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Home >  오피니언
-
[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
[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
[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
[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 오피니언
- 설교/강의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 오피니언
- 칼럼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 오피니언
- 기고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
- 오피니언
- 성경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 오피니언
- 기고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
[박동철 장로] 2700년 전 미스바기도회, 2022년 경남미스바 기도회, 창원시 장로 영성회복 기도회
- 성경에 ‘미스바’의 지명은 여러 곳에 나온다. 미스바의 지리적 해석도 다양하다. 성경에 분명히 적시하고 있고 설교가들이 많이 강조하는 미스바는 사무엘상 7장에 능력의 기도회 장소로 상술되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개척기를 지나면서 우상숭배의 죄에 빠짐으로써 영적 어둠의 때를 맞게 되었다고 사사기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 각기 자기의 소견대로 살아가는 시대라고 기록하고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에 이어 한나의 기도를 통해 사무엘을 이땅에 보내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영적 재건을 계획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 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이스라엘의 시대 상황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범죄로 물들어 있었다. 시내산 언약의 상징 법궤는 블레셋에 빼앗겨 다곤 신전에 있었다.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 블레셋의 지독한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영적 육적 핍박의 깊은 수렁에 있었다. 사무엘은 당시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고 회개 기도 운동을 주장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미스바로 모여 금식 기도할 것을 요청했다. 사무엘상 7장 6절에 “백성들이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 하였나이다.”라고 백성의 회심 소리가 기록돼있다. 당시 이스라엘의 시대 상황을 볼 때 미스바 기도 운동이 장소보다 때가 중요함를 알려준다. 주전 590년, 지금부터 2700여 년 전 이스라엘의 미스바 기도가 이스라엘 백성을 죄악에서 구원하고 블레셋으로부터도 구원받은 역사를 쓰게 됐다는 시대가 더 큰 울림이 된다. 오늘날 지구촌은 어떠한가. 코로나로 갇힌 세상이 되어 온전한 예배 없는 2년여 시간을 보내고 있다. 코로나의 먹구름이 걷혀가는 즈음 경남과 창원지역에서 미스바의 기도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경남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이경은 목사)가 회개 기도회로 코로나를 이겨내고 예배를 회복하자는 슬로건으로 2022년 미스바 기도 성회를 연초부터 매주 목요일 지역을 순회하며 개최하면서 회개의 부르짖음을 쏟아내고 있다. 경남 지역 2600여 교회를 향하여 미스바로 모일 것을 외치는 사무엘 선지자의 음성을 듣는 듯 경남지역을 울리고 있다. 연중 진행될 경남의 2022년 미스바 기동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움직임도 있다. 경남에서 회개 기도 운동이 일어나면 대한민국이 산다는 집회시작의 공통된 기도 소망처럼 미스바 기도회의 열매가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이와 함께 경남의 수부도시이자 대한민국을 이끄는 창원시기독교장로총연합회(대표회장 최주철 장로)가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취지로 장로들의 영성 회복 기도회를 지난 9일 창원 상남교회서 개최했다. 600여 장로 부부들이 모여 말씀과 찬양 그리고 어떤 때보다 뜨거운 부르짖음 속에 진행된 영성회복을 위한 장로들의 기도회였다. 대한민국 기독교역사속에 함께 모여서 회개 기도 했던 미스바 기도회가 오늘의 기독교부흥을 이끌었다. 1907년 1월 14일 평양 장대현교회서 개최된 부흥사경회서 각자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부르짖어 기도했던 집회가 평양교회의 대부흥를 이끌었다는 살아있는 역사기록을 남겼다. 1973년 5월 30일부터 5일간 진행된 빌리 그래함 여의도 전도 집회에서 350만 명의 성도들이 모여 부르짖음으로써 대한민국 미스바 기도의 큰 장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대부흥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 교회는 선교 130년을 넘기면서 물질 풍요의 세상 속에서 갈등하고 있다. 그리고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 펜데믹에서 영성이 메말라가고 예배의 소홀함이 일상화하고 있다. 이 모든 주님의 시선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영적 각성운동을 다시 시작할 때다. 2022년 경남 창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성 회복 기도운동이 대한민국 교회 회복의 시작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2700년 전 미스바기도회, 2022년 경남미스바 기도회, 창원시 장로 영성회복 기도회
