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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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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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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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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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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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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조희완 목사] 사랑의 계명 (요13:31-35)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 중에 하나인 <LG>그룹이 본래 럭키금성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난 1995년도에 LG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LG그룹이 창사 61주년을 맞이하여서 전체 계열회사의 “브랜드 아이덴티티”(BI)를 “사랑”이라는 주제로 바꾸었습니다. 고객들에게 더 친근하고 따뜻한 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기업의 이미지를 “사랑”으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그 기업에서 새롭게 내보내는 광고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랑만 하기 에도 인생은 짧습니다. LG는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고 오직 당신만을 생각하겠습니다. 이제 LG의 365일은 사랑입니다.” LG그룹은 이 새로운 광고를 통해서 “글로벌 톱 브랜드”로 도약을 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는 이 시대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광고 주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라는 주제는 우리 기독교의 브랜드이고 성경의 핵심 주제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기업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로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겠다고 하니까 왠지 우리의 고유 브랜드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들의 인생 브랜드를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요. “사랑만 하기 에도 인생은 짧습니다. 미워하지 맙시다. 나는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고 당신만을 생각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의 365일은 오직 사랑입니다.” 그렇게 인생의 정체성(identity)을 바꿀 때 우리의 삶이 아름답고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자원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자원이 너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갈되어 가고 있는 사랑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첫째로,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새 계명입니다.(34) 둘째로, 사랑은 서로가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34) 셋째로, 사랑은 예수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35)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어지는 이때에 풍성한 사랑을 서로 나누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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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11
  • [신재철 목사] 노래방 삐끼가 만난 사람
    이번에는 노래방 삐끼다. 삐끼는 기본적으로 머리를 숙이고, 웃음을 팔아야 한다. 나를 통해 손님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게 해야만 한다. 지금은 심야 노래방 영업이 금지되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래도 노래방은 돌아간다. 밖에서는 고용된 삐끼들의 호객행위가 이어지고 성공하면 가게 안에 무전을 날린다. 그러면 내려진 셔터가 열리며 손님이 들어간다. 물론 셔터는 다시 닫힌다. 나는 그 호객행위를 담당하는 알바다. 노래방 서빙으로 알고 갔다가 일을 하기로 했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 일단 해보기로 했다. 일을 해야 핸드폰 요금도 내고 학교도 갈 수 있다. “형님, 노래방 어때요? 음료수 서비스 됩니다.” 다양한 형태의 행인이 지난다. 커플,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 짙은 화장의 누나들. 손님과 가벼운 밀당 후 성공하면 노래방 관계자에게 무전을 보낸다. 그리고 닫혀진 셔터 앞까지 안내한 후 열린 문으로 들여보내며 힘차게 인사를 한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여기까지가 내 역할이다. 오늘도 하얗게 불태웠다. 몇 팀이나 들어갔을까? 심지어 성공한 손님 중에 고등학교 동창도 있었다. 영업용 미소를 친구에게 보이며 노래방 이용을 부탁하는데 너무 부끄러웠다. 철저한 손님 마인드로 나를 대하는 동창 녀석이 얄밉기도 했다. 아침과 맞닿은 새벽 시간. 이 때면 손님도 없다. 비틀거리는 사람보다 이른 출근하는 사람이 더 보이는 시간이다. 그래도 퇴근까지는 조금 남았으니 대기. 잠시 등받이 없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숨을 돌린다. 생각이 많아진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신학대학을 다녀야 할까?’ 친구들은 용돈 벌이로 아르바이트하는데, 먹고 사는 문제로 일하는 나를 보니 좀 서글프다. 길게 할 일은 아니라고 토닥여 보지만 괴로움이 털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손에서 버려져 길가에 널브러져 밟힌 수많은 전단지가 내 삶과 겹쳐진다. “오늘 손님 좀 있었어?”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 대전역 앞 사창가에서 호객하는 아주머니다. 이제 얼굴도 익은터라 편하게 이 시간이면 대화도 이어간다. 나이는 있어 보이지만 예쁘장하게 생긴 아주머니. 이분도 많은 사람에게 영업용 미소를 날리며 자괴감을 느꼈을까? 신학생이 왜 이 일을 하냐 물어오는데 근사하게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게요.”라는 말로 나를 감춰 본다. 아주머니의 불편한 질문에 심드렁한 음성으로 아줌마는 왜 일하냐는 반문을 날려본다. 우리는 오히려 더 어색해졌다. 둘 다 그냥 하늘만 본다. 서로의 삶에 관여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다. 아직은 자고 있을 여자친구에게 혹시나 문자 한 통 오지않을까 싶어 내 016 PCS를 만지작거린다. “휴... 하나님, 얼른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요.” * 삐끼 음식점이나 유흥업소 따위에서 손님을 끌어들이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비슷한 말 : 호객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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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11
