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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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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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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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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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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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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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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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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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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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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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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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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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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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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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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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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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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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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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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시대정신과 기독교교육
-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믿음의 용사로 양육하는 것은 모든 신자 부모들과 교사들이 소원하며 바라는 기도의 제목일 것 입니다. 언약의 자녀들을 하나님 나라의 승리하는 군사로 잘 양육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들이 어떠한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고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교육’은 언약의 자녀들을 온실 속에서 양육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을 세상 속으로 내어 보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 부모와 교사들은 우리의 자녀들이 자라면서 영향을 받고 있고, 또 이들이 앞으로 나아가서 살아야 할 세상이 어떤 시대 정신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무엇보다도 세속적 인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본주의란 인간자율성을 절대화하고 인간의 무한정한 가능성을 강조하는 사상입니다. 인본주의는 피조물인 인간을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독립적인 존재로 상정합니다.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스스로 법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본주의 사상은 21세기 사회에서 세속주의와 강하게 결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속주의란 기독교복음의 능력과 범위를 주변화 시키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신앙은 정치나 과학, 그리고 교육과 같은 인간 삶의 핵심 영역에서는 반드시 말해야 할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받고 있는 현대 학교교육은 철저하게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인 교육입니다. 이런 교육을 통해서는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 인격자로 함양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시대의 또 다른 한 사회문화적 특징은 이미 진부한 용어가 되어버린 용어이기도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로 설명 될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보편적 진리를 부인하며, 해체주의를 표방합니다. 해체란 무조건 파괴해 버리는 혼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경직되고 획일화된 사고를 반대하고, 그동안 이성에 밀려서 무시되어 왔던 감성, 비주류 등의 요소를 재조명하자는 것입니다. 이론화, 수식화에 치중하는 경향에서 벗어나서 좀 다른 요소들도 고려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성을 찬양합니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한번 유행했다가 사라져버리는 일시적 현상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 사상이 우리 시대를 어떠한 방향으로 인도해 갈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마치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절대적 조건인 것처럼 생각해 온 현대인들에게는 분명히 크나큰 의미와 도전을 주고 있는 사상적 흐름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결국 상대주의를 표방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세계관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관용하는 것은 상대주의라는 대가를 지불함으로서 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관을 순수하게 사회적인 구성물로 이해하기 때문에 모든 소리와 이야기들을 존중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진리를 주장하는 입장은 본질상 오만하며 억압적이며 타인에 대한 지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절대적인 진리이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육의 전제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오늘의 시대 정신입니다. 이렇게 모든 가치가 상대화되어 버리고 초월적, 절대적인 가치가 사라진 자리에 가장 쉽게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은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라는 가치관입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 사회의 문화는 물질주의와 현세적 쾌락주의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대사회는 폭력성과 퇴폐성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또한 정보와 지식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는 지식정보사회입니다. 