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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신사참배의 망령이 부활했는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는 자들과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사야 5:20) 지금 이 순간, 이란의 이슬람 독재 정권 아래서 10대 소녀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자유를 외쳤다는 이유로 짐승만도 못한 만행을 당하고 있다. "처녀는 곧장 천국에 간다"는 사탄적 논리로 강간을 자행해 정조를 빼앗고 교수형에 처하는 이 광기 어린 현장 앞에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참혹한 것은, 이 피의 정권에 동조하며 자금을 대는 대한민국 이재명 정권과, 그 주역을 거룩한 강단에 세워 '용비어천가'를 부른 한국 교계 지도자들의 영적 간음이다. 1. 국익도 국민도 없는 이재명 정권의 '해괴망측'한 독재 원조를 규탄한다! 이재명 정권은 지금 레바논에 이어 이란에까지 '인도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혈세를 퍼붓고 있다. 이것이 과연 누구의 돈인가? 우리 청년세대들이 짊어져야 할 빚이며 국민의 혈세다. * 배신 외교의 극치: 미국과 이란이 전쟁 중인 상황에서 적대 세력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한미 동맹의 근간을 부정하는 자폭 행위다. * 독재의 군자금: 50만 달러라는 지원금이 민간인에게 갈 것이라 믿는 바보는 없다. 이는 결국 소녀들을 살해하고 시민을 탄압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군자금이 될 뿐이다. * 주객전도의 인권: 자국민 고물가 고통과 천안함 유족의 눈물은 외면하면서, 외부 독재 정권에만 '개폼' 잡으며 생색내는 것은 국익을 팔아 자신의 사법 리스크와 정치적 폼을 사려는 비겁한 굴욕 외교다. 2. 강단을 유린한 이영훈·소강석의 '아부의 향연'과 현대판 신사참배 2026년 부활절, 거룩한 하나님의 성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단에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올라섰다. * 배교적 찬양: 이영훈 목사는 이란 정권을 돕고 교회 탄압의 중심에 선 이를 향해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신 분"이라며 찬양했다. 소강석 목사는 "박수 안 치는 사람 누구냐"며 성도를 협박하고, "아름답습니다"라는 망언으로 아부의 극치를 보였다. * 성도 유린: 권력자의 안위를 위해 성도의 노트북 비번을 풀게 하고 다이어리까지 뒤지는 만행은 이곳이 예배당인지 공산당 검문소인지 분간할 수 없게 했다. 이는 과거 일제 강점기 강단에 일장기를 걸고 천황에게 절하던 신사참배의 데자뷔다. 살아있는 우상에게 제사상을 차려준 이 목사들은 역사와 하나님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 3. 고신 저항 정신의 파산: 김홍석 전 총회장과 '기독교보'의 비겁한 변절 일제의 칼날 앞에서도 신앙의 정조를 지켰던 고신의 저항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 김홍석 전 총회장의 침묵: 이 참담한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손을 들어 축도한 행위는 악의 잔치에 하나님의 복을 비는 영적 배교다. * 기독교보의 궤변: 기독교보(2026.4.11)는 이 사태를 두고 "교단과 이념을 넘어", "교회의 연합과 일치"라 보도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좌파 독재 이념과 적그리스도적 행태가 '수용 가능한 이념'이 되었는가? 어찌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함께할 수 있는가? * 저항의 거세: "분열과 시대를 넘어"라는 표현은 자유민주주의와 교회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는 성도들의 입을 막으려는 교묘한 술책이다. 고신의 기관지라는 기독교보가 독재 조력자를 비판하기는커녕 '은혜로운 예배'라고 미화하는 것은 고신 선배들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4. 자칭 '고사모'의 선택적 정의와 위선을 고발한다! 손현보 목사가 강단에서 시대를 향해 선지자적 경고를 날릴 때는 '정교분리'와 '선거법'을 들먹이며 일간지에 광고까지 내어 정죄하던 자칭 '고사모' 목사들은 지금 어디에 숨었는가? * 손현보의 회개 촉구는 징계 대상이고, 이영훈·소강석의 굴종적 아부는 연합인가? * 거짓의 아비가 부활절 강단에 서서 성도들을 유린하는데도 '입꾹닫'하고 있는 당신들의 신학은 이미 파산했다. 당신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한상동 목사를 비판하던 가결자들과 다를 바 없는 비겁한 기회주의자들일 뿐이다. 결론: 주님, 이 땅의 촛대를 옮기지 마시옵소서! 이란의 소녀들이 처참하게 도살당하는 현실을 외면한 채, 권력자에게 강단을 팔아넘기고 '회복'과 '희망'이라는 거짓 평화를 노래하는 한국 교회는 심판의 대상이다. 이재명 정권은 즉각 독재 지원을 중단하라! 이영훈, 소강석, 김홍석과 고사모는 배교 행위를 회개하라! 기독교보는 저항 정신을 회복하고 위선적 보도를 중단하라!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선 멸망의 가증한 것들을 향해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외쳐야 한다. 그것만이 고신이 살고,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촛대는 반드시 이 땅에서 옮겨질 것이다.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잠언 31:8)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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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그렇게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도 인용을 하려니 부끄러운 한자말이 있다. 백절불굴(百折不屈)인데 백번 꺾어도 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떠한 어려움에도 결코 뜻한 바를 굽히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한국이 낳은 순교자이신 주기철목사님께서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죽음을 던지는 굳건한 의지를 남겼다. 동음이의어가 있는데 의사(義士)와 의사(醫師)의 차이가 크다. 앞의 의사(義士)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꿋꿋한 사람을 뜻하며, 뒤의 의사(醫師)는 자기가 가진 의술로 타인을 살리는 사람이다. 한 사람은 자기가 죽는 길이요, 또 한 사람은 남을 살리는 길이다.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의사(義士)와 의사(醫師) 중에 어떤 인물이 되기를 원하느냐고 물으면 자기 목숨을 내 놓는 의사(義士)가 되려는 청소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도 뜻한 바를 굽히지 않는 결연한 인물들이 더러 나온다. 가나안 땅의 분배를 두고 갈렙은 팔십오 세의 나이로 헤브론 땅을 달라고 요구를 한다. (여호수아14:12)에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라고 마치 출정식과도 같은 연설을 쏟아내었다. 이처럼 자기가 믿는 바를 끝까지 지켜나가는 행동은 쉽지 않다. 군산지방에서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귀암(龜岩)노인이라는 한말의 병사가 있다. 아무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귀암에서 살다 자결했기로 귀암노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 근위 제2연대 1대대 소속 하사졸(下士卒)로 당일 해산식장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항일의거에 참여한 저항군졸이다. 해산식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일본군은 어깨에 견장을 떼고 은사금 명목으로 80원씩 나누어 주었다. 그는 받은 은사금을 찢어버리고 다른 군졸들과 함께 무기고를 털어 당시 서소문 안에 있었던 군영을 뛰쳐나와 남대문 근처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 길로 일본군에게 쫓겨 창의문을 거쳐 삼남지방으로 내려가 약 2년 동안 의병으로 항일운동을 했다. 1909년 전라북도 줄포싸움에서 마지막으로 패하고, 이 때의 부상으로 평생 절름발이가 된 채 숨어 살았다. 그 무렵 금강하류 군산연안에 귀암이란 마을에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많이 와서 합숙을 하면서 호남지방에 선교를 하고 있었다. 쫓기던 그는 왜경들의 치외법권 지역인 이 선교사들의 숙소로 뛰어들어가 전후사정을 이야기하고 하인으로 고용해 줄 것을 애걸하였다. 이 절름발이 병사는 그날부터 여선교사들의 숙소 경호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군영에 있을 때 차고 다녔던 장도(長刀)를 보배처럼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서소문 탈영이래 한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그 장도를 뽑아 어깨에 둘러메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밤마다 숙사를 순찰했던 것이다. 귀암노인은 몸에 밴 군경 생활의 습성을 조금도 고치려 하지 않았다. 새벽 해 뜨기 전에 일어나 찬물을 끼얹고, 비록 절뚝거리지만 스스로의 구령에 따라 보조를 맞추었다. 또한 몸에 밴 군기 그대로 저녁에는 왕궁이 있는 북쪽을 향해 요배하는 것을 거르는 법이 없었다. 가까이 지내는 선교사들이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귀암노인이 급전이 필요하여 선교사에게 돈돔 빌려줄 것을 요청한다. 선교사는 이런 기회를 타서 몸에서 떼질 않는 장도를 저당으로 내놓기만 하면 돈을 빌려 주겠다고 하였다. 귀암노인은 한 사나흘 고민하다가 근 20여년 동안 잠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장도를 선교사에게 맡겼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 귀암노인은 아무말 없이 행적을 감춘 것이었다. 그의 실종과 더불어 저당으로 잡아둔 장도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장도를 놓아두었던 자리에 한 통의 편지가 놓여있었는데 펴 보니 ‘무사로서 양인 밑에 천한 삶을 이어가는 것도 치욕인데 칼마저 몸에서 떼어놓게 되었으니 이제는 잠시도 살아갈 면목이 없어졌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그날 선교사들은 귀암강 강변에서 자기의 장도로 자기 목을 찌르고 죽은 노병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한국의 무사정신에 강동한 선교사들은 귀암강 둔덕에 노인을 묻어주고 십자기를 세워 이 강골병사의 영혼이 영생할 것을 빌어주었다고 한다. 한 평생 다리를 절은 이 노인은 브니엘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이후 절었던 야곱이 떠오른다. (창세기32:31)에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라고 말씀한다. 야곱 역시 백절불굴의 기백이 있었다. (창세기32:26)에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라고 말씀한다. 백암노인이 만약 천국에 갔다면 함께 다리를 절었던 야곱과 함께 좋은 친구가 되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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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총대 파송 하지 말자 – ‘부결’
노회의 제일 중요한 사명은 목사를 양성하는 것과 그 사역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보호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회기에 부총회장으로 세움을 받아 올해 총회장이 되어야 했던 김문훈 목사는 우리 부산서부노회에 속한 우리의 동역자입니다. 노회를 넘어 고신총회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큰 일을 감당하던 포도원교회를 목회하는 우리 노회의 아들입니다. 세상에서도 내 자식이 분명히 잘못한 일이지만 부모가 일단 책임을 지고 모든 것을 안고 가는 것이 선행된 다음, 그 자녀의 잘잘못을 논합니다. 안타까웠던 것은 목사의 어머니 격인 노회도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보다는 세상 여론의 눈치를 보며 노회가 안게 될 부담부터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다 연약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세상의 눈치를 본다는 것,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세상 눈치를 보고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을 마치 복음적인 사역처럼 생각하는데, 교회가 하나님의 인정보다 세상의 평가를 우선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안타까움을 넘어 참담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더럽혀지는 것과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개인의 자리 욕심과 계파의 정치 논리로 동료 목사라는 자들이 공의와 정의라는 명분으로 동료 목사의 비리를 수집하고 세상에 발설하여, 한 목사의 잘못을 빌미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와 정의를 주장하는 것 같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욕심과 세상보다 더 비열한 정치 논리가 뱀이 꽈리를 틀 듯 그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피해를 입고 지금도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이용한 간교한 무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며, 고신총회가 반드시 밝혀내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대를 살며 목회하게 될 후배와 교회들을 위해서도 반드시 밝혀내어 교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전례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투서를 돌리고 연명하는 것조차 불법입니다. 특히 우리 고신은 세상 법정에 고발하는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아팠던 역사가 있습니다. 