  • [황권철 목사] 나다나엘(Nathanael's Behind Stories)-정직의 사도
    나다나엘(Nathanael)이란 이름은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께서 주심”이라는 뜻이다. 그는 갈릴리 가나 출신이다(요 21:2). 나다나엘은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이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주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특히 바돌로매(Batholomew)라는 이름은 그의 부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바돌로매는 공관복음서에 열거된 열두 제자의 목록 중에서 빌립 다음에 나온다(마 10:3; 막 3:18; 눅 6:14).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 그는 열두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마 10:2-3). 바돌로매는 나다나엘과 동일인물이다(마 10:3, 막 3:1, 눅 6:14, 행 1:13). 빌립의 전도를 받은 나다나엘 빌립은 갈릴리의 벳세다(Bethsaida) 사람으로 안드레(Andrew),베드로(Peter)와는 동향인이었다(요 1:44). 그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였다. 즉각적으로 응답하였다는 것은 사전에 예수에 관하여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는 불타는 마음과 감격으로 나타나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전한다(요 1:45). 빌립의 이런 자세로 보아 적어도 구약성경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고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메시야 대망 속에 있었던 차에 그가 예수를 만남으로 너무도 감격하여 하나님이 보내 주신 메시야를 친구 나다나엘에게 전했던 것이다. 빌립의 전도전략은 매우 날카로웠다, 마치 매가 사냥하는 방법과 같다. 매가 사냥을 할 때 하늘을 느린 속도로 빙글빙글 돈다. 이는 먹이 사냥을 위해 준비하는 운동이다. 그러다가 먹잇감을 발견하면 곧 바로 수직강하 하여 매섭게 낚아챈다. 나다나엘이 빌립을 만나기 전에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율법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빌립을 통해 예수를 소개받았다. 그는 나사렛이란 선입감 때문에 율법을 묵상하면서 빙빙 우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빌립이 “와서 보라”는 수직강하와 같은 한 마디에 완전히 매료당하고 말았다. 그는 바로 가서 보고 메시야임을 확인하고 주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했다. 나다나엘은 AD 1세기 중반 이후까지 활동한 인물이다. 당시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 사이에는 여러 형태의 종말론적인 메시야 대망 사상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정치적 메시야로서 이스라엘을 세계 최강국으로 만들어 행복을 누리게 할 자였다. 그러나 나다니엘과 같은 일부 경건한 사람들은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장차는 천국으로 인도하실 메시야를 기다렸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메시야를 기다렸다. 그는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나올 가능성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기가 무화과나무 밑에 있는 것을 보시고 이미 그를 알고 계셨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유대인에게 무화과나무는 율법연구나 번영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초자연적 능력의 계시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했다. 이것은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고백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메시야를 이스라엘에게만 국한 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더 큰 일 즉, 하늘과 모든 인류를 연결시키는 인자를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요 1:45-51). 그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요 21:2). 나사렛 출신을 불신한 나다나엘 메시야와 나사렛은 부조화이다.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던 당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사렛이란 지명과 메시야는 도저히 하나로 묶을 수 없는 조합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서 자란 나사렛을 비옥한 이스라엘 평원이 멀리보이는 해발 380미터 가량의 언덕 위에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다. 메시야가 그런 촌구석에서 나올 수 없다는 편견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는 나사렛이란 말에 콧방귀를 뀌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뒤 그러한 편견을 깨고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1:49)라는 놀라운 고백을 했다. 이 고백의 주인공이 바로 나다나엘이다. 처음에 그는 빌립의 예수에 대한 증거를 불신했다. 물론 그도 메시아가 오리라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나사렛과 같은 보잘 것 없는 작은 마을에서 메시야가 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나사렛에 대한 고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나온다는 예언이 없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믿지 않았다. 나다나엘이 성경을 근거로 빌립의 말을 믿지 못한 것은 그가 늘 성경을 묵상하는 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말한 것은 하나님은 장소나 혈연의 관계없이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편 예수는 나사렛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구약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다나엘의 나사렛에 대한 편견은 구약 예언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메시야가 나사렛으로 온다는 것은 구약에서 이미 예언된 것이다.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님 탄생 예고를 전해 들었다.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으며 탄생하신 후에는 헤롯왕의 어린아이 대학살을 피해 잠시 부모님과 함께 이집트로 피신해 거기서 사셨다. 그 후에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와서 소년 시절을 거쳐 메시야로서의 공적인 직무를 시작하시기 직전까지 그곳에 사셨다. 한편으로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의 공적인 직무를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과 주님의 공생애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배척하기까지 했다. 주님의 인정을 받은 나다나엘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직접 와서 확인해 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대로 예수가 메시아인가를 확인하러 예수께 나아왔다. 