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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6) (민12:1-3, 마5:5)
지면을 통하여 제가 목회하는 고신교회에 대해 잠깐 예로 언급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고신교회도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370 용사는 못되더라도 37 용사는 있어야 합니다. 고신교회 목회자로서 오늘까지 우리 고신교회의 선교를 돌아보면 고신교회 성도들이 다윗의 37 용사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교회 분열의 아픔과 담임목사, 부목사들이 면직을 당하는 일 앞에서도 선교를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의리가 있는 용사들이었습니다. 코로나19 기간에도 15개 정도의 교회를 필리핀과 네팔에 건축했습니다. 순간순간 어려움이 생겼을 때 구제하고 돌아본 것은 말할 수도 없이 많습니다.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우리 교회 선교비가 1억이 더 지출되었습니다. 경상비 전체 25-30%가 선교비로 지출되고 있습니다. 일단 빚을 내서라도 선교비는 지출하고 봅니다. 돈의 액수를 떠나서 선교를 바라보는 시각과 선교를 하는 실천에 우리 고신교회와 같은 교회가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고신교회 담임목사로서 우리 교회는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일에 전 성도가 다윗의 37 용사와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성도들을 좋아하겠습니까? 잘은 몰라도 고신교단 안에서 저만큼 성도들 좋아하는 목사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 장면에서 목회자는 매우 위험한 신호를 감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고 좋아해야 합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성도들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이 부분이 목회자가 감지할 줄 알아야 하는 위험한 신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가 하나님 외에 그 어느 것도 의지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눈곱만큼이라도 하나님 의지하는 것을 성도에게로 돌리고 기대를 거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목회자에게 즉각 응징하십니다. 그러니 목회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성도들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절대로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로 하여금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목회자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성도들은 반드시 목회자의 37 용사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시도 때도 없이 풀무불 앞에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온유한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풀무불에 던져 넣으십니다. (욥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 결과 목회자는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당한다 하더라도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온유한 자가 되어 순금같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온유하게 된 목회자는 정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아론과 70장로들을 규합하여 백성들을 선동합니다. 어느 정도 새가 결집 되니 미리암은 공개적으로 모세의 통치에 비방과 반역을 시도합니다. 아직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감동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때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증언합니다. 악한 무리들이 거짓된 계획을 세워 공격했습니다. 무시무시한 공격 앞에 제자들과 함께했던 무리들은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홀로 지시기도 힘든 십자가를 지시고 묵묵하게 끝까지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목숨까지 위협하는 거짓된 계획으로 공격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른말,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온유한 자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온유한 자의 완성을 이루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약속하신 대로 땅을, 약속의 땅을, 교회를 주셨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약속하신 최고의 복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교회인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미 복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교회가 아닌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 아닙니다. 교회와 한 몸 되지 못하고, 교회와 거리가 있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도 아니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복음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모든 말을 듣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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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현령비현령(5) -전관예우(前官禮遇)
두런두런 둘러앉은 장로님들의 담소 가운데 20만 원짜리 봉투 하나면 “총회에서 발언해 줄 목사들 많다” 아니 “발언 안 할 사람 거의 없다”라는 말로 폭소가 터져 나옵니다. 참 검소한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상임위나 특별국의 자리 하나면 평생 다져왔던 인간관계나 의리는 배설물처럼 여기는 결단력 있는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이렇게 다루기 좋은 목사 장로이니 계파나 진영의 의도를 가지고 매관매직하면 오늘날 고신에 만연되어있는 계파와 진영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 자명합니다. 아니 혹자는 이미 보수는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보수를 만들어 개혁을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자고 주장합니다. 뼛속까지 개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총회 임원으로 만들어 죽어가는 보수를 살려야 한다고 평생 개혁에서 쌓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작금의 정치행태에 발맞추어 가능한 봉투가 되는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서 천년만년 누리고 싶어 하는 형국입니다. 20만 원짜리 봉투와 자리의 맛을 봐 버린 소위 보수라는 자들은 아예 정치적인 의리와 명분은 상실되어버렸고, 보수라는 가면만 쓰고 있을 뿐 언제든지 개혁도 되고, 진보도 되어 그동안 누리던 봉투의 자리를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그 신보수라는 새 배에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최근 들어 고신교단 내에 계파와 진영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커진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서울의 L 목사님께서 열변을 토하신 것처럼 총회 서기 출신 카르텔입니다. 총회 부회록 서기가 되기 전에 총회 준비를 위한 총회 서기부 MT라는 명목으로 그 해 부회록 서기 후보의 물망에 오르는 사람을 부부 동반 모임에 참여시킵니다. 그러니 총회 임원에 입성하기 위해서 그 계파 사람이 아니면 시작부터 불가능합니다. 지금 총회 서기부에 포진한 분들을 보십시오. 계파 색채가 엷고, 계파를 싫어하고, 보수성향이 있는 사람도 일단은 그 진영에 몸을 기대고 양다리를 걸쳐야 시작이 됩니다. 균형 있는 총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으로 다리만이라도 걸치고 시작했는데, 회록 서기를 지나면서 하체가 들어가고, 부서기를 지나면서 몸통이 들어가고, 서기가 되면 총회를 손에 쥐고, 서기를 마치면서 그 영향력은 한국교회로 확대됩니다. 사욕에 치우친 사람이 총회 임원, 특히 총회장이 되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년 동안 총회 서기부를 거치면서는 구석구석을 너무도 잘 알게 된 서기부 임원들이 총회장단이 되었을 때, 유익한 점보다 작금의 현상처럼 위험하고 무법천지가 될 위험성이 훨씬 높습니다. 소위 서기 카르텔이라는 것을 반드시 총회적으로 다루어 이 카르텔로 인한 계파와 진영을 넘어 안하무인의 정치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서기부를 거치지 않아도 총회장단에 오를 정도의 사람이면, 이미 노회와 목회에 상당한 경험과 식견을 가진 분들로서 충분한 자질이 검증되었고, 사무총장 이하 직원들의 훌륭한 보좌가 있기에 1-2년의 총회장단 사명은 충분히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한국교회에서의 우리 교단의 몫이 있습니다. 교단의 위상을 생각해서 대부분이 총회장을 역임하신 분들이 이사로 가십니다. 총회 서기부를 마치고는 특별국이나 상임위에는 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총회 임원회에서 의논이 있었다지만 관례처럼 총회 서기를 마치면 총회를 잘 안다는 빌미로 감사국에 들어갑니다.(현재 감사국원 3명은 최근 총회 서기역임) 총회 감사국인지 총회 서기 지내신 분들의 친목회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입니다. 총회 감사국이 총회 서기부의 연장선 조직입니다. 총회 감사국은 별정직처럼 그 기능상 법적 전문가, 재정 전문가, 행정 전문가 정도는 배치해야 합니다. 차라리 총회를 잘 아는 서기부 출신들로 총회를 하나 만드시지요. 총회 총대로 나올 정도가 되면 기본적인 자격과 능력을 갖춘 분들인데, 총회 서기 출신들이 꼭 해야 한다는 논리는 총대들을 얼마나 무시하는 처사인지 총대들은 알아야 합니다. 총대들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근 하나 던져주면 입을 다무는 총대들이니 무시당하는 줄도 모를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서기를 마치고 임원회에서 의논한 대로 그 어느 상임위도, 틀별국도, 이사도 가지 않은 분이 고 신수인 총회장이십니다. 최근 총회 서기를 지낸 분 들 중 유일하게 보수진영의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 약속을 지켰습니다. 소위 개혁진영의 서기들은 단 한 명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너무 개혁을 잘하셔서 말입니다. 처음 시작할 땐 훌륭하셔서 선출되셨습니다. 그런데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엔 그 어떤 사람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총회가 훌륭한 분들로 보호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총회장의 사역이 끝날 무렵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는 당신의 몫인 “CBS이사”를 제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총회장님께서 가셔야 교단 권위와 위상이 서게 된다고 고사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전달하여 CBS에서는 제가 이사로 갈 것 다 알고 전화까지 왔었습니다. 