-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11
- I. 서언(序言) 코로나의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각종 모임과 회의들이 기지개를 켜는 동시에 각종 회의 통지서가 하루가 멀다 하고 부쳐져 온다. 하지만, 이 모임과 회의들의 제목들을 보면 일관성이 없이 제각각인 경우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노회 소집이나 각종 모임 통지서를 보면, 어떤 경우는 제O회(回)라고 했고, 또 어떤 모임은 제O차(次) 회의라고 했다. 또한 제O기(期) 모임이라는 통지서도 있었다. 거의 대부분 나름대로의 명분과 취지에 맞는 제목이 많았으나 어떤 경우들은 같은 성격의 모임이지만, 제목은 다른 경우들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이에 위 3가지 용어의 차이점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회(回)와 차(次)와 기(期)의 구분 1. 회(回) : 제O회(回)의 회의 사전적인 의미는 ‘횟수’를 나타내는 말이다. 즉‘일정한 기준이나 주기에 따라 반복되는 각각의 단계나 차례’를 의미할 때 사용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제1회 정기총회라든지 제2회 정기노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2. 차(次) : 제O차(次)의 차의 사전적인 뜻은 일의 횟수를 헤아리는 단위인 ‘번’과 일이 발생하는 횟수를 세는 ‘차례’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하면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 일을 나누어서 행할 때 1차, 2차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제2회 정기노회의 기간이 1년이라고 가정하면, 이 회기 안에 수차례 이상의 임원회가 모여질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제2회 정기노회 기간 중의 1차 임원회, 2차 임원회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차’는 ‘회’가 아니기 때문에 제O차 정기 총회나 제O차 정기노회 등의 표현은 적절하지 않는 것이다. 3. 기(期) : 제O기(期)의 사전적인 뜻은 시절, 시기, 기간 등을 뜻하는 용어이다. 즉 일정한 기간씩 되풀이 되는 일의 하나하나의 과정을 나타내는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하면, 중고대학교 같은 정기 학제가 아닌, 사회교육원이나 각종 세미나에서 주로 행해지는 일정기간 교육을 수료하는 성격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4. 예제 : “OO학교 졸업 동문회”를 어떻게 표현할까? 필자가 받아본 어떤 동문회 소집 통지서에서 어떤 경우는 ‘제O기 졸업동문회’라 했고, 또 어떤 경우는‘제O회 졸업 동문회’란 제목이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표현이 올바른가? 이의 정답은 제O회로 하는 것이 옳다. 그 이유는 앞에서 논한 대로 ‘기’는 회기 연도적 학제(學制)개념이 아닌 연(年)단위 속에서 단기적 기간의 수료행위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O기로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III . 결 어(結語) 이상에서 논한 대로 ‘회’, ‘차’, ‘기’란 용어는 서로 엇비슷한 것 같아 보이지만 그 개념상으로 보면 이런 미세한 차이가 있다. 물론 이런 용어를 잘 못 사용했다 해서 행정 질서에 문제가 생겨지거나 법적인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용어상의 작은 부분이라서 간과하거나 무시하다 보면 본질과는 전혀 관계없는 비본질적인 시시비비가 일어나는 경우들을 종종 목격할 때가 있다.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시찰회나 노회 등 여러 회의들이 소집되고 있다. 이런 각종 회의들과 모임들 속에서 정확하고 바른 용어 사용으로 아름다운 모임과 회의 문화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11
-
-
[조희완 목사] 만족한 인생 (전2:1-11)
- 옛날 한 성에 성주(城主)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성을 다스리는 주인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늘 자기 삶에 만족이 없었습니다. 만족함이 없는 삶을 살던 그 성주가 깊은 병이 들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지혜로운 점쟁이가 그 성주에게 “병을 고치시려면 항상 만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의 내복(內服)을 가져다가 입으면 나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하고 일러 주었습니다. 성주는 즉시 신하들에게 명령하기를 전 영토를 뒤져서라도 그런 사람을 찾아오라고 일렀습니다. 