지식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라는 점에서 ‘지식경제’라는 용어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지식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정도를 넘어 지식의 폭발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비스럽게도 현대사회는 과학과 지식정보의 사회이면서도 동시에 이와 상반되는 주술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생활양식이 혼재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모습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 그리고 진보에의 신념 등이 도전을 받기를 하지만 그렇게 쉽게 감성과 주관성 등에게 모든 자리를 양보해 버리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기는 한편으로는 과학기술의 힘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동시에 신비주의적인 생활양식에 관심을 가지는 사회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 정신은 전통적 가정을 중심으로 한 삶의 양식까지도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전통적 가치관이 도전을 받으면서 이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삶의 방식들이 여기 저기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이미 그룹결혼을 포함해서 임시 “동거”, “시험결혼”, 혹은 “계약결혼”, 개방결혼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으며 동성간의 “결혼”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독신주의와 딩크족의 증가, 그리고 성개방의 풍조는 불안한 가정, 병든 가정, 가정의 붕괴와 해체의 위험성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징조들입니다. 이러한 가정의 위기는 21세기 사회에 더욱 심각한 형태로 나타나면서 기독교교육이 직면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사고하고 행도하도록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우리 사회를 감싸고 있는 시대 정신을 분별하면서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자녀들로 잘 양육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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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시대정신과 기독교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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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존재감
- 2010년경부터 빛나는 조연이 등장하면서 장면마다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는 바람에 갈수록 이들의 가치는 커지고 있다. 폭발력 있는 개성적 캐릭터는 주연보다 조연이 매력적으로 구현되어 환호를 낳게 된다. 식상함이 없는 신선함으로 주연과 주변 인물을 섬기는 자세로 연기할 때 그 존재감으로 명품조연이 탄생되는 것은 틀림없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개성과 자존감이 남다르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을 ‘인싸’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존재감이 남다른 사람이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받아 선택받은 자로 구별되게 선민이 된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은 내가 잘나서 결코 아니다. 왕이신 주님이 최고의 주연이 되셔서 우리를 조연으로 뽑아 잘 받들며 섬기라고 명하였기에 존재감이 있는 사람으로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구원받은 주의 자녀로 천국을 갈 수 있다는 자긍심은 있지만 하나님이 선택한 가장 귀한 존재라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다. 종종 기독교인들이 당당하게 존재감을 자랑스럽게 드러내지 못하고 선한 영향력을 펼치지 못한 상태로 살아가는 모습을 목격할 때가 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어 성할 때 ‘그래도 예수쟁이는 믿을 수 있어.’라는 말로 불신자에게서도 존재감을 인정을 받았다. 선진국이 된 오늘날 모든 것이 풍족해서인지 나의 정체성과 존재감마저 망각하고 소명감 없이 살고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분명히 나라는 존재가 그리스도의 조연으로 주와 남을 섬기고 산다면 존경심이 담긴 존재감이 드러날 사람이 될 것이 틀림없는 사실인데 말이다. 요즘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나의 존재감은 어떠한지 자문해보자. 물론 존재감을 키우기 위해 학력의 스펙, 각종 자격증과 세상 지위로 무장할 수 있지만 이런 것들을 무조건 쫓아가면 나중 될 자가 많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진정한 성도의 존재감은 그리스도를 주연으로 모시고 기꺼이 자신을 모든 사람의 종으로 섬기기 시작할 때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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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초장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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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존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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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무익한 염려 (마6:25-34)
-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큰 마을에 어느 날 하나님이 보낸 죽음의 사자가 내려와서 그 마을 대표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보낸 죽음의 사자인데 내가 내일 중으로 이 동네에서 열 명을 데리고 가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무서운 소문은 삽시간에 온 동네 사람들에게 퍼져나갔고 온 동네 사람들이 큰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드디어 그 다음 날 그 동네에서 여러 사람들이 죽었는데 무려 100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대표가 죽음의 사자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아니 열 명만 데리고 가겠다고 하더니 왜 백 명이나 죽었습니까?” 그러자 죽음의 사자가 펄쩍 뛰면서 “나는 결코 백 명을 죽게 하지 않았다. 나머지 90명은 무서운 소문을 듣고 염려하고 두려워 하다가 스스로 죽은 자들이니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죽을 일이 있어서 죽은 사람보다 두려움과 염려로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았던 것입니다. 염려라는 것이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염려(念慮)라는 말은 헬라어로 “메림나오”(μεριμνάω)라고 하는데 “나뉜다.” 혹은 “혼란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나뉘고 혼란스러우면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악한 사탄이 사람들을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서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무기가 바로 “염려”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염려를 통하여 우리를 곤경에 빠트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망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수도 없이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염려를 하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염려를 극복할 수 있는지 성경은 명쾌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염려는 불신앙에서 오는 것입니다.(마6:30,31) 둘째로, 염려는 신앙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마13:22) 셋째로, 염려는 믿음의 기도로 이길 수 있습니다.(빌4:6,7) 모든 염려를 이기고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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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무익한 염려 (마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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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이 기쁨!
