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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신사참배의 망령이 부활했는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는 자들과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사야 5:20) 지금 이 순간, 이란의 이슬람 독재 정권 아래서 10대 소녀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자유를 외쳤다는 이유로 짐승만도 못한 만행을 당하고 있다. "처녀는 곧장 천국에 간다"는 사탄적 논리로 강간을 자행해 정조를 빼앗고 교수형에 처하는 이 광기 어린 현장 앞에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참혹한 것은, 이 피의 정권에 동조하며 자금을 대는 대한민국 이재명 정권과, 그 주역을 거룩한 강단에 세워 '용비어천가'를 부른 한국 교계 지도자들의 영적 간음이다. 1. 국익도 국민도 없는 이재명 정권의 '해괴망측'한 독재 원조를 규탄한다! 이재명 정권은 지금 레바논에 이어 이란에까지 '인도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혈세를 퍼붓고 있다. 이것이 과연 누구의 돈인가? 우리 청년세대들이 짊어져야 할 빚이며 국민의 혈세다. * 배신 외교의 극치: 미국과 이란이 전쟁 중인 상황에서 적대 세력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한미 동맹의 근간을 부정하는 자폭 행위다. * 독재의 군자금: 50만 달러라는 지원금이 민간인에게 갈 것이라 믿는 바보는 없다. 이는 결국 소녀들을 살해하고 시민을 탄압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군자금이 될 뿐이다. * 주객전도의 인권: 자국민 고물가 고통과 천안함 유족의 눈물은 외면하면서, 외부 독재 정권에만 '개폼' 잡으며 생색내는 것은 국익을 팔아 자신의 사법 리스크와 정치적 폼을 사려는 비겁한 굴욕 외교다. 2. 강단을 유린한 이영훈·소강석의 '아부의 향연'과 현대판 신사참배 2026년 부활절, 거룩한 하나님의 성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단에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올라섰다. * 배교적 찬양: 이영훈 목사는 이란 정권을 돕고 교회 탄압의 중심에 선 이를 향해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신 분"이라며 찬양했다. 소강석 목사는 "박수 안 치는 사람 누구냐"며 성도를 협박하고, "아름답습니다"라는 망언으로 아부의 극치를 보였다. * 성도 유린: 권력자의 안위를 위해 성도의 노트북 비번을 풀게 하고 다이어리까지 뒤지는 만행은 이곳이 예배당인지 공산당 검문소인지 분간할 수 없게 했다. 이는 과거 일제 강점기 강단에 일장기를 걸고 천황에게 절하던 신사참배의 데자뷔다. 살아있는 우상에게 제사상을 차려준 이 목사들은 역사와 하나님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 3. 고신 저항 정신의 파산: 김홍석 전 총회장과 '기독교보'의 비겁한 변절 일제의 칼날 앞에서도 신앙의 정조를 지켰던 고신의 저항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 김홍석 전 총회장의 침묵: 이 참담한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손을 들어 축도한 행위는 악의 잔치에 하나님의 복을 비는 영적 배교다. * 기독교보의 궤변: 기독교보(2026.4.11)는 이 사태를 두고 "교단과 이념을 넘어", "교회의 연합과 일치"라 보도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좌파 독재 이념과 적그리스도적 행태가 '수용 가능한 이념'이 되었는가? 어찌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함께할 수 있는가? * 저항의 거세: "분열과 시대를 넘어"라는 표현은 자유민주주의와 교회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는 성도들의 입을 막으려는 교묘한 술책이다. 고신의 기관지라는 기독교보가 독재 조력자를 비판하기는커녕 '은혜로운 예배'라고 미화하는 것은 고신 선배들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4. 자칭 '고사모'의 선택적 정의와 위선을 고발한다! 손현보 목사가 강단에서 시대를 향해 선지자적 경고를 날릴 때는 '정교분리'와 '선거법'을 들먹이며 일간지에 광고까지 내어 정죄하던 자칭 '고사모' 목사들은 지금 어디에 숨었는가? * 손현보의 회개 촉구는 징계 대상이고, 이영훈·소강석의 굴종적 아부는 연합인가? * 거짓의 아비가 부활절 강단에 서서 성도들을 유린하는데도 '입꾹닫'하고 있는 당신들의 신학은 이미 파산했다. 당신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한상동 목사를 비판하던 가결자들과 다를 바 없는 비겁한 기회주의자들일 뿐이다. 결론: 주님, 이 땅의 촛대를 옮기지 마시옵소서! 이란의 소녀들이 처참하게 도살당하는 현실을 외면한 채, 권력자에게 강단을 팔아넘기고 '회복'과 '희망'이라는 거짓 평화를 노래하는 한국 교회는 심판의 대상이다. 이재명 정권은 즉각 독재 지원을 중단하라! 이영훈, 소강석, 김홍석과 고사모는 배교 행위를 회개하라! 기독교보는 저항 정신을 회복하고 위선적 보도를 중단하라!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선 멸망의 가증한 것들을 향해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외쳐야 한다. 그것만이 고신이 살고,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촛대는 반드시 이 땅에서 옮겨질 것이다.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잠언 31:8)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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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그렇게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도 인용을 하려니 부끄러운 한자말이 있다. 백절불굴(百折不屈)인데 백번 꺾어도 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떠한 어려움에도 결코 뜻한 바를 굽히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한국이 낳은 순교자이신 주기철목사님께서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죽음을 던지는 굳건한 의지를 남겼다. 동음이의어가 있는데 의사(義士)와 의사(醫師)의 차이가 크다. 앞의 의사(義士)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꿋꿋한 사람을 뜻하며, 뒤의 의사(醫師)는 자기가 가진 의술로 타인을 살리는 사람이다. 한 사람은 자기가 죽는 길이요, 또 한 사람은 남을 살리는 길이다.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의사(義士)와 의사(醫師) 중에 어떤 인물이 되기를 원하느냐고 물으면 자기 목숨을 내 놓는 의사(義士)가 되려는 청소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도 뜻한 바를 굽히지 않는 결연한 인물들이 더러 나온다. 가나안 땅의 분배를 두고 갈렙은 팔십오 세의 나이로 헤브론 땅을 달라고 요구를 한다. (여호수아14:12)에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라고 마치 출정식과도 같은 연설을 쏟아내었다. 이처럼 자기가 믿는 바를 끝까지 지켜나가는 행동은 쉽지 않다. 군산지방에서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귀암(龜岩)노인이라는 한말의 병사가 있다. 아무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귀암에서 살다 자결했기로 귀암노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 근위 제2연대 1대대 소속 하사졸(下士卒)로 당일 해산식장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항일의거에 참여한 저항군졸이다. 해산식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일본군은 어깨에 견장을 떼고 은사금 명목으로 80원씩 나누어 주었다. 그는 받은 은사금을 찢어버리고 다른 군졸들과 함께 무기고를 털어 당시 서소문 안에 있었던 군영을 뛰쳐나와 남대문 근처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 길로 일본군에게 쫓겨 창의문을 거쳐 삼남지방으로 내려가 약 2년 동안 의병으로 항일운동을 했다. 1909년 전라북도 줄포싸움에서 마지막으로 패하고, 이 때의 부상으로 평생 절름발이가 된 채 숨어 살았다. 그 무렵 금강하류 군산연안에 귀암이란 마을에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많이 와서 합숙을 하면서 호남지방에 선교를 하고 있었다. 쫓기던 그는 왜경들의 치외법권 지역인 이 선교사들의 숙소로 뛰어들어가 전후사정을 이야기하고 하인으로 고용해 줄 것을 애걸하였다. 이 절름발이 병사는 그날부터 여선교사들의 숙소 경호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군영에 있을 때 차고 다녔던 장도(長刀)를 보배처럼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서소문 탈영이래 한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그 장도를 뽑아 어깨에 둘러메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밤마다 숙사를 순찰했던 것이다. 귀암노인은 몸에 밴 군경 생활의 습성을 조금도 고치려 하지 않았다. 새벽 해 뜨기 전에 일어나 찬물을 끼얹고, 비록 절뚝거리지만 스스로의 구령에 따라 보조를 맞추었다. 또한 몸에 밴 군기 그대로 저녁에는 왕궁이 있는 북쪽을 향해 요배하는 것을 거르는 법이 없었다. 가까이 지내는 선교사들이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귀암노인이 급전이 필요하여 선교사에게 돈돔 빌려줄 것을 요청한다. 선교사는 이런 기회를 타서 몸에서 떼질 않는 장도를 저당으로 내놓기만 하면 돈을 빌려 주겠다고 하였다. 귀암노인은 한 사나흘 고민하다가 근 20여년 동안 잠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장도를 선교사에게 맡겼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 귀암노인은 아무말 없이 행적을 감춘 것이었다. 그의 실종과 더불어 저당으로 잡아둔 장도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장도를 놓아두었던 자리에 한 통의 편지가 놓여있었는데 펴 보니 ‘무사로서 양인 밑에 천한 삶을 이어가는 것도 치욕인데 칼마저 몸에서 떼어놓게 되었으니 이제는 잠시도 살아갈 면목이 없어졌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그날 선교사들은 귀암강 강변에서 자기의 장도로 자기 목을 찌르고 죽은 노병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한국의 무사정신에 강동한 선교사들은 귀암강 둔덕에 노인을 묻어주고 십자기를 세워 이 강골병사의 영혼이 영생할 것을 빌어주었다고 한다. 한 평생 다리를 절은 이 노인은 브니엘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이후 절었던 야곱이 떠오른다. (창세기32:31)에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라고 말씀한다. 야곱 역시 백절불굴의 기백이 있었다. (창세기32:26)에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라고 말씀한다. 백암노인이 만약 천국에 갔다면 함께 다리를 절었던 야곱과 함께 좋은 친구가 되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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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총대 파송 하지 말자 – ‘부결’
노회의 제일 중요한 사명은 목사를 양성하는 것과 그 사역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보호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회기에 부총회장으로 세움을 받아 올해 총회장이 되어야 했던 김문훈 목사는 우리 부산서부노회에 속한 우리의 동역자입니다. 노회를 넘어 고신총회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큰 일을 감당하던 포도원교회를 목회하는 우리 노회의 아들입니다. 세상에서도 내 자식이 분명히 잘못한 일이지만 부모가 일단 책임을 지고 모든 것을 안고 가는 것이 선행된 다음, 그 자녀의 잘잘못을 논합니다. 안타까웠던 것은 목사의 어머니 격인 노회도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보다는 세상 여론의 눈치를 보며 노회가 안게 될 부담부터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다 연약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세상의 눈치를 본다는 것,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세상 눈치를 보고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을 마치 복음적인 사역처럼 생각하는데, 교회가 하나님의 인정보다 세상의 평가를 우선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안타까움을 넘어 참담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더럽혀지는 것과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개인의 자리 욕심과 계파의 정치 논리로 동료 목사라는 자들이 공의와 정의라는 명분으로 동료 목사의 비리를 수집하고 세상에 발설하여, 한 목사의 잘못을 빌미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와 정의를 주장하는 것 같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욕심과 세상보다 더 비열한 정치 논리가 뱀이 꽈리를 틀 듯 그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피해를 입고 지금도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이용한 간교한 무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며, 고신총회가 반드시 밝혀내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대를 살며 목회하게 될 후배와 교회들을 위해서도 반드시 밝혀내어 교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전례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투서를 돌리고 연명하는 것조차 불법입니다. 