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Home >  오피니언
-
[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
[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
[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
[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 오피니언
- 설교/강의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 오피니언
- 칼럼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 오피니언
- 기고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
- 오피니언
- 성경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 오피니언
- 기고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
[오성한 목사] “다 믿어라”의 비밀
- 구약의 말씀을 바꾸어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다 지켜 행하라”를 “다 믿어라”로 바꾸어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믿으면 행하게 되어 있다. 백집사님께서 전도하러 갔다가 그분께 과실 수 네 그루를 얻어와 교회당 화단에 심었다. 어디서 생겼느냐고 했더니 전도하러 갔다가 얻은 것이란다. 농사하시는 분도 아닌데 어디서 생겼느냐고 했더니 구청에서 식목일을 맞아 과실수를 나누어 준다는 말을 듣고 구청에서 얻어 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구청에서 나무를 나누어 준다는 말을 듣고 믿음으로 구청에 갔다. 나무를 얻어 온 분은 들음에서 믿음이 생겨 구청으로 가서 나무를 얻어 온 것이다. 듣고 생긴 믿음은 행함을 가져왔다. 성경에 다 지켜 행하라는 말을 믿음의 음성으로 들어야 한다. 예수께서 해 놓으신 것을 다 믿으라는 말로 바꾸어 듣는 귀가 필요하다. 우리 힘으로 지켜야겠고 생각하면 실패와 좌절뿐이다. 예수께서 이미 이루셨음을 믿고 감사와 감격으로 받아들일 때 행함은 즐거움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다 지켜 행하라”는 말씀을 “주님이 하신 것을 다 믿어라”는 뜻이다. "행하라"를 "믿어라"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고 하셨다. 구약도 복음의 소식이다. 구약에서 사람은 철저히 망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신약도 마찬가지지다. 신구약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분들은 신약적인 예수를 믿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구약을 믿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똑 같다. 해석을 잘못해서 그렇다. 구약도 복음이다. 신약도 복음이다. 신구약 모두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회복의 약속을 믿으라는 것이다. 구약을 율법으로만 보면 안 된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고 그랬다(롬3:20). 예를 든다면 요즘 식당에서 담배피우는 것이 죄다. 화장실에서 흡연을 하면 죄다. 옛날에 담배 연기 때문에 식당가기 힘들었다. 옛날에도 담배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줬다. 그러나 법이 없을 때는 흡연이 잘못인 줄 몰랐다. 따져 보면 법이 없을 때도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답배를 피우는 일은 죄였다. 다른 사람이 담배 연기를 마시도록 한 일은 잘 못된 것이다. 그러나 법이 없을 때는 그런 의식이 없었다. 법이 정해지니 죄인 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행복하게 살길 원하신다. 마음을 알고 율법의 요구를 저절로 실행하려면 사랑해야 마음을 알게 되고 저절로 실행하게 된다.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니다. 율법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우리에게 신부 마인드가 생기면 신랑인 하나님의 마음인 율법이 우리에게 오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가 있다. 사랑하지 않고는 마음을 진정으로 알 수 없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마음을 읽고 따라하려고 애쓰는 것은 무엇인가 얻을 것이 있기 때문이다. 얻지 못할 때는 즉각 그만 둘 수도 있고 원망하게 된다. 누가복음 15장의 첫째 아들이 그러했다. 수년 동안 아버지 옆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아 주지 않았다고 불평을 한다.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아버지 옆에서 열심히 일만 했다. 아버지가 함께 한다는 행복을 전혀 모르고 열심을 내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15:31)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사랑 없이 행하려고만 하는 것은 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잘못된 지식의 열심히 되어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할 수 없게 된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오성한 목사] “다 믿어라”의 비밀
-
-
[오태열 목사] 다 이루었다
- I. Kant(1724-1894년)는 죽음이란 자기라는 개인의식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새는 죽는 순간에 슬픈 소리를 내지만 사람은 가장 착한 말을 한다고 하였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최후의 순간만은 선하게 되며, 제아무리 거짓된 자라도 죽는 순간만은 진실해 진다는 말이다. 유언이란 순간적인 생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생을 통하여 마음 깊이 간직하였던 생각이 진실된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언은 그 사람의 생의 목표가 되고 가장 귀한 진실이 되기도 한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는 임종 직전에 말하기를, 아 사랑하는 이들이여 아무쪼록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고 하는 이 한마디 말은 명심해주기를 바라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석가의 인생관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가비라 궁전을 떠나 “生老病死”(생노병사)에서 해탈하려고 평생을 고행하였다.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하고 왕궁을 떠난 것은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더 좋아하였는데 그 이유가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같은 왕자의 신분으로 궁전을 떠나 고행, 고난의 길을 택한 이유가 얼마나 대조적인가?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임종 직전에 “다 이루었다”라고 하였다. 이는 슬픔과 아쉬움이 없는 만족감과 승리의 환호성이다. 인류의 역사이래 그 누가 이런 말을 하였는가? 33세의 젊은 나이에 겨우 12명의 제자를 양성하셨지만, 저들의 배신과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음모로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고 죽어가는 순간에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많은 업적을 남겨 공로를 인정받아 후세 사람들이 기념비도 세워주고 추모해야 할 정도가 되어야만 다 이루었다고 고백할 수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의 제갈량은 신출귀몰한 모사꾼이었다. 숙적 위나라의 사마의 와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이던 때에 사마의 삼부자를 “호로곡 계곡”으로 몰아넣고, 화공작전을 펼쳐 꼼짝없이 죽게 만든다. 사마의는 사마사, 사마소 아들 형제를 부등켜 안고 제갈량의 작전에 걸려든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고 울부짖을 때, 하늘에서 갑자기 소낙비가 내려 사마의 삼부자는 살아 도망침으로 화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간다. 언덕 위에서 이를 보고 있던 제갈량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일을 도모한 것은 사람이나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 “謀事在人 成事在天”(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결과를 하늘에 맡기고 내가 할 일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다. 제갈량이 결과만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말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의미는 오늘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결과를 하나님 뜻에 맡긴다는 뜻이다. 우리는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은 누구나 빌립보서 3:12절의 바울의 고백 대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는 미완성의 삶이며, 아쉬움과 유감스러운 삶이다. 한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무엇을 이루었고 무엇을 잃었는가? 중요한 것은 내 생의 마지막 고백이다. “다 이루었다”는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어떤 말을 남길 것인가? 유언이 내 삶의 핵심이며 인생관이 됨을 명심해야 한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오태열 목사] 다 이루었다
-
-
