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Home >  오피니언
-
[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
[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
[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
[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 오피니언
- 설교/강의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 오피니언
- 칼럼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 오피니언
- 기고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
- 오피니언
- 성경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 오피니언
- 기고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
[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2)
- 갈등 누구에게나 갈등이 있습니다. 갈등을 해결해야 관계가 잘 됩니다. 교회 안에서 갈등이 있습니다. 사소한 것 가지고 갈등이 생깁니다. 갈등을 키우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죄성 욕심 이기심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날마다 욕심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조카 롯 사이에 소유 문제 때문에 갈등이 생겼지만 아브라함이 양보함으로 갈등을 처리했습니다. 양보한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습니다. 갈등이 심해지면 관계가 깨집니다. 천국에는 갈등이 없습니다. 갈등과 관계는 연결됩니다. 잘못된 언어와 행동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가까운 부부관계 친구 관계에서도 갈등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갈등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지혜는 관계의 열쇠입니다. 지혜의 하나님께 날마다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갈등을 일으키고 갈등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대화 부족 오해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대화는 소통의 능력 관계의 힘입니다. 평소에 대화해야 합니다. 갈등이 생기면 피하지 말고 빨리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두려움과 소심함 소극적인 태도가 갈등을 키우게 됩니다. 사탄은 사소한 것 가지고 갈등이 생기게 합니다. 날마다 성령 충만을 구하고 성령 받아야 은혜가 넘치고 마음이 넓어 사람에 대한 이해심이 깊어지고 사랑의 마음이 있기에 갈등을 일으키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감사와 관계 감사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감사하면서 목회해야 관계가 잘됩니다. 감사는 긍정의 삶입니다. 골로새서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감사는 관계의 비결입니다.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가 잘됩니다. 받은 은혜 감사하고 배은망덕하지 않아야 합니다. 적은 것에도 감사해야 하며 감사가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하며 은혜를 아는 자가 관계를 잘하게 됩니다. 감사는 인격의 성숙함입니다. 배은망덕하고, 불평하는 자는 관계를 깨뜨립니다. 목회자는 감사의 중요성을 알고, 감사에 대해 가르치고, 설교해야 합니다. 감사는 인간관계의 비결입니다. 감사 제목만 찾아, 감사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는 관계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감사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불평합니다. 사탄은 불평하는 자의 친구입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는 자입니다. 감사하면 관계가 좋아집니다. 감사는 경건의 연습입니다. 감사는 긍정의 언어요. 긍정의 삶입니다. 인간은 부정적인 자보다 긍정적인 자를 좋아합니다. 받은 은혜만 기억하면 감사가 넘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해서 감사가 넘쳐 목회하고 설교해야 합니다. 감사는 인간관계의 비결입니다.
-
- 오피니언
- 논문/책
-
[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2)
-
-
[하수룡 장로] 역할
- 우리가 살아가는 소속집단에서 개인이 행하는 역할은 엄청 중요하다.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하듯이 교회에서는 목사는 목사대로, 장로는 장로로서 감당해야 할 중요한 일 때문에 역할이 요구된다. 자기에게 주어진 업무에 제대로 역할만 해도 교회 안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터인데 그렇지 못해 그 파열음으로 교회는 물론 사회까지도 물의를 일으켜 주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다. 이미 성경에 기록된 기원전에 있었던 충직한 장로들의 헌신적인 역할을 들여다보면서 교훈으로 삼으면 좋겠다. 