여러 달이 지나서 신하들이 돌아 왔는데 신하들의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 항상 만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찾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신하가 말하기를 “예, 우여곡절 끝에 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성주가 다급해서 묻기를 “그런데 어째서 빈손으로 돌아왔는가?” “예, 항상 만족한 삶을 살고 있는 한 사람을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너무 가난해서 내복을 입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했으면서도 만족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하게 살면서도 늘 감사하면서 만족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적은 것을 가지고 살면서도 늘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내가 가진 것으로 족한 줄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만족 결핍증” “행복 결핍증”에 걸려 있습니다. 도무지 만족이 없어서 어떻게 하면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 모습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만족할 수가 있을까요? 첫째로, 영적으로 즐거워야 만족할 수 있습니다.(전2:1-11) 둘째로, 부부간에 다정하게 살아야 만족할 수 있습니다.(전9:9) 셋째로, 사람의 본분대로 살아야 만족할 수 있습니다.(전12:13)
-
- 오피니언
- 칼럼
-
[조희완 목사] 만족한 인생 (전2:1-11)
-
-
[최호숙 목사] 한(恨) 맺힌 삶의 치유(治癒)를 위하여
- 우리 민족은 한(恨)이 많은 민족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사건 요소요소 마다 “한 많은”이란 단어를 붙이면 말이 된다. 일제 강점기의 모든 삶이 한이었고, 6.25를 겪은 피폐의 삶이 한 많은 삶이었고, 가난 속에 살아온 모든 삶이 한이었다. 손인호 씨의 노래 제목 “한 많은 대동강” 남인수 씨의 “한 많은 백마강” 요즘 대세인 가수 진성 씨의 “보릿고개”란 노래도 한 많은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만든 곡이다. ♬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고개 길 초근목피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5~6월이 되면 아버지를 통해 듣고 선배들을 통해 듣던 보릿고개란 말이 자꾸 생각이 난다. 추수한 쌀이 바닥이 나고 아직 보리는 익지 않은 5~6월, 주린 배 움켜쥐고 식량을 찾아 나섰던 춘궁기(春窮期), 이때는 사건 사고가 많았었는데 도둑들도 돈보다는 쌀을 훔쳐 갔다는 이야기는 굶주림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한(恨)이란 무엇인가? “차별적인 괴로움이 해결되지 않을 때 우리 속에 쌓이는 심리적인 복합상태”라고 정의 하였다. 한(恨)은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분노, 아쉬움, 안타까움, 또는 이들 모두가 한데 뒤섞인 묵은 감정이다. 그렇다면 한은 어떻게 형성이 되는 것일까? 첫째, 부당한 차별을 받을 때다. 예를 들면, 국가나 기관으로부터 부당한 핍박을 당하거나 또는 못 가진 사람이 잘 사는 사람으로부터 부당하게 피해당하거나 무시당할 때,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 때 한국인들은 한을 경험한다고 한다. 둘째, 타인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결핍(relative deprivation) 되었을 때 한이 생기게 되는 데 학자들은 전자의 경우를 객관적 한, 후자를 주관적 한 이라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여인 한나는 남편과의 관계 속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자괴감(自愧感)이 있었고, 그의 적수 브닌나가 심히 그를 격분하게 하였으므로 그의 심정이 괴로웠다. 때문에 그의 삶은 울음의 삶이었다(삼상1:6~7). 여기에 대하여 개역 성경에는 번민(煩悶)이라고 번역했다. 바로 한나가 경험하고 느끼는 이 번민이 객관적 한이며, 동시에 주관적 한(恨)인 것이다. 한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치료와 치유는 조금 다르다. 치료(治療)는 사람이 하는 행위를 말하며, 치유(治癒)는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사람이 치료하는 것도 유익이 있지만 완전 치유를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의 만져주심이 필요하다. 한나의 남편 엘가나는 한나를 치료하기 위하여 ‘위로(慰勞)’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삼상 1:8). 남편의 위로가 치유되지 못하였다. 한나의 괴로움은 여전하였다(삼상 1:10). 그는 완전 치유를 위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사 아들을 주셨는데 그 아들이 사무엘인 것이다. 사무엘이라고 이름을 지은 이유는 “내가 하나님께 구하였다”는 뜻인데 기도로 치유되고 기도의 응답으로 얻은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사무엘이라고 지은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여건 속에는 객관적인 한, 또한 주관적인 한이 복합적으로 병행 되어 나타난다. 완전 치유를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돕는 은혜로 회복되기를 기원한다.
-
- 오피니언
- 칼럼
- 살며 생각하며
-
[최호숙 목사] 한(恨) 맺힌 삶의 치유(治癒)를 위하여
-
-
[오성한 목사] 성화되는 지름길이 있다(1).
