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연월일 2026-04-2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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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욜로(YOLO)’의 시대를 넘어, 부활의 참된 소망으로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욜로(YOLO)’라는 말이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이 말은 “인생은 한 번뿐이니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며 살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 땅의 삶이 전부인 양, 오늘을 마음껏 소비하고 즐기라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길어진 100세 시대라 할지라도 지나고 보면 인생은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날아가는 화살과 같이 쏜살같이 흘러갑니다. 만약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이 땅의 삶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면 그 짧은 여정의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지독한 허무와 공허 그리고 죽음 앞의 우울함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인 ‘부활’은 이 허무한 인생의 마침표를 영원한 생명의 쉼표로 바꾸어 놓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겨울이 되어 얼어붙었던 가지에 봄이 되면 다시 잎새가 싹트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영원한 삶이 예비되어 있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단지 죽음 이후의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는 강력한 원동력입니다. 슬픔을 사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 릴런드 스탠퍼드는 수재였던 외아들을 갑자기 잃고 극도의 슬픔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으니 저 대신 세상의 청년들을 도와주세요”라는 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그의 인생관은 완전히 바뀝니다. 아들이 천국에 살아있다는 부활의 소망을 품게 된 그는 당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헌납해 오늘날의 명문 스탠퍼드 대학을 세웠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개인의 절망을 넘어 수많은 젊은이를 살리는 위대한 헌신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어느 호스피스 병동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젊은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 남긴 편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가, 엄마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향해 가는 문이란다. 기나긴 겨울을 이기고 봄에 피어나는 저 꽃들처럼 우리도 눈물 없는 그곳에서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이처럼 부활의 소망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위대한 사랑과 용기를 현재의 삶 속에 불어넣습니다. 성경은 부활한 우리가 누릴 미래에 대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라고 약속합니다. 부활은 눈물도 사망도 애통함도 없는 완벽하고 행복한 삶이 열리는 기적입니다. 이 땅의 쾌락만을 좇는 ‘욜로’의 허무함을 넘어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가는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2026년 부활절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참된 기쁨과 미래에 대한 찬란한 소망이 상처받고 지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가득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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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8
  • [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부활절을 맞이하는 믿음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세번의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ㅡ.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신 후 처음의 사람에게 1.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창1;28 하나님이 아닌 존재인 뱀이 처음의 사람에게 찾아와 그들의 욕구를 채우도록하고 뱀의 사상을 따르게 한 후..세상은 어둡게 변해 버렸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2.정녕 죽으리라..ㅡ창2;17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찌니라,ㅡ창3;19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고, 밭은 소출을 내지 않고 행복했던 가정에 행복은 간 곳 없고, 형이 동생을 해하고 장례를 치르고 부부는 갈등을 겪고,,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한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 지금도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고, 영생의 나라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 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ㅡ 요11;25-2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시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주시고 ㅡ무덤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십니다.ㅡ요528. 죽음으로 가는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ㅡ 요3;16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의 댓가를 치르고서야 우리 믿는 자들이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ㅡ그가 찔리고 그가 상하고 그가 징계를 받고, 그가 체찍에 맞음은 우리 허물과 죄와 불안과 걱정과 공포, 병 때문인 것을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ㅡ사53;5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하셨고. 사53;6.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들의 저주가 그를 믿음으로 물러가는 복된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3;13-14 이 말씀이 부활절을 맞이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힘이 되고 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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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전서 1:3) 할렐루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온 마음 다해 찬양합니다. 2026년의 봄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에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이웃들의 삶 위에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죽음의 권세도 이길 수 있다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처럼 온 세상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경제적인 어려움들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빈 무덤의 승리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과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거룩한 백성된 우리는 생명의 부활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이번 부활절을 시작으로 경남 지역 구석구석에 산 소망을 전하는 통로로 소외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무너진 마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 부활의 아침은 어둠이 지나고 반드시 빛이 온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자 확증입니다. 비록 현실의 고난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지라도,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신뢰하고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갈등이 있는 곳에 화해를 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다시 한번 우리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이 기쁜 소식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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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통영기연 곽만섭 목사