물론 개혁에 몸을 담았던 총회장 출신은 선배 총회장 출신 목사님의 이사 자리를 빼앗아서라도 반드시 그 자리에 갑니다. 말 그대로 개혁 정신이 투철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고 신 총회장님께로부터 “미안하다”고 하는 전화가 왔습니다.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힘들게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래 그 자리는 제자리가 아닙니다. 총회장님 자리니 총회장님 편하신 대로 하시라”고 대답했고, 현제 이사로 있는 당시 총회 서기가 고집을 부려 그 자리로 갔습니다. 사욕에 눈이 뒤집히면 세상이 말하는 윤리도 도덕도 질서도 없습니다. 현재 우리 고신총회가 한국교회에 파송하는 이사는 CBS, 성서 공회, 찬송가 공회, CTS, 군선교 위원회입니다. 현재 이사를 하고 있는 분들은 다 총회 임원 출신이고, 목사인 경우는 다 총회 서기 출신입니다. 고 신수인 총회장님을 분기점으로 해서 그동안 관례로 총회장을 역임했던 분들이 가던 이사를 총회 서기를 마치고 가는 아주 개혁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총회를 잘 아는 것을 넘어 총회 울타리 밖에 있는 이권도 잘 알게 된 것입니다. 총회장단이 갖는 위엄과 일반 목사와 비교할 수 없는 혜택에 눈이 멀어 목사의 정년까지 희생해 가며 자리에 오르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그동안 꿈꾸어 왔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됩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런 세월이 가는 동안 고신의 신앙과 정신은 오물통이 되어 썩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기가 아니라고 했다가 집권을 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위기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 역시 진영논리로서 총대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속임수입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고신의 교회들에게 떠넘기는 기가 찬 술수이지요. 그리고 뒤에서는 몇 년 세월을 통해 달인의 경지에 오른 실력으로 소위 봉투가 되는 일에는 탁월한 안목으로 몇 수를 내다보는 행보를 하게 됩니다. 총회 서기부는 총회 서기단 활동으로 총회 임원회 자리를 끝내야 합니다. 총회장단은 시대 시대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바라보며 영적으로 한국교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장자 고신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을 세워야 합니다. 총회가 평안하고 태평성대일 때는 농어촌에서 목회하시는 훌륭한 목사님도 총회장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고신이 위기라고 특별기도회를 하는 상황이라면 총회장 되기 위해 몇 해 동안 수천, 수억을 쓸 것이 아니라 총회장에 된 후 수억을 총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을 총회장으로 세워야 합니다. 고신이 위기라고 기도회를 하면서, 1) 눈 감고 아웅 하지 말고 2) 순수한 교회들과 성도들의 주머니를 갈취하지 말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 이미 그 자리에 오르신 분이라 해도 위기의 총회를 위하여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정말 고신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전관예우(前官禮遇)’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장관급 이상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 사람에게, 퇴임 후에도 그의 공직에 대한 헌신을 기려 예의를 갖추어 존중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리는 개인의 행복에 우선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바쳤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로 일한 관리가 퇴직했을 때 그를 예우함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전관예우라는 말의 뜻은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장 잘못된 사례가 법조계의 전관예우입니다. 전직 판사와 검사가 퇴직 후에 변호사가 된 사람을 현직 검사나 판사가 예우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변론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관(前官)이라는 이유로 유리한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공정을 생명으로 하는 법정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총회 감사국은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총회 피감 기관들을 공정하게 제대로 감사할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관예우 받았으니 밥값을 해야겠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신을 대표하는 한국교회의 자리도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자리매김해 버렸습니다. 당연히 사리사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릅니다. *묻고 싶습니다. 앞서 언급한 총회를 대표하여 파송하는 이사직에 어떤 근거로, 어떤 기준으로 파송하는지, 서기 출신이 총회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총회 임원회는 총대들이 납득 할 수 있는 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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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5 : 성경에서의 용납과 용서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데 먼저 감사를 드리면서 문득 그게 용서인가 용납인가? 두 단어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라는 용어적 의미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많은 교인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찬송가 569장 3절에도‘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가 있다. 하지만 엄격히 보면 같은 듯 다른 말이다. 본 호에서는 그 차이점이 어떤지를 분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용납(容納)과 용서(容恕)의 단어 분석 1. 용납이란? : 헬라어로는 ‘아네레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바칠 납(納)이다.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임’이라 했고, 금성사 국어대사전에는 ‘부정적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했다. 국문학 교수를 역임한 최태영 장로는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란 그의 저서에서 ‘이 용납은 허용(許容)과 거의 같은 뜻으로 부정적인 요소, 모자라는 점이 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의 죄는 용납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지 이를 긍정적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라고도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어떤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일에 대한 회개 기도가 필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용납은 죄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후11:1).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구나’(고후11: 19).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라’(엡4:2)고 했다. 여기에서의 용납이란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너그럽게 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2. 용서란? : 헬라어로는 파레시스 로서 ‘놓아줌’, ‘해산’, ‘처벌의 보류’등의 뜻이 있고, 로마서 3:25절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지은 죄를 용서함’이란 뜻으로 말씀하고 있고 수많은 용서에 대한 말씀도 거의 동일하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이며,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이라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성경적 의미나 각종 사전적 의미로 볼 때도 용서의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또 스스로 죄를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 기도할 때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용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인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찬송가 569장 3절에 ‘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면, 용서와 용납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다소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논한 대로 실제로는 같은듯하나 다른 의미이다. 여기서는 용납이 아니라 용서로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이 두 단어 외에도 관용(寬容)(사전적 뜻: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란 용어도 있다. 어쩌면 용납과 용서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고민과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문자적인 구분을 지나치게 하다 보면,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기 때문에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용어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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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삶의 현실에 대한 인간의 태도