[김경헌 목사] 지팡이니이다!(출4:1-4)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심장부에 넣어 보호하셨습니다. 보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위용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출범할 하나님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출애굽이란 성도 개인에게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출애굽이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의 출범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80년 전에 구체적으로 그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아름답다, 잘 생겼다”고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소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출2:1-2) 모세의 어머니와 누나의 치밀한 계획 하에 모세를 바로의 궁정에 침투시키게 됩니다. 4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는 어느 정도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출애굽이라는 거사를 실행에 옮겨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모세는 상상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였습니다. 불 신앙과 반역의 역사는 항상 에덴동산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가 두려워 미디안으로 도망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또 다른 40년 동안의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못하겠다고 버팁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보여주신 표적이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과 손에 문둥병이 생긴 것입니다. 얼핏 보면 모세가 빼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확인에, 확인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의 꼬리를 잡으니 지팡이가 되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애굽의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할 수 있는 요술이요, 마술입니다. 이스라엘을 탈출시키는, 해방시키는, 출애굽시키는, 우리의 입장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장면에 하나님께서는 왜 애굽의 요술사도 할 수 있는 표적을 모세에게 보이고 있을까요? 모세의 사역 전부는 지팡이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작부터 지팡이, 10가지 재앙도 지팡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가르던 지팡이의 장관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습니다.(출14:16) 지팡이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지팡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서 떨어지니 뱀이 되었습니다. 구지 성경은 땅에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던지면 당연히 땅에 떨어질 것인데 성경이 왜 불필요하게 땅에 던졌다고 표현하고 있을까요? 땅은 뱀의 주 무대입니다.(창3:14) 자신을 지키는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자신을 물고, 자신을 죽이는 뱀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져 땅으로 가는 순간 뱀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장로가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장로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가 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출4:4) 뱀 꼬리를 잡았다가는 순식간에 물려 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독이 센, 가장 위험한 뱀이었던 우리의 꼬리를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물려 죽으셨다. 말씀을 선포하고 목회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뱀꼬리를 잡는 사역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뱀이었던 성도들이 목회자의 손에 들려지면 지팡이가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라는 지팡이, 교회라는 지팡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목회자들을 향한 매우 무서운 경고가 있음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를 잘못 사용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민20:11-13) 목회자가 손에 들려진 성도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의 손에 들려진 교회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는 주님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입니다. 모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지팡이는 지팡일 뿐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주님의 지팡이가 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루신 구원은 완전합니다. 오늘의 목회자들은, 교회를 위해 세움 받은 자들은 주님의 손에 들려진 구원의 지팡이입니까? 땅에 떨어져, 땅을 기어 다니며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입니까?
-
- 오피니언
- 설교/강의
-
[김경헌 목사] 지팡이니이다!(출4:1-4)
-
-
[박봉석 목사] 이러한 때에도 나를 믿겠느냐?
- 한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남미의 아우카라는 곳의 인디언 마을에 가서 선교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선교지의 사정상 한 동안 서로 떨어져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받았습니다. 남편이 선교하는 인디언 지역에 대홍수가 나서 그 지역은 완전히 물바다가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1년 동안 온 힘을 다해서 건축하여 거의 완성단계에 있던 선교교육센터가 몽땅 홍수에 무너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부인 엘리자베스는 남편이 1여 년 동안 이 선교센터를 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그 모든 노력과 수고의 결실을 볼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마지막 즈음에 송두리째 물에 휩쓸려가 버렸던 것입니다. 남편이 얼마나 실망할까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이 소식을 접하고는 망연자실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제 남편이 무슨 잘못을 한 것입니까? 아니면 제가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제가 이해할 수 있게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런데 얼마 후 남편으로부터 소식이 왔습니다. 남편은 지금 그곳의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소식의 끝을 이렇게 맺고 있었습니다. “절망의 눈으로 선교교육센터를 무너뜨리고 도도히 흘러가는 홍수의 물결을 보고 있는데 주님이 음성이 들려왔소. ‘나의 종아, 이러한 때에도 나를 믿겠느냐?’ 바로 그 때 내 심령이 열리며 나는 감격하여 무릎을 꿇었소. ‘주여, 내가 믿나이다.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주님을 향하여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소.” 독자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어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내 기대대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순적하게 이루시는 하나님만을 믿었던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전혀 안 될 때에도, 내가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일이 이루어져 갈 때에도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기대와 소망이 다 무너질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지식과 지혜를 가진 존재라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존재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은 결코 무한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해되어지는 신은 신이 아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무한 세계의 존재이고 우리는 유한세계의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과는 다른 무한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에서 나를 이해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으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존재인 하나님에 대하여 할 일은 따지고 증명하여서 다 이해해보려는 교만이 아니라 어떠한 때에도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내가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있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아시고 계십니다. 그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삶의 상황 가운데서도 낙망하지 않고 그 하나님을 믿고 묵묵히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이러한 때에도 나를 믿겠느냐” 그 하나님의 물음에 “예, 하나님 믿습니다. 어떠한 때에도, 아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때에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대답이 독자 여러분의 대답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
- 오피니언
- 칼럼
- 신앙과 삶
-
[박봉석 목사] 이러한 때에도 나를 믿겠느냐?
