이름의 뜻은 찬송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자들이 유다라는 이름으로 불러지기를 좋아했다. 예수님도 유다의 가문을 통해서 오셨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후로 유다란 이름은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 이후로 아무도 유다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그 이름을 가진 자들도 가룟 유다와 구별하여 불렀다. 다대오 유다는 시몬과 함께 열심당원이었다.   주님의 고민에 동참한 다대오    주님의 구원사역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도 주님의 죽으심을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괴로운 심정의 비밀을 토로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요13:21). 이제 주님이 마지막 십자가 지실 사실을 말씀하셨다. 이것이 너무도 가슴 아픈 심령의 괴로움이었다. 물론 십자가 지는 육체적인 고통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그보다 더 큰 아픔과 괴로움은 이 사실을 곁에 있는 제자들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일은 외부에서 일어날 일이 아니고 조직 내에서 반역자가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개적으로 떠벌려 말하기도 곤란하여 지금까지 미루어 왔던 것이다.  이젠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이 사실을 말씀하셨다. 할 수 없이 조직 내에 반란자가 있음을 애기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이는 제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삼년 동안 훈련하여 준비해 왔는데 그것도 외부에서가 아닌 조직 내에서 반동분자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앞으로 조직의 붕괴마저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떠나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신이 떠난 이후 제자들이 서로 분쟁하여 붕괴될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것은 제자들 상호간에 불신을 조장하는 공동체의 마비현상이 생길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요13:22). 당장에 이 같은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그때 성미 급한 베드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요13:24). 그는 분노하여 누가 감히 그런 일을 꾸미느냐 하고 분개했다. 그때 가룟 유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내가 떡 한 조작을 적셔서 주는 자가 그니라”고 하시면서 가룟 유다에게 주셨다. 유다는 그때가 회개 할 절호의 기회였으나 오히려 괴심한 생각을 품어 주님을 팔 생각을 했다. 그때 사단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곳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13:27). 유다는 그 조각을 받고 나간 그날이 영원한 밤이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13:30). 다대오 유다는 이 같은 주님의 아픈 마음을 다 헤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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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8
  • 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전도에 불을 붙이라
    교회는 전도함으로 존재한다 호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소녀가 골수염으로 두 다리를 자르게 되었는데 병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손으로 옮겨져 두 손까지 자르게 되었다. 겨우 생명은 건졌으나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잃어 몸통만 남게 된 그는 남의 도움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죽고 싶으나 죽을 수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비참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 소녀가 복음을 받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후 새로운 생명력이 움트기 시작했다. 생명이 있는 동안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전도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그 날부터 그녀는 팔뚝에 연필을 매어 글쓰기를 연습했다. 피나는 연습 끝에 누워서 편지 쓰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시작으로 감사편지를 쓰게 되었다.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예배에 참석하도록 복음편지를 썼다. 온 몸을 다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쓴 편지에 감동받은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마가복음 6장을 함께 읽고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본문은 주님이 하신 갈릴리갈릴리 전도사역을 통해서 사명자의 전도훈련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특별히 본문은 다양한 삶의 환경에서 전도자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고향에서 선지자의 사명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 갔다. 이전에 자신을 잡아가려 하던 자들이 이젠 많이 변한 것 같다. 아마 버린 자식으로 체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때 주님을 따랐던 열두 제자들도 동행했다. 어찌 보면 이들은 패거리 건달과 비슷했다. 이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바로 그곳에는 그의 친동생들과 나사렛 주변 사람들이 와 있어 그의 가르침과 권능을 보고 심히 놀랐다. 그때 그 동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목수 집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 동생들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데 어디서 저런 권능을 행하느냐고 했다. 그때 주님이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선지자가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왜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가? 첫째, 혈통적인 뿌리 때문이다. 고향이란 핏줄로 얽혀진 공동체이다. 나의 핏줄이고 집안이고 친척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선지자를 나와 동일시함으로 존경심이 사라진다. 그래서 주님은 구원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둘째,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전통이 강하게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다. 변화를 통해서 그 동안 쌓아 놓은 기득권을 상실하기 때문에 수하에 어리고 젊은 자를 선지자로 모신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셋째, 유대의 율법적인 전통 때문이다. 유대 사회에서 율법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의 몫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예수가 성전에서 율법을 가르치는데 그 권능이 서기관들과 비교할 수 없으니 주님을 더욱 시기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을 떠나 갈릴리 여러 촌으로 두루 다니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기억할 사실이 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가정의 복음화가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 가장 큰 선물로 주신 것이 가정 구원의 사명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세상을 향한 전도의 사명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서 둘씩 둘씩 전도하러 보냈다. 먼저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내어 쫓는 권세를 주셨다. 우리는 영혼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복음을 들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 시대에도 그러하지만 주님이 오셨던 그 시대에는 특별히 더러운 귀신 들린 자들이 너무 많았다. 메시야가 직접 이 땅에 오셨으니 사단 권세가 발악했다. 그래서 주님은 가는 곳마다 귀신 들린 자들을 온전케 하셨다. 그러면서 주님은 전도자가 금해야 할 몇 가지를 당부했다. 양식과 돈, 그리고 두벌 옷이다. 이것은 나그네에게 의식주의 대용품으로 여행자로서 반드시 지참해야 할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금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도자는 이미 주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소속과 신분이 다른 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 레위 지파에게 땅의 기업을 주지 않았다. 군사로 부름을 받은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적절히 공급해 주신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수 없이 많은 이 같은 사례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 전도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는 마태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 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첫째, 성에서 복음의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다.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충성된 사명자가 있다. 전도자는 충성된 청지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둘째, 어느 집이나 성으로 들어가면서 먼저 평안을 빌라. 그들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면 은혜를 입어서 다시 베풀 것이요 거절하면 그 평안이 자신에게로 돌아와 성령의 도우시는 위로를 받게 된다. 셋째, 거절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 그 성이나 집이 복음을 받지 않으면 그 곳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떨어버려 심판 때에 증거를 삼으라고 했다. 주님은 전도자가 금해야 할 몇 가지를 당부했다. 양식과 돈, 그리고 두벌 옷이다. 이것은 나그네에게 의식주의 대용품으로 여행자로서 반드시 지참해야 할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금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도자는 이미 주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소속과 신분이 다른 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 레위 지파에게 땅의 기업을 주지 않았다. 군사로 부름을 받은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적절히 공급해 주신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수 없이 많은 이 같은 사례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 전도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는 마태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마10:11-14) 첫째, 성에서 복음의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다.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충성된 사명자가 있다. 전도자는 충성된 청지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둘째, 어느 집이나 성으로 들어가면서 먼저 평안을 빌라. 그들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면 은혜를 입어서 다시 베풀 것이요 거절하면 그 평안이 자신에게로 돌아와 성령의 도우시는 위로를 받게 된다. 셋째, 거절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 그 성이나 집이 복음을 받지 않으면 그 곳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떨어버려 심판 때에 증거를 삼으라고 했다. 악한 세력 앞에서 순교의 사명 주님이 갈릴리 각 지역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며 능력을 행하시니 헤롯 왕가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서 왔다고 했다. 이 사실이 헤롯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래서 헤롯은 필요 이상의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헤롯이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이것이 범죄한 죄인에게 고발하는 선한 양심의 소리이다. 세례 요한은 비록 짧게 살고 비참한 죽음을 죽었으나 가장 값지고 고귀한 삶을 살았다. 우리는 순교자 세례 요한을 통해서 전도자의 사명을 배우게 된다. 첫째, 그는 광야의 소리로 살았다. 그는 당시 세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가문에 태어나 출세할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타고났다. 