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Home >  오피니언
-
[기고] 신사참배의 망령이 부활했는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는 자들과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사야 5:20) 지금 이 순간, 이란의 이슬람 독재 정권 아래서 10대 소녀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자유를 외쳤다는 이유로 짐승만도 못한 만행을 당하고 있다. "처녀는 곧장 천국에 간다"는 사탄적 논리로 강간을 자행해 정조를 빼앗고 교수형에 처하는 이 광기 어린 현장 앞에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참혹한 것은, 이 피의 정권에 동조하며 자금을 대는 대한민국 이재명 정권과, 그 주역을 거룩한 강단에 세워 '용비어천가'를 부른 한국 교계 지도자들의 영적 간음이다. 1. 국익도 국민도 없는 이재명 정권의 '해괴망측'한 독재 원조를 규탄한다! 이재명 정권은 지금 레바논에 이어 이란에까지 '인도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혈세를 퍼붓고 있다. 이것이 과연 누구의 돈인가? 우리 청년세대들이 짊어져야 할 빚이며 국민의 혈세다. * 배신 외교의 극치: 미국과 이란이 전쟁 중인 상황에서 적대 세력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한미 동맹의 근간을 부정하는 자폭 행위다. * 독재의 군자금: 50만 달러라는 지원금이 민간인에게 갈 것이라 믿는 바보는 없다. 이는 결국 소녀들을 살해하고 시민을 탄압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군자금이 될 뿐이다. * 주객전도의 인권: 자국민 고물가 고통과 천안함 유족의 눈물은 외면하면서, 외부 독재 정권에만 '개폼' 잡으며 생색내는 것은 국익을 팔아 자신의 사법 리스크와 정치적 폼을 사려는 비겁한 굴욕 외교다. 2. 강단을 유린한 이영훈·소강석의 '아부의 향연'과 현대판 신사참배 2026년 부활절, 거룩한 하나님의 성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단에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올라섰다. * 배교적 찬양: 이영훈 목사는 이란 정권을 돕고 교회 탄압의 중심에 선 이를 향해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신 분"이라며 찬양했다. 소강석 목사는 "박수 안 치는 사람 누구냐"며 성도를 협박하고, "아름답습니다"라는 망언으로 아부의 극치를 보였다. * 성도 유린: 권력자의 안위를 위해 성도의 노트북 비번을 풀게 하고 다이어리까지 뒤지는 만행은 이곳이 예배당인지 공산당 검문소인지 분간할 수 없게 했다. 이는 과거 일제 강점기 강단에 일장기를 걸고 천황에게 절하던 신사참배의 데자뷔다. 살아있는 우상에게 제사상을 차려준 이 목사들은 역사와 하나님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 3. 고신 저항 정신의 파산: 김홍석 전 총회장과 '기독교보'의 비겁한 변절 일제의 칼날 앞에서도 신앙의 정조를 지켰던 고신의 저항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 김홍석 전 총회장의 침묵: 이 참담한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손을 들어 축도한 행위는 악의 잔치에 하나님의 복을 비는 영적 배교다. * 기독교보의 궤변: 기독교보(2026.4.11)는 이 사태를 두고 "교단과 이념을 넘어", "교회의 연합과 일치"라 보도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좌파 독재 이념과 적그리스도적 행태가 '수용 가능한 이념'이 되었는가? 어찌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함께할 수 있는가? * 저항의 거세: "분열과 시대를 넘어"라는 표현은 자유민주주의와 교회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는 성도들의 입을 막으려는 교묘한 술책이다. 고신의 기관지라는 기독교보가 독재 조력자를 비판하기는커녕 '은혜로운 예배'라고 미화하는 것은 고신 선배들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4. 자칭 '고사모'의 선택적 정의와 위선을 고발한다! 손현보 목사가 강단에서 시대를 향해 선지자적 경고를 날릴 때는 '정교분리'와 '선거법'을 들먹이며 일간지에 광고까지 내어 정죄하던 자칭 '고사모' 목사들은 지금 어디에 숨었는가? * 손현보의 회개 촉구는 징계 대상이고, 이영훈·소강석의 굴종적 아부는 연합인가? * 거짓의 아비가 부활절 강단에 서서 성도들을 유린하는데도 '입꾹닫'하고 있는 당신들의 신학은 이미 파산했다. 당신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한상동 목사를 비판하던 가결자들과 다를 바 없는 비겁한 기회주의자들일 뿐이다. 결론: 주님, 이 땅의 촛대를 옮기지 마시옵소서! 이란의 소녀들이 처참하게 도살당하는 현실을 외면한 채, 권력자에게 강단을 팔아넘기고 '회복'과 '희망'이라는 거짓 평화를 노래하는 한국 교회는 심판의 대상이다. 이재명 정권은 즉각 독재 지원을 중단하라! 이영훈, 소강석, 김홍석과 고사모는 배교 행위를 회개하라! 기독교보는 저항 정신을 회복하고 위선적 보도를 중단하라!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선 멸망의 가증한 것들을 향해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외쳐야 한다. 그것만이 고신이 살고,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촛대는 반드시 이 땅에서 옮겨질 것이다.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잠언 31:8)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정우승 목사]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그렇게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도 인용을 하려니 부끄러운 한자말이 있다. 백절불굴(百折不屈)인데 백번 꺾어도 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떠한 어려움에도 결코 뜻한 바를 굽히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한국이 낳은 순교자이신 주기철목사님께서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죽음을 던지는 굳건한 의지를 남겼다. 동음이의어가 있는데 의사(義士)와 의사(醫師)의 차이가 크다. 앞의 의사(義士)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꿋꿋한 사람을 뜻하며, 뒤의 의사(醫師)는 자기가 가진 의술로 타인을 살리는 사람이다. 한 사람은 자기가 죽는 길이요, 또 한 사람은 남을 살리는 길이다.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의사(義士)와 의사(醫師) 중에 어떤 인물이 되기를 원하느냐고 물으면 자기 목숨을 내 놓는 의사(義士)가 되려는 청소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도 뜻한 바를 굽히지 않는 결연한 인물들이 더러 나온다. 가나안 땅의 분배를 두고 갈렙은 팔십오 세의 나이로 헤브론 땅을 달라고 요구를 한다. (여호수아14:12)에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라고 마치 출정식과도 같은 연설을 쏟아내었다. 이처럼 자기가 믿는 바를 끝까지 지켜나가는 행동은 쉽지 않다. 군산지방에서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귀암(龜岩)노인이라는 한말의 병사가 있다. 아무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귀암에서 살다 자결했기로 귀암노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 근위 제2연대 1대대 소속 하사졸(下士卒)로 당일 해산식장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항일의거에 참여한 저항군졸이다. 해산식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일본군은 어깨에 견장을 떼고 은사금 명목으로 80원씩 나누어 주었다. 그는 받은 은사금을 찢어버리고 다른 군졸들과 함께 무기고를 털어 당시 서소문 안에 있었던 군영을 뛰쳐나와 남대문 근처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 길로 일본군에게 쫓겨 창의문을 거쳐 삼남지방으로 내려가 약 2년 동안 의병으로 항일운동을 했다. 1909년 전라북도 줄포싸움에서 마지막으로 패하고, 이 때의 부상으로 평생 절름발이가 된 채 숨어 살았다. 그 무렵 금강하류 군산연안에 귀암이란 마을에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많이 와서 합숙을 하면서 호남지방에 선교를 하고 있었다. 쫓기던 그는 왜경들의 치외법권 지역인 이 선교사들의 숙소로 뛰어들어가 전후사정을 이야기하고 하인으로 고용해 줄 것을 애걸하였다. 이 절름발이 병사는 그날부터 여선교사들의 숙소 경호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군영에 있을 때 차고 다녔던 장도(長刀)를 보배처럼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서소문 탈영이래 한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그 장도를 뽑아 어깨에 둘러메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밤마다 숙사를 순찰했던 것이다. 귀암노인은 몸에 밴 군경 생활의 습성을 조금도 고치려 하지 않았다. 새벽 해 뜨기 전에 일어나 찬물을 끼얹고, 비록 절뚝거리지만 스스로의 구령에 따라 보조를 맞추었다. 또한 몸에 밴 군기 그대로 저녁에는 왕궁이 있는 북쪽을 향해 요배하는 것을 거르는 법이 없었다. 가까이 지내는 선교사들이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귀암노인이 급전이 필요하여 선교사에게 돈돔 빌려줄 것을 요청한다. 선교사는 이런 기회를 타서 몸에서 떼질 않는 장도를 저당으로 내놓기만 하면 돈을 빌려 주겠다고 하였다. 귀암노인은 한 사나흘 고민하다가 근 20여년 동안 잠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장도를 선교사에게 맡겼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 귀암노인은 아무말 없이 행적을 감춘 것이었다. 그의 실종과 더불어 저당으로 잡아둔 장도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장도를 놓아두었던 자리에 한 통의 편지가 놓여있었는데 펴 보니 ‘무사로서 양인 밑에 천한 삶을 이어가는 것도 치욕인데 칼마저 몸에서 떼어놓게 되었으니 이제는 잠시도 살아갈 면목이 없어졌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그날 선교사들은 귀암강 강변에서 자기의 장도로 자기 목을 찌르고 죽은 노병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한국의 무사정신에 강동한 선교사들은 귀암강 둔덕에 노인을 묻어주고 십자기를 세워 이 강골병사의 영혼이 영생할 것을 빌어주었다고 한다. 한 평생 다리를 절은 이 노인은 브니엘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이후 절었던 야곱이 떠오른다. (창세기32:31)에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라고 말씀한다. 야곱 역시 백절불굴의 기백이 있었다. (창세기32:26)에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라고 말씀한다. 백암노인이 만약 천국에 갔다면 함께 다리를 절었던 야곱과 함께 좋은 친구가 되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
[김경헌 목사] 총대 파송 하지 말자 – ‘부결’
노회의 제일 중요한 사명은 목사를 양성하는 것과 그 사역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보호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회기에 부총회장으로 세움을 받아 올해 총회장이 되어야 했던 김문훈 목사는 우리 부산서부노회에 속한 우리의 동역자입니다. 노회를 넘어 고신총회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큰 일을 감당하던 포도원교회를 목회하는 우리 노회의 아들입니다. 세상에서도 내 자식이 분명히 잘못한 일이지만 부모가 일단 책임을 지고 모든 것을 안고 가는 것이 선행된 다음, 그 자녀의 잘잘못을 논합니다. 안타까웠던 것은 목사의 어머니 격인 노회도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보다는 세상 여론의 눈치를 보며 노회가 안게 될 부담부터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다 연약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세상의 눈치를 본다는 것,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세상 눈치를 보고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을 마치 복음적인 사역처럼 생각하는데, 교회가 하나님의 인정보다 세상의 평가를 우선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안타까움을 넘어 참담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더럽혀지는 것과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개인의 자리 욕심과 계파의 정치 논리로 동료 목사라는 자들이 공의와 정의라는 명분으로 동료 목사의 비리를 수집하고 세상에 발설하여, 한 목사의 잘못을 빌미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와 정의를 주장하는 것 같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욕심과 세상보다 더 비열한 정치 논리가 뱀이 꽈리를 틀 듯 그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피해를 입고 지금도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이용한 간교한 무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며, 고신총회가 반드시 밝혀내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대를 살며 목회하게 될 후배와 교회들을 위해서도 반드시 밝혀내어 교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전례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투서를 돌리고 연명하는 것조차 불법입니다. 특히 우리 고신은 세상 법정에 고발하는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아팠던 역사가 있습니다. 교회를 정화하고 공의와 정의를 원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성경에 기초한 교회법을 따라 정당한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현재 이 문제로 가장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포도원교회일 것입니다. 김문훈 목사도 오늘의 포도원교회가 없었다면 우리가 비난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포도원교회를 사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교회의 부름을 받아 목회하는 목사에게는 최고의 형벌입니다. 어려움과 위기에 처해 있는 포도원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포도원교회의 처절한 노력과 수고를 조금 더 지켜보십시다. 아마 많은 분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 의견이 나오고 여러 제안이 있었던 것도 모두 어머니 노회로서의 책임감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우리 노회 목사회원 1번으로서 같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금이라도 총회와 한국교회 앞에 우리 노회가 책임지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총회 총대로 나가고 총회에서 직분을 맡아 봉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회의 추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총회 총대를 추천한 노회는 총대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동시에 노회는 고신총회에 대한 책임도 있습니다. 노회가 책임을 지는데 눈 가리고 아웅하면 더 큰 웃음거리가 되고, 그렇다고 총회에 대한 책임도 회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우리 노회는 올해 총회 회계로 수고하셔야 하는 장로님이 있고, 선출직 이사도 있으며, 특별국 국원도 있고, 총회를 운영하는 상임위원회 위원장도 있습니다. 고신총회의 장자로 자부하는 우리 부산서부노회가 총회 임원과 총회 선출직 이사, 특별국 국원과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제외하고 이번 총회 회기에는 총대를 파송하지 않는 것으로, 고신총회 앞에 최소한의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였으면 합니다. 이 안이 노회에서 받아들여진다면 저는 헌법위원회 특별국 국원이지만 총대로 가지 않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총회 총대 선정에 대한 회의 진행 발언에 대해 정식으로 동의안을 냅니다. 이번 총회 회기에 우리 부산서부노회는 총회 임원 장로, 선출직 이사, 총회 특별국원, 총회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제외하고 총대를 파송하지 않기로 동의합니다.※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연속기고7] 이만열의 이승만 대통령 비하와 김구 성역화의 위험한 이분법
