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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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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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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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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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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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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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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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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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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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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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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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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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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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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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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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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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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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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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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순종의 결과 (삼상15:17-23)
- 이스라엘에 있는 사해(死海) 바다는 일반 바닷물에 비해서 염도(鹽度)가 약 10배가량 높기 때문에 사람이 누우면 가라앉지 않고 뜨게 됩니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물에 누워서 신문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이 전혀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곳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물에 들어갈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안전 수칙이 있습니다. 그 안전 수칙은 바로 “절대로 헤엄을 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염도가 높기 때문에 물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누우면 부력(浮力)에 의해서 저절로 몸이 뜹니다. 그러나 물에 빠질까봐 걱정을 해서 몸에 힘을 주게 되면 몸의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특히 수영을 한다고 첨벙거리다가는 다량의 광물질(鑛物質)이 함유된 소금물이 눈에 들어가거나 입으로 들이키게 되어서 자칫 큰 해를 입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해진 안전 수칙대로 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바닷물에 몸을 맡기고 누워야 합니다. 그 정해진 안전 수칙에 따르기만 하면 누구나 안전하게 사해 바다의 즐거움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전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한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고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신학자 <앤드류 머레이>는 말하기를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순종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곧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는 올바른 신앙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순종의 학교>에 입학한 그리스도인들답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원칙이 되고 그 원칙에 순종함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삼상15:22) 둘째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출23:22) 셋째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요2:1-11) 항상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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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순종의 결과 (삼상15: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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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내 말에 주의, 눈, 귀, 마음속에!
- 말씀과 기도를 통해 기름 부음이 나타난다. 그러기 위해 믿는 자에게 이미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다는 것을 믿는 바른 믿음이 중요하다. 기름 부음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성령께서 하게 하시는 능력이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분명히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라고 하셨다. 믿는 자에게는 이미 기름 부음이 있다. 기름 부음이 없이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 성령의 도움이 아니고는 예수가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사람의 생각으로 동정녀 탄생을 믿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힘으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고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믿을 수 없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라고 했다. 우리에게 거하는 기름 부음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고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는 복음을 믿는데 왜 내 삶 속에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복음이 이론인가?”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복음을 들을 때 기분은 좋은데 실재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이제 나타내야 되겠다. 기름 부음이 우리에게 있다는 먼저 믿어야 한다. 믿음을 가지면 우리 속에 기름 부음이 유지가 된다. 기름 부음을 유지할 뿐 아니라 기름 부음을 나타내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초대교회는 그렇게 했다. 기름 부음이 나타나는 방법이 있다. 기름 부음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나타난다. 제자들이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기도 외에 방법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라고 하셨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기름 부음이 타나난다. 기름 부음이 역사하는 길을 깨닫고 그 따르는 표적으로 확실히 증언하심을 이 시대에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하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셨다”(막16:20).“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라고 하셨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심이다. "내 말에 주의하라"는 말은 말씀에 주의하라는 말씀이다. "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다. 말씀이다 ."또 그것을 네 눈에서"이다. 그러니깐 말에 주의하고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눈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마음속에 지켜야 한다. 마음속에 지킨다는 말은 내 마음에 믿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늘 마음에 있어야 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요6:63)라고 하셨다. 살리는 것이 영이다. 영만이 살린다. 살리는 영을 붙잡아야 한다. 영이 무엇인가? “내가 이른 말”이 영이다. 생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린다. 말씀과 기도로만이 거룩해진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삶이 나타난다는 말씀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함을 주셨는데 거룩해진다는 말은 거룩한 삶이 타나나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딤전4:5). 이미 우리 거룩함이 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함을 주셨다. 이 거룩함이 나타나는 방법이 말씀과 기도의 충만이다. 나는 다음 구절을 수백 번, 수천 번 암송하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주장하고 고백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하고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 당신도 이 구절을 철저히 암송하고 주장해 보라. 신나는 일이 아니가!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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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내 말에 주의, 눈, 귀, 마음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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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윈도우 XP, 너를 보게 될 줄이야.