그러나 그는 지명예루살렘예루살렘 성과 성전과 율법적인 권위를 버리고 광야의 소리로 복음을 위해 이슬로 사라졌다. 둘째,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광야는 도시와 같이 길이 있는 곳이 아니다. 누가 만들기 전에는 걸어갈 수 없는 너무도 불편한 곳이다. 그는 주님을 위하여 친히 이 길을 닦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헤롯 왕들은 주님의 길을 막는 세력들이다. 이런 자들과 싸워서 주님의 길을 평탄케 하셨다. 셋째, 그는 주님만이 흥하기를 소원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한 마디가 세례 요한의 신앙과 생활의 고백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사명자로 세례 요한의 고백을 배워서 우리도 이런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양 무리를 위한 긍휼의 사명 먼저 제자들은 전도의 현장에서 돌아와 주님께 사역의 보고를 한다. 보고를 받고 주님은 얼마간 쉼을 얻기 위해서 한적한 곳으로 가게 했다. 그런데 무리들이 먼저 알고 모든 고을에서 걸어서 앞서 가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오병이어로 장정만 오천 명을 먹였다. 이 사건은 너무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복음서 기자가 한 분도 빠트림이 없이 다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영적 비밀한 계시가 무엇인가? 이 사건이 구원사역에서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첫째,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 목자의 마음이다. 주님은 이들의 영적 목마름을 보셨다.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이라고 했다. 헤롯이나 가이사 황제나 당시 대제사장들은 그들의 진정한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양 무리의 피를 빨아먹는 이리와 같은 자들이다. 주님은 그들의 목자로 오셔서 그들만이 먹을 수 있는 비유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해 주셨다. 둘째, 오병이어의 헌신이다. 이를 주님에게로 가져온 자는 어른도 아닌 어린 아이였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질병에서 치유함을 받았으나 정작 주님이 요구하실 때 헌신하는 무리는 없었다. 이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는 그가 받은 은혜일뿐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이었다. 자신의 손에서는 오병이어이지만 주님의 손에서는 200데나리온 보다 더 풍성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셋째, 온전한 순종이다. 때가 저물고 빈들이라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가면 반드시 기적은 일어난다. 오병이어를 주님에게 가져간 제자는 계산에 능한 빌립이 아니라 어리석게 보이는 안드레였다. 사역자의 제일가는 사명은 온전한 순종이다. 마지막 넷째, 다 배불리 먹이심이다. 주님이 베푼 잔치에는 모자람이 없다. 연회장에 준비된 가나 혼인잔치에는 포도주가 떨어졌으나 주님이 계신 곳에는 넉넉함이 있다. 모든 무리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작이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셨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바구니에 ‘차게’거두었으며 라고 하심은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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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주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또 산에 오르사 주님은 구원역사를 위해서 어떤 구체적인 방법을 사용하셨는가? 주님은 지상교회를 세우시고 가장 본질적인 목양 사역으로서 제자훈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막3:13-16) 그렇다면 제자훈련의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 자신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제자훈련은 지식을 전달하는 단순한 학습훈련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변화를 주는 인격적 사역훈련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과 같이 있으면서 24시간 주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대로 보고 생활 속에서 삶을 배우는 인격훈련이었다. 세인들처럼 삶을 베일에 가려 놓고 교안만 가져와서 세미나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생활하면서 앞장서서 본을 보이는 모범적인 삶이었다. 둘째, 세상을 향한 파송이다. 오늘날 교회는 부르는 초청에는 관심이 많으나 세상을 향해 내어 보내는 파송에는 너무도 인색하다. 이제 우리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처 땅 끝까지 가야 한다. 목숨을 요구하는 사역의 현장에라도 가야한다. 이것이 전도자의 사명이다. 주님은 하늘보좌를 버리고 이곳까지 오셨다. 셋째, 귀신들을 내어 좇는 권세이다. 주님은 우리를 보내실 때에 거저 보내지 않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어서 보내셨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주님은 우리에게 사단의 권세를 제압하는 능력을 주어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자로 나아가면 사단의 권세가 우리 앞에 굴복하게 된다. 집에 들어가시니 마지막으로 이제 주님은 하산하여 어느 집으로 들어가셨다. 주님이 어디를 가든지 가는 곳마다 무리들이 모여 들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들은 주님을 체포하러 온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주님의 친족들이다. 이들은 주님을 알기로 가정을 버리고 방랑자처럼 떠돌아다니는 미친 자로 알았다. 사실 주님의 구원사역이 얼마나 외롭고 고달픈 길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사명자의 길은 이처럼 외로운 것이다. 주님이 전도현장에서 받은 몇 가지 아픔들은 어떠했는가? 첫째, 무리들에 의한 쉼 없는 사역이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식사할 틈이 없을 정도로 분주한 사역이니 한 순간도 쉴 틈이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제자로서 목양 사역에 수종을 들다보면 때로는 밤과 낮의 구분이 안 될 때가 많다. 둘째, 친족들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3:21)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 그리고 가까운 친척들이 주님을 데리려 왔다.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난 때 집안의 장남인 주님이 공생애 사역으로 전도하려 나오니 이를 이해하지 못한 동생들과 친족들이 예수를 미쳤다고 오해했다. 그러나 주님은 거룩한 구원사역을 혈육의 정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셋째, 성령을 훼방하는 사역이다. 주님이 이 본문에서 말씀하신 성령 훼방 죄가 무엇인가? 지금 더러운 귀신이 주님을 보는 순간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됨을 고백하고 떠나간다. 그런데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도 잘 아는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단의 사역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거룩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므로 이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서기관들의 잘못이 우리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을 때가 많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름답고 큰 역사라도 나와 좋은 관계에 있지 아니한 자가 행한 것이면 비판하고 정죄하여 사단의 역사로 몰아붙이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훼방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체와 동역자들의 거룩한 사역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협력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의 형제와 자매 본 문단은 앞 문단과 연결되어 있다. 20-21절에서 예수의 가족이 등장한다. 그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들 듣고 예수를 잡으러 가버나움으로 향했다. 예수를 오해한 혈통적인 가족들이 서기관과 바알세불 논쟁을 벌이고 있는 현장에 나타났다. 그때 무리들 중에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당신을 찾는다고 했다. 주님은 자신을 찾는 가족들을 향해 참 가족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어떤 분이 가족이란 영어 단어 이니셜을 따서 이렇게 풀이 했다. “아빠 엄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성경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주님은 구약의 율법을 사랑이란 새 계명 하나로 다 이루셨다. 십자가는 사랑의 결정체이다. 주님은 십자가라는 고통의 쓴 잔을 앞에 높고 자신의 의지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소원했다. 저자의 허락에 의해 일부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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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예수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라
    미국 하버드대학교 폴 케네디교수는 “한국이 21세기의 세계 중심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5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한의 문화이다. 한 민족은 5천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외침으로 고통을 당해왔다. 그래서 민족의 저변에 한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한이 1919년 3월 1일 태극기로 독립만세운동을 하게 했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배후에 촛불혁명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둘째, 가족 문화이다. 가족 중심의 정문화가 감수성에 예민한 민족으로 만들었다. 특별히 어머니 품에서 모유를 먹고 자란 세대는 감성이 풍부하다. 21세기를 감성의 시대라고 말한다. 이런 때 한민족의 효 문화가 세계 열방을 선도할 강점이 되었다. 셋째, 엘리트 의식이다. 한 민족은 어떤 민족보다 자부심이 강한 민족이다. 이런 자부심이 하나의 긍정적인 목적으로 작용할 때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된다. 넷째, 모험정신이다. 적극적인 모험정신은 어떤 일이든 신속하게 해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쟁력이다. 마지막 다섯째, 단일민족의 정체성이다. 단일민족 단일 언어로 뭉쳐진 공동체의 저력은 다이나믹한 폭발력을 발휘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폐쇄적일 수도 있으나 이를 긍정적인 목적을 향해 나아갈 때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므로 폭발적인 에너지를 결집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오늘은 마가복음 2장의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은혜를 받고자 한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고장 난 인생이 새롭게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에게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길 바란다. 예수를 만나면 모든 문제에서 해결을 받는다. 인간은 사고뭉치이다. 중풍병자가 예수를 만남으로 참 자유를 얻었다. 마태는 세관에서 돈으로 얻을 수 없었던 참 평안을 예수를 만남으로 누렸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얽매여 억지 금식을 했으나 주님은 그들에게 금식을 통한 참된 기쁨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음을 보고 정죄한 바리새인들에게 참 안식이 무엇인지도 가르쳐 주셨다. 가버나움의 중풍병자 본문 1절에서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고 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서북 지역의 해변가에 있는 마을이다. “수 일 후에”라고 하심은 성구막 1:21막 1:21절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가르치시고 동네에서 복음을 전한 후 갈릴리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전도했다. 그러다가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갔던 때가 다음 안식일이 이르기 전이었다. 주님이 가버나움에 온 이후로 온 동네에 대 소동이 일어났다. 열병으로 앓아 누었던 자가 일어나고, 귀신들린 자들이 온전해지고, 각색 병든 자가 와서 많은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 소문을 들은 온 동네 사람들이 주님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때 주님이 다시 오시자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다. 이런 상황에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다. 