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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⑹- 장두노미(藏頭露尾)
필자는 지난 ?월 ?일 모 신문에 총장 선임의 불법성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고신총회와 고려학원 이사회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응이 없어도 되는 걸까요? 박영호 목사님이 총회장으로 있을 때모 신문에 나온 기사를 가지고 신문에 나온 사건이기에 조사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당시 총회 임원회의 강력한 의지와 결단에 따라 총회는 격론을 벌이고 투표까지 하여 조사위원회를 만들었던 전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도 그 결정의 정신을 존중하여 총회와 관련하여 신문 기사에 난 사건에 대해서 조사위원회를 만들든지, 아니면 운영위원회에서라도 살펴야 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겠습니까? 자기편이면 덮고 다른 편이면 조사위원회를 만듭니까? 총회 임원회의 결정이 이렇게 사람에 따라 수시로 바뀌어도 괜찮은 겁니까? 다시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고신대 총장의 논문표절문제 아무 문제가 없습니까? 개인적으로 이사장이나 총장의 두터운 신뢰와 사랑을 받는 당사자 대해 그 대학이 공정하게 심사하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하지만 결과가 너무 느립니다. 이번에도 시간 끌기로 할 것 같습니다.“오래된 일이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등으로 적당히 넘기려고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결과를 지켜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사회가 바르게 하려고조속한 결론을 내자고 회의 한 일이 한번이라도 있습니까?어쩌면 이사회는 이 일에 대한 답변이 나오지 않길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고려학원은 이사들의 개인 전유물이 아닙니다. 고신총회 산하 성도들과 총회에서 파송한 이사들로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총회와 성도들의 뜻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그런 노력도 의지도 없다면 이사회는 직무유기입니다. 알고도 문제없다고 강행한 이사회에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이사회에 속한 목사들이 자신의 교회에서 설교할 때 그렇게 가르치고, 장로들은 대표 기도할 때 그런 자세로 기도하는지 궁금합니다. “주님, 이건 불법이지만 급한 불부터 끄고 봅시다.” 과연 이런 설교와 기도에 성도들이 얼마나 공감하며 은혜받을 것인지 심히 궁금합니다. 절차위반과 위조문서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총회의 ‘절차위반, 문서위조’, 이런 일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받아들여지다니 참 신기합니다. 노회 구역조정 문제로 시끌벅적할 때 당회도 노회도 거치지 않는 괴문서를 총회장이 운운하는가 하면, 총회 서기가 임원회의 결정과는 다른 문서를 노회에 보내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니 이사회도 그런 불법을 보고 배운 것이 아닙니까? 지난 73회 총회에서 고려학원 이사회가 총장 인선을 위한 고려학원 정관을 개정했습니다. 총장선임을 위해 ‘1차는 3분의 2 찬성을, 2차는 과반 찬성’으로 선임할 수 있도록 개정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 이런 절차가 진행되려면 이사회에서 먼저 결정하고 수정안이 총회에 상정되어야 합니다.그런데 지난해 총회가 파한 후 3개월이 지난 12월 말에가서야이사회가 총회가 결정한 정관개정을 ‘추인’하는 형식으로 개정을했다 하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입니까? 정말 이래도 괜찮습니까? 이일을 누가 주도했으며 누가 진행했습니까? 반드시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이런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되며, 고신 총회와 500여 총대를 속인 일이고, 고려학원 이사회와 고신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기만한 일입니다. 총장은 거짓과 불법으로 세움을 받았으니 주도 세력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하수인 역할을 톡톡히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고신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논문표절, 절차위반, 부정 정관개정 등,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이렇게 선임된 총장의 지도력이 서겠습니까? 정관개정도 불법이지만 불법적 개정안을 불법으로 총회에 상정 해서 총대를 속이고 총장을 선임했습니다. 총장 모집 공고를 낼 때의 법은 분명 3분의 2 이상으로 선임해야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공모를 보고 지원한 지원자들은 공고한 정관대로 선임해야 한다. 그런데공모한 후에정관을 ‘과반수’로 개정해서 뽑는 것은 누가 봐도 특혜입니다. 공모가 나갔다면, 공모한 정관대로, 기준대로 선임해야 합니다. 공모한 정관과 다른 정관을 만들어서 지원자 중에 총장을 선임한 것은 누가 봐도 특혜를 주기 위한 일종의 모략에 불과합니다.처음부터 과반수 개정된 정관으로 공모를 했다면, 더 많은 지원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3분의 2보다 과반수가 훨씬 당선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특정인에게 유리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이사회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부당하게 일사천리로 진행했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의 이런 행위에 대해 ‘선거운동의 의미와 금지되는 범위’와 관련한 대법원의 판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법원 2016. 8. 26. 선고 2015도11812 전원합의체 판결 [공직선거법위반, 정치자금법위반]’을 예를 들어 살펴봅시다. 이때 판시사항은 ‘선거운동의 의미와 금지되는 선거운동의 범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며, 판결 요지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거운동은 대상인 선거가 특정되는 것이 중요한 개념표지이므로 문제 된 행위가 특정 선거를 위한 것임이 인정되어야만 선거운동에 해당하는데, 행위 당시의 상황에서 특정 선거의 실시에 대한 예측이나 확정 여부, 행위의 시기와 특정 선거일 간의 시간적 간격, 행위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 행위자와 후보자의 관계 등 여러 객관적 사정을 종합하여 선거인의 관점에서 문제 된 행위가 특정 선거를 대상으로 하였는지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특정한 선거를 목표로 하여 선거에서 특정인의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하는 목적의사가 표시된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 한 선거운동이라고 볼 것은 아니다.” “...특정 선거에서 특정인의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하는 목적의사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는 점이 당해 선거인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인정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세 가지 판결 요지에 따르면, 고려학원 이사회가 시도한 정관 개정은, ‘행위의 시기와 특정 선거일 간의 간격, 행위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 등을 종합해 볼 때, 분명 ‘특정인의 당선’을 도모하는 ‘목적 의사’가 분명한 ‘선거운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회는 총대들을 무지하게 보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필자는 몇 차례에 걸쳐서 바르게 하자고 강력하게 호소하는데, 이사회나 총회 임원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답을 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까? 잘못이 없으면 없다고 밝히고, 잘못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안에서 이것이 다루어지고 해결책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글로 표현하지만, 답이 없을 땐, 똥물을 뒤집어쓸 각오로 문제를 삼아도 저의 책임이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후의 모든 책임은 그렇게 행한 당사자들에게 있음을 알립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얹어봅시다. 월간고신과 기독교보에 발행인은 현직유지재단 이사장, 총회장이 맡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현 총회장은 어디를 가고, 전례 없는 전 총회장이 발행인을 계속하는가?외국인이라 안된다면, 이에 관해 아무 문제 없다는 사람들이나 당사자가 답할 차례입니다. ‘장두노미’(藏頭露尾)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 원나라의 문인 장가구가 지은 <점강진·번귀거래사>에 등장하는 이 말은 쫓기는 타조가 머리를 덤불 속에 숨기지만 꼬리는 미처 숨기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장두노미(藏頭露尾)는 “진실은 감춰도 언젠가는 밝혀 진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회는 장두노미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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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6) (민12:1-3, 마5:5)
지면을 통하여 제가 목회하는 고신교회에 대해 잠깐 예로 언급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고신교회도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370 용사는 못되더라도 37 용사는 있어야 합니다. 고신교회 목회자로서 오늘까지 우리 고신교회의 선교를 돌아보면 고신교회 성도들이 다윗의 37 용사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교회 분열의 아픔과 담임목사, 부목사들이 면직을 당하는 일 앞에서도 선교를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의리가 있는 용사들이었습니다. 코로나19 기간에도 15개 정도의 교회를 필리핀과 네팔에 건축했습니다. 순간순간 어려움이 생겼을 때 구제하고 돌아본 것은 말할 수도 없이 많습니다.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우리 교회 선교비가 1억이 더 지출되었습니다. 경상비 전체 25-30%가 선교비로 지출되고 있습니다. 일단 빚을 내서라도 선교비는 지출하고 봅니다. 돈의 액수를 떠나서 선교를 바라보는 시각과 선교를 하는 실천에 우리 고신교회와 같은 교회가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고신교회 담임목사로서 우리 교회는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일에 전 성도가 다윗의 37 용사와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성도들을 좋아하겠습니까? 잘은 몰라도 고신교단 안에서 저만큼 성도들 좋아하는 목사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 장면에서 목회자는 매우 위험한 신호를 감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고 좋아해야 합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성도들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이 부분이 목회자가 감지할 줄 알아야 하는 위험한 신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가 하나님 외에 그 어느 것도 의지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눈곱만큼이라도 하나님 의지하는 것을 성도에게로 돌리고 기대를 거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목회자에게 즉각 응징하십니다. 그러니 목회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성도들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절대로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로 하여금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목회자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성도들은 반드시 목회자의 37 용사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시도 때도 없이 풀무불 앞에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온유한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풀무불에 던져 넣으십니다. (욥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 결과 목회자는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당한다 하더라도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온유한 자가 되어 순금같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온유하게 된 목회자는 정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아론과 70장로들을 규합하여 백성들을 선동합니다. 