- 급한 일이 없는 관리실은 평화롭다. 골치 아픈 민원이나 신경 써야 할 작업도 없다. 이럴 때면 작은 컨테이너 관리실에 앉아 소소한 업무를 진행한다. 그런데! 누군가 다가온다. 점점 거리가 좁혀지며 예상 이동 경로가 관리실로 보인다. 결국, 관리실 문이 열렸다. “소장님 계시네? 우리 집 컴퓨터 한번 봐줄 수 있겠습니까?” 늘 이런 식이다. 관리실에서 조금이라도 여유를 가져보려면 내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 입장한다. 카랑카랑한 경상도 할매의 음성, 집에 있는 컴퓨터가 이상하다는 말과 함께 도움을 요청한다. 집의 컴퓨터가 문제가 있는데 왜 관리소장에게 문의할까? 주로 어르신들이 계신 아파트. 자식들은 타지에서 바쁘게 살아간다. 자식들에게는 미안해서 연락을 못 하겠다 하시며 내게는 미안하지 않으신가 보다. 컴퓨터는 물론 소소한 살림살이에 관한 도움 요청이 많다. 이런 일에 엮이면 반나절 이상 소비되는 귀찮은 일이 된다. “아, 그러세요? 컴퓨터 업체 전화번호 드릴까요?” 최대한 미소를 잃지 않고 여유롭게 응대한다. 내가 친절한 목사라는 것을 상대방이 인지하게 해야 한다. 그렇다고 일을 떠안을 수 없다. 이럴 때 가장 유용한 회피 기술은 전문 업체와 연결해 주는 것이다. 단순히 귀찮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기술도 없는 사람이 종일 고생한 후 해결 못 하는 것보다 출장비를 지불하더라도 정확하고 빠르게 해결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비겁한 변명일까? 여하튼 지역에 소문난 컴퓨터 업체 사장님을 소개해 드렸다. “어르신, 제가 고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고 한번 올라가서 봐드릴게요.” 10분이 못 되어 전화를 드린다. 얼마 전 홀로 되신 할머니를 돌려보내며 뒷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아이고, 소장님이 마음에 걸리셨구나.” 돌아설 때 무거운 표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전파를 타고 느껴진다. 나를 의지하며 찾아오셨는데 매몰차게 돌려보낸 것 같아 죄책감이 밀려왔다. 노인 냄새는 났지만 집은 깨끗하다. 안내받은 안방에 들어가 보니 구매할 때는 제법 비쌌을 것 같은 날씬한 본체의 대기업 컴퓨터가 있다. 그 옆에는 정사각형 비율을 통해 연로함을 자랑하는 작은 모니터가 자리했다. ‘지금까지 정상적으로 작동되었을까?’ 의구심이 든다. 전원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오래, 오래, 아주 오래. 다행일까? 부팅이 된다. 맙소사. 부팅 화면에 나타난 화면. ‘윈도우 XP’ 호기심에 설정을 확인해 보니 ‘메모리 512MB’ 추억의 사양이다. “가끔 인터넷 하고, 한글 프로그램만 돌아가면 됩니다.” 할머니가 요구한 조건은 이 녀석이 감당하기에 가혹하다. ‘인터넷은 될까?’ 혹시나 인터넷 사용은 가능할까 싶어 눌러보니 오랜 시간 후 연결은 되나 페이지가 열리지 않는다. 이건 답이 없다. 적당히 내가 만져서 살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뭐라도 살릴 수 있나 살펴보다가 항복을 선언했다. “할머니, 이건 도저히 쓸 수 없겠어요. 차라리 ‘당근 마켓’에서 중고라도 사신다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전부다. 본체와 모니터를 합쳐 10만 원만 줘도 지금 이 아이보다 나을 것이라는 조언을 해드리고 퇴장한다. 사실 내게 약간의 여유만 있어도 컴퓨터를 바꿔드리고 싶었지만 그럴 여력이 없다. 오래된 윈도우XP 보다 내가 더 무능한 것 같아서 할머니에게 괜스레 더 죄송스러워진다. 이번에는 내 잘못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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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윈도우 XP, 너를 보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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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제자 도마가 가야국 김해에 왔다?