특히 우리 고신은 세상 법정에 고발하는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아팠던 역사가 있습니다. 교회를 정화하고 공의와 정의를 원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성경에 기초한 교회법을 따라 정당한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현재 이 문제로 가장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포도원교회일 것입니다. 김문훈 목사도 오늘의 포도원교회가 없었다면 우리가 비난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포도원교회를 사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교회의 부름을 받아 목회하는 목사에게는 최고의 형벌입니다. 어려움과 위기에 처해 있는 포도원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포도원교회의 처절한 노력과 수고를 조금 더 지켜보십시다. 아마 많은 분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 의견이 나오고 여러 제안이 있었던 것도 모두 어머니 노회로서의 책임감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우리 노회 목사회원 1번으로서 같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금이라도 총회와 한국교회 앞에 우리 노회가 책임지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총회 총대로 나가고 총회에서 직분을 맡아 봉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회의 추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총회 총대를 추천한 노회는 총대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동시에 노회는 고신총회에 대한 책임도 있습니다. 노회가 책임을 지는데 눈 가리고 아웅하면 더 큰 웃음거리가 되고, 그렇다고 총회에 대한 책임도 회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우리 노회는 올해 총회 회계로 수고하셔야 하는 장로님이 있고, 선출직 이사도 있으며, 특별국 국원도 있고, 총회를 운영하는 상임위원회 위원장도 있습니다. 고신총회의 장자로 자부하는 우리 부산서부노회가 총회 임원과 총회 선출직 이사, 특별국 국원과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제외하고 이번 총회 회기에는 총대를 파송하지 않는 것으로, 고신총회 앞에 최소한의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였으면 합니다. 이 안이 노회에서 받아들여진다면 저는 헌법위원회 특별국 국원이지만 총대로 가지 않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총회 총대 선정에 대한 회의 진행 발언에 대해 정식으로 동의안을 냅니다. 이번 총회 회기에 우리 부산서부노회는 총회 임원 장로, 선출직 이사, 총회 특별국원, 총회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제외하고 총대를 파송하지 않기로 동의합니다.※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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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7] 이만열의 이승만 대통령 비하와 김구 성역화의 위험한 이분법
서론: 건국의 아버지를 지우고 실패한 낭만을 신격화하다 지난 연재를 통해 필자는 이만열 교수가 '친일 프레임'을 어떻게 악용하여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들을 사상적으로 숙청했는지 폭로했다. 그러나 이만열 사관의 진정한 목적지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인 이승만 대통령을 철저히 폄훼하고, 그 대척점에 서 있던 김구 선생을 신격화하여 성도들에게 그릇된 국가관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낙인찍는 자학적 사관의 핵심 동력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상적 오염이 고신 교단 내부로 깊숙이 침투했다는 점이다. 소위 '고신을 사랑하는 모임(고사모)'을 자처하는 이들이 등장하고, 수많은 목회자나 심지어 총회장까지도 제주 4.3 사건의 본질 왜곡이나 현 이재명 정권의 정교분리 오독, 차별금지법 등에 대해 침묵하거나 동조하게 만드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다. 1. 김구의 독립 투쟁과 친북적 반(反)건국 행위 사이의 엄격한 구분 이만열은 백범 김구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바친 고귀한 독립 투쟁의 헌신을 이용해, 1948년 건국 반대라는 명백한 정치적 실책까지 '민족적 정의'로 포장하는 논리를 펼친다. 그는 김구가 선택한 남북협상 노선을 분단을 막기 위한 유일한 민족적 정통성을 지닌 길로 평가하며, 반대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노선은 분단을 고착화한 행위로 비판해 왔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애국심은 오직 독립운동의 현장까지만 인정될 수 있는 것이며, 건국 과정에서의 친북적 행보는 결코 애국으로 미화될 수 없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그는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이야말로 민족 분단을 막으려 했던 정통성 있는 대안이었다고 평가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 역시 이승만의 단독정부가 아닌 김구와 김규식이 추구했던 통일 정부 수립 노력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등) 2) [비평]: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시기 헌신은 존경받아 마땅하나, 1948년 건국 과정에서의 행태는 단호히 비판받아야 한다. 당시 김구는 김일성이 쳐놓은 통일전선전술의 덫에 빠져 남북협상이라는 명분 아래 대한민국 건국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이는 소련과 김일성의 적화 야욕에 이용당한 역사적 과오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자유 민주의 기틀을 흔든 반건국적 행위에 가깝다. 이만열은 이러한 실체를 외면한 채 김구의 실패한 행보를 민족의 정통성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2. 제주 4.3 사건 왜곡: 공산 폭동을 ‘미군에 대한 항거’로 둔갑시키다 이만열식 사관이 낳은 가장 파괴적인 결과물은 제주 4.3 사건의 본질을 뒤바꾼 조직적 역사 공정이다. 그는 4.3을 단독 정부 수립에 저항한 민중들의 투쟁이자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사상은 고신 내 유력 목회자들에게까지 전염되었다. 필자는 과거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원로)가 손봉호 교수의 영향을 받은 일부 유력 목회자들과 함께 제주 전적지를 탐방하며, "제주 4.3 사건은 미군의 말발굽 아래 희생당한 제주 도민들이 미군과 이승만 정권에 항거한 저항"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사실을 한 참석자로부터 직접 듣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특히 4.3의 주동자 김달삼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1948년 4월 3일 새벽, 제주 전역의 경찰지소를 습격하며 무장 폭동을 일으켰고 수많은 경찰과 우익 인사, 양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폭동 직후 북한으로 도주한 그는 김일성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이후 6.25 전쟁 직전인 1949년 말, 다시 유격대장으로 남파되어 활동하다가 1950년 3월 20일 강원도 정선 승지골(일명 '김달삼 모가지 잘린 골')에서 광복군 출신 김관오 연대장이 이끄는 국군 제8사단에 의해 사살되었다. 김달삼이 일으킨 제주 4.3 사건이 어떻게 '민주 항쟁'인가? 이 명백한 반란 수괴를 미화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그는 제주 4.3을 통일 정부 수립을 갈망하던 민중들이 분단 노선에 저항하며 일어난 사건으로 규정하며, 그 비극의 책임을 이승만 정권과 외세인 미군에 돌린다. 또한 5.10 선거 거부를 민족 자결주의적 저항의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이만열, 『한국 현대사와 기독교』 등) 2) [비평]: 4.3의 본질은 공산 세력의 무장 반란이다. 특히 당시 공산 폭도들에 의해 자행된 '기독교 순교적 진실'을 이만열은 침묵한다. 제주 최초의 순교자 이도종 목사는 공산 폭도들에게 생매장당했고, 삼양교회 김임종 집사 등 수많은 성도가 살해되었다. 당시 제주 27개 교회 중 12개 교회가 소실된 이 참혹한 잔혹사를 외면하고 공산 반란군 주동자를 '민주 항쟁가'로 미화하는 것은 기독교 역사학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린 반역행위다. 이런 제주 4.3 사건을 민주항쟁이라며 전적지 순례를 한 이동원 목사 등 일부 귀가 얇은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이만열식 역사왜곡에서 속히 벗어나기를 촉구한다. 3. 이승만의 통찰을 거부하는 좌파적 역사 공정 이만열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며, 이를 단순히 '정부 수립'으로 폄하한다. 그는 대한민국이 1919년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이미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며 2019년을 '건국 100주년'으로 기념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쳐왔다. 그러나 이는 국제법상 국가의 3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이 실재하지 않았던 임시정부의 한계를 무시한 감성적 민족주의에 불과하다. 만약 1919년에 이미 나라가 세워졌다면, 우리 선조들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찾기 위해 왜 그토록 피 흘려 독립운동을 했단 말인가? 건국된 나라를 되찾는 것은 '광복'이지 '독립운동'이 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 ①: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민족 분단을 선택한 인물이며, 친일 세력을 비호하여 건국 정통성을 훼손했다.” (출처: 『우리 역사 500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만열의 주장 요지 ②: “대한민국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미 건국되었다.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주장하는 것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분단을 정당화하는 반역사적 행위다.” (출처: 이만열 기고 및 ‘건국 100주년’ 관련 강연 요지) 2) [비평]:이만열의 '1919년 건국설'은 듣기엔 그럴듯하나 치명적인 논리적 파탄에 직면한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 1919년에 이미 나라가 건국되었다면, 우리 선조들은 '이미 건국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왜 그토록 피 흘려 독립운동을 했단 말인가? 건국이 이미 완료되었다면 독립운동은 존재할 이유가 없으며, 이는 선조들의 고귀한 투쟁을 '이미 있는 것을 찾는' 무의미한 반복으로 격하시키는 궤변이다. 국제법적으로 국가는 국민, 영토, 주권이라는 3요소가 확립되어야 한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나라를 세우기 위한 '준비 기구'였을 뿐, 실질적인 영토를 통치하거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1948년 8월 15일 건국은 한반도 내에 실체적인 국민이 구성되고, 영토에 대한 통치권이 확립되었으며, 대외적으로 주권을 선포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실체가 완성된 기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국가의 토대 위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세웠고, '한미동맹'과 '기독교 입국론'이라는 강력한 안전판을 구축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북한의 공산 정권과 차별화되는 정통성의 근거다. 이만열은 이승만을 친일파 비호자로 매도하며 건국의 정통성을 깎아내리지만, 정작 북한 정권 핵심부에 포진했던 김영주, 강양욱, 정준택 같은 골수 친일 부역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한다. 결국, 건국을 분단의 원죄로 몰아세우는 그의 억지는 집안에 불길이 닥칠 때 남은 가족이라도 살리려 방화문을 닫은 소방관을 향해, '왜 가족이 못 만나게 가로막느냐'며 불을 지른 방화범 대신 소방관을 꾸짖는 꼴이다. 결론: 거짓된 이분법을 깨고 건국 정신을 회복하라 이만열 교수가 쳐놓은 이승만과 김구의 거짓된 이분법, 그리고 제주 4.3 사건의 왜곡은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파괴하려는 사상적 덫이다. 이 덫에 걸린 상당수 복음주의 목회자들과 '자칭 고사모' 목사들은 고신의 순결한 정신을 좌경화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다. 우리는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기 애국심은 존중하되, 1948년 건국 과정에서 김일성에게 철저히 이용당해 이승만의 건국을 방해한 그의 친북적 역사적 과오와는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자학 사관을 걷어내지 않는 한 고신과 한국 교회는 결코 바로 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승만을 통해 허락하신 자유 대한민국과 고신 교회의 정통성을 지켜내기 위해 이만열의 왜곡된 역사인식과 선전선동의 칼날을 반드시 꺾어야만 한다. 그것만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개혁주의 정절을 회복하는 길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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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6] 이만열의 친일 프레임과 역사적 살인: 건국 주역들을 향한 사상적 테러