어느 정도 새가 결집 되니 미리암은 공개적으로 모세의 통치에 비방과 반역을 시도합니다. 아직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감동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때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증언합니다. 악한 무리들이 거짓된 계획을 세워 공격했습니다. 무시무시한 공격 앞에 제자들과 함께했던 무리들은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홀로 지시기도 힘든 십자가를 지시고 묵묵하게 끝까지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목숨까지 위협하는 거짓된 계획으로 공격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른말,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온유한 자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온유한 자의 완성을 이루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약속하신 대로 땅을, 약속의 땅을, 교회를 주셨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약속하신 최고의 복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교회인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미 복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교회가 아닌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 아닙니다. 교회와 한 몸 되지 못하고, 교회와 거리가 있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도 아니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복음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모든 말을 듣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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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현령비현령(5) -전관예우(前官禮遇)
두런두런 둘러앉은 장로님들의 담소 가운데 20만 원짜리 봉투 하나면 “총회에서 발언해 줄 목사들 많다” 아니 “발언 안 할 사람 거의 없다”라는 말로 폭소가 터져 나옵니다. 참 검소한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상임위나 특별국의 자리 하나면 평생 다져왔던 인간관계나 의리는 배설물처럼 여기는 결단력 있는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이렇게 다루기 좋은 목사 장로이니 계파나 진영의 의도를 가지고 매관매직하면 오늘날 고신에 만연되어있는 계파와 진영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 자명합니다. 아니 혹자는 이미 보수는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보수를 만들어 개혁을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자고 주장합니다. 뼛속까지 개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총회 임원으로 만들어 죽어가는 보수를 살려야 한다고 평생 개혁에서 쌓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작금의 정치행태에 발맞추어 가능한 봉투가 되는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서 천년만년 누리고 싶어 하는 형국입니다. 20만 원짜리 봉투와 자리의 맛을 봐 버린 소위 보수라는 자들은 아예 정치적인 의리와 명분은 상실되어버렸고, 보수라는 가면만 쓰고 있을 뿐 언제든지 개혁도 되고, 진보도 되어 그동안 누리던 봉투의 자리를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그 신보수라는 새 배에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최근 들어 고신교단 내에 계파와 진영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커진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서울의 L 목사님께서 열변을 토하신 것처럼 총회 서기 출신 카르텔입니다. 총회 부회록 서기가 되기 전에 총회 준비를 위한 총회 서기부 MT라는 명목으로 그 해 부회록 서기 후보의 물망에 오르는 사람을 부부 동반 모임에 참여시킵니다. 그러니 총회 임원에 입성하기 위해서 그 계파 사람이 아니면 시작부터 불가능합니다. 지금 총회 서기부에 포진한 분들을 보십시오. 계파 색채가 엷고, 계파를 싫어하고, 보수성향이 있는 사람도 일단은 그 진영에 몸을 기대고 양다리를 걸쳐야 시작이 됩니다. 균형 있는 총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으로 다리만이라도 걸치고 시작했는데, 회록 서기를 지나면서 하체가 들어가고, 부서기를 지나면서 몸통이 들어가고, 서기가 되면 총회를 손에 쥐고, 서기를 마치면서 그 영향력은 한국교회로 확대됩니다. 사욕에 치우친 사람이 총회 임원, 특히 총회장이 되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년 동안 총회 서기부를 거치면서는 구석구석을 너무도 잘 알게 된 서기부 임원들이 총회장단이 되었을 때, 유익한 점보다 작금의 현상처럼 위험하고 무법천지가 될 위험성이 훨씬 높습니다. 소위 서기 카르텔이라는 것을 반드시 총회적으로 다루어 이 카르텔로 인한 계파와 진영을 넘어 안하무인의 정치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서기부를 거치지 않아도 총회장단에 오를 정도의 사람이면, 이미 노회와 목회에 상당한 경험과 식견을 가진 분들로서 충분한 자질이 검증되었고, 사무총장 이하 직원들의 훌륭한 보좌가 있기에 1-2년의 총회장단 사명은 충분히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한국교회에서의 우리 교단의 몫이 있습니다. 교단의 위상을 생각해서 대부분이 총회장을 역임하신 분들이 이사로 가십니다. 총회 서기부를 마치고는 특별국이나 상임위에는 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총회 임원회에서 의논이 있었다지만 관례처럼 총회 서기를 마치면 총회를 잘 안다는 빌미로 감사국에 들어갑니다.(현재 감사국원 3명은 최근 총회 서기역임) 총회 감사국인지 총회 서기 지내신 분들의 친목회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입니다. 총회 감사국이 총회 서기부의 연장선 조직입니다. 총회 감사국은 별정직처럼 그 기능상 법적 전문가, 재정 전문가, 행정 전문가 정도는 배치해야 합니다. 차라리 총회를 잘 아는 서기부 출신들로 총회를 하나 만드시지요. 총회 총대로 나올 정도가 되면 기본적인 자격과 능력을 갖춘 분들인데, 총회 서기 출신들이 꼭 해야 한다는 논리는 총대들을 얼마나 무시하는 처사인지 총대들은 알아야 합니다. 총대들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근 하나 던져주면 입을 다무는 총대들이니 무시당하는 줄도 모를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서기를 마치고 임원회에서 의논한 대로 그 어느 상임위도, 틀별국도, 이사도 가지 않은 분이 고 신수인 총회장이십니다. 최근 총회 서기를 지낸 분 들 중 유일하게 보수진영의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 약속을 지켰습니다. 소위 개혁진영의 서기들은 단 한 명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너무 개혁을 잘하셔서 말입니다. 처음 시작할 땐 훌륭하셔서 선출되셨습니다. 그런데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엔 그 어떤 사람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총회가 훌륭한 분들로 보호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총회장의 사역이 끝날 무렵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는 당신의 몫인 “CBS이사”를 제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총회장님께서 가셔야 교단 권위와 위상이 서게 된다고 고사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전달하여 CBS에서는 제가 이사로 갈 것 다 알고 전화까지 왔었습니다. 물론 개혁에 몸을 담았던 총회장 출신은 선배 총회장 출신 목사님의 이사 자리를 빼앗아서라도 반드시 그 자리에 갑니다. 말 그대로 개혁 정신이 투철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고 신 총회장님께로부터 “미안하다”고 하는 전화가 왔습니다.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힘들게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래 그 자리는 제자리가 아닙니다. 총회장님 자리니 총회장님 편하신 대로 하시라”고 대답했고, 현제 이사로 있는 당시 총회 서기가 고집을 부려 그 자리로 갔습니다. 사욕에 눈이 뒤집히면 세상이 말하는 윤리도 도덕도 질서도 없습니다. 현재 우리 고신총회가 한국교회에 파송하는 이사는 CBS, 성서 공회, 찬송가 공회, CTS, 군선교 위원회입니다. 현재 이사를 하고 있는 분들은 다 총회 임원 출신이고, 목사인 경우는 다 총회 서기 출신입니다. 고 신수인 총회장님을 분기점으로 해서 그동안 관례로 총회장을 역임했던 분들이 가던 이사를 총회 서기를 마치고 가는 아주 개혁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총회를 잘 아는 것을 넘어 총회 울타리 밖에 있는 이권도 잘 알게 된 것입니다. 총회장단이 갖는 위엄과 일반 목사와 비교할 수 없는 혜택에 눈이 멀어 목사의 정년까지 희생해 가며 자리에 오르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그동안 꿈꾸어 왔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됩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런 세월이 가는 동안 고신의 신앙과 정신은 오물통이 되어 썩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기가 아니라고 했다가 집권을 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위기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 역시 진영논리로서 총대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속임수입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고신의 교회들에게 떠넘기는 기가 찬 술수이지요. 그리고 뒤에서는 몇 년 세월을 통해 달인의 경지에 오른 실력으로 소위 봉투가 되는 일에는 탁월한 안목으로 몇 수를 내다보는 행보를 하게 됩니다. 총회 서기부는 총회 서기단 활동으로 총회 임원회 자리를 끝내야 합니다. 총회장단은 시대 시대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바라보며 영적으로 한국교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장자 고신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을 세워야 합니다. 총회가 평안하고 태평성대일 때는 농어촌에서 목회하시는 훌륭한 목사님도 총회장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고신이 위기라고 특별기도회를 하는 상황이라면 총회장 되기 위해 몇 해 동안 수천, 수억을 쓸 것이 아니라 총회장에 된 후 수억을 총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을 총회장으로 세워야 합니다. 고신이 위기라고 기도회를 하면서, 1) 눈 감고 아웅 하지 말고 2) 순수한 교회들과 성도들의 주머니를 갈취하지 말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 이미 그 자리에 오르신 분이라 해도 위기의 총회를 위하여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정말 고신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전관예우(前官禮遇)’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장관급 이상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 사람에게, 퇴임 후에도 그의 공직에 대한 헌신을 기려 예의를 갖추어 존중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리는 개인의 행복에 우선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바쳤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로 일한 관리가 퇴직했을 때 그를 예우함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전관예우라는 말의 뜻은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장 잘못된 사례가 법조계의 전관예우입니다. 전직 판사와 검사가 퇴직 후에 변호사가 된 사람을 현직 검사나 판사가 예우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변론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관(前官)이라는 이유로 유리한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공정을 생명으로 하는 법정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총회 감사국은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총회 피감 기관들을 공정하게 제대로 감사할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관예우 받았으니 밥값을 해야겠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신을 대표하는 한국교회의 자리도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자리매김해 버렸습니다. 