- 지난 5월 4일 김해 모 교회에서 가야 건국 1981주년 기념 예배가 올려졌다. 이어, 이 자리서 가야사 속 기독교 사적을 찾는 세미나가 열렸다. 필자는 기독교 역사 공부에 늘 관심이 있어 김해서 개최되는 가야사 세미나에 몇 차례 참석한 적이 있다. 교회서 무슨 가야 건국 예배인가. 의아할 수도 있지만 우리 역사 1세기 전후 가야국 속에 기독교의 전래 유적이 있다는 가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들어 가야국의 기독교 역사 연구의 열기가 전국으로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개괄적인 역사 흐름은 1세기 중반 제자 도마가 인도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복음을 받은 허황옥이 가야의 시조 김수로(金首露)와 국제 결혼한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고대 역사는 가설에 치우친다. 한데 허황옥이 살던 인도 아유타국에서 도마가 복음을 전한 것과 아유타국의 상징 물고기가 기독교의 상징이란 데 흥미를 끈다. 더욱 지금 눈길을 끄는 것은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릉에 쌍어(雙魚)라는 물고기 두 마리가 그려져 있다. 역사 탐구하는 사람들은 가만 있을 수 없다. 특별히 손길(주님손길의 뜻)문화원을 세워 기독교 역사 연구에 열심인 원장 이용봉 목사의 열정이 가야의 기독교 역사 연구에 불을 붙이고 있다. 가야 고분의 유물 중 일곱 촛대 메노라가 이스라엘의 일곱 등잔대와 같다는 유적유물에서의 일치도 더욱 흥분케 한다. 제자 도마는 의심 많은 제자로 알려져 있다. 부활 후 오신 예수님에게 못 자국을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예수님이 직접 도마의 손을 끌어 못 자국을 만지게 했고 그때 도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20:28)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을 두고 성경 학자들은 도마가 의심 많은 제자가 아니고 신중하면서도 복음을 넓게 전한 제자로 평가하기도 했다. 아무튼 많은 학자들은 제자 도마가 아시아의 인도 아유타국(지금의 첸나이)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정리하고 있다. 인도 첸나이에 도마 기념교회가 있고 우상의 나라 인도에서 3천만 명이 예수를 믿는 복음의 지경이 있게 했다. 역사의 깊음 속에 사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흔적을 통해서 우리는 추적해 볼 수 있고 이를 통해 예수 복음의 강한 전파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묵상해 볼 때 가야국에 복음 전파가 있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같은 시대 신라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경교(景敎)가 있었다. 예수님 승천하시고 초대 강한 복음의 전파가 오늘날 이시대보다 강렬했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김해 가야국의 기독교 역사를 왜 연구하고 강렬하게 추적해야 하는가. 문제는 불교권에서 가야를 불교 진흥의 국가로 왜곡시켜 성역화하는데서 비롯된다. 가야가 불교의 나라인가. 전혀 아니다. 우리 나라 불교 유입의 연대도 맞지 않고 불교국의 역사 유물도 전혀 없다.(우리나라 불교유입 서기378년 고구려시대) 그러나 몇 년 전 국가적 가야사 복원 프로젝트에 수조원의 국비가 편성되면서 불교권에서 이러한 왜곡된 역사 기획을 했던 것이다. 많은 예산를 탐 낼만 하다. 급기야 김해시 기독교연합회서 왜곡된 불교 역사에 저항하고 결국 불교 성역화 사업을 무산시켰다. 너무나 잘한 일이다. 김해기독교연합회는 지난 2018년부터 가야 건국 기념예배를 매년 드리고 가야국 기독교 역사 연구를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부터 전국의 많은 기독교 역사 연구가들이 당시 가야사 전역의 일부 호남 포함 대구 경북지역의 가야 시대 기독교 유물 찾기에 나서고 있다. 이날 세미나에는 경북 영주의 산속에 버려져있는 불상 비슷한 석상이 제자 도마상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필자가 보기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었다. 판단이 어려웠다. 그러나 분명 불상은 아니었다. 깊은 연구의 숙제를 주었다. 가야문화의 많은 남김도 있다. 가야 후기 우륵이 만든 영원한 우리의 악기 가야금은 다윗의 비파 수금과 가장 엇비슷한 악기라고 평가한다. 앞으로 가야의 문화 예술 또한 무한히 재현될 전망이 보인다. 많은 담론이 있겠지만 문화의 옷을 입고 세상에 메시지를 던지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나라 가야(伽倻)가 분명히 재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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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제자 도마가 가야국 김해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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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비판할 자격 있는가?
