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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신사참배의 망령이 부활했는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는 자들과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사야 5:20) 지금 이 순간, 이란의 이슬람 독재 정권 아래서 10대 소녀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자유를 외쳤다는 이유로 짐승만도 못한 만행을 당하고 있다. "처녀는 곧장 천국에 간다"는 사탄적 논리로 강간을 자행해 정조를 빼앗고 교수형에 처하는 이 광기 어린 현장 앞에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참혹한 것은, 이 피의 정권에 동조하며 자금을 대는 대한민국 이재명 정권과, 그 주역을 거룩한 강단에 세워 '용비어천가'를 부른 한국 교계 지도자들의 영적 간음이다. 1. 국익도 국민도 없는 이재명 정권의 '해괴망측'한 독재 원조를 규탄한다! 이재명 정권은 지금 레바논에 이어 이란에까지 '인도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혈세를 퍼붓고 있다. 이것이 과연 누구의 돈인가? 우리 청년세대들이 짊어져야 할 빚이며 국민의 혈세다. * 배신 외교의 극치: 미국과 이란이 전쟁 중인 상황에서 적대 세력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한미 동맹의 근간을 부정하는 자폭 행위다. * 독재의 군자금: 50만 달러라는 지원금이 민간인에게 갈 것이라 믿는 바보는 없다. 이는 결국 소녀들을 살해하고 시민을 탄압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군자금이 될 뿐이다. * 주객전도의 인권: 자국민 고물가 고통과 천안함 유족의 눈물은 외면하면서, 외부 독재 정권에만 '개폼' 잡으며 생색내는 것은 국익을 팔아 자신의 사법 리스크와 정치적 폼을 사려는 비겁한 굴욕 외교다. 2. 강단을 유린한 이영훈·소강석의 '아부의 향연'과 현대판 신사참배 2026년 부활절, 거룩한 하나님의 성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단에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올라섰다. * 배교적 찬양: 이영훈 목사는 이란 정권을 돕고 교회 탄압의 중심에 선 이를 향해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신 분"이라며 찬양했다. 소강석 목사는 "박수 안 치는 사람 누구냐"며 성도를 협박하고, "아름답습니다"라는 망언으로 아부의 극치를 보였다. * 성도 유린: 권력자의 안위를 위해 성도의 노트북 비번을 풀게 하고 다이어리까지 뒤지는 만행은 이곳이 예배당인지 공산당 검문소인지 분간할 수 없게 했다. 이는 과거 일제 강점기 강단에 일장기를 걸고 천황에게 절하던 신사참배의 데자뷔다. 살아있는 우상에게 제사상을 차려준 이 목사들은 역사와 하나님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 3. 고신 저항 정신의 파산: 김홍석 전 총회장과 '기독교보'의 비겁한 변절 일제의 칼날 앞에서도 신앙의 정조를 지켰던 고신의 저항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 김홍석 전 총회장의 침묵: 이 참담한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손을 들어 축도한 행위는 악의 잔치에 하나님의 복을 비는 영적 배교다. * 기독교보의 궤변: 기독교보(2026.4.11)는 이 사태를 두고 "교단과 이념을 넘어", "교회의 연합과 일치"라 보도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좌파 독재 이념과 적그리스도적 행태가 '수용 가능한 이념'이 되었는가? 어찌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함께할 수 있는가? * 저항의 거세: "분열과 시대를 넘어"라는 표현은 자유민주주의와 교회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는 성도들의 입을 막으려는 교묘한 술책이다. 고신의 기관지라는 기독교보가 독재 조력자를 비판하기는커녕 '은혜로운 예배'라고 미화하는 것은 고신 선배들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4. 자칭 '고사모'의 선택적 정의와 위선을 고발한다! 손현보 목사가 강단에서 시대를 향해 선지자적 경고를 날릴 때는 '정교분리'와 '선거법'을 들먹이며 일간지에 광고까지 내어 정죄하던 자칭 '고사모' 목사들은 지금 어디에 숨었는가? * 손현보의 회개 촉구는 징계 대상이고, 이영훈·소강석의 굴종적 아부는 연합인가? * 거짓의 아비가 부활절 강단에 서서 성도들을 유린하는데도 '입꾹닫'하고 있는 당신들의 신학은 이미 파산했다. 당신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한상동 목사를 비판하던 가결자들과 다를 바 없는 비겁한 기회주의자들일 뿐이다. 결론: 주님, 이 땅의 촛대를 옮기지 마시옵소서! 이란의 소녀들이 처참하게 도살당하는 현실을 외면한 채, 권력자에게 강단을 팔아넘기고 '회복'과 '희망'이라는 거짓 평화를 노래하는 한국 교회는 심판의 대상이다. 이재명 정권은 즉각 독재 지원을 중단하라! 이영훈, 소강석, 김홍석과 고사모는 배교 행위를 회개하라! 기독교보는 저항 정신을 회복하고 위선적 보도를 중단하라!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선 멸망의 가증한 것들을 향해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외쳐야 한다. 그것만이 고신이 살고,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촛대는 반드시 이 땅에서 옮겨질 것이다.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잠언 31:8)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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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그렇게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도 인용을 하려니 부끄러운 한자말이 있다. 백절불굴(百折不屈)인데 백번 꺾어도 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떠한 어려움에도 결코 뜻한 바를 굽히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한국이 낳은 순교자이신 주기철목사님께서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죽음을 던지는 굳건한 의지를 남겼다. 동음이의어가 있는데 의사(義士)와 의사(醫師)의 차이가 크다. 앞의 의사(義士)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꿋꿋한 사람을 뜻하며, 뒤의 의사(醫師)는 자기가 가진 의술로 타인을 살리는 사람이다. 한 사람은 자기가 죽는 길이요, 또 한 사람은 남을 살리는 길이다.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의사(義士)와 의사(醫師) 중에 어떤 인물이 되기를 원하느냐고 물으면 자기 목숨을 내 놓는 의사(義士)가 되려는 청소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도 뜻한 바를 굽히지 않는 결연한 인물들이 더러 나온다. 가나안 땅의 분배를 두고 갈렙은 팔십오 세의 나이로 헤브론 땅을 달라고 요구를 한다. (여호수아14:12)에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라고 마치 출정식과도 같은 연설을 쏟아내었다. 이처럼 자기가 믿는 바를 끝까지 지켜나가는 행동은 쉽지 않다. 군산지방에서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귀암(龜岩)노인이라는 한말의 병사가 있다. 아무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귀암에서 살다 자결했기로 귀암노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 근위 제2연대 1대대 소속 하사졸(下士卒)로 당일 해산식장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항일의거에 참여한 저항군졸이다. 해산식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일본군은 어깨에 견장을 떼고 은사금 명목으로 80원씩 나누어 주었다. 그는 받은 은사금을 찢어버리고 다른 군졸들과 함께 무기고를 털어 당시 서소문 안에 있었던 군영을 뛰쳐나와 남대문 근처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 길로 일본군에게 쫓겨 창의문을 거쳐 삼남지방으로 내려가 약 2년 동안 의병으로 항일운동을 했다. 1909년 전라북도 줄포싸움에서 마지막으로 패하고, 이 때의 부상으로 평생 절름발이가 된 채 숨어 살았다. 그 무렵 금강하류 군산연안에 귀암이란 마을에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많이 와서 합숙을 하면서 호남지방에 선교를 하고 있었다. 쫓기던 그는 왜경들의 치외법권 지역인 이 선교사들의 숙소로 뛰어들어가 전후사정을 이야기하고 하인으로 고용해 줄 것을 애걸하였다. 이 절름발이 병사는 그날부터 여선교사들의 숙소 경호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군영에 있을 때 차고 다녔던 장도(長刀)를 보배처럼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서소문 탈영이래 한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그 장도를 뽑아 어깨에 둘러메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밤마다 숙사를 순찰했던 것이다. 귀암노인은 몸에 밴 군경 생활의 습성을 조금도 고치려 하지 않았다. 새벽 해 뜨기 전에 일어나 찬물을 끼얹고, 비록 절뚝거리지만 스스로의 구령에 따라 보조를 맞추었다. 또한 몸에 밴 군기 그대로 저녁에는 왕궁이 있는 북쪽을 향해 요배하는 것을 거르는 법이 없었다. 가까이 지내는 선교사들이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귀암노인이 급전이 필요하여 선교사에게 돈돔 빌려줄 것을 요청한다. 선교사는 이런 기회를 타서 몸에서 떼질 않는 장도를 저당으로 내놓기만 하면 돈을 빌려 주겠다고 하였다. 귀암노인은 한 사나흘 고민하다가 근 20여년 동안 잠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장도를 선교사에게 맡겼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 귀암노인은 아무말 없이 행적을 감춘 것이었다. 그의 실종과 더불어 저당으로 잡아둔 장도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장도를 놓아두었던 자리에 한 통의 편지가 놓여있었는데 펴 보니 ‘무사로서 양인 밑에 천한 삶을 이어가는 것도 치욕인데 칼마저 몸에서 떼어놓게 되었으니 이제는 잠시도 살아갈 면목이 없어졌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그날 선교사들은 귀암강 강변에서 자기의 장도로 자기 목을 찌르고 죽은 노병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한국의 무사정신에 강동한 선교사들은 귀암강 둔덕에 노인을 묻어주고 십자기를 세워 이 강골병사의 영혼이 영생할 것을 빌어주었다고 한다. 한 평생 다리를 절은 이 노인은 브니엘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이후 절었던 야곱이 떠오른다. (창세기32:31)에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라고 말씀한다. 야곱 역시 백절불굴의 기백이 있었다. (창세기32:26)에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라고 말씀한다. 백암노인이 만약 천국에 갔다면 함께 다리를 절었던 야곱과 함께 좋은 친구가 되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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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총대 파송 하지 말자 – ‘부결’
노회의 제일 중요한 사명은 목사를 양성하는 것과 그 사역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보호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회기에 부총회장으로 세움을 받아 올해 총회장이 되어야 했던 김문훈 목사는 우리 부산서부노회에 속한 우리의 동역자입니다. 노회를 넘어 고신총회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큰 일을 감당하던 포도원교회를 목회하는 우리 노회의 아들입니다. 세상에서도 내 자식이 분명히 잘못한 일이지만 부모가 일단 책임을 지고 모든 것을 안고 가는 것이 선행된 다음, 그 자녀의 잘잘못을 논합니다. 안타까웠던 것은 목사의 어머니 격인 노회도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보다는 세상 여론의 눈치를 보며 노회가 안게 될 부담부터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다 연약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세상의 눈치를 본다는 것,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세상 눈치를 보고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을 마치 복음적인 사역처럼 생각하는데, 교회가 하나님의 인정보다 세상의 평가를 우선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안타까움을 넘어 참담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더럽혀지는 것과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개인의 자리 욕심과 계파의 정치 논리로 동료 목사라는 자들이 공의와 정의라는 명분으로 동료 목사의 비리를 수집하고 세상에 발설하여, 한 목사의 잘못을 빌미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와 정의를 주장하는 것 같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욕심과 세상보다 더 비열한 정치 논리가 뱀이 꽈리를 틀 듯 그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피해를 입고 지금도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이용한 간교한 무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며, 고신총회가 반드시 밝혀내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대를 살며 목회하게 될 후배와 교회들을 위해서도 반드시 밝혀내어 교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전례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투서를 돌리고 연명하는 것조차 불법입니다. 특히 우리 고신은 세상 법정에 고발하는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아팠던 역사가 있습니다. 교회를 정화하고 공의와 정의를 원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성경에 기초한 교회법을 따라 정당한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현재 이 문제로 가장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포도원교회일 것입니다. 김문훈 목사도 오늘의 포도원교회가 없었다면 우리가 비난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포도원교회를 사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교회의 부름을 받아 목회하는 목사에게는 최고의 형벌입니다. 어려움과 위기에 처해 있는 포도원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포도원교회의 처절한 노력과 수고를 조금 더 지켜보십시다. 