당연히 사리사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릅니다. *묻고 싶습니다. 앞서 언급한 총회를 대표하여 파송하는 이사직에 어떤 근거로, 어떤 기준으로 파송하는지, 서기 출신이 총회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총회 임원회는 총대들이 납득 할 수 있는 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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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5 : 성경에서의 용납과 용서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데 먼저 감사를 드리면서 문득 그게 용서인가 용납인가? 두 단어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라는 용어적 의미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많은 교인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찬송가 569장 3절에도‘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가 있다. 하지만 엄격히 보면 같은 듯 다른 말이다. 본 호에서는 그 차이점이 어떤지를 분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용납(容納)과 용서(容恕)의 단어 분석 1. 용납이란? : 헬라어로는 ‘아네레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바칠 납(納)이다.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임’이라 했고, 금성사 국어대사전에는 ‘부정적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했다. 국문학 교수를 역임한 최태영 장로는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란 그의 저서에서 ‘이 용납은 허용(許容)과 거의 같은 뜻으로 부정적인 요소, 모자라는 점이 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의 죄는 용납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지 이를 긍정적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라고도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어떤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일에 대한 회개 기도가 필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용납은 죄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후11:1).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구나’(고후11: 19).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라’(엡4:2)고 했다. 여기에서의 용납이란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너그럽게 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2. 용서란? : 헬라어로는 파레시스 로서 ‘놓아줌’, ‘해산’, ‘처벌의 보류’등의 뜻이 있고, 로마서 3:25절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지은 죄를 용서함’이란 뜻으로 말씀하고 있고 수많은 용서에 대한 말씀도 거의 동일하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이며,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이라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성경적 의미나 각종 사전적 의미로 볼 때도 용서의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또 스스로 죄를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 기도할 때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용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인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찬송가 569장 3절에 ‘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면, 용서와 용납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다소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논한 대로 실제로는 같은듯하나 다른 의미이다. 여기서는 용납이 아니라 용서로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이 두 단어 외에도 관용(寬容)(사전적 뜻: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란 용어도 있다. 어쩌면 용납과 용서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고민과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문자적인 구분을 지나치게 하다 보면,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기 때문에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용어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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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삶의 현실에 대한 인간의 태도
인생의 삶을 사는데 현실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 태도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태도(attitude)가 고도(altitude)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비행기가 아래로 향하느냐 위로 향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고도가 결정되듯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방향과 높이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누구나 높이 오르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높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를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본다고 한다.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값이 비싸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값이 싸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다. 항상 높이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려움이 있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 내려가는 자들이 있다. 어려운 시기에 갈렙은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믿음의 태도를 가졌던 사람이다. 그는 85세의 나이에도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땅에 잔류하고 있는 아낙 사람들이 사는 산악지대를 정복하고자 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분명 함께 하실 것이니, 내가 반드시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수 14장 12절)” 갈렙의 신앙은 능동적 신앙의 삶이었다. 45년 전에도 다른 사람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후퇴 반응을 보였지만 갈렙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자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벌써 85세 고령인데도 여전히 적극적인 Next Vision 성취를 지향하며 살았던 것이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창업하기 전 레이 크록은, 53세 나이에 겨우 밀크쉐이크와 함께 30년 동안 종이컵을 파는 세일즈맨으로 반평생을 보냈다. 그래도 그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30년이라는 기나긴 밤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서 성공을 한 것이다. 인도의 벵골 호랑이는 먹이 사냥에서 사냥감을 잡는데 약 스무 번의 시도 끝에 한 번 성공한다고 한다. 그는 실패 앞에 포기가 아니라 도전의 태도를 가져 그 도전이 성공을 이루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 번 실패하면 쉽게 단념하고 한탄한다. 잃은 것 때문에 원망하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이 자산이 되어 다시 도약해야 한다.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음악가였다. 31세로 죽을 때까지 방 한 칸 없었고, 그토록 필요한 피아노 한 대 없는 불우한 음악가였다. 어느 날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데 악상이 떠올랐다. 그는 오선지를 찾았다. 친구가 레스토랑 메뉴판에 오선지를 그려주었다. 그것이 유명한 아베마리아 세레나데이다. 환경에 낙심할 필요 없다. 주위 시선에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폭풍이 일어도 지구는 돌고 있는 것이다. 고난 속에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가면 길이 열린다. 신앙의 열정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고 그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나니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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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자유의 축복 (요8:31-36)
1997년 북한의 권력서열 제3위(노동당 국제담당비서)였던 <황장엽>씨가 주중 한국 대사관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 망명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북한에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나라로 망명함에 따라서 그의 가족들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북한 권력층의 실세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남한으로 망명을 할 경우 남아 있는 가족들이 얼마나 비참해 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남한으로 망명을 감행한 이유는 바로 체제의 자유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고, 너무나 잘못되어 있는 북한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무모한 망명을 한데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의 행동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역사가 평가를 할 것입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 소중함”입니다. 체제의 자유, 정치적인 자유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억압이 있는 나라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기꺼이 몸을 던지고, 민주화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유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억압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애타게 목말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정치적인 자유보다 더 필요하고 소중한 자유가 있는데 바로 영적인 자유(신앙의 자유)입니다. 그 영적인 자유에 대해서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를 취하는 방법을 알아야합니다.(요8:32,36) 둘째는, 자유를 빼앗기지 않게 지켜야합니다.