- 최근 모정당(중립 견지에서 모 정당이라 함)의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사건이 일파만파로 확산될 조짐이다. 소위 80년대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했던 운동권 86그룹이라는 정치인 중심의 모 정당은 진보를 내세우고 민주와 깨끗함을 유전자로 삼고 있다. 실제 이들의 민주화 운동은 그 공로를 높이 인정할 수 있다. 80년대 인권이 짓밟히고 군사독재의 서슬 퍼런 때 용감하게 거리에서 민주화를 외쳤고 또한 감옥살이까지 하면서 고난을 겪은 분들도 많다. 그분들이 그동안 민주화를 거치면서 국회에 많이 진출하고 이제 한국 정치의 중심에서 나라를 이끌고 있다고 봐야한다. 이념의 교체에 따라 몇 차례 집권을 하기도 했다. 진보 이념으로 국가를 발전해 보자는 주창도 이들을 통해 많이 들었다. 보다 보편적 평등사회를 만들자는 주장도 너무 무시할 수는 없다. 문제는 진보 이념을 주창하는 이들이 오늘날 한국의 정치 중심에서 방향을 잃고 위선적 정치판을 만들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번에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은 앞으로 검찰 수사 과정에서 밝혀지겠지만 전망컨대 아수라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민주와 깨끗함의 기치가 깡그리 무너질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이다. 국민들 시각에서 그래도 대한민국이 선진국 초입에서 정치가 성숙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보편적 균형의 사회 안정을 위해 진보 이념의 정치인들이 보수 정치인들과 견제와 경쟁으로 나라를 이끌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국민의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진보 이념의 정치인들이 그동안 도덕적 우월감만 갖고 바리새인 같은 선민의식에서 많은 착각을 보여왔다. 친북좌파로 흐르고 지나친 인본주의 문화와 노동투쟁 쟁취의 문화를 양산했던 것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이번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와 같은 조직적 지능적 부패 관리로 권력을 잡으려는 추한 모습들이 이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으니 슬픈 생각이 든다. 모든 국민의 바람은 나라 지도자들이 부패문화를 없애고 공의가 살아있는 사회를 만들어주길 기대한다. 선진국이 되는 길에서 서민들의 바람은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래서 이번 사건을 보면서 그동안 운동권 정치인들에 우려가 있었지만 정말로 한국 사회에는 빛과 소금 역할을 할 리딩 그룹이 없는 걸까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영적 삶의 현장 기독교 사회는 어떨까. 교회와 교계의 지도자들은 우리 사회의 모본(模本)이 될 만큼 정결하고 건강할까. 우리가 냉정히 진단하고 회개의 기회를 삼아야 되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 필자는 교계발행 신문 한 칼럼 제목을 보고 언뜻 이해가 안 되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다. 칼럼의 제목은 ‘목사장로님들 신사임당을 좋아하지 마소서’였다. 난데없이 신사임당의 단어가 뭔가? 읽고 보니 교계뉴스와 관련 총회를 앞두고 금전이 오가는 악한 문화를 없애자는 비평의 칼럼이었다. 필자는 교계 지도자들이 총회 선거철만 되면 관행의 금전 문화가 있음을 일정 들은 바는 있다. 그러나 칼럼을 읽고 우리 기독교 교계에도 세상의 정치문화처럼 선거 때 ○○억을 써야 당선 되고 천만 원만 적게 쓰도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런 자괴 어린 푸념들이 목사·장로님들 속에서 회자될 일인가. 이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필자도 노회 총대, 총회 총대로 참석해 본 적 있으나 세세한 속을 알 수가 없다. 정치판이라고 다 그래서 될 일인가. 지금 대한민국은 정치판이 건강해지면 선진국이 되는 길은 눈 앞에 와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번과 같은 정당의 돈 봉투 살포 사건을 보고 기독교 교계 지도자들은 강한 비판과 함께 감시의 눈을 더욱 크게 떠야할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한국 정치를 비판할 자격을 잃으면 나라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타락하여 바벨론에 노예로 보내야 할 때 ‘공의’를 가장 강조했던 팩트를 우리는 성경에서 보았다. 교회가 사회 구원을 위한 길은 이웃에게 쌀 한 포대 전달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공의를 전하는 일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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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비판할 자격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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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가룟 유다의 최후(Judas' Death)-예수를 판자
