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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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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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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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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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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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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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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박동철 장로] 21세기 이스라엘 블레셋 전쟁(2)
    혼합을 원치않는 하나님의 강한 메시지 며칠 전 창원극동방송 공개홀에서 아키바 토르 주한 이스라엘대사 초청 특강이 있었다. 이즈음 이스라엘대사 초청 특강이 열린 데는 당연 지금 포염에 휩싸인 이스라엘 하마스전쟁의 실상을 듣고자 하는데 있다. 필자도 참석해서 진지한 강의를 들었다. 예상했던바 대로 아키도 대사의 강의 내용은 지난 10월7일 가자지구 무력단체 하마스가 잔인하게 이스라엘 민간인을 공격한 실상을 비판하는데 있었다. 이스라엘의 향후 전쟁에 대응할 방향을 하나하나 제시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비롯 중동 반 이스라엘 이슬람제국을 이길 수 있다고 설파했다. 우리나라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현 실정에서 당연 이스라엘 입장에서 중동전쟁 대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상황을 두고 전쟁이 끝나고 세계평화가 함께하길 기도하고 싶다. 우리가 예수 구원의 위대한 복음의 소망에 살아가지만 복음의 중심에 있는 이스라엘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여기에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는 설교가나 학자들을 통해서도 딱부러진 이해를 하기가 어렵다. 이는 깊고 넓은 인류의 역사 속 하나님의 섭리를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 21세기 5차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하마스 이스라엘의 공격을 두고 우리는 한번쯤 이곳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찾아가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인가. 세계 인류의 역사 속에 토인비가 말한 도전과 응전의 역사관 속에 항상 주역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유대인. 이들이 만들어내는 세계역사는 지금도 주역이자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봐야한다. 성경에서 주님 명령했던 아브라함의 가나안땅, 모세와 여호수아의 가나안 땅 지향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그곳에서 태어나는 신비를 보였다는 역사를 우리는 이해하고 있다. 위대한 구원자 예수가 태어날 때 그때 이스라엘은 어떠했는가. 주변 4대제국에 이어 로마제국의 노예가 되어 처참한 역사를 쓸 때이다. 그 중심에 예수의 공생애 사역이 있었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 유대인은 메시아 예수를 부인하고 지금껏 그 역사 속에 있다. 최대의 아이러니다. 긴 역사의 부침 속에 이스라엘은 로마에게 마사다 항전을 끝으로 무참히 멸망한데도 그 중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로마서 11장에서 보듯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 끝 날까지의 구원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세계사속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슬람의 기반 500년 오스만제국의 역사 속에 유대인들은 온 땅으로 흩어져 디아스포라가 된다. 주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호흡은 계속된다. 1·2차 세계대전과 함께 세계 유대인들의 시온이즘이 시작되면서 이스라엘의 건국운동이 일어난다. 특히 유럽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모이고 모였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1948년 5월 14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절대 지원으로 이스라엘은 건국하게 되고 세계 속의 이스라엘 국가를 정비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건국됐지만 그곳 실제 거주하던 팔레스타인과 중동 갈등은 본격화한다. 겨우 나라의 걸음마 단계 건국 이듬해 소위 1차 중동 전쟁이 일어나고 예상을 뒤엎고 약체 이스라엘이 아랍에게 대승한다. 이어서 2차 영토 분쟁, 3차 1967년 6일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게 크게 이긴다. 이후 50여년 끊임없는 분쟁과 정전협상 속에서도 진정한 평화는 찾지 못하고 있다. 영원한 숙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브레셋)과는 전쟁의 연속된 역사이다. 이번 전쟁에서 하나님은 무슨 메시지를 던지고 계실까. 로마서 11장 25절이 말하고 있다.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될것이니라.”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통한 온 땅의 구원계획, 그리고 이방인에게 먼저 복음과 이스라엘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한다. 그 속에 이스라엘을 철저히 적그리스도세력과 혼합하지 않고 끌고 가시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중동전쟁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다. 우리도 적그리스도와 절대 혼합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이다. 그것이 끝나지 않는 전쟁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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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4