(갈2:4) 셋째는,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갈5:13)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소중한 자유를 잘 지키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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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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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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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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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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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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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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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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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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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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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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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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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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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범사에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은 형통의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삶을 범사에 형통하게 해 주셨습니다. 범사에 형통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복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은 큰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형통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형통의 복을 주십니다. 형통은 성공입니다. 성공하는 인생이 있고, 실패하는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공을 주셔야 합니다. 전도서 10:10,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어 성공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지혜가 제일입니다. 시편 1:1-3, “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는 의미는 하는 일마다 성공한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수아 1:7-9, “7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9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사는 자에게 형통, 성공의 복을 주십니다. 형통의 의미가 성공이라고 영어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형통은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니고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는 것이 형통입니다. 요셉이 고난당하고 누명 쓰고 감옥에 있을 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는 것이 형통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해 주시니 고난을 잘 견뎠습니다. 위기에서 건짐 받고, 감옥에서도 꿈을 해몽하고, 꿈과 비전을 가지고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주인 보디발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워주셨습니다. 애굽의 종이었던 자가 애굽의 총리까지 됩니다. 천대까지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머리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심이 범사에 형통하게 되는 삶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범사에 형통하게 해 주셨습니다. 범사에 형통한 축복을 받은 자는 자신만 복 되게 살지 않고 축복의 유통자가 되는 삶입니다. 요셉 때문에 애굽 사람들이 복을 받았습니다. 참된 형통의 복은 받은 복을 나누면서 사는 삶입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잘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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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범사에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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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
- 주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으라 우리가 주님께 쓰임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해야 한다. 일평생 5만 번의 기도응답을 받은 조지 뮬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 일곱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말씀을 규칙적으로 묵상하는 일이다. 그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 고아원 일을 시작할 때도 말씀의 인도를 받았다. 그는 시편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라는 말씀에 감동을 받아 길거리에 버려진 고아를 위해 일평생 헌신하며 살았다. 말씀이 그의 길에 등이 되고 빛이 되었다. 둘째, 기도를 통해 성령의 내적 음성을 들었다. 그는 사람에게 무엇을 의논하기 이전에 먼저 무릎 꿇어 기도하므로 성령님께 물었다. 고아원 건물을 지을 때도 많은 시간을 기도하여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 그때마다 성령님은 지혜를 주시고 판단력을 주셔서 일을 잘 처리할 수 있게 하셨다. 셋째, 성령이 주시는 내적 평강을 누렸다. 사람이 볼 때 합당하고 좋게 보일지라도 심령의 깊은 곳에 평강이 임하지 않을 때는 일을 추진하지 않았고 기도의 응답으로 심령에 평강이 임할 때 까지 기다렸다. 넷째, 일의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가를 면밀히 검토했다. 모든 일을 시작할 때 자신의 동기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은지 항상 확인했다. 심중에 지극히 작은 일부분이라도 잘못된 욕심의 그림자가 있으면 그것을 제거한 후에 일을 시작했다. 다섯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 한분만을 의지했다. 그는 1842년 2월 5일 경 갑자기 곤궁에 처해 위기를 맞아 지출경비를 충당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여호사밧이 아람과의 전투에서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며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함 같이 주님만 바라보았다 여섯째, 항상 성령 안에서 일을 시작하고 진행했다. 그는 성령님과 더불어 사역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 성령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추진할 수 있었다. 마지막 일곱째, 환경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은 인간의 처한 환경을 다스리시고 이끄시는 분이심을 믿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을 때는 환경을 통해 막으셨다. 그래서 그는 이 사실을 알고 환경을 변화시키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늘 바라보았다. 마가복음 11장 본문은 주님이 예루살렘을 입성하기 전후에 일어난 사건과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케 한 내용을 기록한 말씀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누구든지 주님을 만나면 변화 받게 된다. 비록 미물의 나귀도 주님을 만남으로 주님의 장중에 귀하게 쓰임 받는 존재가 되었다. 주님은 장사의 놀이터로 변해버린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은혜의 처소로 복원 시키셨다. 기도가 능력이요 기도가 재산이다. 성소에 기도소리가 끊어지지 않을 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다. 나귀 타고 입성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동네 밖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나귀 새끼를 풀어 오라고 하셨다. 이는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다. “...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주님이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마를 타고 임하지 않으시고 왜 나귀 곧 나귀새끼를 타셨는가? 이는 선지자의 글인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둘째, 매인 인생을 풀어 주기 위해 오셨다. 나귀는 첫 새끼를 대속 제물로 드리는 유일한 짐승이다.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아는 짐승이다. 그래서 나귀는 다른 사람의 구유에서는 절대로 먹지 않는다. 이사야는 이스라엘과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나귀를 들어서 책망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 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나귀는 주인에게 목숨을 바쳐 순종하는 짐승이다. 예수님은 태어나서 구유에 누우셨다. 그 구유가 나귀의 구유이다. 유대인지명유대의 구유이면 당연히 나귀의 구유이기 때문에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나귀는 주인에게 목숨을 바치는 순종의 짐승인 것처럼 주님 또한 주인 되신 하나님께 목숨을 바쳐 구원사역을 이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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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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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 목사] 메타버스는, 교회와 주일학교에 기회이다.
- 미래의 충격을 만난 교회 코로나가 발생하지 1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기독교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2000년 이후에 한국기독교의 숫자는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이슈들과 더불어 급감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교회를 출석은 하면서도, 한국기독교에 대하여 불편한 시각을 가졌던 이들은 비대면 예배를 구실로 교회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치명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시설과 인력과 재정이 구비된 교회는 온라인으로 이러한 위기들에 그나마 잘 대처하였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온라인 디지털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다른 매체와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경향이 지적되고는 한다. 반면에 시설과 재정이나 인력이 구비되지 않은 교회는 무대책으로 속앓이만 하는 경우들이 많아졌다. 코로나로 인하여 비대면 사회가 본격화되면서 교회교육에서도 심각한 상황이 대두되었다. 온라인으로 교회교육을 대처하지만, 호응이 되지 않거나, 제대로 된 시도를 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나타나고는 했다. 이는 교회 교사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아날로그 문화에 적응된 교사들은 디지털 문화에 제대로 적응을 못하면서 다양한 어려움들을 호소하였다. 아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자신이 있는데,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여 학생들과 소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디지털 기기로 어렵게 시도를 해도 디지털 마인드로 무장한 학생들과 디지털적인 소통이 잘 되지 않기에 어려움을 겼었다. 그로 인하여 부산의 한 교회에서는 총 18명의 중고등부 교사가 코로나 이후 15명이 더 이상 교사의 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는 말은 이를 반증한다. 이러한 위기들이 교회와 교회학교에 정면으로 밀어 닥치지만, 교회와 교회학교는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해법으로 이 위기들을 풀어 나가야 한다 위기는 위대한 기회이다 (교회는 항상 위기를 발판으로 성장) 모든 상황은 양면을 가지고 있다. 위기는 위대한 기회이다.예루살렘 교회에 심각한 핍박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커다란 피해를 보게 되었지만, 오히려 이는 선교의 역사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이 빌립보 감옥에 투옥된 상황은 빌립보가 시작되는 특별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신약학자인 FF브루스 박사는 “번지는 불길”이라고 표현하였다. 