서론:손봉호의 윤리가 씨앗이라면, 이만열의 사관은 그 독초의 토양이다 앞선 기고(1~5번)를 통해 필자는 손봉호 교수가 기독교 윤리라는 가면을 쓰고 한국 교회를 좌경화의 늪으로 어떻게 인도했는지 파헤쳤다. 그러나 손 교수의 윤리 담론이 고신과 SFC 내부에서 독버섯처럼 번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에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치욕의 역사로 규정한 이만열 교수의 왜곡된 역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만열은 친일 청산이라는 도덕적 결벽증을 무기 삼아 건국의 정통성을 난도질했으며, 고신 정신의 본질인 순교 신앙을 좌파적 민족주의 투쟁으로 변질시킨 장본인이다. 1. 국가 상징과 호국 영웅을 향한 인격적 살인 이만열 교수가 주도한 『친일인명사전』은 객관적 사료에 근거한 학술적 결과물이 아니라 특정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사상적 숙청이자 정치적 낙인찍기의 산물이다. 그는 역사의 입체성을 무시하고 오직 '친일'이라는 단일한 잣대만을 휘둘러 대한민국 건국의 기틀을 닦은 거목들을 사상적으로 매장하는 데 몰두하였다. 이만열의 주장 ①:“백선엽은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독립군을 때려잡은 반민족 행위자다. 그의 공로를 기리는 것은 민족 정기를 훼손하는 일이다.” (출처: 이만열, 「백선엽의 친일 행적과 국립묘지 안장 문제」, 2020년 언론 기고 및 강연 요약) 이만열의 주장 ②: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는 친일파다. 친일 잔재인 애국가를 국가로 부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출처: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지식산업사, 1991) [비평]:이는 일제강점기라는 처절한 역사의 맥락을 무시한 처사이다. 6.25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백선엽 장군을 간도특설대 경력만으로 단죄하는 것은 국군의 정통성을 파괴하려는 시도이다. 당시 간도특설대의 주요 토벌 대상은 독립군이 아닌 중공군과 팔로군이었으며, 1930년대 중반 이후 만주의 독립군 세력은 이미 궤멸되거나 소련으로 이동한 상태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철저히 묵살되었다. 또한 애국가를 공격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상징 자체를 부정하려는 고도의 사상적 테러이자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역사 부정주의이다. 2. 근대화의 선구자들을 향한 주홍글씨와 '선택적 단죄'의 이중성 이만열은 교육, 언론, 문학 등 각 분야에서 대한민국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거인들을 모조리 친일 부역자로 매도하며 그들의 사회적 성취를 부정하였다. 그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려 했던 선구자들의 고뇌는 외면한 채 결과론적인 비판만을 쏟아냈다. 이만열의 주장 ①: “김성수, 김활란 등은 일제에 협력한 반민족 인사들이다. 그들이 세운 교육·언론 기관은 친일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출처: 이만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역사적 의의」, 민족문제연구소 강연, 2009) 이만열의 주장 ②: “민족 지성이라 불리는 최남선과 이광수 역시 결국 변절한 부역자들에 불과하다.” (출처: 이만열, 『우리 역사 500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바다출판사, 2000) [비평]:이들이 닦아놓은 근대 문명의 토대가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이만열의 '선택적 단죄'이다. 대한민국 건국 세력의 행적은 현미경으로 파헤치면서도, 정작 북한 정권 핵심부에 포진했던 수많은 친일 인사들(김일성의 동생 김영주, 부주석 김차승 등)에 대해서는 기이할 정도로 침묵한다. 민족정기를 말하면서 북한의 노골적인 친일파 등용은 눈감아주는 그의 역사학은 공정한 학문이 아니라 특정 진영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를 흉기로 사용한 정치 선동일 뿐이다. 3. 순교 신앙을 민족 해방 투쟁으로 격하시킨 영적 범죄 이만열 교수의 가장 큰 해악은 고신의 자랑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신앙적 성격을 왜곡하여 세속적 민족주의의 틀 안으로 가두어버린 데 있다. 그는 선배 목회자들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당했던 고난을 단순한 항일 운동의 일종으로 해석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초월적 가치를 훼손하였다. 이만열의 주장 ①: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민족 정기를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적 항일 투쟁의 연장선에 있다.” (출처: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지식산업사, 1991) 이만열의 주장 ②: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사명은 민족의 고난과 함께하며 사회를 변혁하는 데 있다.” (출처: 이만열, 「기독교 역사관의 재정립」, 기독교역사연구소 세미나 강연, 2010) [비평]:고신 선배들의 저항은 민족주의 차원의 항일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1계명을 지키기 위해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을 수호하려 했던 거룩한 '신앙 수호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만열은 이를 세속적인 민족 해방 투쟁으로 격하시켜 신앙의 본질을 변질시켰다. 이러한 영적 왜곡은 SFC 간사들과 신학생들이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보다 좌파적 민중사관에 더 열광하게 만드는 사상적 통로가 되었다. 신앙의 선배들이 피로 지킨 제단 위에 이만열은 좌파 이데올로기의 향로를 피워 올린 것이다. 결론:고신의 심장을 겨눈 이만열의 칼을 꺾어야 한다 이만열 교수는 기독교 역사학자라는 학문적 권위를 누리며 정작 고신의 뿌리인 자유민주주의와 성경적 보수 신학의 기틀을 허무는 데 앞장서 왔다. 그의 사상은 성경이 말하는 절대 진리가 아니라 특정 정치 세력의 논리를 대변하는 변증법적 역사론에 불과하다. 손봉호의 윤리가 한국 교회의 손발을 묶었다면 이만열의 사관은 한국 교회의 머리와 심장을 좌경화로 세뇌시켰다. 이제 고신 총회와 깨어있는 성도들은 직시해야 한다. 이만열 식의 자학적 역사관을 단호히 배격하고 하나님께서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허락하신 자유 대한민국과 고신 교회의 정통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 거짓된 사슬을 끊어낼 때 비로소 고신의 순교 정신이 다시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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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활절 연합예배에서의 이영훈, 소강석의 망언과 이에 대해 침묵하는 자칭 고사모를 강력 규탄한다"
고명길 목사 (고신애국지도자연합 전문위원장) 마태복음 24장,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하신 예수님의 경고가 오늘날 대한민국 강단에서 재현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2026년 4월 5일 부활절, 한국 교회의 심장부라 자부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단에서 우리는 거짓과 술수의 권력자가 등판하는 참담한 광경을 목도했다. 그러나 더 절망적인 것은, 평소 강단의 거룩함을 외치며 동료 목회자에게 돌을 던지던 자칭 고사모(고신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모임) 목사들의 굴욕적인 침묵이다. 1. 손현보 목사의 선지자적 외침: 고사모의 광기 어린 정죄 과거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는 강단에서 “이재명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외쳤다. 이는 특정 개인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고 차별금지법 등을 통해 교회를 억압하려는 거대 세력에 대한 선지자적 경고였다. 또한 그는 예배 후 교육감 후보를 소개하며 기독교적 가치를 수호할 것을 독려했다. 당시 고사모 목사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선거법 위반과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강대상에서 정치적 발언을 했다고 손 목사를 총공격했다. 심지어 고신 총회 석상에서까지 나서서 손 목사를 비판하며 징계를 요구하고, 일간지에 광고를 내며 그를 신학적 타락자로 몰아세웠다. 그들에게 손현보의 워딩은 반드시 척결해야 할 정치 선동이었다. 2. 이영훈·소강석의 아부의 향연: 부활절 거룩한 성전의 참사 그렇다면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 강단에서 벌어진 일은 무엇인가. 이영훈 목사와 소강석 목사는 차별금지법과 교회해체법을 주도하는 이재명을 강단에 세우고 아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이영훈 목사는 이재명을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시고 한국을 이끌고 계신 분"이라고 찬양적 소개를 했다. 소강석 목사는 “박수 안치는 사람 누구예요. 이따 좀 남으라"고 윽박질렀고, "실개천 출신이지만 결코 그 개천을 잊지 않으시며 국민화합과 실용정치에 올인하는 모습이 한국 교회 보기에도 참 아름답습니다”라는 망언을 쏟아냈다. 수많은 사법적 의혹과 교회 탄압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향해 ‘무거운 짐을 짊어 지셨다’, ‘아름답습니다’ 라는 찬사를 보낸 것은 아부를 넘어선 영적 배교다. 3. 성도를 유린한 살벌한 검문과 신사참배의 데자뷔 강단 아래의 풍경은 더욱 처참했다. 현장 성도의 증언에 따르면, 교회 입구에서 권력자의 안전을 위해 성도의 개인 노트북 비밀번호를 강제로 풀게 하고 개인 다이어리까지 뒤지는 만행이 저질러졌다. 예배의 주인인 하나님보다 권력자의 안위가 우선시된 현장은 중국 공산당 치하의 예배와 다를 바 없었다. 이 모습은 과거 일제 강점기, 강단에 일장기를 걸고 천황을 향해 절하던 신사참배의 현장과 겹쳐진다. 당시 친일 목사들은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명분으로 내세워 우상에게 무릎 꿇었다. 오늘날 이영훈·소강석 목사가 차별금지법과 교회해체법을 획책하는 권력자에게 강단을 내어준 것은, 형태만 다를 뿐 살아있는 우상에게 제사상을 차려준 현대판 신사참배와 다를 바 없다. 4. 고사모의 선택적 침묵: 당신들의 신학은 파산했다 우리는 묻는다. 손현보 목사의 직언에는 선거법 위반이라며 총회 석상에서까지 칼을 휘두르던 고사모 목사들은 왜 이 명백한 강단 유린 사건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는가. 손현보의 회개 촉구는 징계 대상이고, 이영훈·소강석의 굴종적 아부는 연합인가? 교육감 후보 소개는 강단 오염이고, 거짓의 아비 이재명의 축사는 한국 교회의 영광인가? 이재명의 실체를 경고하는 손현보의 말은 정치라며 정죄하더니, 이재명이 아름답다며 박수를 강요하는 이영훈·소강석의 말에는 침묵하는 고사모. 당신들의 정교분리는 신학적 원칙이 아니라, 자신들의 반성경적 논리를 강요했던 비겁한 고무줄 잣대였음이 만천하에 증명되었다. 당신들이야말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한상동 목사 등을 비판한 신사참배 가결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5. 고신 정신은 권력 앞의 비겁한 침묵이 아니다 고신 정신은 신사참배라는 거대 권력 앞에 목숨을 걸고 '아니오'를 외쳤던 선배들의 피 위에 서 있다. 교회 파괴자인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느라 성도들을 유린하고 강단을 팔아넘긴 이 못된 현대판 신사참배자들을 향해 입 닫고 침묵하는 것은 고신 정신과 선배들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고사모 목사들에게 강력히 요구한다. 손현보 목사에게 퍼부었던 그 서슬 퍼런 비판의 잣대를 이영훈·소강석 목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라. 즉각 성명서를 내고 그들의 배교적 행태에 대한 회개와 책임을 요구하라. 그리고 그들의 교회 앞에도 가서 정교분리를 어겼다는 당신들의 논리대로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가서 시위도 하고 기도회도 열라. 