교회를 정화하고 공의와 정의를 원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성경에 기초한 교회법을 따라 정당한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현재 이 문제로 가장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포도원교회일 것입니다. 김문훈 목사도 오늘의 포도원교회가 없었다면 우리가 비난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포도원교회를 사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교회의 부름을 받아 목회하는 목사에게는 최고의 형벌입니다. 어려움과 위기에 처해 있는 포도원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포도원교회의 처절한 노력과 수고를 조금 더 지켜보십시다. 아마 많은 분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 의견이 나오고 여러 제안이 있었던 것도 모두 어머니 노회로서의 책임감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우리 노회 목사회원 1번으로서 같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금이라도 총회와 한국교회 앞에 우리 노회가 책임지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총회 총대로 나가고 총회에서 직분을 맡아 봉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회의 추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총회 총대를 추천한 노회는 총대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동시에 노회는 고신총회에 대한 책임도 있습니다. 노회가 책임을 지는데 눈 가리고 아웅하면 더 큰 웃음거리가 되고, 그렇다고 총회에 대한 책임도 회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우리 노회는 올해 총회 회계로 수고하셔야 하는 장로님이 있고, 선출직 이사도 있으며, 특별국 국원도 있고, 총회를 운영하는 상임위원회 위원장도 있습니다. 고신총회의 장자로 자부하는 우리 부산서부노회가 총회 임원과 총회 선출직 이사, 특별국 국원과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제외하고 이번 총회 회기에는 총대를 파송하지 않는 것으로, 고신총회 앞에 최소한의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였으면 합니다. 이 안이 노회에서 받아들여진다면 저는 헌법위원회 특별국 국원이지만 총대로 가지 않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총회 총대 선정에 대한 회의 진행 발언에 대해 정식으로 동의안을 냅니다. 이번 총회 회기에 우리 부산서부노회는 총회 임원 장로, 선출직 이사, 총회 특별국원, 총회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제외하고 총대를 파송하지 않기로 동의합니다.※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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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7] 이만열의 이승만 대통령 비하와 김구 성역화의 위험한 이분법
서론: 건국의 아버지를 지우고 실패한 낭만을 신격화하다 지난 연재를 통해 필자는 이만열 교수가 '친일 프레임'을 어떻게 악용하여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들을 사상적으로 숙청했는지 폭로했다. 그러나 이만열 사관의 진정한 목적지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인 이승만 대통령을 철저히 폄훼하고, 그 대척점에 서 있던 김구 선생을 신격화하여 성도들에게 그릇된 국가관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낙인찍는 자학적 사관의 핵심 동력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상적 오염이 고신 교단 내부로 깊숙이 침투했다는 점이다. 소위 '고신을 사랑하는 모임(고사모)'을 자처하는 이들이 등장하고, 수많은 목회자나 심지어 총회장까지도 제주 4.3 사건의 본질 왜곡이나 현 이재명 정권의 정교분리 오독, 차별금지법 등에 대해 침묵하거나 동조하게 만드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다. 1. 김구의 독립 투쟁과 친북적 반(反)건국 행위 사이의 엄격한 구분 이만열은 백범 김구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바친 고귀한 독립 투쟁의 헌신을 이용해, 1948년 건국 반대라는 명백한 정치적 실책까지 '민족적 정의'로 포장하는 논리를 펼친다. 그는 김구가 선택한 남북협상 노선을 분단을 막기 위한 유일한 민족적 정통성을 지닌 길로 평가하며, 반대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노선은 분단을 고착화한 행위로 비판해 왔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애국심은 오직 독립운동의 현장까지만 인정될 수 있는 것이며, 건국 과정에서의 친북적 행보는 결코 애국으로 미화될 수 없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그는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이야말로 민족 분단을 막으려 했던 정통성 있는 대안이었다고 평가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 역시 이승만의 단독정부가 아닌 김구와 김규식이 추구했던 통일 정부 수립 노력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등) 2) [비평]: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시기 헌신은 존경받아 마땅하나, 1948년 건국 과정에서의 행태는 단호히 비판받아야 한다. 당시 김구는 김일성이 쳐놓은 통일전선전술의 덫에 빠져 남북협상이라는 명분 아래 대한민국 건국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이는 소련과 김일성의 적화 야욕에 이용당한 역사적 과오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자유 민주의 기틀을 흔든 반건국적 행위에 가깝다. 이만열은 이러한 실체를 외면한 채 김구의 실패한 행보를 민족의 정통성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2. 제주 4.3 사건 왜곡: 공산 폭동을 ‘미군에 대한 항거’로 둔갑시키다 이만열식 사관이 낳은 가장 파괴적인 결과물은 제주 4.3 사건의 본질을 뒤바꾼 조직적 역사 공정이다. 그는 4.3을 단독 정부 수립에 저항한 민중들의 투쟁이자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사상은 고신 내 유력 목회자들에게까지 전염되었다. 필자는 과거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원로)가 손봉호 교수의 영향을 받은 일부 유력 목회자들과 함께 제주 전적지를 탐방하며, "제주 4.3 사건은 미군의 말발굽 아래 희생당한 제주 도민들이 미군과 이승만 정권에 항거한 저항"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사실을 한 참석자로부터 직접 듣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특히 4.3의 주동자 김달삼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1948년 4월 3일 새벽, 제주 전역의 경찰지소를 습격하며 무장 폭동을 일으켰고 수많은 경찰과 우익 인사, 양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폭동 직후 북한으로 도주한 그는 김일성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이후 6.25 전쟁 직전인 1949년 말, 다시 유격대장으로 남파되어 활동하다가 1950년 3월 20일 강원도 정선 승지골(일명 '김달삼 모가지 잘린 골')에서 광복군 출신 김관오 연대장이 이끄는 국군 제8사단에 의해 사살되었다. 김달삼이 일으킨 제주 4.3 사건이 어떻게 '민주 항쟁'인가? 이 명백한 반란 수괴를 미화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그는 제주 4.3을 통일 정부 수립을 갈망하던 민중들이 분단 노선에 저항하며 일어난 사건으로 규정하며, 그 비극의 책임을 이승만 정권과 외세인 미군에 돌린다. 또한 5.10 선거 거부를 민족 자결주의적 저항의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이만열, 『한국 현대사와 기독교』 등) 2) [비평]: 4.3의 본질은 공산 세력의 무장 반란이다. 특히 당시 공산 폭도들에 의해 자행된 '기독교 순교적 진실'을 이만열은 침묵한다. 제주 최초의 순교자 이도종 목사는 공산 폭도들에게 생매장당했고, 삼양교회 김임종 집사 등 수많은 성도가 살해되었다. 당시 제주 27개 교회 중 12개 교회가 소실된 이 참혹한 잔혹사를 외면하고 공산 반란군 주동자를 '민주 항쟁가'로 미화하는 것은 기독교 역사학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린 반역행위다. 이런 제주 4.3 사건을 민주항쟁이라며 전적지 순례를 한 이동원 목사 등 일부 귀가 얇은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이만열식 역사왜곡에서 속히 벗어나기를 촉구한다. 3. 이승만의 통찰을 거부하는 좌파적 역사 공정 이만열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며, 이를 단순히 '정부 수립'으로 폄하한다. 그는 대한민국이 1919년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이미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며 2019년을 '건국 100주년'으로 기념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쳐왔다. 그러나 이는 국제법상 국가의 3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이 실재하지 않았던 임시정부의 한계를 무시한 감성적 민족주의에 불과하다. 만약 1919년에 이미 나라가 세워졌다면, 우리 선조들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찾기 위해 왜 그토록 피 흘려 독립운동을 했단 말인가? 건국된 나라를 되찾는 것은 '광복'이지 '독립운동'이 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 ①: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민족 분단을 선택한 인물이며, 친일 세력을 비호하여 건국 정통성을 훼손했다.” (출처: 『우리 역사 500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만열의 주장 요지 ②: “대한민국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미 건국되었다.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주장하는 것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분단을 정당화하는 반역사적 행위다.” (출처: 이만열 기고 및 ‘건국 100주년’ 관련 강연 요지) 2) [비평]:이만열의 '1919년 건국설'은 듣기엔 그럴듯하나 치명적인 논리적 파탄에 직면한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 1919년에 이미 나라가 건국되었다면, 우리 선조들은 '이미 건국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왜 그토록 피 흘려 독립운동을 했단 말인가? 건국이 이미 완료되었다면 독립운동은 존재할 이유가 없으며, 이는 선조들의 고귀한 투쟁을 '이미 있는 것을 찾는' 무의미한 반복으로 격하시키는 궤변이다. 국제법적으로 국가는 국민, 영토, 주권이라는 3요소가 확립되어야 한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나라를 세우기 위한 '준비 기구'였을 뿐, 실질적인 영토를 통치하거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1948년 8월 15일 건국은 한반도 내에 실체적인 국민이 구성되고, 영토에 대한 통치권이 확립되었으며, 대외적으로 주권을 선포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실체가 완성된 기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국가의 토대 위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세웠고, '한미동맹'과 '기독교 입국론'이라는 강력한 안전판을 구축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북한의 공산 정권과 차별화되는 정통성의 근거다. 이만열은 이승만을 친일파 비호자로 매도하며 건국의 정통성을 깎아내리지만, 정작 북한 정권 핵심부에 포진했던 김영주, 강양욱, 정준택 같은 골수 친일 부역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한다. 결국, 건국을 분단의 원죄로 몰아세우는 그의 억지는 집안에 불길이 닥칠 때 남은 가족이라도 살리려 방화문을 닫은 소방관을 향해, '왜 가족이 못 만나게 가로막느냐'며 불을 지른 방화범 대신 소방관을 꾸짖는 꼴이다. 결론: 거짓된 이분법을 깨고 건국 정신을 회복하라 이만열 교수가 쳐놓은 이승만과 김구의 거짓된 이분법, 그리고 제주 4.3 사건의 왜곡은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파괴하려는 사상적 덫이다. 이 덫에 걸린 상당수 복음주의 목회자들과 '자칭 고사모' 목사들은 고신의 순결한 정신을 좌경화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다. 우리는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기 애국심은 존중하되, 1948년 건국 과정에서 김일성에게 철저히 이용당해 이승만의 건국을 방해한 그의 친북적 역사적 과오와는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자학 사관을 걷어내지 않는 한 고신과 한국 교회는 결코 바로 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승만을 통해 허락하신 자유 대한민국과 고신 교회의 정통성을 지켜내기 위해 이만열의 왜곡된 역사인식과 선전선동의 칼날을 반드시 꺾어야만 한다. 그것만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개혁주의 정절을 회복하는 길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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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6] 이만열의 친일 프레임과 역사적 살인: 건국 주역들을 향한 사상적 테러