코로나 사태로 모든 것들이 막히지만 하나님의 길은 매이지 않는다. 코로나의 느닷없는 습격으로 인하여 교회당의 문이 닫히고, 교회당에서의 예배모임이 금지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기존의 예배에 익숙하던 이들은 당황하고 절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도리어 놀라운 복음의 확장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드렸던 예배와 교육활동이 이제는 그 어떤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고 예배의 기회는 항상 열리게 되었다 1980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교회는 시대문화를 선도하는 기능을 하였다. 하지만 과학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교육기법이 획기적인 발전을 하면서 교회는 시대에 뒤처지게 되었다. 그러나 코로나가 여기한 펜데믹 시대는 모든 것을 초기화 시키는 결과를 야기했다. 그런데, 이는 오하려 교회에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CHANGE 는 CHANCE 로 사용될수 있다. 기독교의 모든 콘텐츠는 메타버스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유의하여 보다 효과적인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메타버스 교회교육>은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메타버스 교회학교는 무엇인가? 메타버스 교회학교는, 메타버스를 활용하여 교회학교를 운영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메타버스(Metaverse)는 가상·초월의 의미를 가진 단어인 meta와 세계와 우주를 의미하는 universe의 합성어이다. 스마트폰, 컴퓨터, 인터넷 등 디지털 미디어에 담긴 새로운 세상, 디지털화된 지구를 <메타버스>라고 부른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일상을 올리는 것이나, 온라인수업을 듣고, 베달음식을 이용하하는 것도 <메타버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힌다. 메타버스 교회교육은, 이미 갖추어진 모든 인프라를 총동원하여, 이를 활용한 다양한 신앙교육을 시도하고 확장하자는 것이다. 교회는 위기에 강해지는 생명체이다 250년전에 영국에서 시작된 주일학교 운동은 그 당시의 필요에 의하여 복음이 반응한 결과였다. 18세기가 되면서, 영국에는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었다. 급속히 산업화가 진행되는 도시로 몰린 하층민은 온 가족이 매일 15시간 노동을 해야만 겨우 생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동에 어린이도 예외가 없었다. 어린이도 어른과 똑같이 과한 노동에 시달렸으며, 교육이나 도덕적 훈련을 받을 기회는 없었다. 쉬는 날인 주일에는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도시에서 이탈 행위를 했다. 술. 담배.고 싸움은 어린이가 배운 유일한 쉼의 방식이었다. 어린이 소외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주일학교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로버트 레이크스(1736-1811)였다. 레이크스는 목사도, 교사도 아닌, 평신도 신문기자였다. 교회의 한 성도가 점차 심각해지는 어린이의 소외문제를 해결하고자 시작한 봉사가 주일학교 운동이 되었다. 교회는 모든 상황이 유리하고 안정적일때만 작동되는 조직이 아니다. 교회는 상황이 불리하고 어려울 때에 도리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생명체이다.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해답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기준이다. 펜데믹으로 인하여 기존의 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질서 (New-Norma)가 정립되는 시기에 성경적 세계관에 근거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위기의 시대에 준비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사실은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진리이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 어떤 것들로 하나님의 의도와 통제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의 문제가 발생할 때에, 그제서야 답을 찾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미 해답을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많은 문명들은 인간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준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로마는 제국을 통치하기 위하여 도로를 만들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메시지처럼 반란을 진압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상업적 목적을 위하여 도로를 만들었다. 로마는 혈통과 문화와 역사 다른 이질적인 국가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덩치를 불린 제국을 지배하기 위하여 엄격한 법을 제정하였다. 로마는 헬라어를 제국의 공용어로 지정하여 제국의 전역에 공표하였다. 로마는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이러한 시스템들을 운용하였다. 로마는 지배국들에게 최대한의 자치권을 행사하도록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제국에는 200년간의 로마의 평화가 가득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프라들을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사용하셨다. 군사적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든 로마의 도로를 통하여 복음은 신속히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로마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며 상업의 편리를 위하여 보급한 헬라어로 성경이 기록되어 제국의 모든 지역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로마의 전성기인 <로마의 평화> 기간에 지역간의 전쟁은 거의 없었기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인터넷은 처음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개발되었지만, 차츰 상업적인 용도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초창기에는 비싼 가격과 느린 속도가 문제되었지만, 지속적인 발달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터넷은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엄청난 기능을 한다. 이는 메타버스도 마찬가지이다. 메타버스 역시 제대로 활용되면 엄청난 복음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행복나눔교회가 할 수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아날로그 세계>와 <디지털 세계>를 아우르는 메타버스를 통한 교회교육을“행복나눔교회”에서는 다양하게 시도해보았다. 행복나눔교회는 코로나가 오기 전 주일 오전예배에 120명이 출석하였던 교회이다. 코로나로 인한 전통적 방식의 교회교육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모든 인프라를 이용하여 교회교육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했다. 비대면 온라인으로 교회학교 학생들과 소통하고, 신앙교육 프로그램들을 새로이 개발하였다. 비록 온라인을 통하지만, 교회학교 학생들과 소통하며 신앙의 양육을 위한 모든 과정을 통합하여 운영하면서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였다. 또한 오프라인에서 가능한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시행하면서 학생들이 교회와 지속적으로 연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교회 자체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교회들과 연계하여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였다 학생들이 교회를 올 수 없는 상황에서도 매주 주일학교 모임은 계속된다. zoom을 활용하여 주일학교를 운영한다는 뜻으로 <줌일학교>로 명명된 시간은, 불신 가정에서 나오는 학생들도 손꼽아 기다리며 참여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중고등부는 시공간을 넘어서는 영화의제목을 따라 <점퍼 타임>으로 모이는데, 자기의사를 잘 드러내지 않는 청소년들이 활발하게 서로 교제하며 신앙의 훈련을 매주일 밤에 온라인으로 경험한다. 여름성경학교를 이전처럼 교회에서 떠들썩하게 할 수 없지만, 온라인을 통해서 성경학교를 진행하면서, 이전의 소극적인 학생들도 도리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 여름 성경학교를 교회당에 학생들을 보내기만하던 가정안에서, 찬양과 말씀이 울러 퍼지며 온가족이 여름성경학교에 참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중고등부들을 위한 온라인 수련회는 지역을 초월하여 참여한 학생들에게 거룩한 은헤와 놀라운 도전을 주었다 이는 단지 교육기관만이 아니라, 고난주간, 부활절을 비롯한 절기 행사에서 일반 장년교인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메타버스를 활용한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게다가 우리나라를 넘어서 필리핀을 중심으로 5개국의 청소년들 1,200명과 국내의 교회 청소년들 300여명이 참가한 < 온라인 글러벌 캠프>를 뜨거운 은혜중에 진행하였다. 하늘길이 막혀 선교지에 갈 수 없지만, 온라인을 타고 복음이 동시간에 온 열방에 선포되는 특별한 경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을 경험하게 되었다. <메타버스 교회학교> 이러한 경험들을 모아서 <메타버스 교회교육>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출간된지 3주만에 갓피플 선정 <기독교서적 판매 1위> <교회교육 분야 1위>에 오르며 많은 교회의 사역자들과 교사들에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전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많은 교회에서 새롭게 메타버스를 활용하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은 메타버스에 대한 이해를 도우며, 이를 적용하여 코로나와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교회학교의 적합한 대처방안을 실제로 설명하고 있다. 메타버스를 활용하여 교회학교를 운영하면, 이전의 전통적인 교회학교와는 또다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 책에서 지면관계상 미처 다루지 못한 내용들을 심화수업을 하는 <교회, 메타버스를 탑승하다>세미나는 3주간에 걸쳐서 여러 교회들에서 진행중이다. 메타버스 시대의 특징을 이해하고, 메타버스 세대들의 특징을 살펴보며, 여기에 근거하여 교회학교의 전략을 수립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메타버스>를 타고 교회와, 교회학교는 질주한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초유의 상황으로 현장에서의 예배는 중단되고, 교회당에서의 주일학교 교육 프로그램은 멈추어졌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멈추지 않고, 다음세대들을 위한 교회학교 역시, 끝나지 않았다. 이미 현재의 기술력으로도 가동되고 있는 <메타버스>를 활용할 때에 교회와 교회학교는 놀라운 열매들을 거두게 된다. 교회당에 직접 가지는 못해도 충분히 은혜가 충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직접 학생들이 교회당에 모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활기찬 교회교육이 이루오질 수 있다. 실제로 메타버스를 활용하여 교회와 교회학교가 부흥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가기가 사실상 어려워졌음에도, 메타버스를 활용하여 선교지의 현지인들과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다. 이러한 과정은 엄청난 경비와 화려한 장비, 탁월한 기술인력들이 동원되면 더욱 효과적인 구현이 가능하다.하지만, 스마트 폰 하나만 가지고서도 얼마든지 이러한 작업들을 진행할 수 있다. 그러한 전략들을 함께 나누면서 많은 교회들이 메타버스에 탑승하여 목회와 다음세대 사역을 질주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글. 김현철 목사 행복나눔교회 담임, <메타버스, 교회학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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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 목사] 메타버스는, 교회와 주일학교에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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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선생님요, 청소 다했니더