    사랑하는 경남신문 독자들과 경남 성도들께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아침에 선 교회와 성도들이 이 놀라운 생명의 복음을 다시 붙들며, 믿음 가운데 새 힘을 얻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나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의 상황은 여전히 우리를 흔들지만, 주님께서 살아계신 한 교회는 무너지지 않으며 우리의 믿음 또한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능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위에 부활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여, 각 가정과 삶의 자리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일상 속에서 부활의 기쁨이 실제가 되어, 지친 마음을 회복시키고 서로를 위로하는 은혜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역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흘려보내며, 말과 삶으로 복음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작은 섬김과 나눔이 모여 이웃에게는 위로가 되고, 사회에는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어둠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의 은혜로 날마다 새 힘을 얻고, 기쁨으로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여러분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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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창녕기연 안덕수 목사
    부활에 아침에 고백할 승리의 고백 매해 맞이하는 부활절인데 올해는 더욱더 그 의미가 깊이 다가온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의 한말씀, 다이루었다(요19:30)는 말씀이 마음속에서 계속 울린다. 모든것을 하나님께맡기시고, 다 이루심의 완성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그분의 마지막은 승리와 완성의 선언이셨다. “다 이루었다.”이 한마디에는 완전한 지불의 선언이다. 예수는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값을 하나하나 치르셨다. 낮은 땅에 오심, 모욕과 조롱, 가시 면류관, 십자가의 고통까지 치르시면서 그 모든 과정은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는 길이었다. 이때 휘장이 갈라지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무너졌다.죄로 인해 닫혀 있던 길이 열렸고, 하나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다가오시는 분이 되셨다.어쩌면 우리는 이 장면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두 팔을 벌리사 안아주신 사건이다. “이제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 십자가는 단지 고난의 상징에서 용서와 초대의 상징이 된것이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고백은 죽음을 앞둔 체념이 아니다.사명을 완수한 자의 평안이며, 전적인 신뢰의 표현이다. 우리는 흔히 ‘안식’을 쉼으로 이해한다.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안식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인간은 여섯 날 동안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안식일은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날이라는 것이다.이 통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우리는 끊임없이 계획하고, 통제하려 하며, 결과를 붙잡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커진다.그러나 예수의 마지막 고백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준다. “맡겨라.”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괴로움과 눈물의 시간이 찾아올 때, 심지어 과거의 상처와 실패까지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안식을 경험한다. 부활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승리의 선언을 한다. 십자가는 겉으로 보면 패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죄와 죽음을 이긴 승리가 담겨 있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말한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따라서 믿음의 삶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삶.붙잡으려 하기보다 의탁하는 삶.그리고 그 고백은 매주 예배 속에서, 또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반복되어야 한다. 내 삶을 주께 맡김을 통해 신앙은 완성되어 간다. 참된 안식과 승리를 경험하게 되기실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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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진해기연 정용기 목사
    사랑하는 진해와 경남 지역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우리의 믿음의 핵심으로서, 절망 가운데 있는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소망입니다.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현재의 능력이며, 미래를 향한 확실한 약속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고난과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시대는 세계 각국의 이기주의와 전쟁의 소식, 경제적 어려움과 이념의 대립, 빈부와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각자의 삶에 놓인 무거운 짐들로 인해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려움 속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평강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지역사회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부활 신앙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생명을 받은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 희망을, 상처의 자리에 치유를, 분열의 자리에 화해를 이루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진해와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가 한마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나누며 이 땅 가운데 생명의 복음을 더욱 힘있게 전하는 증인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6년 부활절 진해기독교연합회 회장 정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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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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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총장] 인생은 짧다, 그러나 깊을 수 있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어깨춤을 추며 흥겹게 부르던 노래 한 구절이 문득 생각난다.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인생은 짧다”(카르페 디엠/carpe diem)는 의미로 남긴 짧은 라틴어 구절은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오늘날 우리에게 아직도 익숙하게 들린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또 얼마나 진지하게 삶에 적용하고 있는지 새해를 맞으면서 한 번쯤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로만 크르즈나릭(Roman Krznaric)의 베스트셀러 『인생은 짧다, 카르페 디엠』은 바로 이 질문을 우리 앞에 던진다. 그는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이 오늘날 얼마나 얄팍하게 오해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우리 삶을 다시 본질로 되돌아보게 만든다. 현대 사회에서 ‘카르페 디엠’은 종종 “하고 싶은 건 지금 해!”, “지금 즐기자!”라는 소비주의적 문구로 탈바꿈했다.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라는 유행어가 대표적이다. 