-
-
[신재철 목사] 안녕하세요. 벤츠 두 대입니다
- ‘어떻게 이렇게까지 쓰레기가 쌓일 수 있지?’ 전임자의 소홀한 관리로 아파트는 너무 지저분했다. 70대 어르신이 관리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리수거장은 얼마나 묵었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 쓰레기로 가득했다. 나는 관리소장이 된 후 며칠간 쓰레기만 치우고 있다. 처음에는 재활용품과 쓰레기를 분리하다가 포기하고 마대에 쑤셔 담기 시작한다. 쓰레기를 뒤적이다 갑자기 튀어나온 쥐새끼에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쥐와 눈이 마주친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몸살이 날 지경이었지만 ‘나는 군인이다.’를 속으로 되뇌며 3주를 그렇게 보냈다. 결국 1톤 트럭 두 대가 와서 폐기물을 실어나른 후 나는 비로써 쓰레기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다. 땀과 먼지에 범벅이 되어 퇴근하면 더러운 몸을 소파에 잠시 기댄다. 먼저 씻어야 한다는 상식을 모른 체하며 호흡을 정리한다. 개척교회 목사인지, 노동자의 삶이 시작된 것인지 헷갈리며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맞다! 오늘 수요일이지?’ 요일 지나는 것도 모르고 살아간다. 아직 개척 후 예배가 시작되지 않아 사임한 교회 수요집회 찬양 인도를 당분간 이어가기로 했다. 씻고 나서야 한다. “여보, 나 수요예배 가기 싫어.” 목사가 할 말인가. 사실 평생 처음으로 해본 말이다. 가기 싫었던 적이 없지는 않지만 차마 입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미 통제력을 잃은 정신이 실언을 허락해 버렸다. 아내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 수요일에 금요일에 교회에 나오는 분들은 대단한 헌신을 이미 드리는 것이었다. 퇴근 후 교회로 달려온다는 것만 해도 엄청난 믿음의 반응이고 신앙이라는 것이 체감되었다. 이제야 알게 되다니. 오늘 나의 투정은 큰 스승이 되었다.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치우고 나서야 관리소장의 일상 업무를 익히게 되었다. ‘행정, 관리비 정산, 협력업체 사장님들과 업무 조율, 세 층의 주차장 청소와 매일 분리수거장 정리.’ 기술이 크게 필요치 않았고 성실하게만 감당하면 될 일이다. 그러고 보니 중소형교회 부목사 업무와 상당히 닮았다. ‘소소한 건물 관리, 행정, 민원 정리.’ 목회활동을 제외한다면 거의 부자(父子) 관계처럼 많은 부분이 교회 업무와 닮아있다. 상대해야 할 사람이 교인이 아닌 입주민이라는 것 정도가 차이일 뿐? 하지만 이는 내 삶을 흔들어댈 정도로 엄청난 차이라는 것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새로 오신 소장님인가 보죠? 안녕하세요. 저 벤츠 두 대입니다.” 싸늘하고 앙칼진 음성이 쓰레기를 처리하고 있는 내 뒤통수에 꽂혔다. 처음 보는 젊은 할머니 한 분이 서 있었고 호의적인 태도라고는 1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누구인가. 교회 밥이 얼마인데 이 정도 느낌에 미소를 잃을 수는 없다. “안녕하세요. 몇 호 입주민이세요?” 자신의 정체를 벤츠 두 대로 표현하는 사람에게 나는 지극히 기초적인 정보를 요구했다. 상대가 어느 세대 입주민인지를 알아야 했으니깐. 사실 벤츠 두 대는 내게 아무 감흥을 주지 못했다. 차량 정보를 밝힘으로 내가 더 겸손하기를 바랐던 것 같은데, 요즘 젊은 세대를 모르시는 듯하다. 상대가 벤츠를 타든 아우디를 타든 젊은 세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경차 스파크를 타도 상대의 외제 차에 기죽을 이유는 없다. ‘난 나니깐.’ 의도대로 내가 굽혀주지 못해서일까? 아주머니의 2차 공격이 이어진다. “나 12층 살아요. 알죠? 복층 50평.” 그렇다. 40세대 중 가장 위층 네 집은 가장 큰 50평이다. 벤츠 공격에 이어 아파트 크기로 나를 압도하려 했으니 이 역시 유효타가 되지 못했다. 내게 50평 세대는 관리비를 더 내야 하는 입주민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 깨닫게 된다. 조금 숙여주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 상대를 배려하는 것임을. 재산공개를 첫인사로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미처 적절한 대처를 못 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몰랐던 것이 하나 더 있다. 이 아주머니가 우리 아파트의 빌런(villain)이며 나와의 악연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깊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신재철 목사] 안녕하세요. 벤츠 두 대입니다
-
-
[하수룡 장로] 유 산
- 얼마 전에 아버지가 남긴 재산 때문에 큰아들과 작은아들 간에 다툼으로 살인사건이 터진 것을 보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 적이 있었다. 물론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일을 잘 처리했다면 큰 문제 아닌데 어른이 훌쩍 떠나버리고 나니까 큰일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몇 년 전에 필자가 잘 아는 친구에게 살아 있을 동안 두 아들에게 보유한 재산을 적당하게 잘 배분해야 나중에 후환이 없다고 했더니 일을 처리하여 자녀 간에 약간의 불평은 있었으나 서로를 인정하고 협력도 잘 한다고 했다. 물론 재산은 중요한 물질적인 유산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정신적인 유산을 잘 물려주어야만 미래가 있는 것이다. 윗대가 남긴 가치 있는 정신적 유산인 믿음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잘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유산 중에 유산이다. 현대는 젊은이들이 하나님보다 세상 쪽에 더 마음이 쏠려 있어 자칫하면 하나님을 멀리할 우려가 있어 더욱 그렇다. 현재를 사는 부모들이 신불신간 자녀들에게 공부를 잘하여 세상에서 잘되기만 바라기 때문에 자녀들이 성공한 후에 가정과 사회에 문제가 된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만 가치를 두다 보면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친다. 평소 쉽고 편하게 사용하는 우리말 한글만 해도 그렇다. 조상이 물려준 좋은 유산인데도 너무 소홀히 다루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진정 과학적인 한글은 소리글자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자산으로 유네스코는 역사의 유산으로 남기려 한다. 일제강점기에도 평양은 제2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기독교가 부흥했던 곳으로 웃어른이 믿음의 유산을 자녀들에게 남기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여겼다. 80년 이상을 공산 독재 속에서도 신앙의 자유가 전혀 허락되지 않는 북한 땅이지만 아직도 지하교인이 20만이 훨씬 넘는다고 하니 정말 경이롭다. 믿음의 선배들이 믿음이라는 유산을 물려주어 지하 가정교회가 건재해 있는 것은 놀랍기보다 고마워 눈물이 날 정도다. 최근 탈북하여 목사의 부인이 된 김은진 씨가 수많은 북한 기독교인들의 참혹한 현실을 소상히 밝히는 것을 보고 정말 가슴이 아팠다. 독재 치하에서 그 자매의 부모님은 할머니의 올바른 신앙관으로 공산주의의 압제 속에서도 기독교 집안끼리 사돈을 맺어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살아있는 믿음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할머니의 독실한 신앙심 때문에 자녀손들에게 믿음을 유산으로 남기고 떠나야겠다는 강한 집념으로 최근까지 비밀리에 성경을 가르치고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도록 한 것은 대단하다. 북한 보위부의 수사가 시작되자 가족들의 안위 때문에 성경책을 태워 흔적을 없애고 살아남기 위해 온갖 지혜를 발휘했다. 그러나 결국 오지로 추방당하여 인간 이하의 삶을 살다가 목숨 걸고 탈북하여 지금은 전 가족이 자유의 품에 안긴 사실에 온 마음으로 박수를 보낸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신앙의 자유가 없고 인간다운 삶이 없는 암흑의 땅에서도 하나님을 신앙하고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가르친 어른들의 아름다운 믿음의 유산이 그 후손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게 하신 것이다. 최고의 자유 속에서 후손이 잘되길 바라는 성도인 우리는 과연 무엇을 확실하게 유산으로 남겨야 할지를 도전받아야 한다.
-
- 오피니언
- 초장칼럼
-
[하수룡 장로] 유 산
-
-