- 이제 익숙해진다. 등굣길, 학교 앞 문방구, 버스타고 30여분 가면 나오는 시내라는 곳. 그리고 아이들의 사투리까지도. 요즘 나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절대 사투리를 배우지 않겠다는 것. 물론 지금 내가 사용하는 경상도 말도 사투리다. 하지만 이곳에서 다시 배우는 말은 사투리가 아니면 좋겠다. 그래서 결심했다. 표준어를 배우기로. 대전생활이 시작되었지만 이곳 말을 배우지 않기 위해 나는 좋은 표준어 선생님을 모셨다. “텔레비전”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서울말을 쓴다. 유심히 살펴보며 조용히 따라해 본다. ‘에잇 닭살!’ 어색하고 좀 부끄럽다. 경상도 사투리가 익숙한 내가 표준어 연습을 하고 있으니 스스로가 용서가 안 되는 느낌이다. 고향을 배신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계속 텔레비전 앞에서 자리를 지킨다. “기여?” - “그래요?” 대전에서 아이들이 자주 쓰는 말을 일부러 표준어로 바꿔서 다시 연습해 본다. 절대 “기여?” 이 말은 안 쓸 것이다. 이 말을 쓰는 순간 나는 그냥 충청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반드시 이 기회에 표준어를 배우리라. 제법 학교 적응도 잘되고 있고, 염려했던 것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학업 성적도 1-2등을 유지할 수 있었고... 물론 내 성적이 발표될 때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이 많이 놀랐다. 조금 불쾌했다. 왜 놀라지? 나는 이제 ‘시골에서 전학 온 애’에서 ‘시골에서 전학 왔는데 공부 잘하는 애’가 되었다. 그리고 여자 아이들이 주번이라서 무거운 물주전자를 들고 오면 대신 들어주기도 하는 매너남이 되었다. 모든 아이들이 청소를 안 하고 도망가도 남아서 청소의 끝을 보는 성실남이 되어 있었다. 오늘도 함께 청소해야 하는 아이들은 도망갔고 기다란 학교 스탠드를 혼자 모두 쓸어냈다. 청소가 끝났으니 이제 교무실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 “선생님요~ 청소 다했니더.” 아, 나는 오늘도 말 한마디에 교무실 선생님들을 다 웃겨버렸다. 완벽한 표준어를 구사하셨던 텔레비전의 스승님들께 면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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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선생님요, 청소 다했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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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상상력의 윤리성
-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많은 학생들이 “인간은 이성적 존재입니다”라는 대답을 합니다.아마도 학교교육을 통해서 인간존재의 독특성을 생각하는 기능에서 찾는 헬라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이런 대답을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단순히 이성적인 존재로만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성적 능력만을 가진 기능적인 피조물 이상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인간을 상상력과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예술적 상상력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보다 더 풍요하게 만들어 갈 수 있고, 우리의 삶의 질도 더 풍요하고 아름다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다양한 방법으로 볼 수 있고,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상상하고, 창작하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마음속에 그려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하고 사유하는 은사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은사들이 없다면 아마도 우리 삶의 대부분은 대단히 단조롭고 냉랭하고 음울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상상력과 예술적 감성을 주시지 않으셨다고 하면 우리가 저술한 대부분의 책은 딱딱한 논리와 교훈적인 말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순히 이성적인 존재로만 창조하셨다고 하면 우리가 건축하는 건물도 아마 기능적인 면만 지닌 어색한 시멘트 덩어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거주하는 주거 공간도 아마 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들을 가장 유용하고 편리한 방법으로 배치해 놓은 냉혹한 참호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성적이며 과학적인 존재로만 지음받았다면 우리의 예배도 아마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예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의 삶 전체가 단순한 기능과 기술에 불과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상상력을 주셔서, 세상을 보다 풍요하게 가꾸는 예술적 삶을 영위하게 하셨고,이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 자신도 보다 더 부요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물론 화가와 음악가, 무용수와 영화 제작자 그리고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 소위 전업 예술가들만 창의적이며 예술적인 삶을 살도록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창의적이고 풍부한 상상력을 지니라는 부르심은 예술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부르심 입니다. 우리는 요리를 할 때나 옷을 입을 때, 집안 장식을 할 때나 헤어 스타일을 가꿀 때,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상상력을 사용해서 우리가 보다 더 풍요한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력을 가지고 새로운 어떤 것을 예술적으로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image)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위대한 예술가입니다. 화가 피카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최고로 위대한 예술가이시다. 하나님은 결코 똑 같은 것을 두 번 그리지 않으시는 예술가이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매일 저녁 하늘에다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분입니다. 석양의 아름다움은 바라볼 때 마다 다르고, 바라볼 때 마다 새로운 경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는 그림은 세상에 있는 모든 화랑보다도 더 많은 감상자들을 유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예술계의 거장입니다. 홍수 후에 하나님은 다시는 세상을 물로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의 징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양피지에 기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언약의 징표를 흰 종이에 검은 글씨로 써 주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은 아름다운 무지개를 약속의 징표로 주셨습니다. 무지개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보존될 것이며, 그것도 풍성함과 아름다움의 장소로서 보존될 것이라는 약속을 그 자체 안에 담고 있는 아름답고 다채로운 빛의 징표입니다. 하나님은 이 풍성함을 무지개뿐만 아니라 서쪽 하늘의 노을로도 표현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상상하고 만들 수 있는 모든 예술적 솜씨들은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예술적 은사들을 잘 활용하여 우리 자신도 풍요롭게 살고, 우리의 이웃들도 보다 더 풍요하게 살도록 섬기는데 사용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은사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다양성과 조화와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예술적 상상력을 최대한 개발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 세계의 풍성함을 축하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온 세상을 향해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그리고 이러한 삶 자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또 다른 형태의 예배적 행위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지구촌에는 부패한 정치권력들이 온갖 종류의 음모론을만들어내고 있습니다.심지어는 인간의 존엄한 생명을 담보로 잡는 음모론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우리의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우리의 상상력을 잘못되게 호도하는 온갖 치졸한 가짜 뉴스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시간이 지나고 보면 우리가 얼마나 천진난만했는가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어이없는 일들로 판명 난 동일한 종류의 가짜 뉴스들이 또 다시 우리의 상상력이 일탈하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상상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상상력의 윤리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며 성찰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상상력을 가지고 형제에게 상처를 주거나 남을 음해하는 일에 사용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삶은 물론, 이웃의 삶까지도 질적으로 풍요하게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사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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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상상력의 윤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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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용납 그리고 여백
-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제일 힘든 것은 더 이상 제가 실수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먼저 천국에 보내신 한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어머니는 자신이 실수해도 괜찮은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수도 너그러이 받아 주신 유일한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의 고백을 들으면서 가장 좋은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실수해도 괜찮은 관계입니다. 내가 실수하는 것을 너그러이 용납해주는 사람과의 관계야말로 내게 가장 편안한 관계라 하겠습니다. 성경 복음서를 보면 그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죄인이라 취급받던 사람들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벌레를 대하듯 멀리하고 정죄했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인정하는 사람들과만 교제하였습니다. 그래서 정작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이 터부시하고 정죄하는 죄인이라 낙인찍힌 사람들을 가까이 하셨고 더불어서 식사까지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보고 그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정죄하고 수군거리자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위대하신 용납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용납은 예수님의 특기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의 특기로 인해서 우리 같은 죄인도 예수님께로 올 수 있었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유일하게 옷 벗고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부부입니다. 서로의 치부를 다 드러내도 아무렇지도 않고 오히려 그런 서로를 안아주는 것이 부부입니다. 그런 면에서 부부는 최고의 용납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그 용납이 육체에만 머물면 안 됩니다. 다른 모든 면에서도 부부는 서로를 가장 깊게 용납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혹 다른 사람 앞에서 실수하면 부끄러워도 배우자 앞에서는 부끄럽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배우자의 실수에 대해서 “그럴 수도 있지, 뭐 그것 갖고 그래요.”라고 용납할 수 있는 것이 부부입니다. 내 실수와 잘못을 용납해주고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변호해 줄 수 있는 부부라면 최고의 부부입니다. 