서론: 건국의 아버지를 지우고 실패한 낭만을 신격화하다 지난 연재를 통해 필자는 이만열 교수가 '친일 프레임'을 어떻게 악용하여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들을 사상적으로 숙청했는지 폭로했다. 그러나 이만열 사관의 진정한 목적지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인 이승만 대통령을 철저히 폄훼하고, 그 대척점에 서 있던 김구 선생을 신격화하여 성도들에게 그릇된 국가관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낙인찍는 자학적 사관의 핵심 동력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상적 오염이 고신 교단 내부로 깊숙이 침투했다는 점이다. 소위 '고신을 사랑하는 모임(고사모)'을 자처하는 이들이 등장하고, 수많은 목회자나 심지어 총회장까지도 제주 4.3 사건의 본질 왜곡이나 현 이재명 정권의 정교분리 오독, 차별금지법 등에 대해 침묵하거나 동조하게 만드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다. 1. 김구의 독립 투쟁과 친북적 반(反)건국 행위 사이의 엄격한 구분 이만열은 백범 김구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바친 고귀한 독립 투쟁의 헌신을 이용해, 1948년 건국 반대라는 명백한 정치적 실책까지 '민족적 정의'로 포장하는 논리를 펼친다. 그는 김구가 선택한 남북협상 노선을 분단을 막기 위한 유일한 민족적 정통성을 지닌 길로 평가하며, 반대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노선은 분단을 고착화한 행위로 비판해 왔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애국심은 오직 독립운동의 현장까지만 인정될 수 있는 것이며, 건국 과정에서의 친북적 행보는 결코 애국으로 미화될 수 없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그는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이야말로 민족 분단을 막으려 했던 정통성 있는 대안이었다고 평가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 역시 이승만의 단독정부가 아닌 김구와 김규식이 추구했던 통일 정부 수립 노력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등) 2) [비평]: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시기 헌신은 존경받아 마땅하나, 1948년 건국 과정에서의 행태는 단호히 비판받아야 한다. 당시 김구는 김일성이 쳐놓은 통일전선전술의 덫에 빠져 남북협상이라는 명분 아래 대한민국 건국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이는 소련과 김일성의 적화 야욕에 이용당한 역사적 과오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자유 민주의 기틀을 흔든 반건국적 행위에 가깝다. 이만열은 이러한 실체를 외면한 채 김구의 실패한 행보를 민족의 정통성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2. 제주 4.3 사건 왜곡: 공산 폭동을 ‘미군에 대한 항거’로 둔갑시키다 이만열식 사관이 낳은 가장 파괴적인 결과물은 제주 4.3 사건의 본질을 뒤바꾼 조직적 역사 공정이다. 그는 4.3을 단독 정부 수립에 저항한 민중들의 투쟁이자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사상은 고신 내 유력 목회자들에게까지 전염되었다. 필자는 과거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원로)가 손봉호 교수의 영향을 받은 일부 유력 목회자들과 함께 제주 전적지를 탐방하며, "제주 4.3 사건은 미군의 말발굽 아래 희생당한 제주 도민들이 미군과 이승만 정권에 항거한 저항"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사실을 한 참석자로부터 직접 듣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특히 4.3의 주동자 김달삼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1948년 4월 3일 새벽, 제주 전역의 경찰지소를 습격하며 무장 폭동을 일으켰고 수많은 경찰과 우익 인사, 양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폭동 직후 북한으로 도주한 그는 김일성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이후 6.25 전쟁 직전인 1949년 말, 다시 유격대장으로 남파되어 활동하다가 1950년 3월 20일 강원도 정선 승지골(일명 '김달삼 모가지 잘린 골')에서 광복군 출신 김관오 연대장이 이끄는 국군 제8사단에 의해 사살되었다. 김달삼이 일으킨 제주 4.3 사건이 어떻게 '민주 항쟁'인가? 이 명백한 반란 수괴를 미화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그는 제주 4.3을 통일 정부 수립을 갈망하던 민중들이 분단 노선에 저항하며 일어난 사건으로 규정하며, 그 비극의 책임을 이승만 정권과 외세인 미군에 돌린다. 또한 5.10 선거 거부를 민족 자결주의적 저항의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이만열, 『한국 현대사와 기독교』 등) 2) [비평]: 4.3의 본질은 공산 세력의 무장 반란이다. 특히 당시 공산 폭도들에 의해 자행된 '기독교 순교적 진실'을 이만열은 침묵한다. 제주 최초의 순교자 이도종 목사는 공산 폭도들에게 생매장당했고, 삼양교회 김임종 집사 등 수많은 성도가 살해되었다. 당시 제주 27개 교회 중 12개 교회가 소실된 이 참혹한 잔혹사를 외면하고 공산 반란군 주동자를 '민주 항쟁가'로 미화하는 것은 기독교 역사학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린 반역행위다. 이런 제주 4.3 사건을 민주항쟁이라며 전적지 순례를 한 이동원 목사 등 일부 귀가 얇은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이만열식 역사왜곡에서 속히 벗어나기를 촉구한다. 3. 이승만의 통찰을 거부하는 좌파적 역사 공정 이만열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며, 이를 단순히 '정부 수립'으로 폄하한다. 그는 대한민국이 1919년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이미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며 2019년을 '건국 100주년'으로 기념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쳐왔다. 그러나 이는 국제법상 국가의 3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이 실재하지 않았던 임시정부의 한계를 무시한 감성적 민족주의에 불과하다. 만약 1919년에 이미 나라가 세워졌다면, 우리 선조들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찾기 위해 왜 그토록 피 흘려 독립운동을 했단 말인가? 건국된 나라를 되찾는 것은 '광복'이지 '독립운동'이 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 ①: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민족 분단을 선택한 인물이며, 친일 세력을 비호하여 건국 정통성을 훼손했다.” (출처: 『우리 역사 500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만열의 주장 요지 ②: “대한민국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미 건국되었다.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주장하는 것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분단을 정당화하는 반역사적 행위다.” (출처: 이만열 기고 및 ‘건국 100주년’ 관련 강연 요지) 2) [비평]:이만열의 '1919년 건국설'은 듣기엔 그럴듯하나 치명적인 논리적 파탄에 직면한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 1919년에 이미 나라가 건국되었다면, 우리 선조들은 '이미 건국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왜 그토록 피 흘려 독립운동을 했단 말인가? 건국이 이미 완료되었다면 독립운동은 존재할 이유가 없으며, 이는 선조들의 고귀한 투쟁을 '이미 있는 것을 찾는' 무의미한 반복으로 격하시키는 궤변이다. 국제법적으로 국가는 국민, 영토, 주권이라는 3요소가 확립되어야 한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나라를 세우기 위한 '준비 기구'였을 뿐, 실질적인 영토를 통치하거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1948년 8월 15일 건국은 한반도 내에 실체적인 국민이 구성되고, 영토에 대한 통치권이 확립되었으며, 대외적으로 주권을 선포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실체가 완성된 기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국가의 토대 위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세웠고, '한미동맹'과 '기독교 입국론'이라는 강력한 안전판을 구축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북한의 공산 정권과 차별화되는 정통성의 근거다. 이만열은 이승만을 친일파 비호자로 매도하며 건국의 정통성을 깎아내리지만, 정작 북한 정권 핵심부에 포진했던 김영주, 강양욱, 정준택 같은 골수 친일 부역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한다. 결국, 건국을 분단의 원죄로 몰아세우는 그의 억지는 집안에 불길이 닥칠 때 남은 가족이라도 살리려 방화문을 닫은 소방관을 향해, '왜 가족이 못 만나게 가로막느냐'며 불을 지른 방화범 대신 소방관을 꾸짖는 꼴이다. 결론: 거짓된 이분법을 깨고 건국 정신을 회복하라 이만열 교수가 쳐놓은 이승만과 김구의 거짓된 이분법, 그리고 제주 4.3 사건의 왜곡은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파괴하려는 사상적 덫이다. 이 덫에 걸린 상당수 복음주의 목회자들과 '자칭 고사모' 목사들은 고신의 순결한 정신을 좌경화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다. 우리는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기 애국심은 존중하되, 1948년 건국 과정에서 김일성에게 철저히 이용당해 이승만의 건국을 방해한 그의 친북적 역사적 과오와는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자학 사관을 걷어내지 않는 한 고신과 한국 교회는 결코 바로 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승만을 통해 허락하신 자유 대한민국과 고신 교회의 정통성을 지켜내기 위해 이만열의 왜곡된 역사인식과 선전선동의 칼날을 반드시 꺾어야만 한다. 그것만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개혁주의 정절을 회복하는 길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연속기고6] 이만열의 친일 프레임과 역사적 살인: 건국 주역들을 향한 사상적 테러
서론:손봉호의 윤리가 씨앗이라면, 이만열의 사관은 그 독초의 토양이다 앞선 기고(1~5번)를 통해 필자는 손봉호 교수가 기독교 윤리라는 가면을 쓰고 한국 교회를 좌경화의 늪으로 어떻게 인도했는지 파헤쳤다. 그러나 손 교수의 윤리 담론이 고신과 SFC 내부에서 독버섯처럼 번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에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치욕의 역사로 규정한 이만열 교수의 왜곡된 역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만열은 친일 청산이라는 도덕적 결벽증을 무기 삼아 건국의 정통성을 난도질했으며, 고신 정신의 본질인 순교 신앙을 좌파적 민족주의 투쟁으로 변질시킨 장본인이다. 1. 국가 상징과 호국 영웅을 향한 인격적 살인 이만열 교수가 주도한 『친일인명사전』은 객관적 사료에 근거한 학술적 결과물이 아니라 특정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사상적 숙청이자 정치적 낙인찍기의 산물이다. 그는 역사의 입체성을 무시하고 오직 '친일'이라는 단일한 잣대만을 휘둘러 대한민국 건국의 기틀을 닦은 거목들을 사상적으로 매장하는 데 몰두하였다. 이만열의 주장 ①:“백선엽은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독립군을 때려잡은 반민족 행위자다. 그의 공로를 기리는 것은 민족 정기를 훼손하는 일이다.” (출처: 이만열, 「백선엽의 친일 행적과 국립묘지 안장 문제」, 2020년 언론 기고 및 강연 요약) 이만열의 주장 ②: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는 친일파다. 친일 잔재인 애국가를 국가로 부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출처: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지식산업사, 1991) [비평]:이는 일제강점기라는 처절한 역사의 맥락을 무시한 처사이다. 6.25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백선엽 장군을 간도특설대 경력만으로 단죄하는 것은 국군의 정통성을 파괴하려는 시도이다. 당시 간도특설대의 주요 토벌 대상은 독립군이 아닌 중공군과 팔로군이었으며, 1930년대 중반 이후 만주의 독립군 세력은 이미 궤멸되거나 소련으로 이동한 상태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철저히 묵살되었다. 또한 애국가를 공격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상징 자체를 부정하려는 고도의 사상적 테러이자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역사 부정주의이다. 2. 근대화의 선구자들을 향한 주홍글씨와 '선택적 단죄'의 이중성 이만열은 교육, 언론, 문학 등 각 분야에서 대한민국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거인들을 모조리 친일 부역자로 매도하며 그들의 사회적 성취를 부정하였다. 그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려 했던 선구자들의 고뇌는 외면한 채 결과론적인 비판만을 쏟아냈다. 이만열의 주장 ①: “김성수, 김활란 등은 일제에 협력한 반민족 인사들이다. 그들이 세운 교육·언론 기관은 친일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출처: 이만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역사적 의의」, 민족문제연구소 강연, 2009) 이만열의 주장 ②: “민족 지성이라 불리는 최남선과 이광수 역시 결국 변절한 부역자들에 불과하다.” (출처: 이만열, 『우리 역사 500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바다출판사, 2000) [비평]:이들이 닦아놓은 근대 문명의 토대가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이만열의 '선택적 단죄'이다. 대한민국 건국 세력의 행적은 현미경으로 파헤치면서도, 정작 북한 정권 핵심부에 포진했던 수많은 친일 인사들(김일성의 동생 김영주, 부주석 김차승 등)에 대해서는 기이할 정도로 침묵한다. 민족정기를 말하면서 북한의 노골적인 친일파 등용은 눈감아주는 그의 역사학은 공정한 학문이 아니라 특정 진영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를 흉기로 사용한 정치 선동일 뿐이다. 3. 순교 신앙을 민족 해방 투쟁으로 격하시킨 영적 범죄 이만열 교수의 가장 큰 해악은 고신의 자랑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신앙적 성격을 왜곡하여 세속적 민족주의의 틀 안으로 가두어버린 데 있다. 그는 선배 목회자들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당했던 고난을 단순한 항일 운동의 일종으로 해석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초월적 가치를 훼손하였다. 이만열의 주장 ①: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민족 정기를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적 항일 투쟁의 연장선에 있다.” (출처: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지식산업사, 1991) 이만열의 주장 ②: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사명은 민족의 고난과 함께하며 사회를 변혁하는 데 있다.” (출처: 이만열, 「기독교 역사관의 재정립」, 기독교역사연구소 세미나 강연, 2010) [비평]:고신 선배들의 저항은 민족주의 차원의 항일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1계명을 지키기 위해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을 수호하려 했던 거룩한 '신앙 수호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만열은 이를 세속적인 민족 해방 투쟁으로 격하시켜 신앙의 본질을 변질시켰다. 이러한 영적 왜곡은 SFC 간사들과 신학생들이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보다 좌파적 민중사관에 더 열광하게 만드는 사상적 통로가 되었다. 신앙의 선배들이 피로 지킨 제단 위에 이만열은 좌파 이데올로기의 향로를 피워 올린 것이다. 결론:고신의 심장을 겨눈 이만열의 칼을 꺾어야 한다 이만열 교수는 기독교 역사학자라는 학문적 권위를 누리며 정작 고신의 뿌리인 자유민주주의와 성경적 보수 신학의 기틀을 허무는 데 앞장서 왔다. 그의 사상은 성경이 말하는 절대 진리가 아니라 특정 정치 세력의 논리를 대변하는 변증법적 역사론에 불과하다. 손봉호의 윤리가 한국 교회의 손발을 묶었다면 이만열의 사관은 한국 교회의 머리와 심장을 좌경화로 세뇌시켰다. 이제 고신 총회와 깨어있는 성도들은 직시해야 한다. 이만열 식의 자학적 역사관을 단호히 배격하고 하나님께서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허락하신 자유 대한민국과 고신 교회의 정통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 거짓된 사슬을 끊어낼 때 비로소 고신의 순교 정신이 다시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고] "부활절 연합예배에서의 이영훈, 소강석의 망언과 이에 대해 침묵하는 자칭 고사모를 강력 규탄한다"
