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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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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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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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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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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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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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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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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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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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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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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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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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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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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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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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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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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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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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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칼럼] 산적한 경남 진보교육의 문제! 이를 해결할 교육감은 누구일까
- 경남 교육감 선거를 목전에 둔 시점에 경남 교육에 대한 진지한 반성은 필수다. 진보교육감의 장기집권, 특히 8년째 장기집권 중인 경남의 진보교육, 자칫 12년 교육독재를 방불케하는 사건이 이어질 수 있는 중차대한 시점이기에 더욱 그렇다. 경남도민 다수는 ‘경남교육이 뭔가 본질에서 멀어져가고 있음’을 안다. 조국사태를 통해 확인된 내로남불, 공정과 정의의 상실, 말뿐인 진보의 허구와 실상 등 일맥상통한 체험을 하고 있는 듯하다. 진보교육감은 국·영·수 위주의 지식교육을 전통적이고 틀에 박힌 교육, 시험위주의 줄세우기식 교육이라고 폄하했다. 반면, 지식교육 이외의 온갖 교육 즉, 인권, 통일, 민주시민, 노동인권, 성적자기결정권, 다양한 직업체험 등 경험적이고 실질적인 교육이 21세기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설득했다. 학생이 행복한 학교, 다양한 경험 교육, 놀이와 쉼, 민주시민의식함양, 학생인권, 노동인권, 성인권 등 할 수 있는 교육을 현장에 쏟아부었다. 학교교육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교육과정에 인권교육, 통일교육, 민주시민교육, 통일교육, 노동인권교육이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상대적으로 국·영·수 교과 수업 시수가 줄어들었다. 그 결과는 처참하다. 학교수업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기초학력미달 수준의 극심한 증가, 대입진학경쟁력의 추락, 온갖 학교폭력, 성폭력사건, 교권추락, 학교장의 자율성 침해, 도교육청의 전교조 편향 집단화, 학내 노조 간 갈등과 파업 및 교육공백, 정규교사들의 역차별 논란 등 학교 현장부터 도교육청행정 전반에 이르기까지 엉망진창이다. 교육의 인성적인 면이든 실력적인 면에서든 경남의 교육경쟁력은 바닥을 치고 있다. 양두구육(羊頭狗肉, 겉으로는 훌륭한 듯이 내세우지만, 속은 보잘 것 없음)이다.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해놓은 진보교육감의 선물을 마냥 우리 자녀들에게 좋은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막상 포장지를 뜯어보니 실망스런 내용물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겉포장지는 좀 투박해도 내실있고 진정성이 있는 내용물을 받고 싶다. 학교현장부터 교육행정 전반에 이르기까지 망가진 경남교육의 문제를 제대로 개혁할 적임자를 찾아야만 한다. 최소한 3가지 필수요건을 갖춰야 한다. 유·초등·중등학교 교육현장전문가, 도교육청개혁이 가능한 교육행정전문가, 학생의 역량을 제대로 키울 지식교육 가치를 아는 보수적 교육철학이다. ‘학교다운 학교! 교육다운 교육!’을 실천할 수 있는 중도·보수 교육감 후보의 단일화를 통해 경남교육의 경쟁력을 높이고, 경남의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지도자로 발돋움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일구이언 이부지자(一口二言 二父之子)라 했다. 현교육감은 재선당시 학생과 학부모, 도민 앞에서 스스로 했던 약속을 되새기며 최소한의 교육자의 양식을 지켜주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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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칼럼] 산적한 경남 진보교육의 문제! 이를 해결할 교육감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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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남용의 결과 (민20:10-13)