인생의 삶을 사는데 현실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 태도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태도(attitude)가 고도(altitude)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비행기가 아래로 향하느냐 위로 향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고도가 결정되듯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방향과 높이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누구나 높이 오르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높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를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본다고 한다.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값이 비싸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값이 싸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다. 항상 높이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려움이 있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 내려가는 자들이 있다. 어려운 시기에 갈렙은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믿음의 태도를 가졌던 사람이다. 그는 85세의 나이에도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땅에 잔류하고 있는 아낙 사람들이 사는 산악지대를 정복하고자 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분명 함께 하실 것이니, 내가 반드시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수 14장 12절)” 갈렙의 신앙은 능동적 신앙의 삶이었다. 45년 전에도 다른 사람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후퇴 반응을 보였지만 갈렙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자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벌써 85세 고령인데도 여전히 적극적인 Next Vision 성취를 지향하며 살았던 것이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창업하기 전 레이 크록은, 53세 나이에 겨우 밀크쉐이크와 함께 30년 동안 종이컵을 파는 세일즈맨으로 반평생을 보냈다. 그래도 그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30년이라는 기나긴 밤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서 성공을 한 것이다. 인도의 벵골 호랑이는 먹이 사냥에서 사냥감을 잡는데 약 스무 번의 시도 끝에 한 번 성공한다고 한다. 그는 실패 앞에 포기가 아니라 도전의 태도를 가져 그 도전이 성공을 이루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 번 실패하면 쉽게 단념하고 한탄한다. 잃은 것 때문에 원망하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이 자산이 되어 다시 도약해야 한다.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음악가였다. 31세로 죽을 때까지 방 한 칸 없었고, 그토록 필요한 피아노 한 대 없는 불우한 음악가였다. 어느 날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데 악상이 떠올랐다. 그는 오선지를 찾았다. 친구가 레스토랑 메뉴판에 오선지를 그려주었다. 그것이 유명한 아베마리아 세레나데이다. 환경에 낙심할 필요 없다. 주위 시선에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폭풍이 일어도 지구는 돌고 있는 것이다. 고난 속에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가면 길이 열린다. 신앙의 열정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고 그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나니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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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자유의 축복 (요8:31-36)
1997년 북한의 권력서열 제3위(노동당 국제담당비서)였던 <황장엽>씨가 주중 한국 대사관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 망명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북한에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나라로 망명함에 따라서 그의 가족들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북한 권력층의 실세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남한으로 망명을 할 경우 남아 있는 가족들이 얼마나 비참해 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남한으로 망명을 감행한 이유는 바로 체제의 자유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고, 너무나 잘못되어 있는 북한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무모한 망명을 한데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의 행동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역사가 평가를 할 것입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 소중함”입니다. 체제의 자유, 정치적인 자유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억압이 있는 나라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기꺼이 몸을 던지고, 민주화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유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억압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애타게 목말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정치적인 자유보다 더 필요하고 소중한 자유가 있는데 바로 영적인 자유(신앙의 자유)입니다. 그 영적인 자유에 대해서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를 취하는 방법을 알아야합니다.(요8:32,36) 둘째는, 자유를 빼앗기지 않게 지켜야합니다.(갈2:4) 셋째는,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갈5:13)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소중한 자유를 잘 지키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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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이현령비현령(4) - 가스라이팅 (gaslighting)
고신!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이름입니다. 고신!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더 무섭다고 했습니까! 고신!순교자의 정신,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노래하지만 지나가던 개가 고신을 비웃어도 고신에 속한 사람들 중 몇 명이나 당당하게 반론을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개가 고신을 비웃어도 관심을 가질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고신!그래도 고신이 고신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고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신! 내가 부르다 죽을 이름이여! 고신! 고난도 슬픔도 그 이름 아래 묻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이름이여! 고신에는 각계각층에 많은 인재들이 있습니다. 의외로 인재들이 많습니다. 우리 선배들의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는 철저한 신앙교육으로 훈련받은 인물들이 아직도 곳곳에 건재합니다. 오늘 우리는 선배들의 신앙과는 너무 멀어져 있어 다음 세대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인재들이 양산될지는 극히 우려스럽습니다. 위기의 고신이라지만 마지막 희망 하나가 있다면 그렇게 훈련받아 각계각층에서 묵묵하게 고신의 신앙을 지켜가는 인재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왕상19: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문제는 그 인재들이 교단 내에서는 대부분 소위 정치를 등지고 살고 있습니다. 허물어져 가는 위기의 고신을 위하여 두 팔을 걷어붙이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희생과 수고를 하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여리고성과 같은 절벽을 만나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제 내 교회나 잘 섬기다가 가리라!”라는 푸념을 내놓게 됩니다. 교단 외부에 있는 인재들은 고신을 사랑하는 신앙과 정신이 소외되었다는 안타까움과 서러움과 절박함으로 오히려 원한이 되고, 원성이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뿌리가 고신이요, 고신 신앙이기에 고신이 문을 열고 불러만 준다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신의 품으로 달려올 자들이 분명합니다. 고신대, 복음병원의 위기를 위기라고 말들 하지만 어쩌면 이 위기가 진짜 위기인지 모릅니다. 오랜 세월 이러한 위기가 있어 왔기에 오늘과 같은 고신대, 복음병원의 위기는 불을 보듯 자명한 사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고신 내부에 있는 인재들과 고신 외부에 있는 인재들이 왜 이렇게 산화하여 떠돌고 있을까요? 세월이 가면 나이를 먹듯이 자연스러운 질서나 예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하면 바른 기준과 질서에 따라 책임과 권한이 주어져야 합니다. 총회 산하 기관에 몸을 담고, 고신의 식구로서 고신의 교회와 기관을 위해 한 몸 불사르겠노라고 하는 청운의 꿈을 다짐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줄을 서야 되는지를 눈치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신의 기관에 몸을 담은 식구들은 이 눈치, 저 눈치, 이 계파, 저 계파, 이 진영, 저 진영, 이 집안, 저 집안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낼 때 자연스럽게 진급을 하고 책임 있는 사명과 자리로 옮겨가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일을 잘해도 소용없다고 합니다. 위기를 직시하고 위기를 부르짖으면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 되고, 다 같이 헌신해서 위기를 돌파하자고 외치면 손해 보기 싫어하는 동료들도 외면할 뿐 아니라 집행부에서는 다루기 힘든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그러니 제일 잘하는 방법, 제일의 능력은 비위를 맞추고 손을 비비면 됩니다. 급기야 직원들에게 보직과 사명을 맡기면서 “어느 계파에 속해 있느냐? 누구와 가깝느냐? 어느 진영 사람이냐?”가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고 합니다. 이해하기 좋게 최근의 있었던 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평생을 고신대를 위해서 온갖 어려운 일 마다하지 않고 봉사한 이명호 장로의 일입니다. 이 장로는 고신대 기독교교육학과(82학번)를 졸업하고, 1989년 고신대에 몸을 담아 35년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2022년 6월 처장으로 보직을 받아 올해 2024년 12월에 퇴직(은퇴)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퇴직을 앞에 두고서 6개월 휴가(공로)를 주는데 이렇게 볼 때, 올해 2024년 6월 30일까지 3달만 더 근무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장로는 3달도 채 남지 않은 4월 3일에 처장에서 해임되어 학술정보관장(구. 문헌정보관장)으로 밀려(인사발령)나게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당사자는 정작 “이유를 모르겠다, 이유라도 알려주면 좋겠다.”라고 합니다. 이 장로는 한평생 고신대에 몸을 담았고, 고신의 장로로서 “기독교 대학으로 바르게 성장해 가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하면 정말 사람이 없어진다. 