-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요1:1). 하나님이 육신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요1:14). 그는 창조자시다(요1:3). 그래서 이 땅은 자기 땅이다. 자기 땅에 오셨다(요1:11). 사람들은 몰랐다. 예수님이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곤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다(요1:13). 예수를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사람의 형통이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난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다(롬8:1). 이제 우리가 이루어 갈 구원이 있다. 우리가 이루어갈 구원은 예수님께서 해 놓으신 것을 믿는 믿음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을 많이 믿는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능력의 삶을 산다. 어려움 앞에서도 인도를 믿고 흔들리지 않는다.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인격적으로 주님을 알고 믿게 되면 주일을 저절로 잘 지키게 된다. 믿는 자의 삶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성도의 교제가 풍성해 지고 아름답다. 목사와의 관계도 풍성하다. 교회에서 개인의 덕을 세우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자가 된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알고 믿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건강한 정체성 때문에 삶이 건강하다. 이것을 성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성화는 예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다. 우리가 좀 노력해서 더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노력으로 무엇을 더할 수도 없다. 예수를 믿으면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완전한 구원이라는 말을 꼭 기억하라. 예수님의 구원이 부족하지 않다. 예수님의 구원은 완벽하다.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육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인간의 노력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빈틈없는 계획이다. 예수님의 완벽한 구원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구원받은 자의 영은 창조되었다. 죽었던 영이 살아났다. 구원받은 자의 영은 더 깨끗해 질 필요가 없다. 점점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다. 완벽하고 죄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되었다. 우리는 영이다. 영이 혼과 육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인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다(요일3:9, 5:18).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이미 용서되었고 하나님께 기억되지 않는 의로운 자가 된 것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능력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완전한 구원을 알게 될 때 감격과 감사의 삶을 살 수 있다. 완전한 구원을 깨달아 가는 것이 성화다. 이 땅에서 당신은 힘 있는 성화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성화의 길을 마치는 날 영화의 영광을 볼 것이다. 신랑 되신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그날 구원을 완전히 이해하고 완전한 누림의 영화로 나갈 것이다. 하늘나라에 가면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다. 성만찬의 비밀을 통해 성화가 시작되었다. 성만찬을 통해 새 언약을 세우셨다. 피와 잔을 나누어 마심으로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하나가 되어 죄 덩어리가 되셨다. 우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다(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의를 알아가는 과정이 성화의 과정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 앞으로 좀 더 노력하면 점점 더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 왔다가셨다. 예수님의 구원은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이다. 우리의 노력이 조금도 필요 없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회복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다. 성령의 능력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우리가 성화되고, 영화되는 것은 이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지 많이 성화된다고 더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이루심을 깨달아 가는 것을 신앙 성장이라고 하고, 성화라고 한다. 신앙 성장은 행위에 있지 않다. 성화가 행위에 있지 않다. 믿음에 있다. 신앙 성장은 오직 믿음에 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믿음만 있으면 행함은 따라온다. 성화는 하나님의 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당신이 더 성화의 자리로 나아가려면 하나님의 의를 가졌음을 많이 알아가면 된다. 하나님의 의를 깨달아 가는 것이 성화다. 성화 될수록 감격이 생길 것이다. 영화롭게 된 자신을 정확히 발견할수록 감격의 삶이 되고, 변화된 삶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성화는 믿음으로 된다. 정체성의 발견이 삶을 살게 하는 힘이 된다.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고, 믿는 삶은 변화된 삶을 살게한다.
-
- 오피니언
- 칼럼
-
[오성한 목사] 성화되는 지름길이 있다(1).
-
-
[신재철 목사] 피 흘리는 할아버지 그리고 며느리
- 최근 머릿속이 복잡하다. 어느 고3, 열아홉의 고민이 가벼울 수 없겠냐는 생각도 들지만. 역시나 내게는 내 고민이 가장 무겁다. 기도할수록 무거워지는 마음, 복잡한 생각. 하나님의 이끄심과 부담이 있지만 결단과 정리가 쉽지 않다. 딱 불순종의 몸부림이다. ‘신학대학을 가? 아니면 성적에 맞춰 대학가서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 오늘도 야간자율학습 후 교회에 들러 홀로 찬양과 기도를 드린다. 신학대학에 가기 싫은 투쟁이라고 봐야 더 정확할 것이다. 나의 깊은 밤 기도가 교회 노(老)권사님 눈에 적발된 뒤 나는 교회에서 세상 훌륭한 목사 감이 되었다. 밤마다 홀로 기도하는 고3이라는 딱지가 경건하게 붙어버렸다. 기도를 할수록 한 숨이 깊어지는 것은 왜일까? 믿음이 부족해서? 불순종의 불편함? 그렇게 그날도 불순종의 기도를 깊게 드리고 교회 문을 나선다. 밤 12시가 되었으니 집에 가야지. 봄이 오는 듯 했으나 아직은 너무 춥다. 교복 재킷을 여미며 빠른 걸음으로 잠자리를 향해 간다. 골목길 작은 슈퍼마켓은 아직도 불이 켜져 있다. 이제 문을 닫으시려는지 밖에 늘어놓은 물건을 정리하고 있다. 골목이지만 차가 다니는 길이었기에 가에 붙어 걷고 있는데 중앙에 무언가 보인다. 조금 더 다가가 보니 사람이 주저앉아 있다. 술에 잔뜩 취한 듯 중얼거림이 들린다. ‘날이 춥다. 차가 지날 수 있다.’ 사고가 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다가가 할아버지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할아버지, 댁이 어디세요?” 