아마 많은 분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 의견이 나오고 여러 제안이 있었던 것도 모두 어머니 노회로서의 책임감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우리 노회 목사회원 1번으로서 같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금이라도 총회와 한국교회 앞에 우리 노회가 책임지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총회 총대로 나가고 총회에서 직분을 맡아 봉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회의 추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총회 총대를 추천한 노회는 총대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동시에 노회는 고신총회에 대한 책임도 있습니다. 노회가 책임을 지는데 눈 가리고 아웅하면 더 큰 웃음거리가 되고, 그렇다고 총회에 대한 책임도 회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우리 노회는 올해 총회 회계로 수고하셔야 하는 장로님이 있고, 선출직 이사도 있으며, 특별국 국원도 있고, 총회를 운영하는 상임위원회 위원장도 있습니다. 고신총회의 장자로 자부하는 우리 부산서부노회가 총회 임원과 총회 선출직 이사, 특별국 국원과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제외하고 이번 총회 회기에는 총대를 파송하지 않는 것으로, 고신총회 앞에 최소한의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였으면 합니다. 이 안이 노회에서 받아들여진다면 저는 헌법위원회 특별국 국원이지만 총대로 가지 않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총회 총대 선정에 대한 회의 진행 발언에 대해 정식으로 동의안을 냅니다. 이번 총회 회기에 우리 부산서부노회는 총회 임원 장로, 선출직 이사, 총회 특별국원, 총회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제외하고 총대를 파송하지 않기로 동의합니다.※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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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7] 이만열의 이승만 대통령 비하와 김구 성역화의 위험한 이분법
서론: 건국의 아버지를 지우고 실패한 낭만을 신격화하다 지난 연재를 통해 필자는 이만열 교수가 '친일 프레임'을 어떻게 악용하여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들을 사상적으로 숙청했는지 폭로했다. 그러나 이만열 사관의 진정한 목적지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인 이승만 대통령을 철저히 폄훼하고, 그 대척점에 서 있던 김구 선생을 신격화하여 성도들에게 그릇된 국가관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낙인찍는 자학적 사관의 핵심 동력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상적 오염이 고신 교단 내부로 깊숙이 침투했다는 점이다. 소위 '고신을 사랑하는 모임(고사모)'을 자처하는 이들이 등장하고, 수많은 목회자나 심지어 총회장까지도 제주 4.3 사건의 본질 왜곡이나 현 이재명 정권의 정교분리 오독, 차별금지법 등에 대해 침묵하거나 동조하게 만드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다. 1. 김구의 독립 투쟁과 친북적 반(反)건국 행위 사이의 엄격한 구분 이만열은 백범 김구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바친 고귀한 독립 투쟁의 헌신을 이용해, 1948년 건국 반대라는 명백한 정치적 실책까지 '민족적 정의'로 포장하는 논리를 펼친다. 그는 김구가 선택한 남북협상 노선을 분단을 막기 위한 유일한 민족적 정통성을 지닌 길로 평가하며, 반대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노선은 분단을 고착화한 행위로 비판해 왔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애국심은 오직 독립운동의 현장까지만 인정될 수 있는 것이며, 건국 과정에서의 친북적 행보는 결코 애국으로 미화될 수 없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그는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이야말로 민족 분단을 막으려 했던 정통성 있는 대안이었다고 평가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 역시 이승만의 단독정부가 아닌 김구와 김규식이 추구했던 통일 정부 수립 노력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등) 2) [비평]: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시기 헌신은 존경받아 마땅하나, 1948년 건국 과정에서의 행태는 단호히 비판받아야 한다. 당시 김구는 김일성이 쳐놓은 통일전선전술의 덫에 빠져 남북협상이라는 명분 아래 대한민국 건국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이는 소련과 김일성의 적화 야욕에 이용당한 역사적 과오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자유 민주의 기틀을 흔든 반건국적 행위에 가깝다. 이만열은 이러한 실체를 외면한 채 김구의 실패한 행보를 민족의 정통성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2. 제주 4.3 사건 왜곡: 공산 폭동을 ‘미군에 대한 항거’로 둔갑시키다 이만열식 사관이 낳은 가장 파괴적인 결과물은 제주 4.3 사건의 본질을 뒤바꾼 조직적 역사 공정이다. 그는 4.3을 단독 정부 수립에 저항한 민중들의 투쟁이자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사상은 고신 내 유력 목회자들에게까지 전염되었다. 필자는 과거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원로)가 손봉호 교수의 영향을 받은 일부 유력 목회자들과 함께 제주 전적지를 탐방하며, "제주 4.3 사건은 미군의 말발굽 아래 희생당한 제주 도민들이 미군과 이승만 정권에 항거한 저항"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사실을 한 참석자로부터 직접 듣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특히 4.3의 주동자 김달삼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1948년 4월 3일 새벽, 제주 전역의 경찰지소를 습격하며 무장 폭동을 일으켰고 수많은 경찰과 우익 인사, 양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폭동 직후 북한으로 도주한 그는 김일성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이후 6.25 전쟁 직전인 1949년 말, 다시 유격대장으로 남파되어 활동하다가 1950년 3월 20일 강원도 정선 승지골(일명 '김달삼 모가지 잘린 골')에서 광복군 출신 김관오 연대장이 이끄는 국군 제8사단에 의해 사살되었다. 김달삼이 일으킨 제주 4.3 사건이 어떻게 '민주 항쟁'인가? 이 명백한 반란 수괴를 미화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그는 제주 4.3을 통일 정부 수립을 갈망하던 민중들이 분단 노선에 저항하며 일어난 사건으로 규정하며, 그 비극의 책임을 이승만 정권과 외세인 미군에 돌린다. 또한 5.10 선거 거부를 민족 자결주의적 저항의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이만열, 『한국 현대사와 기독교』 등) 2) [비평]: 4.3의 본질은 공산 세력의 무장 반란이다. 특히 당시 공산 폭도들에 의해 자행된 '기독교 순교적 진실'을 이만열은 침묵한다. 제주 최초의 순교자 이도종 목사는 공산 폭도들에게 생매장당했고, 삼양교회 김임종 집사 등 수많은 성도가 살해되었다. 당시 제주 27개 교회 중 12개 교회가 소실된 이 참혹한 잔혹사를 외면하고 공산 반란군 주동자를 '민주 항쟁가'로 미화하는 것은 기독교 역사학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린 반역행위다. 이런 제주 4.3 사건을 민주항쟁이라며 전적지 순례를 한 이동원 목사 등 일부 귀가 얇은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이만열식 역사왜곡에서 속히 벗어나기를 촉구한다. 3. 이승만의 통찰을 거부하는 좌파적 역사 공정 이만열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며, 이를 단순히 '정부 수립'으로 폄하한다. 그는 대한민국이 1919년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이미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며 2019년을 '건국 100주년'으로 기념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쳐왔다. 그러나 이는 국제법상 국가의 3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이 실재하지 않았던 임시정부의 한계를 무시한 감성적 민족주의에 불과하다. 만약 1919년에 이미 나라가 세워졌다면, 우리 선조들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찾기 위해 왜 그토록 피 흘려 독립운동을 했단 말인가? 건국된 나라를 되찾는 것은 '광복'이지 '독립운동'이 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 ①: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민족 분단을 선택한 인물이며, 친일 세력을 비호하여 건국 정통성을 훼손했다.” (출처: 『우리 역사 500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만열의 주장 요지 ②: “대한민국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미 건국되었다.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주장하는 것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분단을 정당화하는 반역사적 행위다.” (출처: 이만열 기고 및 ‘건국 100주년’ 관련 강연 요지) 2) [비평]:이만열의 '1919년 건국설'은 듣기엔 그럴듯하나 치명적인 논리적 파탄에 직면한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 1919년에 이미 나라가 건국되었다면, 우리 선조들은 '이미 건국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왜 그토록 피 흘려 독립운동을 했단 말인가? 건국이 이미 완료되었다면 독립운동은 존재할 이유가 없으며, 이는 선조들의 고귀한 투쟁을 '이미 있는 것을 찾는' 무의미한 반복으로 격하시키는 궤변이다. 국제법적으로 국가는 국민, 영토, 주권이라는 3요소가 확립되어야 한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나라를 세우기 위한 '준비 기구'였을 뿐, 실질적인 영토를 통치하거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1948년 8월 15일 건국은 한반도 내에 실체적인 국민이 구성되고, 영토에 대한 통치권이 확립되었으며, 대외적으로 주권을 선포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실체가 완성된 기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국가의 토대 위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세웠고, '한미동맹'과 '기독교 입국론'이라는 강력한 안전판을 구축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북한의 공산 정권과 차별화되는 정통성의 근거다. 이만열은 이승만을 친일파 비호자로 매도하며 건국의 정통성을 깎아내리지만, 정작 북한 정권 핵심부에 포진했던 김영주, 강양욱, 정준택 같은 골수 친일 부역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한다. 결국, 건국을 분단의 원죄로 몰아세우는 그의 억지는 집안에 불길이 닥칠 때 남은 가족이라도 살리려 방화문을 닫은 소방관을 향해, '왜 가족이 못 만나게 가로막느냐'며 불을 지른 방화범 대신 소방관을 꾸짖는 꼴이다. 결론: 거짓된 이분법을 깨고 건국 정신을 회복하라 이만열 교수가 쳐놓은 이승만과 김구의 거짓된 이분법, 그리고 제주 4.3 사건의 왜곡은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파괴하려는 사상적 덫이다. 이 덫에 걸린 상당수 복음주의 목회자들과 '자칭 고사모' 목사들은 고신의 순결한 정신을 좌경화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다. 우리는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기 애국심은 존중하되, 1948년 건국 과정에서 김일성에게 철저히 이용당해 이승만의 건국을 방해한 그의 친북적 역사적 과오와는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자학 사관을 걷어내지 않는 한 고신과 한국 교회는 결코 바로 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승만을 통해 허락하신 자유 대한민국과 고신 교회의 정통성을 지켜내기 위해 이만열의 왜곡된 역사인식과 선전선동의 칼날을 반드시 꺾어야만 한다. 그것만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개혁주의 정절을 회복하는 길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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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6] 이만열의 친일 프레임과 역사적 살인: 건국 주역들을 향한 사상적 테러