고명길 목사 (고신애국지도자연합 전문위원장) 마태복음 24장,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하신 예수님의 경고가 오늘날 대한민국 강단에서 재현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2026년 4월 5일 부활절, 한국 교회의 심장부라 자부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단에서 우리는 거짓과 술수의 권력자가 등판하는 참담한 광경을 목도했다. 그러나 더 절망적인 것은, 평소 강단의 거룩함을 외치며 동료 목회자에게 돌을 던지던 자칭 고사모(고신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모임) 목사들의 굴욕적인 침묵이다. 1. 손현보 목사의 선지자적 외침: 고사모의 광기 어린 정죄 과거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는 강단에서 “이재명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외쳤다. 이는 특정 개인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고 차별금지법 등을 통해 교회를 억압하려는 거대 세력에 대한 선지자적 경고였다. 또한 그는 예배 후 교육감 후보를 소개하며 기독교적 가치를 수호할 것을 독려했다. 당시 고사모 목사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선거법 위반과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강대상에서 정치적 발언을 했다고 손 목사를 총공격했다. 심지어 고신 총회 석상에서까지 나서서 손 목사를 비판하며 징계를 요구하고, 일간지에 광고를 내며 그를 신학적 타락자로 몰아세웠다. 그들에게 손현보의 워딩은 반드시 척결해야 할 정치 선동이었다. 2. 이영훈·소강석의 아부의 향연: 부활절 거룩한 성전의 참사 그렇다면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 강단에서 벌어진 일은 무엇인가. 이영훈 목사와 소강석 목사는 차별금지법과 교회해체법을 주도하는 이재명을 강단에 세우고 아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이영훈 목사는 이재명을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시고 한국을 이끌고 계신 분"이라고 찬양적 소개를 했다. 소강석 목사는 “박수 안치는 사람 누구예요. 이따 좀 남으라"고 윽박질렀고, "실개천 출신이지만 결코 그 개천을 잊지 않으시며 국민화합과 실용정치에 올인하는 모습이 한국 교회 보기에도 참 아름답습니다”라는 망언을 쏟아냈다. 수많은 사법적 의혹과 교회 탄압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향해 ‘무거운 짐을 짊어 지셨다’, ‘아름답습니다’ 라는 찬사를 보낸 것은 아부를 넘어선 영적 배교다. 3. 성도를 유린한 살벌한 검문과 신사참배의 데자뷔 강단 아래의 풍경은 더욱 처참했다. 현장 성도의 증언에 따르면, 교회 입구에서 권력자의 안전을 위해 성도의 개인 노트북 비밀번호를 강제로 풀게 하고 개인 다이어리까지 뒤지는 만행이 저질러졌다. 예배의 주인인 하나님보다 권력자의 안위가 우선시된 현장은 중국 공산당 치하의 예배와 다를 바 없었다. 이 모습은 과거 일제 강점기, 강단에 일장기를 걸고 천황을 향해 절하던 신사참배의 현장과 겹쳐진다. 당시 친일 목사들은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명분으로 내세워 우상에게 무릎 꿇었다. 오늘날 이영훈·소강석 목사가 차별금지법과 교회해체법을 획책하는 권력자에게 강단을 내어준 것은, 형태만 다를 뿐 살아있는 우상에게 제사상을 차려준 현대판 신사참배와 다를 바 없다. 4. 고사모의 선택적 침묵: 당신들의 신학은 파산했다 우리는 묻는다. 손현보 목사의 직언에는 선거법 위반이라며 총회 석상에서까지 칼을 휘두르던 고사모 목사들은 왜 이 명백한 강단 유린 사건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는가. 손현보의 회개 촉구는 징계 대상이고, 이영훈·소강석의 굴종적 아부는 연합인가? 교육감 후보 소개는 강단 오염이고, 거짓의 아비 이재명의 축사는 한국 교회의 영광인가? 이재명의 실체를 경고하는 손현보의 말은 정치라며 정죄하더니, 이재명이 아름답다며 박수를 강요하는 이영훈·소강석의 말에는 침묵하는 고사모. 당신들의 정교분리는 신학적 원칙이 아니라, 자신들의 반성경적 논리를 강요했던 비겁한 고무줄 잣대였음이 만천하에 증명되었다. 당신들이야말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한상동 목사 등을 비판한 신사참배 가결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5. 고신 정신은 권력 앞의 비겁한 침묵이 아니다 고신 정신은 신사참배라는 거대 권력 앞에 목숨을 걸고 '아니오'를 외쳤던 선배들의 피 위에 서 있다. 교회 파괴자인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느라 성도들을 유린하고 강단을 팔아넘긴 이 못된 현대판 신사참배자들을 향해 입 닫고 침묵하는 것은 고신 정신과 선배들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고사모 목사들에게 강력히 요구한다. 손현보 목사에게 퍼부었던 그 서슬 퍼런 비판의 잣대를 이영훈·소강석 목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라. 즉각 성명서를 내고 그들의 배교적 행태에 대한 회개와 책임을 요구하라. 그리고 그들의 교회 앞에도 가서 정교분리를 어겼다는 당신들의 논리대로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가서 시위도 하고 기도회도 열라. 거짓의 아비가 부활절 강단에 선 이 엄중한 사태 앞에서 끝까지 '입꾹닫'하고 침묵한다면, 당신들은 더 이상 고신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입에 담을 자격도 없는 철부지 목사들이고 장로들일 뿐이다. 부활절 강단은 권력자의 무대가 결코 아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만이 영광받을 거룩한 곳이다. 선지자적 외침이 사라지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강단은 더 이상 교회의 강단이 아니다.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선 이재명과 그 무리들에 대해 “당신이 그 사람이라”, “저 여우에게 가서 이르라”는 경고의 말씀을 다 같이 강하게 외쳐야 한다. 그것만이 고신이 살고,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길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
[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 ‘욜로(YOLO)’의 시대를 넘어, 부활의 참된 소망으로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욜로(YOLO)’라는 말이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이 말은 “인생은 한 번뿐이니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며 살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 땅의 삶이 전부인 양, 오늘을 마음껏 소비하고 즐기라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길어진 100세 시대라 할지라도 지나고 보면 인생은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날아가는 화살과 같이 쏜살같이 흘러갑니다. 만약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이 땅의 삶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면 그 짧은 여정의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지독한 허무와 공허 그리고 죽음 앞의 우울함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인 ‘부활’은 이 허무한 인생의 마침표를 영원한 생명의 쉼표로 바꾸어 놓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겨울이 되어 얼어붙었던 가지에 봄이 되면 다시 잎새가 싹트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영원한 삶이 예비되어 있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단지 죽음 이후의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는 강력한 원동력입니다. 슬픔을 사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 릴런드 스탠퍼드는 수재였던 외아들을 갑자기 잃고 극도의 슬픔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으니 저 대신 세상의 청년들을 도와주세요”라는 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그의 인생관은 완전히 바뀝니다. 아들이 천국에 살아있다는 부활의 소망을 품게 된 그는 당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헌납해 오늘날의 명문 스탠퍼드 대학을 세웠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개인의 절망을 넘어 수많은 젊은이를 살리는 위대한 헌신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어느 호스피스 병동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젊은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 남긴 편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가, 엄마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향해 가는 문이란다. 기나긴 겨울을 이기고 봄에 피어나는 저 꽃들처럼 우리도 눈물 없는 그곳에서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이처럼 부활의 소망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위대한 사랑과 용기를 현재의 삶 속에 불어넣습니다. 성경은 부활한 우리가 누릴 미래에 대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라고 약속합니다. 부활은 눈물도 사망도 애통함도 없는 완벽하고 행복한 삶이 열리는 기적입니다. 이 땅의 쾌락만을 좇는 ‘욜로’의 허무함을 넘어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가는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2026년 부활절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참된 기쁨과 미래에 대한 찬란한 소망이 상처받고 지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가득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
- 오피니언
- 기타
-
[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
-
[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 부활절을 맞이하는 믿음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세번의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ㅡ.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신 후 처음의 사람에게 1.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창1;28 하나님이 아닌 존재인 뱀이 처음의 사람에게 찾아와 그들의 욕구를 채우도록하고 뱀의 사상을 따르게 한 후..세상은 어둡게 변해 버렸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2.정녕 죽으리라..ㅡ창2;17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찌니라,ㅡ창3;19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고, 밭은 소출을 내지 않고 행복했던 가정에 행복은 간 곳 없고, 형이 동생을 해하고 장례를 치르고 부부는 갈등을 겪고,,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한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 지금도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고, 영생의 나라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 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ㅡ 요11;25-2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시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주시고 ㅡ무덤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십니다.ㅡ요528. 죽음으로 가는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ㅡ 요3;16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의 댓가를 치르고서야 우리 믿는 자들이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ㅡ그가 찔리고 그가 상하고 그가 징계를 받고, 그가 체찍에 맞음은 우리 허물과 죄와 불안과 걱정과 공포, 병 때문인 것을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ㅡ사53;5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하셨고. 사53;6.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들의 저주가 그를 믿음으로 물러가는 복된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3;13-14 이 말씀이 부활절을 맞이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힘이 되고 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
- 오피니언
- 기타
-
[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
-
[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전서 1:3) 할렐루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온 마음 다해 찬양합니다. 2026년의 봄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에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이웃들의 삶 위에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죽음의 권세도 이길 수 있다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처럼 온 세상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경제적인 어려움들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빈 무덤의 승리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과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거룩한 백성된 우리는 생명의 부활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이번 부활절을 시작으로 경남 지역 구석구석에 산 소망을 전하는 통로로 소외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무너진 마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 부활의 아침은 어둠이 지나고 반드시 빛이 온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자 확증입니다. 비록 현실의 고난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지라도,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신뢰하고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갈등이 있는 곳에 화해를 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다시 한번 우리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이 기쁜 소식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 오피니언