이 구호는 짜릿한 여행이나 과감한 소비, 충동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며, 정작 삶의 본질을 성찰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피상적인 시간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크르즈나릭은 이를 “카르페 디엠의 납치”라고 말한다. 그는 잊혀져 가는 이 삶의 기술을 다시 우리 손에 되찾아주고자 한다. 그가 제안하는 ‘카르페 디엠’은 단순한 쾌락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의식적 선택과 자기 결단, 타자와의 관계, 죽음에 대한 명상 속에서 피어나는 삶의 태도다. 그는 다섯 가지 유형의 ‘카르페 디엠’을 제시한다. 즉흥적인 기회를 붙잡는 삶(Opportunism), 감각을 통해 삶을 음미하는 쾌락형(Hedonism),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는 해방형(Liberation), 사회 정의를 위한 참여로 드러나는 정치적 형태(Political), 그리고 타자를 위한 헌신으로 드러나는 윤리적 삶(Ethical)이다. 이 모두는 “오늘이라는 시간 안에, 내가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단 하나의 메시지를 지향한다. 이 질문을 기독교 신앙의 언어로 바꾸면 “오늘 나는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표현될 수 있다. 우리가 유한한 존재임을 기억하고, 언젠가 반드시 마주하게 될 죽음을 직면할 때,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죽음을 의식하는 삶은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삶의 지혜로 이끈다. 시편 기자는 말한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크르즈나릭은 자기 결정권을 회복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소비자의 삶이 아니라, 창조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외침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는 세상의 유혹과 무기력 속에서 하루를 흘려보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이 땅을 책임 있게 살아가는 ‘소명자’다. 아프리카 오지와 지구촌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며,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인재들을 양성하는 선교사의 하루도 그러하고, 세속화된 현대 도심의 심장부에서 성경적 가치관을 구현하며 다니엘처럼 오늘을 살아가려고 고민하는 평범한 성도의 하루 삶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동일하게 소중한 ‘카르페 디엠’의 시간이다.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관점이 없으면 “인생은 짧다”고 하는 이 말은 우리의 삶을 한없이 허무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얼씨고 절씨고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라는 노래 소리로 한 해를 보내고 또 맞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짧은 인생이기에 이제는 남은 날을 헤아리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게 해 달라는 우리의 기도는 짧은 인생을 더 위대하고 역동적이며 견고하게 만들어 준다. 짧은 인생이기에 더 깊이 있게 살아야 한다. 매 순간 순간을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온전히 신실하게 응답하며 살아야 한다.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는 우리 모두에게 “카르페 디엠”은 단지 ‘순간을 즐기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붙들고 소명적인 삶에 신실하라’는 우리 주님의 자비로운 초대일 수 있다. 김성수 목사(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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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8
  • [독자기고 ] 국내전도위원회를 해산하라(5)
    6. 적용: 고신 교단이 직면한 ‘현실 외면’ 의 문제 문제를 직면하는 것과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오늘 고신 교단이 겪는 가장 심각한 위기는 단지 한국 사회의 인구 감소나 교회 세대 구조의 약화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이러한 현실을 보고도 아무 근본적 변화 없이 과거의 전략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총회가 시대를 분석하지 못하면, 총회는 제 기능을 잃습니다. 지도력이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면, 지도력은 형식으로 전락합니다. 교회가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면, 교회는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래는 고신 교단이 현재 보이는 주요 문제들입니다. A. 인구 감소 속에서도 계속되는 국내 교회 개척 추진 고신총회는 여전히 ‘국내 교회 개척’ 을 교단 성장의 주요 전략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미 다음과 같은 구조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 세계 최저 출산율 ● 총 인구 감소 ● 교회 출석 인구 감소 ● 청년층의 급속한 이탈 ● 기존 교회의 연령 구조 악화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 개척을 계속 확대하는 것은 선교적 확장이 아니라, 구조적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방향입니다. 새롭게 세워진 교회는 대부분 미약하고, 기존 교회는 더 나뉘어 약해집니다. 나눔은 많아지고, 강함은 줄어듭니다. B. ‘성장’의 착각 — 실제로는 신자 이동일 뿐이다. 고신의 새로운 개척교회와 소규모 지교회들은 종종 “성장” 을 보고합니다. 그러나 그 성장은 대부분 전도나 회심이 아니라, 기존 신자의 이동입니다. ● 새로운 교회가 생기면 ● 근처의 기존 교회 성도들이 일부 이동하며 ● 통계상 “성장” 이 발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 총량이 줄어드는 사회에서의 재배치일 뿐입니다. 즉, 고신 교단이 “성장” 으로 인식하는 것들 중 상당수는 실제로는 교회의 약화를 가속하는 현상입니다. C. 목회자와 성도의 고령화 — 개척이 아니라 통합이 필요한 시대 고신 교단의 목회자 평균 연령은 꾸준히 올라가고 있으며, 젊은 목회자 공급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성도 역시 동일한 패턴을 보입니다. ● 청년/청소년 비율 급감 60–70대 중심의 예배 ● 농어촌 및 중소형 교회는 다음 세대가 거의 없음 이런 구조 속에서 교회를 더 세우는 것은 물과 영양이 부족한 땅에 더 많은 씨를 뿌리는 일과 같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씨앗’ 이 아니라, 이미 심겨진 교회를 살리고 강화하는 일입니다. D. 전도보다 ‘전입 성도’ 가 많은 구조 — 선교의 진정한 부재 개척교회 중 회심자(처음 믿는 사람)의 비율은 극히 낮습니다. 고신 교단 전체적으로 보아도 청년 회심자는 드뭅니다. 그런데도 개척을 통해 얻는 “성장 수치” 가 마치 선교적 성공처럼 보도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교의 결실이 아니라, 타 교회 성도 한두 명을 빼 오는 ‘재배치 효과’ 일 뿐입니다. 한국 교회 전반이 이 문제를 겪고 있지만, 특히 고신의 경우 교회 개척 정책이 적극적이기에 피해는 더 크고 구조적입니다. E. 개척이 목표가 될 때 — 사명보다 ‘직분 확보’ 의 문제 물론 모든 개척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성령의 부르심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척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구조적 현실 속에서 다음과 같은 동기도 실제로 존재합니다. ● 담임 목회 자리 확보 ● 교회의 갈등 회피 또는 독립적 운영 ● 장로회적 감독을 벗어난 자율성 추구 ‘내 교회’ 라는 자기실현 욕구 이러한 개척 동기는 선교가 아니라 개인적 동기이며, 결과적으로 교단 전체의 건강을 약화시킵니다. 바른 교회 개척은 성령의 부르심 + 실제적 필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실제적 필요” 가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F. 성경적/장로교적 명령과의 충돌 — ‘분별없는 개척’ 은 불순종이다. 앞서 보았듯, 성경은 다음을 명령합니다. ● 문제를 ‘모여’ 함께 논의하고 해결하라 (행 15) ● 시대를 분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알라 (대상 12:32) ● 남은 것을 정리하고 구조를 정비하라 (딛 1:5) ● 다수의 지혜로 교회를 안전하게 하라 (잠 11:14) ● 교회를 하나로 세우라 (엡 4:11–13) 또한 개혁주의 전통은 말합니다. “교회의 상태를 살피라” — 존 녹스 “시대를 분별하라” — 제2치리서 “시대의 위험을 관찰하라” — 조지 질스피 “시대에 맞는 방향을 제시하라” — 새뮤얼 러더포드 “각 시대를 위해 다른 결정을 하라” — 웨스트민스터 총회 그러나 고신 총회는 오늘 한국 사회의 인구 구조와 교세 감소라는 시대적 위기를 전략적으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적 명령에도, 개혁주의 정치 전통에도, 지금 시대의 필요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G. 가장 큰 위험 — ‘현상 유지’ 를 믿음으로 착각하는 것 고신 교단이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은, 새로운 전략을 세우지 않는 것을 믿음이나 보수성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신실함은 과거의 방식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방식으로 오늘의 상황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적 보수성은 변화가 두려워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더욱 하나님 중심의 지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그냥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멈추고, 분석하고, 재정비하는 것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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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6