거짓의 아비가 부활절 강단에 선 이 엄중한 사태 앞에서 끝까지 '입꾹닫'하고 침묵한다면, 당신들은 더 이상 고신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입에 담을 자격도 없는 철부지 목사들이고 장로들일 뿐이다. 부활절 강단은 권력자의 무대가 결코 아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만이 영광받을 거룩한 곳이다. 선지자적 외침이 사라지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강단은 더 이상 교회의 강단이 아니다.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선 이재명과 그 무리들에 대해 “당신이 그 사람이라”, “저 여우에게 가서 이르라”는 경고의 말씀을 다 같이 강하게 외쳐야 한다. 그것만이 고신이 살고,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길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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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 ‘욜로(YOLO)’의 시대를 넘어, 부활의 참된 소망으로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욜로(YOLO)’라는 말이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이 말은 “인생은 한 번뿐이니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며 살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 땅의 삶이 전부인 양, 오늘을 마음껏 소비하고 즐기라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길어진 100세 시대라 할지라도 지나고 보면 인생은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날아가는 화살과 같이 쏜살같이 흘러갑니다. 만약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이 땅의 삶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면 그 짧은 여정의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지독한 허무와 공허 그리고 죽음 앞의 우울함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인 ‘부활’은 이 허무한 인생의 마침표를 영원한 생명의 쉼표로 바꾸어 놓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겨울이 되어 얼어붙었던 가지에 봄이 되면 다시 잎새가 싹트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영원한 삶이 예비되어 있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단지 죽음 이후의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는 강력한 원동력입니다. 슬픔을 사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 릴런드 스탠퍼드는 수재였던 외아들을 갑자기 잃고 극도의 슬픔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으니 저 대신 세상의 청년들을 도와주세요”라는 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그의 인생관은 완전히 바뀝니다. 아들이 천국에 살아있다는 부활의 소망을 품게 된 그는 당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헌납해 오늘날의 명문 스탠퍼드 대학을 세웠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개인의 절망을 넘어 수많은 젊은이를 살리는 위대한 헌신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어느 호스피스 병동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젊은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 남긴 편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가, 엄마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향해 가는 문이란다. 기나긴 겨울을 이기고 봄에 피어나는 저 꽃들처럼 우리도 눈물 없는 그곳에서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이처럼 부활의 소망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위대한 사랑과 용기를 현재의 삶 속에 불어넣습니다. 성경은 부활한 우리가 누릴 미래에 대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라고 약속합니다. 부활은 눈물도 사망도 애통함도 없는 완벽하고 행복한 삶이 열리는 기적입니다. 이 땅의 쾌락만을 좇는 ‘욜로’의 허무함을 넘어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가는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2026년 부활절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참된 기쁨과 미래에 대한 찬란한 소망이 상처받고 지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가득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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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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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 부활절을 맞이하는 믿음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세번의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ㅡ.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신 후 처음의 사람에게 1.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창1;28 하나님이 아닌 존재인 뱀이 처음의 사람에게 찾아와 그들의 욕구를 채우도록하고 뱀의 사상을 따르게 한 후..세상은 어둡게 변해 버렸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2.정녕 죽으리라..ㅡ창2;17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찌니라,ㅡ창3;19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고, 밭은 소출을 내지 않고 행복했던 가정에 행복은 간 곳 없고, 형이 동생을 해하고 장례를 치르고 부부는 갈등을 겪고,,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한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 지금도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고, 영생의 나라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 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ㅡ 요11;25-2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시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주시고 ㅡ무덤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십니다.ㅡ요528. 죽음으로 가는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ㅡ 요3;16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의 댓가를 치르고서야 우리 믿는 자들이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ㅡ그가 찔리고 그가 상하고 그가 징계를 받고, 그가 체찍에 맞음은 우리 허물과 죄와 불안과 걱정과 공포, 병 때문인 것을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ㅡ사53;5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하셨고. 사53;6.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들의 저주가 그를 믿음으로 물러가는 복된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3;13-14 이 말씀이 부활절을 맞이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힘이 되고 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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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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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전서 1:3) 할렐루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온 마음 다해 찬양합니다. 2026년의 봄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에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이웃들의 삶 위에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죽음의 권세도 이길 수 있다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처럼 온 세상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경제적인 어려움들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빈 무덤의 승리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과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거룩한 백성된 우리는 생명의 부활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이번 부활절을 시작으로 경남 지역 구석구석에 산 소망을 전하는 통로로 소외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무너진 마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 부활의 아침은 어둠이 지나고 반드시 빛이 온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자 확증입니다. 비록 현실의 고난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지라도,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신뢰하고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갈등이 있는 곳에 화해를 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다시 한번 우리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이 기쁜 소식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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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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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통영기연 곽만섭 목사
- 사랑하는 경남신문 독자들과 경남 성도들께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아침에 선 교회와 성도들이 이 놀라운 생명의 복음을 다시 붙들며, 믿음 가운데 새 힘을 얻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나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의 상황은 여전히 우리를 흔들지만, 주님께서 살아계신 한 교회는 무너지지 않으며 우리의 믿음 또한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능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위에 부활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여, 각 가정과 삶의 자리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일상 속에서 부활의 기쁨이 실제가 되어, 지친 마음을 회복시키고 서로를 위로하는 은혜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역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흘려보내며, 말과 삶으로 복음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작은 섬김과 나눔이 모여 이웃에게는 위로가 되고, 사회에는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어둠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의 은혜로 날마다 새 힘을 얻고, 기쁨으로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여러분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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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통영기연 곽만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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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녕기연 안덕수 목사