-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인들을 매료시킨 홍콩 액션 영화배우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소룡>, 미국 명 <부르스 리>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영화배우였을 뿐만 아니라 온 몸이 운동으로 다져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도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1973년 그의 나이 32세 때 갑자기 죽어서 전 세계 영화 팬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說들이 많았습니다. 독살을 당했다는 설도 있고,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설도 있고, 자살을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사망 원인이 약물 남용 때문이었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는 늘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렸고 그 두통을 이겨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약물을 복용했는데 그 약물을 너무 과다하게 복용한 것 때문에 부작용을 일으켜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약물을 과다하게 남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알려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미국 의학원의 통계에 따르면, 매년 미국에서 약물 남용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사람이 100만 명에 이르고, 그 중에 사망하는 사람이 매년 1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약이 병을 낫게 하고 사람을 고치기도 하지만, 반대로 병을 악화시키고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을 남용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옛날에 “약 좋다고 남용 말고 약 모르고 오용말자!”라는 표어가 있었는데 정말 귀를 기울여야 할 중요한 내용입니다. 필요한 것이나 좋은 것이라도 남용하면 반드시 손해를 보거나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절대로 남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직분을 남용하면 손해를 보게 됩니다.(민20:11) 둘째로, 재물을 남용하면 후회를 하게 됩니다.(눅16:19) 셋째로, 자유를 남용하면 혼란을 겪게 됩니다.(갈5:13) 남용이나 악용을 자제하고 선용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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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남용의 결과 (민2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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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팬덤(fandom)문화 시대의 병폐
- 이 시대 사회문화 중 팬덤문화 현상은 일반적인 사회문화 현상이지만 기독교 문화 안에도 존재할 만큼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팬덤이라는 말은 광신자(狂信者)를 뜻하는 “퍼내틱(fanatic)”에서 유래한 ‘팬(fan)’과 영역 나라 등을 표시하는 접미사 ‘덤(dom)’의 합성어로 특정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대중문화가 확산되면서 “팬덤문화”라는 말도 생기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대중가수 조용필 씨가 무대에 나오면 “오빠~ 오빠~”를 외치며 인기를 따라 형성되었던 ‘오빠부대’가 요즘 말하는 팬덤인 것이다. ‘팬심(fan心)’이 확대되면 ‘팬덤(fandom)’이 되는 것이다. 성경 인물 헤롯 대왕을 보면 유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에 대한 팬덤 현상을 유지하고 왕권을 강화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백성은 유대인들인데 자신은 이두메인(에돔)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출신성분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가장 좋아할 성전건축을 46년에 걸쳐 건축하여 선물로 주었는데 이것이 팬덤을 형성하기 위한 전형적인 포퓰리즘(populism)이다. 또한 유대 사회는 사두개 당파, 바리새 당파, 에세네 당파, 셀롯(열심)당파 등이 있었는데 이 파당들도 팬심이 팬덤이 되어 집단이 형성된 것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도 바울파, 게바(베드로)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등이 팬덤을 이루었는데 이런 팬덤문화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싸움을 통한 수많은 대미지(damage)를 입게 된 것이다. 우리 정치문화 형성을 보면, 민주당, 국힘당, 거대 양당과 소수 정당들 모두가 팬덤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들이 팬덤을 형성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지하는 인물이 이 나라와 개인에게 100% 만족을 줄 것으로 기대하며,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 나라가 망한다는 구조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공약을 하고 인기를 끈다 하더라도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신(神)이 아니기 때문에 능력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세례요한이라는 특출한 인물이 유대인들 가운데 팬덤이 형성되어 엄청난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세례요한보다 더 강력한 존재가 나타나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자를 살리며 기적의 역사를 나타내었다. 특별히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면(요 6:15) 유대 나라의 경제문제가 해결되고, 기적의 능력을 발휘하면 로마로부터 독립을 얻고 자주 민족 국가로써 어엿이 건국(建國)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셨다. 우리 주님은 육신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개인 팬덤문화가 존재하는 이상 현실 세계에 나타나는 병폐는 소멸되지 않는다. 