  • [기고] ‘제3회 경남퀴어문화축제’를 대응하는 기독교의 입장
    경남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에서는 2023년 11월 25일(토) 롯데마트 옆 중앙대로에서 각종 참여형 부스를 설치, 공연, 거리 행진, 런웨이 등의 방법으로 추최측 추산 1천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제3회 경남퀴어문화축제’를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도내 종교계, 시민단체등은 심각한 우려를 표하며 행정당국인 창원시청에 행사를 불허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상태이다. 정통 개혁주의기독교 입장에서의 퀴어는 반성경적이고, 하나님의 창조섭리에도 맞지 않는 이단성의 분야이다. 하나님은 레위기를 통해 남색하는 자들에 대해 ‘돌로 치라’는 명령을 사용하시며, 그 일이 분명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파괴하는 위법행위임을 분명히 하셨다. 경남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의 의도는 명확하다. ‘퀴어’의 의미를 좋은 의미로 바꾸겠다는 것일 것이다. ‘퀴어’(queer)라는 용어는 ‘낯설고 이상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를 대중에게 노출시키고 친숙화 시켜 좋은 의미로 - 또는 무감각해지게 하기위해 – 바꾸어 대중 앞에 당당하게 서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기독교 내에서도 이를 보완해 주기 위해 퀴어신학이 나올 지경이다. 물론 퀴어신학계 내부에서 조차 통일된 신학이 나오진 않았으나 이는 분명 기독교의 이미지에 손상을 주기에는 충분했고. LGBT에게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것일 것이다. 예장통합의 총회에서 보고된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에 대한 연구보고서’에서는 “1980년대 일단의 사람들은 본래 부정적으로 사용되던 ‘퀴어’라는 용어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면서, 동성애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의 논리에 비판적이었던 기독교 전통신학에 맞서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주요 개혁주의교단들은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먼저 합동의 경우는 명확하다. 예장합동 총회(총회장 전계헌 목사)는 제102회 총회를 통해 동성애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구체적으로 정리하였는데, 총대들은 신학부 청원 사안인 "동성애자와 동성애 동조자 및 옹호자의 본 교단 신학교 입학을 금지하고 동성애 신학을 지지하거나 가르치는 교직원의 임용을 금지한다. 사후에 적발되었을 시 학교 상벌위원회와 총회에서 징계 시벌한다"는 내용을 결의했다. 더불어 헌법개정위원회가 제출한 헌법 개정안 가운데 '목사의 직무'를 규정한 기존의 조항(정치 제3조 제1~6항)에 "동성애자와 본 교단의 교리에 위배되는 이단에 속한 자가 요청하는 집례를 거부할 수 있고, 교회에서 추방할 수 있다"는 내용을 삽입하기로 했다. 고신 총회(예장고신·박영호 총회장(당시)) 또한 교단 소속 목회자·신학생·교수들의 사상을 전방위적으로 검증하고, 그 결과를 2020년 9월 22일 열린 제70회 총회에 보고했다. 보고서에 다르면 ▶전북노회는 '동성애 반대 법제화 및 전수조사' 청원을 받아 각 부서를 통해 사상 검증을 지시▶신학위원회에는 신대원 교수들 입장을 확인 ▶전국 노회에도 공문을 보내 목사 후보생들을 전수조사 ▶법제위원회(김하연 위원장)에는 동성애 지지자들을 처벌하는 관련 법규 제정을 검토하게 했다. 구체적으로 △강도사·목사 후보생 중 동성애·차별금지법·성평등법 개정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자에 대해서는 목사 고시와 신학 입학·계속 허락 청원 시 불합격 처리하도록 고시부 내규를 정하고 △신대원 교수는 이사회가 임용할 때 동성애 관련 옹호자들을 임용하지 않고 임용 후에도 동성애 관련 옹호를 할 때는 사직하겠다는 취지의 서약서를 받는 지침을 마련하며 △이미 목사나 교수가 된 사람이 동성애 관련 옹호를 할 때는 권징 조례에 의해 시벌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또한 예장통합도 같은 입장이다. 앞서 언급한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에 대한 연구보고서’ 결론에 “퀴어신학은 성경의 규범적 권위를 부인하며, 자의적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성소수자의 성애를 자연스러운 질서로 보며 더 나아가 성정체성의 구분마저 부인하여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상대화한다. 더 나아가 인본주의적 가치관과 기준에 의하여 전통적인 신학의 체계와 가치관을 파괴하는 세속화된 신학이다. 따라서 퀴어신학은 이단성이 매우 높은 신학이다. 이러한 이유로 본 교단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퀴어신학의 논리에 현혹되지 않도록 경계 해야 하고, 신학교에서도 신학도들에게 이 위험성을 교육하여 퀴어신학의 확산을 막아야 하며 퀴어신학을 옹호하는 어떠한 신학적 입장도 용납될 수 없다.”고 그 입장을 명확히 하였다. 우리 기독교의 생각은 일치되어야 하며, 혹시 일부 자유주의 신학이나 퀴어신학, 통일신학 등으로 인해 오염된 신앙들이 교회에 들어온다면 우리는 단호히 이를 부정해야 할 것이다. 금번 경남퀴어문화축제를 바라보며 심한 우려의 마음이 든다. 또한 ‘죄가 관영’하기까지 참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실지 마음은 참담하기만 하다. 다행히 도민적 여론은 반대의 여론이 높다고 하니 마음이 놓이지만 25%나 되는 사람들이 이를 찬성하고 있다고 하니 이 또한 간절한 기도가 필요한 순간이라 하겠다. 김해기독교연합회 동성애대책위원회 유충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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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0