술에 취한 것은 냄새로 확인 되었다. 넘어졌는지 이마에는 상처와 피가 보였다. 빨리 모시지 않으면 무슨 사고라도 날 것 같아 집을 물었다. 잔뜩 취한 할아버지가 집을 잘 알려줄리 만무하다. 질문을 바꿔 전화번호를 물었다. 얼마나 혀가 꼬부라졌는지 한참을 실랑이 하며 번역을 해가며 번호를 알 수 있었다. 부담스러웠지만 그냥 길에 둘 수는 없어서 일단 등에 업었다. 아직 문이 열려있는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아저씨, 전화 한 통 할 수 있을까요?” 사장님도 바로 상황을 이해하시고 가게 전화기를 내어주셨다. 가족과 연락이 닿았고 집 위치를 확인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전화 받는 가족의 목소리가 차갑다. 모시러 온다는 말없이 위치를 설명한 후 전화가 끊어졌다. 마침 내가 다니던 학원 인근 골목이라 찾아갈 수 있어서 다시 할아버지를 업었다. 걸어서 1킬로미터 정도? 쉽게 생각했는데... 결코 가볍지도 않았고 가깝지도 않았다. 땀이 범벅이 되고 몇 번이나 쉬었다 가기를 반복해서 겨우 집을 찾았다.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외침에 달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며 그렇게 도착했다. 문은 열렸지만 누구도 반기지 않았고 할아버지를 넘겨받지도 않았다. 머쓱해진 내 걸음이 며느리로 보이는 분이 안내하는 방을 향했다. 마지막 내려드리는 자세에서 다리가 후들거려 조금은 던져지듯 착지가 되었다. 교복 입은 학생이 길에 쓰러진 할아버지를 업고 댁에 모셔드렸다. 그렇다면 물 한잔에 칭찬 정도의 보상은 있을 줄 알았는데... 가족이 할아버지를 향해 험한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며 도망치듯 집을 나선다. “왜 또 술은 그렇게 처먹고, 어디서 쓰러져서 이 모양으로 들어와! 차라리 나가 죽어!” 사연이야 있겠지만. 그래도 살아 돌아온 사람에게 죽으라니. 내 진로보다 더 짙은 생각이 무게를 더한다. ‘가족이 뭘까? 사랑은 뭘까?’
-
- 오피니언
- 칼럼
-
[신재철 목사] 피 흘리는 할아버지 그리고 며느리
-
-
[김성수 총장] 문화변혁을 위한 그리스도인
- 오늘 우리 사회를 거듭난 심령을 가진 니고데모의 안경을 통해 바라보면서 저는 우리 사회의 문화 전반이 우리가 믿고 전파하는 복음으로 좀 바뀌어 졌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램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최근 주요 언론의 사회면에 연일 보도되고 있는 아동학대, 성폭행, 패거린 정치 행태 등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이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구석을 좀 밝혀주고 바꾸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램을 갖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와 오늘을 비교해 보면 교회당 수나 교인 수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교회당 수와 교인 수의 증가에 비례하여 부정과 부패가 줄어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오히려 더 악해진 것 같고 어두움은 더 깊어만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많지만 우리 삶의 정치와 경제와 교육과 문화 등 인간 삶의 핵심영역을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도 소수인 것 같고 그 영향력도 아주 미미한 것 같습니다. 미국의 경우도 보면, 미국인의 절대 다수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복음주의 교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 사회 전반에 걸쳐 기독교 신념과 가치관은 현저하게 감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국의 대도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신문, 잡지들을 보면 마치 복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해도 그저 낯설고 미미하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복음의 영향력이 이렇게 미미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한 가지 이유는 문화변혁적 그리스도인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요 대학교에서 가르치거나 텔레비전 혹은 영화 산업에서 일하거나, 주요 일간지에 글을 쓰거나, 방송 매체에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의 비율은 겨우 3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문화와 사회의 주요 유형들은 거의 그리스도인이 부재한 현실 속에서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와 문화에 뭔가 영향력을 미치려고 하면, 다른 누군가가 이미 제안하고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 비판하는 부정적인 반응만 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 비재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책이나 영화가 기독교 신앙을 비하시키면 우리는 그것을 비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비판하고 보이코트하는 운동을 펼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방식은 우리 자신들을 더욱더 우리만의 폐쇄적인 껍질 속으로 밀어 넣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렇게 부정적인 대응방식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는 내어 놓을 만한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공동체는 우리의 사회 문화적인 현실에 대해 이제 보다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대처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둡다고 불평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촛불을 밝힌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사회가 어둡다고 불평은 엄청나게 하면서도 촛불은 거의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흑암이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그리스도와 문화를 대립적인 관계로 인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과업은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활동을 수행하는 것 외에는 복음을 선포하고 자비를 행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문화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어거스틴(St. Augustine) 역시 인간은 이 변화무상한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려서, 가능한 한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영원불변한 하나님에게만 시선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은 문화가 이방 신상 앞에 바쳐지는 방식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문화를 그리스도에게 다시금 바쳐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가장 기본적인 문화적 활동 외에는 모든 문화적 활동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동산을 다스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무효화 