우리가 잘 아는 다리우스 왕 때 예루살렘 성전 재건은 예사로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파사의 초대 왕 고래스가 내린 포고령(BC538)으로 귀국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데 고문관들을 매수하여 성전 계획을 꺾으므로 다리우스가 왕이 될 때(BC522)까지 공사를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을 무시하고 업신여긴 바벨론의 원수들과 이교도들은 아하수에르왕(BC486~465)이 등극하자마자 유대민족과 예루살렘의 성민들을 고발하였다. 왕이 죽은 뒤 아닥사스다 왕(BC465~423) 때에도 여전히 고발하여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방해했다. 그러나 뜻있는 분들과 장로들은 이에 맞서 오직 성전 재건만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이라 믿고 목숨을 걸고 자기의 역할을 다하여 투쟁하였다는 사실이다. 아닥사스다에게 올린 상소인 장계를 보면 기가 찬다.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무엄하게도 옛날에 반역했던 예루살렘 성을 다시 세운다고 했다. 그 성을 다 쌓는 일이 다 끝나면 그들은 조공도 세금도 바치지 않을 것이라고 규탄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전부터 반역질을 했기 때문에 망했다고 했다. 성 쌓는 일이 다 끝나고 그 성전이 재건되면 다시 반역할 것이라고 왕에게 강하게 아뢴 것이다. 왕은 자기가 지시를 내릴 때까지 성을 쌓는 일을 중지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성전 재건이 하나님의 뜻이고 유다 백성이 살길임을 일깨워주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죽음을 무릅쓰고 성전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총독 다뜨내가 누구의 허락을 받고 이 집을 짓느냐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유다 장로들을 굽어보시는데 절대 중단할 수 없다고 담대하게 말했다. 공사를 책임진 두목이 누구인지 하문했을 때도 우린 하나님을 섬기는 장로들로서 이 전을 다시 세워야 하니까 선대왕의 약속대로 방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도와달라고 주장했다. 바빌론의 다리우스 왕이 명령하여 선대왕의 실록을 살펴보았더니 신전을 다시 세우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은 기구들을 다 돌려주라고 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다리우스왕은 유다 장로들이 성전 짓는 일을 힘써 도우라고 명령하여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완성한 것이다. 지배당한 나라로서 불가능한 예루살렘 성전 재건은 장로들이 예언자의 격려를 받아가며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믿고 자기 역할을 다했기 때문이다. 유다 장로들의 끊임없는 기도와 오직 성전 재건을 위한 사생 결단의 추진력 때문이라 생각되어 오늘날 교회 장로들의 헌신적인 역할이 절대 요구되는 시대임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한 때다.
-
- 오피니언
- 초장칼럼
-
[하수룡 장로] 역할
-
-
[김경헌 목사] 민수기(Numbers) (민12:1-3)
-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다는 것은 구스 여자와 결혼했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와 결혼한 것을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했다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언제 구스 여자와 결혼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구스 여자가 모세의 아내 십보라라고 하는 것은 학자들에 따라 주장이 다릅니다. 바로 앞 장(민1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후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에 발생했던 수많은 원망이니 이 장면은 오늘날 예수 믿어 구원의 백성이 되어 천국으로 가는 여정에 있는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족장들과 약속의 땅에 대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출애굽을 준비하셨습니다. 먼저는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그리고 순교 정신을 가진 부부를 준비하셨습니다. 애굽 땅에 거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묵묵히 아브라함의 신앙을 계승하는 레위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출2:1)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그 가정에 출애굽을 위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출2:2)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부모 눈에 자식이 안 예쁠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이 “잘 생겼다, 예쁘다, 아름답다, 보기에 좋았다, 사랑스럽다”라고 하는 표현들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 (눅2:52)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우리가 상투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멋있게 컸네!, 멋진 청년이네!”와 같은 사랑스러움일까요? 아닐 것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다 인정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의 조상 야곱이 라헬을 선택할 때 말 그대로 예뻐서, 아름다워서 택했을까요? (창29:17)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하는 장자의 신앙을 위해, 형과 원수가 되어 목숨을 걸고 나이 70이 넘어 집을 떠나야 했던 야곱이 겨우 외모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맞이했을까요? 