우리는 중풍병자를 데리고 주님에게로 나온 그들의 믿음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 첫째,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이 일차 가버나움을 다녀간 이후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주님이 오셨고 그들은 병자를 침상에 메고 주님을 만나러 왔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이와 같이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둘째, 불가능한 환경 앞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이 중풍병자를 매고 가는 사이에 벌써 사람들이 먼저 와서 꽉 들어 차 있어 문 앞까지 들어 설 틈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이런 불가능한 환경 앞에 뒤로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셋째, 적극적으로 길을 찾는 것이다. 동서사방으로 다 막혀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구멍을 내어 환자를 달아 내리기로 했다.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길이 열린다. 넷째, 지붕에 구멍을 뚫는 일이다. 사실 이 일은 아주 심각한 사건이다. 우선 남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범죄행위가 될 수 있는 일이다. 만일 위험한 사태가 발생하면 구속도 될 수 있는 엄청난 위험부담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중풍환자를 주님에게로 지명인도인도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자 하는 온전히 헌신된 마음이 있었다. 우리가 영혼구원을 위해서 이런 헌신과 희생을 한다면 어떤 중풍병자라도 주님에게로 지명인도인도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혼연일체 된 마음이다. 그들이 지붕으로 올라갈 때도 그러했지만 최후의 순간 환자를 주님 앞으로 달아 내릴 때는 한 순간의 방심도 용납할 수 없는 초긴장 된 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중풍환자가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주님은 바로 그들이 가진 이런 믿음의 행위를 보셨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이런 중풍병자가 많이 있다. 제 발로 걸어서 주님 앞으로 나아올 수 없는 자들은 다 영적 중풍병자이다. 이들을 위해 공동체가 합동작전을 해야 한다. 땀 흘리는 수고와 함께 물질적인 헌신도 감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중풍병자를 말씀 앞으로 지명인도인도할 수 있다. 중풍병자는 주님을 만나는 순간 죄에서 자유 함을 얻고, 질병에서 고침을 받아 예수를 그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변화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세리 마태 집에서 주님은 다시 갈릴리 바닷가로 나갔다. 가버나움에서 세관을 지나가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 그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나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가정과 직장을 한 순간에 버리고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런 사건의 배후에 숨겨진 사실들을 알아야 한다. 본문 14절에 “알패오의 아들 레위”란 말씀에 주목해 보라 알패오란 분이 그의 아들의 이름을 「레위」라고 지었다. 레위는 자라서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은 세관에 앉아 사역하면서 그 마음에 수많은 영적 고민과 갈등을 겪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레위란 “하나님과 연합”이란 뜻이다. 알패오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레위라 지었을 때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쓰임받기를 원해서 그런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레위는 세관에 앉은 세리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으므로 세리는 로마 권력의 하수인 노릇하는 매국 행위를 행하므로 창기보다 더 추한 직업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알패오와 그 아들 레위의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 레위는 언제든지 때가 되면 이 직업에서 떠날 것을 생각하고 있던 차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래서 레위는 미련 없이 세관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그와 그 아버지 알패오는 너무도 감사하여 주님을 청하여 식사를 대접했다. 이를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증오하여 주님이 죄인과 같이 식사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이때 주님은 복음의 놀라운 비밀을 가르쳐 주셨다. 첫째, 나는 죄인의 구주로 이 땅에 왔다고 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주님은 세관에서 하나님과 연합하기를 소원하는 자를 부르기 위해서 오셨다.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들의 구주로 오셨다. 둘째, 기쁨과 감격을 주기 위한 혼인집 신랑으로 오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는 금식이 필요 없다. 주님은 율법적 제약에 얽매여 있는 부자유한 신부들에게 참 자유를 주기 위해 오신 복음의 신랑이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서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이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득세하는 이 세상의 모습이다. 이때는 금식하지 않을 수 없다. 금식의 능력으로 흉악한 결박을 풀어서 승리해야 한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주중에 2일 이상 규칙적으로 금식했다. 그러나 신랑과 함께 하는 혼인집에 가면 이런 금식의 법에서 자유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축제의 자유를 준 영적 신랑이다. 셋째, 새 가죽부대에 담긴 새 포도주로 오셨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당시 바리새인들이 붙들고 있는 장로들의 유전이나 랍비적인 전통은 생명력이 없으므로 변화에 신축성이 없는 묵은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와 같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지명그리스의 복음은 생명력을 가진 운동하는 신축성이 있는 새 가죽부대와 새 포도주였다. 주님은 죄인의 구주로 오셨다. 죄로 인하여 병든 인생은 영적 대 의사 되신 주님 앞에 나와서 고침을 받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난 감격의 기쁨으로 축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생베 조각의 복음적인 가치를 낡은 구습과 전통에 붙여서는 안 된다. 새 술은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지명그리스의 생명의 복음은 어떤 언어와 문화적인 삶도 극복해 갈 수 있다. 안식일에 밀밭 가에서 안식일에 주님과 제자들이 길을 갔다. 분주하게 서두르다 보니 식사 할 때를 놓친 것 같다. 시장한 그들은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었다. 이것이 용케도 바리새인의 렌즈에 잡혔다. 요즘 같으면 그들이 신문지상에 대서특필해서 보도 했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안식을 범했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이렇게 비약해서 말씀하고 있다. 밀 이삭을 손으로 자르는 것은 추수하는 행위이며, 그 이삭을 손바닥으로 비비는 것은 정미소에서 방아 찢는 것이며, 껍질을 날리기 위해서 입으로 분 것은 타작마당에서 가라지를 날리는 키질행위라고 했다. 이 같은 일은 당시 안식일에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주님은 다윗이 대제사장 아비아달의 집에서 행했던 것을 말씀하셨다. 아비아달은 사울 왕에게 쫓겨 온 다윗에게 베풀 항용 떡이 없음을 보고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 떡을 주어 먹게 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은 안식을 어떻게 지켰는가를 알아야 한다. 첫째,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일을 하셨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안식일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소극적인 금지법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안식일에 적극적으로 회당과 동네를 다니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했다. 둘째, 안식의 근본정신은 사람을 위함이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이 창조질서에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인간에게 참된 쉼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안식은 철저히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사람이 없다고 하면 안식일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셋째, 그런데 그 안식일에 주인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지명그리스이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날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행위인가? 주님이 기뻐하는 일을 해야 한다. 주님은 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죄와 사망권세에서 구원하기 위해 전도하러 오셨다. 그래서 주님은 복음전도를 위해 행하신 제자들의 행위를 정죄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농부가 추수할 때 밭이랑에 이삭 얼마를 남겨 두어 길가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양식이 되게 하셨다. 주님은 친히 금식하여 주려 죽는 아픔을 체휼해 보았으므로 배고픈 자들의 아픔을 다 헤아리고 계신다. 우리는 안식일을 유대 지명유대인 전통을 계승하는 소극적인 금지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주인 되신 주님이 기뻐하시는 전도자의 삶을 사는 복음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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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5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신약성경 처음 4권은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 복음이다. 마태복음은 세리 마태가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한 것으로 구약에 대한 인용도 99회 정도 된다. 또한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므로 신약의 가장 서두에 편집했다. 특히 왕, 왕국이라는 말이 75회 이상 나온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왕의 복음이라고 부른다. 마가복음은 요한의 성을 가진 마가가 바울을 수종들다가 로마에서 로마인들을 위하여 종의 관점에서 기록하였기에 섬김의 관점에서 기록된 복음이다. 그의 어머니는 예루살렘 출신으로써 믿음과 덕을 갖춘 신실한 여성도로서 그 집과 다락방을 사도들의 휴식처로 제공하여 지상교회를 탄생시킨 복음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마가의 외숙부는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 받아 초대 선교사로 명성을 떨친 바나바이다. 누가복음은 아수리아 안디옥 사람인 의사 누가가 당시 지성을 자랑하는 헬라문화를 지배하는 자들을 위해 오신 도성인신 한 예수님에 관해 기록한 인자의 복음이다. 마지막 요한복음은 세베대와 살로매의 아들인 야고보의 동생 요한이 쓴 책으로써 요한은 주님의 제일 어린 제자로 밧모섬에 귀향까지 간 가장 오래 살았던 제자이다. 요한은 영적으로 전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를 위해 공관복음에 없는 부분을 보충해서 기록한 우주적인 복음이다. 마가복음은 주후 65년 전후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바울의 전도여행에 동참했다가 중도에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나중에는 옥중에 갇힌 사도 바울의 복음전파에 끝까지 수종들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리멘트는 마가복음을 “로마인의 복음”이라고 했다. 마태복음은 혈통을 중시하는 족보로부터 시작하지만 마가복음은 로마인에게 준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로 시작된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에게까지 전파된 복음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착념하지 않게 했다. 복음이란 ‘좋은’이란 말과 ‘철자’란 단어의 합성어로 “좋은 소식”이란 말이다. 마가복음은 총 16장으로 되어 있는데 사복음서 중에서 가장 짧은 책이다. 책의 총 제목은 종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서 핵심 성구는 마가복음 10장 45절의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이다. 광야의 사람 세례 요한 그는 선지자의 예언대로 오신 분이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사40:3절)을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고 했다. 