그는 모든 행동에 있어서 신중했다. 그가 예수를 만나고자 나왔을 때 예수는 나다나엘을 가리켜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말씀하셨다.예수님은 나다나엘에 대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셨다. 빌립의 말을 반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나다나엘은 겸손하고 말씀에 충실하며 경건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나다나엘은 자기를 아는 그리스도의 전능하심에 매우 놀랐다(요1:48). 나다나엘은 놀람과 겸손한 마음으로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라고 예수님께 질문했다. 예수님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부르기 전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다(요1:49).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평화와 번영의 상징일 수도 있고(왕상5:5), 율법 연구의 상징일 수도 있다.3 이 점에서 나다나엘은 열심히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깊이 교제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나다나엘의 지각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사실임을 능히 알았으므로 더욱 놀란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주님과 나눈 대회에서 언약사상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었다. 비록 그가 초기에는 몇 가지 편견을 가지고 있었으나 주님을 만난 후 모든 잘못된 편견을 버릴 수 있었다. 그의 고백은 첫째,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고백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기능에 대한 고백이다. 둘째, 그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다. 이는 예수가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으나 신의 능력을 가진 신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셋째, 예수를 이스라엘 왕이라 고백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이스라엘 왕이며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야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나다나엘의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과 동일하다(마16:16). 그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사랑과 나다나엘의 준비된 신앙인의 자세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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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11
  • [김성수 총장] 주님의 뜻에 대한 상반된 반응
    주님의 뜻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상반된 두 사람의 반응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엘리 제사장의 경우다. 그는 주님의 뜻 앞에서 전적으로 순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엘리는 실로의 대제사장이었는데, 그의 두 아들들도 역시 제사장들로서 봉사하였다. 이 두 아들들도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걸출한 인물들이었는데, 그것은 이들의 경건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비할 수 없는 악행과 불경스런 행동들 때문이었다. 물론, 엘리제사장은 이들의 악한 행동에 동참하지 않았고, 이들의 행동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들들이 그러한 길에서 돌이키도록 단순히 훈계하는 정도의 행동을 취했을 뿐 그 행동을 중단시키려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이제 엘리의 집을 심판하실 날을 세기 시작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선지가가 전했을 때도 엘리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제 엘리 제사장이 아주 늙고 시력이 좋지 않아 잘 보지도 못할 때에 그는 성전에서 자기를 도우는 사무엘이라는 소년을 두었다. 주님은 어느 날 밤에 이 사무엘을 불러서 그를 통해 엘리에게 마지막 경고를 주었다. 엘리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가로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삼상 3:17).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에게 말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의 가정을 영영토록 심판하시겠다는 메시지를 무거운 마음으로 전했다. 그런데 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에 대해서 엘리 제사장은 놀라울 정도의 무감각한 반응을 보였다. 아마도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무감각한 반응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반응이었는가?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엘리의 이 말이 무슨 말인가? 그것은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질지어다“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행하시도록 계획하시든지 간에 엘리에게는 괜찮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것이 자신과 자기 가족의 파멸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태도다. 이 얼마나 감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무관심이 아닌가? 주님의 뜻은 엘리 제사장의 가정을 파멸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엘리의 가정의 일어난 무서운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엘리의 두 아들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엘리가 이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의 며느리 역시 아기를 낳는 과정에서 죽었다. 그녀는 죽으면서 “이가봇”-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울부짖었다. 엘리 제사장이 말한 “주님의 뜻대로 될지어다”는 말은 절대로 우리가 따라야 할 경건의 본보기가 되지 못한다. 왜 그렇게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는가? 왜 그는 자기 자신의 영적 상태와 자기 아들들의 영적 상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명확하게 답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엘리 제사장에게는 자기 자신이 따를 수 있었던 한 모범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엘리 제사장만이 징계와 파멸과 실망스런 메시지를 들어야 했던 유일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의 경우를 보면 주님의 뜻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 엘리 제사장의 경우와 엄청난 대조를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큰 죄악에 빠졌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악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조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곧은 백성들이라고 불평하면서 모세에게 말하기를,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10)고 하셨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모세는 경건하게 머리를 숙이고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다. 