개인의 인기와 팬덤에 치우치지 않고 바른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 세례요한과 바울을 들 수 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정보를 입수한 결과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나보다 능력이 많아서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사람(눅 3:16) 이라고 했으며, 그는 흥하여야 될 분, 나는 쇠하여야 할 존재(요3:30)로 말하며 대중들 속에 인기를 누리기보다는 예수를 높이는 삶을 살았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권면하기를 나와 아볼로는 단지 심고 물주는 존재이지만 그리스도는 자라게 하는 주권자임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개인 팬덤문화에 빠질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한 팬덤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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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팬덤(fandom)문화 시대의 병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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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습기를 공급하라
- 고대 철학자 Tales(Bc 625-547년)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 하였다. 모든 생명체는 물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 외의 행성들에 생명체 존재 여부를 알기 위해 먼저 물의 유무를 조사한다고 한다. 이집트에서 3천 년 된 미이라가 발견되었는데 미이라의 손에 밀알 몇 개가 쥐어져 있어 시험 삼아 심어 보았더니 싹이 나더란다. 물이 없으니 3천 년이 흘러도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다가 물이 공급되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물을 필요로 한다. 미국 LA에서 동쪽으로 가면 갈수록 점점 사막화가 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무들이 큰 잎사귀에서 점점 작아지다가 급기야 사막에 이르러서는 가시나무들만 보인다. 가시는 본래 잎사귀였지만 메마름이 가시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사막에는 온통 선인장들뿐이다. 메마름은 재앙이다. 인간의 심령도 마찬가지다. 심령의 메마름이 가시를 만들어 나를 찌르고 남을 찌르게 된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이생의 염려가 가시를 만든다고 하였다. 염려하다 보면 가시가 되고 점점 날카롭게 되어 남을 찌르게 된다. 염려의 반대는 평강이다. 평강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염려를 물리치고 평강을 얻는 비결을 바울은 빌립보 4:6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였다. 염려하면 마음이 황폐하여 가시가 되지만 기도하면 가시가 변하여 잎사귀가 된다. 주변에서 선인장 같은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 이들은 너무 날카로워서 접근하기도 말을 걸기도 어렵다. 심령이 메말라 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마음에 상처받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못 볼 것을 보고 못 들을 것을 듣다 보면 이런 것이 쌓여 독이 된다. 독이 쌓이면 마음이 점점 강팍해지고 메말라 사막화되어 버린다. 나쁜 것이 쌓이면 씻어내야 한다. 가시를 잎사귀로 만들어야만 남도 살리고 나도 산다. 기도는 가시를 잎사귀로 변화시키는 비결이다. 다윗은 블레셋으로 부터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낸 일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에 의해 많은 날 동안 유리걸식하며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심지어 생명의 위협까지도 여러 번 받았다. 분하고 억울하여 사울 왕에 대해 독기를 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용서의 사람이 되고 관용의 사람이 된다. 사울 왕을 죽일 수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살려 준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갔고, 보디발 아내의 위증으로 억울한 감옥살이를 한다. 총리가 된 요셉은 형들에게 복수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들의 죄를 깨끗이 용서해주었다. 기도가 마음속 독기를 사라지게 하였기에 용서할 수 있는 관용의 사람이 된 것이다. 바위에 떨어진 씨는 “습기가 없어 말랐다” 하였다. 사막도 물이 공급되면 옥토가 되듯이 심령에도 수분이 공급되면 옥토가 된다. 지금 여러분들의 심령은 어떤 상태인가? 메마름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심령의 밭에 자주 습기를 공급하여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가야 한다. 그래야만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관용의 사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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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습기를 공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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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진짜 믿어지니?
- 진짜 믿어지니? 500원의 헌금 이후, 안내받은 청소년부 주일예배에 찾아갔다. 긴장과 함께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 그리고 흥분으로 문을 열었다. 어린이예배에서 보았던 남자 전도사님의 격한 환영이 나를 더 긴장이 시킨다. 환영해 주시니 마음이 놓이면서도 긴장이 더해지는 것은 왜일까? 주변을 둘러보니 내 또래 남자 아이가 앞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외모도, 기타도, 노래도. 나이스하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평소에 노래를 즐겨 부르던 나에게는 너무나 멋진 모습이다. 흠모할만하다. 그리고 긴 의자에는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모여 앉아 앞에 선 남자아이의 가이드에 따라 노래를 부르고 있다. 뭔지 모를 흥분에 자리에 앉게 되었다. 모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모르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래도 상식이 있었기에 주머니에 천 원짜리 한 장 들고 온 것으로 헌금순서를 능숙하게 넘긴다. 문제는 사도신경이었다. 아주 어릴적 외웠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눈을 감고 조용히 친구들의 중얼거림을 듣는 것으로 OK. “진짜 왔구나? 