자신의 장자 신앙에 함께 할 수 있는 여인, 그 신앙을 함께 계승할 수 있는 믿음의 여인을 아리따운 여자라고 해야 앞뒤 문맥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라헬이 곱고 아리땁다는 것은 믿음이 좋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관점보다는 너무도 쉽게, 자연스럽게 우리의 관점으로 들여다보는 잘못된 습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잘 생겼다, 사랑스럽다, 보시기에 좋았다, 아리땁다”라고 말씀하신다면 그 속에는 무슨 뜻이 있을까요? 당연히 우리를 향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맞물려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40년 동안 준비시키셔서 이제 때가 되어 출애굽을 실행에 옮기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출애굽의 역사는 시작부터 다름이 아닌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망과 불신앙으로 지연이 됩니다. (출2:13-14)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민수기, Numbers, 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신의 백성들, 자녀들의 수를 헤아리시는 듯합니다. 그런데 정작 민수기 안에는 끝도 없는 원망과 불평, 비방과 반역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하나둘 손꼽아 헤아리셨는데 다 헤아리고 보니 원망의 수, 원망 뿐이더라는 사실입니다. 민수기는 너무도 아프신 하나님의 심정을 기록한 책 같습니다. 오늘날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신앙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도 사랑하시는 오늘날의 목사, 장로, 집사, 권사, 성도들을 하나둘 손꼽아 헤아리시는데 정작 다 헤아리고 나니 그 수가 원망의 수가 될 것 같아 너무 송구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겠습니다. (민12:1-3)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
- 오피니언
- 설교/강의
-
[김경헌 목사] 민수기(Numbers) (민12:1-3)
-
-
[박동철 장로] 동남아 한중일 경제전쟁, 우린 복음으로 이긴다
- 동남아시아 관광중심도시 태국여행의 기회가 있었다. 사단법인 경남기독문화원 이사진들의 비전트립 일정으로 5일 동안 현지를 두루 볼 수 있었다. 이사장으로 섬기는 구자천 장로(신성델타그룹회장)의 사업장을 견학하고 선교지 파타야 선교 교회와 파타야 농아 교회를 방문하는 여정이었다. 구이사장의 배려로 회사가 있는 라용공단 내 신성그룹 태국법인을 방문하고 동남아의 경제와 시장동향을 공부할 수 있었다. 신성태국법인은 주로 LG그룹 전자제품을 생산한다. 특히 이곳에서 우리나라의 단종 된 80년대 절수형 세탁기를 대량생산, 동남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수출하고 있다. 태국현지에서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태국법인이다. 일행들은 우리기업이 태국 등 동남아 지역에 진출해 기업 활동을 하는 그 현장만 보고도 감동을 받았다. 일찍이 우리나라의 세계적 메이커가 된 LG·삼성이 동남아에서는 일찍이 일본을 제치고 선두에서 현장시장을 장악했다. 문제는 자동차 시장이다. 우리의 현대·기아차가 일본을 절대 따라가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한국 기업이 많이 입주해있는 라용 공단 파타야 시내를 따라 들어가는 곳에 반갑게도 현대차 사무실 하나볼 수 있었다. 일본자동차는 일찍이 현지 생산 시설을 통해 무거운 관세를 피하고 가격 경쟁 우위에 있었다. 구석구석에 즐비한 일본 국적의 편의점 또한 눈에 거슬렸다. 앞으로 더욱 긴장이 되는 일은 중국의 시장 공격이다. 여행 가이드는 중국의 값싼 제품들이 품질이 조금 향상되면 자동차 전자 등 모든 시장에서 중국의 선두가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제국이 되고픈 중국 일대일로(一帶一路)라는 해외정책 또한 섬뜩히 느낄 수 있는 현장이었다. 그야말로 태국을 비롯 동남아시장에는 한중일의 경제 전쟁이 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면서도 놓칠 수 없는 것은 어디든 생업현장이요, 치열한 경쟁의 시장이다. 특별히 태국을 비롯 엇비슷한 동남아 경제시장은 이제 한국과 중국 일본의 치열한 각축장이 되고 있다. 현지인들은 조만간 중국의 공격이 선두에 설 것으로 전망했다. 관광도시 태국에서 동남아 경제현장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또 다른 큰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바로 복음의 사역이다. 참 감사한 일은 동남아에서 선교 사역은 우리나라가 단연 앞서고 있다. 세계에 2만2천여 명의 우리의 선교사가 파송, 2위권을 달리고 있다. 동남아에선 우리 선교사들이 아직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 모든 곳에서 활발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1천 명 가까이 가장 많은 선교사들이 진출한 태국은 완전 불교 국가이다. 95%가 불교 인구인 태국은 종교의 영향에서 오는 게으름 문화가 팽배해 있다. 살생을 금하는 문화로 유기견들과 뱀이 도시거리에 활보하는 특성이 있다. 귀한 복음의 사명으로 사역하는 심태선 선교사의 파타야 선교 교회와 파타야 농아 교회를 방문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또 다른 회한이 차올랐다. 