  • [강영구 목사] 마지막에 남는 것(벧전 4장 7–11절)
    무엇이든 끝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을 진지하게 만들고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 연말이 되면 한 해의 끝을 생각하게 되고, 오늘과 같은 총회 자리에 서면 분주하게 달려온 시간들이 마무리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끝을 앞에 두고 돌아보면, 그때는 그냥 그렇게 살아도 되는 줄 알았던 삶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끝이 가까워질수록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가 더욱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끝을 앞에 두게 되면 사소한 것과 끝까지 남을 소중한 것이 구분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가 보면, 정말 붙들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무려 2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어 온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도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했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틀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재림의 때를 비밀로 감추어 두셨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오늘 밤이라도 끝이 올 수 있다”는 긴장감 속에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끝이 멀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대충 살게 됩니다. 의미 없는 것에도 마음을 빼앗기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 힘을 쏟게 됩니다. 그러나 끝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가치만 붙들게 됩니다. 본문은 그 ‘끝까지 남는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대화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사람도, 돈도, 명예도, 권세도 떠나갑니다. 그러나 끝까지 남아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붙들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끝까지 남습니다. 직분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자동으로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직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소홀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끝이 가까울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더 깊이 만나고, 더 친밀해지는 데 힘써야 합니다. 둘째는 사랑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만물의 마지막에 가서 남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계명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설 때, 이 땅에서 이룬 업적이나 성취를 가지고 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이 땅에 남겨 두고 가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한 것은 가지고 갑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은“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며 먹이고 입히고 돌본 것, 용서하고 덮어준 것, 화해한 것—이 모든 것은 세상 역사가 끝나도 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합니다. 끝이 오기 전에,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는 봉사와 섬김입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봉사는 자기 힘이나 자기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봉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이 말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섬길 때, 그 섬김은 끝까지 남습니다. 봉사와 섬김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지 않아도 될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봉사와 섬김은 만물의 마지막이 와도 남을 일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창원기독교총연합회를 위해 묵묵히 섬긴 모든 수고와, 앞으로 세워질 임원들의 섬김 또한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오실지, 우리가 먼저 주님께로 갈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 우리의 마지막이 오더라도, 기도와 사랑과 섬김이라는 이 소중한 핵심 가치를 붙들고 살아가는 주님의 종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본 설교문은 2025년 12월 10일 창원기독교총연합회 총회 예배에서 전한 강영구 목사의 실제 설교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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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4
  • [성탄인사]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2:14-23)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아니하리라”(호2:16) 이 말씀은 단순히 부르는 호칭을 바꾸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예배가 얼마나 깊이 타락했는지를 폭로하는 말씀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끝까지 가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1. 이스라엘 역사에 반복된 한 가지 패턴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한 가지 반복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출애굽 직후, 시내산 아래에서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그들은 금송아지를 다른 신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여호와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가장 무서운 형태입니다. □ 여호와를 버린 것이 아니라, □ 여호와를 왜곡한 것입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 역사 속에는 수많은 이방 신들이 등장합니다. 바알, 아세라, 몰렉… 그러나 호세아 시대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더 심각해집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바알’이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2. “내 바알” 이라는 말의 충격입니다. ‘바알’은 단순히 ‘주인’이라는 일반 명사가 아닙니다. 바알은 가나안의 대표적인 우상신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 바알” 이 말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과 바알이 혼합되었다는 말입니다. □ 참 하나님과 거짓 신의 경계가 무너졌다는 말입니다. □ 예배는 있는데, 대상이 틀린 예배입니다. 금송아지를 여호와라 부르던 그 착각이, 이제는 하나님을 바알이라 부르는 지경까지 온 것입니다. 이것은 무지한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왜곡된 예배, 섞여버린 신앙, 타락의 최종 단계입니다. 3. 이것은 옛 이스라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과연 옛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성도들은 교회에 나옵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 예배의 중심에 계신 분이 참 하나님이 아니라, 각자가 만들어 낸 ‘자기만의 바알’일 수 있습니다. 