서론:손봉호의 윤리가 씨앗이라면, 이만열의 사관은 그 독초의 토양이다 앞선 기고(1~5번)를 통해 필자는 손봉호 교수가 기독교 윤리라는 가면을 쓰고 한국 교회를 좌경화의 늪으로 어떻게 인도했는지 파헤쳤다. 그러나 손 교수의 윤리 담론이 고신과 SFC 내부에서 독버섯처럼 번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에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치욕의 역사로 규정한 이만열 교수의 왜곡된 역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만열은 친일 청산이라는 도덕적 결벽증을 무기 삼아 건국의 정통성을 난도질했으며, 고신 정신의 본질인 순교 신앙을 좌파적 민족주의 투쟁으로 변질시킨 장본인이다. 1. 국가 상징과 호국 영웅을 향한 인격적 살인 이만열 교수가 주도한 『친일인명사전』은 객관적 사료에 근거한 학술적 결과물이 아니라 특정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사상적 숙청이자 정치적 낙인찍기의 산물이다. 그는 역사의 입체성을 무시하고 오직 '친일'이라는 단일한 잣대만을 휘둘러 대한민국 건국의 기틀을 닦은 거목들을 사상적으로 매장하는 데 몰두하였다. 이만열의 주장 ①:“백선엽은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독립군을 때려잡은 반민족 행위자다. 그의 공로를 기리는 것은 민족 정기를 훼손하는 일이다.” (출처: 이만열, 「백선엽의 친일 행적과 국립묘지 안장 문제」, 2020년 언론 기고 및 강연 요약) 이만열의 주장 ②: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는 친일파다. 친일 잔재인 애국가를 국가로 부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출처: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지식산업사, 1991) [비평]:이는 일제강점기라는 처절한 역사의 맥락을 무시한 처사이다. 6.25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백선엽 장군을 간도특설대 경력만으로 단죄하는 것은 국군의 정통성을 파괴하려는 시도이다. 당시 간도특설대의 주요 토벌 대상은 독립군이 아닌 중공군과 팔로군이었으며, 1930년대 중반 이후 만주의 독립군 세력은 이미 궤멸되거나 소련으로 이동한 상태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철저히 묵살되었다. 또한 애국가를 공격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상징 자체를 부정하려는 고도의 사상적 테러이자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역사 부정주의이다. 2. 근대화의 선구자들을 향한 주홍글씨와 '선택적 단죄'의 이중성 이만열은 교육, 언론, 문학 등 각 분야에서 대한민국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거인들을 모조리 친일 부역자로 매도하며 그들의 사회적 성취를 부정하였다. 그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려 했던 선구자들의 고뇌는 외면한 채 결과론적인 비판만을 쏟아냈다. 이만열의 주장 ①: “김성수, 김활란 등은 일제에 협력한 반민족 인사들이다. 그들이 세운 교육·언론 기관은 친일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출처: 이만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역사적 의의」, 민족문제연구소 강연, 2009) 이만열의 주장 ②: “민족 지성이라 불리는 최남선과 이광수 역시 결국 변절한 부역자들에 불과하다.” (출처: 이만열, 『우리 역사 500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바다출판사, 2000) [비평]:이들이 닦아놓은 근대 문명의 토대가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이만열의 '선택적 단죄'이다. 대한민국 건국 세력의 행적은 현미경으로 파헤치면서도, 정작 북한 정권 핵심부에 포진했던 수많은 친일 인사들(김일성의 동생 김영주, 부주석 김차승 등)에 대해서는 기이할 정도로 침묵한다. 민족정기를 말하면서 북한의 노골적인 친일파 등용은 눈감아주는 그의 역사학은 공정한 학문이 아니라 특정 진영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를 흉기로 사용한 정치 선동일 뿐이다. 3. 순교 신앙을 민족 해방 투쟁으로 격하시킨 영적 범죄 이만열 교수의 가장 큰 해악은 고신의 자랑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신앙적 성격을 왜곡하여 세속적 민족주의의 틀 안으로 가두어버린 데 있다. 그는 선배 목회자들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당했던 고난을 단순한 항일 운동의 일종으로 해석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초월적 가치를 훼손하였다. 이만열의 주장 ①: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민족 정기를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적 항일 투쟁의 연장선에 있다.” (출처: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지식산업사, 1991) 이만열의 주장 ②: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사명은 민족의 고난과 함께하며 사회를 변혁하는 데 있다.” (출처: 이만열, 「기독교 역사관의 재정립」, 기독교역사연구소 세미나 강연, 2010) [비평]:고신 선배들의 저항은 민족주의 차원의 항일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1계명을 지키기 위해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을 수호하려 했던 거룩한 '신앙 수호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만열은 이를 세속적인 민족 해방 투쟁으로 격하시켜 신앙의 본질을 변질시켰다. 이러한 영적 왜곡은 SFC 간사들과 신학생들이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보다 좌파적 민중사관에 더 열광하게 만드는 사상적 통로가 되었다. 신앙의 선배들이 피로 지킨 제단 위에 이만열은 좌파 이데올로기의 향로를 피워 올린 것이다. 결론:고신의 심장을 겨눈 이만열의 칼을 꺾어야 한다 이만열 교수는 기독교 역사학자라는 학문적 권위를 누리며 정작 고신의 뿌리인 자유민주주의와 성경적 보수 신학의 기틀을 허무는 데 앞장서 왔다. 그의 사상은 성경이 말하는 절대 진리가 아니라 특정 정치 세력의 논리를 대변하는 변증법적 역사론에 불과하다. 손봉호의 윤리가 한국 교회의 손발을 묶었다면 이만열의 사관은 한국 교회의 머리와 심장을 좌경화로 세뇌시켰다. 이제 고신 총회와 깨어있는 성도들은 직시해야 한다. 이만열 식의 자학적 역사관을 단호히 배격하고 하나님께서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허락하신 자유 대한민국과 고신 교회의 정통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 거짓된 사슬을 끊어낼 때 비로소 고신의 순교 정신이 다시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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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활절 연합예배에서의 이영훈, 소강석의 망언과 이에 대해 침묵하는 자칭 고사모를 강력 규탄한다"
고명길 목사 (고신애국지도자연합 전문위원장) 마태복음 24장,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하신 예수님의 경고가 오늘날 대한민국 강단에서 재현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2026년 4월 5일 부활절, 한국 교회의 심장부라 자부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단에서 우리는 거짓과 술수의 권력자가 등판하는 참담한 광경을 목도했다. 그러나 더 절망적인 것은, 평소 강단의 거룩함을 외치며 동료 목회자에게 돌을 던지던 자칭 고사모(고신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모임) 목사들의 굴욕적인 침묵이다. 1. 손현보 목사의 선지자적 외침: 고사모의 광기 어린 정죄 과거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는 강단에서 “이재명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외쳤다. 이는 특정 개인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고 차별금지법 등을 통해 교회를 억압하려는 거대 세력에 대한 선지자적 경고였다. 또한 그는 예배 후 교육감 후보를 소개하며 기독교적 가치를 수호할 것을 독려했다. 당시 고사모 목사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선거법 위반과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강대상에서 정치적 발언을 했다고 손 목사를 총공격했다. 심지어 고신 총회 석상에서까지 나서서 손 목사를 비판하며 징계를 요구하고, 일간지에 광고를 내며 그를 신학적 타락자로 몰아세웠다. 그들에게 손현보의 워딩은 반드시 척결해야 할 정치 선동이었다. 2. 이영훈·소강석의 아부의 향연: 부활절 거룩한 성전의 참사 그렇다면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 강단에서 벌어진 일은 무엇인가. 이영훈 목사와 소강석 목사는 차별금지법과 교회해체법을 주도하는 이재명을 강단에 세우고 아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이영훈 목사는 이재명을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시고 한국을 이끌고 계신 분"이라고 찬양적 소개를 했다. 소강석 목사는 “박수 안치는 사람 누구예요. 이따 좀 남으라"고 윽박질렀고, "실개천 출신이지만 결코 그 개천을 잊지 않으시며 국민화합과 실용정치에 올인하는 모습이 한국 교회 보기에도 참 아름답습니다”라는 망언을 쏟아냈다. 수많은 사법적 의혹과 교회 탄압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향해 ‘무거운 짐을 짊어 지셨다’, ‘아름답습니다’ 라는 찬사를 보낸 것은 아부를 넘어선 영적 배교다. 3. 성도를 유린한 살벌한 검문과 신사참배의 데자뷔 강단 아래의 풍경은 더욱 처참했다. 현장 성도의 증언에 따르면, 교회 입구에서 권력자의 안전을 위해 성도의 개인 노트북 비밀번호를 강제로 풀게 하고 개인 다이어리까지 뒤지는 만행이 저질러졌다. 예배의 주인인 하나님보다 권력자의 안위가 우선시된 현장은 중국 공산당 치하의 예배와 다를 바 없었다. 이 모습은 과거 일제 강점기, 강단에 일장기를 걸고 천황을 향해 절하던 신사참배의 현장과 겹쳐진다. 당시 친일 목사들은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명분으로 내세워 우상에게 무릎 꿇었다. 오늘날 이영훈·소강석 목사가 차별금지법과 교회해체법을 획책하는 권력자에게 강단을 내어준 것은, 형태만 다를 뿐 살아있는 우상에게 제사상을 차려준 현대판 신사참배와 다를 바 없다. 4. 고사모의 선택적 침묵: 당신들의 신학은 파산했다 우리는 묻는다. 손현보 목사의 직언에는 선거법 위반이라며 총회 석상에서까지 칼을 휘두르던 고사모 목사들은 왜 이 명백한 강단 유린 사건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는가. 손현보의 회개 촉구는 징계 대상이고, 이영훈·소강석의 굴종적 아부는 연합인가? 교육감 후보 소개는 강단 오염이고, 거짓의 아비 이재명의 축사는 한국 교회의 영광인가? 이재명의 실체를 경고하는 손현보의 말은 정치라며 정죄하더니, 이재명이 아름답다며 박수를 강요하는 이영훈·소강석의 말에는 침묵하는 고사모. 당신들의 정교분리는 신학적 원칙이 아니라, 자신들의 반성경적 논리를 강요했던 비겁한 고무줄 잣대였음이 만천하에 증명되었다. 당신들이야말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한상동 목사 등을 비판한 신사참배 가결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5. 고신 정신은 권력 앞의 비겁한 침묵이 아니다 고신 정신은 신사참배라는 거대 권력 앞에 목숨을 걸고 '아니오'를 외쳤던 선배들의 피 위에 서 있다. 교회 파괴자인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느라 성도들을 유린하고 강단을 팔아넘긴 이 못된 현대판 신사참배자들을 향해 입 닫고 침묵하는 것은 고신 정신과 선배들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고사모 목사들에게 강력히 요구한다. 손현보 목사에게 퍼부었던 그 서슬 퍼런 비판의 잣대를 이영훈·소강석 목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라. 즉각 성명서를 내고 그들의 배교적 행태에 대한 회개와 책임을 요구하라. 그리고 그들의 교회 앞에도 가서 정교분리를 어겼다는 당신들의 논리대로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가서 시위도 하고 기도회도 열라. 거짓의 아비가 부활절 강단에 선 이 엄중한 사태 앞에서 끝까지 '입꾹닫'하고 침묵한다면, 당신들은 더 이상 고신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입에 담을 자격도 없는 철부지 목사들이고 장로들일 뿐이다. 부활절 강단은 권력자의 무대가 결코 아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만이 영광받을 거룩한 곳이다. 선지자적 외침이 사라지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강단은 더 이상 교회의 강단이 아니다.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선 이재명과 그 무리들에 대해 “당신이 그 사람이라”, “저 여우에게 가서 이르라”는 경고의 말씀을 다 같이 강하게 외쳐야 한다. 그것만이 고신이 살고,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길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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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 ‘욜로(YOLO)’의 시대를 넘어, 부활의 참된 소망으로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욜로(YOLO)’라는 말이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이 말은 “인생은 한 번뿐이니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며 살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 땅의 삶이 전부인 양, 오늘을 마음껏 소비하고 즐기라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길어진 100세 시대라 할지라도 지나고 보면 인생은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날아가는 화살과 같이 쏜살같이 흘러갑니다. 만약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이 땅의 삶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면 그 짧은 여정의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지독한 허무와 공허 그리고 죽음 앞의 우울함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인 ‘부활’은 이 허무한 인생의 마침표를 영원한 생명의 쉼표로 바꾸어 놓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겨울이 되어 얼어붙었던 가지에 봄이 되면 다시 잎새가 싹트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영원한 삶이 예비되어 있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단지 죽음 이후의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는 강력한 원동력입니다. 슬픔을 사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 릴런드 스탠퍼드는 수재였던 외아들을 갑자기 잃고 극도의 슬픔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으니 저 대신 세상의 청년들을 도와주세요”라는 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그의 인생관은 완전히 바뀝니다. 아들이 천국에 살아있다는 부활의 소망을 품게 된 그는 당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헌납해 오늘날의 명문 스탠퍼드 대학을 세웠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개인의 절망을 넘어 수많은 젊은이를 살리는 위대한 헌신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어느 호스피스 병동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젊은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 남긴 편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가, 엄마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향해 가는 문이란다. 기나긴 겨울을 이기고 봄에 피어나는 저 꽃들처럼 우리도 눈물 없는 그곳에서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이처럼 부활의 소망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위대한 사랑과 용기를 현재의 삶 속에 불어넣습니다. 성경은 부활한 우리가 누릴 미래에 대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라고 약속합니다. 부활은 눈물도 사망도 애통함도 없는 완벽하고 행복한 삶이 열리는 기적입니다. 