사실 이 말씀은 이사야가 유대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다가 해방되어 올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그보다 더 큰 의미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죄악의 사슬에 묶여 있는 백성을 풀어서 참된 자유를 주기 위해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올 것을 예언한 말씀이다. 바로 그 사역의 수종자가 세례 요한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삶은 당대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당신에게 오늘날 주어진 삶은 또 다른 한 시대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복음의 도구가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너무도 거시적인 동시에 구체적이고 확실한 사건이다.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러 왔다.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그는 이 땅에 인자의 몸으로 섬기려 오신 분이지만 실제는 하나님의 독생자인 왕이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함부로 맞이할 수 없다. 사전에 철저한 준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는 하늘의 어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주님보다 먼저 오셨다. 당시 유대 사회는 왕이신 주님이 사역하기가 너무도 불편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파 놓은 함정이 많았고, 사두개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박아 놓은 돌부리들이 많아 그 첩경을 평탄하게 하지 않고는 주님이 걸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원해서 광야의 사람이 되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라고 했다. 그는 당시 덕망이 있는 제사장 스가랴와 엘리사벳의 가문에 태어나서 세속적으로 출세를 할 수 있는 신분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 자리를 포기하고 빈들에서 민초들과 함께 생활하는 광야의 사람이 되었다. 그곳에서 약대털옷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광야의 소리로 살았다. 소리란 모양도, 빛도, 냄새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듣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그러나 삶을 변화시키는 소리는 복음의 소리이다. 그는 가장 천한 자리에서 가장 귀하게 살았으며,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권세 있게 살았으며,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가장 밝게 살았다. 그는 젊은 삼십대에 부름을 받아 짧은 세월을 살았으나 가장 값지고 굵게 살았다. 그 입은 헤롯 대왕도 막지 못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준비 때가 차매 주님이 오셨다. 세례 요한은 철저하게 주의 길을 준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신 후에 소리와 같이 사라졌다.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의 인생철학을 너무도 멋있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그렇다면 주님은 세례 요한의 뒤를 이어 오셔서 공생애 구원사역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 먼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세례란 죄사함의 표로써 공교회 앞에서 베풀어지는 예식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죄가 있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 베푸는 것을 사양했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그러나 주님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했다. 주님은 죄가 없지만 세상 죄를 대신 짊어지신 대속의 제물 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었다. 주님이 세례 받고 죄가 청산됨으로 하늘 문이 열리면서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다음으로 광야에서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받았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주님은 공생애에 불어 닥칠 시험을 이기기 위해 먼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금식하며 기도로 준비했다. 사단권세가 주님을 넘어지게 하려고 했으나 주님은 그때마다 철저하게 기록된 말씀으로 물리쳤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선택하셨다. 주님은 구원사역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는가? 소그룹 제자훈련을 시작하셨다. 제자훈련은 주님이 가르쳐 준 성경적인 전도방법이었다. 그러면 주님은 제자선택을 어떻게 하셨는가? 먼저 현장으로 가서 직접 확인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주님은 책상에 앉아서 이력서만 보고 채용한 것이 아니다. 현장에서 사역하는 것을 보시고 부지런 하고 충성된 자를 선택하셨다. 그리고 이들은 그물과 배 뿐 아니라 심지어 부모와 종들까지 버려두고 쫓았다. 이것이 제자의 도이다. 주님의 하루 일과 주님의 하루 일과는 너무도 분주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래서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파했다. 본문은 가버나움에서 안식일을 보낸 하루를 통해 주님의 하루 일과가 어떠한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오전에는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가르쳤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주님은 회당에 들어가서 율법을 가르쳐서 천국복음을 증거 하셨다. 그의 말씀은 서기관들과 달리 권세가 있어 뭇 사람들이 놀라고 귀신들이 항복하며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났다. 오후에는 심방을 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 인명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주님은 회당에서 교육과 설교사역을 마치시고, 권찰들을 데리고 주의 종들의 집을 심방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확인했다. 주님의 말씀이 증거 된 복음이 가는 곳마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래서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다가 주님이 손잡고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님께 수종 들었다. 저녁에 대성회가 열렸다.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소문을 들은 온 동네 사람들이 그 밤에 다 몰려 왔다. 주님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각색 병든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이튿날 새벽에는 기도하러 갔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주님의 하루 사역은 한 순간도 쉴 틈이 없는 분주한 사역이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 미명에 기도할 곳을 찾으셨다. 새벽 기도를 놓치지 않았다. 낮 동안에 이런 사역이 가능했던 것은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만난 큐티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을 놓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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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0-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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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권철 목사] 마가가 당신을 섬깁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대속물이란 헬라어 뤼트론은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지불되는 몸값(ranson)을 의미한다. 구약시대에는 이 몸값에 대한 내용이 기업 무르는 전통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어떤 사람의 형제가 타인에게 빚을 져서 종이 될 운명에 있으면 그 사람의 형제가 그를 대신해서 몸값을 지불함으로써 그 사람은 해방될 수 있었다. 이런 방법으로 해방 될 수 없는 사람은 희년 제도에 의해 구제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희년은 은혜의 해로 불렀다.  첫째, 아브라함의 모리아 제사는 대속의 제사였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언약 백성 히브리민족을 세우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를 붙들고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갔다.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갔다. 그가 모리아 제단으로 갈 때도 이성적으로나 사회 윤리적으로 보나 아니 혈육의 정으로써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언약 사상에 사로잡혀 모리아로 갔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칼을 뽑아 찌르는 최후의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은 이삭을 대신하여 한 수양을 준비해 두셨고 그 수양은 이삭을 대신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었다. 이것이 후일에 나타날 메시야 사건의 예표이다.  둘째, 애굽에서 유월절 어린양은 대속의 죽음이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3). 하나님이 애굽에 장자를 치는 재앙을 내릴 때 천사가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보고 재앙이 건너가게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재앙이 임하기 전에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고기는 온 가족이 함께 먹었다. 바로 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오실 메시야의 보혈이다. 우리가 예수 보혈로 사망권세에서 놓임을 받는다.  셋째, 주님이 갈보리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으시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막 15:34). 주님이 죽으심이 대속의 죽임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은 사건이 이를 증명해 준다. 먼저 제 6-9시까지 해가 빛을 잃었다. 유대시간으로 정오에서 오후 3시까지 가장 강렬한 빛을 비추는 시간이었다. 이때 해가 빛을 잃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참 빛 되신 주님이 빛을 잃는 순간 창조질서를 위해 세워 둔 궁창의 해가 자연스럽게 빛을 잃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다음으로 갈보리 변방의 무덤 문이 열렸다. 주님은 사망권세를 깨고 부활할 것은 친히 보여 준 예표였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악의 담이 허물어짐으로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구약의 제사장이나 그 어떤 중보자가 없이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종교개혁지 순방 중 스코틀랜드에서 특별한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애딘버러의 한 교회당 묘지 동산에 충견비와 함께 개의 무덤이 있음을 보았다. 이 비가 세워지기까지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주인은 개를 끔찍이도 사랑했다. 어디를 가든지 개를 데리고 다녔고 개는 주인의 사랑을 받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개를 기르던 주인이 세상을 떠났다. 가족들은 교회 묘지 동산에 장사하고 집으로 다 돌아왔다. 그런데 개를 찾으니 없어 온 동네를 찾아 헤매다가 주인을 장사한 무덤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가족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으나 개는 주인의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가족들이 개를 집에 데리고 왔으나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없어 무덤으로 가 보니 개가 주인의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무덤을 떠나지 않았다. 가족들은 무덤 곁에 개집을 옮겨 놓고 먹을 것을 갖다 주었다. 그렇게 무려 14년 동안 주인의 무덤을 지키다가 개도 죽었다. 사람들은 개가 주인을 섬기는 충성됨을 귀하게 여겨 무덤을 만들어 주고 그 곁에 비를 세워 주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비가 충견비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성도들에게 주님을 향한 섬김과 충성에 큰 도전이 되기 바란다. 미물에 불과한 개도 주인을 향한 충성이 변함 없음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교훈이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편지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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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03
  • [황권철 목사] 마가가 당신을 섬깁니다.