안타깝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장로는 현재 총장의 직계 후배입니다. 작년에 현 총장이 총장으로 선임된 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잘 도와달라 끝까지 함께 가자”고 부탁을 했고 이 장로도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다고 했는데 결과는 위와 같습니다. 필자가 알고 있는 총장은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 할 사람입니다. 고신의 장로 아들로 누구보다도 고신을 잘 알고 후배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총장이 되고 나서 사람이 달라진 것입니까? 겨우 몇 달 사이에 말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 이 총장으로서는 얼마나 든든하고 믿을 수 있는 후배가 아닙니까? 한평생의 일을 마무리하는 이 장로 역시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2달도 남지 않은 이 장로를 보직해임 시키고 학술정보관장(구. 문헌정보관장)으로 물러나게 했습니다. 과연 총장이 그렇게 했겠습니까? 총장의 평소 인품을 잘 아는 필자는 절대로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학교 구성원들은 총장은 허수아비요, 다른 사람이 실제 총장이라 말한다고 합니다. 학원 이사는 물론이요, 법인 사무실의 직원이 학교와 병원을 좌지우지한다고 입을 모은다고 합니다. 학교와 병원의 보직 인선에 총장이나 병원장의 의중보다는 외부의 입김이 더 크다고 교직원들은 말합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지만 고신과 고신대를 위기로 몰아넣은 오늘까지의 악습이요, 안하무인입니다. 이런 상황에 기관의 구성원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까? 아니 어떤 자세를 취할 것 같습니까? 학원 이사들은 위기라고 소리치며 교회의 호주머니를 노릴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산하 기관의 식구들이 정당하게 일하고 정당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예상 가능한 행정을 집행하기 바랍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영광을 위한 기관을 누가 이렇게 똥 칠을 하고 있습니까?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우리 사람으로 불렀으면 적어도 1-2년은 전권을 주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왜 사람을 불러 놓고 이런 말을 듣게 하고, 이런 식으로 손발을 자르고, 얼굴마담 노릇을 하게 합니까? 기준이 허물어지면 이렇게 됩니다. 법을 집행하는데 “법은 아니라 해도 우리가 다 찬성하면 할 수 있다”고 하는 결과가 바로 이것입니다. 총장을 정당한 방법으로, 정당한 법으로 초빙했어야 합니다. 억지로 총장을 불러오기 위하여 학원이사회와 총회를 운영하는 자들은 총회와 총대들을 속이고 기만한 결과가 이런 폐단을 만들었습니다. 불법적인 정관개정 고려학원 이사회는 지난 73회 총회에 고려학원 정관개정을 의뢰했고 총회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총회에 상정되는 안건은 정확하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개인이라면 당회와 노회를 거치고, 법인이라면 법인 이사회에서 충분히 논의하고 결정한 안건을 상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총회는 바로 그 안건을 접수하여 다루어야 합니다. 지난 73회 총회는 고려학원 이사회의 이 정관개정 안건을 접수했고, 정관을 개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관개정 논의를 위한 임시이사회는 정작 총회를 파한 후 3개월이 지난 2023년 연말에 열렸고, ‘사후 인준’이라는 명목으로 통과시켰습니다. 이것이 총회 법을 따른 정당한 절차입니까? 총회는 결과적으로 이사회가 제대로 논의하지 않은 안건을 접수, 논의, 개정했고, 고려학원 이사회는 총회와 교단을 기만했습니다. 이런 불법적인 개정안으로 총장 공모는 이전에 하고, 총장 선출은 개정된 법으로 집행했습니다. 총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법으로 총장에 오르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사욕의 의도를 가진 불의한 자들이 총장의 발목을 잡은 결과입니다. 총장의 발목을 잡은 총회의 몇몇 실권자들이 고신의 미래요, 자랑이자 자부심이기도 한 고신대와 복음병원을 세상보다 더 저질 기관으로 만들고 있음을 자인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총회와 총대를 기만하고 속인 학원 이사들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 아니 총회는 이것이 사실일 경우 모든 이사들을 반드시 소환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을 결정하게 된 총회 임원회도 당연히 책임져야 합니다. “나는 몰랐다, 모른다”고 하는 총대들 역시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서든지 자신이 없으면 이번 총회 총대를 포기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고신을 위해 하나님으로 부름을 받은 고신의 총대들이여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습니다. (살전5:6)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벧전4: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란 말이 있습니다. 대상에게 정서적인 학대를 지속하여 대상이 자신의 판단력이 매우 낮다고 스스로 믿게 만들어, 그가 행위자에게 의존하게끔 만드는 세뇌의 일종입니다. 가해자에게만 이득이 되는 교묘한 궤변, 날조, 선동, 정치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총회 곳곳에서 정권(?)을 잡고 있는 실세들은 총회와 산하기관들을 “가스라이팅(gaslighting)”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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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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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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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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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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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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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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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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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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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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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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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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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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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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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망(網)을 쓴 우리들, 봄날은 간다.
- 성경 말씀 신명기 25장 4절에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고 했다. 일하는 자에게 수고의 대가를 주고 먹을 것을 반듯이 주라는 주님의 명령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풀어쓴 고린도전서 9장 10절을 보면 곡식 떠는 자가 소망을 갖고 일하듯 밭 가는 소 또한 소망을 갖고 일한다고 했다. 코로나19의 역병이 3년째 기승을 부리며 온 인류에게 망(網)을 씌워놓고 있다. 2022년에 들어서도 우리들 모두 마스크라는 망을 쓰고 봄을 맞았다. 아버지의 소망을 바라볼 수 없는 죄인들인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개나리 진달래가 봄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 세상 또 한해의 봄날은 가고 있다. 1953년 가수 백설희가 불러 국민가요가 된 ‘봄날은 간다’는 한국인의 정서에 뿌리가 깊이 서려있다. 6.25전쟁 시기 해마다 따뜻한 봄날은 오지만 봄이 아니었다. 전쟁의 참혹함으로 젊은이들에게 소망이 없어 보일 때 박시춘 작곡에 서정성의 작사가 손소원이 작사한 봄날은 간다의 곡이 만들어져 널리 불렸고 전쟁 이후에도 국민가요가 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지기도 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가사를 가슴에 새겨보면 애틋한 남녀의 사랑 가운데 큰 아쉬움이 자리하고 있는듯하다. 그래서 봄날은 간다는 전쟁 속의 슬픈 봄날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한 맺힌 국민가요가 되어 우리의 정서를 후벼댔다. 이후 봄날은 간다는 조용필, 장사익 기라성 같은 대형가수들이 리메이크하여 많이 불리고 있다. 요즘 젊은이 미스·미스터 트롯 가수들도 많이 부르는 가요가 되고 있다. 2001년 영화로도 만들어져 이영애와 유지태가 주연으로 만들어졌다. 애틋한 남녀 사랑이 처음과 끝이 달라지는 비극의 러브스토리로 가슴에 아려있다. 처절한 전쟁의 아픔 속에 사랑과 행복 이별로 얽혀가는 사람들의 고난의 정서를 보여준 영화이기도 하다. 지금 2022년 봄날은 어떤가. 봄날은 온 줄도 모르게 가고 있다. 코로나 19라는 역병이 온 지구촌을 전쟁보다 더한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이 땅에 예수의 탄생과 부활로 구원의 여정을 이루는 세기의 역사를 코로나가 새롭게 바꿀 수도 있다는 무서운 전망을 하기도 한다.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겪어보지 못한 공포 속에 언젠가 끝이 오면 전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 아닌가 하는 나약한 인간의 막연한 기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은혜 입은 우리들은 마지막 때를 진짜 봄날을 준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5절에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다. 복음의 밭갈이를 않는 우리들에게 망을 씌웠을까. 아니다. 소망을 가진 자에게는 망을 벗겨줄 것이다. 더욱 복음의 소망을 가져보자. 우리는 예수 다시 오실 때 받을 칭찬 영광 존귀 영원한 유업을 받는 그때는 복되고 그리고 영원한 봄날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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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망(網)을 쓴 우리들,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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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칼럼] 산적한 경남 진보교육의 문제! 이를 해결할 교육감은 누구일까