우리 한국선교사가 태국에서 유일하게 장애인 선교를 함께하는 그 열정에 일행들의 딱딱했던 심령들이 녹아내렸다. 이 선교지 또한 신성그룹 태국법인에서 세우고 지금껏 섬기는 설명에 모두가 감명이었다. 그렇다. 동남아의 경제시장이 아무리 한국 중국 일본과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더라도 선교복음의 열기만 있으면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날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동남아 모든 나라들은 국민소득 겨우 5천 불 전후이며 인구는 여전히 크게 늘고 있는 나라들이다. 모든 나라 한류문화가 급속히 흐르고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코로나 전·후 우리의 선교사들이 크게 줄고 있고 노령화 하고 있다는 통계가 잡히고 있다. 세계선교협의회(KWMA) 통계에 따르면 동남지역에 파송된 우리 선교사는 1만3천 명으로 전체의 65%에 달하지만 60세 이상 노령이 절반에 가깝다는 것이다. 복음이 확장될 때 현장이 부흥되고 발전됨은 세계 역사에서 알 수 있다. 동남아의 경제현장 최고의 경쟁력은 바로 복음의 힘이라는 사실 불문가지다. 우리가 급속도로 변화·발전하는 동남아에 한국기독교가 새로운 눈으로 돌아봐야할 때임이 분명함을 확인한 여행 여정이었다. 복음이 사람을 구원하고 나라를 살린다는 진리에 다시 눈뜬 시간이었다.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동남아 한중일 경제전쟁, 우린 복음으로 이긴다
-
-
[오성한 목사] 기도는 부르짖어야 한다
- 기도는 부르짖어야 한다. “부르짖는다.”는 의미는 무조건 내가 원하는 것을 부르짖는다는 말이 아니다. 부르짖는 것은 주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붙잡고 “주님 이렇게 말씀하셨네요. 제가 그것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확신하며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부르짖는다.”라는 말 속에는 말씀대로 받아들이는 회개가 포함된다.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각하지 못했음을 철저히 돌아보고 고치는 것이다. 진정한 마음의 회개가 없는 사람은 돌이킬 수 없다. 성경을 자세히 보고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약속을 누리지 못한 것을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무조건 "나는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말씀 따라 생각하지 못했고, 말씀 따라 쉼을 얻지 못한 부분들을 통회하고 가슴을 찢고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미 다 주셨다. 구약에 역사서나 선지서가 다 그렇게 말씀한다. 아니 성경 전체가 그러하다. 선지서를 보라. 철저한 멸망과 함께 하나님의 완벽한 회복의 약속들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을 약속하고 이미 주신 것을 선포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라고 하신다. 내가 다 줄 것이다. 그래도 너희가 그것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하신다(겔36:37). 요한계시록에도 요한 사도가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가서 놀라운 하늘의 광경을 본다. 사실 하늘과 우리가 사는 세계는 분리할 수 없는 같은 공간에 속한 하나다. 설명을 위해 편의상 분리하여 설명한다고 보아야 한다. 요한은 보좌에 올라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보았다. 일 곱 인이 찍힌 것을 보고는 그 인을 뗄 사람이 없어 크게 운다. 아무도 의로운 자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통곡을 하고 운다. 이 책은 열릴 책이다. 예수를 통해 열릴 책이다. 그런데 요한은 통곡한다. 하나님께서 열려고 계획하신 것들이 실행되기 전에 기도를 통해 누리게 하신다. 이미 계획된 것들이다.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계획에 없던 것들을 여시는 것이 기도가 아니다. 이미 하나님은 여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실 것을 내가 깨닫고 선포하며 미리 감사와 평안 속에 거하라는 것이 기도다. “기도하고 구한 것은 이루어진 줄 믿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모든 것을 여시고 이루신다. 인을 떼실 때 요한만 크게 울며 기도한 것이 아니다. 요한 계시록 5장에 보면 요한 울고 나니 성도들의 기도가 금 대접에 향으로 담겨져 노래로 나타난다. 이 일 후에 인이 떼 진다. 기도는 이런 것이다. 이미 주신다는 약속을 알고 내가 그렇게 선포하며 미리 누리는 것이다. 기도는 놀랍다. 하나님의 계획이 열리는 것을 내가 직접 볼 수 있는 것이 기도이다. 다니엘서 9장과 10장에서 다니엘이 예레미야가 쓴 책을 읽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발견한다. 70년 후에 포로에서 해방된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본다. 이것을 깨달은 다니엘은 금식하며 회개하며 기도한다. 이 모습을 통해서 기도를 배울 수 있다. 다니엘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예레미야 25장과 29장에 나오는 70년 후 해방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을 본 후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본 사람이 깨달은 것을 부르짖는 것이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계획하신 것들이 열리는 시간이다. 다니엘은 70년이 다 되어 감을 알고 그냥 저절로 기다린 것이 아니다. 