서론:손봉호의 윤리가 씨앗이라면, 이만열의 사관은 그 독초의 토양이다 앞선 기고(1~5번)를 통해 필자는 손봉호 교수가 기독교 윤리라는 가면을 쓰고 한국 교회를 좌경화의 늪으로 어떻게 인도했는지 파헤쳤다. 그러나 손 교수의 윤리 담론이 고신과 SFC 내부에서 독버섯처럼 번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에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치욕의 역사로 규정한 이만열 교수의 왜곡된 역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만열은 친일 청산이라는 도덕적 결벽증을 무기 삼아 건국의 정통성을 난도질했으며, 고신 정신의 본질인 순교 신앙을 좌파적 민족주의 투쟁으로 변질시킨 장본인이다. 1. 국가 상징과 호국 영웅을 향한 인격적 살인 이만열 교수가 주도한 『친일인명사전』은 객관적 사료에 근거한 학술적 결과물이 아니라 특정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사상적 숙청이자 정치적 낙인찍기의 산물이다. 그는 역사의 입체성을 무시하고 오직 '친일'이라는 단일한 잣대만을 휘둘러 대한민국 건국의 기틀을 닦은 거목들을 사상적으로 매장하는 데 몰두하였다. 이만열의 주장 ①:“백선엽은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독립군을 때려잡은 반민족 행위자다. 그의 공로를 기리는 것은 민족 정기를 훼손하는 일이다.” (출처: 이만열, 「백선엽의 친일 행적과 국립묘지 안장 문제」, 2020년 언론 기고 및 강연 요약) 이만열의 주장 ②: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는 친일파다. 친일 잔재인 애국가를 국가로 부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출처: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지식산업사, 1991) [비평]:이는 일제강점기라는 처절한 역사의 맥락을 무시한 처사이다. 6.25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백선엽 장군을 간도특설대 경력만으로 단죄하는 것은 국군의 정통성을 파괴하려는 시도이다. 당시 간도특설대의 주요 토벌 대상은 독립군이 아닌 중공군과 팔로군이었으며, 1930년대 중반 이후 만주의 독립군 세력은 이미 궤멸되거나 소련으로 이동한 상태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철저히 묵살되었다. 또한 애국가를 공격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상징 자체를 부정하려는 고도의 사상적 테러이자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역사 부정주의이다. 2. 근대화의 선구자들을 향한 주홍글씨와 '선택적 단죄'의 이중성 이만열은 교육, 언론, 문학 등 각 분야에서 대한민국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거인들을 모조리 친일 부역자로 매도하며 그들의 사회적 성취를 부정하였다. 그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려 했던 선구자들의 고뇌는 외면한 채 결과론적인 비판만을 쏟아냈다. 이만열의 주장 ①: “김성수, 김활란 등은 일제에 협력한 반민족 인사들이다. 그들이 세운 교육·언론 기관은 친일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출처: 이만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역사적 의의」, 민족문제연구소 강연, 2009) 이만열의 주장 ②: “민족 지성이라 불리는 최남선과 이광수 역시 결국 변절한 부역자들에 불과하다.” (출처: 이만열, 『우리 역사 500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바다출판사, 2000) [비평]:이들이 닦아놓은 근대 문명의 토대가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이만열의 '선택적 단죄'이다. 대한민국 건국 세력의 행적은 현미경으로 파헤치면서도, 정작 북한 정권 핵심부에 포진했던 수많은 친일 인사들(김일성의 동생 김영주, 부주석 김차승 등)에 대해서는 기이할 정도로 침묵한다. 민족정기를 말하면서 북한의 노골적인 친일파 등용은 눈감아주는 그의 역사학은 공정한 학문이 아니라 특정 진영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를 흉기로 사용한 정치 선동일 뿐이다. 3. 순교 신앙을 민족 해방 투쟁으로 격하시킨 영적 범죄 이만열 교수의 가장 큰 해악은 고신의 자랑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신앙적 성격을 왜곡하여 세속적 민족주의의 틀 안으로 가두어버린 데 있다. 그는 선배 목회자들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당했던 고난을 단순한 항일 운동의 일종으로 해석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초월적 가치를 훼손하였다. 이만열의 주장 ①: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민족 정기를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적 항일 투쟁의 연장선에 있다.” (출처: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지식산업사, 1991) 이만열의 주장 ②: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사명은 민족의 고난과 함께하며 사회를 변혁하는 데 있다.” (출처: 이만열, 「기독교 역사관의 재정립」, 기독교역사연구소 세미나 강연, 2010) [비평]:고신 선배들의 저항은 민족주의 차원의 항일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1계명을 지키기 위해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을 수호하려 했던 거룩한 '신앙 수호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만열은 이를 세속적인 민족 해방 투쟁으로 격하시켜 신앙의 본질을 변질시켰다. 이러한 영적 왜곡은 SFC 간사들과 신학생들이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보다 좌파적 민중사관에 더 열광하게 만드는 사상적 통로가 되었다. 신앙의 선배들이 피로 지킨 제단 위에 이만열은 좌파 이데올로기의 향로를 피워 올린 것이다. 결론:고신의 심장을 겨눈 이만열의 칼을 꺾어야 한다 이만열 교수는 기독교 역사학자라는 학문적 권위를 누리며 정작 고신의 뿌리인 자유민주주의와 성경적 보수 신학의 기틀을 허무는 데 앞장서 왔다. 그의 사상은 성경이 말하는 절대 진리가 아니라 특정 정치 세력의 논리를 대변하는 변증법적 역사론에 불과하다. 손봉호의 윤리가 한국 교회의 손발을 묶었다면 이만열의 사관은 한국 교회의 머리와 심장을 좌경화로 세뇌시켰다. 이제 고신 총회와 깨어있는 성도들은 직시해야 한다. 이만열 식의 자학적 역사관을 단호히 배격하고 하나님께서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허락하신 자유 대한민국과 고신 교회의 정통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 거짓된 사슬을 끊어낼 때 비로소 고신의 순교 정신이 다시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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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활절 연합예배에서의 이영훈, 소강석의 망언과 이에 대해 침묵하는 자칭 고사모를 강력 규탄한다"
고명길 목사 (고신애국지도자연합 전문위원장) 마태복음 24장,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하신 예수님의 경고가 오늘날 대한민국 강단에서 재현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2026년 4월 5일 부활절, 한국 교회의 심장부라 자부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단에서 우리는 거짓과 술수의 권력자가 등판하는 참담한 광경을 목도했다. 그러나 더 절망적인 것은, 평소 강단의 거룩함을 외치며 동료 목회자에게 돌을 던지던 자칭 고사모(고신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모임) 목사들의 굴욕적인 침묵이다. 1. 손현보 목사의 선지자적 외침: 고사모의 광기 어린 정죄 과거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는 강단에서 “이재명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외쳤다. 이는 특정 개인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고 차별금지법 등을 통해 교회를 억압하려는 거대 세력에 대한 선지자적 경고였다. 또한 그는 예배 후 교육감 후보를 소개하며 기독교적 가치를 수호할 것을 독려했다. 당시 고사모 목사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선거법 위반과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강대상에서 정치적 발언을 했다고 손 목사를 총공격했다. 심지어 고신 총회 석상에서까지 나서서 손 목사를 비판하며 징계를 요구하고, 일간지에 광고를 내며 그를 신학적 타락자로 몰아세웠다. 그들에게 손현보의 워딩은 반드시 척결해야 할 정치 선동이었다. 2. 이영훈·소강석의 아부의 향연: 부활절 거룩한 성전의 참사 그렇다면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 강단에서 벌어진 일은 무엇인가. 이영훈 목사와 소강석 목사는 차별금지법과 교회해체법을 주도하는 이재명을 강단에 세우고 아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이영훈 목사는 이재명을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시고 한국을 이끌고 계신 분"이라고 찬양적 소개를 했다. 소강석 목사는 “박수 안치는 사람 누구예요. 이따 좀 남으라"고 윽박질렀고, "실개천 출신이지만 결코 그 개천을 잊지 않으시며 국민화합과 실용정치에 올인하는 모습이 한국 교회 보기에도 참 아름답습니다”라는 망언을 쏟아냈다. 수많은 사법적 의혹과 교회 탄압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향해 ‘무거운 짐을 짊어 지셨다’, ‘아름답습니다’ 라는 찬사를 보낸 것은 아부를 넘어선 영적 배교다. 3. 성도를 유린한 살벌한 검문과 신사참배의 데자뷔 강단 아래의 풍경은 더욱 처참했다. 현장 성도의 증언에 따르면, 교회 입구에서 권력자의 안전을 위해 성도의 개인 노트북 비밀번호를 강제로 풀게 하고 개인 다이어리까지 뒤지는 만행이 저질러졌다. 예배의 주인인 하나님보다 권력자의 안위가 우선시된 현장은 중국 공산당 치하의 예배와 다를 바 없었다. 이 모습은 과거 일제 강점기, 강단에 일장기를 걸고 천황을 향해 절하던 신사참배의 현장과 겹쳐진다. 당시 친일 목사들은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명분으로 내세워 우상에게 무릎 꿇었다. 오늘날 이영훈·소강석 목사가 차별금지법과 교회해체법을 획책하는 권력자에게 강단을 내어준 것은, 형태만 다를 뿐 살아있는 우상에게 제사상을 차려준 현대판 신사참배와 다를 바 없다. 4. 고사모의 선택적 침묵: 당신들의 신학은 파산했다 우리는 묻는다. 손현보 목사의 직언에는 선거법 위반이라며 총회 석상에서까지 칼을 휘두르던 고사모 목사들은 왜 이 명백한 강단 유린 사건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는가. 손현보의 회개 촉구는 징계 대상이고, 이영훈·소강석의 굴종적 아부는 연합인가? 교육감 후보 소개는 강단 오염이고, 거짓의 아비 이재명의 축사는 한국 교회의 영광인가? 이재명의 실체를 경고하는 손현보의 말은 정치라며 정죄하더니, 이재명이 아름답다며 박수를 강요하는 이영훈·소강석의 말에는 침묵하는 고사모. 당신들의 정교분리는 신학적 원칙이 아니라, 자신들의 반성경적 논리를 강요했던 비겁한 고무줄 잣대였음이 만천하에 증명되었다. 당신들이야말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한상동 목사 등을 비판한 신사참배 가결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5. 고신 정신은 권력 앞의 비겁한 침묵이 아니다 고신 정신은 신사참배라는 거대 권력 앞에 목숨을 걸고 '아니오'를 외쳤던 선배들의 피 위에 서 있다. 교회 파괴자인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느라 성도들을 유린하고 강단을 팔아넘긴 이 못된 현대판 신사참배자들을 향해 입 닫고 침묵하는 것은 고신 정신과 선배들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고사모 목사들에게 강력히 요구한다. 손현보 목사에게 퍼부었던 그 서슬 퍼런 비판의 잣대를 이영훈·소강석 목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라. 즉각 성명서를 내고 그들의 배교적 행태에 대한 회개와 책임을 요구하라. 그리고 그들의 교회 앞에도 가서 정교분리를 어겼다는 당신들의 논리대로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가서 시위도 하고 기도회도 열라. 거짓의 아비가 부활절 강단에 선 이 엄중한 사태 앞에서 끝까지 '입꾹닫'하고 침묵한다면, 당신들은 더 이상 고신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입에 담을 자격도 없는 철부지 목사들이고 장로들일 뿐이다. 부활절 강단은 권력자의 무대가 결코 아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만이 영광받을 거룩한 곳이다. 선지자적 외침이 사라지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강단은 더 이상 교회의 강단이 아니다.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선 이재명과 그 무리들에 대해 “당신이 그 사람이라”, “저 여우에게 가서 이르라”는 경고의 말씀을 다 같이 강하게 외쳐야 한다. 그것만이 고신이 살고,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길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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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 ‘욜로(YOLO)’의 시대를 넘어, 부활의 참된 소망으로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욜로(YOLO)’라는 말이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이 말은 “인생은 한 번뿐이니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며 살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 땅의 삶이 전부인 양, 오늘을 마음껏 소비하고 즐기라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길어진 100세 시대라 할지라도 지나고 보면 인생은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날아가는 화살과 같이 쏜살같이 흘러갑니다. 만약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이 땅의 삶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면 그 짧은 여정의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지독한 허무와 공허 그리고 죽음 앞의 우울함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인 ‘부활’은 이 허무한 인생의 마침표를 영원한 생명의 쉼표로 바꾸어 놓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겨울이 되어 얼어붙었던 가지에 봄이 되면 다시 잎새가 싹트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영원한 삶이 예비되어 있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단지 죽음 이후의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는 강력한 원동력입니다. 