- 기타
-
[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
-
[부활절 메시지] 통영기연 곽만섭 목사
- 사랑하는 경남신문 독자들과 경남 성도들께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아침에 선 교회와 성도들이 이 놀라운 생명의 복음을 다시 붙들며, 믿음 가운데 새 힘을 얻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나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의 상황은 여전히 우리를 흔들지만, 주님께서 살아계신 한 교회는 무너지지 않으며 우리의 믿음 또한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능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위에 부활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여, 각 가정과 삶의 자리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일상 속에서 부활의 기쁨이 실제가 되어, 지친 마음을 회복시키고 서로를 위로하는 은혜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역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흘려보내며, 말과 삶으로 복음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작은 섬김과 나눔이 모여 이웃에게는 위로가 되고, 사회에는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어둠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의 은혜로 날마다 새 힘을 얻고, 기쁨으로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여러분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
- 오피니언
- 기타
-
[부활절 메시지] 통영기연 곽만섭 목사
-
-
[부활절 메시지] 창녕기연 안덕수 목사
- 부활에 아침에 고백할 승리의 고백 매해 맞이하는 부활절인데 올해는 더욱더 그 의미가 깊이 다가온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의 한말씀, 다이루었다(요19:30)는 말씀이 마음속에서 계속 울린다. 모든것을 하나님께맡기시고, 다 이루심의 완성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그분의 마지막은 승리와 완성의 선언이셨다. “다 이루었다.”이 한마디에는 완전한 지불의 선언이다. 예수는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값을 하나하나 치르셨다. 낮은 땅에 오심, 모욕과 조롱, 가시 면류관, 십자가의 고통까지 치르시면서 그 모든 과정은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는 길이었다. 이때 휘장이 갈라지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무너졌다.죄로 인해 닫혀 있던 길이 열렸고, 하나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다가오시는 분이 되셨다.어쩌면 우리는 이 장면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두 팔을 벌리사 안아주신 사건이다. “이제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 십자가는 단지 고난의 상징에서 용서와 초대의 상징이 된것이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고백은 죽음을 앞둔 체념이 아니다.사명을 완수한 자의 평안이며, 전적인 신뢰의 표현이다. 우리는 흔히 ‘안식’을 쉼으로 이해한다.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안식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인간은 여섯 날 동안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안식일은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날이라는 것이다.이 통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우리는 끊임없이 계획하고, 통제하려 하며, 결과를 붙잡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커진다.그러나 예수의 마지막 고백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준다. “맡겨라.”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괴로움과 눈물의 시간이 찾아올 때, 심지어 과거의 상처와 실패까지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안식을 경험한다. 부활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승리의 선언을 한다. 십자가는 겉으로 보면 패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죄와 죽음을 이긴 승리가 담겨 있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말한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따라서 믿음의 삶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삶.붙잡으려 하기보다 의탁하는 삶.그리고 그 고백은 매주 예배 속에서, 또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반복되어야 한다. 내 삶을 주께 맡김을 통해 신앙은 완성되어 간다. 참된 안식과 승리를 경험하게 되기실 소망합니다.
-
- 오피니언
- 기타
-
[부활절 메시지] 창녕기연 안덕수 목사
-
-
[부활절 메시지] 진해기연 정용기 목사
- 사랑하는 진해와 경남 지역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우리의 믿음의 핵심으로서, 절망 가운데 있는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소망입니다.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현재의 능력이며, 미래를 향한 확실한 약속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고난과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시대는 세계 각국의 이기주의와 전쟁의 소식, 경제적 어려움과 이념의 대립, 빈부와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각자의 삶에 놓인 무거운 짐들로 인해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려움 속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평강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지역사회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부활 신앙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생명을 받은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 희망을, 상처의 자리에 치유를, 분열의 자리에 화해를 이루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진해와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가 한마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나누며 이 땅 가운데 생명의 복음을 더욱 힘있게 전하는 증인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6년 부활절 진해기독교연합회 회장 정용기 목사
-
- 오피니언
- 기타
-
[부활절 메시지] 진해기연 정용기 목사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
[신년 묵상] 최성은 목사 - 상생의 아름다움과 복(시133:1-3)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6년 새해를 맞아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역 위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새해를 시작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혜요, 기적이며,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지난 한 해 수많은 어려움과 위험한 순간들을 지나 이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해 함께 예배드리는 이 시간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특별히 지난 한 해는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갈등과 불안이 가중된 시간이었고, 경북 산불과 경남 집중호우 등 여러 자연재해가 겹쳐 찾아온 해였습니다. 현장을 직접 보며 막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함께 예배의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본문 시편 133편은 ‘성전에 오르는 노래’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이 노래는 시편 120편,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라는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곧 성전에 오르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수많은 혼란과 환난을 이기고 예배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시편 133편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터져 나오는 시인의 감격의 탄성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이 감격과 감사가 오늘 우리에게도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해의 환란을 지나 2026년을 새롭게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 찬양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시편 133편은 세 절에 불과한 짧은 시이지만, 하나님께서 연합하여 동거하는 교회 공동체에 주시는 복, 곧 상생의 복을 가장 아름답게 노래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의 공동체가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 연합의 공동체, 상생의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형제 된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고 상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을 이처럼 아름답게 보시고 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연합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연합은 단순히 한 집안의 형제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그 출신 배경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본부인의 자녀도 있었고, 여종의 몸에서 난 자녀도 있었으며, 요셉 지파는 애굽 여인에게서 태어난 후손이었습니다. 분열하기에 너무나 쉬운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 곧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배하는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 한 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연합은 그들이 예배하는 하나님을 닮은 연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교회를 세우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우리가 하나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고, 사도 바울 역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했습니다. 형제의 연합은 하나님께 선한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형제가 함께 동거하며 상생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탐욕과 이기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 하나님을 닮은 교회들이 연합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복음의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연합한 공동체에 주시는 복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회복의 복입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라는 말씀은 대제사장의 임직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와 회복을 선포하는 존재였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모습을 대제사장의 임직에 비유한 것은, 함께하는 곳에 회복의 능력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풍성한 생명의 복입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물이 귀한 이스라엘 땅에서 헐몬산의 이슬은 온 땅을 적셔 생명과 열매를 맺게 하는 은혜였습니다. 시인은 형제가 함께하며 상생하는 모습을 이 헐몬의 이슬에 비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 되는 곳, 상생하는 공동체에 임하셔서 풍성한 생명의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초대교회가 언제 강한 교회로 세워졌습니까? 거대한 건물이나 체계적인 조직이 있어서가 아니라, 함께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할 때였습니다. 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상생으로 함께할 때 오늘도 성령 하나님께서 교회 위에 풍성한 생명의 능력을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설 수 없다.” 말씀을 맺습니다. 지난 경남 지역 집중호우 당시, 총회 긴급구조단이 산청의 한 피해 현장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물에 잠긴 비닐하우스와 진흙에 뒤덮인 작물을 보며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의 한 장로님께서 오히려 “괜찮습니다. 천국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로하러 갔던 우리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경험하고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지난 한 해의 모든 시련을 믿음으로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새해를 맞아 형제 되어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회복의 복과 풍성한 생명의 복을 더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2026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으로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는 교회, 상생으로 세상을 섬기는 성도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위 설교문은 1월 2일, 고신 지도자 초청 신년 인사회에서 최성은 목사의 설교를 옮긴 것 입니다.