시키지 않고 오히려 보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체를 하나님의 원래 의도대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모든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구속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문화적 과업의 전체 범위에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나 ‘문화와 그리스도’가 아니라 ‘문화를 통한 그리스도’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대응 방식의 흐름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은 진정으로 생명력이 있고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변화시킬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을 세상의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문화변혁적 일꾼들로 기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수동적으로 죄를 피하려는 데만 관심을 갖는 자녀들이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자녀들로 양육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경기 규칙을 위반하지 않으려고 안전한 플레이만 하다가, 그만 졸전을 벌이고 마는 자녀들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어가는 십자가 군병들로 양육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
- 오피니언
- 설교/강의
-
[김성수 총장] 문화변혁을 위한 그리스도인
-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3)
-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좋은 리더입니다. 사랑이 많은 리더는 공동체를 세웁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가르치고 설교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키고,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성경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인간관계가 좋아집니다. 사랑은 인간관계의 열쇠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자가 지혜자이며 리더입니다. 사랑이 없는 자는 고독하게 되고 실패하게 됩니다. 십계명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 사랑, 인간관계의 관계, 이웃 사랑의 중요성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을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중요한 명령입니다. 성경을 요약하면 “사랑하라”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의 리더십은 관계의 리더십입니다. 사랑의 리더십이 최고의 리더십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이요 위선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흉내는 냈지만,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사람에 대해 비판하고 미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인이었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 난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면 인간관계가 잘됩니다. 이웃 사람을 사랑하되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합니다. 자신의 몸을 사랑합니다. 나 자신, 내 몸을 사랑하듯이 이웃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표현이요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 넓은 사랑이십니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이며 변하는 사랑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서 선물로 준 사랑의 편지요 사랑의 책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나 사람은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 인간을 사랑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사랑하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고 지옥에 가야 하는 인생인데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을 구원시키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셔서 인간을 구원해 주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살리시는 하나님, 용서해 주시고 기회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외모 형편을 보시지 않으시고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해 주신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악인과 의인에게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심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긍휼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지어 회개하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과거를 묻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사랑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사랑의 복음입니다. 사랑의 피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Amaging Grace. 놀라운 은총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가르쳐 주는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비유입니다. 죄는 우리가 짓고 용서는 하나님이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서 선택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나의 목자, 피난처가 되십니다.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먹이시고, 기도 응답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시는 이유도 우리가 깨닫고 잘 되게 하기위하여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하십니다. 우리를 품으시고 내 모습 이대로 받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저주보다는 축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우리의 감정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대하시고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큰 사랑 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 자연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제일이고, 능력이고 , 지혜요, 리더십 입니다. 사랑은 감동을 주고, 설득시키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랑은 좋은 관계의 열쇠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예수님, 사랑의 성령님이십니다.