이 땅의 쾌락만을 좇는 ‘욜로’의 허무함을 넘어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가는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2026년 부활절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참된 기쁨과 미래에 대한 찬란한 소망이 상처받고 지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가득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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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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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 부활절을 맞이하는 믿음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세번의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ㅡ.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신 후 처음의 사람에게 1.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창1;28 하나님이 아닌 존재인 뱀이 처음의 사람에게 찾아와 그들의 욕구를 채우도록하고 뱀의 사상을 따르게 한 후..세상은 어둡게 변해 버렸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2.정녕 죽으리라..ㅡ창2;17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찌니라,ㅡ창3;19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고, 밭은 소출을 내지 않고 행복했던 가정에 행복은 간 곳 없고, 형이 동생을 해하고 장례를 치르고 부부는 갈등을 겪고,,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한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 지금도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고, 영생의 나라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 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ㅡ 요11;25-2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시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주시고 ㅡ무덤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십니다.ㅡ요528. 죽음으로 가는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ㅡ 요3;16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의 댓가를 치르고서야 우리 믿는 자들이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ㅡ그가 찔리고 그가 상하고 그가 징계를 받고, 그가 체찍에 맞음은 우리 허물과 죄와 불안과 걱정과 공포, 병 때문인 것을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ㅡ사53;5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하셨고. 사53;6.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들의 저주가 그를 믿음으로 물러가는 복된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3;13-14 이 말씀이 부활절을 맞이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힘이 되고 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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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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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전서 1:3) 할렐루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온 마음 다해 찬양합니다. 2026년의 봄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에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이웃들의 삶 위에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죽음의 권세도 이길 수 있다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처럼 온 세상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경제적인 어려움들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빈 무덤의 승리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과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거룩한 백성된 우리는 생명의 부활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이번 부활절을 시작으로 경남 지역 구석구석에 산 소망을 전하는 통로로 소외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무너진 마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 부활의 아침은 어둠이 지나고 반드시 빛이 온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자 확증입니다. 비록 현실의 고난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지라도,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신뢰하고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갈등이 있는 곳에 화해를 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다시 한번 우리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이 기쁜 소식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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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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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통영기연 곽만섭 목사
- 사랑하는 경남신문 독자들과 경남 성도들께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아침에 선 교회와 성도들이 이 놀라운 생명의 복음을 다시 붙들며, 믿음 가운데 새 힘을 얻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나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의 상황은 여전히 우리를 흔들지만, 주님께서 살아계신 한 교회는 무너지지 않으며 우리의 믿음 또한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능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위에 부활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여, 각 가정과 삶의 자리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일상 속에서 부활의 기쁨이 실제가 되어, 지친 마음을 회복시키고 서로를 위로하는 은혜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역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흘려보내며, 말과 삶으로 복음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작은 섬김과 나눔이 모여 이웃에게는 위로가 되고, 사회에는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어둠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의 은혜로 날마다 새 힘을 얻고, 기쁨으로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여러분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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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통영기연 곽만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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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녕기연 안덕수 목사
- 부활에 아침에 고백할 승리의 고백 매해 맞이하는 부활절인데 올해는 더욱더 그 의미가 깊이 다가온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의 한말씀, 다이루었다(요19:30)는 말씀이 마음속에서 계속 울린다. 모든것을 하나님께맡기시고, 다 이루심의 완성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그분의 마지막은 승리와 완성의 선언이셨다. “다 이루었다.”이 한마디에는 완전한 지불의 선언이다. 예수는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값을 하나하나 치르셨다. 낮은 땅에 오심, 모욕과 조롱, 가시 면류관, 십자가의 고통까지 치르시면서 그 모든 과정은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는 길이었다. 이때 휘장이 갈라지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무너졌다.죄로 인해 닫혀 있던 길이 열렸고, 하나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다가오시는 분이 되셨다.어쩌면 우리는 이 장면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두 팔을 벌리사 안아주신 사건이다. “이제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 십자가는 단지 고난의 상징에서 용서와 초대의 상징이 된것이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고백은 죽음을 앞둔 체념이 아니다.사명을 완수한 자의 평안이며, 전적인 신뢰의 표현이다. 우리는 흔히 ‘안식’을 쉼으로 이해한다.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안식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인간은 여섯 날 동안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안식일은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날이라는 것이다.이 통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우리는 끊임없이 계획하고, 통제하려 하며, 결과를 붙잡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커진다.그러나 예수의 마지막 고백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준다. “맡겨라.”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괴로움과 눈물의 시간이 찾아올 때, 심지어 과거의 상처와 실패까지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안식을 경험한다. 부활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승리의 선언을 한다. 십자가는 겉으로 보면 패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죄와 죽음을 이긴 승리가 담겨 있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말한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따라서 믿음의 삶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삶.붙잡으려 하기보다 의탁하는 삶.그리고 그 고백은 매주 예배 속에서, 또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반복되어야 한다. 내 삶을 주께 맡김을 통해 신앙은 완성되어 간다. 참된 안식과 승리를 경험하게 되기실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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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녕기연 안덕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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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진해기연 정용기 목사
- 사랑하는 진해와 경남 지역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우리의 믿음의 핵심으로서, 절망 가운데 있는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소망입니다.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현재의 능력이며, 미래를 향한 확실한 약속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고난과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시대는 세계 각국의 이기주의와 전쟁의 소식, 경제적 어려움과 이념의 대립, 빈부와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각자의 삶에 놓인 무거운 짐들로 인해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려움 속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평강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지역사회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부활 신앙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생명을 받은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 희망을, 상처의 자리에 치유를, 분열의 자리에 화해를 이루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진해와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가 한마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나누며 이 땅 가운데 생명의 복음을 더욱 힘있게 전하는 증인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6년 부활절 진해기독교연합회 회장 정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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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진해기연 정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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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교회는 기업이 아니다!