그처럼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최고의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실수해도 편안하게 말할 수 있고 그 실수를 감싸고 용납해 주는 교회가 최고의 교회입니다. 실수한 것 때문에 정죄 받는 교회라면 예수님을 닮은 예수님의 몸 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좋은 목회자는 무엇보다 성도의 실수를 용납하고 위로할 수 있는 목회자이고, 좋은 성도는 목회자의 실수를 덮어주고 용납하는 성도입니다. 실수 할 수 있는 인간들이 모인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해서 꼬투리를 잡고 정죄하기 시작하면 그 교회는 예수님 닮은 예수님의 몸 된 교회가 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사람을 힘들게 하고 사람을 떠나게 만드는 교회답지 못한 교회가 됩니다. 교회 안에 완벽주의적인 성향의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이나 사람 앞에서 바른 삶을 사는 것은 참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하여서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에 여백이 없이 글만 빽빽하게 적혀 있는 책은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읽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여백이 있고 삽화도 있는 책은 술술 잘 읽혀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사람에게도 여백이 필요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연약함과 부족함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서로를 용납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하여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용납하는 자세, 바로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여백의 신앙이라 하겠습니다. 성경 전도서 7장 16에서는 말씀합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바로 이 말씀이 다른 사람을 향해서 용납할 줄 아는 여백의 신앙을 명하는 말씀입니다. 독자 여러분, 다른 사람에게 완벽을 강요하지 않고 실수를 용납할 줄 아는 여백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어 보십시오. 그리할 때에 다른 성도가 편안히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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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용납 그리고 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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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연리지
- 일본을 여행할 때 큐슈에 있는 산사 앞에 수백 년 된 연리지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묘한 모습으로 서있는 것을 본적이 있다. 큰 나무의 가지가 서로 얼싸 안고 있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여 그 매력으로 마음을 뺏긴 것은 사실이다. 주로 연리지라 함은 같은 종류의 나뭇가지가 서로 붙어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한 상태로 남녀 간의 사랑이나 부부간의 금실, 선비의 우정 등을 나타낸다고 한다. 고금을 막론하고 연리지의 출현은 희귀하고 경사스러운 일로 여기고 귀한 나무로 대우받고 있는 것이다. 큰 나무 줄기가 이어지면 연리목이라 하고 나뭇가지가 이어지면 연리지라고 한다. 가지가 맞닿으면 바람에 의해 서로 비벼지는 상태가 되어 산불이 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땅속의 붙어있는 뿌리 덕분에 나무가 죽지 않고 오랫동안 같이 잘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맞닿은 두 나무의 줄기나 가지는 각각 해마다 새로운 나이테를 만들어 지름이 점점 굵어지면서 서로가 심하게 눌리므로 제일 먼저 껍질이 압력을 견디지 못해 찢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나무의 세포들이 직접 맨살로 맞부딪치게 되어 운명적인 만남이 완성된다. 이것은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는 경우와 흡사하지만 나는 우리 주님의 원가지에 상처 난 우리 인생의 작은 가지가 접붙임을 당한 연리지와 유사하여 정말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무의 연리현상은 아무 가지나 서로 맞닿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동질의 나무라야 가능하다. 소나무나 참나무는 수십 년 붙어있어도 연리지와 같이 결합되지 않는다고 한다. 근본이 서로 달라 돕는 것보다 맞닿을 때마다 서로에게 상처만 준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상처받지 않고 항상 위로해 주시고 감싸 주시는 우리 주님의 큰 나무에 연리지로 붙어있어야만 잘 생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래 전에 태안 꽃박람회에서 크기가 같은 원 가지가 붙어있는 벤자민을 부부나무라 칭하여 20년 동안 잘 키워 큰 나무로 성장시켰다. 두 나무처럼 각각 성장하는 것 같았으나 나중에는 가지가 붙어버린 연리지가 되어 모두들 신기하게 생각하고 기뻐하였다. 부부일체의 사랑을 나타내는 모습처럼 연리지가 되어버렸으나 분명한 것은 부부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고 주님과의 연리지 사랑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았다. 영국 작가 루이는 ‘인간은 에로스에 의해 성장하고, 스톨게에 의해 양육되고, 아가페에 의해 완성된다.’고 한 것처럼 인간이 가진 사랑은 역시 미완성일 뿐이다. 세상은 수많은 사람들이 남녀 간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외치고 연리지처럼 서로 변하지 않기를 염원한다. 심지어 가요까지도 연리지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모두 사랑의 홍수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지만 진정 사랑의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릴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참 나무이신 포도나무로 보내 주셨다. 원가지이신 주님에게 상처 난 연한 포도나무의 순이 되어 접붙임이 되어야만 참 연리지 같은 삶이 전개된다. 세상에서 상처받은 연약한 가지가 주님의 큰 가지에 붙어살면 치유와 함께 연리지의 사랑을 맛보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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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연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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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
- I. 서언(序言) 일반인이든 교인이든 가장 흔하게 접하는 일들이 장묘에 대한 일이다. 그동안 수많은 장례식에 참여하거나 예식을 인도했고, 강의를 했던 필자도 정작 본인의 가족이 상을 당했을 때는 다소 당황이 되었던 일들도 있었다. 그 많 큼 우리 기독교인의 장례예식은 형태는 있으나 신학적 조명과 정례화 된 장묘문화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몇 차례 기고한 구약학의 김중은 교수도“성경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이것이 기독교의 장묘문화라고 말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고, 주로 각 시대의 장묘문화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 보편적으로 공유했을 것으로 본다.”고 한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과거에 없다고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에 올바른 신학적인 정립과 기독교적 가치에 합당한 장묘문화를 지금보다 더 정확하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는 본 기고의 근본 취지인 장묘 용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본 호에서도 앞서와 같이 장묘문화를 논하면서, 요즈음의 가장 보편적인 화장에 대한 김교수의 연구 논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II. 김중은 교수의 시대에 따른 성경의 장묘문화 고찰(3)/ 화장과 무덤 1. 화장(火葬; cremation): 김 교수가 연구하고 발표한 화장에 관한 내용을 축약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화장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이전 시대에 게제르(Gezer, 게셀)와 예루살렘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 전염병이 돌때는 비상조치로서 화장을 했을 가능성이 있었고(암 6:10),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보은하는 뜻으로 사울과 요나단의 시신을 수습할 때 살과 내장은 불태우고 그 유골만 매장한 것으로 이해된다(삼상 31:11이하). 하지만, 이러한 장례방식은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신화장의 금지사상을 생각하게 하는 구절도 있다(암2:1). 일찍이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화장이 행해졌으며, 셈족과 페니키아인도 일부 화장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화장은 미개지역에서는 드물고 고도의 문화지역과 계급사회에서 성행되었다. 그리스, 로마에서도 화장과 토장이 병용되었으나, 주후 200년 경 부터는 화장제도가 폐지되었다. 화장 선호의 이유로는, 시체 부패에 따른 불쾌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함, 영혼이 시체에서 빨리 빠져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함, 영혼의 옛 거처를 파괴함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일에 자극을 주기 위함 등이 거론 된다. 모세 율법의 사형 방법으로 불태워 죽이는 것이 있으며(레20:14; 비교, 참38:24; 수7:25), 죽은 자에게 분향하는 것은 화장과는 상관없다(렘34:5; 대하16:14; 21:19 등). 이스라엘 시대 팔레스틴에서는 많은 무덤들이 발굴되었으나 시신을 불에 태운 화장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로 볼 때 화장은 비 이스라엘 주민의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팔레스틴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시체를 불태워 훼손하는 것은 범죄행위이며(암2:1), 제단을 훼손하는 범죄자들과(왕상13:2), 흉악한 범죄자들을 화형에 처하는 경우가 있었다(창38:24; 수7:25 등). 2. 무덤 : 성경시대 가장 일반적인 무덤은 석회암에 형성된 자연동혈이나 인조 석실묘를 사용하였고, 필요에 의해 확장이나 새로운 석실을 파서 사용하는 데로 발전했다. 이러한 동굴묘실의 무덤형태가 성경시대 전체에 걸쳐 사용되었다. 그러나 석실묘는 그 비용문제 때문에 주로 상류층에서 사용했고, 일반 평민들은 땅을 얕게 파서 묻는 평토장을 주로 했다. 무덤의 장소는 일반적으로 주거지나 성읍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진 장소를 사용했다. 유해의 처리는 보통 반드시 누운 자세로 했고, 가나안과 이스라엘 시대를 일관하여 무덤에서는 부장품을 넣었던 것이 발견되었고, 여기에는 일상생활에 사용하던 모든 종류의 가재도구들이 있다(다량의 토기그릇 종류, 무기류, 인장, 부적 등). 또한 유해는 평상복을 입혀서 머리핀, 장신구 등과 함께 매장하였으며, 왕과 상류층 귀족들은 그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물품들이 발견된다. 이런 무덤의 부장품들은 내세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III. 중략하고 맺는 말 필자의 입장에서 장묘 문화에 대한 가장 큰 관심은, 현대에 있어서 가장 많이 시행하고 있는 화장에 대한 성경적 조명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논한 김 교수의 연구에서 본대로 화장에 대한 성경적 입장의 거의 없다. 또한 무덤 속에 부장품들을 같이 매장한 것으로 보아서 이런 일들이 기독교적 입장을 충분히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로 볼 때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묘문화는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사후에는 육신의 처리보다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면이 더 중요하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앞으로도 더 논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결론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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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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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복음이 영감(靈感)이다.