  • [박동철 장로] 우상 神道의 나라 일본 땅에서 예수 생명을 보았다
    2023년 10월22일 주일 저녁. 주일 예배를 마치고 창원특례시기독교장로총연합회(대표 최주철 장로, 이하 창기장총) 장로들과 부인 등 30여 명이 일본 땅 선교여행을 위해 부산서 카페리호에 몸을 실었다. 연초부터 창기장총 임원회가 일본 성지순례 계획을 세웠다. 희망자를 모집, 일본 땅 기독교 유적코스를 탐색, 현지를 돌아보고 복음의 현실을 살펴보자는 취지였다. 갈릴리 여행사 안내로 밤 9시 넘어 밤배는 부산 여객 터미널을 출발했다. 출발시간부터 부산 앞바다의 야경을 감상하며 삼삼오오 모여 여행의 기대와 일본 복음화의 사전 정보 등 소담한 시간을 보내고 단체 방에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8시경 시모노세키 항 하선과 함께 가이드의 인솔로 잠시 옛 영주들의 성이 있던 성하(城下)마을을 둘러보고 나가사키로 3시간 달려 성지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첫 장소는 나가사키 남쪽 히라도. 1549년 스페인출신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히라도에 첫발을 내딛고 선교의 시작종을 울림으로써 일본에 복음의 씨가 뿌려졌다. 잠시 당시 역사적 개관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로마 카톨릭은 유럽전지역에 전파되면서 면죄부 등으로 타락했으나 마틴 루터가 1517년 종교개혁을 단행 천주교의 개혁 신앙이 널리 퍼져갈 때라고 보아진다. 루터 종교개혁 후 30년이 흘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신부는 포르투갈 가톨릭 수도회 예수회의 파송으로 일본 땅 히라도에 들어온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관점에서 당시 일본에 들어온 카톨릭은 매우 복음적이고 타락의 신앙에서 개혁된 카톨릭이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막부전성기 서양문물과함께 복음 상륙 같은 시대 일본 땅은 막부권력시대였다. 당시 오다 노부나가의 쇼군이 강력한 영주가 되어 사무라이 권력을 휘두를때이다. 처음 프란시스코와 동행한 토레스 신부 등이 오다 노부나가와 친한 관계가 되었다. 그 이유는 포르투갈에서 조총이 들어옴에 따라 일본의 권력자들은 서양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작용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시대 역사를 살펴보자. 오다 노부나가에 이어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고 초기 서양종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 또한 서양 무기도입에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592년 도요토미는 조선을 침략한다. 서양조총을 들고 중국 명나라를 갈테니 길을 내어달라며 조선 땅을 침략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만들었다. 일본의 초기 복음의 전파가 우리에게 회한을 던져준다. 우리 땅의 천주교역사는 이때 임진왜란과 함께 일본에서 선교사들이 들어왔으나 뿌리 내리지 못했다. 이후 한참 뒤 중국에서 카톨릭 선교사들이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조총 등 신무기를 들고 우리 땅에 먼저 들어왔다면 우리의역사가 어떻게 됐을까? 항상 우리는 주님의 깊은 뜻을 알 수 없다는데 순종해야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 하에서 우리는 지금 복음의 강국이 되었고 일본은 복음이 약하기 그지없는 땅이 되었다. 아무튼 일본 땅 첫 복음지 히라도에는 프란체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처음세운 교회당 터만 남아있고 그곳을 성지로 성역화해 가꾸고 많은 순례자들이 다녀가고 있다. 아울러 당시 기거하던 집터 기무라와 기념공원도 볼 수 있었다. 500여 년 전 이곳에 복음의 씨를 뿌린 하나님. 그 복음의 향기가 히라도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히라도에서 온천욕을 즐기며 일 박한 후 다음날 일행은 나가사키로 이동했다. 규수지역 복음지경 확장 ‘작은 로마’ 규수지역의 넓은 땅 중 나가사키에 또한 많은 옛 선교지를 볼 수 있었다. 히라도에서 복음의 씨가 자라 나가사키로 지경이 확장되면서 곳곳에 성당이 들어서고 작은 로마라 일컬어질 정도로 부흥했다. 당시 일본 땅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막부시대 천하통일을 하고 조선 땅 침략을 꿈꾸고 있을 때 이다. 도요토미는 초기 서양각국과 교류를 위해 교회를 인정하다 세력이 갑자기 커지는데 불안을 느끼고 본격 탄압을 시작했다고 한다. 도요토미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탄압한 원인은 당시 스페인 선교사들이 일본에 들어와 결국 일본을 점령한다는 소문에 더욱 격노하여 가혹한 교인 색출에 나섰다. 곳곳에 숨어 지내던 성도들을 한마을에서 밀고함으로서 26명을 한꺼번에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나가사키 니시자카의 언덕에서다. 1597년 2월 5일이라고 순교 터에 적혀있다. 도요토미는 자기가 일으킨 임진왜란이 우리의 이순신 장군에게 패전으로 끝나갈 때 급사한다. 임란 역사서에는 도요토미가 천주교신자로 기록되어있지만 실제 부하 고니시 유키나가가 신실한 신도로 알려져 있다. 다음 권력을 잡은 쇼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즈음부터 200년 동안 일본은 기독교를 탄압하는 시대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열도의 나라 뜨거운 100도 온천수가 나는 곳에 성자들을 밀어 넣고 불에 태우는 처참한 순교의 현장이 26성좌 순교를 비롯 나가사키 일대에 산재해 있다. 여러 공원에서 볼 수 있었다. 곳곳에 후일 세워진 순교자 위령비에 한국인 13명의 명단도 있어 마음이 짠함을 느꼈다. 200년 추방 탄압에 못이겨 산속으로 숨어 살다 나가사키에 다시 복음의 그루터기에서 새 생명이 피었다. 200년 동안 믿음의 생명들은 산속에서 지하에서 숨어 기도하는 시간이 흘렀다. 일본에는 막부시대가 가고 메이지 유신과 함께 종교 개방책에 따라 나가사키에 교회가 세워진다. 