- 가룟 출신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판자이다. 그의 이름 앞에 불명예스러운 오명(汚名)이 붙는다. 주를 팔았던 배신자라는 말이다(마 10:4; 막 3:19; 눅 6:16; 요 18:2). 성경은 통일왕국 유다가 이스라엘로 분리 될 때 여로보암Ⅰ세의 범죄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버리시리니 이는 그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하였음이니라 하니라”(왕상 14:16). 그는 자신만 범죄 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로 범죄하게”한 자라고 했다. 주님은 인자를 판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마 26:24). 그는 예수를 배신한 후 양심의 가책을 받아 목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 밭이라 일컫느니라”(마 27:5-8). 유다는 예루살렘 근처 힌놈의 골짜기 남쪽에 위치한 아겔다마(피 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그의 최후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행 1:18-20). 그의 사도직은 후일에 맛디아가 계승했다.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행 1:26).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비게 된 자리는 맛디아(Matthias)를 택하여 그를 가입시킴으로써 채워졌다. 그리하여 이 제자단의 수는 완결되었고 이후 결코 그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유다를 제외한 열두 제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셨을 때 처음 본 자들 속에 있었고(고전 15:5; 막 16:7) 이는 공관복음서 기자들에게서 확인 된 사실이다. 돈궤를 맡은 가룟 유다 요한은 유다를 돈궤를 맡은 도둑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 가룟 유다는 셈이 빨라서 주님은 그에게 돈궤를 맡겼다. 그는 사도 공동체의 회계를 맡으면서 공금을 횡령하는 일을 자주 했던 것 같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 밭이라는 뜻이라”(행 1:18-19). 그래서 누가는 그의 사후에 이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는 다른 제자들 몰래 불의한 삯으로 부동산을 많이 매입해 두었던 것 같다. 결국 그의 비참한 말로를 보고 누가가 이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이 같은 일은 베다니의 마리아의 집에서 잘 보여 준다. 그는 마리아가 값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는 것을 보고 이 여인을 책망하면서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라고 투덜거렸다. 마태는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마 26:8)고 하면서 분개했다고 한다. 요한은 그가 도둑의 심보로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했다. 진짜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 말 한 게 아니라 저 향유를 팔아서 그 돈의 일부를 횡령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 아까워서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향유는 금전과 달리 고정된 수입이 아니므로 가격 측정이 얼마든지 유동적이기 때문에 속여 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다. 그때 예수께서 그를 책망하면서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막 14:6-7)라며 꾸짖었다. 이때 그는 선생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이에 분노하고 괘심한 생각을 한 그는 곧 바로 유대교의 대제사장들에게 달려가서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마 26:15) 하고 예수를 그들에게 팔아넘길 것을 제의했다. 제사장들은 너무나 좋은 기회가 왔기에 즉석에서 은 30으로 흥정을 시작했다. 당시 노예가 황소에 받혀 죽었을 때 보상금으로 주인에게 지불하던 금액이 은 30이었다. 이 같은 것을 보면 유다가 돈의 액수는 고사하고 스승이 한 충고에 대한 적개심으로 예수를 팔아넘긴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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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가룟 유다의 최후(Judas' Death)-예수를 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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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굄을 얻는 자
- 굄은 유난히 귀엽게 여겨 사랑함이란 뜻인데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참 아름다운 순수한 우리의 말이다. 동생 집의 정원 가운데 밀감나무가 해마다 열매를 많이 맺고 탐스럽게 잘 자라 정말 주인의 굄을 얻고 좋은 나무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유독 마음이 가는 나무는 좋은 거름과 맑은 물을 공급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랑스러워 무엇이든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성경에 에스더라는 분이 왕후가 되기 전의 삶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굄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르드게를 보내어 에스더의 삶을 하나님의 백성 중에 고귀한 사람이 되도록 훈련을 시킨 것이다. 그가 에스더를 잘 기르고 보이지 않게 항상 도와주는 역할을 감당한 것이 결국 왕의 굄을 얻어 여성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리게 한 것이다. 