- 요즘 교회의 사역 현장에서 자주 들리는 말들이 있다. 그것은 비전, 전략, 성과, 시스템, 그리고 효율성과 같은 단어들이다. 이런 단어들은 이제 교회에서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교회는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정하고, 사역을 평가하며, 더 효과적인 운영을 고민한다. 이러한 노력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교회도 질서가 필요하고, 사역에는 지혜로운 운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 보아야 한다. 교회는 운영되어야 할 조직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신앙 공동체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단순한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설명하는 언어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성도는 ‘인력’이 되고, 사역은 ‘프로젝트’가 되고, 목회는 ‘운영’이 되고, 성장은 ‘성과’라는 단어로 대체되고 있다. 이러한 언어는 조직 관리에는 적합하지만, 신앙 공동체를 설명하는 데는 적절한 언어가 아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백성, 성령의 전,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이라고 너무나도 고귀한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 이것은 관리의 언어가 아니라 생명의 언어이다. 언어가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교회의 방향도 바뀐다. 교회 경영화의 가장 큰 변화는 목회자의 역할에서 나타나고 있다. 목회자는 원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고, 영혼을 돌보는 목자이며, 기도하는 지도자이다. 그러나 점점 목회자는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 조직을 관리하는 책임자, 성과를 만들어야 하는 경영자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교회의 건강이 목회자의 영성보다 리더십 능력과 경영 능력으로 평가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는 교회를 이끄는 CEO가 아니라, 말씀과 기도로 공동체를 섬기는 종이다. 경영화된 교회는 자연스럽게 결과를 측정하려 한다. 출석 인원, 등록 성도 수, 헌금 규모, 건물 확장 등이 교회의 성공 기준이 된다. 그러나 교회의 성공 기준은 양적인 크기가 아니라 신실함이다. 성장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가이다. 경영화된 교회에서는 성도가 점점 소비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를 소비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왕 같은 제사장,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른다. 교회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아니라, 함께 십자가를 지는 공동체이다. 경영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효율이다. 그러나 복음의 길은 언제나 효율적인 길이 아니었음을 교회의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숫자가 본질을 대신하고, 성도가 고객이 되고, 효율성이 신실성을 대신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면 다시금 교회의 본질을 진지하게 성찰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회복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성과 중심에서 신실함 중심으로, 관리 중심에서 목양 중심으로, 프로그램 중심에서 말씀 중심으로, 리더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교회는 사람이 성장시키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는 공동체이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전략이 아니라 말씀이며, 시스템이 아니라 성령이며, 경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치이다. 목회자가 이와 같은 교회의 본질을 고수하게 되면 외형의 성장은 늦어질 수 있을지 몰라도, 더 깊고, 더 건강하고, 더 오래 가는 교회가 세워질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교회를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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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교회는 기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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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이창교 목사, “주의 지팡이를 붙들라”
- 사랑하는 장로님 여러분, 우리 주님이 희망입니다. 다시 한 번 고백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우리가 이 세상의 희망인 줄로 믿습니다. 제가 한 가지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전에 교인들과 함께 지리산 천왕봉을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올라갈 때는 차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이거 별거 아니네’ 생각했습니다. 정상에 올라가 사진도 찍고 여유 있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내려올 때는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내려왔습니다. 그때부터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올라갈 때는 몰랐는데 내려오는 길이 그렇게 힘든 줄 몰랐습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몇 번이나 주저앉을 뻔했습니다. 중간에 쉬었다가 또 내려오고, 쉬었다가 또 내려오고,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길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 중에 조금 굵은 것을 하나 주워서 지팡이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 하나가 제 몸을 끝까지 지탱해 주었습니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제 힘듦을 다 받아주고,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었습니다. 그때 저는 지팡이의 도움을 얼마나 확실하게 받았는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에도 지팡이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지팡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누가 들고 있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연약한 사람이 들면 몸을 지탱하는 도구가 되고, 죄를 범한 사람에게는 징계의 도구가 되며, 지도자의 손에 들리면 통치의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목자의 손에 들리면 양을 인도하고 보호하는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지팡이 가운데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모세의 지팡이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르셨을 때, 모세에게는 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불신이었습니다. 첫째, 자기 자신을 믿지 못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나이도 많고, 이미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백성들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믿고 따라줄 것인가.’ 셋째,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확신도 부족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을 믿지 못했습니다. 과거에 애굽 사람을 죽이고 민족을 위해 뭔가 해보려 했을 때, 오히려 동족이 그 일을 드러냈습니다. 그 경험 때문에 ‘이 사람들과 함께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불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물으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가 말합니다. “지팡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지팡이를 통해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그 이후 모세가 그 지팡이를 들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열 가지 재앙이 나타나고, 홍해가 갈라지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지팡이를 통해 모세의 불신을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회복시키시고, 모세와 백성 사이의 불신도 해결하셨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의 지팡이를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장로님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물질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위치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장로라는 직분일 수 있습니다. 이 직분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교회가 인정하고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지팡이를 어디에 사용하느냐입니다. 이 지팡이는 나를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성도를 섬기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모든 직분이 그렇습니다. 목사의 직분도 자기 자신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장로의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지팡이를 잘못 사용한 사건이 있습니다. 무리바에서 물이 없다고 백성들이 원망할 때 하나님은 반석에 명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이 지팡이로 너희에게 물을 내리라.” 그리고 반석을 쳤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전히 그 백성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셨는데, 모세는 자신의 분노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지팡이는 내 감정을 표출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지팡이가 있습니다. 다윗의 지팡이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지팡이는 보호입니다. 그런데 막대기는 징계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막대기까지도 자신을 살리는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의 인생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많은 징계를 받았습니다.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은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을 통해 고통을 겪게 하시고, 삶 속에서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막대기가 나를 살리는구나.’ 그 징계가 없었다면 자신은 하나님을 떠났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막대기가 있습니다.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어려움이 있고, 고통이 있고, 실패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은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냥 두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돈을 많이 버는 사람도 있고,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달 만에 수십억을 벌고, 어떤 사람은 한 달 만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세상의 것은 이렇게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들이 정말 안전한 것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돈이 나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권력이 나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사람도 끝까지 나를 책임져주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장로님 여러분, 이 세상의 것은 다 썩은 지팡이입니다. 우리가 의지했던 것들이 우리를 배신한 경험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질도, 사람도,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지팡이는 오직 하나입니다. 주의 지팡이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엘더스쿨을 왜 합니까. 더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더 잘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지팡이를 어떻게 바르게 사용할 것인가를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합니다. 많이 알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배우려고 해야 합니다.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때부터 무너집니다. 그러나 배우려는 사람, 낮아지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사랑하는 장로님 여러분, 하나님께서 맡기신 이 지팡이를 끝까지 붙드시기 바랍니다. 이 지팡이를 가지고 교회를 섬기고, 성도를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귀한 직분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 본 설교문은 경남노회 장로회 창립 50주년 감사예배에서 전한 이창교 목사의 설교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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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이창교 목사, “주의 지팡이를 붙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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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손봉호 교수, 한국교회를 극우로 모는 좌파 본산인가?