엄청난 통곡과 회개로 감격으로 운다.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다니엘 9장에 회개의 기도를 한다. 다니엘의 삶을 보면 잘 살았다. 그런데 그는 민족의 죄를 안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미 죄 값을 다 치른 70년이 가까워 왔는데도 기도한다. 이 말은 기도는 하나님이 뜻을 발견한 자가 말씀을 붙잡고 감격하고 읊조리는 것임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이 부르짖음이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부르짖어야 한다.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져서 부르짖는 일이 있다면 엄청난 기름 부음이 나타나게 된다. 회개하고 감격으로 부르짖는 놀라움이 열려야 한다. 이런 깨달은 없이 지식으로만 복음이 정리되어서는 안 된다. 성령으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 깨달음이 세례 요한처럼, 다니엘처럼 터져 나오게 해야 한다. 회개가 저절로 터져 나올 수 있어야 한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오성한 목사] 기도는 부르짖어야 한다
-
-
[오태열 목사] 쉽게 생각하고 쉽게 시작하라
- 큰일을 하는 사람과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은 매사를 쉽게 생각하고 쉽게 시작한다. 고 정주영 회장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지성인의 약점은 너무 깊이 생각하고 이것저것을 따지다가 결단력 부족으로 기회를 놓쳐 버리고 후회한다. 그래서 사업가는 되지 못한다. 사탄의 시험 특징은 무엇을 하려고 하면 열등감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주고 쉬운 일을 어렵게 생각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여 시작하지 못하게 한다. 쉽게 생각하면 시작이 쉽고 어렵게 생각하면 시작이 어렵다.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일화가 있다. 신전 기둥에 주술을 걸어놓은 “고르디온 매듭”이 있는데 이 매듭을 풀어내는 자가 세계를 제패한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세계를 제패하고자 하는 영웅호걸들이 이 매듭을 풀고자 애를 쓰지만 아무도 풀지 못하였을 때, 알렉산더는 잠시 매듭을 응시한 후 단칼에 끊어 버린다. 이 일 후 알렉산더가 세계를 제패하였다는 전설적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알렉산더는 쉽게 생각하였기에 쉽게 매듭을 풀어낼 수가 있었다. 쉽게 시작하려면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한다. 쉽게 시작 할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하고 쉽게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의 판단에 옳고 그름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경험주의자들은 보고 듣는 것만 믿는다. 그러나 보고 듣는 것이 모두가 옳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히브리서 11: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들을 듣고 사는 사람들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5:7절에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다음으로 쉽게 시작하려면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몰라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할 수 없는 이유는 추진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을 갖게 되면 자신감과 함께 추진력이 생겨 쉽게 생각하고 쉽게 시작할 수 있다. 다윗은 시편 18:1절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 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다윗은 왕이라는 절대 권력을 소유하였지만, 하나님의 힘을 더 사모하고 의지하였기에 매사를 쉽게 생각하고 쉽게 시작할 수 있었다. 거인 골리앗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치며 당당히 맞서는 태도에서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힘에는 체력과 지력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힘을 갖고자 몸짱을 만들고 많은 스펙을 쌓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도 갖지도 못하는 또 하나의 힘이 있는데 이를 영력이라 한다. 영력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성령의 권능이다. 이 힘을 소유할 때, 니체가 그토록 염원한 초인이 될 수 있다. 히브리서 11:38절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이 힘은 기도와 말씀, 경건한 삶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두려움과 시기 질투, 범죄는 내게 임한 하나님의 힘을 빼앗아 간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영적 에너지를 점화시켜나가야 한다. 하나님께로 나오는 힘은 흥분과 열정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나를 단순하게 만들어 매사를 쉽게 생각하고 쉽게 시작할 수 있게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공급받아 능력의 사람이 되어, 매사를 쉽게 생각하고 쉽게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