-
- 오피니언
- 설교/강의
-
[신년 묵상] 최성은 목사 - 상생의 아름다움과 복(시133:1-3)
-
-
[특별기고] 교회와 성도의 정치참여에 대하여
- 들어가며 필자의 고향은 진주시 정촌면 관봉리에 있는 진주 강씨의 집성촌이며, 우리 가정이 복음화된 것은 1932년경으로 추정된다. 할머니가 가장 먼저 결신 하신 후 증조할머니를 설복하셨으며 할머니와 증조할머니가 주일 옥봉리교회(현 진주교회)로 발걸음을 옮기시면서 우리 가정에 복음의 역사가 시작하였다. 할머니는 주변 친척들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그 와중에 불치의 병을 갖고 있던 어린 시조카가 계셨는데 그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며 복음을 전하셨다. 그분은 저에게는 3종 숙이 되시며 후일 저명한 목사님이 되셨다. 두 분이 함께 고향 동네의 뒤편 작은 골짜기의 굴에서 함께 기도하면서 당시 치유가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병이 치유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가정이 복음화되었으며 또 믿는 친척이 늘어 갔다. 할머니는 우리 집 텃밭에 교회당을 세웠는데 그 교회가 지금 정촌면 관봉리에 있는 관봉교회로 1934년에 세워졌다. 그 교회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친척들과 함께 옥봉리교회당에서 나오신 조사(?)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는데 누군지 알고 싶어서 확인하였더니 진주교회의 초기기록이 6.25 전쟁으로 불타 누군지 밝힐 수 없었다. 그런데 방해자가 생겼다. 집안의 촌수가 머지않은 친척 어른 세 분이 예수 믿는다고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교회당을 파손하기도 하고 집에 와서 그들에게 집안 형님이 되시는 저의 할아버지에게 폭언하는 일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였다. 문제는 이들이 나중 알고 보니 공산주의자들(속칭 지방빨갱이)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보도연맹 사건 때 몸을 피해 숨어있다가 동네를 인민군이 점령한 후 붉은 완장을 차고 나타났다. 인민군 치하에서 할머니는 교회에서 혼자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며 성경을 읽고 계셨고, 아버지는 현재의 이장 격인 구장을 하시면서 젊은이가 피난을 가고 남은 가정 - 집성촌이니 결국 집안사람들 - 을 돌보고 계셨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1950년 가을 추석 직전에 인민군들이 도주하였는데 이때 이들도 함께 도주하였으며 곧이어 국군과 경찰이 진주해 들어 왔다. 어떤 연유인지 국군과 경찰은 교회를 지키고 계셨던 할머니와 구장을 하던 아버지를 부역 혐의자로 체포하였고 추석 후 즉결 처형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인민군들이 급히 도주하면서 남겨 놓고 간 문서 중에 할머니와 아버지를 추석 후에 인민재판을 통하여 처형하기로 한 내용의 인민재판 문서가 발견되어 할머니와 아버지는 국군 지휘관의 사과와 함께 석방되었다. 놀랍게도 그 고발자들은 할머니가 예수 믿는다고 우리 집과 관봉교회에 와서 행패를 부리던 그들 3인이었다. 아버지는 촌수가 머지않은 친족으로부터 배신당했다는 충격으로 고향을 떠나기로 하고 우리 가정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마산으로 거주를 옮겼다. 지금의 마산합포구 성호동 산비탈에 주거를 정하였는데 출석할 수 있는 교회는 문창교회였다. 당시 문창교회는 총회파와 고려파가 교회당 소유권을 갖기 위하여 소송이 시작된 교회였다. 총회파는 김석찬 목사님이셨고 고려파는 송상석 목사님이셨는데 피난민으로 문창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은 대부분 총회파를 지지하였으나, 할머니는 일제 하의 경험으로 신사참배는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는 현재의 고신 교회인 고려파 신앙을 택하셨고 우리 가정은 고려파의 교인이 되었다. 따라서 나는 태어나면서 고려파 교인이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고려파 교인이 아닌 적이 없었으며, 고려파가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고려파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로부터 핍박받은 간접 경험자, 또 해방 후 6.25 전쟁이 마칠 때까지 공산주의가 나라 전체뿐만 아니라 교회에 어떤 핍박을 하였는지 역사와 교회사를 통하여 알고 있으므로 필자는 분명히 반공주의자이다. 이렇게 나 자신을 밝히는 것은 이 글에 따른 불필요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함이다. 보수개혁주의 신앙인으로 드리는 질문 나는 고신 교회의 보수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신봉함을 다시 한번 밝히면서 최근 고신 교회 내부에서 이른바 교회의 정치참여에 관한 논쟁에 관하여 필자의 의견을 밝히고자 한다. 이 논쟁의 시발점이 어디서부터인가 하는 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다. 먼저 ‘포괄적차별금지법’이 대두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분이 계신다. 포괄적차별금지법의 일부 내용은 성경의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위배하였으므로 기독교계가 함께 거부해야 할 법안임은 틀림없다. 물론 그 법안의 내용 중 당연하고 긍정적인 내용이 함께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 법안의 목표는 동성애를 묵인하고 오히려 보호하기 위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생소한 단어인 ‘성적지향’을 보호하는 해괴한 내용을 넣는 것이 주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논의되고 있는 교회의 정치참여 문제는 직접적으로는 지난해 10월 27일 한국교회 연합예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 집회는 ‘예배’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하였으나 자타가 정치적 목적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대통령의 탄핵 과정,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한국교회와 고신 교회의 일부 목회자와 교회가 국힘의 김문수 후보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후로도 많은 교회 지도자가 보수 정치세력을 지지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실정법 위반이 문제 되었으며 그 중 손현보 목사님이 구속되어 지금 재판에 계류되어 있다. 그리고 이 문제가 주제가 되어 제19회 미래교회포럼에서는 ‘설교와 정치참여’란 주제로 포럼이 개최되었다. 백석대 김윤태 교수는 [정치참여적 설교의 긍정성과 부정성]이란 제목의 글에서 ‘정치나 정부정책과 관련된 어떤 현실 이슈가 언급될 때마다 지역적 이념적 정치적 입장에 따라 정교분리의 원칙이 편파적이고 선택적으로 적용됨으로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현재 ‘진영논리’라고 부르는 우리나라의 극단적인 분열이 교회 내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국가나 정치의 목적은 사람들의 행복한 삶을 유지 보존 증진시키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질서와 문화를 조장 보호하고 법과 제도를 통하여 사회적 국가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국가와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목적이다’라고 국가와 정치의 사명과 목적을 정의하였다. 또 교회의 사회적 사명에 대하여는 ‘교회 또한 하나님의 뜻이 교회와 국가를 통해 이 땅에 이루어짐을 믿으며 하나님의 의의 통치의 실현을 위해 이 땅에 평화와 공의의 증진을 위해 노력한다. 교회는 이를 위해 신자들에게 이런 기독교 시민의식을 가르치고 실천하도록 장려한다’라고 정의하였다. 따라서 목사의 설교는 ‘당연히 이러한 부분을 포함하여야 하며 이는 교회의 대 사회적 활동의 주요한 목적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교회는 사회적 공공성의 의미를 가지며 사회적 순기능을 담당해야 한다.’고 신자의 삶을 통한 설교의 대 사회적 기능을 밝혔다. 그리고 교회의 정치참여에 대하여는 ‘교회와 목사는 정당들 간의 투쟁과 경쟁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켜야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목사는 선거철을 맞아 신자들에게 정부와 정치의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의미를 알게 하고 그럼으로 시민으로서 신자들이 바른 정치참여를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정의하였다. 따라서 ‘공의롭고 질서 있는 사회를 위해 바른 정책을 추구할 수 있는 후보자를 선택할 수 있도록 목사는 성경적 가치와 기준을 가르쳐 줌으로 신자들이 바른 선택을 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설교의 기준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종교의 자유에 관하여 ‘국가권력이나 정치세력은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서 행하는 정당한 비판을 제한하거나 금해서는 안 된다. 목사가 기독 신자에게 시민으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행해야 할 것을 설교하는 것은 목사의 권리이며 이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것은 종교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라고 설교와 종교의 자유와의 관계를 결론하고 있다. 김 교수는 국가와 정치, 교회의 사명, 정치에 관한 목사의 설교 한계, 교회의 정치참여, 설교와 종교의 자유에 관한 탁월한 의견을 제시해 주셨다. 김 교수가 제시한 이러한 몇 가지 원칙에 관하여 아무도 달리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원칙에 따라 최근 기독교의 정치참여에 관한 부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 상당수 교회는 보수적인 정치세력 – 지난 대선 때는 김문수 후보를, 이후 사실상 보수 정치세력인 국민의 힘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교회와 성도들이 보수정치를 지지하기 때문에 김문수 후보를 지지하였고 국민의 힘이 보수 정치세력이기 때문에 지지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정치지향점이나 정책이 이 나라에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데 상대적으로 가깝거나 적합하기 때문인지 묻고 싶다. 이 질문은 비슷한 것 같지만 출발점을 완전히 달리한다. 아마도 이 질문에 백이면 백 모두 후자의 이유로 보수 정치세력을 지지한다고 할 것이다. 즉, 보수정당이 또는 보수 정치세력이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에 세우고 교회의 사명을 이루는데 상대적으로 적합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국민의 힘 핵심 인사들이 이단 세력인 통**와 교류하고 그들로부터 정치자금이 아니라 뇌물로 보이는 물품을 건네받은 것에 대하여 왜 침묵하고 있는가?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해도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종교를 표방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기존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고 대다수 국민이 그렇게 알고 있는 집단에서 불의한 것을 매개체로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세력의 핵심에 접근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지금 이 문제는 여야 양측 모두에게 위법한 사실이 나타나 언론에 집중하여 보도되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점차 그 규모가 커지고 있다. 아마도 이 문제가 어쩌면 현재의 정치구조에도 큰 타격을 입힐 공산이 크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데 상대적으로 적합하다고 믿은 정치세력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하고 오용하는 자들과 불법적인 거래가 있었다면 마땅히 비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하여 보수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교회와 단체는 왜 침묵하고 있는가? 마 5:37은 이렇게 말씀한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반공주의자로서 드리는 말씀 – 오세택 목사님의 인공기 발언에 대해 필자는 또 반공주의자로서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앞서 말씀드린 제19차 고신미래포럼에서 오 모 목사님의 놀라운 발언을 지상을 통하여 보았다. 오 목사님의 발언은 위 포럼에서 자료로 배포한 발제문 ‘설교와 정치참여’에 있는 내용과는 결을 달리하는 다른 내용이다. 왜 발제문과 전혀 관계없는 내용을 말씀하셨는지 내가 직접 포럼에 참석하지 못하여 오 목사님의 발언을 전체적으로 듣지 못하였으므로 깊은 뜻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크리스찬투데이’에 보도된 그대로를 몇 개 인용한다. 당시 사랑의교회가 태극기를 내건 모습을 언급하면서 “개혁주의 입장에서 교단 정신으로 보면 그게 정당한가? 민족주의인가, 국수주의인가? 하나님 나라는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것” “모든 지상의 국가를 섬기고 복음을 전하고 구원한다는 의미에서, 달려면 만국기를 붙여야 할 것 아닌가? 성조기를 붙이면 美 문화원인가 할 것이고, 일장기를 붙이면 더 이상할 것” “공간이 부족하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는 상징으로 붙일 한 국가 깃발이 있다. ‘북한 인공기’다. 붙이려면 그걸 붙여야 한다”며 “그럼, 사람들이 ‘저게 뭐냐’라고 할 것 아닌가? 그때 얼마나 (설명할) 기회가 좋은가? 복음은 좌우를 넘어, 위에서 내려다봐야 한다. 좌우의 관점을 가지고 보면 교회는 분열할 수밖에 없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태극기는 비록 음양과 팔괘의 사상이 들어 있지만 조선 말 고종황제 때 기본이 만들어지고 이후 조금씩 변화하면서 항일 독립투쟁 때부터 우리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자연스럽게 우리의 국기가 되었고 이에 대하여 아무도 거부하지 않는다. 사랑의 교회가 태극기를 게양한 것은 나라 사랑의 의미가 아닌가? 심지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수립 직후인 1946년 2월 16일부터 1948년 7월 10일까지 북한도 태극기를 사용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공기는 다르다. [나무위키]의 해설에 따르면 인공기의 의미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인공기가 제작되었을 당시의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내세운 인공기의 의미는 “인공기 위와 아랫부분 파란색은 한반도 좌우에 있는 동해와 서해를 의미하고 빨간색 별은 공산주의, 그리고 빨간색 별을 둘러싼 흰색은 공산주의를 지킨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당연히 태극기의 파란색, 빨간색과는 뜻이 다르다.” 다음은 김일성종합대학의 기사에서는 또 다르게 언급되는데 이는 북한 외무성에서 밝히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날 어버이 수령님께서는 국기의 색갈을 붉은색, 흰색, 푸른색으로 하니 좋다고, 국기의 붉은색은 항일 선렬들과 조선의 애국자들이 흘린 피와 공화국의 주위에 굳게 뭉친 우리 인민의 불패의 위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된다시며 국기의 흰색은 우리나라가 한 강토에서 하나의 혈통과 언어, 문화를 가지고 결백하게 살아온 단일민족국가라는 것을 상징하며 푸른색은 민주주의 새 사회건설을 위하여 투쟁하는 우리 인민의 씩씩한 모습과 세계의 평화와 진보를 위하여 투쟁하는 조선인민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할수 있다고 하시였다.” (공화국기에 드리는 경의 —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박사 부교수 박희순)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는다. [히스토리의 역사산책]이라는 다음(daum.net)의 블러그에서는 인공기는 북한공산주의와 김일성 주체사상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 ‘위와 아래에 파란색이 있고 그 사이에 넓은 빨간색이 있으며 그 안에 하얀 동그라미와 붉은 별이 있다. 빨간색은 공산주의와 혁명 그리고(김일성의 독재 이후에는) 주체사상을 상징한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파란색은 평화에 대한 염원과 인민의 희망을 뜻한다고 한다. 그리고 하얀색은 광명 및 음양사상을 상징한다. 하얀 원 안에 있는 붉은 별은 한반도 전체의 공산주의 건설을 뜻하는데 조선인민군의 상징으로도 통한다고 한다’ 위 세 가지 인공기의 의미 중 어느 것을 택하여도 인공기는 공산주의 이념과 주체사상을 상징하기 위해 또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인공기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오 목사님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함을 보이기 위해, 복음이 좌우를 넘어 위에서 보듯이 하기 위해 인공기를 게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고, 제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며 “사상과 이념을 넘어 사회주의·공산주의·자본주의·민주주의를 넘어 우주적 관점으로 사랑하자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고 해명하였다고 한다. 