- 2025년 3월 15일, 서울 영동교회(조상우 목사 시무)에서 열린 전국기독교수연합회 정기총회 및 로고스포럼에서 손봉호 교수가 “AI와 혼란의 대한민국, 기독 교수의 소명”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했다. 기독일보 3월 17일자 보도에 따르면, 손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북 문제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문제이기 때문에, 해결의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외면할 수 없으며,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최근 한국 정세를 보면 대통령 탄핵 논란 등으로 인해 나라가 극도로 분열된 상태다. 이런 가운데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우려를 표명하며 입장을 발표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의 문제를 넘어 더욱 심각한 국제적 난제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트럼피즘’의 확산이다. 트럼피즘은 미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으며,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 또한 트럼피스트로 분류되기도 한다. 미국에서 발생하는 변화가 한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 현상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독일보, 2025.3.17.) 그러나 필자는 단순한 언론 보도만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당일 현장에서 녹음된 52분 18초 분량의 강연 전체 녹취를 입수해 직접 청취·분석한 결과, 손 교수의 발언은 과거 우리가 알던 ‘옳은 소리, 바른 소리’의 손봉호가 아니었다. 겉으로는 미국의 역할에 감사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남북문제, 윤 대통령 탄핵, 트럼피즘에 대한 평가에서 뚜렷한 좌파적 편향과 반복음주의적 윤리관을 드러냈다. 그의 강연은 단순한 교회·정치·사회 평론이 아니라, 한국교회와 복음주의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사상적 선언에 가까웠다. 손봉호 교수는 오랫동안 기독교 철학자요 윤리학자로 존경을 받아왔다. 필자가 SFC 학생 시절, 그는 마치 선비처럼 고고한 학자,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큰 산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다르다. 옳고 그름이 분명히 드러나는 정치·사회적 격변 속에서, 그의 후학들과 제자들을 통해 이미 사상적 방향이 드러났고, 이번 강연을 통해 그 정체가 더욱 명확히 드러났다. 그는 여전히 원로의 어조로 한국교회와 사회를 비판했지만, 그의 윤리적 평가는 성경적 윤리가 아니라 좌파적 세계관을 대변하는데 더 가까웠다. 특히 민주당 정권의 불의와 비윤리성에는 침묵하면서도, 교회와 나라를 위해 목소리를 낸 애국 시민과 교회를 “극우”로 몰았다. 그날 강연의 주요 발언만 보아도, 손 교수가 한국교회 안에 깊숙이 자리 잡은 좌파적 본산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1. 남북문제에 대한 교묘한 왜곡 손 교수는 “남북문제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문제”라고 했다. 언뜻 중립적이고 윤리적인 평가처럼 들리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표현이다. 남북문제의 본질은 추상적 갈등이 아니라, 스탈린과 김일성의 적화야욕과 6·25 남침이라는 명백한 침략 범죄에서 비롯되었다. 그럼에도 손 교수는 ‘사람’을 지목하면서도 김일성, 스탈린, 공산주의 세력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처럼 이미 역사적으로 규명된 ‘주체’와 ‘책임’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손 교수의 발언은 이를 특정하지 않은 채 ‘사람’이라는 추상적 표현으로 처리한다. 이러한 방식은 결과적으로 책임의 주체를 흐리고,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특히 그의 강연 전반을 보면, 남북문제를 설명하면서도 공산주의 체제의 폭력성과 김일성 정권의 침략 책임에 대한 명시적 언급은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한국 사회 내부의 갈등과 분열에 대해서는 비교적 강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이 균형의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남북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침략’이라는 역사적 사실보다 ‘인간이 만든 갈등’이라는 일반론이 앞설 때, 청중은 자연스럽게 책임의 방향을 흐릿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질문은 이것이다. 그가 말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왜 그 이름은 끝내 말해지지 않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그의 역사 인식과 사상적 방향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라고 본다. 2. 윤 대통령 탄핵 논란에 대한 왜곡 손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논란을 두고 “나라가 극도로 분열된 상태인데, 교회 지도자들이 우려를 표명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했다. 이는 극단적 분열의 책임을 윤 대통령과 지지층에 돌리고, 탄핵 찬성 시국선언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발언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집권 이래 자유민주체제, 시장경제, 한미동맹을 일관되게 강조해 온 지도자다. 그를 지지하며 탄핵을 반대한 국민과 교회를 “분열 조장 세력”으로 몰아붙인 것은, 곧 광화문 집회와 세이브코리아 운동을 비방하고, 손현보 목사 징계를 청원한 목사·장로들을 옹호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손 교수가 말한 “우려를 표명한 지도자들”은 다름 아닌 기윤실의 정0오 장로, 권0경, 오0택, 이0령, 김0태, 김0홍 목사 등으로 보인다. 결국 그는 자신의 후학들이 주도한 반 광화문, 반 세이브 코리아, 반 애국신앙 운동을 두둔하며 한국교회를 무력화하는 데 힘을 실었다. 더구나 그의 발언에는 민주당의 의회 독재, 부정선거 의혹, 헌법재판소의 편향성에 대한 비판은 전혀 없었다. 오직 애국 국민과 교회만을 겨냥한 공격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골수 좌파적 시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도대체 손 교수는 어느 나라 교수인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정체성을 지지하는 국민을 공격하고, 오히려 북한과 종북 세력의 논리를 대변하는 듯한 그의 발언은 북한의 대변자, 공산주의 선동가의 언어와 다르지 않다. 3. 트럼피즘에 대한 악의적 매도 손 교수는 트럼피즘의 확산을 “국제적 난제”라 규정하며 윤 대통령을 트럼피스트로 몰고, 이를 지지하는 애국 교회와 단체들을 싸잡아 비난했다. 그러나 트럼피즘은 다음과 같은 기독교적 가치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1) 차별금지법 반대– 성경적 성윤리를 지키며 동성애와 젠더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운동 2) 생명과 가정 수호– 낙태와 동성결혼 합법화를 거부하며 창조 질서를 붙드는 신앙 실천 3)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옹호– 사회주의와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를 지키는 신앙의 투쟁 4) 반공산주의 정신– 북한 주체사상과 국제 사회주의 흐름에 저항하는 자유 진영의 깃발 5) 애국심과 공동체 회복– 국가 정체성과 가정을 지키려는 기독교적 헌신 이러한 트럼피즘은 성경적 가치의 회복을 목표로 하며,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럼에도 손 교수는 촘스키의 “트럼프는 히틀러보다 더 악하다”는 말을 인용하며 “일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자유세계의 도덕적 기반을 훼손하는 심각한 발언이다. 또한 그는 미국 민주당의 다양성·평등·포용(DEI) 정책을 “기독교적 가치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사실상 차별금지법과 젠더 이데올로기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발언이다. 손 교수의 발언은 죄와 구원의 복음을 도덕적 평등 담론으로 희석시키는 심각한 신학적 오류다. 4. 사회복음주의로 흐른 ‘이상한 윤리학’ 손 교수는 강연 후반부에서 “환경보호가 진정한 이웃 사랑이며, 지식인들만이 진보가 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겉보기에 선하고 지성적인 듯 보이지만,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복음의 본질과 우선순위를 왜곡하는 인본주의적 윤리로의 변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근본적인 이웃 사랑은, 죄로 인해 영원한 사망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이웃에게 복음, 곧 구원을 전하는 것이다. 환경보호와 창조 질서 보전은 그리스도인의 청지기적 사명이며 이웃 사랑의 중요한 실천이지만, 이를 복음의 핵심인 죄와 구원의 문제보다 우선하거나 ‘진정한 사랑의 전부’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웃 사랑을 영적 차원에서 물질적·사회적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사회복음주의적 오류다. 예수님이 진정한 이웃이라고 칭찬했던 사건은 강도만난 이웃의 생명을 살려 준 선한 사마리아인이었지 환경을 돌보고 살려준 환경보호론자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손 교수의 주장은 복음의 중심을 벗어나, 인간의 도덕적 선행을 구원의 본질로 오해하게 만드는 위험한 윤리학이다. 또한 “지식인들만이 진보가 된다”는 발언은 하나님 나라의 진보와 구원의 보편성을 정면으로 위배한다. 성경은 세상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지혜와 믿음을 중시하며(고린도전서 1장), 진정한 기독교적 진보는 지적 엘리트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모든 사람의 거듭남과 변화로 이루어진다. 손 교수의 강연은 하나님 중심의 복음 윤리에서 인간 중심 도덕 철학으로 초점이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맺는 말 손봉호 교수의 강연은 짧았지만, 그의 사상적 본질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그의 발언에는 네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1) 남북문제 왜곡– 김일성 책임을 흐리고 이승만·미군 책임론을 암시 2) 탄핵 논란 왜곡– 자유민주 대통령과 지지 국민을 분열 세력으로 매도 3) 트럼피즘 매도– 기독교적 가치를 극우로 낙인찍고 DEI를 신학적으로 미화 4) 사회복음주의 윤리– 복음의 본질을 인간 중심 도덕철학으로 변질시킨 사상 이 네 가지 사실만으로도 손 교수는 좌파 성향 목사들의 사상적 원조이자 배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한국교회를 극우로 몰아가는 좌파 본산임에 틀림없다. 그의 윤리는 결코 성경적 윤리가 아닌 인본주의적 선택 윤리다. 오늘 교회가 따라야 할 길은 손봉호식 좌파적 정치관과 선택적 윤리학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며 불의한 권세를 향해 진리를 외친 손현보 목사와 같은 선지자적이 사명을 다하는 자들이다. 나는 감히 손봉호 교수님에게 묻는다. “트럼프는 그렇게 비난하면서 시진핑과 김정은은 얼마나 비판했는가? 문재인과 이재명은 또 얼마나 꾸짖었는가?” 현 정권의 수많은 불의와 불법들에 대해서 얼마나 꾸짖고 책망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그는 더 이상 기독교 윤리학자가 아니라 한국교회를 극우로 몰아가는 좌파 본산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고신 교회의 뿌리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불의한 권력 앞에 결연히 맞섰던 저항정신이 살아 있다. 고애연은 이 고신의 저항정신을 계승하여, 교회를 무력화시키려는 좌파적 거짓 담론을 분별하고 철저히 배격해 갈 것이다. 주석: 본 기사는 기독일보 2025년 3월 17일자 「전국기독교수연합회 정기총회」 보도와 당일 현장 손봉호 교수 강연 녹음파일(52분 18초) 전편을 직접 분석한 내용을 근거로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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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손봉호 교수, 한국교회를 극우로 모는 좌파 본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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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 바울에게서 배울 것이 참으로 많다. 그 중에서도 바울은 자비량 선교를 하는 중 그의 목회에서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목회서신에서 바울은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서 빼놓지 않고 말하였던 자격이 바로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딤전3:8)에서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며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디도서1:7)에서도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라고 말씀한다. 