- 부활에 아침에 고백할 승리의 고백 매해 맞이하는 부활절인데 올해는 더욱더 그 의미가 깊이 다가온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의 한말씀, 다이루었다(요19:30)는 말씀이 마음속에서 계속 울린다. 모든것을 하나님께맡기시고, 다 이루심의 완성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그분의 마지막은 승리와 완성의 선언이셨다. “다 이루었다.”이 한마디에는 완전한 지불의 선언이다. 예수는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값을 하나하나 치르셨다. 낮은 땅에 오심, 모욕과 조롱, 가시 면류관, 십자가의 고통까지 치르시면서 그 모든 과정은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는 길이었다. 이때 휘장이 갈라지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무너졌다.죄로 인해 닫혀 있던 길이 열렸고, 하나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다가오시는 분이 되셨다.어쩌면 우리는 이 장면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두 팔을 벌리사 안아주신 사건이다. “이제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 십자가는 단지 고난의 상징에서 용서와 초대의 상징이 된것이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고백은 죽음을 앞둔 체념이 아니다.사명을 완수한 자의 평안이며, 전적인 신뢰의 표현이다. 우리는 흔히 ‘안식’을 쉼으로 이해한다.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안식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인간은 여섯 날 동안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안식일은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날이라는 것이다.이 통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우리는 끊임없이 계획하고, 통제하려 하며, 결과를 붙잡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커진다.그러나 예수의 마지막 고백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준다. “맡겨라.”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괴로움과 눈물의 시간이 찾아올 때, 심지어 과거의 상처와 실패까지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안식을 경험한다. 부활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승리의 선언을 한다. 십자가는 겉으로 보면 패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죄와 죽음을 이긴 승리가 담겨 있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말한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따라서 믿음의 삶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삶.붙잡으려 하기보다 의탁하는 삶.그리고 그 고백은 매주 예배 속에서, 또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반복되어야 한다. 내 삶을 주께 맡김을 통해 신앙은 완성되어 간다. 참된 안식과 승리를 경험하게 되기실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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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녕기연 안덕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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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진해기연 정용기 목사
- 사랑하는 진해와 경남 지역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우리의 믿음의 핵심으로서, 절망 가운데 있는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소망입니다.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현재의 능력이며, 미래를 향한 확실한 약속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고난과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시대는 세계 각국의 이기주의와 전쟁의 소식, 경제적 어려움과 이념의 대립, 빈부와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각자의 삶에 놓인 무거운 짐들로 인해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려움 속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평강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지역사회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부활 신앙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생명을 받은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 희망을, 상처의 자리에 치유를, 분열의 자리에 화해를 이루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진해와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가 한마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나누며 이 땅 가운데 생명의 복음을 더욱 힘있게 전하는 증인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6년 부활절 진해기독교연합회 회장 정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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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진해기연 정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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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바벨탑 위에 자리 잡는 AI 기술이 되나
- 최근 지인이 읽고 있는 발터 벤야민이 지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비평서를 잠시 빌려 읽었다. 이 책의 저자 발터 벤야민은 독일 출신 유대인으로 철학과 미학 분야에서 저술 활동을 한 작가이다. 책의 줄거리는 작가가 20여 년 전 향후 AI 기술 시대를 예상했다는 점이다. AI 시대가 오면 예술작품에 있어 진품과 가짜의 판별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우리는 지금 AI 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생활 적응의 시대에 돌입했다. AI 기술이 작가의 예상대로 오늘날 예술품 시장에서 대혼란을 일으키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이 책에서 작가의 탁월한 예지력에 감탄할 수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AI 기술 시대에 걱정되는 바가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챗GPT, 제미나이 활용법을 배우는 붐이 일고 있고, 산업 현장은 물론 자동차와 가정 모든 곳에서 이제 로봇과 함께 살아가는 시대에 직면했다. 문제는 이것이 교회에 크고 무섭게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교회에서 AI 기술이 교회 행정을 돕고 다양한 교육 현장에 이롭게 적용되고 있다. 교회는 우리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이다. 만인이 교회에서 기도하고 찬양함으로써 주의 음성을 듣기도 한다. 주로 목사의 설교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많다. 예배의 비중과 중심에 설교자의 말씀 선포가 가장 중요시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요즘 교계를 비롯해 곳곳에서 ‘AI 설교’라는 뜨거운 담론으로 논쟁과 토론이 일고 있다. AI 기술이 설교 원고를 만들고 있다는데, 우려의 강도가 높아가고 있다. 설교자가 성도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설교문을 준비하는 데에는 다양한 준비가 필요하다. 성경 본문을 잘 전달하기 위해 여러 서적을 읽고, 사안에 대한 깊은 사유도 중요하다. 설교자가 직접 체험한 생활 영성도 필요하다. 그런데 AI 기술에 주제 설교 원고를 부탁하면 문장적으로 체계를 갖춘 완성도 높은 설교문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과연 성도에게 은혜가 되는가. 그러나 AI 기술에 의존한 설교문은 자료에 불과하다는 주류의 비판을 대부분 수긍한다. 그럼에도 시대 흐름에 민감한 설교자들은 AI 기술이 인간의 영역을 능가하게 될 때, 로봇에 의존하는 교회 예배 문화가 나타날 것이라고 비판한다. 피지컬 로봇(physical AI)이 직접 설교하는 이상한 세상까지 생각해 보아야 할까. 벤야민 작가가 예언했듯이 판별 불가능한 예술작품처럼, 교회에도 판별이 어려운 설교 문장이 침투하게 될 개연성은 있다. 설교자의 설교는 깊은 기도와 묵상, 본문 준비를 통해 성경 말씀에서 다시 들려주는 말씀의 깊이로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게 된다. 설교 준비에 AI 기술 의존이 높아지면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 오염되고, 전해지는 말씀이 성도의 영성을 혼돈케 하는 혼선이 올 수 있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또 다른 대혼란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지금 미국과 같이 로봇 기술이 발달하고 인구가 많은 나라에서는 AI끼리 종교성 플랫폼(공동체)을 만들어 수백만 가입 로봇이 모여 종교성 행사를 하는 AI 대형 종교 집단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마치 생명을 가진 인간 대용의 로봇 정체 말이다. 무서움을 불러오는 듯하다. 우리는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을 잘 알고 있다. 홍수 심판을 받은 인류가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자기 의와 지혜로 바벨탑을 쌓다가 온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사람끼리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족속과 족속의 다툼이 생겨났고, 지구촌은 전쟁과 전쟁의 땅으로 발전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2장 8절에서 경고했다. “그들의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여 절하였도다.” AI 기술이 다시 바벨탑 위에 자리 잡게 될까.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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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바벨탑 위에 자리 잡는 AI 기술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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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3.1 운동이 현대 교회와 교인에게 주는 의미와 교훈은?
- 1. 서언(序言) 그동안 기독교인의 생활용어 바로잡기에 대해서 논해왔다. 하지만 이번 호는 잠시 이를 멈추고 제목 그대로 제107주년을 맞이한 3.1 운동이 당시 교회와 어떤 연관이 있으며, 이런 일이 오늘 현대 우리 교회와 교인들에게 어떤 의미와 교훈을 주는지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먼저 3.1운동이 일어난 시작과 당시 교회의 참여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2. 3.1운동의 배경 1910년 8월22일 한일병합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을 합병한 일제는 무단통치로 온갖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를 자행했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를 제한했으며, 너무 가혹한 처벌로 인권을 유린했다. 또한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 등으로 경제적 수탈을 자행했다. 여기에 국제적인 많은 이유가 복합되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 속에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난 만세 사건이 1919년 3월 1일의 민족 저항 운동이었다. 3. 3.1운동과 교회의 역할 1) 교회 중심의 3.1운동: 1919년 3월 1일 정오에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함으로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은 당시의 교회와 교인들이 거의 중심이었다. 그때의 한국 교인 수는 전체 인구의 1.7%였지만, 독립선언서를 선포한 민족 대표 33인 중에는 16명이 교인이었다. 또한 만세운동은 75%가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특히 이때는 코로나보다 더한 스페인 독감이 유행했던 때이다. 당시 전국 인구가 약 1천700만 정도였고, 감염자는 약 7백50만 정도였으며, 약 14만 명이 사망했다. 