- 오피니언
- 칼럼
-
[오태열 목사] 쉽게 생각하고 쉽게 시작하라
-
-
[최호숙 목사] 권태(倦怠)를 극복하는 신앙
- 인생의 삶 과정에는 육적인 권태(倦怠)뿐만 아니라 영적 권태기가 있다. 권태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관심이 없어지고 시들해져서 생기는 싫증이나 게으름” 뜻하는 말이다. <군주론>을 쓴 이탈리아의 정치 사상가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가난도, 걱정도, 병도 비애(悲哀)도 아니다. 그것은 권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이렇게 말했다. “권태 보다는 죽음을...” 인생에 권태를 느끼며 하품만 하고 따분하다고 불평만 하는 사람처럼 세상에 비참한 사람은 없다. 코로나 이후 교회 내 세 부류의 사람이 형성되게 되었다. 첫째 부류는 코로나로 인해서 오히려 신앙이 성장한 성도들이 있고, 둘째 부류는 신앙이 떨어진 성도들이고, 셋째 부류는 평상유지하며 사는 성도들이 있다. 코로나로 인하여 오히려 신앙이 성장한 사람이라고 하면 유의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욥에 대하여 사탄에서 자신 있게 변호하기를 “네가 내 종 욥을 유의(留意)하여 보았느냐?” 시인 나태주 씨가 <풀꽃>이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풀꽃의 가치에 대해서 변호하며 이렇게 시(詩)를 지었다.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하나님께서도 욥의 신앙의 가치를 칭찬할 때에 욥을 그냥 흘려보아서는 안 되고 자세히 집중하여 보면 그가 가진 신앙은 어떤 역경 속에서도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보석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우리의 신앙은 환경에 지배를 받아 무너지는 신앙, 무기력한 신앙의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신앙을 세우기 위한 활기찬 전진이 있어야 한다. 노력의 나무에는 반드시 충실의 향기가 있고, 향상의 꽃이 피고, 행복의 열매가 열린다. 우리는 땀의 배려로 노력의 나무를 가꾼다. 권태의 나무에는 반드시 허무의 악취가 나고, 불만의 벌레가 먹고, 불행의 낙엽이 떨어지고, 실패의 병이 들게 된다. 지혜로운 시작과 보람된 출발을 계획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노력의 땀을 흘릴 각오를 해야 한다. 현대 기독교 지도자 존 맥스웰(John Maxwell)은 모세의 새로운 도약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안전지대를 벗어나 믿음의 지대에서 살았다: He lived in the faith zone out of the safe zone.” 의미 있는 말이다. 우리가 제 2 의 인생을 살고자 도약하려면 안전지대를 벗어나야 하고 신앙의 나태함, 권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벤처 신앙이다. 인생이란 과감한 모험을 하지 않고는 진정 위대한 일을 이루어낼 수가 없다. 초대교회 시절 사탄의 전술 전략은 환란과 핍박이었으나 실패하였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사탄은 환난 핍박 보다는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 6:9~11). 말씀으로 재 무장하고 새롭게 도약하는 신앙이 되기를 기대한다.
-
- 오피니언
- 칼럼
- 살며 생각하며
-
[최호숙 목사] 권태(倦怠)를 극복하는 신앙
-
-
[이정희 목사] 가정에서의 호칭어와 지칭어 : 아내가 남편에게
- I. 서언(序言) 가끔 주례를 하면서 신랑신부에게 ‘여보’라 불러보라고 시킬 때가 있다. 그 이유는 신혼 초에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잘못되거나 일정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결혼을 했어도 전과 마찬가지로 ‘오빠’나 이름을 그대로 부르거나, 어떻게 불러야 할지 서로가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 가족과 친지와 지인들이 보는 앞에서 ‘여보’라는 첫 호칭을 불러보게 하고 있다. 이런 경우는 결혼 한지 20년이 다된 필자의 두 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끔 그들이 ‘아빠’라고 부를 때 사위와 필자는 동시에 ‘왜?’라고 하면서 둘 다 돌아 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는 두 딸들은 필자를 부를 때도 아빠, 남편을 부를 때도 ‘아빠’라고 호칭하기 때문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앞으로는 이런 면으로 당분간 올바른 호칭어와 지칭어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호칭어와 지칭어 1. 호칭어 : 대학의 동기와 결혼한 어떤 주부는 자신의 남편을 부를 때, 결혼 전에는 ‘철호야’라고 했다가 결혼 후에는 ‘철호씨’, ‘이봐요’, ‘여보’, ‘당신’, ‘자기야’ 등의 기분 내키는 대로 불렀다. 차녀 출생 후에는 아들의 이름을 붙여서 ‘민호 아빠’라고 부르고, 시부모 앞에서 남편을 부를 때는 ‘보세요.’ 