슬픔을 사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 릴런드 스탠퍼드는 수재였던 외아들을 갑자기 잃고 극도의 슬픔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으니 저 대신 세상의 청년들을 도와주세요”라는 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그의 인생관은 완전히 바뀝니다. 아들이 천국에 살아있다는 부활의 소망을 품게 된 그는 당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헌납해 오늘날의 명문 스탠퍼드 대학을 세웠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개인의 절망을 넘어 수많은 젊은이를 살리는 위대한 헌신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어느 호스피스 병동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젊은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 남긴 편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가, 엄마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향해 가는 문이란다. 기나긴 겨울을 이기고 봄에 피어나는 저 꽃들처럼 우리도 눈물 없는 그곳에서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이처럼 부활의 소망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위대한 사랑과 용기를 현재의 삶 속에 불어넣습니다. 성경은 부활한 우리가 누릴 미래에 대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라고 약속합니다. 부활은 눈물도 사망도 애통함도 없는 완벽하고 행복한 삶이 열리는 기적입니다. 이 땅의 쾌락만을 좇는 ‘욜로’의 허무함을 넘어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가는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2026년 부활절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참된 기쁨과 미래에 대한 찬란한 소망이 상처받고 지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가득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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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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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 부활절을 맞이하는 믿음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세번의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ㅡ.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신 후 처음의 사람에게 1.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창1;28 하나님이 아닌 존재인 뱀이 처음의 사람에게 찾아와 그들의 욕구를 채우도록하고 뱀의 사상을 따르게 한 후..세상은 어둡게 변해 버렸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2.정녕 죽으리라..ㅡ창2;17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찌니라,ㅡ창3;19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고, 밭은 소출을 내지 않고 행복했던 가정에 행복은 간 곳 없고, 형이 동생을 해하고 장례를 치르고 부부는 갈등을 겪고,,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한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 지금도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고, 영생의 나라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 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ㅡ 요11;25-2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시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주시고 ㅡ무덤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십니다.ㅡ요528. 죽음으로 가는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ㅡ 요3;16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의 댓가를 치르고서야 우리 믿는 자들이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ㅡ그가 찔리고 그가 상하고 그가 징계를 받고, 그가 체찍에 맞음은 우리 허물과 죄와 불안과 걱정과 공포, 병 때문인 것을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ㅡ사53;5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하셨고. 사53;6.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들의 저주가 그를 믿음으로 물러가는 복된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3;13-14 이 말씀이 부활절을 맞이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힘이 되고 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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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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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전서 1:3) 할렐루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온 마음 다해 찬양합니다. 2026년의 봄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에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이웃들의 삶 위에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죽음의 권세도 이길 수 있다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처럼 온 세상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경제적인 어려움들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빈 무덤의 승리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과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거룩한 백성된 우리는 생명의 부활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이번 부활절을 시작으로 경남 지역 구석구석에 산 소망을 전하는 통로로 소외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무너진 마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 부활의 아침은 어둠이 지나고 반드시 빛이 온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자 확증입니다. 비록 현실의 고난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지라도,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신뢰하고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갈등이 있는 곳에 화해를 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다시 한번 우리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이 기쁜 소식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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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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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통영기연 곽만섭 목사
- 사랑하는 경남신문 독자들과 경남 성도들께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아침에 선 교회와 성도들이 이 놀라운 생명의 복음을 다시 붙들며, 믿음 가운데 새 힘을 얻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나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의 상황은 여전히 우리를 흔들지만, 주님께서 살아계신 한 교회는 무너지지 않으며 우리의 믿음 또한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능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위에 부활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여, 각 가정과 삶의 자리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일상 속에서 부활의 기쁨이 실제가 되어, 지친 마음을 회복시키고 서로를 위로하는 은혜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역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흘려보내며, 말과 삶으로 복음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작은 섬김과 나눔이 모여 이웃에게는 위로가 되고, 사회에는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어둠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의 은혜로 날마다 새 힘을 얻고, 기쁨으로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여러분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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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통영기연 곽만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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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녕기연 안덕수 목사
- 부활에 아침에 고백할 승리의 고백 매해 맞이하는 부활절인데 올해는 더욱더 그 의미가 깊이 다가온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의 한말씀, 다이루었다(요19:30)는 말씀이 마음속에서 계속 울린다. 모든것을 하나님께맡기시고, 다 이루심의 완성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그분의 마지막은 승리와 완성의 선언이셨다. “다 이루었다.”이 한마디에는 완전한 지불의 선언이다. 예수는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값을 하나하나 치르셨다. 낮은 땅에 오심, 모욕과 조롱, 가시 면류관, 십자가의 고통까지 치르시면서 그 모든 과정은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는 길이었다. 이때 휘장이 갈라지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무너졌다.죄로 인해 닫혀 있던 길이 열렸고, 하나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다가오시는 분이 되셨다.어쩌면 우리는 이 장면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두 팔을 벌리사 안아주신 사건이다. “이제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 십자가는 단지 고난의 상징에서 용서와 초대의 상징이 된것이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고백은 죽음을 앞둔 체념이 아니다.사명을 완수한 자의 평안이며, 전적인 신뢰의 표현이다. 우리는 흔히 ‘안식’을 쉼으로 이해한다.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안식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인간은 여섯 날 동안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안식일은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날이라는 것이다.이 통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우리는 끊임없이 계획하고, 통제하려 하며, 결과를 붙잡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커진다.그러나 예수의 마지막 고백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준다. “맡겨라.”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괴로움과 눈물의 시간이 찾아올 때, 심지어 과거의 상처와 실패까지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안식을 경험한다. 부활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승리의 선언을 한다. 십자가는 겉으로 보면 패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죄와 죽음을 이긴 승리가 담겨 있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말한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따라서 믿음의 삶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삶.붙잡으려 하기보다 의탁하는 삶.그리고 그 고백은 매주 예배 속에서, 또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반복되어야 한다. 내 삶을 주께 맡김을 통해 신앙은 완성되어 간다. 참된 안식과 승리를 경험하게 되기실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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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녕기연 안덕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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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진해기연 정용기 목사