감염의 위험도 있었지만, 당시 참여한 교인들이 약 20만 명이었을 정도로 3.1운동의 주체는 교회와 교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각 교회와 교인들의 사례: 일시별과 참여한 교회들을 보면, 첫째로는 서울 파고다 공원 부근에 있었던 승동교회였다. 이 교회 지하실에서 작성한 독립선언서 유인물은 학생들이 3월 1일을 시점으로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시행하자는 결의를 하고 이를 전국에 배포했다. 이러한 장소 제공과 모체가 된 승동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이 교회는 당시 천대받든 백정인 박성춘 장로를 비롯한 약 20여명의 백정들이 주로 모이는 작은 교회였다. 그의 아들인 박봉출(박서양)은 에비슨 의료 선교사의 도움으로 광혜원(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에서 공부하고 1907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의사가 되었다. 그도 또한 3.1운동을 도왔고 나중에 만주에서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독립군들의 군의관이 되었다. 또한, 아버지 박성춘과 함께 천민인 백정을 비롯해서 고질적인 반상의 신분 타파에 절대적 공헌을 했다. 승동교회에서 시작된 3.1운동에 참여한 교회는 3월 6일에 전북 군산의 구암교회, 8일은 대구 제일교회와 남산교회, 4월 1일은 천안의 아우내 장터에서 유관순과 병천교회가 중심이 되었다. 4월 15일에는 화성 제암리교회의 만세운동이 있었으나 일제는 주민들을 교회 안에 몰아놓고 그대로 불태워 죽였다. 경남의 경우는, 4월 3일 진해에서 주기철 목사의 4촌인 주기용이 웅동에서, 4월 6일은 밀양 춘화교회와 밀양교회 등에서 만세운동이 있었다. 이러한 만세운동으로 전국의 교인들 630여 명의 살상과 많은 교인들이 투옥되게 되었다. 3) 기독교 중심의 3.1운동의 결과: 만세운동으로 인해 전국으로 검거령이 내려지자 이를 이끌던 지도자들은 중국 등으로 망명하여 1919년 4월 10일에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설립했다. 이때의 취지문을 보면, "우리들은 만세운동을 통하여 조선의 독립을 쟁취한 후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3.1 운동의 중심에 기독교적 가치가 중심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기독교 정신은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김구, 이승훈, 이상재, 남궁억, 조만식, 김교신, 윤치호, 김규식, 여운형 등의 많은 지도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4. 3.1운동이 현대 교회에 주는 교훈과 결론 이상으로 볼 때 3.1운동은 당시 기독교적 애국심의 가치관이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엄청난 힘이 있다. 그 당시 교인이 전체 인구의 1.7%였다면, 지금은 15~16%이다. 그러나 힘이 없다. 교회가 사회 걱정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걱정한다고 할 정도로 여러 문제가 있다. 반면 현재의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많은 분야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인 문제는 오히려 전방위적으로 교회 탄압을 시도하고 있다. 만시지탄의 차별금지법 통과와 이로 인한 동성애 문제 등, 우리 교회가 고수하고 방어해야 될 문제가 산적해 있다. 하지만 교회는 현재까지 비교적 복지부동이다. 왜 교회의 지도자들은 침묵하고 있는가? 란 비판도 많다. 하지만 3.1절의 시작은 교회의 유명 리더자들이 아니었다. 민족대표 16명도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무명의 목회자와 장로와 교인들이었고, 승동교회나 앞장섰던 이들도 학생들이거나 일반 교인들이었다. 이러한 우리의 선조들은 107년을 지난 현재의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고 본다.“우리의 후대들인 그대들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왜 침묵하고 있는가?”. 다시 한 번 우리의 선열들에 대해서 옷깃을 여미며 “나는 오늘 이 현실에서 무엇을 외쳐야 될 것인가?”를 심각한 마음으로 고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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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3.1 운동이 현대 교회와 교인에게 주는 의미와 교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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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애연 창립 1주년, 침묵을 거부한 1년
- 2026년 2월 28일, 우리는 고신애국지도자연합(고애연) 창립 1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우리는 실내에서 축하하지 않았다. 우리는 광장으로 나갔다. 1년 전, 두 사람의 단톡방으로 시작된 작은 모임이 오늘 광화문에서 한국교회와 전 국민 앞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조직의 확장이 아니라, 시대적 위기 속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책임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2025년 2월 28일 아침,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고명길 목사가 “손현보 목사를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옥재부 목사가 “우리 두 사람이라도 시작해 봅시다”라는 응답이 돌아왔다. 그 한마디로 단톡방이 열렸다. 원대연 목사가 합류하여 세 사람이 되었고, 이어 이일호, 노은환 목사가 함께하여 다섯 사람이 되었다. 그 다섯 사람의 결단은 열흘 만에 160명의 목회자를 모으는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2025년 3월 13일, 국회 정론관에서 첫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우리는 공적 책임의 자리로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동역의 진정성이 시험을 받았고, 침묵과 결단이 분명히 갈라지는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시간을 통해 우리를 정금같이 빚으시고 다듬으셨다. 그날의 작은 결단이 오늘의 연합을 낳았다. 1. 고애연의 지난 1년 지난 1년은 준비와 확장의 시간이었다. 신실한 회장단과 임원단이 세워졌고, 7명의 필진과 45명의 실행위원, 200여 명의 장로들이 기둥처럼 함께 서 주었다. 13차례의 실행위원회, 5회의 정치신학 세미나, 14회의 시국선언과 성명 발표, 50여 차례 집회와 기도회가 이어졌다. 120여 편의 기고와 논평이 교단과 사회를 향해 던져졌다. 54차례의 각종 집회에 1만여 명이 참여했고, 기드온 300 용사를 허락받았으며, 1천 명의 회원이 연합 안에 정착하였다. 이 숫자는 자랑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대 속에서 우리를 사용하신 흔적일 뿐이다. 2. 1주년, 우리는 축하 대신 광화문으로 원래 오늘 우리는 함께 모여 1주년을 기념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광화문 국민대회 측의 요청이 왔다. 그리고 우리는 결단했다. “축하보다 사명이다.” 오늘 광화문 국민대회에서 고애연은 한국교회와 애국 국민들과 함께 섰다. 이성구 대표는 설교로 말씀을 선포했고, 옥재부 실행위원장은 교회의 공적 책임과 연합을 외쳤으며, 박경만 총무는 세이브코리아 자격으로 모두발언을 했다. 고애연 청년대학팀은 화투사 오창성 화백의 애국 그림 전시회를 열어 광장 한복판에서 문화적 증언을 펼쳤다. 1주년에 우리는 케이크를 자르지 않았다. 우리는 광장에서 깃발을 들었다. 3. 고신을 넘어 전국으로 확장되는 운동 불과 한 주 전, 김한식 목사는 광주 금남로에서 차별금지법과 이른바 교회해체법의 위험성을 강연했다. 울산에서 시작된 고애연은 부산과 대구, 서울을 거쳐 광화문과 광주 금남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불과 1년 만에 지역 모임이 전국적 애국신앙 네트워크로 확장되었다. 이것은 조직의 능력이라기보다, 한국교회 안에 누적된 문제의식과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이라 믿는다. 4. 1년의 평가 – 우리는 무엇을 해 왔는가 첫째, 우리는 침묵하지 않았다. 손현보 목사 징계 청원과 구속 사태에 대해 원칙적 입장을 밝히고, 검찰과 법원 앞에서 수차례 집회를 열었다. 정교분리의 왜곡, 설교 통제, 차별금지법과 교회 해체를 우려케 하는 입법 시도에 대해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둘째, 우리는 기도와 교육을 병행했다. 집회만이 아니라 기도회를 열었고, 선언만이 아니라 정치신학 세미나를 통해 목회자와 장로를 깨우는 교육을 이어왔다. 셋째, 우리는 고신의 저항 정신을 다시 호명했다. 순교 신앙은 내면적 경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불의 앞에 서는 공적 책임임을 강조해 왔다. 넷째, 우리는 세대와 직분을 아우르는 연합 구조를 세웠다. 목회자, 장로, 청년이 함께 서는 조직적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몇 사람의 모임이 아닌 지속 가능한 연합체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5. 향후 결단 그러나 우리는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우리는 분명히 선언한다. 첫째, 잠든 고신을 깨우겠다. 일제 치하에서 침묵하지 않았던 고신의 본래 저항 정신과 순교 신앙을 오늘에 되살리고, 침묵과 타협, 보신주의를 벗고 고신 정신을 회복하겠다. 둘째, 한국교회의 갱신을 돕겠다. 왜곡된 정교분리 프레임을 바로잡고, 설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지키겠다. 더 나아가 애국 신앙을 지향하는 교회와 단체들을 묶는 연합의 마중물이 되겠다. 셋째, 대한민국의 자유민주 헌정 질서를 지키겠다. 국가 정통성을 약화시키고 자유민주 체제를 흔드는 흐름에 침묵하지 않으며, 자유 시민 단체들과 연대하여 책임 있는 공적 참여를 이어가겠다. 넷째, 복음적 통일을 준비하겠다. 김일성 일가주의라는 우상적 체제를 거부하고, 한반도에 복음의 자유가 선포되는 날까지 기도하며 전진하겠다. 통일은 이념의 통합이 아니라 복음의 회복이어야 한다. 6. 맺음 선언 1년 전, 우리는 단톡방이었다. 오늘 우리는 광화문에 서 있다. 1년 전, 우리는 몇 사람이었다. 오늘 우리는 전국으로 확장된 연합이 되었다. 1년 전, 우리는 조용히 시작했다. 오늘 우리는 공개적으로 선포한다. 고애연은 멈추지 않는다. 고신을 깨우고, 한국교회를 갱신하며, 대한민국을 자유민주국가로 굳게 세우고, 복음으로 통일을 준비하는 그날까지 우리는 기도하며 연합하여 경주할 것이다. 축하가 아니라 출정이다. 1주년은 끝이 아니라, 더 깊고 더 넓은 사명의 시작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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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애연 창립 1주년, 침묵을 거부한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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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 욕설 논란, 반성과 회복 그리고 교단적 성찰의 기회
- 문제의 발단: 녹취 공개로 드러난 목회 리더십 논란 최근 부산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와 관련된 교역자 회의 녹취가 외부로 공개되면서 교계 안팎에 큰 파장이 일고 있다. 공개된 녹음에는 부목사와 전도사들을 향한 거친 언어와 위압적 표현이 담겨 있었고, 일부 전·현직 사역자들의 증언까지 이어지며 논란은 빠르게 확산됐다. 김문훈 목사는 포도원교회를 부산지역 대표 대형교회로 성장시킨 인물이며, 고신 교단 내에서도 영향력 있는 리더십과 연결된 목사라는 점에서 파장이 더욱 컸다. 무엇보다 교회 내부의 문제가 공적 영역으로 노출되면서 목회자의 언어가 사회적 조롱의 대상이 된 현실은 많은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1. 개인 논란을 넘어선 교단 신뢰의 문제 이번 사안은 단순한 실언이나 일회적 사건으로 보기 어렵다는 시선도 존재한다. 일부 사역자들이 장기간 언어적 압박과 상처를 경험했다는 증언이 이어지면서 문제는 개인의 성향을 넘어 구조적 질문으로 이어졌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왜 내부에서 걸러지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이다. 논란이 확산되자 교계 안에서는 상반된 반응이 나타났다. 모든 공적 직위에서 사퇴하라는 요구와 회개와 성숙의 기회를 주고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신중론이 동시에 등장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교단 전체의 공적 신뢰가 흔들린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특히 개혁주의 정체성과 신앙 양심을 강조해 온 고신 교단이라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더 큰 상징성을 갖게 됐다. 2. 언론사를 통한 사과문 발표의 의미 논란 이후 김문훈 목사는 교회 홈페이지 사과에 이어 기독교보 및 각종 언론을 통해 보다 공개적인 사과문을 발표했다. 사과문에서 김 목사는 부적절한 언어 사용을 인정하고, 상처를 입은 사역자들과 성도들에게 사과의 뜻을 밝히며 책임을 통감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교단과 기독교계의 공적 매체들을 통한 사과라는 점에서 이전보다 한 걸음 나아간 조치로 평가할 수 있다. 이는 교회 내부 차원을 넘어 공적 책임을 의식한 행보라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가 있다. 