반갑다. 중고등부 담당 전도사님이야.” 오전 주일학교 예배에서 만났던 분과 예배가 끝나고 나서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20대 후반? 인상은 좋았는데 잘생긴 분은 아니다. 그리고 옆에는 예배 내 옆자리를 지켜주었던 분이 중고등부 선생님이라는 소개를 하셨다. 미소가 참 아름다운 분이다. 간단하게 나의 소개를 하며 주변에 있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유난히 동갑이 많은 교회였다. 그리고 한 살 어린 여중생들이 많았다. “어? 오빠네? 반가워. 자주봐.” 아, 내가 오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을 오랜만에 상기시켰다. 이곳에 오기를 잘했다. 등록이라는 절차를 안내받고는 ‘1’도 고민하지 않았다. 이곳 패밀리가 되어야했다. 무엇인가 내 삶에 밝음이 찾아오는 느낌이다. 그렇게 흔쾌히 등록을 마친 후 전도사님께서 갑자기 진지한 톤으로 질문을 하신다. “사영리를 알고 있니?” 태어나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단어다. 모른다는 나의 대답에 전도사님은 나를 의자에 앉힌 후 옆에 앉아 작은 책자를 꺼내셨다. 글이 많은 것도 아니고, 길지도 않았다.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관계.’ 처음 듣는 이야기다. 듣기도 하고, 생각도 하고, 같이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던져지는 질문. “이 사실이 믿어지니?” 전도사님은 나에게 성경의 이야기를 전해 준 것 같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믿어야 할 것처럼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는 진짜로 믿어졌다. 오히려 오늘 소개받은 예수님께 감사와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런 분이라면 잘 따라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전도사님의 물음에 믿어진다는 힘찬 대답을 드렸다. 전도사님은 놀라셨다. 그리고 재차 물으셨다. “정말 믿어지니?” 아니, 믿으라고 지금까지 설명하셨던 분이. 내가 믿는다고 했더니 이분이 오히려 믿지 못하는 눈치다. 정말 믿어지고, 앞으로 더 잘 알고 싶다는 나의 말에 전도사님의 눈은 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는 자신을 따라서 기도를 하자고 말씀하신다. 전도사님의 떨리는 음성을 따라 나는 또박또박 반복하며 따라한다. 그렇게 나는 짧은 시간에 예수님의 매력에 빠지면서 신자가 되었다. 당시 전도사님과 지금도 연락을 한다. 그분은 당시를 회상하시며 그 이후로도 나처럼 사영리를 소개받고 한 번에 영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사실 나도 사역을 하며 그런 학생을 만나본 적이 없으니. 사람에게 믿음이 생긴다는 자체가 은혜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확신 있게 본인이 전하고도 그렇게 놀라던 전도사님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조금 우습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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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진짜 믿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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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5
- I. 서언(序言)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언어를 배우면서 가장 어렵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는 외국어에는 거의 없는 존칭어와 낮춤말이라고 한다. 그것도 우리 국어의 존칭어가 극히 높임말, 예사 높임말, 예사 낮춤말과 극히 낮춤말 등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경어 사용이 없는 외국인들로서는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언어 예절은 우리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약 존칭어와 낮춤말을 잘못 사용했을 때는 예의를 중시하는 우리 문화에서는 말하는 자의 인격과 가문, 학력까지도 의심을 받게 된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더군다나 목회자의 경우는 거의 모든 사역이 언어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잘못 사용된 용어하나가 목회자의 전인격인 면을 판단 받을 수도 있다. 이에 본 호에서는 교회 안에서 잘못 쓰고 있거나 다소 듣기에 어색한 말의 사용 중에 ‘아내’에 대한 용어들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아내에 대한 용어 : “우리 사모(師母)입니다”란 말의 남용 1.아내에 대한 호칭들: 한자 문화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언어문화는 아내에 대한 호칭만 해도 아주 다양하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에게 아내를 소개할 때‘아내’ 혹은 ‘내자’라고 하거나 겸손하게 이르는 말로서‘집사람’이라는 말을 한다. 또 다른 사람의 아내를 높여 부를 때는‘부인’이라는 호칭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자기 아내를 남에게 소개할 때‘우리 부인’이라고 하거나 우리 마누라’라는 말을 하는 경우들도 종종 보고 듣는다. 전자의 경우는 너무 높여서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합당하지 않고, 뒤의 경우는 너무 낮추어 부르는 비속어이기 때문에 올바른 호칭어가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장 통합교단에서는‘아내’라는 말로 통일하자고 교단 내 교회들에게 권장을 했든 적이 있다. 2.‘우리 사모(師母)입니다’란 말의 남용: 아내에 대한 호칭들 중에 가장 어색한 말 중의 하나는‘우리 사모(師母)입니다.’라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경어법으로 본다면 너무 어색한 말이다. 왜냐하면, 사모라는 말의 뜻은‘스승 사(師)’에‘어미 모(母)’자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의 1차적인 의미는 스승의 부인을 높여서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요즈음에는 좀 더 넓은 의미로 확장되어서 2차적인 의미로는 직장의 윗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호칭어로도 겸하여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2차적인 의미는 사전적인 적합성의 의미로 본다면 다소의 문제는 있다. 그러나 이미 워낙 많이 사용되고 있는 사회 통용어가 되었기 때문에 2차적인 의미로 사용해도 현재로서는 별 무리는 없다고 본다. 사모라는 용어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 중의 하나는 교회이다. 흔히들 교인들이 목회자의 아내를 호칭 할 때‘사모님’이라고 한다.