바로 국보로 지정된 오우라 천주당. 흩어졌던 신자들이 성당에 높이 세워진 십자가를 보고 몰려들었다고 안내 책에 기록되었다. 5백여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일본은 기독교 인구가 1퍼센트도 안되지만 나가사키 일대에 대부분 모여 이 지역에 10%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순교의 피의 역사는 곧 주님의 은혜의 골짜기가 된다는 진리를 입증하고 있었다. 성지 순례를 마무리하면서 나가사키 우에노마치에 있는 원폭피해자 나가이 타카시박사의 원폭상처를 노래하는 기념관을 방문했다. 1945년 8월 14일 2차 대전 말 연합군은 일본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이로써 2차 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 또한 치욕의 일제 36년에서 해방한다. 이 거대한 역사의 반전에 원폭 피해의 이야기가 눈물겹다. 당시 의학박사로 두 자녀와 행복했던 타가시박사는 아내를 그 자리에서 잃고 본인은 백혈병 등 10가지 넘는 온몸이 찢어지는 장애인이 되었다. 그러나 박사는 일본의 잘못을 자백하며 다시는 원폭의 역사가 없도록 용서와 화해의 노래를 하고 43세에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장식한 나가이 타가시 기념관을 찾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눈에 들어오는 벽에 그린 사랑의 노래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에게 남기는 메시지. “네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너희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이 말씀으로 시작하고싶다. 끝도 이 말씀으로 맺고 결국 모두가 이 말씀으로… 사랑하는 아이들아” 긴 여운을 던졌다. 오늘의 일본, 전범국으로서 경제 강국이다. 무장해제 된 나라이지만 자위대의 위력이 무섭다. 정직하고 정결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나라 일본을 보고 깊은 생각을 한다. 또다시 속을 알 수 없는 나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으로 다가가야 할 것이다. 그래도 일본 땅에서 지금 예수생명의 씨를 볼 수 있었다는데 있다. 귀가길 성지 순례한 일행 모두의 생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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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30
  • [하수룡 장로] 일견
    재미있게 쓴 좋은 글 중에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두 마리의 개를 키운다고 한다. 물론 한자어는 다르지만 하나는 선입견이고 또 다른 하나는 편견이라 말한다. 인간은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거대한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고 했다. 이 두 마리의 개를 쫓아버리는 특별한 한 마리의 개가 바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말했다. 직접 보지 않고 들은 얘기로 상대를 판단하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고 했다. 물론 한자어는 전혀 다르지만 일견을 키우면서 상대를 바르게 보는 혜안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제대로 된 일견을 가지지 못하여 실수할 때가 많다. 우리의 실수 중 가장 큰 과오는 부모의 신앙이나 자녀의 직업과 외모만 믿고 일을 추진하는 경우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일을 추진해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한데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 분명히 부모와 자녀의 신앙은 다른데 응당 어른이 좋으니까 자녀가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새 신자가 찾아와 자리를 잡을 때쯤 되면 자신이 드려온 예배의 형식이나 용어가 다를 경우에는 이단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선입견을 가진 것도 문제가 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인상이 다른 사람에 비해 좋다고 여겨지면 좋은 사람으로 여기고 그를 무조건 인정하는 주관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린 얼마나 다른 사람을 흠담하길 좋아하고 좋은 내용이든 나쁜 내용이든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선입견을 가진 특별한 민족이 아니던가! 이런 환경 속에서 사는 우리는 자연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입견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되어 잘못된 편견으로 불공정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도 잘못된 일견으로 주님을 실망시키는 제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도마에게 찾아와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상처 난 손을 보여주시므로 부활의 확신을 심어주셨다.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배하는데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도 있었다. 꼭 보아야 믿겠다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별수 없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한낱 연약한 인간임을 알 수 있다. 신앙의 관점에 어떤 이는 보지 않고도 믿고, 어떤 이는 도마처럼 보여주어도 믿지 못한다. 주님이 주신 일견으로 무엇이든지 먼저 정확하게 보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공정하고 정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면 믿을 만한 것이 도저히 없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눈이 절대 필요한 시기가 오늘날이 아닐까? 선입견과 편견의 오염으로 공의롭지 못한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성경에서 명령하고 계신다. 세상에서는 한 번 보고 도저히 믿을 만한 것이 없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오직 일견으로 충분하다. 우리의 일생을 주님의 한 말씀을 일견으로 믿고, 또 다른 말씀을 일견으로 확신하면서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이 최고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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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5