모세는 주님께 빌었다. 주님께 사정했다. 주님께서 마음을 돌이키도록 빌었던 것이다. 모세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논증을 하면서 사정을 하였다. 모세의 이런 간청 때문에 하나님은 마침내 그 뜻을 돌이키셨다. 모세를 향한 주님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전에 죽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이러한 심판에 대해서 단순히 경건하게 머리 숙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지어다”라고 하지 않았다. 모세를 향한 주님의 뜻은 쓰라린 실망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호소하였다. 모세의 이런 완강한 간청 때문에 모세는 느보산의 꼭대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볼 수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언약의 후예로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와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호소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모세는 성경에서 위대한 선지자로 칭찬받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기계적으로 따라야만 하는 어떤 것인가? 엘리제사장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파멸하려고 하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받고, 그 앞에서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았다. 주님께 매달리고 간구하면서, 오히려 뜻을 돌려 달라고 논증하고 따지고 간청했다. 주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떠해야 할지를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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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2-11-11
  • [하수룡 장로] 낙 엽
    인생의 황혼기를 보통 낙엽에 비유할 때가 많다. 나무가 새싹이 나고 푸른 잎으로 무성해지는 기간을 지나 열매를 맺고 나면 나무의 할 일은 거의 마무리되고 떨어지는 낙엽으로 가득 차게 된다. 새로 이사를 온 후 마트에 가보면 유독 혼자 다니는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노인이 마트의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수년 동안 보았는데 요즘은 통 보이지 않아 천국으로 가셨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이가 들면 노인들이 갈 곳이 없다. 그래도 친구가 있고 용돈이라도 있으면 나으련만 그렇지 못하고 식당이나 시식하는 코너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모습은 처량하다 못해 불쌍한 느낌마저 드는 것은 필자의 지나친 측은지심 때문일까? 늙은이가 병으로 고통당하지 않고 노후를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이 살아가면서 주님 의지하며 자녀들과 소통을 통하여 외롭지 않으면 정말 축복을 받은 삶이라 말할 수 있다. 게다가 노탐이라 할까 아니면 노욕을 버리면 그보다 더 좋은 이상적인 삶은 없다. 일본에서는 나이가 든 주부들이 정년퇴직을 하고 집안에서 죽치고 들어앉은 늙은 남편을 ‘오치 누레바’라고 부른다고 한다. 우리말로 ‘젖은 낙엽’이라는 뜻으로 늙은 남편이 집에 딱 붙어 나가지 않아 부담스러운 존재로 비유한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사자인 노인들에게는 심히 모욕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현대사적으로 우리나라는 오랜 시간 동안 남편이란 존재의 의미는 가족을 위해 밤잠을 모르고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그 주역들이 바로 오늘날의 늙은이들이다. 이웃 나라 일본과는 사뭇 다른 문화를 가진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일본처럼 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은 있다. 국민소득 50달러에서 이제 3만 달러로 600배로 성장시킨 주역이 바로 현재의 노인들이 아닌가! 이제는 세계 유력한 이름 있는 기구에서 한국을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격상시킨다는 뉴스가 나오자 전 세계가 놀라고 칭찬을 보낸 사실을 기억하자. 노인은 세월이 흘러 주름이 많이 생긴 것은 틀림이 없으나 계절이 끝나 쓸모없이 버려지는 낙엽은 분명 아니다. 그 동안 피땀 흘려 이루어 놓은 업적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고 노인들을 절대 홀대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 나이든 나뭇잎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가을 산에 단풍이 되어 울긋불긋하게 물들었을 무렵 비에 젖었을 때이다. 저녁노을이 드리어 질 때 물든 낙엽은 신비하기도 하고 보석처럼 아름다워 흥분하기도 한다. 정말 쓸모없는 찌꺼기도 없고 깨끗한 순수함 그 자체다. 늙은이를 가을 노을에 물든 낙엽이라고 말하고 싶다. 허리가 굽도록 새벽별을 보고 나가 저녁달이 뜰 때 돌아왔던 노인들을 먼저 가족들이 그 노고를 알아주어야 한다. 믿는 자이면 더욱 배우자가 손을 더 내밀어야 하고 자녀들이 존경의 마음으로 다가서야 한다. 늙었다고 기죽지 말고 주님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내가 살아 있는 인생으로 살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 누가 뭐라 해도 인생의 노년은 경륜으로 젖은 단풍처럼 찬란하게 빛난다. 그래서 노인은 낙엽이라도 노을에 물든 단풍처럼 귀히 여김을 받고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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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2-11-11
  • [박동철 장로] 망조(亡兆)보이는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