    독생자로 오신 예수(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주님은 독생자로 이 땅에 오셨을 때 섬기는 자로 오셨다.  첫째, 그는 구유에 누운 생명의 빵으로 오셨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2:7). 구유는 짐승의 먹이통이다. 주님은 이 세상에 굶주린 인생들을 먹이려 오셨다. 그래서 그의 공생애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셨다. 이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을 포도주를 즐기며 먹기를 탐하는 자라(마11:19)고 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먹은 것이 아니라 주린 자들을 먹이기 위한 민망히 여기는 마음에서 행한 사역이었다. 주님은 단순히 육신의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히 주리지 않는 생명의 떡을 공급하셨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둘째, 목수의 집안으로 오셔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모퉁이 돌이 되셨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눅2:4-5). 주님은 목수 집안으로 오셔서 30세까지 육신의 아버지를 도와 가족을 돌보아 주셨다. 3년간의 공생애 기간에는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구원의 집을 세우는 일을 했다. 주님은 앞서도 주린 자들을 먹였을 뿐 아니라 헐벗은 자들을 입히고 재워 주셨다. 그래서 특별히 집이 없는 고아와 나그네 그리고 과부를 긍휼히 여기셨다. 주님이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한 서기관이 주님을 따를 것을 말씀하였을 때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주님 자신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집에서 전세 자금이나 주택 마련할 돈을 가지고 나올 형편이 못 되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할 때 먹고 마시고 입고 자는 문제에 대하여 늘 걱정하고 염려했다. 그때 주님은 “이는 다 이방인들이 하는 걱정이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 해 주신다”고 하셨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14:1-2)라며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사실을 보면 당시 집 없이 나그네로 살아가는 제자들의 서러움이 얼마나 큰지를 잘 알 수 있다.  셋째, 나사렛이란 작은 동네에 오셔서 만민의 구주가 되셨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요1:46). 주님은 제국의 부유한 왕궁이나 고관대작의 집안으로 오시지 않았다. 당시 식민지 국가인 이스라엘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여 나사렛 동네에서 자란 지극히 작은 겨자씨와 한 알의 밀알로서 온 인류를 구원하는 구주가 되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선생(요13:4-5)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요13:4-5). 주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권세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만왕의 왕으로 오셨다. 그러나 주님은 세속 왕들과 같이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 오셔서 가장 낮은 종의 자리에서 선생 된 자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첫째, 주님은 구원자로서 친히 죄인인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3:15).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세례요한에게 가셔서 세례를 받으셨다. 주님이 요한에게 갔을 때 요한은 “내가 오히려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고 사양했다. 그러나 주님은 “요한아 이와 같이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다. 요한이 그 말씀을 듣고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세상 죄를 지고 있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다. 주님이 요한에게 세례 받는 순간 인자는 대속의 제물되심을 친히 보여 주셨다. 이는 후일 십자가에 죽을 것을 예표로 보여 준 것이다. 세례는 공생애 처음으로 행하신 사건이다. 이로 인하여 하늘 문이 열렸다. 하늘로서 음성이 들려와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했다. 우리에게 죄가 청산되었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정으로 사랑받는 아들이 될 수 있다.  둘째, 선생 된 주님은 친히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요13:4-5). 주님이 구원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까지도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서로 대접을 받으려고 높은 자리를 탐하고 있었다. 그때 주님은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친히 종의 모습을 하고 선생 된 자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줌으로 친히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을 나누면서 구원사역을 완성하셨다.  셋째, 의로운 주님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 법정의 사형언도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막 15:15). 주님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패역한 로마 제국시대에 죽임을 당했다. 그때 온 백성에게 민란을 일으켜 죽임을 당할 바라바라는 죄수는 특사로 풀어주고 주님은 그의 죄까지 대신하여 죽임을 당했다. 당시 로마 황제의 최고 권력을 위임받은 빌라도 총독의 사형 언도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 의로우신 독생자 주님은 가장 패역한 시대, 가장 패역한 죄수를 대신하여, 가장 최악의 권력인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 같은 그의 죽음으로 온 인류를 대속할 구속의 사명을 이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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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0
  • [황권철 목사] 마가가 당신을 섬깁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샤클롯(Shachllot) 부인이라는 73세의 할머니가 있었다. 노랑머리에 젊은이 못지않은 미모를 갖춘 아름다운 노인이었다. 평소에 음식을 조절해 먹으므로 몸매를 잘 가꾸어 항상 고상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귀부인이었다. 그 여인에게 딸이 하나 있기는 하나 교회 출석을 잘 하지 않았기에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직접 운전하여 동양인이 세운 교회에 출석했다. 그 교회가 바로 김동명(안이숙 남편) 목사가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척한 한인침례교회였다. 부인은 김동명 목사와 안이숙 사모의 신앙에 감동을 받아 젊은 목사를 친 자식 같이 생각하고 주의 종으로 섬겼다. 그 여인은 30분 이상을 운전하여 김 목사가 개척한 교회에 오기까지 열 개가 넘는 백인교회(白人敎會)를 지나오면서도 주변의 동양인 할머니와 미국인 할머니들을 전도하여 모시고 왔다. 또한 교회 맨 앞자리에 앉아 설교를 들었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언제나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예배를 마치면 자기 집 근처에 있는 분들을 태워 집으로 모셔다 드렸고, 여름성경학교 때는 음료수와 과자를 한 아름 사서 동네 아이들을 교회로 데려오기도 했다. 하루는 한 동양인 할머니가 물었다. “당신은 백인이면서 화려하고 좋은 백인교회도 많은데 하필이면 동양인이 세운 한국인 교회에 오십니까?” 그때 샤클롯 부인은 “한국인 김 목사는 내 아들 같은 주의 종이며 내 기도의 뒷받침이 절실히 필요한 주님의 일꾼입니다. 내가 사는 날 동안 그를 붙잡아 주어야 해요 당신도 힘껏 도와주세요” 라고 했다. 그녀는 78세의 일기로 김 목사의 장례주례를 받고 천국으로 갔다.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 시절 칠년 기근의 때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를 자기 집으로 모셔서 섬김으로 선지자를 보호한 그 하나님이 선지자를 모신 그 과부와 아들까지 지켜 주셨다. 그래서 주님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1-42)라고 했다.  마가는 어떤 사람인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루살렘에 12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큰 집을 소유한 부자였다(행 12:12). 이는 마가가 부유한 유대인 가문의 출신임을 보여준다.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 의하면(행 12:13-16) 마가 집안에 계집종이었던 로데가 베드로의 음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베드로는 마가의 모친 마리아의 집에 자주 왕래하였을 뿐 아니라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이기도 했다(골 4:10). 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오게 한 이는 베드로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마가를 친히 아들이라(벧전 5:13)고 불렀다. 또한 마가 자신이 쓴 복음서의 근본 자료도 베드로에게 전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즉 마가는 AD 30-65년 사이에 베드로가 행한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이르는 전도사역의 초기부터 끝까지 그와 함께 하면서 베드로가 전하는 바를 기록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서보다 특별히 베드로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가 사도는 아니지만 베드로의 직접적인 증언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기에 사도성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연유로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복음이라는 별명까지 붙이기도 한다.  마가복음이란 저자 마가의 이름에서 붙여진 것이다. 초대교회 각종 문헌과 교부들의 증언에 의하면 본서의 저자가 마가임을 너무도 쉽게 확증할 수 있다. 또한 마가복음 10장은 갈릴리에서 유대 예루살렙 입성 전까지의 유대사역을 요약하고 있다. 예수님은 마지막 한 주간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인자(the Son of God)는 섬기려 왔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수난의 의미를 밝히는 동시에 참된 제자의 길이 섬기는 종의 길임을 알려 주고 있다. 예수는 만왕의 왕이신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셨으나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섬기려 오셨다(마 20:28; 요 13:12-17). 주님의 대속적인 죽으심과 섬김의 본은 결코 분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는 성도는 누구나 그가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신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3-4)고 권면했다. 성도의 참된 교제도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서로 서로 섬기는 자세를 가질 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다. 이 섬김의 자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죽음을 본받는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없는 자는 진정으로 섬기는 삶을 살 수 없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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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05
  • [황권철 목사] 부활신앙의 확신