- 이 기쁨! “제자입니까?”라는 제목의 책을 쓴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언제나 자신의 언행심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괴로워했습니다. 성격을 보아도 형편이 없고, 그 성격 때문에 자기가 지은 죄를 생각하면 더 어이가 없어서 ‘나는 왜 목사이면서도 이럴 수밖에 없을까?’라며 늘 자책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것 때문에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목사님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문제가 뭔지 아니? 너의 가장 큰 문제는 네가 걱정하는 성격이나 허물이 아니야. 더 큰 문제는 내가 받아들인 너를 너 자신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야. 너는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 않았니? 그래서 목사가 되지 않았니? 그런데 내 아들 예수의 피가 나에게는 충분하고도 만족스러운 것인데 너에게는 아직도 불만족스러운 것 같구나. 그렇다면 네가 나보다 더 거룩하다는 말이냐?” 바로 그런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계기로 자신 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완벽주의 성향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스스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서 죄인 된 자신을 온전히 씻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자신의 삶 속에서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신앙생활과 사역에 기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 하나님의 음성에 큰 깨달음을 얻고 이제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죄와 허물을 온전히 씻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제 모든 죄책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바로 이 진리를 깨닫고부터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평을 경험하고 비로소 말로 다할 수 없는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고, 그리고 그로부터 신앙생활과 사역에 기쁨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어떤 외국의 목사님이 한국교회를 방문하고서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왜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예배하는 데 얼굴 표정이 다 어둡습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아무리 봐도 구원받은 감격이 얼굴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 외국 목사님을 안내한 한국 목사님이 변명할 말을 찾다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우리 한국의 성도들은 예배당에 들어서면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은 그 외국 목사님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요. 한국 크리스천들에게는 아직도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셨는가보군요.” 독자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제목으로만 즐거워한다면 예수님 믿는 의미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즐거워할만한 세상의 조건이 혹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받은 그 놀라운 구원의 감격으로 날마다 즐거워하며 기쁨으로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과 똑같은 것만을 즐거워하고 세상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을 똑같이 슬퍼하고 세상 사람들이 근심하는 것을 똑같이 근심한다면 예수님 믿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며, 우리가 무엇으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위대함을 세상에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12장 28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은 미래가 아니라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이미 이 지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사탄의 결박과 종노릇하는데서 해방 되고 자유를 얻은 그것이 이미 내게서 구원이 시작되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당연히 기쁨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인 구원을 받고 이미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되었으니 지금부터 그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 바로 그것이 구원 받은 자의 삶입니다. 독자 여러분, 지금 이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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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이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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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예수 믿는 것
-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를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것은 내 몸이 성전 됨을 믿는 것이다. 임마누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모두 청산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이유는 내 몸에 좌정하시기 위함이셨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다 청산하시고 나를 성전 삼으셨다. 나를 성전 삼으셨다는 말은 내 몸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이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이다. 이제 실수하는 모습에 집중하지 말고, 예수님의 하신 일에 집중하여 경건의 훈련을 해야만 한다. 말씀대로 믿고 기도해 보라. 말씀과 기도의 믿음으로 거룩해 짐을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의 행함을 고쳐서 완벽해 지려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해 놓으신 것을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자신의 행위를 고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이 이루신 것을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행위를 고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조심하고 열심을 내면 말씀을 완벽히 지켜 낼 수 있는 줄 안다. 아니다. 