    지난 10월 16일부터 22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제20차 전국대표대회가 있었다.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이하 당대회)는 5년 만에 열리는 최대 정치행사이다. 당대회는 보통 공산당 통치의 최고 권력자 국가 주석이 새롭게 등극하거나 5년 만에 재신임을 받는 이벤트다. 지금껏 관행이라면 시진핑 주석의 10년 통치가 끝나고 새로운 지도자가 선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날 당대회는 새 지도자를 선출하지 않음으로써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을 결정하는 대회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모택동, 毛澤東)의 공산당 혁명 후 장기집권에서 개혁의 혁명가 덩샤오핑(등소평, 鄧小平)이 사회주의 속 자본주의의 소위 흑묘백묘(黑猫白猫)론으로 동서 냉전시대를 끝내고 개방의 정책을 성공시켰다.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속 자본주의 개방과 최고 지도자의 권력 또한 분산하고 10년의 권력 시한을 관례화하는데도 성공했다. 이에 중국은 경제의 도약과 함께 14억 인구의 경제 대국이 되고 미국과 세계 속 G2라는 위치를 굳히고 있다. 놀라운 일은 그동안 개혁·개방과 함께 기독교 복음의 길이 열리고 공산당의 엄격한 통제가 있었지만 오늘날 1억이 넘는 기독교 인구로 복음의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번 당대회를 통해 시진핑 주석의 영구집권의 정치체제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사회주의 현대화란 기치로 명실상부한 공산주의 국가로 세계 제국의 꿈을 선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을 선언한 것이다. 중국은 우리 대한민국과도 개혁개방과 함께 경제 우방국이 되었다. 국가 경제의 교역 1위의 나라이자 가장 가까운 경제 파트너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중국 당대회를 보면서 우리는 비상한 각오를 갖게 한다. 복음 전파를 위한 중국에 대한 전환적 시각이다. 중국을 상대하는데 자세를 바로잡아야하는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우리는 중국의 경제발전을 두고 아주 혼란스러운 시각들을 갖고 있다. 사회주의식 경제 국가로 성공했다는 중국에 대해 동경하는 일부 좌파 이념의 세력들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국의 통제경제의 속살을 모르는 시각이다. 중국의 경제 발전 속에 민주화의 피바람이 크게 잠재하고 있음을 안다면 다시금 생각할 수 있다. 중국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발전과정에서 겪는 민주화의 경험이 아직 없다. 그동안 시진핑의 집권 10년 동안 민주화의 움직임을 억눌러왔다. 아울러 교회를 탄압하는데 어느 때보다 앞장서왔다. 정부 당국의 허가를 받아 교회 십자가를 세워야 하고 십계명 대신 시진핑 강령을 세우고 선(先) 공산당 이념을 교회에 명령해왔다. 중국의 기독교에서는 기독 인구 1억 명을 넘기면서 복음의 꿈을 꾸었다. 그러나 시진핑의 중국은 앞으로 기독교 복음에 더욱 강한 적대행위를 할 것이다. 더욱 본연의 공산주의 독재국가로 진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물론의 공산주의와 기독교 복음은 공존할 수 없다. 국내 정치적으로는 소수민족을 강하게 흡입하면서 함께 공산 사회주의 전체주의국가로 전진할 것이다. 이에 복음의 사명에 불타는 성령의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더욱 복음전파에 정진할 것이다. 로마제국이 제국과 황제를 위해 기독교를 박해했을 때 예수그리스도가 나셨고 그리고 위대한 제자들이 로마에서 피의 순교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로마는 기독교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예수님 시대 로마를 닮아가는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은 기독교를 더욱 박해하는 슬픈 여정이 있을지라도 서서히 망조가 되어갈듯하다. 역사의 교훈이 오늘의 중국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교훈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중국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는 사명으로 중국을 위해 기도할 때이다. 골로새서 1장 16장은 말하고 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흑묘백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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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와 세상
    2022-11-10
  • [박동철 장로] 이태원 참사가 교회에 던져주는 메시지
    지난 주말 저녁 소위 ‘핼로윈데이 축제’를 맞아 서울 이태원 거리에서 많은 인파가 밀리면서 압사사고가 발생, 2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먼저 참사에 희생된 유족들에게 애도와 위로를 드린다. 예상치 못한 참사, 국가적 애도 기간이 정해지고 온 국민의 애도와 함께 사고 수습이 잘되길 바란다. 이날 참사는 핼로윈데이라고 하는 주최 없는 축제의 장이 거리에서 열리고 수많은 군중이 몰리면서 질서와 통제의 기능을 잃고 발생한 사고이다. 경찰 등 공공질서가 잘못되었던 부분도 있어 조사도 진행 중이다. 참 안타깝고 아쉽고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슬픈 사고이긴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핼로윈데이가 뭔지, 그리고 교회가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는듯하다. 핼로윈데이의 유래는 고대 유럽에서 세력이 강했던 부족국가 켈트족이 지키는 한해의 마지막 날 (그들이 지키는 일 년을 10개월), 즉 10월의 마지막 날이 핼로윈데이다. 켈트족은 핼로윈데이에 그들의 조상을 섬기는 날로 정해 귀신 분장을 하여 사람을 찾아다니며 먹을 것을 요구한다. 소위 귀신놀이하는 사탄 문화로 발전했다고 볼수있다. 켈트족들이 살았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족들이 1940년대 미국으로 대거 이민하면서 점차 미국의 지배문화가 되었다고 한다. 미국 전 대륙에 전파된 핼로윈문화는 최근 우리나라를 비롯 온 세계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최근 코로나 팬데믹과 함께 움츠려있던 여러 축제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핼로윈데이가 지키는 10월 마지막 날은 우리 교회가 지키는 종교개혁주일이다. 올해는 종교개혁 505주년을 맞아 지난주 기념주일을 지키면서 할로인 축제의 사고에 무거운 마음을 가졌다. 우리에게 종교개혁이란 500여 년 전 로마 가톨릭에 의해 기독교신앙이 우상화되고 타락해버린데 대해 새로운 개혁의 순교적 도전이었다. 루터 칼빈 등의 종교개혁가들의 외침이 있었기에 오늘날 바른 복음을 지킬 수 있는 복음주의 세계 개신교가 부흥하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 주일에 우리에게 발생한 참사는 오늘날 교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너무도 큰 것만 같다. 문화가 넘쳐나는 문화 부흥시대 복음이 문화의 옷을 입고 전파된다. 그러나 한 곳에는 핼로윈과 같은 사탄의 문화가 복음의 현장에 무차별 침투하여 영성을 흐리게 하고 있다. 온갖 세상의 문화들이 교회의 벽을 넘어 교회를 점령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교회를 섬기며 예수의 참 문화를 지켜내려고 하지만 몸부림에 머물러있고 이러한 허무한 문화들이 대중을 넘어 교회로 향해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다. 복음주의 기독교가 강한 미국에서 왜 핼로윈축제가 크게 유행할까요. 오늘 우리에게 역으로 던지는 강한 메시지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미국의 한 교회가 핼로윈데이에 맞춰 할렐루야데이로 열어 지키려고 했지만 소위 흥행이 전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교회가 사탄이 즐기는 문화의 교회 공격을 막아내는 비상적 그리고 공격적 사명의 회복이 필요한때이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그곳에서 건져올린 복음의 옷을 입은 문화의 창조가 필요하다. 그리고 다음 세대들이 세상에서 범람하고 교회로 밀려오는 사탄의 문화를 경계하는 영적 지혜를 발하도록 교회가 더욱 사명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사탄의 문화는 빛이 없다. 세상을 어둡게 한다. 영적 찬란한 빛을 발하는 복음의 문화를 가르치고 전파해야 하는 사명을 더욱 느끼게 하는 종교개혁 주간의 슬프고 슬픈 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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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2
  • [특별기고] 교회 연합과 교회법적 관점에서 본 목사·장로직 여성 임직 문제