바울이 집사와 감독의 자격을 말하면서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그런 삶을 충실히 살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눈물로 섬긴 이후에 때가 차매 에베소 교인들과 작별을 하게 된다. 여러 작별의 말 중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있는데 (사도행전20:33)에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라는 구절이다. 오늘날 일부 목회자는 주의 종이라는 그럴 듯한 타이틀을 가지고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욕심내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나님과 바울이 보기에 어떤 평가를 할까 심히 두렵다. 조선시대 서울 남산에 사는 선비들을 ‘헛가리 선비’라고 속칭하였다. 헛가리란 곧 가벽을 뜻하며, 요즈음 말로 바꿔 말하면 판자집을 뜻한다. 곧 청빈을 전통으로 하는 지역적인 풍토가 남산에 형성되어 왔던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수만 명의 헛가리 선비가 남산에 살았으며, 이들의 청빈정신은 대단하여 ‘남산골 샌님 원 하나 못내도 떼기는 잘한다’는 속담을 남기기까지 했다. 곧 남산골의 헛가리 선비는 벼슬아치 하나 못 내지만 벼슬아치의 목을 잘 뗀다는 말이다. 남산의 헛가리 선비 중에 손순효(孫舜孝, 1427-1497)가 있다. 그는 조선전기 문신으로 1480년에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공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냈다. 어느 날 저녁 성종 임금은 시종을 데리고 경회루를 거닐고 있었다. 지금은 고층 건물과 공해 때문에 경회루에서 남산을 제대로 볼 수 없지만 그 무렵에는 남산 숲속을 거니는 동태를 볼 수 있었다. 성종은 남산둔덕에 자리를 펴고 술잔을 주고 받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저건 분명히 손순효일 것이다. 내 말이 틀린지 가서 알아 보고 오너라’ 고 시종을 시켰다. 성종은 손순효가 무척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건너짚은 것인데 성종의 예측이 들어맞은 것이다. ‘손순효가 분명합니다’, ‘술 안주는 뭐든가?’ ‘참외 한 개 썰어놓고 탁주를 마십니다’ 그러려니 하면서 성종은 미주와 교자상으로 술상을 하사하라고 분부하고 그 때문에 내일 사은하러 입궐하지 말라고 특별히 분부하라고 말했다. 일국의 재상이 초라한 집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는 성종의 배려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담하게 여운을 남긴다. 고려시대에도 이런 비슷한 일화가 있다.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사건이다. 직장동정의 벼슬까지 오른 노극청(盧克淸)은 1181년(명종11) 가세 빈한하여 자신의 집을 팔려다 마침 일이 생겨서 다른 군으로 갔는데, 아내가 현덕수(玄德秀)에게 은 12근을 받고 팔았다. 노극청이 돌아와서 그것을 알고 ‘9근에 집을 사서 수년간 살면서 서까래 하나 보탠 것이 없는데 3근을 더 받는 것은 경우가 아니다’ 라고 하여 3근을 현덕수에게 돌려주려고 하였다. 현덕수 또한 받지 않으려 하자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재물을 탐하는 것은 의가 아니니 3근을 받지 않으려거든 집을 반납하라’고 하므로 어쩔 수 없이 받았다. 그러나 현덕수 또한 ‘내가 어찌 노극청만 못한 사람이 되겠는가’ 라고 하면서 마침내 그 돈을 절에 바쳤다고 한다. 연암(燕岩) 박지원은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나 받은 녹을 모두 가난한 친척에게 나누어 주어 집이 무척 가난하였다. 40년간 나라의 녹을 받으면서도 그가 작고할 때 관 값 한 푼도 마련해 놓지 않았으니 조정의 부조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하였을지 모를 일이다. 말년에 그는 책을 보다가도 잠이 오면 자는데 깨워줄 사람이 없어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자는 수도 있었다. 그러다 보면 사흘을 굶기도 하였다. 그의 삶이 마치 제비(燕)가 바위(岩)에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해서 그의 호가 연암(燕岩)이 된 것이다. 모든 목사와 성도는 바울을 존경하고 그의 삶을 본 받으려고 한다. 바울이 남긴 족적 중에서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이 말씀에 스스로 당당한 삶을 살면 좋겠다. 태어난 시대가 달라서 그렇지 바울과 손순효와 노극청과 박지원이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살았으면 정말 좋은 붕우(朋友)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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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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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다윗의 인간관계
- 인간관계를 잘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만큼 중요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잘한 인물입니다. 다윗의 성공비결은 관계에 있습니다. 다윗의 예배, 찬송, 기도, 헌신,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면 인간관계가 잘됩니다. 다윗은 인간미가 있고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했고 인간관계에 적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인간관계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무엘상 22:1-2)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명 가량이었더라 아둘람 굴에서의 다윗의 인간관계는 큰 감동을 줍니다. 다윗이 핍박과 공격을 피해 아둘람 굴에 숨어 있으면서 인간관계를 잘해서 리더가 됩니다. 자신이 리더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다윗에게 리더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인간관계를 잘하면 성공하게 됩니다. 아둘람 굴에서 다윗이 만난 사람들은 환난당한 자, 빚진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상처받고 고난당하는 400여명의 사람들을 멸시하지 않고 인간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누구나 섬기고 사랑하는 다윗은 인간관계를 너무나 잘했습니다. 다윗은 인간이면 누구나 멸시하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며 격려해 주고 사랑했습니다. 다윗의 사랑과 격려, 따뜻한 보살핌을 받은 400명의 고통당하는 인생들이 용기와 힘을 얻게 됩니다. 다윗의 인간관계의 비결은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섬긴 것입니다. 다윗의 사랑을 받은 400여명의 고통당하는 자들이 다윗과 인간관계가 좋으니 다윗이 왕이 되고 리더가 될 때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인간관계가 성공의 비결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모함하고 죽이려는 사울과 수많은 악인들을 미워하지 않고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다윗은 어느 누구와도 막힌 담이 없고 적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들과 악인들을 용서해 주고 불쌍히 여겨 주었습니다. 용서하고 보복하지 않아야 관계가 잘됩니다.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보복하면 관계가 깨집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다윗의 인간관계의 비결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관계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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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다윗의 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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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한(恨)이 많은 인생
- 우리 민족을 한(恨)이 많은 민족이라고 한다. 한(恨)의 의미는 고통과 상실에서 오는 슬픔,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의 감정인 억울함, 화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 사랑하는 이를 애타게 기다리는 그리움이 복합적으로 쌓여 해소되지 않은 감정을 한(恨)이라고 한다. 이 복합적인 감정을 영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어서 학자들은 ‘한’을 설명할 때 그냥 “Han”으로 표기한다. (Han : a deep feeling of unresolved sorrow, resentment, and grief.-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슬픔과 억울함이 쌓인 감정) 우리 민족이 이렇게 한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유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일어났던 외적들의 침략으로 인한 트라우마(trauma)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고조선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930번의 침략을 당했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특히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전쟁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는데 이 전쟁으로 인하여 수많은 조선의 딸들이 잡혀가서 노비, 첩, 성 접대부가 되었다. 이들이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들을 환향녀(還鄕女: 고향을 찾아 돌아온 여인)라고 불렀다. 그런데 조선은 그 환향녀들을 영접하고 이해하고 사랑으로 맞아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멸시하고 비하시켜 ‘화냥년(火娘년)’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유교적 사상을 가지고 유교 사상의 잣대로 재어 정조를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환향녀들이 낳은 자식들을 ‘호로자식(胡虜子息)’이라고 불렀다. ‘호’는 오랑캐를 뜻하는 말로 포로로 잡혀가 오랑캐의 씨를 받아 낳은 자식이라는 뜻이다. 환향녀들은 오랑캐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고향에서 조선 사람들에 의하여 멸시와 천대를 받아 결국 자살하고 숨어 살고 신분을 감추고 눈물의 세월을 보내며 한평생 ‘한’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이런 아픈 상처가 있기 때문에 문서적 용어로라도 복수하는 차원에서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을 ‘청조전쟁’이라 부르지 않고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고 부르는데 ‘오랑캐 호’자를 사용하여 “병자년에 청나라 오랑캐들이 일으킨 전쟁”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환향녀뿐 아니라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慰安婦)들도 그렇다. 일본에 의하여 멸시 천대를 받았다. 수많은 오랑캐 침략과, 일본 왜적과 북한 공산당 침략을 통해 사람 빼앗겼고 또한 먹거리 양식들을 빼앗겼기에 빼앗기지 않게 숨기다 보니 오래 저장해서(숨겨두고) 먹을 수 있는 발효식품들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곡식들을 다 빼앗겼기에 땅에 나는 잡초들 바다에 나는 해초들을 식용으로 승화시켜 양식으로 먹었다. 그 종류가 해초 50종, 잡초 150종 약 200종의 식물을 식용으로 먹고 있다. 세계적으로 땅의 잡초, 바다의 해초를 양식으로 다양한 먹거리로 먹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계속적으로 침략을 당하고 빼앗기다 보니 민족 특성상 배고픔의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삶의 우선순위가 배를 채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만나서 인사하는 것도 “진지 잡수셨습니까?” “밥 먹었니?”이다. 먹는 것에 집착한다. 또 사업을 하다 망해도 “말아 먹었다”는 표현을 한다. 맘에 들지 않으면 “밥맛 없다”고 한다. 이런 현상들이 우리 민족 속에 내재 되어 있는 ‘한’의 문화이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며 기쁨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 분 안에서 참 편안과 안식 누리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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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한(恨)이 많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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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하나님은 앞서 행하신다.