속은 것이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라고 했다. 율법을 몰랐을 때는 자신이 대단한 줄 알고 살았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살아야 하는데 율법을 모를 때는 자신이 살았다는 말이다. 계명을 알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되었다고 하는가? 죄가 살아났다고 한다. 율법을 알고 보니 죄가 살았다고 했지 그리스도가 살았다고 하지 않는다. 율법을 알게 된 결과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7:10)라고 한다. 율법을 지키려는 것은 불가능함을 말씀하고 있다. 율법을 아무리 지키려 해도 결과는 사망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속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7:11)고 선언한다. 죄가 기회만 있으면 우리를 속인다. “너는 계명을 지킬 수 있어. 왜 못 지켰어. 좀 더 노력했으면 되는데. 더 노력해”라는 생각을 주는 것은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계명을 지킬 수 없다.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지키려 하는 것은 속는 것이다. 지킬 수 있는데 못 지켰다는 자책감과 자괴감과 죄책감은 나를 죽이는 자리로 이끈다는 말씀이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오래 속아 왔다. 내가 열심을 내고 인내하고, 온유를 발휘하면 선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늘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솔직히 한 번도 완벽하게 의롭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보혈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간다고 믿었지만 완벽하게 믿고 나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은혜를 많이 받고 회개가 잘 된다고 생각할 때에만 가능했다. 죄는 나를 속였다. “너는 그것 밖에 안 되는 녀석이야. 아직 멀었어, 더 자신을 수련을 해야 해.”라는 의식을 넣고 있었다. 미래의 언젠가는 더 좋아질 나를 바라보며 끝없는 수련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을 했다. 나는 보수교단에서 성장을 했고 보수교단의 신학을 했다.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배웠다. 그래서 믿음으로만 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고만 알았던 것이다. 믿음을 말하고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알고 있었지만 완전히 믿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하나님께 죄송하고 아프다. 오늘도 좋은 날이다. 주님과 풍성함을 누린다. 임마누엘로 풍성하다. 임재 속에 있으면서도 모르고 살아온 날들이 아깝기만 하다. 오늘도 주님의 임재로 충만하다. 임마누엘의 영광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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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예수 믿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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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조롱을 당하다
- 「'공동주택 관리법 제30조'에 근거하여 소유자에게 부과 적립하여야 하며 '시행령 제31조 8항'에서 임차인이 대신 납부한 경우 이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동주택 관리비 청구서에는 “장기수선충당금”이라는 항목이 있다. 건물이 노후화됨에 따라 필요비용을 미리 적립하는 것이다. 도색, 배관 수리 및 교체, 승강기 교체가 대표적인 내용이다. 워낙 큰 금액이 들기에 매달 적립을 한다. 또한 장기적인 관리 영역이라 의무자는 세대 소유자가 된다. 즉, 집주인이 납부해야 할 항목이다. 하지만 매달 집주인에게 직접 받기가 쉽지 않아 관리비에 포함해서 청구하게 된다. 그러면 조금 문제가 생긴다. 상당수의 세입자가 미래의 관리비를 주인 대신 지불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주택 관리법에서는 세입자가 이사 갈 때 관리실에서 정산받은 내역을 기준으로 집주인이 돌려주게 되어 있다. 40세대 작은 아파트이기에 전출입이나 매매가 흔하지는 않지만 종종 있다. 그러면 관리소장의 카리스마를 뿜으며 내역을 정리하고 설명한다. 필요 시 적당한 중재를 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장기수선충당금 정산으로 큰 갈등은 한 번도 없었다. 숫자를 정리를 돕는 아내 입장에서는 조금 번거로운 일이지만 내역서를 보면 누구나 수긍하는 부분이라 마음의 고단함은 없는 업무다. “아이고, 이사 가신다고요. 다음 가시는 곳은 조용한 집이면 좋겠습니다.” 늘 층간소음으로 고생하시던 세입자 한 분이 이사 가신다는 연락을 주셨다. 이사 가는 사유를 들어보니 층간소음은 아니고 집주인이 바뀌면서 새 주인이 직접 거주하게 되어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늘 술에 취해 인생 한탄하시는 독거 어른이다. 가끔 노동판에 나가 생활비를 벌어오는 것 같은데 이미 퇴근길에 얼굴이 붉다. 어느 날은 전화해서 성경책 한 권만 구해줄 수 있냐고 해서 교회에 있던 깨끗한 중고 성경책을 전해 드리기도 했다. 이래저래 정이 들었던 분이었기에 조금 섭섭한 마음도 인사를 나누었다. “장기수선충당금? 그게 뭔 소리입니까? 당신 주택관리사 자격 없죠?” 소유자가 바뀔 때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통화가 된 집주인. 전세로 살던 입주자에게 돌려주어야 할 장기수선충당금에 관해 차근히 안내를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조롱이다. 나의 자격이나 무지함을 탓하기 시작한다. 거듭 설명을 드렸더니 본인이 세를 주는 주택이 여럿이고 부동산 중개 일을 하는데 장기수선충당금 내용은 처음 듣는다고 한다. 지금까지 3년간 전출입 간에 한 번도 이런 내용으로 분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웠다. 내가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었을까? 조롱 섞인 소리에 화가 났지만 일단 꾹 눌러 참고 통화를 마쳤다. 지인 중 공인중개사가 두 분 있어서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그 사람은 엉터리 공인중개사이거나 돈을 세입자에게 내주기 싫어서 관리실에 으름장을 놓은 것이라고. 관련 법규를 찾아보니 장기수선충당금은 정산 후 세입자에게 돌려줘야 할 내용이 맞다. 이제 어떻게 할까? 어차피 집 팔고 사람이기에 다시 볼 이유가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정들었던 세입자 아저씨가 분명 피해 보는 상황이다. 연체 한번 없이 냈던 관리비에서 돌려받을 수 있는 돈이다. 그 돈이면 좋아하는 술도 편하게 마실 수 있을 정도는 된다. 그리고 무시 받았다는 사실에 지금 너무 화가 난다. 전화기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며 고민이 깊어진다. 그냥 확 한번 퍼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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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조롱을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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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4: 하기수련회인가? 하계수양회인가?