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좋은 호칭어라고 본다. 하지만, 목회자 자신이 자기 아내를 소개할 때‘우리 사모입니다’라고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또한 목회자의 아내들도 스스로를 소개할 떼‘어느 교회 사모입니다.’라고 하거나, 모임에서는 스스로‘사모회’란 명칭을 정하기도 한다. 이는 너무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말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내를 스승의 대열에 두거나 또한, 자신 스스로를 높여서 사모라고 호칭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 이런 경우가 범람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이‘사모’라는 호칭을 권사, 집사처럼 교회의 하나의 직책의 용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모는 교회 직책의 명칭이 아니라 교인들이 목회자의 아내를 높여서 부르는 호칭어인 것이다. III . 결 어(結語) 이상과 같은 경우가 하도 많다 보니 아예 이 사모라는 호칭어를 교회의 통상적인 직책의 용어로 사용하자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 사모라는 말은 이미 사회 일반 전체에 통용되고 있는 정상적인 사전적 표준어이기 때문에 이 호칭어를 교회의 직책 용어로 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또한 잘못 남용할 때는 일반 사회인들로부터 지탄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좋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사모라는 말이 덕스럽고 예의를 갖춘 아름다운 존칭어로 보이지만, 이를 자칫 남용하면 오히려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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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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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관계의 리더십
-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 고부간의 갈등이 많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가 좋아야 가정이 편안합니다. 과거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이 많아서 고부간의 갈등이 많았습니다. 고부간에 관계가 깨지면 고통이 커집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고 며느리의 실수, 부족을 눈감아 주어야 합니다. 요즘은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 보면서 사는 시대입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격려해 주고 부족한 점이 보이면 상처 받지 않게 부드럽게 대화해야 합니다. 서로간의 나쁜 감정이 커지지 않도록 지혜롭게 해결해야 합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며느리라면 서로의 힘든 상황을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독립하여 따로 살면서 서로 보살피면서 사는 것도 하나의 지혜입니다. 시어머니는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며느리와의 관계가 좋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고부간의 좋은 관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재정문제로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재정관리도 잘해야 합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부담스러워 하지 말고 이해해 주고 섬겨야 합니다. 부모공경의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 쉽게 속상해하는 심리를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나이가 든 시어머니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약합니다. 서운한 감정을 쉽게 가지게 됩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형편이라면 상황을 잘 받아 들이고 적응해야 관계가 유지 됩니다. 따로 산다면 자주 찾아 뵙고 인사하며 전화해야 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가 쉽지 않습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미워질 때 ‘시’자들어가는 것이 다 싫다해서 시금치도 안먹고 시편을 읽지 않는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볼 때 자신의 아들을 섬기고 손주, 손녀를 키우고 살림 하느라고 수고하는 며느리의 힘든 환경을 이해하고, 도움이 되고,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며느리는 나의 남편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감사의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힘이 드나 지혜롭게 잘하면 관계가 깨지지 않게 됩니다. 서로 서로 양보하고 배려해야 관계가 잘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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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관계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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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부활신앙의 확신
- 부활신앙의 확신 주님은 베드로를 특별히 사랑하셨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주님은 자신의 부활소식을 가장 먼저 제자들에게 알리게 하셨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베드로의 이름을 호명하셨을까? 아마 그가 주님을 부인하고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요21:3).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님을 부인하고 디베랴로 갔으나 주님은 그들 먼저 가셔서 그들을 격려해 주셨다. 심한 좌절과 실의에 빠진 베드로에게 주님은 디베랴 바다에서 강한 확신을 심어 주셨다(요21:15-17). 부활신앙은 좌절에 빠진 우리를 강한 확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주님은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이들은 근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주님은 그들 곁에 가서 물으셨다.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눅24:17). 