    부활신앙의 확신     주님은 베드로를 특별히 사랑하셨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주님은 자신의 부활소식을 가장 먼저 제자들에게 알리게 하셨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베드로의 이름을 호명하셨을까? 아마 그가 주님을 부인하고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요21:3).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님을 부인하고 디베랴로 갔으나 주님은 그들 먼저 가셔서 그들을 격려해 주셨다. 심한 좌절과 실의에 빠진 베드로에게 주님은 디베랴 바다에서 강한 확신을 심어 주셨다(요21:15-17). 부활신앙은 좌절에 빠진 우리를 강한 확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주님은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이들은 근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주님은 그들 곁에 가서 물으셨다.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눅24:17). 주님은 이들의 근심된 마음에 부활신앙을 불어넣어 줌으로 냉랭한 가슴에 불을 붙여 주셨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24:32). 부활신앙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풀어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해야 한다. 부활신앙은 냉랭한 우리의 가슴에 말씀과 성령으로 불을 지피는 것이다.  주님은 마음이 강퍅한 제자들을 꾸짖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이 말을 들으면 제자들의 신앙이 이상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왜 믿지를 못했을까? 사실 제자들은 지금 영적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전에 주님과 동행하면서 보는 신앙에 길이 들어져 있었던 자들이 한순간 보이던 예수가 사라져 버리니 그들은 갈 바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공허해지고 방황하게 되어 각기 제 길로 가게 되었다. 이제 보이는 메시야 시대가 끝나고 보혜사 성령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성령 보혜사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보이지 않는 보혜사의 능력을 구하는데 익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령을 무익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굳어지고 닫힌 완악한 마음을 책망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일 처음으로 제자들을 만나실 때 깊은 호흡을 내어 쉬면서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복음에 신실한 증인이 된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젠 복음이 유대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은 유대지역에만 제한 받았으나 성령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므로 성령 받은 우리로 하여금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그래서 딕 힐리스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마음은 곧 선교지이며, 그리스도를 모신 모든 마음은 곧 선교사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 믿지 않는 모든 자에게는 전도해야 하며, 예수 믿는 모든 자는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중생 하여 세례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함을 받아 멸망할 것이다. 부활신앙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 주신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    주님은 믿는 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표적을 주셨다. 여기 표적이란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테라스(Teras)란 의미이다. 이는 호흡이 멈추어질 정도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대제사장과 빌라도 총독의 숨을 멈추게 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다. 둘째, 두나미스(Dunamis)란 말이다. 우리가 바위와 같은 암반을 깨뜨릴 때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폭발물을 사용한다. 죄악으로 굳어진 암반과 같은 강퍅한 심령은 성령의 다이나믹한 힘으로만이 파괴할 수 있다. 셋째, 세메이온(Semeion)란 뜻이다. 이는 삶의 의미를 주는 것으로 신호기능을 가진 사인(Sign)을 말한다.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나가면 성령이 우리와 동행하므로 우리의 사역 현장에 놀라운 증거들이 나타난다. 그러면 믿는 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표적이 나타나는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쫓겨난다.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했다. 악한 령들은 예수 이름이 아니고는 절대로 쫓아낼 수 없다. 바울이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귀신들렸던 자가 바울의 사역을 방해하여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행16:18)고 했다. 예수만이 사망권세와 사단의 권세를 정복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귀신들이 물러간다.  새 방언을 말한다. “새 방언을 말하며”, 여기 새 방언이란 부활신앙을 소유한 자들이 죄와 사망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어떤 세력 앞에서도 담대하게 주님의 이름을 증거 할 수 있는 부활신앙을 소유한 전도의 역사를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고 했다. 이는 말씀의 능력이다.  뱀을 잡는다. “뱀을 집어올리며”, 여기 뱀은 지금 우리가 보는 땅에 기어 다니는 그런 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뱀은 미혹의 영으로 나타나는 사단을 상징하는 말이다. 에덴동산에 하와에게 나타난 뱀이 단순한 뱀 이전에 사단의 영이 역사한 것처럼 부활신앙의 소유자는 사망권세를 짓밟은 것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옛날에 교회를 박해한 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사약을 먹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복음을 전파한 사실들이 많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해 독약을 먹으면 죽는다. 영적으로 마귀는 우리의 심령 속에 죽이는 독약 같은 미움과 시기와 증오를 심으려고 한다. 그러나 부활신앙의 소유자는 그러한 것으로 인해 해를 받지 않고 말씀으로 승리한다.  병 고치는 능력을 주신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5:14-16)고 했다. 사도는 갔으나 사도와 함께 했던 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중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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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2-03-22
  • [황권철 목사] 너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받은 은혜 감사하며 삽시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이러하다. 영국 국왕의 박해로 청교도들은 7년을 준비해서 180톤 되는 범선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구입하여 신대륙으로 향했다. 1620년 9월 16일 102명의 사람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65일간 추위와 영양실조와 질병과 싸워 이겨 미국 동부지역까지 도착했고, 이에 살아남은 자는 78명이었다. 이들은 이듬해 가을 첫 소산을 얻고 플리머스(Plymouth)에서 3일간 감사제를 드렸다. 이렇게 시작하여 1789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11월 26일을 감사절로 공포했으며, 1863년 링컨 대통령이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선포했고, 그 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11월 셋째 주 수요일을 감사절로 개정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추수감사절이 한국에서 시작되기는 1904년 조선 장로교 공의회 서경조 장로의 제의로 시작되었다가 1945년 광복절 이후로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게 되었다. 성경에서 모세는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 23:16)고 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받은 은혜를 최선을 다해 감사하는 절기이다.  그리고 마가복음 마지막 16장 강론이다. 마가복음의 총 주제는 섬김이다. 핵심성구는 10:45절로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섬기는 자로 오셔서 섬기는 삶을 살다가 섬기는 자로 생을 마감하셨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떠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부탁하셨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5). 주님의 최후부탁은 우리의 최초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밀알교회가 감당할 최대의 사명인줄로 안다.    무덤을 찾은 여인들(1-8)    안식 후 첫날 무덤을 찾은 자는 여인들이었다. 이들은 다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전에 일곱 군대 귀신들렸던 여인이었고(눅8:2),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도 주님을 특별히 사랑했으며, 살로매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서 예수님의 이모였다(요19:25).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갈보리 현장까지 따라간 자들은 힘 있고 당당한 남자들이 아니라 연약한 여인들이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마27:55), 우리말에 “여성은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다.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강한 어머니가 있었음을 안다. 옛날도 그러했거니와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여성들의 역할은 참으로 대단하다. 특별히 오늘날 교회 안에 크고 작은 일에 여성들의 손이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실로 장한 여성들이다.  여인들은 해가 돋기가 무섭게 무덤으로 달려갔다.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2). 이번 안식일은 그 어느 때와는 다른 하루였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최악의 순간이요 가장 불안한 하루를 보내는 날이었다. 사실 이날은 온 인류가 긴장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부활사건은 예수가 메시야 되심을 검증 받는 최후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면 구약의 예언대로 그는 메시야임을 증거 하는 날이지만 만약 그의 부활이 공수표로 돌아가면 예수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고전15:14-15). 이제 그토록 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그 날이 다가왔다. 주님을 따르던 여인들은 날이 새기가 무섭게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2) 무덤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 여인들에게 한 가지 큰 고민이 있었다. 문제는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큰 돌이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3). 여인들의 생각은 아마 이러했을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은 하셨으나 너무도 큰 돌이 막고 있으니 갇혀서 나오지 못하고 있을 것이며, 우리 역시 가기는 가지만 그 돌을 옮길 힘이 없다. 이 돌을 옮길만한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없을 뿐만 아니라 그곳은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파수꾼이 지키고 있으며, 돌 위에는 빌라도가 인(印)을 쳐서 봉해 두었기 때문에 아무도 손을 댈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도착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무덤에 도착한 순간 이런 근심은 순식간에 다 사라지고 말았다.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4). 참된 부활신앙은 우리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의심의 큰 돌들을 굴러 버린다. 불신앙과 염려와 근심 걱정의 돌을 굴러버려야 부활의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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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2-03-08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간 구레네 시몬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간 구레네 시몬 이렇게 하여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불법적인 재판이 이루어진 곳이 본디오 빌라도 법정이다. 가장 추하고 가장 더러운 죄인이 가장 의롭고 성결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형 언도를 집행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이 불의한 행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주님에게는 불합리하게 몇 가지 죄목이 주어졌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유대인의 왕일뿐 아니라 온 인류의 만왕의 왕 되심을 선포하셨다. 그래서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하여 성전을 놀이터로 만든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시면서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다. 그들은 주님의 옷을 벗기고 자색 옷을 입혀 주님을 희롱했다. 결국 갈보리로 가서 십자가를 지게 했다. 심한 고문을 당해 가다가 쓰러져 주님이 일어나지를 못했을 때 구레네 사람 시몬이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다.  구레네 시몬은 주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갔다.