그런 뜻이라고 하더라도 인공기를 게양하자는 말씀을 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북한 공산주의자도 용서의 대상이며 복음이 전해져야 하며 구원의 대상인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내려놓고 참회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는 죄의 고백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오 목사님이 인공기를 붙이자고 하신 것은 자칫하면 공산주의자들이 우리의 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엄청난 죄악들에 대하여 묵인하고 관용을 베풀자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북한 공산주의자에 대한 관용보다 그들로 인하여 고통받는 동포들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해방 후 분단의 공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저질은 수많은 끔찍한 범죄 – 이른바 적색테러, 6.25 전쟁의 참화, 그 후의 각종 침략행위를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북한에는 공산정권에 의하여 수많은 동포가 삶의 고통을 겪고 있으며, 그들의 삶의 고통을 외면하고 엄청난 재원을 대량 학살 무기 등 군비를 갖춤에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여순반란 사건 때 반란군들이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신과 동인을 모르고 죽였을까? 아니다. 그들은 손양원 목사님이 누군지 알고 있었고, 동신과 동인을 손 목사님의 아들인 것을 알고 죽였다. 이 땅에서 가장 비천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목사님의 아들을 그들과 뜻을 함께할 수 없음을 알고, 그들의 뜻에 방해된다고 죽인 것이다. 6.25 전쟁 때에는 손양원 목사님 역시 공산군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한센병 환자와 함께 아무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성자(聖者)와 같은 삶을 사시는 목사님을 역시 그들의 뜻에 방해되고 뜻을 함께할 수 없음을 알고 죽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6.25 전쟁 때 공산군들은 이 땅의 수많은 목사님 등 기독교인을 죽였고 교회당을 불태웠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때보다 10배가 넘는 순교자의 이름이 합동 측에서 발간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00년사』 2권 88면과 747면에 명시되어 있다. 교파별로 모두 조사하여 정리하면 엄청난 수가 될 것이다. 그들은 미군을 점령군, 소련군을 해방군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 세계 역사를 다 찾아봐도 목사를 학살하고 교회를 불태우는 해방군은 없다. 그 전쟁범죄자의 후계자들이 그들의 목표를 위하여 상징으로 내세우는 것이 인공기이다. 그런데도 인공기를 게시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과거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도 있었지만, 최근의 노동운동 현장에서 북한 공산주의에 영합하는 듯한 구호와 주장들이 나타나고 있다. 백번 양보해서 민주화를 위한 학생운동도 좋고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노동운동도 좋으나 그 주장이 북한 공산주의를 이롭게 하는 구호와 주장은 결코 잘못된 것이다. 부패한 자들이 통치하는 사회주의는 부패한 자본주의보다 국민의 모든 삶을 훨씬 힘들게 한다. 중국과 북한, 남미의 여러 나라 사례를 우리는 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모습을 우리의 경험으로 여겨야 한다. 마치면서 필자의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교회와 신자는 정치와 단절될 수 없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고 신자 역시 시민으로서 국가의 통치체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교회와 국가를 통해 이 땅에 이루어짐을 믿으며, 신자는 하나님의 의의 통치의 실현을 위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신자는 선거 때마다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투표로 나타내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교회와 목사님은 신자들이 바르게 정치참여를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성경적 가치와 기준을 제시하고 가르쳐 줄 뿐이지 직접적으로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에 대한 찬반을 거론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국가의 정책 역시 그러하다. 분명히 성경적 가치관과 배치된다면 그 부분에 대하여 반대해야 하지만 국가의 정책은 대부분 항상 양면을 가지고 있으므로 전문적인 지식과 깊은 성찰이 없다면 쉽게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추구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한 정치를 이루는 것은 우리의 정치적 전략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이유 하나로 가이사의 것을 쉽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롬 13:1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가르쳤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말씀을 기록할 때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권력이 정당하고 타당해서 복종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악한 체제하에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복종하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교회와 목사님, 그리고 모든 성도가 교회와 성도의 정치참여에 대해 깊은 성찰이 있기를 기도한다.
-
- 오피니언
- 기고
-
[특별기고] 교회와 성도의 정치참여에 대하여
-
-
[황권철 목사] 교회순방: 무성교회(41)
- 무성교회(이수건 목사)는 경남 창원시 의창구 동읍 무성길47번길 16-10에 있다. 이 교회는 본래 고신교회 출신으로써 덕산재건교회를 출석하여 집사로 장립 받아 섬기던 박만석 집사가 자신이 살던 동네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자기 집터 일부와 돼지를 기르던 돈사 부지를 교회 기증하여 1991년 10월 1일 창원군 동면 무성리 195-1에서 당시 가술교회 시무하던 원대연 목사의 명의로 무성교회(종교단체)로 등록하였다가 1992년 7월 2일 경남(법통)노회로부터 교회 설립을 허락받았다. 지금의 교회당은 2009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2011년에 완공하고 2013년 11월 14일에 입당감사예배를 드렸다. 교역자로는 1992년 6월 18일 이상철 목사가 부임한 이래 이학재 목사, 안영원 목사, 그리고 이한성 목사가 섬기다가 현재는 이수건 목사가 경남(법통)노회 제192회 때 전임 목사로 허락받아 2020년 5월 3일 부임하여 섬김으로 교회가 새롭게 부흥하고 있다. 이수건 목사는 고려신학대학원 45회 졸업하였고 진주노회 아름다운 교회에서 사역하다가 청빙을 받았다. 이 목사는 부임한 이후 창원동부시찰 교역자들을 초청하여 “무성교회 과거 현재,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자신의 목회 사역을 소개했다. 지난날 교회 설립 때 가술교회(원대연 목사)를 비롯한 여러 교회가 도와주셨고, 새 예배당 건축할 때는 덕산교회(안은준 목사)를 비롯한 시찰 산하 여러 교회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무성교회는 본동의 아파트에 입주한 분들을 전도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새 예배당을 짓고 헌신적으로 섬겨 왔기에 건강한 교회로 자라가고 있다. 무성교회 미래는 초대 예루살렘교회를 본받아 닮아 가기를 소원한다. 초대교회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한 것처럼 무성교회를 설립한 분도 자신의 가옥 일부를 받침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초대 예루살렘교회에 열심인 여성도들과 헌신자 바나바와 청년 마가가 있었던 것처럼 무성교회에도 이름 없이 헌신하는 여종들과 바나바 같은 헌신자와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청년들의 섬김으로 건강한 교회로 세워가고 있다. 금주의 주신 말씀의 제목은 창세기 32장 24절로 28절 말씀으로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이다. 지금 야곱은 일생에서 가장 큰 위기에 직면한 순간이다. 그는 일생을 살면서 몇 번의 위기를 맞았다. 형의 미움을 받아 집을 떠날 때와 외삼촌의 재산을 가지고 탈출할 때,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얍복 나루에서 20년간 한을 품고 기다린 형이 400군대를 거느리고 복수하러 옴으로 진퇴양난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러한 위기를 대처하는 야곱은 어떠했는가? 우선 가축을 두 떼로 나누었다. 한 떼를 치면 다른 한 떼와 도피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부인과 아이들을 먼저 보내어 형의 마음을 풀게 하고자 했다. 그러고 보니 결국 자기 혼자만 남게 되었다. 왜 혼자 남았을까? 위기의 때 가족을 버리고 도망가기 위함인가? 형과 대면할 자신이 없는 두려움 때문인가? 물론 그러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였다. 성도는 위기의 때 기도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여호사밧은 아람 전투에서 위기를 직면했을 때 오직 주만 바라보았다(대하 20:12). 그는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대하 20:15) 오늘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신 질문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질문과 나타난 대답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먼저, 나는 연약한 존재란 말이다. 야곱은 본래 가정에서 어머니 치마폭에서 자란 유약한 사람이다. 에서와 전혀 다른 사람이다. 에서는 사냥에 익숙한 들 사람이요 야성적인 사람이다. 거기에 비하면 야곱은 가정에서 어머니 그늘에서 자랐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버러지와 지렁이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사 41:4).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도와주시겠다고 했다. 날카로운 타작 기계처럼 만들어 주셨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보라 내가 너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서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을 겨같이 만들 것이라”(사 41:14-15) 야곱이 비록 지정이 같고 버러지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열방을 다스릴 왕국으로 세움을 받았다. 다음, 나는 하나님 없이는 못 사는 존재란 말이다. 야곱은 출생 때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야곱은 출생 때부터 형을 잡고 나와 결국 형의 장자권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형의 위협 앞에 하나님을 붙잡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제 하나님을 붙잡은 손을 놓는 순간 그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야곱이다’는 말은 이제 하나님의 발꿈치를 잡은 인간이라는 말이다. 전에는 사람을 붙잡고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붙잡고 산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시 118:8-9) 이젠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전에는 형을 붙들고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붙잡고 사는 인생이다. 마지막, 저는 불구자 인생이란 말이다,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다가 허벅지 관절이 위골 되었다. 하나님은 반칙을 써서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면서 환도뼈가 위골됨으로 일평생 다리를 저는 절름발이 장애자로 살았다. 그는 절뚝거리며 불구의 몸이 되어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다. 이후 야곱은 완전히 변하여 형 앞으로 나아갈 때 일곱 번 절하며 나아갔다.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을 향해 하나님은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나는 야곱이니이다.” 대답했다. 이는 곧 나는 연약한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 없이 못 사는 불구자 인생이요 절름발이 인생이라는 말이다. 이 한 주간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마흔한 번째로 무성교회를 찾았다. 주일 아침 예배 15분 전에 도착하여 예배실로 들어서니 이수건 목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로님과 집사님들을 소개하고 앞 자석으로 안내해 주었다. 2009년도에 지은 새 예배당에 1층은 교회학교와 교육관 및 식당으로, 2층은 예배실로 잘 꾸며져 있었다. 찬양 인도가 끝나고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 목사님의 설교는 너무도 차분하게 정제되고 논리적이며 체계적으로 준비한 본문의 성구를 액정 화면에 띄우면서 모든 성도가 쉽게 알 수 있도록 설득력 있게 선포했다. 모두가 말씀의 은혜를 받고 예배 후 식당으로 가서 목사님과 함께 식사하면서 장로님과 집사님들, 그리고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밀알교회를 섬긴 장로님의 동향을 비롯한 귀한 사역자들을 만나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었다. 이후 목사님과 교우들의 배웅 인사를 받으면서 오후 메트로 병원 선교 사역의 현장으로 돌아왔다. 2024년 10월 27일 주일 오전 11시 예배 고려파교회연구소장 교육학박사 황권철 목사(밀알교회 원로)
-
- 오피니언
- 기타
-
[황권철 목사] 교회순방: 무성교회(41)
-
-
[하수룡 장로] 원 가 지
- 호야라는 식물을 거제 동생집에서 가져와 꺾꽂이를 해 심어놓았던 것이 잘 자라더니 갑자기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했다.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작은 벌레들이 호야를 괴롭히면서 크지도 않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극단의 조치를 취해 원가지를 사정없이 다 쳐버리고 약간의 음지인 뒷 베란다에 놓아 두고 일 년을 키웠더니 잘랐던 원가지 옆 부분에서 곁가지가 나와 엄청 무성하게 잘 자라 이젠 예쁜 꽃까지 피워 우릴 즐겁게 해 주고 있다. 매일 물과 거름도 넉넉히 주었더니 더 충실하여 어떤 식물보다 관심을 더 가지게 되어 주인인 우리 부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잘려 버리게 된 참 감람나무의 원가지인 유대인이 떨어져 나가고 그 덕택으로 곁가지 이방인인 우리가 풍성한 구원의 은혜의 복을 누리고 잘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후 천육백 년이란 역사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후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그동안의 소회를 말씀하셨으나 피폐한 삶을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답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 다소 냉소적이며 원망이 가득한 반응을 보인 것을 알았다. 아마도 유일하게 선택한 원가지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답에 하나님은 큰 충격을 받으신 것이 틀림이 없다 그 후 하나님은 4백 년 동안을 침묵하셨다. 갑갑한 세월이 흐른 후 하나님은 원가지인 이스라엘 항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세상에 보내주셨다. 하나님께 감정의 골이 깊어서인지 그들은 수많은 선지자의 예언과 예수님의 기적과 표적을 보았는데도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기는 커녕 십자가에 못 박고 만 것이다. 많은 민족 중에 열악한 환경 속에 살아가던 유대민족을 감람나무의 원가지로 선택하셨으나 그들의 실족 때문에 큰 덕을 본 사람은 바로 돌감람나무의 곁가지로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인 우리들이 아닌가! 이방인 사도로 큰 쓰임을 받은 바울은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이 늘 가슴 속에 있어 돌감람나무 이방인인 우리에게 ‘교만치 말라.’라고 줄곧 경고하고 있는 음성에 귀를 기울려야 한다. 예수를 믿는 돌감람나무인 우리는 참 감람나무의 찍혀버린 그 자리에 접붙임 받은 것을 망각하고 하나님이 처음으로 선택한 원가지인 것처럼 내가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곁가지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우리가 한 번쯤 믿음으로 돌아보아야 할 때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제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안타까운 것은 참감람나무 원가지인 유대인들은 아직까지도 주님 오신지 2천 년이 지난 현재에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모세에게만 붙들여 있다는 사실이다. 돌감람나무였던 곁가지인 구원받은 우리 역시 세상 것을 더 사랑하고 자기가 가장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다. 2026년 새해에는 다른 사람이 아닌 구원받은 내가 야생 기질을 지닌 못 먹는 곁가지 돌감람나무임을 꼭 깨닫고 세상을 위해 작은 선행이라도 하면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다. 참감람나무 원가지에서 올라오는 진액을 마음껏 흡수하여 푸른 잎과 꽃,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고 은혜를 베푸신 우리 하나님만 바라보고 늘 감사하고 찬양을 돌리면 참 좋겠다. 2026.01.06. 경남기독신문 초장컬럼 원고