논란을 축소하거나 방어하기보다 사과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점은 갈등 수습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번 사과문에는 세 가지 분명한 메시지가 담겼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피해를 입은 부목사와 사역자들에 대한 직접 사과 의지다. 김 목사는 상처를 입은 이들을 가능하다면 공개적으로 초청해 사과하고 위로의 시간을 갖겠다고 밝혔다. 이는 단순한 유감 표명을 넘어 관계 회복을 전제로 한 사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둘째, 교단을 향한 공적 사과와 피해 회복 노력이다. 이번 일을 개인 문제가 아니라 교단 전체에 상처를 남긴 일로 규정하며 총회 앞에 공식적으로 사과했고, 피해자 회복과 건강한 목회 생태계를 위해 구체적 지원 방안을 모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과의 범위를 교회 내부에서 교단 공적 영역으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이전보다 진전된 모습으로 평가할 수 있다. 셋째, 부총회장 거취를 포함한 공적 직위에 대한 입장이다. 김 목사는 어떤 직분에도 연연하지 않겠으며 자신의 거취를 총회 임원회와 선거관리위원회의 판단에 일임하겠다고 밝혔다.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교단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선언은 공적 책임을 의식한 표현으로 읽힌다. 3. 남은 과제: 사과 이후는 행동이다 그러나 사과의 진정성은 결국 이후의 행보로 평가된다. 사과문이 발표된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다. 무엇보다 상처를 입었다고 증언한 사역자들을 향한 개별적 접근이 필요하다. 직접적인 사과, 충분한 경청, 관계 회복의 시도는 회개의 가장 기본적인 열매다. 여기에 실질적 회복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심리적 치유를 위한 상담 지원, 사역 단절을 겪은 이들에 대한 명예 회복과 지원에 대한 노력, 공동체적 위로와 배려 등이 함께 논의될 수 있다. 이는 법적 책임을 넘어 영적 공동체의 책임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다. 또한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와 리더십 성찰도 필요하다. 건강한 목회 리더십에 대한 기준을 다시 세우고, 공동체 앞에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 줄 때 사과는 공동체적 의미를 갖게 된다. 4. 선거문화와 리더십 검증이라는 구조적 질문 이번 사건이 단순한 개인 논란을 넘어 교단적 논의로 확산된 이유 중 하나는 교단 리더십 구조와의 연관성 때문이다. 김문훈 목사가 교단 내 주요 리더십 흐름과 맞닿아 있었던 만큼, 논란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리더십이 어떻게 공적 위치까지 올라갔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이 지점에서 선거 문화와 리더십 검증 구조에 대한 성찰 요구가 등장한다. 줄 세우기, 비공식 영향력 구조, 인물 중심의 권력 재편이 반복되어 왔다면 이제는 냉정하게 돌아볼 시점이다. 고신 교단은 역사적으로 신앙 양심과 개혁주의 전통을 강조해 온 공동체다. 그렇기에 이번 사건은 특정 인물의 문제로 축소되기보다 공적 리더십 검증 구조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선거문화 개선, 윤리기준 명문화, 공적검증 강화, 리더십 책임구조 정립 등 제도적 논의가 뒤따를 때 위기는 발전과 성숙의 계기가 될 수 있다. 5. 맺음말: 사과를 넘어 성숙으로 가는 길 이번 논란은 교회와 교단에 분명한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위기는 공동체의 수준을 드러내는 동시에 방향을 재설정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에 대한 진정한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을 때 용서와 화합도 동시에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사과는 시작됐다. 남은 것은 행동과 실천이다. 피해자 회복을 위한 진정성 있는 노력, 책임 있는 리더십, 그리고 구조적 성찰이 함께 갈 때 이번 사건은 단순한 논란을 넘어 성장과 성숙의 전환점으로 기록될 수 있다. 교회는 위기 속에서 정화되고 성장해 왔다. 이번 사건 역시 부끄러움으로만 남을지, 아니면 성숙의 이정표가 될지는 지금부터 김문훈 목사와 우리 모두의 선택에 달려 있다. 꾸짖고 정죄하기 보다는 함께 고쳐가고 세워가는 고신교단이 되기를 진정으로 소망한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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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 욕설 논란, 반성과 회복 그리고 교단적 성찰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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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권력의 개가 된 좌파 판사의 민낯인가?
- 어제 지귀연 판사는 판결문에서 감성적인 언어로 ‘성경’과 ‘촛불’을 인용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과 일반 시민은 성경 구절과 비유가 등장하자 그 판결이 마치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것처럼 착각하며 쉽게 수긍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의 본질을 왜곡하여 정치적 목적에 이용한 극히 위험한 행태입니다. 전국의 목회자와 교회는 이 비유가 얼마나 부적절하며, 사실상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반국가적 수사(修辭)인지를 교인들에게 반드시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지 판사가 인용한 촛불 비유와 찰스 1세 사례의 무지는 대한민국 판사의 수준이 이토록 처참한가 하는 자괴감을 넘어, 사법부가 권력의 하수가 될 때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1. 사건의 본질 왜곡: ‘개인의 절도’와 ‘국가 수호’를 혼동한 무지 지 판사는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촛불을 훔치는 것은 개인의 비도덕적 범죄일 뿐입니다. 반면, 대통령의 계엄은 야당의 29회 탄핵 폭주와 대통령실 예산 0원 편성이라는 ‘입법 독재’로 인해 국정이 마비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국가 시스템을 보호하려 한 방어적 결단이었습니다. 국가를 구하려는 소방관에게 절차를 따지지 않았다고 ‘절도범’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사건의 본질조차 파악하지 못한 천박한 비유입니다. 2. 역사적 맥락 오독: ‘절대 군주’와 ‘민주제 대통령’을 구분 못한 무지 재판부는 국회에 군대를 보냈던 찰스 1세의 참수 사례를 인용했으나, 이는 역사적 실체를 완전히 왜곡한 것입니다. * 찰스 1세: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법 위에 군림하며 국회를 무력화하려 했던 절대 군주입니다. * 윤 대통령: 헌법 제77조라는 명문 규정에 근거하여 국가 위기를 타개하려 한 민주적 대통령입니다. 유혈 내전을 일으킨 폭군과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이 헌법 절차에 따라 계엄을 해제한 대통령을 동일시하는 것은 사법부의 지적 수준을 의심케 합니다. 3. 상황 판단의 오류: ‘촛불’을 꺼버린 주범이 누구인지 모르는 무지 재판부는 대통령이 촛불을 훔쳤다고 비난했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성경을 읽을 촛불(예산과 인사권)’조차 야당에 의해 꺼져버린 국가적 화재 상황이었습니다. 행정부의 숨통을 끊어놓은 입법부의 국헌문란은 외면하고, 이를 정상화하려 한 통치권자의 결단을 비아냥거리는 비유로 폄훼한 것은 재판부가 이미 정치적 편향성에 매몰되었음을 증명합니다. 4. 헌법적 월권: 계엄 판단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모르는 무지 대한민국 헌법 제77조 5항은 계엄의 적절성을 판단할 유일한 권한을 사법부가 아닌 국회에 부여하고 있습니다. 국회의 해제 요구를 대통령이 수용한 순간 법적 절차는 종결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재판부가 17세기의 초법적 법정처럼 군림하며 "민주주의는 피를 마신다"는 제퍼슨의 문구까지 인용해 형벌을 내린 것은 그 자체가 사법 독재이자 명백한 월권입니다. 결론: 역사의 심판대와 하나님의 공의가 기다린다 지귀연 판사의 비유는 대통령을 파렴치한 범죄자로 낙인찍기 위한 저급한 정치 수사에 불과합니다. 거룩한 성경의 가치를 빌려와 자신의 정치적 편향성을 정당화하려 한 시도는 신앙인들에 대한 기만이요, 하나님에 대한 오만입니다. 진정으로 촛불을 훔친 자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의 헌법적 권한을 찬탈하고 사법의 이름으로 법치를 살해한 민주당의 입법부와 그에 동조하는 우리법연구회의 사법부 세력입니다. 인간의 법정은 거짓 비유로 눈을 가릴 수 있을지 모르나, 만물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심판대는 반드시 이 무도하고 무식한 판결을 심판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이 영적, 정치적 기만술에 속지 말고 깨어 기도하며 강단에서 침묵하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것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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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권력의 개가 된 좌파 판사의 민낯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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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윤석열 전 대통령 무기징역 선고는 사법부의 ‘사망선고’이다
- 오늘 대한민국 사법부는 스스로 존재 이유를 부정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지귀연 재판장)가 12·3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국가 원수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것은,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고유권한과 통치행위의 특수성을 전면 부인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사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이 '정치적 단죄'를 강력히 규탄하며, 판결의 모순을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1. 삼권분립의 모순: ‘견제’ 없는 ‘침탈’은 독재다 대한민국은 입법, 행정, 사법이 균형을 이루는 삼권분립 국가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이 균형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렸다. 1) 비대칭적 권력 구조의 모순 입법부는 탄핵소추권을 통해 행정부를 마비시킬 수 있다. 진정한 삼권분립 국가라면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에게도 이에 상응하는 '국회 해산권'이 보장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국회 해산권이 삭제된 기형적 구조 속에서, 대통령이 입법 독재에 맞서 꺼낸 계엄권은 무너진 국가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헌법적 자구책이었다. 2) 고유권한의 정당성과 절박한 상황 재판부는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칠 수 없다"는 비유로 대통령의 결단을 폄훼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단순히 촛불을 훔친 것이 아니라, 야당이 29차례의 무분별한 탄핵으로 행정부의 심장을 멈추고, 대통령실 예산을 '0원'으로 만들어 국가의 기능을 완전히 고사시키려던 ‘국가적 화재’ 상황이었다. 또한, 끊임없이 제기된 부정선거 의혹을 해소하여 선거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대통령의 노력을 사법부는 '명분'일 뿐이라며 일축했다. 화재를 진압하려는 소방관에게 절차를 따지지 않았다고 방화범의 멍에를 씌우는 것이 과연 정의인가. 2. "대통령의 고유권한을 사법부가 재단할 수 있는가?" 헌법 제77조는 대통령의 계엄권을 명시하고 있으며, 그 적절성을 판단할 유일한 기관으로 '국회'를 지정했다(헌법 제77조 5항). 1) 판단 주체의 오류 국회의 해제 요구를 수용한 순간 정치적·헌법적 절차는 종료된 것이다. 재판부가 "군을 국회에 보낸 것이 핵심"이라며 국회 권한 침해를 내란으로 몰아세운 것은, 대통령의 통치행위를 일반 형사범죄의 잣대로 끌어내린 명백한 월권이다. 2) 폭동 개념의 억지 확대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기물 파손도 없었던 상황을 '한 지역의 평온을 해칠 정도의 위력' 즉, 폭동이라 규정한 것은 내란죄를 무한정 확대 해석한 것이다. "선진국에서 사례를 찾기 어렵다"는 재판부의 고백은 역설적으로 이번 판결이 얼마나 전례 없는 사법적 과잉인지를 스스로 자인한 꼴이다. 3. 수사 절차의 위법성 묵인 재판부는 공수처와 검찰의 내란죄 수사가 '관련 범죄'라는 이유로 적법하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수사권이 없는 기관이 현직 대통령을 겨냥해 벌인 별건 수사를 용인한 것은 법치주의의 기본인 절차적 정의를 사법부가 스스로 내팽개친 것이다. 결론: 역사의 심판대,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대가 남아 있다 오늘 사법부는 정권의 시녀가 되어 헌법을 유린하고, 국가 수호를 위한 결단을 내란으로 둔갑시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사법 정의가 땅에 떨어진 이 비극적인 날을 국민은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권력은 짧고 진실은 영원하다. 