    지난 72회기 고신총회는 여성안수에 대한 연구 청원을 기각했다. 필자가 기억하기로 이 청원은 역대 두 번째 청원이다.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이 높다. 우리 교단 역사 중 최고치에 이른 듯 보인다. 그래서 말들이 많다. 72회기 총회 때는 역대 어느 총회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여성 안수 허락에 대한 피케팅이 있었다. 여성임직 허락에 대한 청원도 아니고, 연구에 대한 청원인데 연구를 못하게 할 필요가 있냐는 말도 있다. 반대로 한국장로교회 내에서 고신이 가진 정체성과 영향력이 있는데 이런 결정은 파장이 크다는 의견도 있다. 여성 임직 문제는 그 자체로 첨예한 대립을 예고하며, 교회사적으로도 그래왔다. 어떤 신학적 패러다임을 배경으로 하던지 이미 양쪽은 성경적,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으며, 서로의 주장은 공격하며, 자신의 주장은 옹호한다. 토론과 논쟁에 비교적 열려 있다고 평가받는 서방에서도 이미 갈등과 반목은 불가피했다. 전 세계적으로 이미 여러 종류의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생채기 수준을 넘어선 상처로 아픔을 겪고 있다. 우리 교단도 이런 과정으로 들어갈까 심히 염려된다. 어쩌면 문을 열고 이미 들어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 가지를 꼭 염두에 두면 좋겠다. 우리 자매교회 중 하나인 남아 개혁교회는 공식적으로 분열 없이 수 십 년째 논쟁하고 있다. 갈등이 깊다는 말도 되지만, 교회 연합과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 그만큼 노력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또 다른 자매교회인 화란 해방파의 진행과정과 비교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필요하다. 결정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분노하지 말자. 이 덕목은 우선 여성 임직 찬성론자에게 요구될 것이다. 상대방의 주장이 비(혹은 반)성경적, 혹은 자유주의적 신학이라 화내지 말자. 이 덕목은 우선 여성 임직 반대론자에게 요구될 것이다. 성경과 신앙고백의 토대 위에서 치밀하게 연구하고, 치열하게 논쟁하되 주 안에서 서로를 온유한 심정으로 대하자. 그리고 끝까지 하나 됨을 지키자. 이런 각오와 결단이 없다면 연구와 논쟁을 그냥 포기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필자는 개인적으로 목자 장로직 여성 임직 허용을 반대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여성 임직에 관한 논의에 다시금 신학적,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이 말을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모두가 성경과 신학적 근거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여성 임직을 결정한 교회의 예를 보면 결국 지지하는 다수를 확보한 찬성 쪽의 성경과 신학적 근거가 채택되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 필자는, 앞서 언급한 덕목을 염두에 두면서 여성 임직 연구와 논쟁 시에 고려해야 할 교회연합 및 교회법적 관점에서 생각해 볼 문제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지만, 여성 임직을 반대하는 입장에서이다. 첫째, 여성 임직 문제가 결코 교회 연합을 깨트릴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여성 임직 자체만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여러 결정으로 인해 세계의 많은 교회가 지역 교회 단위, 노회 단위, 총회 단위, 그리고 연합 기구 단위의 분열을 이미 겪었다. 최근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있었던 국제 개혁교회 협의회(ICRC) 총회는 우리 자매 교회인 화란 해방파 교회의 ICRC 회원 자격을 박탈했다. 직전 총회(2017년, 캐나다)에서 정지되었던 회원권을 최종적으로 박탈한 것이다. 해방파 교회의 회원권 문제는 해방파 교회를 모교회로 삼는 캐나다 개혁교회의 발의(이들이 그만큼 심각하게 이 사안을 고려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한부선 선교사를 파송했던 미국 정통 장로교회의 동의로 채택된 안건이었는데, 이번 ICRC 총회의 주요 안건 중 하나였다. 우리 교단 대표로 참석했던 후배 목사에게 들은 바로는 이 논의는 아주 조용하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으며, 해방파 교회 대표의 여성 임직 문제에 대한 변호 발언과 이에 대한 회원교회들의 의견을 나눈 후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가결에 대해 각 회원교회 대표가 의사 결정을 ‘Yes’라고 말하는 다수의 목소리에서는 심지어 떨림이 감지되기도 했으며, 해방파뿐 아니라 기타 회원교회의 모든 대표가 침울한 슬픔을 표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나뉘고, 교회의 연합이 깨어진 셈이다. 해방파는 자신들의 결정을 변호하는 발언 기회에 여성 임직 문제가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그리고 교회 연합적으로 ICRC에서 퇴출될 만큼의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논지의 발언을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ICRC에 머무르고 싶다는 희망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결정을 지지했다. 마찬가지로 보수 신학 진영의 여성 임직 찬성론자들 역시 이 문제를 성경의 권위 및 진리 문제와는 별개로, 또한 교회를 혼란에 빠트리거나 분열을 야기할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을 표명한다. 하지만 결국 그동안 ‘이 작은 문제’를 교회의 분열보다 앞세운 셈이다. 다시 말하면, ‘이 작은 문제’가 교회를 찢어 놓은 것이다! 이번 ICRC의 결정은 우리에게 몇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 교단은 WCC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그토록 경계하고 반대하지 않는가? (필자도 동일한 생각이다.) 그렇다면 WCC 대척점에 서 있는 ICRC 교회와의 연합에는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가? 우리 교단은 처음부터 WCC와 그에 준하는 국제기구에 가입된 교회와는 교류를 하지 않고 경계해 왔다. 비록 그 개념이 약했다고 할지라도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때문이었다. WCC는 경계하면서, ICRC와의 연합은 고려하지 않는 입장은 우리 스스로를 모순 가운데 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ICRC 가입 교회들과의 교제와 연합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우리가 이끌고, 또 지켜온 같은 신앙고백 안에서의 하나 됨에 분열을 야기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런 신학적 논의에 자매 교회들의 견해를 얼마나 열린 마음으로 듣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자매 관계에서는 총회의 회의록과 중요 결정사항을 교환한다. 정기적으로 각 교회 총회를 방문하여 서로 교제를 나눈다. 신앙고백이 일치하기 때문에 서로의 결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배우며, 또 권면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서로의 목사를 청빙할 수도 있다. 가르치고 고백하는 내용이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고하신 고 허순길 교수가 우리 자매교회인 호주 자유 개혁교회의 목사로 청빙 된 아름다운 개혁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자매 교회들과 이런 교제를 가지지 못하는 것은 우리 교회가 여전히 성숙하지 못했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아닌가? 