- 경남 교육감 선거를 목전에 둔 시점에 경남 교육에 대한 진지한 반성은 필수다. 진보교육감의 장기집권, 특히 8년째 장기집권 중인 경남의 진보교육, 자칫 12년 교육독재를 방불케하는 사건이 이어질 수 있는 중차대한 시점이기에 더욱 그렇다. 경남도민 다수는 ‘경남교육이 뭔가 본질에서 멀어져가고 있음’을 안다. 조국사태를 통해 확인된 내로남불, 공정과 정의의 상실, 말뿐인 진보의 허구와 실상 등 일맥상통한 체험을 하고 있는 듯하다. 진보교육감은 국·영·수 위주의 지식교육을 전통적이고 틀에 박힌 교육, 시험위주의 줄세우기식 교육이라고 폄하했다. 반면, 지식교육 이외의 온갖 교육 즉, 인권, 통일, 민주시민, 노동인권, 성적자기결정권, 다양한 직업체험 등 경험적이고 실질적인 교육이 21세기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설득했다. 학생이 행복한 학교, 다양한 경험 교육, 놀이와 쉼, 민주시민의식함양, 학생인권, 노동인권, 성인권 등 할 수 있는 교육을 현장에 쏟아부었다. 학교교육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교육과정에 인권교육, 통일교육, 민주시민교육, 통일교육, 노동인권교육이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상대적으로 국·영·수 교과 수업 시수가 줄어들었다. 그 결과는 처참하다. 학교수업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기초학력미달 수준의 극심한 증가, 대입진학경쟁력의 추락, 온갖 학교폭력, 성폭력사건, 교권추락, 학교장의 자율성 침해, 도교육청의 전교조 편향 집단화, 학내 노조 간 갈등과 파업 및 교육공백, 정규교사들의 역차별 논란 등 학교 현장부터 도교육청행정 전반에 이르기까지 엉망진창이다. 교육의 인성적인 면이든 실력적인 면에서든 경남의 교육경쟁력은 바닥을 치고 있다. 양두구육(羊頭狗肉, 겉으로는 훌륭한 듯이 내세우지만, 속은 보잘 것 없음)이다.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해놓은 진보교육감의 선물을 마냥 우리 자녀들에게 좋은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막상 포장지를 뜯어보니 실망스런 내용물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겉포장지는 좀 투박해도 내실있고 진정성이 있는 내용물을 받고 싶다. 학교현장부터 교육행정 전반에 이르기까지 망가진 경남교육의 문제를 제대로 개혁할 적임자를 찾아야만 한다. 최소한 3가지 필수요건을 갖춰야 한다. 유·초등·중등학교 교육현장전문가, 도교육청개혁이 가능한 교육행정전문가, 학생의 역량을 제대로 키울 지식교육 가치를 아는 보수적 교육철학이다. ‘학교다운 학교! 교육다운 교육!’을 실천할 수 있는 중도·보수 교육감 후보의 단일화를 통해 경남교육의 경쟁력을 높이고, 경남의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지도자로 발돋움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일구이언 이부지자(一口二言 二父之子)라 했다. 현교육감은 재선당시 학생과 학부모, 도민 앞에서 스스로 했던 약속을 되새기며 최소한의 교육자의 양식을 지켜주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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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칼럼] 산적한 경남 진보교육의 문제! 이를 해결할 교육감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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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남용의 결과 (민20:10-13)
-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인들을 매료시킨 홍콩 액션 영화배우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소룡>, 미국 명 <부르스 리>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영화배우였을 뿐만 아니라 온 몸이 운동으로 다져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도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1973년 그의 나이 32세 때 갑자기 죽어서 전 세계 영화 팬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說들이 많았습니다. 독살을 당했다는 설도 있고,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설도 있고, 자살을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사망 원인이 약물 남용 때문이었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는 늘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렸고 그 두통을 이겨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약물을 복용했는데 그 약물을 너무 과다하게 복용한 것 때문에 부작용을 일으켜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약물을 과다하게 남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알려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미국 의학원의 통계에 따르면, 매년 미국에서 약물 남용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사람이 100만 명에 이르고, 그 중에 사망하는 사람이 매년 1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약이 병을 낫게 하고 사람을 고치기도 하지만, 반대로 병을 악화시키고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을 남용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옛날에 “약 좋다고 남용 말고 약 모르고 오용말자!”라는 표어가 있었는데 정말 귀를 기울여야 할 중요한 내용입니다. 필요한 것이나 좋은 것이라도 남용하면 반드시 손해를 보거나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절대로 남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직분을 남용하면 손해를 보게 됩니다.(민20:11) 둘째로, 재물을 남용하면 후회를 하게 됩니다.(눅16:19) 셋째로, 자유를 남용하면 혼란을 겪게 됩니다.(갈5:13) 남용이나 악용을 자제하고 선용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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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남용의 결과 (민2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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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팬덤(fandom)문화 시대의 병폐
- 이 시대 사회문화 중 팬덤문화 현상은 일반적인 사회문화 현상이지만 기독교 문화 안에도 존재할 만큼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팬덤이라는 말은 광신자(狂信者)를 뜻하는 “퍼내틱(fanatic)”에서 유래한 ‘팬(fan)’과 영역 나라 등을 표시하는 접미사 ‘덤(dom)’의 합성어로 특정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대중문화가 확산되면서 “팬덤문화”라는 말도 생기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대중가수 조용필 씨가 무대에 나오면 “오빠~ 오빠~”를 외치며 인기를 따라 형성되었던 ‘오빠부대’가 요즘 말하는 팬덤인 것이다. ‘팬심(fan心)’이 확대되면 ‘팬덤(fandom)’이 되는 것이다. 성경 인물 헤롯 대왕을 보면 유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에 대한 팬덤 현상을 유지하고 왕권을 강화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백성은 유대인들인데 자신은 이두메인(에돔)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출신성분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가장 좋아할 성전건축을 46년에 걸쳐 건축하여 선물로 주었는데 이것이 팬덤을 형성하기 위한 전형적인 포퓰리즘(populism)이다. 또한 유대 사회는 사두개 당파, 바리새 당파, 에세네 당파, 셀롯(열심)당파 등이 있었는데 이 파당들도 팬심이 팬덤이 되어 집단이 형성된 것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도 바울파, 게바(베드로)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등이 팬덤을 이루었는데 이런 팬덤문화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싸움을 통한 수많은 대미지(damage)를 입게 된 것이다. 우리 정치문화 형성을 보면, 민주당, 국힘당, 거대 양당과 소수 정당들 모두가 팬덤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들이 팬덤을 형성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지하는 인물이 이 나라와 개인에게 100% 만족을 줄 것으로 기대하며,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 나라가 망한다는 구조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공약을 하고 인기를 끈다 하더라도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신(神)이 아니기 때문에 능력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세례요한이라는 특출한 인물이 유대인들 가운데 팬덤이 형성되어 엄청난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세례요한보다 더 강력한 존재가 나타나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자를 살리며 기적의 역사를 나타내었다. 특별히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면(요 6:15) 유대 나라의 경제문제가 해결되고, 기적의 능력을 발휘하면 로마로부터 독립을 얻고 자주 민족 국가로써 어엿이 건국(建國)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셨다. 우리 주님은 육신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개인 팬덤문화가 존재하는 이상 현실 세계에 나타나는 병폐는 소멸되지 않는다. 개인의 인기와 팬덤에 치우치지 않고 바른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 세례요한과 바울을 들 수 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정보를 입수한 결과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나보다 능력이 많아서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사람(눅 3:16) 이라고 했으며, 그는 흥하여야 될 분, 나는 쇠하여야 할 존재(요3:30)로 말하며 대중들 속에 인기를 누리기보다는 예수를 높이는 삶을 살았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권면하기를 나와 아볼로는 단지 심고 물주는 존재이지만 그리스도는 자라게 하는 주권자임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개인 팬덤문화에 빠질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한 팬덤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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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팬덤(fandom)문화 시대의 병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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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습기를 공급하라