-
- 오피니언
- 초장칼럼
-
[하수룡 장로] 원 가 지
-
-
[조희완 목사] 의심은 금물 (창3:1-8)
-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누구를 의심하거나 누구로부터 의심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누구를 의심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고 누구로부터 의심을 받는 것도 괴로운 일입니다. 고려시대 학습교재로 날려진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보면, “사람을 의심하거든 쓰지를 말고, 사람을 썼거든 의심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을 의심한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면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가정이 행복하려면 부부간에 의심이 없어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의심하면 의처증이 되고, 아내가 남편을 믿지 못하면 의부증이 됩니다. 그렇게 서로를 의심하다 보면 가정이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의심을 하면 서로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대구의 한 여중생은 반 친구들로부터 의심을 받다가 너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뛰어내려서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의심은 인생을 파괴시키는 무서운 마귀의 술책임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를 믿고 신뢰해야 평안하고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이민생활을 하면서 참 안타깝게 여겨졌던 것은,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을 믿지 못하고 서로에 대해서 의심을 한다는 것입니다. 머나먼 타국에서 같은 한국 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기뻐야 하는데 그렇질 않고 일단 의심을 하게 됩니다. 왜 그런가 하고 살펴보았더니 타국에 와서 정착하는 과정에 같은 한국 사람들로부터 사기를 당하고 배신을 당한 아픔들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고 불행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의심이 없어야 합니다. 즐겁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다음과 같은 일을 당할 때 의심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첫째로, 말씀을 받을 때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창3:1) 둘째로, 고난을 당할 때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욥23:10) 셋째로, 응답이 없을 때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합2:1,3) 밀려오는 의심을 잘 극복하시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이루어가시기 바랍니다.
-
- 오피니언
- 성경
-
[조희완 목사] 의심은 금물 (창3:1-8)
-
-
[정우승 목사] 아버지와 딸
-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가끔 이해하기 힘든 사건을 접할 때가 있다. 그 중에서 (사사기 11장)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사사 입다의 서원으로 자기 딸을 하나님께 바치는 사건이다. 암몬 왕이 입다의 말을 듣지 않자 입다는 출정을 하면서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렸다. (사사기11:30-31)에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자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라고 말씀한다. 이 얼마나 경솔한 서원인가?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데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 자신의 무남독녀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한다. (사사기11:34)에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라고 말씀한다. 이 때 입다는 자기 옷을 찢으며 말한다. (사사기11:35)에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라고 말씀한다. 그 말에 딸은 (사사기11:36)에서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라고 대답한다. 정말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그리고 입다의 딸은 한 가지 청을 올린다. 다만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처녀로 죽는 것에 대해 애곡하도록 두 달의 시간을 허락받았다. 결국 입다의 딸은 산 위에서 처녀의 죽음에 대해서 애곡하고 두 달 만에 아버지께로 돌아온 후 (사사기11:39)에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라고 딸의 죽음을 암시하는 언급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어진 아버지가 착한 딸에 죽음을 강요한 사건이 있다. 경남 하동(河東) 옥종면(玉宗面)에 종화골에서 안계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다. ‘가마고개’로 불리우는 이 고개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구전된다. 광해군 때의 일이다.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학통의 이어 받은 종화골의 한 명문 집안에서 딸을 출가시키고자 가마 행차를 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때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어받은 안계골의 한 명문 집안에서도 딸을 출가시키고자 가마행차를 하였다. 이 양가(兩家)는 수백 년 동안이나 학통이 다르다는 것을 두고 다투어온 적대 가문이다. 이 적대하던 가문의 두 가마가 공교롭게 이 고갯마루에서 부딪치게 되었다. 비록 좁은 고갯길이기는 하지만 가마가 못 비켜가리만큼 좁진 않았다. 고개 아래는 낭떠러지로 남강의 지류인 덕천강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 한쪽의 가마가 비켜주거나 비켜가기만 하면 아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한데 그들의 골수에 사무친 학통의식은 그 같은 겸양을 철저히 배제하고 대치하고만 있었다. 비켜가는 가마 쪽의 가문이 굽힌다는 의식에서 치열한 다툼이 생겼다. 그들은 무려 14일간 그 자리를 버티었고, 각기 각 학통에서 응원 온 유생들도 초막을 치고 버티기까지 하였다. 급기야 어느 학파에서도 물러날 조짐이 보이질 않았다. 그리하여 팽팽히 맞선 이 양 학파에서는 그 대결의 불씨가 된 시집가는 딸에게 각기 자결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가문과 학문의 명예를 구제하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시집을 가는 두 딸은 무거운 돌덩이를 붉은 비단 치마에 싸서 안고 덕천강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들의 신방은 바로 무덤이 되었고, 집을 나설 때는 꽃가마인데, 집에 돌아올 때는 꽃상여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 자기 딸을 하나님께 바쳤던 입다의 행동이나, 타 학파에 밀리지 않겠다는 결연의 의지 때문에 딸에게 자결을 강요했던 선비의 행동에 대한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경의 인물이나 우리 조상들에게서 자기가 믿는 바를 지키기 위해서 죽음을 불사하는 지조와 결단력을 높이 평가할 뿐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정우승 목사] 아버지와 딸
-
-
[이정희 목사]
- 1. 서언(序言) 요즈음 연말연시를 기하여 한 해의 마무리와 새해를 맞이하기 위하여 달력을 나누거나 새해의 각종 절기와 행사를 계획하기도 한다. 이런 때에 달력을 받으면 올해는 어떤 해인가에 대한 연호에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연호는 거의 다 사용하는데, 동양의 연호는 전통적인 황제 연호와 60갑자 연호이다. 2026년은 지난 호에서 기술한 대로 60갑자 연호인“병오년”(丙午年)이다. 서양의 경우는 예수님이 중심인 서력기원인 A.D와 B.C란 연호이다. 본 호에서는 이러한 연호와 그 유래와 현재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2. 동양 연호(年號)의 의의와 유래 1) 동양 연호란?: 먼저 한자의 뜻은 年은 한 해 365일을 의미하며, 號는 차례나 순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그해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한해의 명칭으로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의 군주제 국가 시절에는 왕의 즉위 때나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 그해에 이름을 붙여서 그 해를 원년으로 해서 이후 연도를 붙여가는 황제 연호이다. 2) 동양 연호의 유래: 최초의 연호는 중국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건원(健元)이다. 이는 황제의 권위와 국가적 정통성을 위해 시작했으며, 원칙적으로 황제만이 사용하고, 제후왕은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지 못했다.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 일본 등에서도 사용하였으나 중국은 중화민국이 성립되면서 폐지되었고, 지금은 천황제도가 있는 일본만 사용하고 있다. 3) 우리나라의 유래: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삼국시대부터 시작하였다. 고구려는 광개토왕비에 영락(永樂)이란 연호를 사용했음을 볼 수 있으며, 백제는 칠지도(七支刀)에 태화(泰和)라는 연호가 기록되어 있다. 구체적인 연호의 제정은 신라 법흥왕 536년에 독자적으로 건원(建元)이란 연호를 사용했다. 고려시대도 연호를 세워 그 주체성을 발휘하였으며, 조선시대는 명나라의 제후국을 자처해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지 못했으나, 갑오경장 때 개국 기원을 503년으로 채택하여 연호를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연호를 사용하다가 미 군정기(1945∼1948)에는 서력기원(西紀)을 사용했다. 해방 후 1948년 정부수립 후에는 서기와 단군기원을 공용연호로 제정하였다가 국제적인 시류에 따라 1961년에 연호에 관한 법률(법률 제775호)을 공포하고 서력기원을 공용연호로 사용하고 있다. 4) 60갑자 연호의 유래와 사용: 또 하나의 연호인 60갑자 연호의 시작은 중국에서 B.C 2637년 황제시대로 추정하고 있으나 공식적인 사용은 B.C 104년 한 무제(漢武帝)때 황제 연호인 건원(健元)과 함께 사용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A.D 1444년에 세종대왕 때에 칠정산 역법(七政算曆法)을 편찬하면서 이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3. 서력기원(西曆紀元)의 의의와 유래 1) 서양의 연호 사용의 유래: 동양의 황제 연호나 60갑자 연호와 같은 별도의 명칭을 사용하기보다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 등에서 왕의 등극한 해나 계절 주기 등을 기준으로 연도를 계산한 월력(月曆)을 사용했다. 대표적으로는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 태양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토대로 만든 태양력(太陽曆)이었다. 그 이후 BC 46년 이집트를 정복한 쥴리아스 시저(Caius Julius Caesar)가 이를 로마에서 사용한 것이 태양의 공전주기에 맞춘 율리우스력(Julius Calendar)이다. 이를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A.D 1582년에 새롭게 개정한 그레고리우스력(Gregorius Calender)을 제정했고, 이는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다. 2) 기독교적 연호(A.D) 사용의 유래 : ‘A.D’란 연호의 처음 사용은 주후 6세기경의 동로마 황제인‘저스틴 1세’부터였다. 그는 당시의 수도사였던‘디오니시우스’로 하여금 세계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연호를 연구하게 했다. 이에 그는 깊은 명상 중에 예수님 탄생의 해를 기점으로, 그 이전은 before Christ의 약자인 ‘B.C’로, 이후는 Anno Domine(주 오신후)의 약자인 ‘A.D’로 정했다. 또한 이를 황제에게 보고했고, 황제는 이를 선포하여 오늘까지 거의 세계 모든 나라들이 사용하는 연호로 확정되었다. 4. 기독교적 관점과 제언 이상에서 논한 대로 연호의 사용은 동서양 관계없이 고대로부터 그 역사성을 가지고 있고, 전 인류사에 공헌한 정말 유익한 것이었다. 단지 이러한 사용이 지도자의 권위를 위한 것이나 우상숭배와 점복(占卜)의 도구로 오용되는 일은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감사한 일은 거의 온 세계가 지금은 공용으로 예수님이 중심이 된 주전(B.C)과 주후(A.D)로 나누는 서력기원 연호를 사용하고 있는 일이다. 이는 기독교인인 우리로서는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다. 부디 이런 연호를 널리 사용함으로서 기독교적 언어 문화를 창출해 가야 할 것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
[이정희 목사]
-
-
[오성한 목사] 종교와 복음 사이