- I. 서언(序言) ‘하기 수련회’와 ‘하계 수련회’. 어떤 말이 올바른 말일까? 또 ‘수양회’와 ‘수련회’. 둘 중에서 어떤 말이 올바른 표현인가? 때로는 이런 질문을 받아보기도 하고, 필자 스스로도 다소 혼란이 되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여러 교회들이나 단체들이 여름과 겨울행사를 하면서 이 용어들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휴가철 용어들도 여러 외래어들과 함께 사용함으로서 정확한 구분이 잘 되지 않는 경향들도 많이 있다. 본격적인 여름방학과 휴가철을 맞이하여 진행되는 교회내의 각종 교육행사가 시작되고 있고 또 저마다의 휴가 계획을 세우고 있는 시점에서 올바른 용어 사용과 그 뜻과 정의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하기와 하계, 수련회와 수양회의 구분 1.하기(夏期)와 하계(夏季)의 차이 : ‘하기’란 말의 사전적인 뜻은 여름 기간이다. 계절별로 본다면 춘기(春期), 추기(秋期), 동기(冬期) 등과 계념이 같은 말이다. 하계의 경우는 여름의 시기란 뜻이다. 거의 같은 의미로도 볼 수 있고 또 그렇게 쓰여 질 때도 많이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하기는 여름의 처음과 끝의 기간(期間) 동안을 의미한다. 반면 하계는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여름철 자체의 특징을 내포하는 말로 볼 수 있다. 또한 본 연제 11회에서 논한바 대로 기(期)란 용어의 사전적 뜻은 시절, 시기, 기간 등을 뜻하는 말로서 “일정한 기간씩 되풀이 되는 일의 하나하나의 과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다시 이를 논한다면, 기(期)는 중, 고, 대학교 같은 정기 학제가 아닌, 사회교육원 같은 데서 주로 행해지는 일정기간의 교육을 수료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즉, 기(期)는 회기 연도적 학제(學制)개념이 아닌 연(年)단위 속에서 단기적기간의 수료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오래전에 여름성경학교를 ‘하기 학교’라고 한 것이나 오늘날의 학생회나 청년회의 하기 수련회 등의 말은 바른 용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하계는 사전적 뜻 그대로 여름철에 행하는 행사를 의미하기 때문에 사용해도 무방하지만, 교회의 행사는 일정한 기간이 있기 때문에 하계보다는 하기란 말이 더 합당하다고 볼 수 있다. 2. 수련회(修鍊會)와 수양회(修養會)의 차이 : 이 두 용어의 사전적 뜻은 다음과 같다. 수련(修鍊)의 뜻은 “정신수양이나 운동 따위를 통해서 몸과 마음을 힘써 닦아 기르는 것”, 또는 “기술이나 학문 등을 힘써 배우고 익힘”을 의미한다. 그다음 수양(修養)의 뜻도 역시 “몸과 마음을 닦아 기르는 것”이기 때문에 두 단어의 차이도 별로 없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보통 수련회는 나름대로의 땀 흘리는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몸과 마음을 한 층 더 높은 단계로 이끌어 올리는 모임을 일컬어 말한다. 반면 수양회는 고된 훈련이 아닌 휴식과 휴양을 통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모임을 의미할 때가 많다. 이로 본다면, 교회의 여름 교육 행사들은 ‘하계’보다는 ‘하기’로, ‘수양회’보다는 ‘수련회’로 하는 것이 더 그 뜻에 부합된 말이 된다. III . 결 어(結語) 이상에서 살펴 본 것 같이 서로 엇비슷한 것 같아 보이지만 그 개념상으로 보면 이런 미세한 차이가 있다. 물론 이런 용어를 잘 못 사용했다 해서 행정 질서에 문제가 생기거나 법적인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용어가 통일되지 않고 때에 따라서, 또 사람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사용된다면 우리 스스로의 모순을 드러내는 격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미세한 작은 부분이라도 간과하거나 무시할 것이 아니라 통일된 용어들을 바로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은 여름철 교회 행사의 소중한 각종 교육행사를 진행하거나 곧 행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휴가를 가거나 쉼의 시간들을 가질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바르고 적절한 용어 사용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문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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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4: 하기수련회인가? 하계수양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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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교회 보란듯 미신 무당이 미화되는 세상
-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은 혁명가이자 탁월한 혁신가였다. 무장 이성계를 등에 업고 망해가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한 일등공신이다. 정도전이 조선을 세우고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혁신적으로 단행한 적폐 청산은 타락된 불교에서 파생된 미신타파였다. 오백년 고려가 당시 망조(亡兆)에 들게 된 것은 고려의 국교 불교가 너무 비대하여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그리고 일부 불교세력은 타락하여 미신 문화화하여 백성들을 혹세무민했다. 정도전은 이 시대상을 정확히 읽고 쿠데타로 새 나라를 세울 것을 설계했다. 정도전은 개국 후 불교를 국교에서 지우고 절을 줄여나갔다. 