이번 총회에서 기각된 우리 신앙고백서 34-35장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전부 다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ICRC에 속한 대다수의 장로교회들은 34-35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해 이견이 없을 정도이다. 아주 명쾌하다. 하지만, 우리 교단은 34-35장을 삽입할 때도, 그리고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고 있는 지금도 자매 교회들의 의견을 들은 적이 없다. 한때 우리 교단과 교제의 폭을 넓히고, 신학적 일치를 이루며, 합동까지 바라보고 있던 합신 교단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명확한데 말이다. 만약 우리 교단이 여성 임직 연구와 논쟁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면, 치밀하고 치열하게 시행하되 교회의 연합과 하나 됨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길 바란다. 자매 교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의 논의도 확대하며, 함께 걸으려고 하는 유연한 교회 연합적 스탠스가 필요하다. 급하게 서두르지 말자! 둘째, 또한 우리는 새로운 교회 질서(법, 규례)를 만드는 일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흔히들 교회의 권세 중 하나로 ‘입법권’을 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통치하시는 교회는 말씀과 신앙고백의 빛 아래에서 질서(혹은 법과 규례)를 만들 권세가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말씀의 지배 아래에서여야만 한다. 말씀의 원리를 따라 교회에 필요한 최소한의 질서, 최소한의 법과 규례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교회 질서’나 ‘교회법’이 ‘교회법전’화 되어 교회를 지배하자 종교개혁의 문이 열렸다. 교회에게 법과 질서가 필요한 것이지, 법과 질서에게 교회가 필요한 것이 아닌데 말이다. 물론 교회 질서와 법은 유동적이다. 하지만, 말씀의 원리를 무시한 채 시대사조나 요구에 따라 교회가 질서와 법을 적극적으로 만들고, 교회법적인 결정을 쉽게 내렸을 때 교회는 언제나 그 법이 가지고 오는 필연적인 무거운 멍에를 실제로 짊어져야 했다. 특히 여성 임직 문제는 직분의 문제이다. 공식적으로 온라인 예배(?)를 그토록 경계했던 우리 교단이 예배의 핵심과 직결된 직분의 문을 쉽게 여는 것에 대해 경계심이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화란 해방파의 예를 들어 보자. 현재 알려진 바에 따르면, 화란 해방파에서는 여성 임직을 결정한 후 동성애자를 교회에 허용하는 문제에 대한 연구 위원회를 구성했다고 한다. 은퇴한 윤리학 교수 한 명은 동성애 허용 가능성을 지지하는 입장의 책을 지난 주간에 출판했고, 실제 지역 교회에서도 동성애 커플들에 대한 치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심지어 성찬에 참여 시키는 예도 있다고 한다. 비록 여성 임직 찬성론자들이 여성 임직-동성애 허용은 별개의 문제라 주장하지만 여러 많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도 우리는 이 두 문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아왔다. 뿐만 아니라 해방파는 2020년 총회에서 WCC에 가입하기 위한 준비 위원회를 구성했다고 한다. 우리 관점으로는 2022년에 해방파는 ICRC에 머무르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면서도 이미 2020년에는 반대편으로 가려는 다른 시도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새로운 질서(법과 규례)를 받아들이면, 이를 뒤따르는 무거운 멍에를 받아들이는 책임을 져야 한다. 누가 이 멍에를 맬 것인가? 가깝게는 화란 해방파의 예를 보면서도 동성애 관련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인가? 우리도 우리가 그토록 경계했던 WCC 편으로 이제 옮겨갈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필자에게는 염려스러운 것이 하나 있다. 이런 글들이 오히려 연구와 논쟁을 가속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결국 이 연구와 논쟁을 피할 수 없다면 성경적, 신앙 고백적, 예배적, 교회 연합적, 교회법적 등, 모든 관계를 치밀하게 고려하고 치열하게 토론하여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앞에 제대로 정리된 보고서를 내어놓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성경과 신앙고백을 따라 여성 임직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늘의 지혜가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길 희망한다. 무엇보다 열린 마음으로 자매 교회와 함께 의논하여 하나 됨에 상처를 내는 일이 없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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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27
  • [박동철 장로] 정치 언론권력과 손잡는 이단 집단들
    지난 7월 8일 일본 나라현 야마토사이다이시 광장에서 유세를 하다 발생한 아베 전 총리의 저격사건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총격으로 그 자리서 사망한 아베는 일본 총리로서는 8년 9개월 재임한 장수 총리다. 보수 자민당의 사실상 대부였기에 더욱 충격이 컸다. 총격의 원인이 또한 충격을 던졌다. 범인 야마가미는 어머니가 통일교신자인데 재산을 모두 통일교에 바쳐 가산을 탕진했는데 아베총리가 통일교를 지원하고 있다는 게 암살의 동기였다. 일본 열도는 발칵 뒤집혔고 이런 여러 연유와 반 아베 여론으로 결국 아베의 장례는 두 달 넘어서 국장으로 치렀다. 범인의 진술은 아베는 총리를 역임한 외조부부터 통일교 교주 문선명을 추앙하고 문선명의 투옥시 미국을 통해 석방운동까지 했다고 했다. 이단 통일교가 정치권력과 얽혀 비극을 자아낸 사례다. 최근 우리나라 메이저 언론 신문에 가끔씩 나오는 전면광고에 “온 천하는 잠잠하라”는 대형문구와 함께 전면광고를 내고 홍보전을 펴는 이단 광고가 게시됐다. 그 광고주를 추적한 한 단체는 은혜로교회라는 이단 기독교가 거액으로 게시한 광고임을 판명했다. 은혜로교회라는 이단은 교인들을 무차별 학대하며 태평양 섬으로 집단 이주시켜 폭행을 일삼고 헌금을 받아낸 사실이 드러났다. 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이 뿐인가. 지금도 매주 추수꾼이라는 신천지 이단 신도들이 기존 교회를 알게 모르게 드나들고 있다. 최근 코로나 때 방역과 관련 국민적 비난의 대상이 되자 전국일간지 신문에 연일 고액광고를 게재하고 있다. 필자는 오랫동안 신문사 재직한바 있어 관계자를 만나면 이단 종교의 폐해를 설명하고 광고수임을 못할 것을 설명한 바 있다. 그렇지만 신문이란 회사는 진리를 알 수 없고 수익을 외면할 수 없는 입장이라 무시할 수 없는 사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신문사의 반사회적 이단종교의 광고를 싣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흥미를 끄는 이단의 사건이 있다. 여신도에 대한 상습적 성폭행으로 이름난 '기독교복음선교회'라고 하는 JMS정명석이란 자가 성폭행범으로 복역하다 출소한지 얼마 안 되어 또다시 여신도를 성폭행하여 구속된 사건이 최근 있었다. 이 뿐이겠는가. 언제든 우리의 신앙 주변에는 악령의 세력들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다. 이단의 문제는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올 때까지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 먼 옛날 초대 시대에도 '바른 복음과 다른 복음'의 논쟁이 끝없이 있어왔음을 성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문제는 최근 우리 주변에서 나타나는 이단들이 교세 확장을 위해 움직이는 양태가 예사롭지 않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단 세력들은 세 확장을 위해 언론광고를 통해서도 선전하고 있지만 선거철만 되면 표를 찾는 정치집단에 파고들어 정치권력을 만드는데 힘을 보태고 있다. 