  • [최호숙 목사] 인간의 공짜 심리
    공짜 심리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힘이나 돈을 들이지 않고 물건 따위를 거저 얻는 것을 좋아하거나 원하는 마음”을 말한다. 교회 내 체육대회를 한다거나 어떤 경연대회를 한다거나 모임 행사에 경품 추첨이 있으면 인원동원이 수월하고 모임에 활기가 있다. 영어권에서는 ‘자유’와 ‘공짜’ 모두 ‘free’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 혼동이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어쨌든 대부분의 인생은 공짜를 좋아한다. 목사도 사람인지라 추석 명절이나 설 명절이 되면 은근히 성도들이 선물이라도 가져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 ‘선물’ 하면 몇 년 전 교회 내 부흥회 사건이 기억 속에 떠 오른다. 부흥사 목사님이 오셔서 부흥집회를 하는데 시간마다 담임목사님 잘 섬기라고 강조하는 통에 너무도 민망했던 적이 있다. 마치 강사와 담임목사가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아 필자가 성도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였다. 그것도 모자라 한 수 더 나아가 또 강조하기를 “요즘 시대 명절에 누가 목사에게 시시하게 과일바구니 가지고 오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돈 봉투면 몰라도...” 그 부흥회 이후로 명절이 오면 목사 가정에 돈 봉투 주기는 부담이 되고, 과일 선물하면 목사가 시시하게 생각할 것 같아 성도들이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어 목사는 명절에 빈 손이다. 마음에 서운함 보다는 차라리 내가 섬기자 하고 오히려 많은 분들에게 내가 손수 선물을 하고 있다. 그것이 마음 편하고 좋다. 무엇인가 받으면 준 사람은 기대 심리가 있어 오히려 불편하다. 옛날 중국 요왕이 학자들에게 백성들이 교훈 삼을 만한 책을 편찬하라고 명령했다. 학자들은 1년 동안 고심하여 책 10권을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왕은 “먹고살기 바쁜 백성들이 한가롭게 10권의 책을 언제 읽겠느냐” 하면서 1권으로 만들라고 하였다. 1권으로 요약하여 바쳤으나 왕은 다시 1권도 많으니까 1장으로 요약하라고 했다. 1장도 많으니 다시 1줄로 요약하라고 하였다. 결국 학자들은 왕의 명령을 따라 1줄로 요약하여 바친 말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 “공짜면 소도 잡아 먹는다”는 말이 있고, 북한 속담에는 “공짜면 양재물도 마신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그렇게 할 사람은 없겠지만 공짜 싫어할 사람은 세상에 없음을 풍자한 말이다. 반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는 말도 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열심히 일해야 댓가를 받을 수 있다는 일종의 도덕률이다. 공짜로 생긴 억만금의 돈(재물) 보다는 자신의 땀과 수고가 담긴 예물을 귀히 보신다. 불로 소득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로또복권을 사서 한순간에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처럼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명언 “If you're not paying for it, You are the product. (뭔가를 공짜로 쓰고 있다면, 당신이 바로 상품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일하여 먹고 살기를 권하신다. 공짜 심리는 도적과 같은 마음이요 욕심이 담겨진 정당하지 못한 마음이다. 공짜를 받았다면 다음에 더 큰 것으로 베풀려고 하는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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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8
  • [조희완 목사] 어머니와 아들(출2:1-10)
    미국에는 미국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입니다. 그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의 조각가 「바르톨디」의 작품입니다. 바르톨디는 그 작품을 만드는데 자기의 전 재산을 투자했고 20년이나 걸려서 그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그가 그 작품을 조각할 때 여신상의 얼굴 모델을 누구로 할 것인가 하고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여러 유명한 사람들이 물망에 올랐지만,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을 낳아서 사랑으로 길러주신 자기 어머니의 얼굴을 모델로 삼아서 그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미국 뉴욕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 자유의 여신상의 얼굴 모습은 바로 조각가 <바르톨디>의 어머니의 얼굴 모습입니다. 그 내용을 알고 나면 그 자유의 여신상이 더 아름답고 위대하게 보입니다. 자기 어머니를 모델로 그 위대한 작품을 만든 조각가 <바르톨디>도 훌륭하지만, 아들이 만드는 그 유명한 작품의 모델이 된 그의 어머니는 더욱 훌륭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바르톨디>의 어머니는 바로 “어머니 같은 어머니”였습니다. 