[민귀식 목사]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계 3:7-13)
- 서론 2023년 경남기총이 주관하는 2월 미스바 대성회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모든 성도들 위에 놀라운 은혜와 평강이 차고 넘치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오늘 지금의 튀르키예 서쪽인 소아시아 지방에 흩어져 있었던 일곱 개의 교회 가운데 우리 주님으로부터 넘치는 칭찬을 받았던 빌라델비아교회의 아름다운 사역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지금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하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대를 마지막 종말 시대라고 말합니다. 말세지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과 같이 종말시대의 많은 징조가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디모데후서3:1-5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교회 안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무관한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으며 만몬이즘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예수 없는 인간 중심주의가 판을 치고 있으며 물량주의와 세속적인 의식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랑, 자기 과시가 판을 치고 있으며,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각종 현상들이 온 교계 속에 나타나고 있으며 끔찍한 사건과 사고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18세기 계몽주의의 각종 전통과 정신은 완전히 무시되고 인간중심의 포스트모던이즘이 판을 치며 뉴에이지운동이 만연한 가운데 있습니다. 유일신 사상이 거부되며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며 절대적 선을 거부하고 상황과 환경에 따라 행동할 것을 강조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만 할까요? 이 질문에 관해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13:11-14 속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할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할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새롭게 무장하여 시대적 사명을 바로 감당할 때입니다. 그래서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했던 교회, 우리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교회, 소아시아 지방에 있었던 빌라델비아교회를 소개하면서 이 시간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주후 95년경에 소아시아 지방에는 일곱 개의 교회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 일곱 개의 교회 이름이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입니다. 이들 일곱 개 교회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일곱 개 교회 가운데 우리 주님의 책망이 전혀 없고 칭찬만을 받은 교회가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증거 하면서 주님께 전혀 책망이나 비판을 받지 않은 교회, 오직 칭찬만 있는 교회, 빌라델비아교회의 내면을 깊이 살펴보면서 이 시간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빌리델비아교회는 오늘날의 알라쉐히르라는 곳으로 사데지방에서 동남쪽으로 약 48Km 정도 떨어져 있는 지방에 위치한 교회로 상업이 성행한 도시요, 동방의 관문으로 불려진 도시에 위치한 교회로서 주변 산지는 포도농사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이런 도시와 농촌이 혼재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빌라델비아교회의 내면을 살펴 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빌라델비아교회는 “열린 문을 가진 교회”입니다. 공산주의자로 삶을 살던 사람, 히틀러를 추종했던 사람, 하지만 이들의 사상과 이념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고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여 지지의 땅 뉴질랜드에 정착하고 난 이후, 우리 인류역사 속에 아주 중요한 책을 남긴 칼 포퍼(Karl. Popper.1902-1994), 그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이라는 놀라운 책을 통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주장이 과학적인 타당성을 지니려면 내 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고의 개방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의미있는 주장인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가 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해 가기 위해서는 폐쇄적인 사회가 아니라 개방적인 사회, 열린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폐쇄적인 사회가 아니라 열려 있는 사회공동체임을 들어내는 말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몇 가지를 살펴보면 KBS에서 진행하고 있는 열린 음악회를 비롯하여 교회 이름을 열린문 교회로 사용하는 교회들이 많고 교회안에 열린 예배, 열린 공간, 열린 교육, 열린 당회, 열린 학교, 심지어 몇 년 전에는 ‘열린 우리당’이 우리나라 정치의 중심에 서서 그 사명을 감당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열려 있다’고 하는 말은 ‘개방성’을 뜻하며, ‘소통’을 뜻하고 ‘긴밀한 교제와 대화’를 뜻하는 말씀으로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아주 좋게 평가하는 표현입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현대 사회에 아주 잘 맞는 모습을 취한 공동체로 앞서가고 있는 민주주의 공동체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말입니다. 본문 7-8절에 보면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 속에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가 누구일까요? 절대 다수의 신학자들은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한 절대적 권한을 가진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구원의 예수님이 빌라델비아교회에 열린 문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교회에 들어가기만 하면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기도의 응답을 받고 구원의 기회를 얻고 수많은 사람이 몰려와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고 성도들이 축복의 기회를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가 열린 문을 가졌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 중심에 모셨다는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되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움직인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10:7-10속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인이 되셔서 그 뜻대로 교회를 세워간다는 말씀입니다. 주님 중심의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십니까? 사람입니까?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까? 힘있는 사람들의 뜻에 따라 교회가 움직이고 있습니까? 