개국 후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 때 태조 이성계마저 무학대사의 말을 듣고 왕궁의 방향을 정했으나 정도전은 이를 무시하고 과학적 근거에 가까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경복궁 터를 택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정도전의 개혁과 혁신이 조선 오백년의 역사의 맥이 되었다고 사가(史家)들은 말하고 있다. 이후 조선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유교의 국가가 되었지만 긴 역사 속에서 유교 또한 온갖 사회 폐해를 낳았다. 양반과 상놈의 반상계급 고귀한 선비정신이 되려 타락하여 게으르고 나태하고 그리고 나라의 먼 미래를 찾지 못하는 갇힌 나라가 되어 일본에 먹히면서 망하게 된다. 한 나라의 정신세계에서 우러나오는 에너지가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의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 조선의 말기 어지러운 조정과 백성의 정신문화 속에 파고들어 개혁과 혁신을 일으킨 데는 우리 자체의 에너지가 아니었다. 130년 전 이 땅에 복음을 들고 들어온 기독교 선교사들의 십자가 희생이었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이 땅에 들어왔을 때 타파해야 할 문화는 유교문화에서 나온 나태 게으름 남존여비의 천대 문화 그리고 철저한 미신과 우상 문화였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정신세계의 적폐 청산이 교회에서 파생되었지만 당시 많은 선각의 마음을 가졌던 나라의 인재들이 복음을 잘 받고 나라의 문화 근간을 바꾸는데 큰 활약이 있었다. 복음을 받은 우리의 교회 지도자들 또한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속에서 나라를 지켜내고 백성의 정신세계를 바꿔나갔다. 특히 교회중심의 3.1운동 애국정신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끌었으며 나라발전을 이루는데 거름이 되었다. 당시 시대는 온 백성들이 굿을 즐기고 조상을 섬긴다는 제사에 열을 올려왔다. 그러나 교회 부흥과 함께 무당들이 현저히 줄어들고 미신 문화가 거의 사라지는 듯 건강한 사회로 발전했다. “너희가 주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2) 교회는 철저히 말씀대로 복음을 전했으며 많은 신내림 등 영적 질병에서 힘겨운 자들이 교회서 치유받는 놀라운 일들이 있었다. 교회 주변에는 아예 점집과 무당집이 안되는 은혜도 임했다. 그러나 요즘의 세태가 크게 변하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 무당을 찾고 점집을 좋아하는 풍조가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원인에는 청년들이 취업이 힘들고 결혼이 어려워 호기심과 함께 점집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영국 시사잡지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의 점보는 시장이 4조 원이라는 보도를 했다. 지금껏 부끄럽게 여기던 점집 무당들이 공중파 방송에서 토크쇼를 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단순한 사회풍조로 볼 수 없다. 교회 보란 듯 공개방송에서 어떤 유명 배우 출신이 무당이 되어 그동안 숨어서 고뇌했던 개인적인 이야기의 미신을 미화시킨 프로도 있었다. 이렇게 미신의 사회화가 확산된다면 크리스천의 눈으로서만 바라봐야 하는 걱정의 차원이 아니다. 나라의 흥망성쇠 역사에서 미신과 우상숭배가 어떤 결과를 이끌었다는 사례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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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교회 보란듯 미신 무당이 미화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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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성 장로] 다시스로 가는 배의 유혹을 물리칩시다
-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배려하며 한 말이다. 먼저 선택권을 가지게 된 롯은 그의 눈에 기름지게 보였던 요단을 택하고 아브라함은 남은 땅 가나안을 택하게 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롯은 우상과 음란의 죄악으로 범벅이 된 소돔으로 빠져들어 패가망신하고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된다. 반면 아브라함은 롯이 외면한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게 되고 인간의 눈에는 척박한 것처럼 보였지만 믿음과 인내로 그 길을 개척해 기어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바꾸어 내게 된다. 요나는 앗수르를 회개시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라는 사명을 외면하고 황금과 환락이 판치는 다시스로 평안하게 살려고 도망쳤다가 풍랑을 만나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롯과 요나는 힘든 곳, 주님이 원하시는 좁은 길을 버리고 평안하고 세상적인 축복이 넘치는 길을 택했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쓰라린 좌절을 맛보게 된, 결과적으로 닮은 점이 있는 인물들이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엎질러진 꿀단지의 꿀을 발견한 파리떼들이 실컷 꿀을 빨아먹고는 정작 날아가려고 하는데 날개와 몸이 꿀에 달라붙어 죽어가면서 이런 바보같이 달콤함에 빠져서 목숨을 내어주게 되었음을 한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가? 멀리 보지 않더라도 코로나 이후에 달라진 교회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공동식사 준비, 봉사, 섬김 등 그동안 해왔던 일들이 힘든 것, 귀찮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는 않은지? 