그리고 교묘히 정치권력의 힘을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크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큰 문제를 일으킬 소지를 안고 있다. 정부에서도 종교로 인한 사회혼란과 폐해를 막기 위해 최근 실태조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이단종교의 감시는 한계가 있다. 말씀에 순종하며 복음의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교회는 더욱 감시에 나서고 대적하는 기도와 반응이 필요하다. 우리의 무관심이 커질 때 이단은 급속도로 성장함을 오늘날 목도하고 있다. 이단은 분명 오직 예수복음의 교회를 무력화하는데 혈안이다. 그리고 사회에 온갖 폐해를 불러왔음을 지금껏 경험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요한일서의 주님 말씀을 다시 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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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21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9: 중동(中東) 동남(東南)아시아 등의 지역이름의 유래와 고찰
    I. 서언(序言) “내가하고 있는 말들은 과연 바르게 표현하고 있는 말인가?”생활용어를 정리하고 논해보면서 한 번씩 필자 자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러면서 “바르게 말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구나.” 라는 생각을 가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본 호에서 논하고자 하는 명칭 용어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위의 말들은 사전과 국제적으로 사용되는 명칭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 말들이다. 그러나 그 유래와 민족적인 자존감에서 본다면 어딘가 모르게 자연스럽지 못한 말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위의 명칭들의 유래와 그 사용처와 문제점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논하면 다음과 같다. II. 세계의 각 지역 이름들의 고찰 1. 아시아권의 지역 이름들의 고찰: 먼저 아시아권의 지역 명칭들을 보면, 중동(中東(중동)), 극동(極東(극동)), 원동(遠東), 근동(近東), 또한 동아시아(東Asia), 동남아시아(東南Asia), 서남 아시아(西南Asia), 중앙아시아(中央Asia) 등의 여러 지역 이름들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아시아권에 대한 이러한 지역 명칭들이 한 반도의 위치와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이라는 데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대한민국은 극동지역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중심이다. 또한 동남아시아 지역인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등은 우리나라의 위치에서 보면 동남쪽이 아니라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근동지역으로 불리어지는 터키, 시리아,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근동이 아니라 원동이다. 중동지역도 마찬가지이다. 중동은 근동과 극동의 중간 지역을 일컫는 말로서 이라크,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의 나라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곳도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중동이 아니다. 2. 세계지도를 보는 관점에 따른 지역이름의 차이 : 앞의 문제 제기처럼 왜 우리나라와는 전혀 관계없는 명칭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먼저 세계의 지도를 누가 어떻게 어떤 관점에서 그리느냐에 따라 그 시각과 인식이 달라진다. 또 그와 동시에 지역에 대한 명칭도 달라진다. 이런 면에서 세계 지도를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유렵과 아메리카 대륙을 중심으로 한 지도이다. 이는 과거에 영국을 중심한 서방국가들의 영향력이 세상에서 가장 컸고, 또 그들의 관점에서 지도를 그린 것이 현제 세계의 대다수 국가와 U.N이 공식화 하고 있는 지도이다. 두 번째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을 중심으로 한 지도이다. 여기에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세계의 중심이란 관점에서 그린 지도이다.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지도는 바로 이 지도이며, 현재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다음 세 번째는 오세아니아 주를 포함한 남반구를 중심으로 한 지구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거꾸로 된 지도가 있다. 이는 이 세상을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그들을 중심으로 보면서 그린 지도이다. 이로 볼 때 세계 모든 민족들은 지도 하나를 놓고도 모두 자신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지역 이름을 붙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II . 제언(提言(제언))과 결 어(結語) 지도를 보는 관점에 따라 정해진 지역의 명칭들을 다시 보면, 첫 번째 지도를 그린 유렵인들은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고, 각 지역을 저들의 관점에서 나누어서 붙였다. 특히 이런 명칭들이 구체화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싸우던 영국이 아시아를 세지역으로 구분하면서 부터이다. 예를 들면, 그들의 식민지 국가였든 인도를 중심으로 인도가 중동, 인도 서쪽을 근동, 우리나라를 극동으로 분류 했다. 지금은 그 때 그들의 개념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 기본적인 분류의 개념은 그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볼 때에는 어떤 문제성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나라 중심이 아니라고 배격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너무 국수주의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를“동방예의지국”이나 “동방의 떠오르는 태양”같은 나라로 불리어 지는 것은 명칭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명칭 용어들에는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지역을 이렇게 나눈 이들의 인식이다. 이들은 당시 자신들을 중심으로 보면서 그들의 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문명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을 했다. 이런 관점에서 중동, 원동,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란 명칭은 원래는 식민사관에서 오는 다소 비하하는 의미의 말이었든 것이다. 그렇다고 이 명칭들을 사용하지 말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단지 그 유래와 뜻을 바로 알자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수정 보완하거나 다른 용어로 교체함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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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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