우리가 한국교회를 바르게 진단하면서 회개할 바를 회개하고 바르게 세워 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빌라델비아교회가 열린 문을 가졌다는 말씀은 기도하는 교회라는 말씀이요, 기도의 능력을 맛보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두손 모아 기도할 때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이 나타나고 기적이 일어나고 성령의 기름부음이 나타나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33:2-3속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성도들이 부르짖어 기도하는 교회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나며 크고 은밀한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7:7-11속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성도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고 있는 교회가 열린문을 가진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빌라델비아교회가 열린 문을 가졌다는 말씀은 새로운 성도들이 많이 찾아오는 교회라는 말씀이요, “활발하게 전도하며 선교하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감당하신 세 가지 사역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이요,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이요, 각종 병자와 연약한 사람을 고치시는 사역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마태복음9:35속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사역을 열심히 감당하신 것처럼 빌라델비아교회가 선교하고 전도함으로 구원받는 사람이 많이 교회로 몰려온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4:1-2속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했는데 이 말씀과 같이 열심히 전도함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교회, 날마다 생명구원을 위해 힘쓰고 애쓰는 노력하는 교회가 열린 문을 가진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이같은 교회가 시대적 사명을 바로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경남지역의 모든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경남지역 모든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이 간증하기를 “나는 교회에 출석하고 난 이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나는 우리교회에 출석하고 난 이후 각종 기도의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나는 우리교회에 출석하고 난 이후 인생을 사는 삶의 의미와 보람을 갖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간증이 넘쳐나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같은 놀라운 간증과 구원의 은총과 기도의 응답과 넘치는 축복이 교회를 출입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차고 넘치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빌라델비아교회는 “주님의 칭찬을 받은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는 어떤 교회였기에 주님으로부터 책망할 것이 없는 교회였을까요? 넘치는 칭찬만 받게 된 근거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내용을 오늘 본문 속에서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확인해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첫째, 작은 능력으로 우리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킨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속에서 말하고 있는 ‘작다’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미크란(micran)’이라는 말로서 영어로 표현하면 마이크로(micro)가 됩니다. 바로 ‘마이크로’라는 말은 “축소된 것, 아주 작은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마이크로 버스(micro bus)’라는 말은 '아주 작은 버스'를 나타내는 말이요, ‘마이크로 필름’이라는 말은 '아주 작게 축소 된 필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처럼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능력’, 즉 마이크로 파워(micro power)를 가지고 있었지만 놀라운 일, 원더풀 파워를 들어낸 교회라는 말입니다. 주어진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열심히 일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힘쓴 교회였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작은 능력이라는 말은 물리적 힘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 교회 구성원인 교인들의 신분이나 지위나 재산 등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모습을 통하여 자랑하거나 내 세울 만한 대단한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교회는 넘어지거나 실족하지 않고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사명을 잘 감당했다는 말씀입니다. 선교에 대한 사명과 사랑실천에 대한 명령을 잘 지켰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이 세상을 떠나 승천하기 직전,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마태복음28:19-20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명령하신 이 선교의 명령을 그 어떤 교회보다 잘 감당했다는 말씀이요, 사명을 열심히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13:34-35에서 말씀하신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사랑실천의 말씀, 사랑실천의 명령을 잘 지켰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빌라델비아교회는 주님이 주신 말씀과 명령에 순종했던 것으로 주경학자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들 신학자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목사입니다. 사실 ‘빌라델비아교회’라는 명칭도 그래서 지어졌는지도 모릅니다. ‘빌라델비아’라는 말은 “형제 사랑”이라는 뜻으로 ‘필로스(philos)’라는 말과 ‘아델포스(adelpos)’라는 말이 하나로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바로 이름 값을 한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이 빌라델비아교회가 세워져 있는 지역은 버가모왕국에 속한 도시였습니다. 오래 전 버가모왕국을 다스린 유메네스 2세는 아주 호전적인 사람으로서 전쟁터에 나갈 때마다 정치력과 행정력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자신의 친 동생이었던 앗탈로스 2세(Attalos Ⅱ, BC159-138)에게 국내정치를 다 맡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민의 지지도가 높았고 인기가 많았던 그를 당시 로마정부가 이용할 목적으로 왕위에 오를 것을 충동질 했지만 앗탈로스 2세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자신의 형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르쳐 “앗탈로스의 형제애”라고 합니다. 이같은 아름다운 형제 사랑의 전통을 이어 오고 있었던 버가모 왕국의 국민들은 빌라델비아교회라는 이름을 지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형제들로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껴주고 서로 신뢰하며 서로 연합하면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자 하는 아름다운 소망을 담은 교회로 발전해 나아가기 위하여 빌라델비아교회로 명명했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아주 의미 있는 해석인 것 같습니다. 