- 고대 철학자 Tales(Bc 625-547년)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 하였다. 모든 생명체는 물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 외의 행성들에 생명체 존재 여부를 알기 위해 먼저 물의 유무를 조사한다고 한다. 이집트에서 3천 년 된 미이라가 발견되었는데 미이라의 손에 밀알 몇 개가 쥐어져 있어 시험 삼아 심어 보았더니 싹이 나더란다. 물이 없으니 3천 년이 흘러도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다가 물이 공급되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물을 필요로 한다. 미국 LA에서 동쪽으로 가면 갈수록 점점 사막화가 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무들이 큰 잎사귀에서 점점 작아지다가 급기야 사막에 이르러서는 가시나무들만 보인다. 가시는 본래 잎사귀였지만 메마름이 가시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사막에는 온통 선인장들뿐이다. 메마름은 재앙이다. 인간의 심령도 마찬가지다. 심령의 메마름이 가시를 만들어 나를 찌르고 남을 찌르게 된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이생의 염려가 가시를 만든다고 하였다. 염려하다 보면 가시가 되고 점점 날카롭게 되어 남을 찌르게 된다. 염려의 반대는 평강이다. 평강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염려를 물리치고 평강을 얻는 비결을 바울은 빌립보 4:6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였다. 염려하면 마음이 황폐하여 가시가 되지만 기도하면 가시가 변하여 잎사귀가 된다. 주변에서 선인장 같은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 이들은 너무 날카로워서 접근하기도 말을 걸기도 어렵다. 심령이 메말라 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마음에 상처받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못 볼 것을 보고 못 들을 것을 듣다 보면 이런 것이 쌓여 독이 된다. 독이 쌓이면 마음이 점점 강팍해지고 메말라 사막화되어 버린다. 나쁜 것이 쌓이면 씻어내야 한다. 가시를 잎사귀로 만들어야만 남도 살리고 나도 산다. 기도는 가시를 잎사귀로 변화시키는 비결이다. 다윗은 블레셋으로 부터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낸 일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에 의해 많은 날 동안 유리걸식하며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심지어 생명의 위협까지도 여러 번 받았다. 분하고 억울하여 사울 왕에 대해 독기를 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용서의 사람이 되고 관용의 사람이 된다. 사울 왕을 죽일 수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살려 준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갔고, 보디발 아내의 위증으로 억울한 감옥살이를 한다. 총리가 된 요셉은 형들에게 복수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들의 죄를 깨끗이 용서해주었다. 기도가 마음속 독기를 사라지게 하였기에 용서할 수 있는 관용의 사람이 된 것이다. 바위에 떨어진 씨는 “습기가 없어 말랐다” 하였다. 사막도 물이 공급되면 옥토가 되듯이 심령에도 수분이 공급되면 옥토가 된다. 지금 여러분들의 심령은 어떤 상태인가? 메마름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심령의 밭에 자주 습기를 공급하여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가야 한다. 그래야만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관용의 사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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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습기를 공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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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진짜 믿어지니?
- 진짜 믿어지니? 500원의 헌금 이후, 안내받은 청소년부 주일예배에 찾아갔다. 긴장과 함께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 그리고 흥분으로 문을 열었다. 어린이예배에서 보았던 남자 전도사님의 격한 환영이 나를 더 긴장이 시킨다. 환영해 주시니 마음이 놓이면서도 긴장이 더해지는 것은 왜일까? 주변을 둘러보니 내 또래 남자 아이가 앞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외모도, 기타도, 노래도. 나이스하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평소에 노래를 즐겨 부르던 나에게는 너무나 멋진 모습이다. 흠모할만하다. 그리고 긴 의자에는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모여 앉아 앞에 선 남자아이의 가이드에 따라 노래를 부르고 있다. 뭔지 모를 흥분에 자리에 앉게 되었다. 모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모르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래도 상식이 있었기에 주머니에 천 원짜리 한 장 들고 온 것으로 헌금순서를 능숙하게 넘긴다. 문제는 사도신경이었다. 아주 어릴적 외웠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눈을 감고 조용히 친구들의 중얼거림을 듣는 것으로 OK. “진짜 왔구나? 반갑다. 중고등부 담당 전도사님이야.” 오전 주일학교 예배에서 만났던 분과 예배가 끝나고 나서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20대 후반? 인상은 좋았는데 잘생긴 분은 아니다. 그리고 옆에는 예배 내 옆자리를 지켜주었던 분이 중고등부 선생님이라는 소개를 하셨다. 미소가 참 아름다운 분이다. 간단하게 나의 소개를 하며 주변에 있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유난히 동갑이 많은 교회였다. 그리고 한 살 어린 여중생들이 많았다. “어? 오빠네? 반가워. 자주봐.” 아, 내가 오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을 오랜만에 상기시켰다. 이곳에 오기를 잘했다. 등록이라는 절차를 안내받고는 ‘1’도 고민하지 않았다. 이곳 패밀리가 되어야했다. 무엇인가 내 삶에 밝음이 찾아오는 느낌이다. 그렇게 흔쾌히 등록을 마친 후 전도사님께서 갑자기 진지한 톤으로 질문을 하신다. “사영리를 알고 있니?” 태어나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단어다. 모른다는 나의 대답에 전도사님은 나를 의자에 앉힌 후 옆에 앉아 작은 책자를 꺼내셨다. 글이 많은 것도 아니고, 길지도 않았다.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관계.’ 처음 듣는 이야기다. 듣기도 하고, 생각도 하고, 같이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던져지는 질문. “이 사실이 믿어지니?” 전도사님은 나에게 성경의 이야기를 전해 준 것 같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믿어야 할 것처럼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는 진짜로 믿어졌다. 오히려 오늘 소개받은 예수님께 감사와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런 분이라면 잘 따라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전도사님의 물음에 믿어진다는 힘찬 대답을 드렸다. 전도사님은 놀라셨다. 그리고 재차 물으셨다. “정말 믿어지니?” 아니, 믿으라고 지금까지 설명하셨던 분이. 내가 믿는다고 했더니 이분이 오히려 믿지 못하는 눈치다. 정말 믿어지고, 앞으로 더 잘 알고 싶다는 나의 말에 전도사님의 눈은 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는 자신을 따라서 기도를 하자고 말씀하신다. 전도사님의 떨리는 음성을 따라 나는 또박또박 반복하며 따라한다. 그렇게 나는 짧은 시간에 예수님의 매력에 빠지면서 신자가 되었다. 당시 전도사님과 지금도 연락을 한다. 그분은 당시를 회상하시며 그 이후로도 나처럼 사영리를 소개받고 한 번에 영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사실 나도 사역을 하며 그런 학생을 만나본 적이 없으니. 사람에게 믿음이 생긴다는 자체가 은혜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확신 있게 본인이 전하고도 그렇게 놀라던 전도사님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조금 우습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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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진짜 믿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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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5
- I. 서언(序言)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언어를 배우면서 가장 어렵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는 외국어에는 거의 없는 존칭어와 낮춤말이라고 한다. 그것도 우리 국어의 존칭어가 극히 높임말, 예사 높임말, 예사 낮춤말과 극히 낮춤말 등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경어 사용이 없는 외국인들로서는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언어 예절은 우리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약 존칭어와 낮춤말을 잘못 사용했을 때는 예의를 중시하는 우리 문화에서는 말하는 자의 인격과 가문, 학력까지도 의심을 받게 된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더군다나 목회자의 경우는 거의 모든 사역이 언어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잘못 사용된 용어하나가 목회자의 전인격인 면을 판단 받을 수도 있다. 이에 본 호에서는 교회 안에서 잘못 쓰고 있거나 다소 듣기에 어색한 말의 사용 중에 ‘아내’에 대한 용어들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아내에 대한 용어 : “우리 사모(師母)입니다”란 말의 남용 1.아내에 대한 호칭들: 한자 문화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언어문화는 아내에 대한 호칭만 해도 아주 다양하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에게 아내를 소개할 때‘아내’ 혹은 ‘내자’라고 하거나 겸손하게 이르는 말로서‘집사람’이라는 말을 한다. 또 다른 사람의 아내를 높여 부를 때는‘부인’이라는 호칭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자기 아내를 남에게 소개할 때‘우리 부인’이라고 하거나 우리 마누라’라는 말을 하는 경우들도 종종 보고 듣는다. 전자의 경우는 너무 높여서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합당하지 않고, 뒤의 경우는 너무 낮추어 부르는 비속어이기 때문에 올바른 호칭어가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장 통합교단에서는‘아내’라는 말로 통일하자고 교단 내 교회들에게 권장을 했든 적이 있다. 2.‘우리 사모(師母)입니다’란 말의 남용: 아내에 대한 호칭들 중에 가장 어색한 말 중의 하나는‘우리 사모(師母)입니다.’라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경어법으로 본다면 너무 어색한 말이다. 