성공을 주는 하나님, 안전만 보장해 주는 하나님, 내 계획을 도와주는 하나님,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하나님. 이것은 여호와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알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것입니다. □ 이 우상숭배는 □ 교회 밖에서가 아니라, □ 예배당 안에서, □ 하나님의 집에서, □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안방에 와서 참된 남편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외간 남편, 바알을 섬기는 예배. 이것이야말로 가장 더럽고, 가장 추하고, 가장 심각한 우상숭배입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호세아 2장 16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다시는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이 말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깨닫고 돌아온다는 말이 아닙니다. □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겠다는 선언입니다.\ 혼합된 예배를 정리하시고, 왜곡된 관계를 끊어내시고, 다시 언약의 관계로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로 데려가시고, 말로 위로하시고,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바꾸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2:19–20) 5.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이 약속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신을 신랑이라 부르셨고, 교회를 신부라 부르셨습니다. 십자가는 혼합된 예배를 끝내는 자리이며, 바알의 관계를 끊는 자리이며, 언약의 혼인을 다시 여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더 이상 ‘내 바알’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 남편’이라 고백하는 신부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여호와를 예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손으로 만들어 낸 바알을 여호와라 착각하며 예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약속하십니다. “다시는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게 하겠다.” “내가 너를 다시 내 아내로 회복시키겠다.” 혼합된 예배를 내려놓고, 참된 남편이신 하나님 앞에 정결한 신부로 다시 서는 고신의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 말씀 앞에 우리의 예배와 신앙을 다시 비추어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는 입술로는 주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마음으로는 주님을 바알처럼 대하며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을 사랑의 남편이 아니라 필요를 채워주는 대상으로, 내 뜻을 돕는 존재로 왜곡하여 불러왔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참 하나님이 아닌 우리가 만들어 낸 바알을 섬겼던 이 더럽고 추한 우상숭배를 회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끊어내지 않으시고, 광야로 데려가 다시 말씀하시며, “다시는 나를 바알이라 부르지 않게 하겠다” 약속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주님, 교회를 맡아 사역하시는 말씀 사역자, 목사님들을 주님의 강한 손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혼합된 예배의 시대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게 하시고, 바알의 언어가 아니라 언약의 말씀만을 담대히 전하는 신실한 말씀 사역자, 목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말씀 사역자, 목사님들의 영과 육을 지켜 주시고, 가정과 사역 위에 주님의 위로와 분별력을 날마다 더하여 주옵소서. 주님, 고신의 모든 성도들의 마음을 다시 주님께로 돌이켜 주옵소서. 익숙해진 신앙, 형식만 남은 예배, 섞여버린 가치관을 말씀의 빛으로 정결하게 씻어 주옵소서. 주님을 내 바알이 아니라 내 남편이라 부르며, 관계로 주님을 아는 신앙으로 회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육신과 마음의 질병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주님의 긍휼로 찾아가 주옵소서. 병상에서, 고통의 자리에서 주님이 여전히 언약의 남편이심을 붙들게 하시고,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그들의 몸과 마음 위에 부어 주옵소서. 주님, 오늘도 우리를 버리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라 다시 아내로 삼기 위해 부르신 줄 믿습니다. 혼합된 예배를 끊어내고, 참된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정결한 신부로 서게 하시며, 끝까지 신실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고신의 모든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참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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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4
  • [최호숙 목사] 복(Blessing)의 본질을 찾아서
    연말연시가 되면 기독교인들은 송구영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바르게 하여 복 받기를 원하고, 일반인들은 해돋이를 통해 태양신(?)이 주는 복을 받기를 원한다. 필자가 목회하는 통영 지역은 12월 마지막 날이 되면 해돋이를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인하여 북새통을 이룬다. 복에 해당하는 단어를 찾아보면 히브리어 아쉬레(אשרי-ashre), 바라크(ברך-barak), 헬라어 단어 중에는 εὐλογία(유로기아), 마카리오스(μακαριος) 등의 단어가 나온다. 알렉산더 대왕의 가문이 헬라 문화를 장악하고 있을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는 복의 개념으로 마카리오스를 사용하였다. 이 용어는 헬라 철학자 아리스토 텔레스가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그러므로 헬라 사람들에게 복이란 어떤 신이든 상관없이 개인에게 이득이 주어지는 복 곧 “신들에 의해 얻어지는 부(富)나 염려 없는 평안한 삶”을 복이라 생각했다. 히브리인들에게 복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인 평안, 의로움, 경건함”등으로 율법을 지키고 사는 삶 그 자체가 복이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시대를 지나 바사 헬라,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이 복의 개념이 “율법을 지켜야 복을 얻고, 율법 준수가 복의 자격이 되는 철저하게 조건적인 복의 개념으로 변질되므로 바리새적인 율법주의가 출현하게 되어 복이 은혜가 아닌 인간의 노력과 성과로 받게 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복을 뜻하는 영어 단어 ‘해피니스(Happiness)’는 '우연히 일어나다.’라는 뜻의 해픈(happen)에서 파생된 단어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한자어 행복(幸福)이라는 단어 풀이도 그렇다. 여기서 행은 “우연히, 요행” 뜬구름 잡듯이 우연히 잡게 된 복을 말한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본질적인 복은 해피니스(Happiness)가 아닌 블레싱(Blessing)이다. 블레싱(Blessing) 단어는 “블리드(bleed-피를 흘리다)”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찾아 만들어낸 것이 해피니스라면, 신으로부터 받는 복은 블레싱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모든 복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복은 ‘해피니스’가 아닌 ‘블레싱’이다. 행복은 우연히 살아가며 어쩌다 누리는 사건이지만,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을 믿는 사람은 약속된 언약의 복이므로 일상 전체가 복인 것이다. 주님의 보혈이 이미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우연한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순간이 최고의 복 받는 순간이다. 히브리어 “바라크”는 조건적인 복으로 “복을 받을 것이다”이며, 히브리어 “아쉬레, 헬라어 마카리오스”는 존재적 복으로 “복된 자”이다. 예수님께서 강조하는 복의 개념은 “아쉬레, 마카리오스”적 복의 개념이다. 예수님은 율법주의에 기반을 둔 조건적 복의 사상을 은혜로 주어지는 복의 원래 의미를 회복시켜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복을 받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복 받은 백성답게 감사하며 영광 돌리며 사는 삶이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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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4
  • [이정희 목사] 연말, 연시 용어 I : 2026년 병오년, 붉은 말띠 해란 말은 적절한가?