바로 경남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세상적으로는 내 세울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고 대단한 재력가나 유명인도 없지만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연합하면서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모습을 세상 속에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편133:1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그랬는데 이 같은 감탄사가 경남지역 모든 교회 성도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두고 하는 표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말씀이 정말 대단한 말씀입니다. 그 당시 소아시아 지방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황제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황제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황제숭배사상을 모든 점령국 백성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유일신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탄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핍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로마 정부는 황제숭배 사상을 내세워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는데 그 기간이 장장 300년 정도 됩니다. 핍박과 박해가 계속되자 많은 성도들은 그 박해와 핍박이 두려워 교회를 등지기 시작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자리에서 떠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늘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은 전혀 흔들리지 아니하고 믿음을 굳게 지켜가면서 우리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모습이야말로 정말 숭고한 모습이요 대단한 모습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빌라델비아교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것은 정치적인 탄압과 박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단들의 적극적인 도전과 유혹도 결코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교회 안에서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면서 유대인이 아닌 거짓된 이단들이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같은 도전과 유혹 속에서 빌라델비아교회는 전혀 흔들리지 아니하고 우리 주님이 주신 말씀과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믿음을 잘 지켰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같은 모습이 바로 존귀한 모습입니다. ♪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성도의 신앙 본받아 원수도 사랑 하겠네 인자한 언어 행실로 이 신앙 전파하리라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찬송가 336장1,3절- 경남지역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도 그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 되는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과 같은 아름다운 믿음으로 우리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믿음의 꽃을 피우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작은 능력으로 놀라운 일을 감당한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우리 주님은 세 가지를 약속하고 있는데, 그 세 가지 약속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고 하는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시험의 때와 환란의 때에 너를 지켜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같은 약속은 구약성경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편121:5-7에 보면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 큰 시험과 환란의 때에 주어진 말씀을 잘 지키고 우리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성도들에게는 우리 주님께서 모든 시험과 모든 환란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도록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기둥은 집을 떠 받치는 중심축입니다. 모든 건축물에서 기둥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없습니다. 바로 기둥과 같이 중요한 사람으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꼭 필요한 사람으로 사용하겠다는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경남지역의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나의 새 이름을 그에게 써 주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구원의 보증서를 써 준다는 말씀이요, 구원의 사람으로 인(印)을 쳐 준다는 말씀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천국시민으로 인정하고, 두 말도 하지 않고 하늘나라에 받아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의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이 소개하고 있는 빌라델비아교회는 우리 주님이 극찬을 하며 인정할 수밖에 없는 교회로서 두 가지 특징을 지닌 교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첫째, “열린 문을 가진 교회”라고 말씀 드렸고, 둘째, “놀라운 칭찬을 받은 교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사실은 첫째, “작은 능력으로 우리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킨 교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둘째, “우리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교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같은 자랑스러운 교회였기에 교회사에서 길이 빛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경남지역의 모든 교회도 이 빌라델비아교회처럼 작은 능력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교회가 되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교회가 되면서 구원의 주가 되시며 축복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는 복된 교회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 오피니언
- 설교/강의
-
[민귀식 목사]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계 3:7-13)
-
-
[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 26: 숫자에 대한 호불호(好不好) 1/ 기피하는 4(四