왜냐하면, 사모라는 말의 뜻은‘스승 사(師)’에‘어미 모(母)’자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의 1차적인 의미는 스승의 부인을 높여서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요즈음에는 좀 더 넓은 의미로 확장되어서 2차적인 의미로는 직장의 윗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호칭어로도 겸하여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2차적인 의미는 사전적인 적합성의 의미로 본다면 다소의 문제는 있다. 그러나 이미 워낙 많이 사용되고 있는 사회 통용어가 되었기 때문에 2차적인 의미로 사용해도 현재로서는 별 무리는 없다고 본다. 사모라는 용어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 중의 하나는 교회이다. 흔히들 교인들이 목회자의 아내를 호칭 할 때‘사모님’이라고 한다.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좋은 호칭어라고 본다. 하지만, 목회자 자신이 자기 아내를 소개할 때‘우리 사모입니다’라고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또한 목회자의 아내들도 스스로를 소개할 떼‘어느 교회 사모입니다.’라고 하거나, 모임에서는 스스로‘사모회’란 명칭을 정하기도 한다. 이는 너무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말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내를 스승의 대열에 두거나 또한, 자신 스스로를 높여서 사모라고 호칭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 이런 경우가 범람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이‘사모’라는 호칭을 권사, 집사처럼 교회의 하나의 직책의 용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모는 교회 직책의 명칭이 아니라 교인들이 목회자의 아내를 높여서 부르는 호칭어인 것이다. III . 결 어(結語) 이상과 같은 경우가 하도 많다 보니 아예 이 사모라는 호칭어를 교회의 통상적인 직책의 용어로 사용하자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 사모라는 말은 이미 사회 일반 전체에 통용되고 있는 정상적인 사전적 표준어이기 때문에 이 호칭어를 교회의 직책 용어로 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또한 잘못 남용할 때는 일반 사회인들로부터 지탄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좋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사모라는 말이 덕스럽고 예의를 갖춘 아름다운 존칭어로 보이지만, 이를 자칫 남용하면 오히려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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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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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관계의 리더십
-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 고부간의 갈등이 많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가 좋아야 가정이 편안합니다. 과거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이 많아서 고부간의 갈등이 많았습니다. 고부간에 관계가 깨지면 고통이 커집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고 며느리의 실수, 부족을 눈감아 주어야 합니다. 요즘은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 보면서 사는 시대입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격려해 주고 부족한 점이 보이면 상처 받지 않게 부드럽게 대화해야 합니다. 서로간의 나쁜 감정이 커지지 않도록 지혜롭게 해결해야 합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며느리라면 서로의 힘든 상황을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독립하여 따로 살면서 서로 보살피면서 사는 것도 하나의 지혜입니다. 시어머니는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며느리와의 관계가 좋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고부간의 좋은 관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재정문제로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재정관리도 잘해야 합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부담스러워 하지 말고 이해해 주고 섬겨야 합니다. 부모공경의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 쉽게 속상해하는 심리를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나이가 든 시어머니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약합니다. 서운한 감정을 쉽게 가지게 됩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형편이라면 상황을 잘 받아 들이고 적응해야 관계가 유지 됩니다. 따로 산다면 자주 찾아 뵙고 인사하며 전화해야 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가 쉽지 않습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미워질 때 ‘시’자들어가는 것이 다 싫다해서 시금치도 안먹고 시편을 읽지 않는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볼 때 자신의 아들을 섬기고 손주, 손녀를 키우고 살림 하느라고 수고하는 며느리의 힘든 환경을 이해하고, 도움이 되고,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며느리는 나의 남편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감사의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힘이 드나 지혜롭게 잘하면 관계가 깨지지 않게 됩니다. 서로 서로 양보하고 배려해야 관계가 잘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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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관계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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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부활신앙의 확신
- 부활신앙의 확신 주님은 베드로를 특별히 사랑하셨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주님은 자신의 부활소식을 가장 먼저 제자들에게 알리게 하셨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베드로의 이름을 호명하셨을까? 아마 그가 주님을 부인하고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요21:3).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님을 부인하고 디베랴로 갔으나 주님은 그들 먼저 가셔서 그들을 격려해 주셨다. 심한 좌절과 실의에 빠진 베드로에게 주님은 디베랴 바다에서 강한 확신을 심어 주셨다(요21:15-17). 부활신앙은 좌절에 빠진 우리를 강한 확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주님은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이들은 근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주님은 그들 곁에 가서 물으셨다.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눅24:17). 주님은 이들의 근심된 마음에 부활신앙을 불어넣어 줌으로 냉랭한 가슴에 불을 붙여 주셨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24:32). 부활신앙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풀어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해야 한다. 부활신앙은 냉랭한 우리의 가슴에 말씀과 성령으로 불을 지피는 것이다. 주님은 마음이 강퍅한 제자들을 꾸짖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이 말을 들으면 제자들의 신앙이 이상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왜 믿지를 못했을까? 사실 제자들은 지금 영적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전에 주님과 동행하면서 보는 신앙에 길이 들어져 있었던 자들이 한순간 보이던 예수가 사라져 버리니 그들은 갈 바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공허해지고 방황하게 되어 각기 제 길로 가게 되었다. 이제 보이는 메시야 시대가 끝나고 보혜사 성령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성령 보혜사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보이지 않는 보혜사의 능력을 구하는데 익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령을 무익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굳어지고 닫힌 완악한 마음을 책망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일 처음으로 제자들을 만나실 때 깊은 호흡을 내어 쉬면서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복음에 신실한 증인이 된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젠 복음이 유대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은 유대지역에만 제한 받았으나 성령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므로 성령 받은 우리로 하여금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그래서 딕 힐리스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마음은 곧 선교지이며, 그리스도를 모신 모든 마음은 곧 선교사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 믿지 않는 모든 자에게는 전도해야 하며, 예수 믿는 모든 자는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중생 하여 세례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함을 받아 멸망할 것이다. 부활신앙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 주신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 주님은 믿는 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표적을 주셨다. 여기 표적이란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테라스(Teras)란 의미이다. 이는 호흡이 멈추어질 정도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대제사장과 빌라도 총독의 숨을 멈추게 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다. 둘째, 두나미스(Dunamis)란 말이다. 우리가 바위와 같은 암반을 깨뜨릴 때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폭발물을 사용한다. 죄악으로 굳어진 암반과 같은 강퍅한 심령은 성령의 다이나믹한 힘으로만이 파괴할 수 있다. 셋째, 세메이온(Semeion)란 뜻이다. 이는 삶의 의미를 주는 것으로 신호기능을 가진 사인(Sign)을 말한다.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나가면 성령이 우리와 동행하므로 우리의 사역 현장에 놀라운 증거들이 나타난다. 