물론 복음적으로 볼 때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적용된 것이지만 성령 역사임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절대 나타내지 않도록 가르치면서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지도한 것이 왕후 에스더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모든 일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만이 성공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에스더를 훈련시킨 모르드게는 베냐민의 자손 기스의 증손으로 능력의 뜻이 있고 시므이의 손자이며 야일의 아들로 그가 들으셨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인 야일은 아들 모르드게의 앞날을 밝게 하여 주님의 굄을 받게 하려는 노력이 엿보여 고금을 통하여 부모의 마음은 똑같다.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유다 왕 여고냐와 함께 모르드게가 사로잡혀 포로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르드게는 예수님의 예표로 이미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르드게를 통해 에스더가 굄을 크게 받는 자로 살아가도록 믿음의 역사를 이룬 내용을 기록하여 남긴 것이라 믿는다. 에스더의 역사적인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주님에게서 굄을 얻기 위해서는 복음으로 보혈과 십자가를 자랑하고 귀한 예물로 그분을 조용한 가운데 잘 섬겨야 한다. 에스더가 도성 수산에 나아갔을 때 궁중대신 헤개라는 분이 몰약과 향품을 주어 몸을 정결하도록 했다. 따라서 우리의 더러워진 심령을 내놓고 주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지 않으면 굄을 받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일곱 궁녀는 도우시는 성령님을 예표한 것이라 믿어진다면 에스더처럼 그분과 늘 동행하는 삶을 영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에서 믿는 자의 아름다운 처소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가족이 있는 가정과 함께 모이는 교회 역시 우리가 스스로 연단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신 불신 간에 전능자에게서 굄을 얻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이치다. 분명한 것은 사랑받을 짓을 해야 주님의 굄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성도는 에스더처럼 자기 자신을 직장과 교회뿐만 아니라 어떤 장소에서도 절대 나타내어서는 안 된다. 어렵더라도 나를 죽이고 주님만 드러내는 믿음이 절대 요구된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기만 하면 우리 주님의 굄을 얻는 자가 틀림없이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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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굄을 얻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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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수고의 자세 (고전15:57-58)
- 우리가 흔히 주고받는 인사말 중에 “수고 하세요” 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일터를 방문했다가 나올 때나. 관공서에 가서 일을 보고 나올 때 그냥 나오기가 뭐해서 일반적으로 “그럼 수고 하세요”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 인사말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인사를 할 때는 그 말을 써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 속에는 “욕을 보세요.”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욕(辱)이기 때문입니다. “욕보세요.”라는 말은 엄청난 “욕”(辱)입니다. 옛날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우리 조선의 처녀들이 오랑캐들에게 끌려가서 윤간(輪姦)을 당한 것을 가리켜서“욕을 당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제시대(日帝時代) 때 우리 조선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로부터 착취(搾取)를 당하고 학대(虐待)를 당한 것을 가리켜서 “욕을 당했다”라고 합니다. “수고 하세요”라는 말 속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인사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수고라는 한문을 다른 글자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성취할”(遂) 字에다가 “오로지 고”(固) 字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로지 노력해서 믿음을 성취하자”는 뜻이며, “오로지 노력해서 맡겨주신 직분을 잘 감당하자”는 뜻입니다. 욕(辱)을 보자는 수고가 아니라 직분을 잘 감당하고 맡겨 주신 일을 성취하자는 수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수고를 할 때 큰 보람이 있고 하나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겨주는 것은 하나의 계급이거나 명예가 아닙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수고하라고 맡겨주는 것입니다. 수고를 하되 어떤 자세로 수고해야 할까요? 첫째로, 기쁨으로 수고해야 합니다.(고전15:58) 둘째로, 겸손으로 수고해야 합니다.(고전15:10) 셋째로, 열심으로 수고해야 합니다.(골1:28,29) 우리의 수고로 주님의 몸 된 온전한 교회가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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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수고의 자세 (고전15: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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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 29: 높임말(경어), 이대로 좋은가? (1)