- 출애굽기의 홍해 사건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극적이며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다. 단순히 바다가 갈라진 기적 이야기로 읽기에는 이 장면이 담고 있는 신학적 깊이가 매우 크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복음 안에서 믿음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해방의 기쁨도 잠시, 곧 홍해 앞에 서게 된다. 앞에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 온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명백한 실패의 동선이며, 이해할 수 없는 인도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계획 밖에서 벌어진 돌발 상황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은 지름길이 아닌 ‘필요한 길’로 인도하신다 출애굽기 13장과 14장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블레셋 땅의 가까운 길, 곧 지름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그 길이 더 빠르고 합리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전쟁을 보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연약함을 모르셨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아셨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백성이 감당할 수 없는 길로 몰아붙이지 않으신다. 우리는 종종 빠른 결과, 즉각적인 변화, 눈에 보이는 성공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성숙과 훈련을 먼저 보신다. 홍해 쪽으로 인도하신 선택은 인간의 계산으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가장 적절한 길이었다. 홍해 앞이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조차 하나님께는 갑작스러운 위기가 아니라, 이미 설계된 은혜의 여정이었다. 홍해 앞의 막다른 길은 실패가 아니라 기적의 무대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상황은 말 그대로 완벽한 ‘막다른 길’이었다. 앞은 바다요, 뒤는 애굽의 군대였다. 도망칠 길도, 협상할 길도, 싸울 힘도 없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애굽 군대의 추격을 미리 알고 계셨다고 분명히 증언한다. 하나님은 애굽 왕의 마음이 바뀔 것을 아셨고, 군대가 동원될 것을 아셨으며, 이스라엘이 홍해 앞에 서게 될 것도 이미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 홍해 앞의 위기는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략이었다. 우리는 종종 인생의 막다른 길 앞에서 “왜 하필 여기까지 와서 이런 일을 겪게 하셨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홍해 사건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느끼는 바로 그 자리에서, 당신의 구원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신앙의 절정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원망한다. “우리를 이곳에서 죽게 하려고 데려왔느냐”, “애굽에서 종으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았느냐”고 외친다. 절망 앞에서 인간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간이다. 그때 모세는 뜻밖의 말을 선포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세상은 가만히 있으면 도태된다고 말한다. 무엇이든 해야 살 길이 열린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복음은 때로 전혀 반대의 방향을 가리킨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무책임이나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힘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선행적 일하심을 신뢰하라는 신앙의 요청이다.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모든 상황을 맡기는 믿음이다. 순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순종 이전에 하나님이 이미 일하고 계심을 신뢰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움직이신다 홍해가 갈라진 이유는 이스라엘의 믿음이 특별히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믿음은 오히려 불안과 원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이 열린 것은 하나님이 먼저 계획하셨고, 먼저 움직이셨으며, 먼저 구원을 준비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문제를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 이미 해결을 예비하시는 분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수많은 홍해가 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뒤는 막혀 있으며,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는 순간들이다. 그러나 홍해 사건은 우리에게 선언한다. 그 자리는 무너짐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무대가 될 수 있다고.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백성보다 한 걸음 앞서 행하신다. 그리고 그 앞서 가심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를 수 있는 복음의 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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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하나님은 앞서 행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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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방심은 금물 (창33:10-20)
-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려서 이륙을 하는 데는 3분이 걸리고, 목적지에 도착을 해서 활주로에 착륙을 하는 데는 8분의 시간이 걸립니다. 이 시간을 가리켜서 마(魔)의 11분이라고 하는데, 조종사들이 가장 긴장을 하는 시간이 바로 그 마(魔)의 11분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항공기 사고의 약 75%가 그 마의 11분대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종사들이 그 시간에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종사들만 그 시간에 긴장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 승객들도 그 시간에는 긴장을 합니다. 비행기를 이용할 때 조종사가 얼마나 노련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할 때 알아 볼 수가 있습니다. 초보자의 경우는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할 때 동체가 요란하게 흔들리고 소음이 심하게 나고 사고가 날까봐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노련한 조종사의 경우는 동체 흔들림이 거의 없고 소음도 별로 없고 아주 자연스럽게 착륙을 합니다. 비행기 조종사들은 마(魔)의 11분때에 긴장을 하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는 평생이 마(魔)의 시간이기 때문에 한 순간도 긴장을 풀거나 방심할 수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긴장이 풀리고 방심하면 사단 마귀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우리를 유혹하거나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순간까지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때 하나님을 잘 믿었던 사람들이 방심하다가 사단의 쳐 놓은 올무에 걸려서 넘어진 경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신앙생활에 영원한 천하장사(天下壯士)는 없습니다. 방심하면 다 넘어지게 됩니다. 오늘은 우리가 신앙생활에 왜 방심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방심하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방심하면 곁길로 가게 됩니다.(창33:13-14) 둘째로, 방심하면 실패를 하게 됩니다.(수7:3-5) 셋째로, 방심하면 결국이 비참합니다.(삿8:33-35) 마지막이 아름다우려면 방심하지 말고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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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방심은 금물 (창3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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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인간 없는 세상
- 만약 인간이 지금 이 순간 지구에서 사라진다면, 이 행성은 어떤 표정을 되찾게 될까. 멈출 줄 모르는 기후의 극단화, 눈앞에 닥친 해수면 상승, 끝없이 반복되는 산불과 홍수는 이 질문을 더 이상 공상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탐욕과 무절제한 개발이 만들어 낸 생태계 붕괴의 한복판에 서 있다. 어느 지역에서는 기록적인 폭염이, 또 다른 지역에서는 이례적인 한파와 폭설이 일상이 되었고, 가뭄과 집중호우는 계절의 질서를 무너뜨린 채 번갈아 지구를 강타한다. 숲은 불타고 강은 범람하며, 바다는 서서히 육지를 삼킨다.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들은 해마다 국토가 줄어드는 현실 앞에서 국가의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산불과 홍수는 더 이상 예외적인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간 문명이 스스로 불러온 구조적 재앙이 되었다. 기후 재난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예측이 아니다. 바다 속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산호초, 남극에서 빠르게 녹아내리는 빙하, 해수면 상승으로 물속에 잠기고 있는 투발루와 몰디브 같은 섬나라들. 이들은 단지 생태계의 피해자가 아니다. 오히려 인류가 지금 이 순간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를 증언하는 현실의 경고장이다. 공장은 멈추지 않고, 플라스틱은 바다를 뒤덮으며, 벌목과 댐 건설은 야생 생물의 터전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의 이면에서, 창조 세계는 조용히 무너지고 있다. 이 모든 장면은 우리에게 하나의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지구가 이렇게 아픈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중심에 인간은 어떤 존재로 서 있는가. 앨런 와이즈먼(Alan Weisman)은 그의 책 『인간 없는 세상』에서 하나의 가정을 제시한다. “만약 인간이 지금 이 순간 지구에서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질문은 단순한 공상과학적 상상이 아니다. 인간의 손길이 끊긴 체르노빌 지역에서 자연이 놀라운 회복을 이루는 모습을 통해, 그는 역설적으로 말한다. “인간 없는 지구는 오히려 살아날 수 있다.” 이 문장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인간이 존재하는 지구는 왜 이렇게 아픈가. 문제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대답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인간이 창조 세계를 돌보는 청지기의 자리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고(창 1:28), 동시에 “에덴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창 2:15) 하셨다. ‘정복’은 파괴가 아니라 책임 있는 관리이며, ‘지킴’은 무제한적 개발이 아니라 보호를 전제로 한 사명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명령을 오해했고, 오용했으며, 결국 외면해 버렸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병든 지구의 얼굴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다음 세대의 것이며, 피조물 전체의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만을 위해 지구를 창조하지 않으셨다. 시편 기자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이 세계가 주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노래했다(시 19:1).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그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에 서 있는가, 아니면 가리는 자리에 서 있는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이다. 플라스틱 컵 하나, 무심코 켜 둔 전등 하나, 소비 중심의 삶의 방식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환경 운동은 ‘의식 있는 시민’만의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신앙적 응답이다. 생태계를 돌보는 일은 전문가들만의 영역이 아니다. 땅을 지키는 사람, 바다를 치유하는 사람, 동물과 나무를 아끼는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공동 청지기다. 지금은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때다. “땅이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고”(창 3:17).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회복의 약속도 전한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계 21:1). 하나님은 파괴의 하나님이 아니라 회복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그 회복의 동역자로 부르신다. 우리 모두 땀 흘려 땅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설교를 듣는 데서 멈추지 않고, 쓰레기를 줄이며, 나무를 심고, 에덴의 청지기로 다시 서야 한다. 창조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우리는 그 선물의 관리인이다. 병든 지구를 고치는 일은 거창한 정치 선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내 손에 들린 종이컵 하나를 내려놓는 작은 행동에서 시작된다. 회개는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증명될 때, 비로소 진짜가 된다. 이 준엄한 청지기적 소명에 내가 봉사하고 있는 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가 신실하게, 순종적으로 응답할 수 있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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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인간 없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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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창원 극동방송 개국 30주년에 붙여
- 전국 다섯 번 째 지역 네트워크로 개국 창원극동방송이 3월 16일이면 개국 30년을 맞는다. 1996년 3월 16일 창원국가공단의 도시화가 한창이던 때 부산도 아닌 창원에서 순수 복음방송 창원극동방송이 개국 첫 전파를 발송했다. 당시 경남 전역과 부산권에 송출하는 기독교 복음 라디오 방송을 개국한 데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서울의 극동방송은 올해 70년을 맞고 창원극동방송은 다섯 번째 지역 네트워크 방송 스튜디오로 개국, 지금껏 지역의 교회들과 함께 전파 선교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당시 창원극동방송이 설립 추진되면서 서울, 대전, 대구, 광주에 이어 부산에서 개국될 순서였다. 그래서 창원에서의 설립을 두고 부정의 소리가 있었다. 당시 창원시는 공단의 작은 도시에 불과하고 복음화율도 낮아 극동방송이 설립되기에 열악했다. 그렇지만 한창 교회 부흥에 목말라 있던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합심하여 설립 추진에 나섰다. 그동안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1990년부터 교회 목회자들이 방송 설립을 위해 창원 가음정교회에서 기도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농촌 지역에서 공단 신도시로 급속한 발전을 하고 있던 창원 신도시에 의욕이 넘치는 지도자들이 있었다. 당시 한빛교회 윤희구 목사께서 앞장서고 양곡교회, 가음정교회, 서머나교회, 상남교회, 창원교회, 임마누엘교회, 세광교회 등 교회 부흥을 이끌고 기독교총연합회를 섬기던 지금은 원로목사로 물러나신 이분들이 열정을 냈다. 그리고 평신도로서는 기독교실업인회(CBMC) 경남연합회장을 역임한 故 박윤섭 장로 등 실업인들과 여러 사람들이 열정으로 헌신했다. 필자는 당시 언론사 일선 기자로서 이러한 설립 과정을 지켜봤다. 그리고 이후 10여 년 창원극동방송 운영위원으로서 섬김의 시간이 있었다. 창원극동방송이 설립하게 된 또 다른 사안이 있다. 정부 당국의 방송국 허가 과정에서 1992년 경남 출신 故 김영삼 대통령이 선출되어 취임함으로써 정부 요로의 도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창원극동방송은 1995년 5월 19일 당시 문화공보부로부터 방송국 개설 허가를 받고 주파수 98.3MHz로 1996년 3월 16일 첫 방송을 시작했던 것이다. 도시 발전 과정에서 복음의 큰 사명 일깨워 복음 불모지 교회 부흥을 이끌어 창원극동방송이 설립된 후 창원 지역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급속한 도시 발전이 이어져 갔다. 도시 인구가 급격히 늘었다. 그러나 당시 복음화율은 전국에서 최하위권이었다. 창원 신도시에 외지인들이 급격히 늘고 각 교회에서 전도 활동이 활발하면서 대형 교회들이 생겨나고 창원극동방송과 함께 전도와 선교의 힘을 발했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창원 지역이 마산, 진해와 함께 통합특례시가 되고 복음의 확산 시너지가 살아나면서 복음화율 10%에 달하는 부흥의 시대를 이끌었다. 이같이 더불어 발전한 창원극동방송을 크게 칭찬할 만하다. 다양한 기독문화의 산실 기능 큰 과제 그동안 창원극동방송은 지역의 교회들과 함께 독립 사옥을 지난 98년 건립하고 문화 사역도 함께 감당해 왔다. 어린이 합창단, 청소년을 위한 학교 콘서트, 마마기도회를 비롯해 여러 문화 선교 프로젝트를 감당하고 있다. 창원극동방송은 16일 개국 30년 기념식을 갖고 기드온 프로젝트를 기획해 새로운 30년을 시작한다고 한다. 다양한 선교 복음 문화의 시대를 맞아 지역 교회의 문화 중심 공간의 새로운 계획이 필요할 것이다. 여러 방송 장비와 다목적홀 개편 등 시설의 보완도 필요하다. 다음 세대에 대한 선교 방송의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 등 많은 과제가 있을 것이다. 지역 교회와 함께하는 창원극동방송이 개국 30년과 함께 지역을 넘어 동아시아 지역과 온 세계로 복음의 지경을 크게 넓히는 큰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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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창원 극동방송 개국 30주년에 붙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