- 사랑하는 진해와 경남 지역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우리의 믿음의 핵심으로서, 절망 가운데 있는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소망입니다.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현재의 능력이며, 미래를 향한 확실한 약속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고난과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시대는 세계 각국의 이기주의와 전쟁의 소식, 경제적 어려움과 이념의 대립, 빈부와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각자의 삶에 놓인 무거운 짐들로 인해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려움 속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평강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지역사회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부활 신앙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생명을 받은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 희망을, 상처의 자리에 치유를, 분열의 자리에 화해를 이루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진해와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가 한마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나누며 이 땅 가운데 생명의 복음을 더욱 힘있게 전하는 증인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6년 부활절 진해기독교연합회 회장 정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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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진해기연 정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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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인생은 짧다, 그러나 깊을 수 있다
- 어린 시절 어른들이 어깨춤을 추며 흥겹게 부르던 노래 한 구절이 문득 생각난다.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인생은 짧다”(카르페 디엠/carpe diem)는 의미로 남긴 짧은 라틴어 구절은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오늘날 우리에게 아직도 익숙하게 들린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또 얼마나 진지하게 삶에 적용하고 있는지 새해를 맞으면서 한 번쯤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로만 크르즈나릭(Roman Krznaric)의 베스트셀러 『인생은 짧다, 카르페 디엠』은 바로 이 질문을 우리 앞에 던진다. 그는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이 오늘날 얼마나 얄팍하게 오해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우리 삶을 다시 본질로 되돌아보게 만든다. 현대 사회에서 ‘카르페 디엠’은 종종 “하고 싶은 건 지금 해!”, “지금 즐기자!”라는 소비주의적 문구로 탈바꿈했다.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라는 유행어가 대표적이다. 이 구호는 짜릿한 여행이나 과감한 소비, 충동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며, 정작 삶의 본질을 성찰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피상적인 시간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크르즈나릭은 이를 “카르페 디엠의 납치”라고 말한다. 그는 잊혀져 가는 이 삶의 기술을 다시 우리 손에 되찾아주고자 한다. 그가 제안하는 ‘카르페 디엠’은 단순한 쾌락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의식적 선택과 자기 결단, 타자와의 관계, 죽음에 대한 명상 속에서 피어나는 삶의 태도다. 그는 다섯 가지 유형의 ‘카르페 디엠’을 제시한다. 즉흥적인 기회를 붙잡는 삶(Opportunism), 감각을 통해 삶을 음미하는 쾌락형(Hedonism),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는 해방형(Liberation), 사회 정의를 위한 참여로 드러나는 정치적 형태(Political), 그리고 타자를 위한 헌신으로 드러나는 윤리적 삶(Ethical)이다. 이 모두는 “오늘이라는 시간 안에, 내가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단 하나의 메시지를 지향한다. 이 질문을 기독교 신앙의 언어로 바꾸면 “오늘 나는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표현될 수 있다. 우리가 유한한 존재임을 기억하고, 언젠가 반드시 마주하게 될 죽음을 직면할 때,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죽음을 의식하는 삶은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삶의 지혜로 이끈다. 시편 기자는 말한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크르즈나릭은 자기 결정권을 회복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소비자의 삶이 아니라, 창조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외침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는 세상의 유혹과 무기력 속에서 하루를 흘려보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이 땅을 책임 있게 살아가는 ‘소명자’다. 아프리카 오지와 지구촌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며,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인재들을 양성하는 선교사의 하루도 그러하고, 세속화된 현대 도심의 심장부에서 성경적 가치관을 구현하며 다니엘처럼 오늘을 살아가려고 고민하는 평범한 성도의 하루 삶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동일하게 소중한 ‘카르페 디엠’의 시간이다.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관점이 없으면 “인생은 짧다”고 하는 이 말은 우리의 삶을 한없이 허무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얼씨고 절씨고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라는 노래 소리로 한 해를 보내고 또 맞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짧은 인생이기에 이제는 남은 날을 헤아리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게 해 달라는 우리의 기도는 짧은 인생을 더 위대하고 역동적이며 견고하게 만들어 준다. 짧은 인생이기에 더 깊이 있게 살아야 한다. 매 순간 순간을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온전히 신실하게 응답하며 살아야 한다.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는 우리 모두에게 “카르페 디엠”은 단지 ‘순간을 즐기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붙들고 소명적인 삶에 신실하라’는 우리 주님의 자비로운 초대일 수 있다. 김성수 목사(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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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인생은 짧다, 그러나 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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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 국내전도위원회를 해산하라(5)
- 6. 적용: 고신 교단이 직면한 ‘현실 외면’ 의 문제 문제를 직면하는 것과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오늘 고신 교단이 겪는 가장 심각한 위기는 단지 한국 사회의 인구 감소나 교회 세대 구조의 약화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이러한 현실을 보고도 아무 근본적 변화 없이 과거의 전략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총회가 시대를 분석하지 못하면, 총회는 제 기능을 잃습니다. 지도력이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면, 지도력은 형식으로 전락합니다. 교회가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면, 교회는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래는 고신 교단이 현재 보이는 주요 문제들입니다. A. 인구 감소 속에서도 계속되는 국내 교회 개척 추진 고신총회는 여전히 ‘국내 교회 개척’ 을 교단 성장의 주요 전략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미 다음과 같은 구조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 세계 최저 출산율 ● 총 인구 감소 ● 교회 출석 인구 감소 ● 청년층의 급속한 이탈 ● 기존 교회의 연령 구조 악화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 개척을 계속 확대하는 것은 선교적 확장이 아니라, 구조적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방향입니다. 새롭게 세워진 교회는 대부분 미약하고, 기존 교회는 더 나뉘어 약해집니다. 나눔은 많아지고, 강함은 줄어듭니다. B. ‘성장’의 착각 — 실제로는 신자 이동일 뿐이다. 고신의 새로운 개척교회와 소규모 지교회들은 종종 “성장” 을 보고합니다. 그러나 그 성장은 대부분 전도나 회심이 아니라, 기존 신자의 이동입니다. ● 새로운 교회가 생기면 ● 근처의 기존 교회 성도들이 일부 이동하며 ● 통계상 “성장” 이 발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 총량이 줄어드는 사회에서의 재배치일 뿐입니다. 즉, 고신 교단이 “성장” 으로 인식하는 것들 중 상당수는 실제로는 교회의 약화를 가속하는 현상입니다. C. 목회자와 성도의 고령화 — 개척이 아니라 통합이 필요한 시대 고신 교단의 목회자 평균 연령은 꾸준히 올라가고 있으며, 젊은 목회자 공급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성도 역시 동일한 패턴을 보입니다. ● 청년/청소년 비율 급감 60–70대 중심의 예배 ● 농어촌 및 중소형 교회는 다음 세대가 거의 없음 이런 구조 속에서 교회를 더 세우는 것은 물과 영양이 부족한 땅에 더 많은 씨를 뿌리는 일과 같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씨앗’ 이 아니라, 이미 심겨진 교회를 살리고 강화하는 일입니다. D. 전도보다 ‘전입 성도’ 가 많은 구조 — 선교의 진정한 부재 개척교회 중 회심자(처음 믿는 사람)의 비율은 극히 낮습니다. 고신 교단 전체적으로 보아도 청년 회심자는 드뭅니다. 그런데도 개척을 통해 얻는 “성장 수치” 가 마치 선교적 성공처럼 보도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교의 결실이 아니라, 타 교회 성도 한두 명을 빼 오는 ‘재배치 효과’ 일 뿐입니다. 한국 교회 전반이 이 문제를 겪고 있지만, 특히 고신의 경우 교회 개척 정책이 적극적이기에 피해는 더 크고 구조적입니다. E. 개척이 목표가 될 때 — 사명보다 ‘직분 확보’ 의 문제 물론 모든 개척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성령의 부르심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척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구조적 현실 속에서 다음과 같은 동기도 실제로 존재합니다. ● 담임 목회 자리 확보 ● 교회의 갈등 회피 또는 독립적 운영 ● 장로회적 감독을 벗어난 자율성 추구 ‘내 교회’ 라는 자기실현 욕구 이러한 개척 동기는 선교가 아니라 개인적 동기이며, 결과적으로 교단 전체의 건강을 약화시킵니다. 바른 교회 개척은 성령의 부르심 + 실제적 필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실제적 필요” 가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F. 성경적/장로교적 명령과의 충돌 — ‘분별없는 개척’ 은 불순종이다. 앞서 보았듯, 성경은 다음을 명령합니다. ● 문제를 ‘모여’ 함께 논의하고 해결하라 (행 15) ● 시대를 분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알라 (대상 12:32) ● 남은 것을 정리하고 구조를 정비하라 (딛 1:5) ● 다수의 지혜로 교회를 안전하게 하라 (잠 11:14) ● 교회를 하나로 세우라 (엡 4:11–13) 또한 개혁주의 전통은 말합니다. “교회의 상태를 살피라” — 존 녹스 “시대를 분별하라” — 제2치리서 “시대의 위험을 관찰하라” — 조지 질스피 “시대에 맞는 방향을 제시하라” — 새뮤얼 러더포드 “각 시대를 위해 다른 결정을 하라” — 웨스트민스터 총회 그러나 고신 총회는 오늘 한국 사회의 인구 구조와 교세 감소라는 시대적 위기를 전략적으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적 명령에도, 개혁주의 정치 전통에도, 지금 시대의 필요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G. 가장 큰 위험 — ‘현상 유지’ 를 믿음으로 착각하는 것 고신 교단이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은, 새로운 전략을 세우지 않는 것을 믿음이나 보수성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신실함은 과거의 방식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방식으로 오늘의 상황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적 보수성은 변화가 두려워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더욱 하나님 중심의 지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그냥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멈추고, 분석하고, 재정비하는 것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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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 국내전도위원회를 해산하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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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구 목사] 마지막에 남는 것(벧전 4장 7–11절)