    1. 서언(序言) “올해는 병오년(丙午年), 붉은 말띠 해입니다.” 이 말은 2026년 1월 1일부터 모든 언론 매체들이 동시에 언급할 것이다. 또한 “올해는 이런 면으로 삼재(三災)해이니 조심해야 된다.”란 말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우리 기독교인으로서는 적절하지 못한 말이다. 물론 뿌리 깊이 이미 대중화된 말이라서 혹시 사용하더라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보고 해야 할 말이다. 이에 본 지면을 통해 이 용어를 분석하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연초에 사용할 올바른 연호와 적절한 말을 논하고자 한다. 2. 60간지 연호(年號) 사용의 유래와 병오년 붉은 말띠, 삼재 해는 무엇인가? 1) 60간지 연호의 유래 : 이는 중국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 등의 동아시아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60간지 연호이다. 이는 유교의 경전 중 하나인 주역(周易)에서 나온 것으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주술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육십갑자 연호인 갑자, 을축, 병인, 2026년의 병오년 등은 하늘의 줄기로 보는 천간(天干)의 10글자(十干)와 땅의 가지를 뜻하는 12개의 지지(地支)가 합쳐서 만든 연호이다. 또한 태어나서 60년이 되면 육갑 연호가 다시 돌아오는 해가 되기 때문에 환갑(還甲)이 된다. 이때는 사주팔자(四柱八字)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생일의 마지막이라 해서 축하연을 전통적으로 해 오기도 했다. 2) 병오년 붉은 말띠란? : 60간지의 띠별 주기는 12지신인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순으로 12년마다 같은 띠가 돌아온다. 이에 천간 10개와 결합하면 60년 주기로 완전히 같은 해가 반복된다. 이 중에서 2026년은 십이지신 중 일곱 번째 동물인 말의 해로, 60갑자 중 43번째에 해당된다. 천간으로는 병(丙)이고 지지로는 오(午)이기 때문에 병오년이라고 한다. 또한 보통 병(丙)은 태양처럼 밝고 뜨거운 기운을 나타내며, 오(午)는 한낮의 태양처럼 가장 왕성한 에너지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병은 오행에서 불(火)에 해당하고 붉은색을 상징하기 때문에 2026년은 ‘붉은 말의 해’ 또는 ‘화마(火馬)의 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2026년은 열정과 활력이 넘치는 해가 될 것이며, 말은 빠르고 역동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변화와 발전의 기운이 강하여 새로운 도전이나 시작에 적합한 해가 될 것이라고 덕담을 나누게 될 것이다. 3) 삼재(三災)해란? : 60간지 연호와 띠를 말할 때는 앞에서와 같은 덕담도 있지만 삼재가 든다는 나쁜 말들도 있다. 삼재란 9년 주기로 돌아오는 3가지 재난이 3년 동안 계속된다는 말인데, 3가지 재난이란 천살(天殺: 천재지변), 지살(地殺: 땅에서의 사고), 인살(人殺: 인간관계의 사고)이며, 또 대삼재(大三災)란 것도 있는데 불(火), 바람(風), 물(水)의 재난을 말한다. 3년 재난은 첫해는 들삼재, 둘째 해는 눌삼재, 셋째 해는 날삼재로 순환한다고 믿는다. 2026년 병오년은 삼재 중 눌삼재로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해당하며 토끼띠, 양띠, 돼지띠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한다. 특히 건강, 금전, 인간관계에 불운이 온다고 믿는다. 3. 기독교적 관점과 제언 앞에서 본 대로 육십갑자 연호와 12지 동물 띠에 관한 말과 삼재해 등은 중국의 주역과 동물 숭배, 토템 신앙에 천문학적 관습을 더하여 나온 것이다. 이는 미신적인 사고와 우상 숭배의 행위가 그대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인인 우리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미신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렇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계속 그 의미와 뜻도 잘 모른 채 육십갑자 연호와 12지 동물 띠에 관한 말을 스스럼없이 사용하면서 나는 무슨 띠라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 민족의 민속적인 의미는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관계없는, 버려야 할 미신적인 용어들이다. 이상으로 볼 때 기독교인으로서 “올해는 병오년(丙午年), 붉은 말띠 해입니다.”란 말이나 ‘올해는 이런 면으로 삼재(三災)해이니 조심해야 된다.’란 말은 기독교 신앙 원리와 기독교 연호에도 맞지 않는 말이다. 또한 이런 60연호와 12지 등의 띠, 생년월일(四柱)로 결혼이나 인간 중대사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논하는 것은 연말과 연초에 있어서 너무나 잘못되고 사려 깊지 못한 일이다. 다음 호에서는 바람직한 기독교 연호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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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4
  • [오성한 목사] 복음알기 : 이미 시작된 은혜 – 구름기둥과 불기둥
    이스라엘이 에담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홍해 앞에서 백성이 두려워할 때 모세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오늘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선포합니다. 출애굽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복음의 구조를 그대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때,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가 바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언제부터 나타났습니까?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홍해를 건너기 전, 에담에서부터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홍해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앞길이 막힐 것이라는 불안도, 뒤에서 애굽 군대가 쫓아올 것이라는 공포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시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때 이미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준비하셔서 앞서 가시며 인도하십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당하게 될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너희가 걱정하기 전에, 나는 너희의 길을 준비해 두었다.” 광야는 살기에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낮에는 타는 듯한 뜨거움, 밤에는 온몸을 떨게 만드는 추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도 없고, 길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광야에서 하나님은 구름기둥으로 그늘을 만들고, 불기둥으로 온기와 빛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잘 준비해서 길을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준비하신 은혜였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영적으로 광야 같은 계절을 만납니다. 