주님은 이들의 근심된 마음에 부활신앙을 불어넣어 줌으로 냉랭한 가슴에 불을 붙여 주셨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24:32). 부활신앙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풀어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해야 한다. 부활신앙은 냉랭한 우리의 가슴에 말씀과 성령으로 불을 지피는 것이다. 주님은 마음이 강퍅한 제자들을 꾸짖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이 말을 들으면 제자들의 신앙이 이상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왜 믿지를 못했을까? 사실 제자들은 지금 영적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전에 주님과 동행하면서 보는 신앙에 길이 들어져 있었던 자들이 한순간 보이던 예수가 사라져 버리니 그들은 갈 바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공허해지고 방황하게 되어 각기 제 길로 가게 되었다. 이제 보이는 메시야 시대가 끝나고 보혜사 성령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성령 보혜사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보이지 않는 보혜사의 능력을 구하는데 익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령을 무익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굳어지고 닫힌 완악한 마음을 책망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일 처음으로 제자들을 만나실 때 깊은 호흡을 내어 쉬면서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복음에 신실한 증인이 된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젠 복음이 유대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은 유대지역에만 제한 받았으나 성령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므로 성령 받은 우리로 하여금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그래서 딕 힐리스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마음은 곧 선교지이며, 그리스도를 모신 모든 마음은 곧 선교사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 믿지 않는 모든 자에게는 전도해야 하며, 예수 믿는 모든 자는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중생 하여 세례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함을 받아 멸망할 것이다. 부활신앙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 주신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 주님은 믿는 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표적을 주셨다. 여기 표적이란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테라스(Teras)란 의미이다. 이는 호흡이 멈추어질 정도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대제사장과 빌라도 총독의 숨을 멈추게 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다. 둘째, 두나미스(Dunamis)란 말이다. 우리가 바위와 같은 암반을 깨뜨릴 때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폭발물을 사용한다. 죄악으로 굳어진 암반과 같은 강퍅한 심령은 성령의 다이나믹한 힘으로만이 파괴할 수 있다. 셋째, 세메이온(Semeion)란 뜻이다. 이는 삶의 의미를 주는 것으로 신호기능을 가진 사인(Sign)을 말한다.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나가면 성령이 우리와 동행하므로 우리의 사역 현장에 놀라운 증거들이 나타난다. 그러면 믿는 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표적이 나타나는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쫓겨난다.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했다. 악한 령들은 예수 이름이 아니고는 절대로 쫓아낼 수 없다. 바울이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귀신들렸던 자가 바울의 사역을 방해하여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행16:18)고 했다. 예수만이 사망권세와 사단의 권세를 정복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귀신들이 물러간다. 새 방언을 말한다. “새 방언을 말하며”, 여기 새 방언이란 부활신앙을 소유한 자들이 죄와 사망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어떤 세력 앞에서도 담대하게 주님의 이름을 증거 할 수 있는 부활신앙을 소유한 전도의 역사를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고 했다. 이는 말씀의 능력이다. 뱀을 잡는다. “뱀을 집어올리며”, 여기 뱀은 지금 우리가 보는 땅에 기어 다니는 그런 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뱀은 미혹의 영으로 나타나는 사단을 상징하는 말이다. 에덴동산에 하와에게 나타난 뱀이 단순한 뱀 이전에 사단의 영이 역사한 것처럼 부활신앙의 소유자는 사망권세를 짓밟은 것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옛날에 교회를 박해한 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사약을 먹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복음을 전파한 사실들이 많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해 독약을 먹으면 죽는다. 영적으로 마귀는 우리의 심령 속에 죽이는 독약 같은 미움과 시기와 증오를 심으려고 한다. 그러나 부활신앙의 소유자는 그러한 것으로 인해 해를 받지 않고 말씀으로 승리한다. 병 고치는 능력을 주신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5:14-16)고 했다. 사도는 갔으나 사도와 함께 했던 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중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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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부활신앙의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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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공의가 하수 같이…