라든가 ‘있잖아요’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경우는 젊은 부부들 뿐 만이 아니라 40, 50대 이상의 중년, 노년 부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연령층의 호칭어들은 주로 ‘여보’를 비롯해서 ‘민호 아버지’, ‘영감’, ‘임자’등 아주 다양하게 호칭한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남편을 지칭할 때도 ‘그이’, ‘우리 남편’, ‘바깥양반’, ‘우리 집 주인’, ‘우리 아저씨’ 등으로 지칭하기도 하고, 남편의 직장 직함을 붙여서 ‘사장님’, ‘교장 선생님’, ‘장로님’, ‘목사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호칭어와 지칭어 사용을 어떤 단체에서 설문조사로 물어보니 대상주부 565명중에 65.5%가 ‘여보’, 22.1%가 ‘아빠’, 또 ‘자기’로 부르는 경우가 10.3%였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오늘날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말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일관성이 없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 가장 알맞은 남편에 대한 호칭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전문가들 의견들도 일관성이 없이 다양하다. 대략 3가지 정도인데, 하나는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8.15 해방 후에는 일본식인 ‘주인’이란 호칭어이다. 두 번째는 현대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여보’이다. 물론 이 용어도 국어사전에 정식으로 오른 것은 1982년판 국어대사전이었기 때문에 그리 오래된 용어는 아니다. 하지만 오늘 날에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용어로 되어 있다. 마지막 또 하나의 보편적인 호칭어는 ‘자기’이다. ‘애인이나 부부간에 상대방을 부르는 속어이긴 하지만, 어떤 사람을 부르는 대명사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에 표준어로 수용해도 좋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2. 지칭어 : 남편에 대한 지칭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호칭어보다 더 까다롭다. 특히 문제는 시부모 등 어른 앞에서 남편을 지칭하는 말들이다. 일제 강점기까지는 시부모 앞에서 ‘아범’이나 ‘○○아버지’, ‘그 사람’ 등의 지칭어가 많이 쓰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아범’, ‘애비’, ‘○○아빠, ‘○○아버지’, ‘서방님’, ‘아빠’, ‘○○씨’, ‘○○애비’, ‘애 아빠’, ‘그 사람’, ‘그 이’, ‘남편’, ‘지아비’, ‘제 남편’등 20가지 가까운 지칭어가 혼용되고 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시부모에게 남편을 지칭하는 말의 빈도수는 ‘애 아빠’가 38.85%, ‘아범’ 25.1%, ‘그 이’ 22.4%, ‘애비’ 12.3%, ‘그 사람’1.4%였다고 한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역시 다양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시댁 어른 들 앞에서는 ‘그 이’로, 친정 어른들에게는 ‘○서방’이 보편적인 지칭어들이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오늘날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호칭어나 지칭어가 얼마나 다양하고 일관성이 없는가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다양성 속에서 어느 하나만을 택해서 똑같이 적용을 하는 것은 다소 무리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많다. 하지만 공동의 문화적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동일하지 않는 용어들을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것은 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일은 가장 긴밀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가정과 교회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이러한 적절한 부부간의 아름다운 호칭어와 지칭어의 사용은 아름다운 공동체 문화를 형성해 가는 귀중한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 모두 올바른 언어문화 창조에 앞장설 수 있게 되기를 기도드린다.
-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
[이정희 목사] 가정에서의 호칭어와 지칭어 : 아내가 남편에게
-
-
[조희완 목사] 신앙의 적폐 (삿17:1-6)
- 문재인대통령이 집권을 시작하면서 국정 지표로 삼은 것이 바로 ‘적폐 청산’입니다. 적폐(積弊)란 ‘오랫동안 쌓여온 폐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적폐는 반드시 청산되어야 하는 게 지당합니다. 다만 무엇을 적폐의 기준으로 보느냐는 것은 생각할 여지가 있습니다. 자기 판단을 기준으로 적폐몰이를 하고 마녀사냥을 하듯이 청산의 대상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 판단기준이 절대 선이 아니고 진영에 따라서 판단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폐란 잘못된 것인데 오랫동안 쌓여온 나머지 몸에 밴 습관이 되었기 때문에 좀처럼 바꾸거나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이 오래된 습관을 바꾸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유대교의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잘못된 악습과 불의한 제도를 청산하시려고 했지만 강한 저항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적폐 청산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를 보여 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자기발전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적폐를 청산하지 않으면 그 사회가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항이 따르고 고통이 따르더라도 잘못된 관습은 뜯어고치고 청산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계에도 청산되어야 할 오랜 기간 동안 쌓이고 쌓여온 적폐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가 잘못된 것을 뜯어고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잘못된 것인데도 잘못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는 관습이 있습니다.