기도의 감격도 잘 느껴지지 않고, 말씀을 읽어도 내 마음을 울리는 것 같지 않고, 문제는 계속해서 밀려옵니다. 혹시 지금,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기쁨은 줄어들고, 막연한 의무감과 낙심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더 열심히 해야 하나님이 도와주시겠지.” “기도를 더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전도를 더 하고, 봉사를 더 해야 하나님의 시선이 내 쪽으로 돌아오시겠지.” 그러나 출애굽기의 메시지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열심을 보여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믿음 좋은 민족이어서, 준비된 공동체여서 하나님의 인도가 시작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보기 전부터, 그들이 앞으로 겪게 될 뜨거움과 추위를 아시고 먼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세우셨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와 같은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문제에만 매여서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라고 묻지만, 하나님은 이미 우리보다 앞서 가고 계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미 우리 길 앞에 서 있습니다. 성경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이 구절을 “열심히 믿음 생활해라” 정도의 도덕적 권면으로만 받아들이지만, 사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미 준비해 놓으신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방식’을 말합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 행위를 근거로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지 않고, 내 감정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가늠하지 않고, 내 이해 수준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재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이미 앞서가시며 준비하신 은혜를 신뢰하고, 그분이 나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은 떨었습니다. 앞은 막혔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의 소리가 다가옵니다. 그때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우리는 ‘가만히 있는 것’을 오해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자기 힘과 공로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적극적인 신앙의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도 홍해와 같은 막막한 순간이 있습니다. 건너갈 수 있을지, 무너질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홍해 앞에 서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준비해 두셨다는 것. 이 글을 읽는 독자 한 분 한 분이 지금 어떤 자리에서 이 글을 읽고 있든지, 하나님께서 이미 앞서 인도하고 계심을 다시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도 우리 앞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은혜가 서 있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그 인도를 ‘믿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낙심 속에 새로운 힘이 솟아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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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4
  • [정우승 목사] 옷자락을 던진 사람들
    성도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도 의식해야 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늘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소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전의식이라고 부르는 삶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아가라고 명령하신다. (신명기6:25)에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신명기18:13)에서도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라고 요구한다. 성경의 여러 인물들 중에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신다는 두려움으로 하루하루 살았던 인물이 있다. 바로 요셉이다. 요셉은 17세의 나이로 애굽으로 팔려갔다. 다른 사람의 손에 팔려간 것이 아니라 형들의 의해서 인신매매를 당한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17살의 나이로 유배를 간 왕이 있다. 소위 ‘단종애사’ 라는 사건이다. 세종의 손자요, 문종의 아들로 태어난 ‘단종’은 ‘문종’이 왕이 된 지 2년 만에 죽는 바람에 겨우 12세 나이로 조선의 6대 왕이 되었다. 그러나 단종은 15세 때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쫓겨났고, 17세에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그 해 가을에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했다. 보통 10대에 잘못된 과거나 마음의 상처가 있으면 그것이 그의 평생 정신과 인격에 영향을 주어서 나중에 잘못된 방향으로 뻗어갈 수 있는데 요셉은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 올라서도 형들에게 잘못을 되갚지 않았다. 애굽에 팔려온 요셉은 한 마디로 앞이 보이지 않고, 미래가 없는 막막한 환경이었다. 보통의 청소년 같으면 그냥 되는대로 살아갔을 것이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게 된다. 그러던 중 보디발 장군의 아내는 요셉을 유혹한다. (창세기39:12)에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을 나가매” 라고 말씀한다. 요셉이 버려두고 간 그 옷이 나중에 증거물이 되어서 강제추행의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기재잡기(寄齋雜記)에 수록되어 있다. 성리학자인 박 영(朴英, 1471-1540)의 후손들은 대대로 옷자락이 잘린 두루마리 한 벌을 유물로 물려받는 가풍이 있었다. 여기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하루는 박 영선생이 말을 타고 남소문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골목 어귀에 미색이 남다른 여인이 손짓을 하였다. 