“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의 이집트 곁에 있는 지역으로서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그가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왔다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소동이 일어난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구경을 하러 가서 잡혔던 것이다. 예수님은 지난밤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느라 밤을 새웠으며, 많은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과 빌라도 법정에서 받은 고문으로 인하여 너무도 많은 기력을 잃은 상태라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갈 힘이 없었다. 그래서 군병들은 그 십자가를 구레네 시몬에게 강제로 지웠다. 그때 그는 이렇게 항변했을 것이다. ‘나는 이 예수를 따르는 자가 아닙니다. 나는 갈릴리 출신이 아닙니다. 나는 유월절에 성지를 순례 온 구레네 사람입니다. 나는 바쁜 사람입니다. 하루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고 했으나 군병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강제로 십자가를 지워 가게 했다. 비록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얻을 수 없는 놀라운 은총을 입게 되었다. 주님의 제자들도 다 흩어져 도망갔으나 시몬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감으로 주님이 지는 십자가를 눈으로 똑똑히 목도할 수 있었다.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진 후 얻은 것은 무엇인가? 첫째, 주님이 십자가 지는 것을 친히 목도했다. 둘째, 주님이 메시야이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님이 십자가 지는 현장에는 그가 메시야이심을 보여주는 몇 가지 징조가 나타났다. 제 6-9시까지 해가 빛을 잃은 사건이나 골고다 주변 무덤의 문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사건과 바로 그 시에 예루살렘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들은 주님이 메시야이심을 증거 하는 사인이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다. 그토록 장담하던 제자들은 다 흩어졌으나, 뿌리치고 거절했던 자신에게 억지로 지운 십자가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생각 밖에 베풀어 주시는 놀라운 사건이다.   예수를 장사한 아리마대 요셉    이렇게 하여 주님은 갈보리에서 구원사역을 완성하셨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는 절정에 이런 기도를 했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주님이 십자가 지신 사건을 미리 예견한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주님은 세상의 죄 짐을 짐으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아 아들의 권세를 박탈당하고 죄인의 몸으로 죄수가 되어 하늘의 심판대 앞에 섰다. 그래서 감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어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율법의 정죄로 주어진 죽음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친히 율법을 다 이루시고 완성하셨다. 이제 그 주님의 시체를 누가 장사했는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아리마대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8km, 욥바에서 동쪽으로 24km정도 위치한 곳이다. 그는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주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다. 어떻게 해서 그에게 이런 당당함이 생겼을까? 주님을 장사한 것은 단순한 헌신적인 수고나 무덤 하나를 기증한 정도로 보아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리마대의 신앙을 배워야 한다. 첫째, 진리 앞에 당당한 모습이다.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전에 그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해 은밀히 주님을 따랐다. 그런데 그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주님이 메시야이심을 너무도 확실히 목도했다. 그래서 그는 당당하게 나아가 주님을 장사하고자 했다. 또한 이 귀한 복을 남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둘째, 존경받는 공회원이었다.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이다. 산헤드린의 수장이 대제사장 가야바이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청부 살해까지 하는 판인데 공회원으로서 주님을 장사하기 위해 그 시체를 달라고 하는 것은 그 자신과 가족과 후손들과 친인척들에게 어떤 불이익과 불행이 닥쳐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과 그 주변의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주님을 장사하고자 나섰다. 셋째, 천국을 사모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그는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를 사모했다.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메시야를 대망했다. 넷째, 깨끗한 부자였다.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마27:57) 그는 부자였으나 불의하게 치부한 부자가 아니었다. 그는 주님의 시체를 받아 자신의 새 무덤에 주님을 장사했다(마27:60). 돈은 이렇게 쓰는 법이다. 성경에 부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깨끗한 돈을 많이 벌어 주를 위해 거룩한 곳에 값지게 쓰임 받기 바란다. 다섯째, 그는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덕망을 갖춘 사람이었다.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눅23:50). 그는 누구 앞에서나 당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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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3
  • [황권철 목사] 인생의 위대한 발견이 무엇인가
    인생에게 위대한 발견이 무엇인가? 당신은 예수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에 따라 인생관이 달라진다. 이 질문에 대하여 여러 가지 반응이 나올 수 있으나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를 세계 위대한 성인 중 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이런 정도로 아는 것이 자연인이다. 그러나 중생하여 거듭난 자들은 예수를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이 예수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당신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죄와 사망권세임을 알게 될 것이다. 세상 그 어떤 자도 이에 대해 자유 할 수 없고 모든 인생이 여기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죄와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분으로 주님은 이런 문제로 고통 받는 인생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다. 또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했다. 오늘은 마가복음 15장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가룟 유다와 미리 약속한 대제사장들은 돈으로 로마 군병들을 사서 예수를 체포하여 대제사장 가야바 집으로 갔다. 대제사장은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불러 이른 새벽에 공회를 소집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백성인 그들로서는 사형언도를 내릴 권한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로마 총독부 빌라도 법정으로 넘겨주었다. 그들은 무리들과 합세한 후 빌라도를 압박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했다. 그렇다면 주님은 누구에 의하여 어떻게 십자가를 지게 되었는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대제사장과 빌라도 때는 유월절이다. 유월절은 유대인에게 최대의 명절이다.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이런 절기에는 총독의 권위로 죄수 하나를 특사로 풀어주었다. 그때 마침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한 흉악한 강도 ‘바라바’라는 사람이 처형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람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중한 형벌을 받게 된다. 그러니 총독 빌라도는 이 둘 중 한 사람을 특사로 풀어 주어야 하는데 누구를 풀어 주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총독으로서 황제에게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식민지 백성들이지만 여론을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때 여론을 주도하는 대제사장 가야바는 어떠했는가?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유대의 역대 대제사장들이 모였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여론 몰이를 하여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와서 압력을 가했다. 대제사장은 산헤드린의 의장으로서 유대의 모든 행정적인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의 책임자로서 민중의 여론에 귀가 밝은 자였다. 그는 민중을 선동하여 절대적인 지지를 입어 총독 빌라도에게 압력을 넣었다. 이것이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 실수요 범죄이다. 이렇게 해서 최후에 공은 로마 총독부 빌라도에게로 넘어갔다. 그렇다면 총독 빌라도는 어떻게 했는가?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그리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장본인은 로마 총독 본디오 사람 빌라도였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고백한다. 그는 무리를 만족케 하기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빌라도를 손가락질 할 만큼 의로운 자들인가? 아니다. 우리 역시 동일한 범죄자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나 자신을 위하여 무리를 만족시키면서 주님을 십자가에 내어 준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내 속에 있는 가야바와 빌라도를 청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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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8
  • 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으라
    시몬아 자느냐 이렇게 하여 주님은 제자들과 겟세마네 동산에 도착했다. 이곳은 주님이 기도하기 위해서 즐겨 찾으시는 동산으로 가룟 유다를 뺀 십 일명의 제자들과 함께 했다. 먼저 주님은 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그 중 여덟 명의 제자들을 향해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했다. 이들은 주님과 동행한 그룹으로 제자로 부름 받아 이 밤에 겟세마네까지 동행한 제자들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불러 세웠다. 주님은 평소에도 이들을 언제나 자기 곁에 두셨다. 이어 주님은 그들을 데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 주님은 이들이 자신의 고난에 동참해주기를 바라고 계셨기에 이들이 주님의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만큼 가셔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여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은 기도를 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깨어 있지 못했다. 주님이 돌아와서 보았을 때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했다. 사실 그들은 한 순간도 주님의 기도에 동참하지 못했다. 주님과 함께 기도하지 못했고, 주님의 기도 소리도 듣지 못했다. 주님은 세 번이나 그들에게 와서 확인해 보았으나 올 때마다 자고 있었다. 최후에 주님은 그들을 깨워서 이르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했다. 모든 범사에는 때가 있다. 아무리 피곤해도 깨어서 기도할 때가 있다. 깨어 기도할 때 기도하지 못하면 시험에 빠지게 된다. 결국 베드로는 실수하고 말았다. 기도할 때 기도하지 못한 그는 검을 빼어 휘두르다 말고의 귀를 떨어뜨리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다. 공중 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과 싸우는 영적인 전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그런데 베드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의지하지 않고 육신의 검으로 로마 군병들과 싸우려 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시며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나아가 로마 군병들을 향하여도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지 못한 베드로는 혈과 육의 검이 두려워 주님을 멀찍이 따랐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예수를 멀찍이 좇아 주님은 로마 군병들에 의해 대제사장에게로 잡혀갔다. 