- I. 서언(序言) 세계 어디를 가든지 특별한 기물이나 어떤 일들을 불길한 일의 징크스(jynx)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는 숫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우리나라를 비롯한 한자문화권에서는 4(四)를 가장 금기시하고 있으며, 서양에서는 13일의 금요일에 대한 금기와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반면 7은 행운의 숫자로 여기고 즐겨 사용한다. 이런 숫자에 대한 호불호와 여기에 따른 생각과 행위는 미신적이기도 하지만, 전혀 근거 없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더욱 더 배격해야 할 비 신앙적인 행태이다. 이에 본 호에서는 기피하는 4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다음 호에서는 주로 서양권에서 기피하는 13일의 금요일과 행운의 숫자 7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II. 4(四)를 금기시하는 이유 4의 금기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도 너무 황당한 일이다. 그 이유는 4가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다고 해서 생겨진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한국 뿐 만이 아니라 한자문화권 지역인 중국과 홍콩, 일본, 베트남 등도 마찬가지다. 사회와 문화적이 차이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이를 나라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한국의 경우: 우리나라의 경우는 아주 옛날부터 4를 무조건 기피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고대로부터 사신(四神)이나 사주팔자(四柱八字) 등을 중요시 한 것을 볼 때 무조건 4를 기피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경우를 볼 때 4의 금기 유래는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이런 잘못된 기피현상은 근대에 와서 생과 사를 가름하는 병원들이 고층 건물이 되면서 환자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죽을 사(死)에 대한 민감성 때문에 발음이 같은 4를 회피하게 되었고, 이에 4층과 엘리베이터도 F층으로 표시하거나 아예 4층을 두지 않고 5층으로 표기하는 웃지 못 할 현상이 만연되게 된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병원 외에도 많은 경우들에서 볼 수 있다. 사례를 들면, 1990년대 이전에 지어진 공동주택과 아파트 등에도 4동, 4층, 4호, 4단지가 없는 경우가 흔하다. 또한 군대의 편제에서도 4군, 4군단, 4사단, 4여단, 4군수지원 사령부, 4비행단, 4전대는 거의 없다. 해병대에서도 4를 쓰지 않는데, 이는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결기의 뜻에서 4를 건너뛰고 바로 5를 사용하고 있으며, 국군 간호사관학교에도 환자와 관계되기 때문에 제4기가 없다. 수학여행이나 수련회 등에서 버스를 반별로 나눌 때도 4호차는 F호차로 표시하며, 장례식장도 4호를 쓰면 고인을 두 번 죽이는 느낌이라 해서 4호실을 두지 않는 경우도 많다. 시내버스나 기차 등의 교통수단에도 4를 기피하는 경향이 많고, 인천국제공항에는 4번과 44번, 244번 게이트가 없다. 기업 중에는 삼성그룹 계열회사들이 4자 금기가 많은 편이다. 회사의 여러 사업장에는 4층이 없는 곳이 많으며, 신라호텔 등에도 4층이 없다. 이는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이런 면에 민감했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2. 한자 문화권의 다른 나라들의 경우: 먼저 일본의 경우는 우리 한국 많 큼은 아니지만, 아파트나 차량번호 등에서 4를 기피하는 경향들이 있다. 이 외에 일본에서는 7이 행운의 숫자가 아니라 금기로 여기기도 한다. 이는 7의 발음이 죽음의 땅을 의미하는 시치(死地)와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북한의 경우도 조선인민군에는 제4여단이 없는 것을 볼 때 우리 남한의 경우처럼 4를 기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경우는 4에 대한 금기가 아주 심한 편이다. 중국의 건물에는 4층, 13층, 14층, 24층이 없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중국의 소유로 되어있는 홍콩의 경우도 지상 14층, 24층, 44층이 없는데, 이는 14, 24의 홍콩지역의 광동어 발음이 자살 등과 비슷하기 때문이며, 영국 등의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13층이 없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III. 결 어 서언에서 언급한 대로 어떤 사물과 일들을 불길한 것으로 여기는 징크스(jynx)나 지금까지 논한 대로의 4(四)와 13일의 금요일을 금기어로, 7을 행운의 숫자로 여기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현대 문명에서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밝을수록 그림자가 더 뚜렷하게 나타나듯이 고도로 발달된 이 사회 문화 속에서도 사람의 심리는 아직도 이러한 미신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양지속의 음지를 대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사명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다음 호에서는 13일의 금요일과 행운의 숫자 7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
[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 26: 숫자에 대한 호불호(好不好) 1/ 기피하는 4(四
-
-
[김성수 총장] 신앙의 계승
- 어린 시절 초등학교(옛 국민학교) 가을 운동회는 많은 분들의 뇌리에 아직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시골 학교 가을 운동회는 전교생을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어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함께 먼지 나는 운동장에서 하루를 즐기는 동네 축제였다. “보아라 이 넓은 싸움터에 청군과 백군이 싸운다. 청군과 백군이 싸우면 틀림없이 백군(자기편)이 이긴다. ……”는 응원가를 소리 높여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Victory! Victory! V-I-C-T-O-R-Y!”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함께 응원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이런 운동회에서 피날레는 역시 맨 나중에 펼쳐지는 계주였다. 좀 발이 빠른 주자는 바통을 받기 위해 아예 미리 좀 뒤로 나와서 힘겹게 쥐어 주는 바통을 받아 빠르게 달렸고, 비교적 빠르지 못한 주자는 앞으로 좀 나와서 발이 빠른 주자가 조금 더 달려서 넘겨주는 바통을 받아 달리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통을 놓치지 않고 잘 넘겨주고 또한 잘 받아 완주하는 것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에서 최초로 개최된 올림픽이었다. 이 올림픽은 ‘최초’라는 수많은 수식어들이 따라 붙었는데, 가장 이상한 일 중 하나는 릴레이 계주에서 메달을 딴 미국 선수가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라고 한다. 계주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도입된 1928년 이후로 미국 팀은 한 번도 거스르지 않고 시상식 단상에 올랐고, 대개 금메달을 수상했다. 그러나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단 한 종목에서도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 미국 선수들이 바통을 놓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미국 팀은 스피드와 체력이 뛰어났지만 핸드오프 기술은 서툴렀다.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주자였고 속도가 결코 뒤처지지 않았지만, 릴레이 팀으로서는 아니었던 것이다. 바통을 잘 받아 달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아주 중요하다. 성경은 그 특유의 솔직함으로 한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신앙을 계승하는데 실패한 극적인 사례들을 과감 없이 서술하고 있다. 엘리의 아들들이 타락한 이야기, 사무엘의 아들들의 부패, 다윗 왕의 추악한 죄악, 솔로몬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성경은 그 영웅들을 조금도 미화하지 않으며 그 기록에 어떤 덧칠도 하지 않는다. 성경은 이와 함께 개인에게나 이스라엘 민족에게 참으로 중요한 극적인 계승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이스라엘이 그 고귀한 소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야훼를 향한 신앙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신실하게 전수되어야 했다. 