- 무엇이든 끝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을 진지하게 만들고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 연말이 되면 한 해의 끝을 생각하게 되고, 오늘과 같은 총회 자리에 서면 분주하게 달려온 시간들이 마무리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끝을 앞에 두고 돌아보면, 그때는 그냥 그렇게 살아도 되는 줄 알았던 삶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끝이 가까워질수록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가 더욱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끝을 앞에 두게 되면 사소한 것과 끝까지 남을 소중한 것이 구분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가 보면, 정말 붙들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무려 2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어 온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도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했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틀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재림의 때를 비밀로 감추어 두셨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오늘 밤이라도 끝이 올 수 있다”는 긴장감 속에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끝이 멀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대충 살게 됩니다. 의미 없는 것에도 마음을 빼앗기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 힘을 쏟게 됩니다. 그러나 끝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가치만 붙들게 됩니다. 본문은 그 ‘끝까지 남는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대화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사람도, 돈도, 명예도, 권세도 떠나갑니다. 그러나 끝까지 남아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붙들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끝까지 남습니다. 직분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자동으로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직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소홀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끝이 가까울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더 깊이 만나고, 더 친밀해지는 데 힘써야 합니다. 둘째는 사랑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만물의 마지막에 가서 남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계명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설 때, 이 땅에서 이룬 업적이나 성취를 가지고 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이 땅에 남겨 두고 가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한 것은 가지고 갑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은“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며 먹이고 입히고 돌본 것, 용서하고 덮어준 것, 화해한 것—이 모든 것은 세상 역사가 끝나도 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합니다. 끝이 오기 전에,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는 봉사와 섬김입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봉사는 자기 힘이나 자기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봉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이 말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섬길 때, 그 섬김은 끝까지 남습니다. 봉사와 섬김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지 않아도 될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봉사와 섬김은 만물의 마지막이 와도 남을 일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창원기독교총연합회를 위해 묵묵히 섬긴 모든 수고와, 앞으로 세워질 임원들의 섬김 또한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오실지, 우리가 먼저 주님께로 갈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 우리의 마지막이 오더라도, 기도와 사랑과 섬김이라는 이 소중한 핵심 가치를 붙들고 살아가는 주님의 종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본 설교문은 2025년 12월 10일 창원기독교총연합회 총회 예배에서 전한 강영구 목사의 실제 설교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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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구 목사] 마지막에 남는 것(벧전 4장 7–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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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인사]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2:14-23)
-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아니하리라”(호2:16) 이 말씀은 단순히 부르는 호칭을 바꾸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예배가 얼마나 깊이 타락했는지를 폭로하는 말씀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끝까지 가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1. 이스라엘 역사에 반복된 한 가지 패턴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한 가지 반복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출애굽 직후, 시내산 아래에서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그들은 금송아지를 다른 신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여호와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가장 무서운 형태입니다. □ 여호와를 버린 것이 아니라, □ 여호와를 왜곡한 것입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 역사 속에는 수많은 이방 신들이 등장합니다. 바알, 아세라, 몰렉… 그러나 호세아 시대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더 심각해집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바알’이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2. “내 바알” 이라는 말의 충격입니다. ‘바알’은 단순히 ‘주인’이라는 일반 명사가 아닙니다. 바알은 가나안의 대표적인 우상신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 바알” 이 말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과 바알이 혼합되었다는 말입니다. □ 참 하나님과 거짓 신의 경계가 무너졌다는 말입니다. □ 예배는 있는데, 대상이 틀린 예배입니다. 금송아지를 여호와라 부르던 그 착각이, 이제는 하나님을 바알이라 부르는 지경까지 온 것입니다. 이것은 무지한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왜곡된 예배, 섞여버린 신앙, 타락의 최종 단계입니다. 3. 이것은 옛 이스라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과연 옛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성도들은 교회에 나옵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 예배의 중심에 계신 분이 참 하나님이 아니라, 각자가 만들어 낸 ‘자기만의 바알’일 수 있습니다. 성공을 주는 하나님, 안전만 보장해 주는 하나님, 내 계획을 도와주는 하나님,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하나님. 이것은 여호와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알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것입니다. □ 이 우상숭배는 □ 교회 밖에서가 아니라, □ 예배당 안에서, □ 하나님의 집에서, □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안방에 와서 참된 남편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외간 남편, 바알을 섬기는 예배. 이것이야말로 가장 더럽고, 가장 추하고, 가장 심각한 우상숭배입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호세아 2장 16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다시는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이 말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깨닫고 돌아온다는 말이 아닙니다. □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겠다는 선언입니다.\ 혼합된 예배를 정리하시고, 왜곡된 관계를 끊어내시고, 다시 언약의 관계로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로 데려가시고, 말로 위로하시고,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바꾸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2:19–20) 5.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이 약속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신을 신랑이라 부르셨고, 교회를 신부라 부르셨습니다. 십자가는 혼합된 예배를 끝내는 자리이며, 바알의 관계를 끊는 자리이며, 언약의 혼인을 다시 여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더 이상 ‘내 바알’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 남편’이라 고백하는 신부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여호와를 예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손으로 만들어 낸 바알을 여호와라 착각하며 예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약속하십니다. “다시는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게 하겠다.” “내가 너를 다시 내 아내로 회복시키겠다.” 혼합된 예배를 내려놓고, 참된 남편이신 하나님 앞에 정결한 신부로 다시 서는 고신의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 말씀 앞에 우리의 예배와 신앙을 다시 비추어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는 입술로는 주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마음으로는 주님을 바알처럼 대하며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을 사랑의 남편이 아니라 필요를 채워주는 대상으로, 내 뜻을 돕는 존재로 왜곡하여 불러왔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참 하나님이 아닌 우리가 만들어 낸 바알을 섬겼던 이 더럽고 추한 우상숭배를 회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끊어내지 않으시고, 광야로 데려가 다시 말씀하시며, “다시는 나를 바알이라 부르지 않게 하겠다” 약속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주님, 교회를 맡아 사역하시는 말씀 사역자, 목사님들을 주님의 강한 손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혼합된 예배의 시대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게 하시고, 바알의 언어가 아니라 언약의 말씀만을 담대히 전하는 신실한 말씀 사역자, 목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말씀 사역자, 목사님들의 영과 육을 지켜 주시고, 가정과 사역 위에 주님의 위로와 분별력을 날마다 더하여 주옵소서. 주님, 고신의 모든 성도들의 마음을 다시 주님께로 돌이켜 주옵소서. 익숙해진 신앙, 형식만 남은 예배, 섞여버린 가치관을 말씀의 빛으로 정결하게 씻어 주옵소서. 주님을 내 바알이 아니라 내 남편이라 부르며, 관계로 주님을 아는 신앙으로 회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육신과 마음의 질병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주님의 긍휼로 찾아가 주옵소서. 병상에서, 고통의 자리에서 주님이 여전히 언약의 남편이심을 붙들게 하시고,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그들의 몸과 마음 위에 부어 주옵소서. 주님, 오늘도 우리를 버리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라 다시 아내로 삼기 위해 부르신 줄 믿습니다. 혼합된 예배를 끊어내고, 참된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정결한 신부로 서게 하시며, 끝까지 신실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고신의 모든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참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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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인사]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2: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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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복(Blessing)의 본질을 찾아서