-
- 오피니언
- 논문/책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3)
-
-
[황권철 목사] 베드로(Peter's Behind Stories)-열정의 사도 3
- 고린도에 게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아 고린도와 이웃 지역에도 갔을 것으로 본다(고전 1:12) 베드로의 로마 방문에 관한 것에 대한 많은 견해는 있으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없다. “바벨론에 있는 교회”(벧전 5:13)에서 그 근거를 제시한다. 당시 로마를 은밀히 바벨론이라 불렀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도 로마로 가는 도상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고린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도 그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로마에 가서 복음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한다. 이레니우스(Irenaeus)도 바울과 베드로는 로마에서 설교하면서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베드로 전서가 기록된 곳은 로마라고 했다. 베드로의 최후 순교 주님은 베드로가 이 같이 박해 받을 것을 이미 예언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요 21:18-19). 베드로행전과 유세비우스는 베드로가 순교할 때 거꾸로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베드로가 최초로 교황직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이나 로마서에서 베드로가 로마에 살았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으나 혹자는 베드로가 ‘바벨론’에 대한 언급을 통해 제국의 수도에 머물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벧전 5:13). 여기 언급한 바벨론은 1-2세기에 로마에 대한 비밀스러운 전승의 표현으로(계 14:8, 16:19, 17:5). 1세기 말에 베드로가 로마에 살았다고 한다. 이는 2세기 초 안디옥 주교 이그나티우스가 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Letter to the Romans)』에 나온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25년간 주교직을 수행했다고 한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죽었다고 하는 강력한 주장은 로마의 클리멘스의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Letter to the Oorinthians)』(96년경, 5:-6:4)에서 볼 수 있다. 베드로는 후일에 흩어진 디아스포라에게도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서 순교했다. 그는 기독교 박해를 피해 도망가다가 주님을 만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Domine Quo vadis)라고 물었다. 그러자 주님은 “나는 네가 버리고 떠난 나의 양떼들을 위해 다시 죽으러 로마로 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되었다. 베드로는 햇빛이 차단된 로마의 마메르틴(Mamertine) 지하 감옥에서 9개월 간 갇혀 지냈다고 한다. 투옥되어 있는 동안 베드로는 몸이 수직으로 고정된 채 기둥에 묶여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곤고한 나날 가운데도 베드로는 간수들을 비롯하여 40여 명의 사람들을 개종시켰다고 한다. 그는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가 극에 달한 AD 67년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기 몇 시간 전에 처형당하였고, 죽기 전에 행한 설교를 통해 아내의 천국행에 대해 감사하면서 “오 주께 기억함을 받을 자여”라는 말로 아내를 위로 격려했다고 한다. 오리게네스(Origenes)는 베드로가 최후에 로마에 왔으며 머리를 아래로 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한다. 바울과 베드로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순교했으나 두 사람이 동시에 죽었다는 사실은 확실하지 않다. 베드로의 무덤의 위치에 대해 여러 세기 동안 학자들은 논쟁을 벌여 왔다. 이 같은 연구에 교파나 신학적 편견과 이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믿는 자들은 이 같은 편견과 이해관계에서 자유 할 수 있다(요 4:21-24). 베드로가 매장 된 장소는 역사학적이며 고고학적인 문제이다. 적어도 3세기 초까지는 바티칸 언덕 위에 베드로의 유적인 트로피 혹은 기념비적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 사실을 믿고 콘스탄티누스 황제(Emperor Constantinus)가 이곳에 교회를 지었다. 현재 성 베드로 성당이 서 있는 곳이다. 1939년 이 성당의 제단 밑을 개축하던 중, 초기 이교도의 묘지와 다른 중요한 자료가 발견되어 대규모적이며 조직적인 탐사가 착수되었다. 2세기 말이나 그 직후부터 확실히 그렇게 여겨왔다.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베드로가 로마 황제 네로(Nero)의 박해로 죽음을 당했다면 그 당시 쫓기는 그리스도인들로서 그 시체를 거두어 매장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이와 유사한 많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로마에서 베드로가 순교했다는 증거가 그를 매장한 곳에 대한 증거 이상으로 훨씬 더 확실하다는 점이다. 베드로의 기념 유적이 발견된 곳에 베드로가 매장되었다는 가능성을 설정하기에는 그 증거가 충분하다. 이삭줍기 베드로에 관한 기록은 복음서 기자들과 사도행전 전반부와 베드로 자신이 쓴 전후서가 있다. 혹자는 그의 동역자 실루아노가 대필한 것으로 인해 베드로의 저자성을 부인하는 자들도 있기는 하나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벧전 5:12). 누가가 쓴 사도행전의 베드로의 설교에 의하면 그는 구약과 이스라엘 전통에 대한 충성,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과 이스라엘의 역사의 성취, 그리고 믿고 세례를 받는 자에게 약속한 성령 부어주심을 모든 자에게 전파된 것이라고 했다. 마가는 베드로의 설교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2세기 이후에 기록된 문헌들 가운데는 베드로의 설교(Preaching og Peter), 베드로의 수난(Passion of Peter), 베드로 행전(Acts of Peter), 슬라브어 베드로 행전(Slavonic Acts of Peter), 베드로 묵시록(Apocalypse of Peter) 그리고 야고보에게 보낸 베드로 서신 등이 있다.