- I. 서언(序言) 종종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 치과를 찾은 적이 있었다. 그 때 간호원으로 부터 “목사님이 앉으신 의자가 내려가시겠습니다.” 라는 말을 들었다. 이런 말은 한 번 두 번 들었던 것이 아닌 자주 듣는 말이기도 하다. 또 은행에서 돈을 찾을 때 “선생님의 돈이 나오십니다.” 라는 말도 종종 듣는다. 말하는 이로서는 최대한 존대 말로 상대방을 높이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높임말의 원칙에서 본다면 이 말은 너무나도 어색한 말이다. 이런 차원에서 앞으로는 평소에 사용하는 높임말의 바른 사용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높임말의 구분과 원칙 1. 구분의 필요성: 높임말을 제대로 잘 사용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필자 자신도 때로는 높임말을 해놓고 지금 바로 말했는가? 라는 의문점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가? 이유 중 하나는 높임말에 대해서는 우리 한국어가 세계에서 가장 발달되어 있으며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높임말은 아주 다양하고 정확하게 바로 사용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학습이 없으면 우리가 한국인이지만 높임말을 바로 정확하게 쓴다는 것이 힘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고 여러 계층의 교인들을 만나는 목회자로서는 이런 면으로는 너무 많은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다. 2. 올바른 높임말의 기초적인 원칙들: 높임말에는 여러 원칙들이 있지만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논하기로 하고 우선 위의 서두의 잘못 사용된 높임말을 분석해 보자. 먼저 “목사님이 앉으신 의자”까지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의자가 내려가십니다.”란 말은 사물의 하나인 의자를 높이는 격이 되기 때문에 너무 잘못된 표현이다. 바른 표현은 “목사님이 앉으신 의자가 내려갑니다.”라고 해야 올바른 말이 된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슈퍼에 가서 커피 한잔을 주문하면서 “커피 한 잔 주세요"라고 했다. 그 때 주인이 “예, 3천 원이세요.”라고 대답했다. 그 때 손님이 “그러면 시럽도 좀 넣어 주세요”라고 요구했다. 이때 주인이 “예, 시럽은 저쪽 테이블에 있으세요” 라고 대답했다. 여기 이 대화에서 잘못된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인이 “3천 원이세요”, “테이블에 있으세요”라는 대답에서 “~이세요, ~있으세요” 라는 말이다. 이는 높일 필요가 없는 사물을 존대함으로서 “주체 높임말의 오류법”이란 원칙을 어기고 잘못 사용한 경우이다. 이상과 같이 실체를 알 수 없는 어색한 높임말이 우리 사회의 언어문화에서 너무나도 많이 범람하고 있다. 이런 경우는 교회의 성도들 간의 대화에서도 얼마든지 많이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그러면 언제부터 이러한 현상이 생겼을까? 국어학자들에 의하면 이런 변형된 존대어는 6.25전쟁 이후, 산업화 초기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여 오늘에까지 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급격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봇물처럼 밀려오는 외래어와 새로운 용어들이 등장함으로서 우리의 언어체계 뿐만 아니라 민족 고유의 높임말까지 변형시키게 된 것이다. 특히 이러한 잘못된 존대어의 주범은 “TV와 인터넷, 스마트 폰이다”라고 할 만큼 이런 기기들의 영향이 아주 크다. 여기에다 연예인, 특히 개그맨들의 어법에 맞지 않는 유행어의 남발과 인터넷 언어 등의 남용이나 오용, 무조건 외래어를 사용해야 유식해 보이는 언어 사대주의 등이 우리 고유의 기존의 높임말에도 잘못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III. 결 어 이상과 같은 잘못된 높임말은 일반 사회뿐만이 아니라 앞에서 밝힌 대로 교회에서도 역시 많이 통용되고 있는 경우들을 많이 듣고 본다. 이러한 차원에서 앞으로 구체적으로 높임말의 체계와 실례를 들어서 논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올바른 높임말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생활 가운데서도 매우 유익할 것이다. 특히 이러한 높임말의 올바른 사용은 우리 모두를 덕과 인격을 갖춘 품위 있는 기독교인으로 세워 줄 것이며, 또 하나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귀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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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 29: 높임말(경어), 이대로 좋은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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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기도는 부르짖어야 한다