가장 위대한 아버지, 가장 위대한 어머니가 어떤 사람일까요? 자기 아들로부터 “나도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겠다”는 말을 듣고, 자기 딸들로부터 “나도 어머니 같은 어머니가 되겠다”는 말을 듣는다면 아마 가장 위대한 아버지요 위대한 어머니 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아들딸로부터 “나는 이 다음에 우리 아버지같이 되지 말아야지, 나는 우리 엄마같이 되지 말아야지”라는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성경에 나오는 여인들 중에서 자녀에게 절대적인 신앙의 영향력을 끼친 어머니 같은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살펴보면, 첫째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식을 바라본 요게벳과 그의 아들 모세입니다(출2:1-3절). 둘째는, 기도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마리아와 그의 아들 마가입니다.(행12:12) 셋째는, 거짓 없는 믿음을 계승시킨 유니게와 그의 아들 디모데입니다.(딤후1:5) 모두 그런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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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 칼럼
    2023-10-18
  • [박봉석 목사] 어떤 결단
    한 저명한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그분의 장인어른은 어느 때까지 신앙이 없으셨다고 합니다. 사모님과 결혼을 하고 거의 13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교회에 나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사모님과 함께 장인어른의 믿음과 구원을 위해서 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장인어른에게는 교회에 나오는 것을 주저하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술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오면 그렇게 좋아하는 술을 마시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위가 목사이고 딸이 사모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위가 목사라서 사위와 함께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을 늘 아쉬워하고는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장인어른이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딱 끊고는 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놀라워서 장인어른에게 직접 그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장인어른은 “다른 이유가 있나? 내 건강을 위해서 끊은 거야.”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매스컴을 통해서 술이 건강에 미치는 해악에 대해서 듣고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술을 끊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목사님은 장인어른의 그런 결심을 듣고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건강이 중요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즐기고 좋아하던 술을 한순간에 끊으실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 더하여서 “이런 장인어른이라면 주님을 한번 믿기 시작한다면 화끈하게 믿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자신의 교회 안에 교회 집사라고 하면서도 아직 술을 끊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장인어른은 신앙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단 순간에 끊어버리는데,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면서도 술 하나 끊지 못하는 교인이 있다는 것을 장인어른이 안다면 기독교인을 얼마나 우습게 여길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강하기 위해서 그렇게 즐기던 술을 끊을 수 있다면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온전히 믿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술을 끊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모진 고난과 수치를 감수하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온전히 섬기기 위해서 지금 내가 결단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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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8
  • [신재철 목사] 만화방 삼촌, 만화방 이모
    교회 문 앞, 거리에서 숙덕거리는 아이들이 보인다. PC방 하나 없는 동네에 만화방이 생겼으니 궁금도 하겠지. 하지만 교회 입구, 아니 만화방 입구까지 통로가 길어 아이들이 쉽게 첫걸음 하기가 어려웠다. 숙덕거리는 소리나 인기척이 있으면 아내와 나는 일부러 내다본다. 말도 걸어보고 들어와 구경해 보라며 권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낯선 장소에 걸음 하기가 어디 쉽겠는가. 망설이거나 뒷걸음질하기 일쑤다. “안녕, 들어와서 책 보며 놀래?” 며칠째 밖에서 서성이는 작은 아이.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누가 보더라도 귀엽고 예쁘게 생긴 여자 아이다. 아내도 권하고, 나도 권하고. 쭈뼛거리며 들어와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한다. 잠시 앉아서 책을 보더니 휙 나가버린다. 숙기 없는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그런데. “이모, 저 왔어요! 삼촌, 여기 매일 있어요?” 