그때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했다. 심지어 겉옷인 베 홑이불만 두르고 주님을 따르던 한 청년이 군병들에게 잡혀 얼마나 놀랐으면 겉옷인 베 홑이불을 벗어 던지고 벗은 몸으로 도망쳤겠는가?. 그때 베드로는 두려워 뒤에서 멀찍이 따라갔다. 그 날 저녁 주님이 말씀하신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는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다.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서 대제사장 가야바 궁전까지 갔다. 추운 날씨인지라 하속들과 군병들이 뜰에서 불을 피우고 있었다. 베드로도 추워서 불을 쬐기 위해 모르는 척하고 그들 곁으로 갔다. 곁에 선 비자중 한 여인이 베드로를 보고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했다. 그때 베드로는 간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고 했다. 아마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당신 지금 무엇이라고 했소 나사렛 예수라고요 예수가 뭐 하는 사람인데요 생전 듣도 보지도 못한 소리를 하고 있소 살다가 보니 별소리를 다 듣겠네’ 하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두 손을 비비면서 태연히 불을 쬐고 있다가 슬쩍 빠져 나와 앞뜰로 갔을 것이다. 얼마를 지났는데 그곳에도 역시 비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베드로가 말하기를 내가 갈릴리에 살기는 살았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베드로에게 다 집중이 되었다. 그러자 곁에 선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고 했다. 그때 베드로는 아하 내가 갈릴리 사람이라고 한 것이 잘못이구나 생각하고 완전 오리발을 내밀기로 작정했다. 예수 ‘그놈은 못 박아 죽일 놈이지 나라도 당장 그놈을 죽일 것이야’ 라며 주님을 저주하고 맹세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닭이 곧 두 번째 울었다. 처음 울 때는 무심코 들었는데 두 번째 우는 소리를 듣는 순간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그는 그만 밖으로 달려 나가 통곡하고 말았다. 그는 철저히 회개한 이후 사도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베드로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실수도 많았으나 깨달은 순간 회개하고 돌아선 것이다. 우리가 비록 연약하여서 넘어지기도 하고 실수도 잘 하나 그럴 때마다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야 한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려지느니라”. 사명자들은 칠전팔기 오뚜기 신앙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다른 점이다. 가룟 유다는 후회는 했으나 회개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서 회개할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주님을 멀리하지 말라. 베드로는 멀찍이 주님을 따르다가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다.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주의 성소를 가까이 하고, 주님의 종들을 가까이 하기 바란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라 주를 앙망하면 새 힘을 주시고 독수리의 날개를 달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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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19
  • 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무화과나무의 비유
    무화과나무의 비유 왜 무화과나무로 비유했을까?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감람산은 무화과나무가 무성한 곳으로 산의 높이가 20-30척 되는 것이 많다. 이 말씀을 하실 때가 유월절 직전이므로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이 돋아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이 비유를 사용하셨다. 팔레스타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올리브나 오동나무가 상록수인데 비해 무화과나무는 낙엽수로 겨울에 잎이 떨어졌다가 봄에 잎이 돋아나 여름이면 무성해진다. 곧 결실의 때가 온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생의 마지막 종말의 때가 다가왔음을 기억하라는 사실이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인자가 문 앞에 이른 사실을 알림이다. 사실 주님의 말씀은 구원사역이 당도한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재림의 주로 오실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말씀하고 있다. 주님이 당신의 문 앞에서 두드리고 계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둘째,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 중 영원한 비밀은 개인의 종말인 죽음과 우주적인 종말인 말세이다. 만약 이것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했다. 우리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주의 일에 힘쓰면 된다. 셋째,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고 했다. 주인에게 신실한 청지기는 준비하여 깨어 있는 자이다.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준비성이다. 열 처녀 비유에 보면 신랑이 더디 오므로 열 처녀 모두가 졸고 잤다.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생각하지 않고 잤지만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하고 졸았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다 같이 일하고 다 같이 쉬고 다 같이 즐긴다. 그러나 기름이 없이 사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기름을 준비하고 사는 자들이 있다. 깨어 있는 성도들은 기름을 준비한 성도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말세기 말을 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종말론적으로 살았다. 그렇다면 2천 년이 지난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더 철저하게 종말론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삶은 내세에 대한 소망이 너무도 희미해 졌다. 우리는 이전에 바울이 버린 배설물에 사로잡혀 세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고백한 사도 요한의 고백이 신약교회의 유일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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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9
  • 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인생의 마무리를 잘하라 인간은 역사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삶을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비록 문자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흔적과 자국을 남기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를 가지지 않는 민족은 없다. 역사는 해석자의 시각과 사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세속역사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 헬라의 순환사관이다. 헬라인들은 세상 모든 것이 끊임없이 반복하고 순환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이 과거에도 일어났고 미래에도 일어날 것으로 믿는다. 그러므로 역사의 궁극적인 책임을 인간에게 묻지 않는다. 다만 인간은 장엄한 자연적 순환주기에 파묻혀 사라질 뿐이다. 이 같은 시간의 굴레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고 했다. 둘째, 헤겔의 변증법적 사관이다. 역사는 정반합의 원리에 의해서 발전한다. 하나의 통치형태가 나타나면 그것에 반하는 세력이 나타나 대립하다가 연합하므로 발전해 가는 역사관이다. 그러나 역사는 끝없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후퇴하기도 한다. 셋째, 무신론적 실존주의 사관이다. 이들은 역사 자체에 의미를 부과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역사란 어떤 방향성도 없고 목표를 따라 움직이지도 않는 의미 없는 사건의 연속으로 본다. 그러나 기독교적 역사관은 세속사관과 다른 구속사적 사관이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믿는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당신의 의도대로 이끌어 가신다는 말이다. 그 의도는 인간의 구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언약으로 약속하고 선포하셨다. 그 언약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구속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시작되고 진행되고 완성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원자이다. 당신은 예수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마지막 때 승리하기를 바란다. 본문은 재림에 대한 종말론적 신앙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본문과 함께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을 소 계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과 스룹바벨에 이어 헤롯 대왕에 의해 지어진 제3의 성전이라고 부르는데 BC 19년에 착공하여 AD 63년에 완공된 82년에 걸쳐 지어진 성전이다. 그 당시도 건축 중이었으니 그 위엄은 대단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 성전은 로마 디도 장군에 의하여 AD 70년경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당시 헤롯이 성전을 지을 때 돌과 돌 사이에 보석을 박아 너무도 화려하게 지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보석을 파내기 위해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허물었기 때문이다. 감람산에서 제자들과 주님은 제자들과 감람산으로 가서 예루살렘 성전을 마주보고 앉았다. 그때 주님은 말세에 일어날 징조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첫째,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사단은 주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미혹한다. 미혹이란 속임수를 말하는 것으로 말세에 주님의 이름으로 간판을 단 이단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병 고친다고 하면서 신유행위를 하는 잘못된 기도원들이 많이 일어나고, 주님의 이름을 팔아 선지자를 배출한다는 엉터리 신학교들과 선지자 행세를 하는 목사들이 많이 나올 것이란 말이다. 이런 자들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둘째,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거짓된 이상한 소문들이 많이 들릴 것이다. 거짓된 소문들이 사람을 미혹할 뿐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을 준다는 것이다. 국가도 어지러울 때에 공의의 법보다는 유언비어가 성행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살아 있는 주님의 교회가 진리를 좇아 공의를 행치 아니하면 이단자들이 많이 일어나게 된다. 셋째, 전쟁과 재난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요즘은 집단 이기주의가 너무도 팽배해 있다.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허다하다. 도처에 지진이 일어나고 기근으로 인하여 수많은 생명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다. 넷째, 신앙의 박해가 일어난다. 그러나 절대로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성령께서 보혜사가 되어 순간순간 모든 것을 가르치고 주님이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이다. 다섯째,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 아비와 자식이 서로 대적하고, 형제와 이웃에게 미움을 당하고, 모든 사람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왕따를 당하게 된다. 아무런 이유 없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낙심하지 말라.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런 징조가 말세현상이다. 이 같은 징조가 마지막이 아니라 마지막이 다가오는 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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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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