- 우리는 “열심히 하면”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며,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언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 깊은 곳에 이런 공식이 자리 잡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충성하면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신다.”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봉사를 열심히 해야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 겉으로 보면 그럴듯한 말처럼 들립니다. 실제로 교회는 이런 ‘열심 있는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이 복음의 중심이 아니라 종교의 언어라는 데 있습니다. 종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열심히 하면, 네가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을 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네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할 때, 하나님이 먼저 너를 위하여 행하셨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도 종교’라고 부르지만, 복음 그 자체는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려는 종교’와는 전혀 다른 길을 말합니다.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려 하고, 복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반대로 말합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렇게 하면 의로워질 수 있다”라는 길이 아니라, “너는 이렇게까지 해도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다”라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을 통해 스스로 의롭다 할 수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굳이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값없이’ 입니다. 우리는 늘 뭔가를 “치르고 얻는 방식”에 익숙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 사업을 열심히 하면 성과, 사람에게 잘하면 인정 등의 공식을 갖고 삽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대가의 구조’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신앙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옮겨 버립니다. “기도라는 영적 수고를 드려야 응답을 받는다.” “헌신이라는 영적 비용을 지불해야 복을 받는다.” “눈물과 금식을 쌓아야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기도도 쌓고, 헌신과 봉사도 쌓아야 한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너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너는 이미 사랑받는 자다.” “너의 열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 때문에 너는 이미 받아들여진 자다.” 여기서 우리는 깊은 충돌을 경험합니다. 종교적 습관과 복음의 진리가 충돌합니다. 입으로는 “은혜로 삽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조금 더 열심히 해야…”라는 죄책감과 부담 속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이것이 게으름을 합리화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열심’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열심의 동기와 방향입니다. “더 사랑받기 위해” 열심을 내는가? “이미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기쁨으로 헌신하는가? 복음은 두 번째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조금 더 해라, 그래야 사랑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독생자를 주실 만큼 사랑하셨고,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제대로 알면,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오히려 종교적 강박에서 자유로워질수록, 감사와 감격 때문에 기도하고 싶고, 말씀을 보고 싶고, 섬기고 싶어집니다. “노력해야 사랑받는 신앙”에서 “가만히 있어도” 사랑받는 자이라는 생각의 전환, “이미 사랑받기에 기쁨으로 헌신하는 신앙”으로의 전환, 이것이 복음을 아는 첫 번째 회심입니다. 부담과 죄책감으로 신앙을 끌고 가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 위에 조용히 앉아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것들을 하나씩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하나님, 제가 ‘더 해야 사랑받는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이제는, 이미 사랑받고 있다는 이 복음을 믿게 해 주옵소서.” 이 고백의 자리에서부터, 복음의 기쁨이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하면”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며,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언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 깊은 곳에 이런 공식이 자리 잡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충성하면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신다.”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봉사를 열심히 해야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 겉으로 보면 그럴듯한 말처럼 들립니다. 실제로 교회는 이런 ‘열심 있는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이 복음의 중심이 아니라 종교의 언어라는 데 있습니다. 종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열심히 하면, 네가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을 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네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할 때, 하나님이 먼저 너를 위하여 행하셨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도 종교’라고 부르지만, 복음 그 자체는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려는 종교’와는 전혀 다른 길을 말합니다.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려 하고, 복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반대로 말합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렇게 하면 의로워질 수 있다”라는 길이 아니라, “너는 이렇게까지 해도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다”라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을 통해 스스로 의롭다 할 수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굳이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값없이’입니다. 우리는 늘 뭔가를 “치르고 얻는 방식”에 익숙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 사업을 열심히 하면 성과, 사람에게 잘하면 인정 등의 공식을 갖고 삽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대가의 구조’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신앙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옮겨 버립니다. “기도라는 영적 수고를 드려야 응답을 받는다.” “헌신이라는 영적 비용을 지불해야 복을 받는다.” “눈물과 금식을 쌓아야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기도도 쌓고, 헌신과 봉사도 쌓아야 한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너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너는 이미 사랑받는 자다.” “너의 열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 때문에 너는 이미 받아들여진 자다.” 여기서 우리는 깊은 충돌을 경험합니다. 종교적 습관과 복음의 진리가 충돌합니다. 입으로는 “은혜로 삽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조금 더 열심히 해야…”라는 죄책감과 부담 속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이것이 게으름을 합리화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열심’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열심의 동기와 방향입니다. “더 사랑받기 위해” 열심을 내는가? “이미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기쁨으로 헌신하는가? 복음은 두 번째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조금 더 해라, 그래야 사랑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독생자를 주실 만큼 사랑하셨고,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제대로 알면,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오히려 종교적 강박에서 자유로워질수록, 감사와 감격 때문에 기도하고 싶고, 말씀을 보고 싶고, 섬기고 싶어집니다. “노력해야 사랑받는 신앙”에서 “가만히 있어도” 사랑받는 자이라는 생각의 전환, “이미 사랑받기에 기쁨으로 헌신하는 신앙”으로의 전환, 이것이 복음을 아는 첫 번째 회심입니다. 부담과 죄책감으로 신앙을 끌고 가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 위에 조용히 앉아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것들을 하나씩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하나님, 제가 ‘더 해야 사랑받는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이제는, 이미 사랑받고 있다는 이 복음을 믿게 해 주옵소서.” 이 고백의 자리에서부터, 복음의 기쁨이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오성한 목사] 종교와 복음 사이
-
-
[양대식 목사] 나쁜 관계
- 관계가 나쁘고 관계가 깨지면 고통이요, 비극이고 불행입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뜨리고 좋았던 관계를 나쁜 관계가 되게 됩니다. 관계가 나쁘면 슬프고 외롭고 비극이며 불행입니다. 나쁜 사람과의 만남은 관계가 나빠집니다. 나쁜 사람 악인과 동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쁜 만남의 장소는 피해야 합니다. 나쁜 사람 악인들은 미워하지는 말아야 하나 깊이 교제하거나 가까이하면 물들게 되고 상처받기도 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 누구와 관계 맺느냐가 중요합니다. 나쁜 관계는 사탄의 역사입니다. 사탄의 시험에 넘어지면 관계가 나빠지고 나쁜 관계가 됩니다.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다스려야 합니다. 나의 마음이 나쁘고 악하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되어 나쁜 관계를 맺게 됩니다. 나쁜 관계는 사소한 것 가지고 관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관계 맺고 유익이 없으면 배신하는 관계는 나쁜 관계입니다. 목회자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해야 합니다. 사람을 이용하지 말고 사람에게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나쁜 관계는 목회를 실패로 이끌어 갑니다.
-
- 오피니언
- 논문/책
-
[양대식 목사] 나쁜 관계
-
-
[박봉석 목사] 생각 잘 하기
- 미 텍사스 근교의 한 냉동 창고에서 직원이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동태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었고,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병원에 옮겨져 부검한 결과 사인(死因)은 동사(凍死)로 판명되었습니다. 그 사고는 토요일 오후 늦게까지 냉동 창고 안에서 잔업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관리자가 밖에서 문을 잠가버리고 퇴근함으로써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토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오전까지 36시간을 냉동 창고에 갇혀 변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토요일 오후부터는 전기가 끊겨 그 냉동 창고의 냉동기가 가동되지 않았습니다. 즉 토요일 오후부터 냉동 창고는 냉방이 되지 않는 말뿐인 냉동 창고였다는 것입니다. 실제 그 직원이 시체로 발견되었던 당시 그 냉동 창고의 온도는 섭씨 13도였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죽은 것은 냉동 창고의 추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사인은 추위가 아니고 추워서 곧 죽게 될 것이라는 그의 얼어붙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이 그를 죽인 것입니다. 오래 전 미국의 어느 신문에 자기가 고양이로 변하고 있다는 생각에 빠져버린 한 부인의 이야기기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아멜라라고 하는 이 부인은 20년 동안 고양이 음식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 사연은 이랬습니다. 어느 날 이 부인이 애지중지하며 키우던 고양이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몹시도 허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양이를 사랑해서 미리 사 둔 고양이 사료가 집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인은 그 고양이를 생각하며 그 사료를 한 개씩 집어먹기 시작하다가 그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그렇게 고양이 사료를 먹다보니까 자신이 고양이로 변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기를 20년이 지났습니다. 그는 진짜 고양이 행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분이 좋을 때는 고양이가 그러하듯이 그렁그렁 소리를 내었습니다. 화가 날 때는 고양이가 하듯이 야옹야옹 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심지어 그 부인의 생긴 모습도 점차 고양이처럼 변해갔습니다. 실제 신문에 그 부인의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진짜 고양이 같은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이 실화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생각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달라지고, 그래서 그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성경 로마서 8장 6절에서는 생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생각의 차이가 얼마나 엄청난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느 신문에 정치인이며 교회 장로인 한 분의 이야기기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예수님을 믿고 진리를 깨달은 후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에는 골프장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생각의 전환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일요일에 골프장을 안가면 정치에서 소외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장로님은 그렇게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기 속에 계신 성령님이 주일에는 골프장에 가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주일을 온전히 성수해야 한다고 늘 감동을 주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육신의 생각이 아닌 영의 생각,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령의 생각을 따르는 모습인 것이지요. 그렇지만 어느 때는 정치적인 욕심에 이끌려서 골프장을 갈 때가 있었는데, 그렇게 욕심에 이끌려서 골프장에 갔다가 오는 날이면 마음의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왠지 마음이 불안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모습이 추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성령님의 생각을 따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주일에는 아예 골프장 출입을 금했습니다. 그로부터 당장 찾아온 것이 마음의 평안이었습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의 평안이 물밀듯이 밀려 와서 교회도 기쁜 마음으로 오게 되고 삶에서도 이전과 다른 즐거움이 생겼다고 합니다. 바로 그것이 “영(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말씀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독자 여러분, 가끔씩 주일성수를 뒤로 하고 주일에 산이나 들로 소풍을 간 적은 없으십니까? 내 볼일 보러 간 적은 없으셨습니까? 그 때 마음이 평안하던가요? 평안하지 않은 것을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면 다 느낄 것입니다. 그것은 양심하고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내 속에 계신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므로 말미암아 내 속에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내주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참 평안은 자신 속에 계신 성령님의 생각과 내 행동이 일치할 때에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끝까지 육신의 생각에 무너지지 않고, 내 안에 내주하셔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려는 성령님의 생각을 따르는 진정한 성령의 사람이 되시기를 빕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
- 오피니언
- 칼럼
- 신앙과 삶
-
[박봉석 목사] 생각 잘 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