- 기도는 약속을 붙잡고 이미 이루어 진줄 믿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회개다. 확신 있는 기도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회복의 약속을 다 해 두시고 난 다음에 말씀하신 것이 기도다.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4-27)라고 하신 후에 그래도 기도하라고 하신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36:37)라고 하셨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을 그래도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에게도 마찬가지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왕 때 활동을 했다. 유가가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선지자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러니 멸망에 대한 메시지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회복의 메시지를 하셨다. 특히 예레미야 25장과 29장에서는 70년 후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올 것을 구체적으로 선언하셨다. 특히 30장부터 33장은 집중적으로 회복의 메세지를 한다. 다시 회복시키시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하신다. 물 없는 동산 같은 곳을(사1:30) 물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겠다(렘31:12)라고 하신 후 그래도 기도하라고 하신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을 쉬지말고 기억하고 믿고 기도해야 한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비밀의 문이 열리면 삶 전체가 변화된다. 믿음의 사람은 기도가 바뀐다. 행동도 바뀐다. 목적이 바뀐다. 하나님의 뜻이 땅이 이루어지는 것이 목적이 된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통한 회복임을 잊지 말자. 믿음을 갖게 되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성령받기는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심을 더 많이 믿자는 말이다. 성령 받는 것인 믿는 것이다. 성령받기는 성령께서 내 안에 임마누엘 하셨음을 믿기다. 방언 말하기도 성령님의 언어가 이미 나에게 있는 것 믿는 것이다. 방언 말하기는 이미 방언할 수 있음을 믿기다. 그러면 방언을 말할 수 있다. 신구약에 성령을 주시겠다고 했다. 우리 편에서는 받는 다고 하는 것이다. 주시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으라고 이미 손을 내 밀고 계신다. 받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믿는 자의 책임은 하나님의 약속을 인정하는 것이다. 은혜는 항상 내려지고 있다. 은혜로 구원을 주시고 계시지만 은혜만으로는 구원을 못 받는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 이미 주시고 계심을 믿고 받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주셨다. 기도가 그렇다. 아멘하고 받으면 된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다(막11:22). 그 다음 구절에 하나님을 믿는 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라고 하셨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되리라”(막11:24)라고 대박의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이 새 언약을 맺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두시겠다고 하신다(렘31:31~33). 우리가 볼 땐 내가 두는 것 같이 보인다. 이것이 은혜와 믿음의 관계다. 은혜 없이는 믿을 수 없다. 믿음 없이는 은혜가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6-27)라고 하신다. 이 말씀을 붙잡고 나는 선포하며 믿는 훈련을 쉬지 않고 하려고 한다. “나에게 부드러운 마음이 있다.” “나에게 새 영이 있다”고 계속 읊조리고 주님께 고백하며 나에게 이야기 해 준다. 새 영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주님이 내가 주겠다고 하셨다.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고 하셨다. 주님이 우리를 부드럽다고 하신다. “주님, 저에게 부드러운 마음이 있습니다.”고 고백하는 것이 기도다. “하나님 나는 부드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새 마음이 있습니다. 나는 부드러운 사람입니다.”라고 믿고 고백한다. 이것을 놓치면 굳은 사람으로 돌아 갈 수 있다.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나는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나에겐 부드러운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믿음이다. 은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성경대로 믿자. 믿음으로 기름부음이 나에게 있음을 믿을 때 기름부음을 유지할 수 있다. 부어 주겠다고 했으니 부은바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2:28-29)라고 했으니 우리가 장래 일을 말한단다. 이상을 본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7-39)라고 했다.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가, 안 나오는가? "나에게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외쳐도 좋다. 아니 외쳐야 한다. 나는 말마다 외치고 감사한다. 너무 감사하다. 또 “영원토록 함께하리라”고 했으니 나는 하나님이 영원토록 함께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나는 성령의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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