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만 우리가 적폐로 여기고 고쳐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은 적폐입니다.(삿17:6) 둘째로는, 편의주의를 추구하는 신앙은 적폐입니다.(삼하6:6,7,대상15:13) 셋째로는, 세속주의적인 신앙생활은 적폐입니다.(롬12:2,약1:27) 느리더라도 불편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바른 신앙생활을 힘쓰기 바랍니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조희완 목사] 신앙의 적폐 (삿17:1-6)
-
-
[심재철 목사] 불편한 반상회
- 아무리 날이 더워도 혼자 쓰는 에어컨은 불편하다. 눈치가 보인다. 그리고 아파트에서 그만큼 불편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반상회. 그 자리는 안건이 무엇이든지 늘 불편하다. 「‘고성, 갈등, 비난’ 이 셋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고성(高聲)이라.」 경상도 아지매와 아재의 소리는 기본적으로 데시벨이 높다. 본인은 화난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화가 많이 났다. 의견을 낼 때도, 건의사항이 있을 때고, 심지어 부탁할 때도 화가 나 있다. 냉정하게 분노의 이유를 분석해보려 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다. 화를 낼 타이밍도 이유도 아닌데 소리는 점점 커지고 상대의 말을 부정하며 공격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이 반상회에 잘 참여하지 않는다. 불참에 따른 벌금이 있지만 참석하지 않는다. 어쩌면 불편한 자리에서 담임목사와 만나는 것이 더 불편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이런 자리에서 집사님들과 만난다면 편치는 않을 것 같다. 오늘 반상회도 여러 가지 논의할 부분이 있다. 분명 누군가 도화선이 될 것이고 전쟁은 시작될 것이다. 아파트 옆 공터에 버스 차고지가 들어온다. 그리고 배수관에 문제가 있어서 작은 공사가 추진되어야 한다. 역시나 난장(亂場)이다. 뭐라 하는지 들리지도 않고 시끄럽기만 하다. 반상회에서 관리소장은 3자의 입장이다. 입주민과 대표가 논의하고 결정된 것을 실행하는 위치이기에 격한 토론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 내 의견을 내봐야 내 목과 마음만 상한다. 잠시 먼 곳을 바라보며 심신의 평온을 유지하고 있을 때 갑작스러운 공격이 들어온다. “관리소장이 누구요?” 얼마 전 이사 온 어르신이다. 나를 몰라서? 아니다. 관리소장이 관리실에서 자리를 지키지 않아 짜증이 난 것이다. 새로운 입주민이 생기다 보니 나의 근로 형태를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차근히 설명해드린다. “아파트에 필요한 일은 시간 가리지 않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만 경비처럼 자리를 지키며 근무하지 않기로 처음부터 계약이 되어 있습니다.” 이미 대부분 입주민이 알고 수긍하는 내용이었고 문제 될 부분이 아니었다. 그때. “소장!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입주민들이 수군거려! 불편하다고!” 입주민이기도 한 전(前) 관리소장님이 갑자기 더 큰 소리를 내며 따져 묻기 시작한다. 하... 저 어른 있을 때 아파트 상태를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난다. 더럽고, 노후 된 시설 방치되고, 미래 준비 따위는 없었고. 사실 지금 하는 고생의 절반은 저 어르신의 뒤처리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아파트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는 나를 누구보다 가장 잘 알 사람이다. 그리고 전과 다르게 뭐가 좋아졌는지도 분명하게 알고 있을 텐데.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할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제가 근무하면서 불편하신 부분이 많은데 말씀을 못 하셨나 봐요. 제 생계를 염려해서 그러셨다면 염려 마세요. 요즘 최저시급이 올라서 주 5일 편의점 가서 일해도 여기 일보다 덜 힘들고 급여도 낫습니다. 그러니 좋은 사람 생기시면 반상회에서 정식으로 해임안 올리셔서 관리소장을 바꾸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정당하게 해임안을 올려서 결의하시라고 차분하게 말씀드렸다. 나는 고용된 사람이다. 고용주가 맘에 들지 않으면 해고하면 그만이다. 일도 못하면서 90만 원이나 받아갈 이유가 없다. 나를 위해 아파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를 위해 관리인이 존재하는 것이니깐. 서운할 이유도 버틸 이유도 없다. “우리 새로운 소장님 와서 아파트 많이 깨끗해지고, 일 처리도 빠르고 좋습니다.” 여기저기서 토닥이는 말씀이 이어진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상처는 이미 받았고 흔적은 남더라. 날이 덥다. 그리고 사람과 마주하기가 갑갑하다. 언제까지 나는 아파트에서 일하고 있을까? 벌써 만 3년이 지나고 있구나. 삽화작가 강신영
-
- 오피니언
- 칼럼
-
[심재철 목사] 불편한 반상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