- 현대사회는 과학과 과학 기술 등 여러 면에서 굉장한 승리를 쟁취한 사회이면서도 동시에 전례 없는 부정과 부패, 불공정, 불의, 고통 그리고 비극에 깊이 빠져있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방대한 선택의 범위를 구가하면서 자국의 시민들은 거대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바로 그 정부가 전 세계적으로 수십억에 달하는 사람들을 영속적인 가난의 상태에 머물도록 만들고,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정치테러와 고문이 그들의 항존적 환경이 되도록 지원하거나 그러한 불의를 자행하는 부정의한 현실이 바로 현대사회의 한 심각한 비극이기도 합니다. 우크라이나의 비극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함께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 같이 흐르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하늘의 평강(샬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공의가 없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평강의 삶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기쁨과 떨림과 환희가 있는 샬롬은 공의로운 상태 하에서만 피어날 수 있습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많은 조건들과 상황들은 공의도 마찬가지로 깨뜨려 버립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공의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상호간의 의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회는 공의를 추구하는 사회입니다. 이와 같은 사회는 언제나 샬롬의 사회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공의를 추구하지 않는 사회는 샬롬의 성취를 가로막습니다. 예를 들어, 방직 공장 안에 어린아이들을 가두고, 자연 자원들을 함부로 낭비함으로 후손들로부터 그것을 착취하며, 자국 영토의 확장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국가는 불의한 국가이며, 이와 같은 사회와 국가는 공의를 파괴하며 필연적으로 샬롬의 성취를 가로막는 흑암의 세력입니다. 그렇다면 공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공의라는 단어를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냉담하고 원칙을 고수하는 비인간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의와 관련하여 연상되는 것은 재판 과정, 법적 절차, 감옥 등과 같은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공의는 본질상 권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공의와 권리는 사실상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향유할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공의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권리라는 단어 역시 공의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다소 냉담하고 비인간적인 어떤 것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권리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연상하는 것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 천부적 인권, 유엔 회원국의 권리, 권리 헌장 등과 같이 다소 추상적이며 고양된 권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권리의 의미를 공의와 관련하여 아주 다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개인이 어떤 것에 대해 권리를 가진다라고 할 때 그것은 윤리적으로 합법적인 권리, 그것을 실제로 향유함에 대한 주장, 그리고 그 어떤 것을 누림에 있어서 직면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보장받을 것에 대한 주장을 의미합니다. 권리는 다른 이에 대해 윤리적으로 합법적인 권리입니다. 권리는 다른 이에 대해 의무와 책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모든 책임이 권리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권리는 책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권리는 또한 그것을 실제로 누림에 대한 주장입니다.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그 권리를 실제로 향유하지 못하면 그 법은 공허한 것입니다. 그리고 권리는 그 어떤 것을 누릴 때에 일반적이거나 심각한, 그러나 고쳐질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의 사회적보장을 주장합니다. 위협에 대해서 보장하라는 주장을 권리로 보는 것은 권리가 사회에서 약자와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상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권리를 우리는 자기 방어의 권리, 자유의 권리, 발언과 참여의 권리, 그리고 안전과 생계의 권리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안전과 생계의 권리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안전과 생계권은 그것이 없다면 모든 다른 권리가 의미가 없어지며,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는 권리라는 의미에서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대부분의 다른 권리들보다 더 근본적입니다. 언론의 자유는 그것이 얻어지는 만큼 삶에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이도 많은 다른 권리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안전과 생계권보다는 임의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전과 가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관용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안전을 위협받는 자들과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은 살롬의 성취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과 같은 것입니다. 부유한 자가 기아에 있는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을 알고 도울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육체적으로 그 어려운 자를 공격하는 것만큼 그 주린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겠지만, 이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공의에 관한 책입니다. 