- 복음이 영감이다. 가장 크고 정확한 영감은 복음이다. 영감을 키우려면 복음을 깨닫는 것이다. 예수만 믿었는데 모든 문제가 풀리고, 모든 것을 주신 것이 복음이다. 성도 중에 많은 분은 신앙 생활하는 것이 죄짓지 않는 것인 줄 알고 죄를 짓지 않으려는데 초점을 맞추어 살고 있다. 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는지, 안 지었는지를 먼저 살피며, 회개하며 죄짓지 않으려고 애쓰며 산다. 속지 말아야 한다. “왜 못 지킨 거니, 조금 더 노력하고 조심했으면 지킬 수 있었는데 너는 아직 멀었어.”라고 하며 죄책감과 정죄감에 빠지든지, “앞으로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너는 완벽해질 수 있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겨우겨우 지켜야 하는 나약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죄가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죄의 말을 듣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또, 다시 로마서 5장을 바르게 묵상해야 한다. 로마서 5장은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하고 있다. 아담이 큰가, 예수가 큰가? 대답해 보라. 아담과 예수를 비교라도 할 수 있는 상대인가? 아담이 지은 죄를 얼마나 완벽하게 날려 버리시려고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야 한다. 아담과 예수님은 비교할 수조차 없다. 아담 때문에 죄가 왕 노릇 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의가 왕 노릇 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아담을 키우지 말고, 예수를 가득 키워야 한다. 계명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죄가 우리를 속여서, 우리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로마서 7:11)라고 했다. 선한 것을 해 보겠다고 마음먹을수록 안 되기 때문에 결국 죄의식만 자라게 된다. 또는 위선자로 살게 만들거나, 죄인이라는 생각으로 덮여버려 아무렇게 살아버린다. 아담이 저지른 일이 아닌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에 집중해야 한다. 예수께서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생각이 믿음이다. 성경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로마서 7:13)라고 한다. 선한 것을 하겠다고 하면. 죄가 더 드러난다는 사실을 아는 성도가 몇이나 될까?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율법은 선하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죄인 됨을 드러내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죄를 깨달으면 한다.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필요한 것을 깨달으라고 주신 것이다. 율법은 선하지만, 율법으로 우리는 죄인 됨만이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로마서 7:14)라고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이기에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 그 마음을 읽어 드리고, 저절로 따라 하게 된다. 죄는 매일 우리에게 죄인임을 증명하며, 우리를 사로잡아 온다. 믿음 좋은 자에게 여전히 죄의 법이 사로잡아 오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정상인 줄 모르면 죄의 법이 사로잡아 올 때마다 평생 시달리고 능력의 삶을 살 수 없다. 십자가를 왜 지셨는지, 정확히 아는 것은 너무 중요하다. 다시 말해 복음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지 모른다. 바른 영감으로 행복의 삶을 살게 하기 때문이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로마서 7:23)라고 한 말을 알아들어야 한다. 율법을 지키려고 할수록 죄가 우리를 사로잡아 올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답을 제시하기 위해 탄식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5)라고 말이다. 죄의 법이 사로잡아 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울은 죄의 법에 잡혀 있지 말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했으니, 영의 생각을 하라고 호소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로마서 8장에서 말한다. 영의 생각을 하는 훈련을 해라. 죄의 법에서 완전히 해방됨을 볼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죄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것을 받아들이는 영의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이 깨달아져야 바른 영감이 오고, 당신 안에 잠재운 성령의 능력을 복음으로 깨울 수 있다. 이제는 죄의 법이 주는 고통이 아닌 영의 생각으로 풍성해야 한다.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을 많이 생각할수록 주님은 기뻐하신다. 죄의 법을 이기는 지름길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보여 주고 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원하셨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이 나를 얼마나 신뢰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이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임마누엘의 영감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 주님이 주신 온전한 복음의 결론은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가진 것을 아는 것이다. 임마누엘 안에 완전한 인도가 있다. 임마누엘의 복음의 영감을 받자. 복음이 이 땅을 능력으로 살게 하는 영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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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복음이 영감(靈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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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그리스도인 정치가들에게 바란다!
- 경남기독신문 독자들 중 혹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재임 당시에 ‘Again 1907 in Seoul - 서울에서 예루살렘까지’라는 기독청년집회에 참석하여 “서울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서”를 낭독한 것이 언론에 기사화되어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청계천 복원과 함께 이명박 전 시장의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당시 서울시 교통체계개편에 따른 혼란과 함께 이 시장을 이중으로 아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이 시장은 “흐르는 역사 속에서 서울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하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면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도시이며, 서울의 시민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서울의 교회와 기독인들은 수도 서울을 지키는 영적 파수꾼임을 선포하며, 서울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고 기도하는 서울 기독 청년들의 마음과 정성을 담아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합니다”는 내용의 봉헌서를 ‘서울특별시장 이명박 장로 외 서울의 부흥을 꿈꾸며 기도하는 서울 기독 청년 일동’의 이름으로 낭독하였습니다. 이 내용이 〈오마이뉴스〉를 통해 보도되자 네티즌들의 비난이 봇물을 쳤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역시 규탄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이 시장의 사과를 요구하였고, 정치인들은 호기를 놓칠세라 무참한 정치적 일격을 가하였습니다. 당시에 유인태 의원은 “그나 저나 서울이 이제 하나님 것이 됐으니 수도를 옮기긴 옮겨야 겠어요”라고 정치적 폄하 발언을 하였고, 임채정 의원은 “사람 땅으로 옮겨야지요”라고 응답하였습니다. 배기선 의원은 “아니 자기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좋은데 왜 자기 것도 아닌 걸 바친다고 하느냐”고 비아냥거렸다. 급기야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도 이 시장의 발언이 “사려 깊지 못한 처사”라는 공식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을 대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좀더 성숙한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언론계와 정치계와 종교계를 망라한 우리 사회 전반이 말초적이고 지엽적인 것보다는 보다 더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의연하고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없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사실 당시 기도집회는 도덕과 윤리가 붕괴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 사회가 복음으로 회복되기를 간구하면서 기독청년들로서의 책임을 통감하며 회개하는 순수한 기도모임이었습니다. 이 집회에서 이명박 당시 서울 시장은 행사 주최측이 작성한 내용을 주최측의 요구로 그대로 읽었을 뿐입니다. 집회에 참석하여 ‘서울 봉헌서’의 내용을 처음 본 이 시장이 그대로 낭독하겠다고 동의한 것도 집회 자체가 정치적인 모임이 아니라 기독청년들의 순수한 기도 모임임을 알았기 때문이며, 동시에 봉헌서의 내용도 정치적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의 가치관과 문화가 도덕과 윤리적 가치 차원에서 바뀌어야 한다는 공통의 바램을 표현한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표현도 서울 시장으로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 서울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표현으로 해석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지말고, 서울을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깨끗하고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드는데 진력해 달라는 기독청년들의 마음을 서울 시장에게 전달하는 지극히 종교적이며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사건을 다시금 회고해 보면서 진솔한 자기 성찰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기도하는 모임이나 연합 집회를 정치화하거나 이벤트화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이웃의 죄와 허물로 인해 애통하며 사죄의 은총을 구하는 제사장의 모습과, 지도자들의 죄를 지적하며 공의를 요구하는 선지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종교적 행사를 통해 권력자들을 위무하고 그들의 잘못에 면죄부를 부여해주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모습이 거침없이 나타나고 있음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의 순수한 기도회에 참석하여 “서울시 봉헌사”를 낭독한 이명박 장로가 혹시라도 당시 행사를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한 홍보의 장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한 정치인이 단순히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표를 몰아줄 정도로 유치한 수준에 머물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조찬기도회 개최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서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 표출할 것인가하는 고민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건전한 사회 질서와 건강한 사회라는 한계 내에서 다른 사람들의 신념과 종교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리차드 마우(Richard Mouw)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무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성과 세상의 도성이 지상에서 자유롭게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월터스톨프(Wolterstorff)의 표현대로 모든 것을 기독교화해야 하는 ‘성례적 사회’(sacral society) 또는 중립적인 삶에 종교를 추가하는 ‘중립적 사회’(neutral society)가 아니라, 종교적으로 헌신된 다양한 집단과 기관이 공평하게 취급을 받는 ‘다원주의적 사회’(pluralistic society)를 추구해야 합니다. 당시 서울 시장 이명박 장로의 서울시 봉헌 발언이 정치판에서 필요이상으로 폄하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대선후보들은 물론 가족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이 중대한 시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 세계관의 틀을 통해서 후보들의 인물됨과 자질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온갖 종류의 왜곡, 거짓 선동, 음모에 현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 정치가들도 이제는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통해서 자신이 믿고 고백하는 신앙을 제도교회의 문턱을 넘어 공의와 평강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정책으로 구현해내어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가와 지지를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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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그리스도인 정치가들에게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