그는 혹하여 말에서 내려 여인을 따라갔다. 집에 이르니 이 여인은 박 영을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이 ‘풍채를 보니 여느 사람이 아는데 나 때문에 죽게 되었으니...’ 하고는 말끝을 흐린다. 박 영은 무슨 연유인지 따져 물었다. 그 여인은 강도가 보낸 미끼였던 것이다. 밤중이 되자 다락에서 여인을 부르는 신호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박 영은 눈치를 채고 강도떼가 들어오는 순간 다락 벽을 발로 차 무너뜨려 짓눌러 놓고 급히 여인을 업고 나왔다. 이 여인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자 이젠 여인이 진정으로 두루마리 자락을 붙들고 늘러졌다. 박 영은 칼을 빼서 그 잡힌 옷자락을 자르고 담을 넘어 멀리 달아났다. 그 후 옷자락이 잘린 두루마리는 집안의 가보가 되어 자자손손 박 영의 정신을 기리게 된 것이다. 요셉은 언제나 자기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맞추었다. 그러면서 늘 다짐하는 결단이 있는데 (창세기39:9)에서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라고 말씀한다. 요셉은 17세에 애굽에 팔려와서 30세에 애굽의 총리까지 올라갔다. 그렇다면 요셉이 총리가 되기까지 13년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을 한다면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살아갔던 사람이 바로 요셉이다. 아무도 자기를 지켜보거나 감시하는 사람이 없는 타향살이 가운데서도 요셉은 불꽃같은 눈으로 자기를 보시는 하나님을 늘 생각하며 살았다. 요셉과 박 영, 두 사람은 정말 멋있게 겉옷을 던진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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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4
  • [조희완 목사] 걱정과 근심 (요14:1-6)
    미국에 <수면학회>라는 단체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미국 인구 3억 5천 만 명 중 약 1/10에 해당하는 3천 5백 만 명이 만성 불면증 내지는 수면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1년 동안에 소비되는 수면제가 자그마치 700억 알이나 된다고 합니다. 잠을 이루지 못해서 수면제를 찾는 인구가 해가 갈수록 급증을 하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그래서 각 제약회사들이 수면제를 팔아먹기 위해서 1년에 자그마치 6억불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수면제광고비로 지출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의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갈수록 삶의 스트레스로 인한 마음에 근심 걱정이 너무나 많아서 그런 것입니다.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고 뼈를 마르게 한다고 했는데, 인간들이 이루어 놓은 찬란한 현대 문명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지 못하고 도리어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많은 근심과 걱정을 끼쳐서 심령을 상하게 하고 뼈를 마르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서 신경 안정제를 찾고, 불면증을 이기기 위해서 수면제를 복용합니다. 그런데 신경 안정제를 먹으면 모든 신경을 둔화시켜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수면제를 복용하면 신체적으로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켜서 우리를 해롭게 합니다. 그래서 FDA에서는 수면제 약 통에다가 “이 약을 먹으면 심각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문을 써 붙이도록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신경안정제나 수면제를 먹지 않고도 근심 걱정을 이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은 걱정과 근심을 이기게 합니다.(요14:1,27) 둘째로, 소망은 걱정과 근심을 이기게 합니다.(요14:2,3) 셋째로, 기도는 걱정과 근심을 이기게 합니다.(시107:28-30) 이런 방법으로 걱정과 근심을 이기고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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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4
  • [양대식 목사] 기도와 관계
    기도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영적 전쟁 승리의 열쇠입니다. 새벽기도는 하루의 승리, 삶의 승리로 인도합니다. 다윗은 고난의 때를 지날때 새벽에 기도했고, 새벽을 깨웠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 실패입니다. 기도해야 관계가 깨지지 않고 관계가 잘됩니다. 좋은 관계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나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정신 차리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잠자는 제자들에게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었냐고, 책망했습니다. 한시는 한 시간입니다. 매일 한 시간만 기도해도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시험에 들지 않게 됩니다. 마귀, 사탄이 있습니다. 마귀는 시험하는 자, 대적자, 참소자, 거짓말쟁이입니다. 이단은 사탄에게 조종당하는 자이며, 거짓으로 속이는 자들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종의 특징은 신실하고, 거짓이 없는 자입니다. 사탄은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관계가 깨지는 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사탄은 이간 자, 참소자인데, 인간관계에서 참소하고 이간시켜, 관계를 깨뜨립니다. 관계가 깨지면, 불행해지고, 믿음이 파괴되고, 교회 생활에 큰 지장을 줍니다. 사탄은 영적 리더와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관계가 잘 되면 행복하고, 믿음이 성장하고, 교회 생활이 행복합니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사탄이 역사하여,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좋은 관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좋은 인간관계가 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관계가 전부이고 나머지는 사소합니다. 관계의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관계가 세워지는 데는 오래 걸리나 깨지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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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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