구약의 모세 오경과 선지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공의를 요구하시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공의에 대해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사람들은 고아와 과부들, 나그네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 사회에 공의가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실제적 원칙은 공의가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미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공의가 요구하는 것은 고아와 과부들, 나그네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같이 한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지고 자신의 공정한 몫을 갖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해하는 공의의 본질은 현대 서구사회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공의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는 공의와 권리의 문제를 인간 존재의 아주 섬세한 조직과 같이 가장 근원적인 것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작금의 국내외 정세를 보면서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나 감언이설의 의식이 아니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흐르게 하라”(암 5:24)는 것임을 갈파했던 아모스 선지자의 호소를 다시금 가슴에 새길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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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공의가 하수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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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이념의 전장(戰場), 교회가 분명해야할 때다
- 제20대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정국은 새 정부 출범을 준비하는 분주함에 들어갔다. 어느 선거보다 국민 관심도가 높았고 그만큼 투표 현장의 열기도 뜨거웠었다. 밤샘 개표 현장은 쉽게 떠날 수 없는 피 말리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윤석열 당선인에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축하를 보낸다. 이번 대통령선거가 왜 이렇게 네거티브의 극단이라 할 만큼 상대 허물만 찾는 선거였을까. 그리고 진영의 위치에서 한순간도 양보 없는 초극 대립된 선거였을까. 선거의 뒷담이 국가사회발전에 던져주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또한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복음의 사명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선거 결과를 두고 볼 때 지난 5년의 정권은 진보 이념의 세력들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진보적 촛불세력들이 5년간 국가관리에 너무도 부족함을 드러냈다. 대표적 실패가 부동산 정책. 서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너무도 컸다. 실험적 임금고용정책의 실패 등등이 있지만 평화를 내세운 대북정책이 북한에 굴종적 모습을 보임으로써 친북좌파정권이라는 혹된 평가를 받고 정권을 내놓게 되었다. 사실 반일 친북의 기조 속에 국민을 갈라치기 함으로써 더더욱 국민의 정서에 상처를 냈고 혹된 비판을 받았다. 우리 교회가 민감했던 부문은 우리 사회에 소리 없이 들어온 유물론의 산물, 평등사회로의 전환준비를 위한 제반 법들을 만들어 사회를 병들게 하고 교회 복음을 옥죄게 하는 제도가 생기는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이에 사실상 반정부입장으로 악법들 제정에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같은 사회갈등이 심화된 것은 지난 5년, 정권을 운영해온 주체들이 지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극단 친북 인사들의 정책주도에 따라 나타난 결과라는 지적도 있다. 많은 혼돈이 일어났다. 국가는 이념의 싸움판에서 몸살을 앓았다. 헌법 이념과 대한민국 건국을 두고도 엄청난 논란이 일었다. 북한을 향한 통일의 제안과 소통은 필요하지만 공산주의 집단을 미화시키는 일은 용납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따뜻한 가슴으로 통일을 논하되 도발의 북한에 대해서는 냉철하고 단호해야 한다. 지난 정권에는 이러한 대처가 없었다.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이 이념의 전장(戰場)이 된 원인이다. 보수의 진영에서는 최대의 위기라는 진단과 함께 정권교체의 큰 장이 형성된 것이다. 복음에 사는 교회는 어떠한가. 지난 5년 동안 악법 제정을 막기 위한 투쟁에 교회가 나섰으며 애국운동이란 화두에 성도들이 편승했다. 걱정되면서도 중요한 것은 교회 내 세대 중심의 시각차가 엄청나다는데 있다. 이념 투쟁이 되어버린 나라, 그 중심에서 교회가 복음을 맘껏 전하고 사회를 건강하게 이끄는데 혼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보수적 이념 논쟁에서 이해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전후세대 한국 근대사를 몸으로 알지 못하는 세대 또한 이념의 공격이 얼마나 교회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데 낙관하는 점도 있다. 교회를 이끌고 설교를 담당하는 목사와 장로들의 시각이 난처할 때가 많다. 장로의 기도가 다르고, 집사의 기도가 다른 교회 현장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혼미함이 생겨나고 있다. 이제 정권교체와 새 정부가 출범하지만 또다시 이념의 전장은 생겨날 것으로 전망된다. 선거에 이기고 졌지만 이념의 투쟁은 이제 시작될 것 같은 나라의 걱정거리가 생겨나고 있다. 여기서 교회가 분명해지지 못하고 혼미해가서는 안될 일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를 지켜내고 나라의 미래를 어떻게 세워갈 것인지 깊이 생각하고 가르치는 지금의 때가 아닌가 싶다. 복음을 공격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 평등법 기독사학 관련 등 많은 법들이 국회에 상정되어있다. 너무 현안이 많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교회가 분명히 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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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이념의 전장(戰場), 교회가 분명해야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