-
- 오피니언
- 성경
-
[황권철 목사] 베드로(Peter's Behind Stories)-열정의 사도 3
-
-
[박동철 장로] 고위 공직자 청문회 사회기부 공헌도 검증하라
- 성경을 연구하는 학문의 범주를 신학(神學)이라고 한다. 그러나 더 넓게 성경을 깨닫고 실천하는 가치적 학문을 칭하는 데는 ‘사랑학’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저자 하나님은 창조자이자 온 세상의 통치자로서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으로 구원하는 대역사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큰 명령을 함께하기 때문에 성경을 사랑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듯하다. 이 세상을 위임받은 사람들의 세상의 통치와 관리권에서도 이웃과 함께 사랑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덕목을 우선시하고 있다. 특히 모든 나라의 정치적 민주주의 근간과 경제적 자유시장경제권에서도 더불어 살아가는 키워드는 사랑의 사회 헌신도이다. 기득권자 가진 자들이 약한 자들과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은 기부 등을 통한 사회에 대한 헌신이다. 일찍이 산업화를 거치고 민주화를 통해 선진국이 된 유럽 여러 나라들의 사회상은 사회 기부의 헌신 문화가 굉장히 앞서있다. 그것은 기독교 성경의 사랑이 사회교육에 미치고 영향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의 수많은 곳에 이러한 하나님의 어록이 남겨있다. 구약에서도 레위기 19장 18절에 동포를 원망치 말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했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수없이 이웃사랑을 강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 및 여러 미주 기독교 문화 속에 발전해온 나라들의 사회 기부나 헌신 문화는 가히 놀랄만하다. 최근 미국의 세계적 재벌들이 거의 재산 모두를 기부한다는 뉴스들이 들리고 있다. 미국의 워렌 버핏, 빌 게이츠의 재산 사회 기부 소식들이 온 세상을 놀라게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신흥 재벌들이 재산 절반을 사회에 내놓겠다고 놀랄만한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고무적인 일이기는 하다. 문제는 돈 많은 재벌들의 사회 기부가 아니라 사회 모든 가진 자 지도층 기득권층의 솔선수범하는 작은 기부헌신의 생활화가 정착해야 우리나라도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교회를 섬기는 교회 중직자 지도자들은 대부분 수입의 10%를 십일조로 헌금하는데 아끼지 않는다. 교회서 교인들이 낸 헌금이 교회 운영에도 쓰이지만 사회복지 주변 이웃을 섬기는데 많은 예산을 들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신실한 교인들은 수입의 20%를 들여 이웃사랑의 사역에 열정을 내는 크리스천들도 있다. 교회가 이렇게 해야 복음 전파는 물론 사회 발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국가 발전을 리드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 사회 지도층이자 국가 권력층의 인사들의 사회 공헌도는 어느 정도인지가 가름이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고위공직자 장차관급 평균 재산이 20억을 넘었다는 소식은 옛날 뉴스다. 끝없이 부동산 값이 오르는 강남 거주인들이 고위공직들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평균 재산은 나날이 오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재산을 강남에서 늘렸다고 죄인으로 몰 수 없다. 우리의 생활상은 양극화로 접어들어 강남 비강남으로 부(富)와 빈(貧)의 이분적 계층이 심화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데 사회적 대안과 치유를 위해서는 사회 공헌 문화가 정착해야 할 것이다. 지난 새 정부 장관급 고위공직자를 검증하는 청문회 과정에서 과거의 불법 사례 투기 전력 등을 파헤치면서 놓치고 있다는 게 있었다. 바로 그들이 삶 가운데서 사회를 위한 작은 공헌을 얼마나 했는지 살피는 과정이 없었다. 고위공직자 청문회에 사회 기부 공헌도 등을 철저히 검증해서 훌륭한 인물을 찾는 기준이 됐으면 한다. 상대적 국가의 부유함 속에도 절대 빈곤층 또는 경제적 하위계층을 국민 세금으로 국가가 전적인 책임을 다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회 기부와 헌신의 정도를 국가 지도자를 찾아내는 중요한 기준으로 세워야 할 때다. 그것이 더불어 사는 이웃사랑의 행복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고위 공직자 청문회 사회기부 공헌도 검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