그 아이는 가장 빈번하게 드나드는 손님이 되었고 책장을 휘젓고 다녔다. 그리고 엄청난 수다쟁이라는 것을 오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목양실에 앉아 있으면 뭐라 뭐라 아내와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다가 갑자기 목양실 문이 열리고 머리를 빼꼼히 들이밀어 내가 있는 것을 확인하기도 한다. 얼마지 않아 동행도 생겼다. 집에만 있는 오빠를 데리고 왔다. 오빠는 책을 참 좋아한다. 진득하게 앉아 만화책을 열심히 본다. ‘과학 만화, 위인 만화, 역사 만화’ 좋은 책을 찾아 꼼꼼히도 본다. 하지만 이 꼬마 아가씨는 책에 큰 관심이 없다. 아내와 내게 와서 떠들어 대다가, 갑자기 키를 들고 화장실에 갔다가, 책장 주변을 돌고 돈다. 우리 부부는 거의 매일 그 남매와 만나며 만화방 주인으로서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모와 삼촌이 있는 만화방」 아이가 불러준 호칭. 나는 삼촌이고 아내는 이모다. 삼촌과 이모가 부부가 되는 이상한 관계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나 보다. 우리가 부부라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 (우리가 부부라는 것이 왜 아이들에게는 놀라운 일이 될까?) 삼촌과 이모의 호칭은 변하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이 조금씩 모이며 우리의 조카도 많아졌다. 이모와 삼촌이라. 너무 오랫동안 목사로 불려 와서 어색하긴 했지만, 이 호칭이 맘에 든다. 사람이 된 느낌이랄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동네 사람이 된 느낌이라서 좋다. 삽화 :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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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3)
    I. 서언(序言) 얼마 전에 ‘뿌리 깊은 나무’의 ‘이도’는 어디에?’라는 작은 논설문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여기의 ‘이도’는 세종대왕의 원래 이름이고 ‘뿌리 깊은 나무’는 훈민정음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 작은 글의 의도는 세종대왕의 이 위대한 한글이 오늘날에 와서 너무 많이 훼손되고 있는 것에 대한 아픔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는 필자도 같이 공감하는 바이며, 같은 아픈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일은 호칭이나 지칭어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형제자매간에도 이런 적절한 용어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경우도 많으며, 때로는 실수하는 경우도 많아서 당황할 때가 많다. 이런 면에서 본호에서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간의 호칭어와 지칭어에 대해서 지난호에 이어서 계속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남편의 아우에 대한 경우: 여기에도 여러 관계와 경우가 있기 때문에 각각 그 용어는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남편의 아우, 곧 시동생이 미혼일 때는 ‘도련님’으로 부른다. ‘되련님’으로 부르는 지역도 있지만 ‘도련님’이 표준이다. 남편의 아우가 여럿이 함께 있을 때는 혼란을 막기 위해서 ‘첫째 도련님’, ‘둘째 도련님’처럼 서열을 넣어 호칭할 수도 있다. 그런데 흔히 남편의 아우를 ‘삼촌’이라고 부르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하지만 전통적인 호칭이 있을 때는 자녀가 부르는 호칭인 ‘삼촌, 고모, 큰 엄마...’ 등과 같은 호칭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호칭하는 당사자의 삼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편의 아우가 기혼일 때는 ‘서방님’으로 호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상황에 따라 ‘첫째 서방님, 둘째 서방님’처럼 서열을 넣어 호칭하기도 한다. 또한 남편의 아우를 부르거나 지칭할 때는, 시댁 쪽 사람에게 미혼자는 ‘도련님’, 기혼자는 ‘서방님’으로 지칭한다. 그러나 친정 쪽 사람에게는 ‘시동생’, 자녀가 있을 때는 ‘OO 작은 삼촌’, ‘OO 작은 아버지’ 등으로 지칭한다. 2. 남편 동생의 아내일 경우: 이런 경우도 며느리 사이의 관계 말인 ‘동서’로 호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외에도 ‘여보게’, 자녀가 있을 때는 ‘OO 엄마’ 등으로 호칭할 수도 있으나 가족이 아닌 타인을 부르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적절하지는 않다. 하지만 ‘동서’로 부르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3. 남편의 누나와 여동생에 대한 경우: 당사자나 시댁 쪽 사람에게는 보통 ‘형님’으로 호칭한다. 친정 쪽 사람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시누이’, ‘OO 고모’, 형님‘ 등으로 지칭한다. 남편의 여동생에 대한 호칭은 ‘아가씨, ‘아기씨’이다. 이 호칭은 남편의 여동생이 미혼이든 기혼이든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다. 물론 나이가 들면 사용하기가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있으나 전통적으로 사용된 말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친정 쪽 사람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시누이’, ‘OO 고모’ 등으로 지칭한다. 4. 남편의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 대한 경우: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과 지칭어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이 관계에 있어서는 엄격한 내외법이 있어서 직접 부를 일도 없었고, 적당한 호칭어도 없었다. 