아프리카 오지에서 점심 사역, 에이즈 치유 사역 등을 위해 애를 쓰는 선교사님이 보내오는 편지를 보노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사치스럽다는 미안함이 든다. 그 옛날 환락과 육신의 풍요를 구가하는 이들을 싣고 떠나던 다시스행 유람선이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을 유혹하고 있다. 성경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에게 돌아서라고 말씀하신다. 죄악의 길인 다시스로 가는 배로 달려갈 것 아니라 좁은 길 곧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니느웨행의 길로 가는 우리 모두이길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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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성 장로] 다시스로 가는 배의 유혹을 물리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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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5)
- 사랑의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성령님은 따스한 하나님이십니다. 부드러운 성령님, 사랑의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얼마나 사랑이 많은지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은 큰 관심을 가지신 성령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성령님이시기에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사랑의 성령님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따뜻한 사랑의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변호사가 되어 변호해 주고 보호해 주십니다. 슬플 때 위로해 주십니다. 위로의 영, 격려의 영, 성령님은 사랑의 성령님이십니다. 사랑의 성령님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에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게 하시고 잘못된 길을 갈 때는 깨닫게도 하시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사랑의 성령님은 거듭나게 해주시고 새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영감과 지혜주시고 성령의 좋은 열매 맺게 하십니다. 사랑의 성령님이십니다. 사랑의 성령님과 동행하며 좋은 관계 맺고 사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사랑의 성령님 사랑해요’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사랑의 성령님과 동행할 때 사랑의 사람, 사랑의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성령님으로 부터 성령받으면 따뜻한 자로 사랑의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 성령 충만하면 열매가 맺힙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 중 첫 번째 열매입니다. 사랑이 가장 중요한 열매입니다. 사랑은 계속해야 합니다. 사랑하다가 포기하고 미워하면 실패합니다. 계속 사랑,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고 끝까지 관계가 좋아집니다. 가까운 사이의 관계에서 관계가 깨지는 이유는 계속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열 번 잘해주다가 한 번 잘못하면 돌아서고 배반하게 됩니다. 인간의 죄성이기에 믿을 수 없습니다. 아홉 번 사랑해 주고 잘해준 것을 잊어버리고 한 가지 섭섭한 것만 기억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엄격합니다. 받은 사랑 하나라도 있으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나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관대해야 참 사랑이고 인간관계가 깨지지 않게 됩니다. 사랑이 중요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 알면서도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사랑하는 것보다 미워하는 것이 쉽습니다. 성령 받고 성령 충만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할 힘이 생깁니다. 사랑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것이 즐겁고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넘치는 사랑의 공동체는 성령충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힘듭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 받으면 원수를 사랑합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원수를 향해 보복하지 않게 됩니다. 사랑하면 원수를 이기는 것이고 원수가 생기지 않게 됩니다. 누구와도 원수를 만들지 않고 사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스데반과 다윗의 원수 사랑의 비결은 성령충만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도바울은 성령 충만함으로 사랑 충만,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차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사랑으로 편지를 썼으며 성도를 향해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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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