- 연말연시가 되면 기독교인들은 송구영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바르게 하여 복 받기를 원하고, 일반인들은 해돋이를 통해 태양신(?)이 주는 복을 받기를 원한다. 필자가 목회하는 통영 지역은 12월 마지막 날이 되면 해돋이를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인하여 북새통을 이룬다. 복에 해당하는 단어를 찾아보면 히브리어 아쉬레(אשרי-ashre), 바라크(ברך-barak), 헬라어 단어 중에는 εὐλογία(유로기아), 마카리오스(μακαριος) 등의 단어가 나온다. 알렉산더 대왕의 가문이 헬라 문화를 장악하고 있을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는 복의 개념으로 마카리오스를 사용하였다. 이 용어는 헬라 철학자 아리스토 텔레스가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그러므로 헬라 사람들에게 복이란 어떤 신이든 상관없이 개인에게 이득이 주어지는 복 곧 “신들에 의해 얻어지는 부(富)나 염려 없는 평안한 삶”을 복이라 생각했다. 히브리인들에게 복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인 평안, 의로움, 경건함”등으로 율법을 지키고 사는 삶 그 자체가 복이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시대를 지나 바사 헬라,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이 복의 개념이 “율법을 지켜야 복을 얻고, 율법 준수가 복의 자격이 되는 철저하게 조건적인 복의 개념으로 변질되므로 바리새적인 율법주의가 출현하게 되어 복이 은혜가 아닌 인간의 노력과 성과로 받게 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복을 뜻하는 영어 단어 ‘해피니스(Happiness)’는 '우연히 일어나다.’라는 뜻의 해픈(happen)에서 파생된 단어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한자어 행복(幸福)이라는 단어 풀이도 그렇다. 여기서 행은 “우연히, 요행” 뜬구름 잡듯이 우연히 잡게 된 복을 말한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본질적인 복은 해피니스(Happiness)가 아닌 블레싱(Blessing)이다. 블레싱(Blessing) 단어는 “블리드(bleed-피를 흘리다)”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찾아 만들어낸 것이 해피니스라면, 신으로부터 받는 복은 블레싱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모든 복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복은 ‘해피니스’가 아닌 ‘블레싱’이다. 행복은 우연히 살아가며 어쩌다 누리는 사건이지만,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을 믿는 사람은 약속된 언약의 복이므로 일상 전체가 복인 것이다. 주님의 보혈이 이미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우연한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순간이 최고의 복 받는 순간이다. 히브리어 “바라크”는 조건적인 복으로 “복을 받을 것이다”이며, 히브리어 “아쉬레, 헬라어 마카리오스”는 존재적 복으로 “복된 자”이다. 예수님께서 강조하는 복의 개념은 “아쉬레, 마카리오스”적 복의 개념이다. 예수님은 율법주의에 기반을 둔 조건적 복의 사상을 은혜로 주어지는 복의 원래 의미를 회복시켜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복을 받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복 받은 백성답게 감사하며 영광 돌리며 사는 삶이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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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복(Blessing)의 본질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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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연말, 연시 용어 I : 2026년 병오년, 붉은 말띠 해란 말은 적절한가?
- 1. 서언(序言) “올해는 병오년(丙午年), 붉은 말띠 해입니다.” 이 말은 2026년 1월 1일부터 모든 언론 매체들이 동시에 언급할 것이다. 또한 “올해는 이런 면으로 삼재(三災)해이니 조심해야 된다.”란 말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우리 기독교인으로서는 적절하지 못한 말이다. 물론 뿌리 깊이 이미 대중화된 말이라서 혹시 사용하더라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보고 해야 할 말이다. 이에 본 지면을 통해 이 용어를 분석하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연초에 사용할 올바른 연호와 적절한 말을 논하고자 한다. 2. 60간지 연호(年號) 사용의 유래와 병오년 붉은 말띠, 삼재 해는 무엇인가? 1) 60간지 연호의 유래 : 이는 중국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 등의 동아시아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60간지 연호이다. 이는 유교의 경전 중 하나인 주역(周易)에서 나온 것으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주술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육십갑자 연호인 갑자, 을축, 병인, 2026년의 병오년 등은 하늘의 줄기로 보는 천간(天干)의 10글자(十干)와 땅의 가지를 뜻하는 12개의 지지(地支)가 합쳐서 만든 연호이다. 또한 태어나서 60년이 되면 육갑 연호가 다시 돌아오는 해가 되기 때문에 환갑(還甲)이 된다. 이때는 사주팔자(四柱八字)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생일의 마지막이라 해서 축하연을 전통적으로 해 오기도 했다. 2) 병오년 붉은 말띠란? : 60간지의 띠별 주기는 12지신인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순으로 12년마다 같은 띠가 돌아온다. 이에 천간 10개와 결합하면 60년 주기로 완전히 같은 해가 반복된다. 이 중에서 2026년은 십이지신 중 일곱 번째 동물인 말의 해로, 60갑자 중 43번째에 해당된다. 천간으로는 병(丙)이고 지지로는 오(午)이기 때문에 병오년이라고 한다. 또한 보통 병(丙)은 태양처럼 밝고 뜨거운 기운을 나타내며, 오(午)는 한낮의 태양처럼 가장 왕성한 에너지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병은 오행에서 불(火)에 해당하고 붉은색을 상징하기 때문에 2026년은 ‘붉은 말의 해’ 또는 ‘화마(火馬)의 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2026년은 열정과 활력이 넘치는 해가 될 것이며, 말은 빠르고 역동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변화와 발전의 기운이 강하여 새로운 도전이나 시작에 적합한 해가 될 것이라고 덕담을 나누게 될 것이다. 3) 삼재(三災)해란? : 60간지 연호와 띠를 말할 때는 앞에서와 같은 덕담도 있지만 삼재가 든다는 나쁜 말들도 있다. 삼재란 9년 주기로 돌아오는 3가지 재난이 3년 동안 계속된다는 말인데, 3가지 재난이란 천살(天殺: 천재지변), 지살(地殺: 땅에서의 사고), 인살(人殺: 인간관계의 사고)이며, 또 대삼재(大三災)란 것도 있는데 불(火), 바람(風), 물(水)의 재난을 말한다. 3년 재난은 첫해는 들삼재, 둘째 해는 눌삼재, 셋째 해는 날삼재로 순환한다고 믿는다. 2026년 병오년은 삼재 중 눌삼재로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해당하며 토끼띠, 양띠, 돼지띠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한다. 특히 건강, 금전, 인간관계에 불운이 온다고 믿는다. 3. 기독교적 관점과 제언 앞에서 본 대로 육십갑자 연호와 12지 동물 띠에 관한 말과 삼재해 등은 중국의 주역과 동물 숭배, 토템 신앙에 천문학적 관습을 더하여 나온 것이다. 이는 미신적인 사고와 우상 숭배의 행위가 그대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인인 우리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미신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렇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계속 그 의미와 뜻도 잘 모른 채 육십갑자 연호와 12지 동물 띠에 관한 말을 스스럼없이 사용하면서 나는 무슨 띠라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 민족의 민속적인 의미는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관계없는, 버려야 할 미신적인 용어들이다. 이상으로 볼 때 기독교인으로서 “올해는 병오년(丙午年), 붉은 말띠 해입니다.”란 말이나 ‘올해는 이런 면으로 삼재(三災)해이니 조심해야 된다.’란 말은 기독교 신앙 원리와 기독교 연호에도 맞지 않는 말이다. 또한 이런 60연호와 12지 등의 띠, 생년월일(四柱)로 결혼이나 인간 중대사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논하는 것은 연말과 연초에 있어서 너무나 잘못되고 사려 깊지 못한 일이다. 다음 호에서는 바람직한 기독교 연호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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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연말, 연시 용어 I : 2026년 병오년, 붉은 말띠 해란 말은 적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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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복음알기 : 이미 시작된 은혜 – 구름기둥과 불기둥
- 이스라엘이 에담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홍해 앞에서 백성이 두려워할 때 모세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오늘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선포합니다. 출애굽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복음의 구조를 그대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때,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가 바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언제부터 나타났습니까?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홍해를 건너기 전, 에담에서부터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홍해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앞길이 막힐 것이라는 불안도, 뒤에서 애굽 군대가 쫓아올 것이라는 공포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시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때 이미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준비하셔서 앞서 가시며 인도하십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당하게 될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너희가 걱정하기 전에, 나는 너희의 길을 준비해 두었다.” 광야는 살기에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낮에는 타는 듯한 뜨거움, 밤에는 온몸을 떨게 만드는 추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도 없고, 길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광야에서 하나님은 구름기둥으로 그늘을 만들고, 불기둥으로 온기와 빛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잘 준비해서 길을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준비하신 은혜였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영적으로 광야 같은 계절을 만납니다. 기도의 감격도 잘 느껴지지 않고, 말씀을 읽어도 내 마음을 울리는 것 같지 않고, 문제는 계속해서 밀려옵니다. 혹시 지금,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기쁨은 줄어들고, 막연한 의무감과 낙심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더 열심히 해야 하나님이 도와주시겠지.” “기도를 더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전도를 더 하고, 봉사를 더 해야 하나님의 시선이 내 쪽으로 돌아오시겠지.” 