하지만 사회의 변화에 따라 요즈음은 두 사람이 자리를 같이 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에 서로를 부르는 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주버님’, ‘서방님’, ‘고모부님’ 등으로 호칭하기도 하나 다른 호칭들과 중복되는 일들이 많아서 표준호칭어를 만든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중에 있어서 아직은 정리된 호칭어가 없는 형편이다. 남편 여동생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전통적으로 ‘서방님’이다. 남편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이 ‘아주버님’, ‘아주버니’이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서 ‘서방님’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한 호칭어로 된 경우이다. III. 결 어 이상과 같이 살펴본 호칭과 지칭어만 보아도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결코 단순하지 않고 아주 다양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다양성 속에서 어느 하나만을 택해서 꼭 같이 적용하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공동의 문화적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 민족의 현실에서 동일하지 않은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일은 가장 긴밀한 공동체인 가정과 교회에서는 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디서든지 이러한 적절한 호칭과 지칭어의 사용은 아름다운 사회를 형성해 가는 귀중한 잣대가 될 것이다. 이에 우리 모두 이런 문화 창조에 앞장설 수 있게 되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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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8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4) (민12:1-3)
    비방의 대명사인 미리암이 죽자마자 또 안타깝게도 우리가 잘 아는 므리바의 물 사건이 일어납니다. (민20:10-11)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모세도 사람인지라 화가 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민20:12)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다고 하십니다. (민20:24)아론은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 신앙의 정통과 생활을 순결을 실천하기 위하여 순교정신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 말씀을 잊어선 안 됩니다. 교회의 직분을 받은 목사와 장로, 집사, 권사는 명심에 명심을 해야 합니다. 코람데오의 신앙으로 반석에서 물을 내는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반석에서 물을 냈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반석에 물을 내었는데도 모세와 아론처럼 약속의 땅으로 못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매우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교회와 성도가 살아가는 삶의 핵심은 오직 하나 여호와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홀이라도 내가 한다는 생각을, 내가 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자신의 공로를 첨가하고, 숟가락을 얹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물을 내는 것처럼 반석을 두들기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문둥병에 걸리고, 주어진 직분에 따라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는 자들은 목사와 장로일 가능성이 많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특히 코람데오,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순교정신을 강조하할수록 “내가, 내, 나”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지 않도록 조심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고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다고, 그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는데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미리암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오늘날 교회를 적용하여 쉽게 풀어보면 장로와 권사가 같이 목사를 비방했는데 문둥병에는 권사만 걸렸다는 말입니다. 미리암만 문둥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고 많습니다. 여자의 사명이 돕는 것, 살리는 것과 맞물려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미리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사명은 남편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를 돕는 배필로서의 사명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돕는 것이 아니라 주도하는 것으로 망각할 때 문둥병에 걸립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척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입의 변질된 말은 물론이요, 속마음의 말들까지 듣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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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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