그러면 믿는 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표적이 나타나는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쫓겨난다.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했다. 악한 령들은 예수 이름이 아니고는 절대로 쫓아낼 수 없다. 바울이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귀신들렸던 자가 바울의 사역을 방해하여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행16:18)고 했다. 예수만이 사망권세와 사단의 권세를 정복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귀신들이 물러간다. 새 방언을 말한다. “새 방언을 말하며”, 여기 새 방언이란 부활신앙을 소유한 자들이 죄와 사망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어떤 세력 앞에서도 담대하게 주님의 이름을 증거 할 수 있는 부활신앙을 소유한 전도의 역사를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고 했다. 이는 말씀의 능력이다. 뱀을 잡는다. “뱀을 집어올리며”, 여기 뱀은 지금 우리가 보는 땅에 기어 다니는 그런 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뱀은 미혹의 영으로 나타나는 사단을 상징하는 말이다. 에덴동산에 하와에게 나타난 뱀이 단순한 뱀 이전에 사단의 영이 역사한 것처럼 부활신앙의 소유자는 사망권세를 짓밟은 것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옛날에 교회를 박해한 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사약을 먹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복음을 전파한 사실들이 많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해 독약을 먹으면 죽는다. 영적으로 마귀는 우리의 심령 속에 죽이는 독약 같은 미움과 시기와 증오를 심으려고 한다. 그러나 부활신앙의 소유자는 그러한 것으로 인해 해를 받지 않고 말씀으로 승리한다. 병 고치는 능력을 주신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5:14-16)고 했다. 사도는 갔으나 사도와 함께 했던 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중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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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부활신앙의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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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공의가 하수 같이…
- 현대사회는 과학과 과학 기술 등 여러 면에서 굉장한 승리를 쟁취한 사회이면서도 동시에 전례 없는 부정과 부패, 불공정, 불의, 고통 그리고 비극에 깊이 빠져있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방대한 선택의 범위를 구가하면서 자국의 시민들은 거대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바로 그 정부가 전 세계적으로 수십억에 달하는 사람들을 영속적인 가난의 상태에 머물도록 만들고,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정치테러와 고문이 그들의 항존적 환경이 되도록 지원하거나 그러한 불의를 자행하는 부정의한 현실이 바로 현대사회의 한 심각한 비극이기도 합니다. 우크라이나의 비극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함께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 같이 흐르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하늘의 평강(샬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공의가 없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평강의 삶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기쁨과 떨림과 환희가 있는 샬롬은 공의로운 상태 하에서만 피어날 수 있습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많은 조건들과 상황들은 공의도 마찬가지로 깨뜨려 버립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공의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상호간의 의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회는 공의를 추구하는 사회입니다. 이와 같은 사회는 언제나 샬롬의 사회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공의를 추구하지 않는 사회는 샬롬의 성취를 가로막습니다. 예를 들어, 방직 공장 안에 어린아이들을 가두고, 자연 자원들을 함부로 낭비함으로 후손들로부터 그것을 착취하며, 자국 영토의 확장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국가는 불의한 국가이며, 이와 같은 사회와 국가는 공의를 파괴하며 필연적으로 샬롬의 성취를 가로막는 흑암의 세력입니다. 그렇다면 공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공의라는 단어를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냉담하고 원칙을 고수하는 비인간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의와 관련하여 연상되는 것은 재판 과정, 법적 절차, 감옥 등과 같은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공의는 본질상 권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공의와 권리는 사실상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향유할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공의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권리라는 단어 역시 공의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다소 냉담하고 비인간적인 어떤 것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권리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연상하는 것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 천부적 인권, 유엔 회원국의 권리, 권리 헌장 등과 같이 다소 추상적이며 고양된 권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권리의 의미를 공의와 관련하여 아주 다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개인이 어떤 것에 대해 권리를 가진다라고 할 때 그것은 윤리적으로 합법적인 권리, 그것을 실제로 향유함에 대한 주장, 그리고 그 어떤 것을 누림에 있어서 직면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보장받을 것에 대한 주장을 의미합니다. 권리는 다른 이에 대해 윤리적으로 합법적인 권리입니다. 권리는 다른 이에 대해 의무와 책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모든 책임이 권리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권리는 책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권리는 또한 그것을 실제로 누림에 대한 주장입니다.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그 권리를 실제로 향유하지 못하면 그 법은 공허한 것입니다. 그리고 권리는 그 어떤 것을 누릴 때에 일반적이거나 심각한, 그러나 고쳐질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의 사회적보장을 주장합니다. 위협에 대해서 보장하라는 주장을 권리로 보는 것은 권리가 사회에서 약자와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상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권리를 우리는 자기 방어의 권리, 자유의 권리, 발언과 참여의 권리, 그리고 안전과 생계의 권리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안전과 생계의 권리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안전과 생계권은 그것이 없다면 모든 다른 권리가 의미가 없어지며,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는 권리라는 의미에서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대부분의 다른 권리들보다 더 근본적입니다. 언론의 자유는 그것이 얻어지는 만큼 삶에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이도 많은 다른 권리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안전과 생계권보다는 임의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전과 가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관용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안전을 위협받는 자들과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은 살롬의 성취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과 같은 것입니다. 부유한 자가 기아에 있는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을 알고 도울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육체적으로 그 어려운 자를 공격하는 것만큼 그 주린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겠지만, 이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공의에 관한 책입니다. 구약의 모세 오경과 선지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공의를 요구하시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공의에 대해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사람들은 고아와 과부들, 나그네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 사회에 공의가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실제적 원칙은 공의가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미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공의가 요구하는 것은 고아와 과부들, 나그네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같이 한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지고 자신의 공정한 몫을 갖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해하는 공의의 본질은 현대 서구사회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공의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는 공의와 권리의 문제를 인간 존재의 아주 섬세한 조직과 같이 가장 근원적인 것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작금의 국내외 정세를 보면서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나 감언이설의 의식이 아니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흐르게 하라”(암 5:24)는 것임을 갈파했던 아모스 선지자의 호소를 다시금 가슴에 새길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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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공의가 하수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