그러나 출애굽기의 메시지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열심을 보여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믿음 좋은 민족이어서, 준비된 공동체여서 하나님의 인도가 시작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보기 전부터, 그들이 앞으로 겪게 될 뜨거움과 추위를 아시고 먼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세우셨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와 같은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문제에만 매여서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라고 묻지만, 하나님은 이미 우리보다 앞서 가고 계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미 우리 길 앞에 서 있습니다. 성경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이 구절을 “열심히 믿음 생활해라” 정도의 도덕적 권면으로만 받아들이지만, 사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미 준비해 놓으신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방식’을 말합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 행위를 근거로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지 않고, 내 감정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가늠하지 않고, 내 이해 수준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재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이미 앞서가시며 준비하신 은혜를 신뢰하고, 그분이 나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은 떨었습니다. 앞은 막혔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의 소리가 다가옵니다. 그때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우리는 ‘가만히 있는 것’을 오해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자기 힘과 공로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적극적인 신앙의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도 홍해와 같은 막막한 순간이 있습니다. 건너갈 수 있을지, 무너질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홍해 앞에 서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준비해 두셨다는 것. 이 글을 읽는 독자 한 분 한 분이 지금 어떤 자리에서 이 글을 읽고 있든지, 하나님께서 이미 앞서 인도하고 계심을 다시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도 우리 앞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은혜가 서 있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그 인도를 ‘믿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낙심 속에 새로운 힘이 솟아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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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복음알기 : 이미 시작된 은혜 – 구름기둥과 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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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옷자락을 던진 사람들
- 성도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도 의식해야 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늘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소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전의식이라고 부르는 삶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아가라고 명령하신다. (신명기6:25)에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신명기18:13)에서도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라고 요구한다. 성경의 여러 인물들 중에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신다는 두려움으로 하루하루 살았던 인물이 있다. 바로 요셉이다. 요셉은 17세의 나이로 애굽으로 팔려갔다. 다른 사람의 손에 팔려간 것이 아니라 형들의 의해서 인신매매를 당한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17살의 나이로 유배를 간 왕이 있다. 소위 ‘단종애사’ 라는 사건이다. 세종의 손자요, 문종의 아들로 태어난 ‘단종’은 ‘문종’이 왕이 된 지 2년 만에 죽는 바람에 겨우 12세 나이로 조선의 6대 왕이 되었다. 그러나 단종은 15세 때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쫓겨났고, 17세에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그 해 가을에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했다. 보통 10대에 잘못된 과거나 마음의 상처가 있으면 그것이 그의 평생 정신과 인격에 영향을 주어서 나중에 잘못된 방향으로 뻗어갈 수 있는데 요셉은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 올라서도 형들에게 잘못을 되갚지 않았다. 애굽에 팔려온 요셉은 한 마디로 앞이 보이지 않고, 미래가 없는 막막한 환경이었다. 보통의 청소년 같으면 그냥 되는대로 살아갔을 것이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게 된다. 그러던 중 보디발 장군의 아내는 요셉을 유혹한다. (창세기39:12)에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을 나가매” 라고 말씀한다. 요셉이 버려두고 간 그 옷이 나중에 증거물이 되어서 강제추행의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기재잡기(寄齋雜記)에 수록되어 있다. 성리학자인 박 영(朴英, 1471-1540)의 후손들은 대대로 옷자락이 잘린 두루마리 한 벌을 유물로 물려받는 가풍이 있었다. 여기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하루는 박 영선생이 말을 타고 남소문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골목 어귀에 미색이 남다른 여인이 손짓을 하였다. 그는 혹하여 말에서 내려 여인을 따라갔다. 집에 이르니 이 여인은 박 영을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이 ‘풍채를 보니 여느 사람이 아는데 나 때문에 죽게 되었으니...’ 하고는 말끝을 흐린다. 박 영은 무슨 연유인지 따져 물었다. 그 여인은 강도가 보낸 미끼였던 것이다. 밤중이 되자 다락에서 여인을 부르는 신호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박 영은 눈치를 채고 강도떼가 들어오는 순간 다락 벽을 발로 차 무너뜨려 짓눌러 놓고 급히 여인을 업고 나왔다. 이 여인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자 이젠 여인이 진정으로 두루마리 자락을 붙들고 늘러졌다. 박 영은 칼을 빼서 그 잡힌 옷자락을 자르고 담을 넘어 멀리 달아났다. 그 후 옷자락이 잘린 두루마리는 집안의 가보가 되어 자자손손 박 영의 정신을 기리게 된 것이다. 요셉은 언제나 자기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맞추었다. 그러면서 늘 다짐하는 결단이 있는데 (창세기39:9)에서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라고 말씀한다. 요셉은 17세에 애굽에 팔려와서 30세에 애굽의 총리까지 올라갔다. 그렇다면 요셉이 총리가 되기까지 13년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을 한다면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살아갔던 사람이 바로 요셉이다. 아무도 자기를 지켜보거나 감시하는 사람이 없는 타향살이 가운데서도 요셉은 불꽃같은 눈으로 자기를 보시는 하나님을 늘 생각하며 살았다. 요셉과 박 영, 두 사람은 정말 멋있게 겉옷을 던진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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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옷자락을 던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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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걱정과 근심 (요14:1-6)
- 미국에 <수면학회>라는 단체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미국 인구 3억 5천 만 명 중 약 1/10에 해당하는 3천 5백 만 명이 만성 불면증 내지는 수면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1년 동안에 소비되는 수면제가 자그마치 700억 알이나 된다고 합니다. 잠을 이루지 못해서 수면제를 찾는 인구가 해가 갈수록 급증을 하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그래서 각 제약회사들이 수면제를 팔아먹기 위해서 1년에 자그마치 6억불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수면제광고비로 지출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의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갈수록 삶의 스트레스로 인한 마음에 근심 걱정이 너무나 많아서 그런 것입니다.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고 뼈를 마르게 한다고 했는데, 인간들이 이루어 놓은 찬란한 현대 문명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지 못하고 도리어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많은 근심과 걱정을 끼쳐서 심령을 상하게 하고 뼈를 마르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서 신경 안정제를 찾고, 불면증을 이기기 위해서 수면제를 복용합니다. 그런데 신경 안정제를 먹으면 모든 신경을 둔화시켜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수면제를 복용하면 신체적으로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켜서 우리를 해롭게 합니다. 그래서 FDA에서는 수면제 약 통에다가 “이 약을 먹으면 심각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문을 써 붙이도록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신경안정제나 수면제를 먹지 않고도 근심 걱정을 이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은 걱정과 근심을 이기게 합니다.(요14:1,27) 둘째로, 소망은 걱정과 근심을 이기게 합니다.(요14:2,3) 셋째로, 기도는 걱정과 근심을 이기게 합니다.(시107:28-30) 이런 방법으로 걱정과 근심을 이기고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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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걱정과 근심 (요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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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기도와 관계
- 기도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영적 전쟁 승리의 열쇠입니다. 새벽기도는 하루의 승리, 삶의 승리로 인도합니다. 다윗은 고난의 때를 지날때 새벽에 기도했고, 새벽을 깨웠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 실패입니다. 기도해야 관계가 깨지지 않고 관계가 잘됩니다. 좋은 관계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나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정신 차리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잠자는 제자들에게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었냐고, 책망했습니다. 한시는 한 시간입니다. 매일 한 시간만 기도해도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시험에 들지 않게 됩니다. 마귀, 사탄이 있습니다. 마귀는 시험하는 자, 대적자, 참소자, 거짓말쟁이입니다. 이단은 사탄에게 조종당하는 자이며, 거짓으로 속이는 자들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종의 특징은 신실하고, 거짓이 없는 자입니다. 사탄은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관계가 깨지는 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사탄은 이간 자, 참소자인데, 인간관계에서 참소하고 이간시켜, 관계를 깨뜨립니다. 관계가 깨지면, 불행해지고, 믿음이 파괴되고, 교회 생활에 큰 지장을 줍니다. 사탄은 영적 리더와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관계가 잘 되면 행복하고, 믿음이 성장하고, 교회 생활이 행복합니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사탄이 역사하여,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좋은 관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좋은 인간관계가 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관계가 전부이고 나머지는 사소합니다. 관계의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관계가 세워지는 데는 오래 걸리나 깨지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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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기도와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