왕들은 훌륭한 선조들처럼 여호와께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했다. 선지자의 겉옷을 또 다른 선지자가 물려받아야 했다. 횃불이 꺼지지 않고 밝은 불빛을 내며 전달되어야 했다. 바통을 떨어뜨려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바통을 잘 물려주었고 여호수아는 그의 후계자들에게, 사무엘은 사울에게, 다윗은 솔로몬에게,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바통을 잘 물려주었다. 세대 간 교체를 실감나게 경험하면서 신앙의 경주를 달려온 세대는 이제 바통을 잘 넘겨주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오스 기니스(Os Guinness)가 강조하는 세 가지 도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첫째, 횃불을 전달하는 주자들은 후임자들이 현재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도전해야 한다. 자기 유산을 공고화 하는데 목적을 두는 주자는 바통을 잘 넘겨주지 못한다. 모세는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 이제 떠날 때라고 말했다. 그들은 긴 세월을 광야에게 배회하며 허비했다. 여호수아는 그 후임자들에게 약속의 땅의 정복 과업을 완수할 때라고 말했다. 둘째, 다음 세대로 횃불을 전달하는 주자들은 후임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지나온 길을 기억하도록 도전해야 한다. 성경에서의 기억은 단순히 낭만적 추억이나 향수가 아니다. 오로지 감사와 겸손, 믿음과 소망을 고취하는데 목적이 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기억은 감사와 신뢰 회복의 열쇠이다. 셋째, 다음 세대로 횃불을 전달하는 주자들은 그 후임자들이 언제나 미쁘신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의지하도록 도전해야 한다. 견고한 것 같아 보이는 가정, 찬란한 영광을 구가하는 시대, 강력한 부흥도 한두 세대 이상을 이어가지 못한다. 해가 지지 않는 날도, 영광이 시들지 않는 영웅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고 그분의 자비는 무궁하고, 그분의 구원과 감찰하심과 회복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그분은 우리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누울 때에라도 우리 믿음을 지켜 주시는 분이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시 136). 오스 기니스의 강조점에 네 번째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자 한다. 다음 세대로 횃불을 전달하는 주자들은 신앙의 계승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명심하도록 도전해야 한다. 한 개인, 한 가정, 한 교회, 한 교단만 신앙의 바통을 잘 넘겨준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전진하고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의 경주는 지역적이면서도 세계적이며, 심지어 우주적인 경주다. 복음에 빚진 한국교회가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선교지 현지 지도자 양성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 우리는 신앙의 경주에서 바통을 잘 넘겨주지 못하는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무엇을 전할지는 특별히 중요하다. 언제나처럼 우리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우리 주님에 대한 온전한 신실함을 유지하면서 전수할 가치가 있는 것을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으로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다.
-
- 오피니언
- 설교/강의
-
[김성수 총장] 신앙의 계승
-
-
[황권철 목사] 작은 야고보 - 겸손의 사도
- 숨은 봉사자 작은 야고보 작은 야고보는 제자 서열 순위 중에 하위 그룹으로 아홉번째에 나온다(마10:3; 눅6:15; 행 1:13). 성경에 작은 야고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이 단지 그의 이름만 등장할 뿐이다. 성경에는 이같은 인물들이 많다. 항상 바울 곁에 있었던 아리스다고도 그런 사람이다. 옥중에 있을 때도 무인도 섬에 귀양 갈 때도 같이 있었다. 아마 바울이 천국 가서 이런 고백을 했을 것이다. ‘내가 선교지 갈 때마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아리스다고가 곁에 있어 주었다. 그의 따뜻한 보살핌이 없었으면 이 같은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작은 야고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작은 야고보는 말없이 항상 예수님 곁에 있어 준 자이다. 그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장 아름다운 섬기는 영성을 배웠다. 주님은 이 땅에 섬기는 자로 오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왔다”고 했다. 주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고 가장 작은 자로 오셨고 섬기다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드렸다. 그래서 세리와 친구가 되셨고 헐벗고 병든 자를 돌보고 세롯 같이 따돌림 받는 자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작은 야고보는 주님의 이런 섬김의 삶을 무언으로 실천한 자이다. 그리고 함께 하기 위함이었다. 주님이 제자를 부르신 목적도 바로 함께 하기 위함이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3:14).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려 가실 때도 이같이 말씀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마26:36).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실 때도, 제자들을 데리고 가셔서 고난의 현장에 함께 앉아있게만 했다. 외롭고 힘들 때 함께 있어 주기만 해도 위로가 된다. 마지막으로 주님이 부활 승천하여 하늘로 올리어 가실 때 다시 오실 보혜사 성령이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성령 보혜사는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 곁에 항상 함께 하신다. 기도의 사람 작은 야고보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한 때 휼륭한 애국자였다. 후에 휼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금욕적인 자기 수양에 힘썼던 자이다. 열두 제자 중 기도를 많이 했던 자이다. 그는 말없이 기도하는 실천자였다.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예수님을 닮은 자라고 했다. 그는 예루살렘과 시리아에서 전도할때 돌에 맞아도 죽지 않자 톱으로 켜임을 받고 죽었다고 한다. 지금 그의 시신은 로마에 옮겨져 잠들어 있다고 한다. 그는 말없이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무릎을 꿇는 것은 항복의 자세이다. 그는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 앞에 항복했다. 겸손하게 낮아졌다. 하나님의 손이 아니고는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았다. 그의 간절한 기도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다. 하나님이 주시는 담력은 왕의 권세도 두렵지 않고 굶주린 사자도 두렵지 않았다. 이것이 진정한 겸손이다. 겸손한 자는 보이는 사람 앞에서는 담대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그는 이제 거룩한 열심당원이 되었다. 믿음의 사람들은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세상을 정복한 자들은 다 무릎으로 살았다.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이다. 그는 무릎으로 아합과 그 무리를 정복했다. 갈멜산 기도는 무릎의 기도이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 번까지 다시가라”(열상18:42-43).
-
- 오피니언
- 성경
-
[황권철 목사] 작은 야고보 - 겸손의 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