인간의 법정이 거짓으로 눈을 가릴지라도, 우리에게는 역사의 심판대가 남아 있으며, 그 위에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불꽃 같은 눈동자로 살피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대가 엄중히 기다리고 있다. 역사는 언제나 정의로 회귀하며,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인의 득세를 방관하지 않으실 것이다. 자유 우파 국민 여러분,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오늘의 판결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투쟁의 시작입니다. 이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은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결코 좌절하지 말고, 대한민국에 반드시 법치가 바로 세워지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날이 올 것임을 굳건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실은 가둘 수 없으며, 정의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우리는 이 땅의 자유와 헌법 가치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멈추지 않고 이 선한 싸움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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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윤석열 전 대통령 무기징역 선고는 사법부의 ‘사망선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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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정 구 죽 천(丁口竹天)
- 옛날 선비가 살고있는 집에 손님이 찾아와 머물면서 아침 밥시간이 되었는데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참다못한 하인이 집주인에게 인량복일(人良卜一)하오리까 하니까 주인은 월월산산(月月山山)이라 답했다. 그말을 엿들은 손님은 정구죽천(丁口竹天)이라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정구(丁口)자가 합치면 가(可)자가 되고 죽천(竹天)자도 합치면 소(笑)자가 되어 가소(可笑)롭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세 사람이 주고받은 말처럼 선진국이 되어 많은 나라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대한민국의 현재의 현실에서 일반인인 우리가 생각해도 참으로 가소롭게 여겨지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가소롭다는 영어로 ridiculous(가소롭다) 또는 laughable(우스꽝스럽다)로 번역된다. 가소롭다의 제주 방언은 하가수하다로 사용하기도 한다. 가소롭다는 표현은 비현실적이거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되지만 흔히 누군가의 행동이나 주장이 상식에 어긋날 때 사용되며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경시하거나 비난할 때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 헌법이 존재하고 있는데도 정략적으로 집권 세력의 구미에 맞게 개정하려고 한다면 그것 가소로운 일이고 국민이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한국은 선진국이라 행복하게 잘 살고있지만 지금 북한은 핵으로 무장한 상태이고 우릴 적으로 간주하고 이를 갈고 있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찬양하는 종북세력이 국회나 각종 단체에 활동하고 있다면 더욱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국가인 애국가도 부르지 않고 태극기를 밟는 행위로 행사를 치루는 그런 같잖은 사람들을 강제라도 북송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의 두 얼굴을 꼭 기억해야 한다. 벚꽃이 필 때에는 평범한 시민들이 행락객으로 붐빈다. 신사 곳곳에는 군국주의 망령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욱일기의 잔재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 가소로움을 넘어 너무 섬뜩한 느낌이 마저 든다. 그러면 내가 믿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독교는 어떠한가? 정말 기가 찰 정도로 부패하고 엉망이다. 옛날에는 타 총회에서 총회장을 맡으려면 엄청난 재정이 든다고 비판했는데 작금의 우리 고신 총회도 그 이상이 되어버렸으니 정구죽천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역할과 호칭은 교회에서 목사님! 장로님! 이라고 불려지지만 종교지도자는 제대로 낮은 자의 자리에서 섬겨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하고 예수님의 자리에 앉아 왕 노릇을 하려고 한다면 정말 가소롭지 않는가. 목사도 장로도 총회나 노회의 주요 직책을 맡아 단체를 위해 힘을 많이 쓰는 것이 마땅하지만 자질이 함양 미달이고 사회적 평판은 물론 교계 내에서도 형편이 없는 사람을 교권이나 물질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같잖은 조직의 모임이 되어버린다면 어찌 가소롭지 않은가! 필자가 청년입문 직전에 친구가 잘못 처신하면 ‘정구죽천! 정구죽천!’이라고 말하면서 핀잔을 주었던 때를 기억한다. 부쩍 요즈음에 정구죽천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는 건 사회에 가소로운 정치인, 가소로운 종교지도자, 가소로운 어른, 가소로운 친구나 선배가 많다는 의미일까? 2026.02.07. 경남기독신문 초장컬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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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정 구 죽 천(丁口竹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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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타협의 내용 (출8:25-32)
- 미국이라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첨단 과학과 산업문명을 달리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미국에서 모든 현대문명을 거부한 채로 300년 전 생활상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서 <아미쉬>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미국에는 약 18만 명의 <아미쉬>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자동차, 전화, 컴퓨터, TV, 라디오, 신문 등 모든 과학 문명의 이기를 멀리한 채로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과 더불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 현대문명의 모습은 일체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교통수단으로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옛날 마차를 타고 다니거나 아니면 걸어서 다닙니다. 농사를 지을 때도 트랙터나 발달된 첨단 농기구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멍에를 맨 말이 끄는 쟁기로 밭을 일굽니다. 남자들의 복장은 검정색 양복을 입고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고, 여자들은 짙은 자주색 원피스 차림에 쪽진 머리 모양을 하고 그 위에 하얀 스카프를 두르고 다닙니다. 음식은 순수 무공해 유기농자연식을 먹습니다. 그 <아미쉬>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둘러보면서 제 마음에 강하게 와 닿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미쉬>사람들처럼 모든 현대 문명을 거부하는 정도 까지는 아닐지라도 죄악이 관영한 세상과 분리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도들이 지향해야 할 삶은 세속화 되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악한 사단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실패하게 하기 위해서 가장 흔하고 쉽게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타협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다보면 결국 신앙생활을 실패하게 됩니다. 첫째로, 편하게 믿으라고 타협합니다.(출8:25) 둘째로, 적당히 믿으라고 타협합니다.(출8:28) 셋째로, 형식만 믿으라고 타협합니다.(출10:24) 마귀의 타협에 걸려 넘어지거나 신앙생활을 실패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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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타협의 내용 (출8: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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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그저 비만 피하면 족하리
- 대다수의 사람들은 중산층으로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각 나라마다 중산층의 정의가 조금씩 다르다. 각 나라별 중산층의 정의가 이렇습니다. 한국에서 중산층이 되기 위해서는 아파트 30평 이상에 살아야 하며, 월급 500만원 이상, 2000 CC 급 자동차를 타야 하며, 예금 잔액이 1억원 이상 보유해야 한다고 정의한다. 이에 반해 미국의 중산층은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야 하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해야 하며, 집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놓여 있어야 한다고 정의한다. 영국은 어떠한가? 영국의 중산층은 페어플레이를 해야 하며,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져야 하며,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아야 하며, 약자를 도와주고, 강자를 대응해야 하며, 불의와 불법에 대처해야 하는 계층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프랑스의 중산층은 어떠한가? 불어 외에 외국어를 하나 해야 하며,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어야 하고,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어야 하며, 남들과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가 있어야 하며, 정의를 지키며, 약자를 도우며 꾸준히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고 정의를 한다. 한국은 중산층과 관련해서 오로지 돈과 관련해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잠언22:1)에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라고 말씀한다. 하지만 한국의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커서 명예와 재물을 동시에 거머쥘 수 있는 직업군으로 보내기를 원한다. 과거 우리의 청렴한 선비들은 재물과 명예 중에서 명예를 택했다. 더 나아가 자신이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 애써 재물을 멀리하는 경향과 돈을 기피하는 습속을 가졌다. 동대문 밖을 나와서 신설동과 보문동의 경계 즈음해서 ‘우산각(雨傘閣)’ 이라는 옛 지명의 마을이 있었다. 같은 마을인데도 선비들과 식자들은 비를 피한다는 뜻으로 ‘비우당(庇雨堂)’이라고 불렀다. 그 마을에 비를 가린다는 초라한 집 하나가 있었으며 그에 유래된 지명이었다. 구한말이나 일제 초기만 해도 이 비우당의 주춧돌과 비우당을 뒤덮는 노송 한 그루가 남아 있었는데 일제 때 도시계획에 의한 신설동의 조성으로 그 흔적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비우당 터로 추정되는 그 곳 주변의 기둥에 아래의 글이 새겨져 있다. ‘현이다재 (賢而多財) 즉손기지(則損其志) 우이다재(愚而多財) 즉익기과(則益其過)’ <현명한 이가 큰 재물을 가지면 곧 그 뜻을 해치며, 어리석은 이가 큰 재물을 가지면 곧 그 과실을 더한다> 는 의미이다. 비우당 기둥에 새겨진 이 글은 <소학> 외편에 나오는 명언으로 우리 옛 선비들의 행동을 구제해 온 가장 영향력 있는 가르침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우산각 마을에서는 고려말 20년 간, 그리고 조선에 들어서 태조, 정종, 태종, 세종 4대에 걸쳐 35년간 나라 일을 돌봤던 정승 유관(柳寬)이 살았던 마을이다. 그는 바른 선비의 조건인 청빈을 생활화하고 살았던 많은 선비 가운데 전형적인 분이었다. 재상을 거쳐 정승이 됐을 때까지도 우산각 마을에서 담장이나 대문마저도 없는 허술한 초가에서 살았다. 그의 청빈한 성품을 잘 알고 있는 태종이 선공감으로 하여금 밤에 몰래 울타리를 둘러놓게 했던 고사는 유명하다. 집이 허술하여 장마철이면 지붕이 새어 방안에 빗물이 떨어지곤 했다. 정승 유관은 그가 과거에 급제했을 때 받은 일산을 방 안에서 펴들고 비를 피했다. 후세에 조선시대 실학자 이수광 선생이 물려받으면서 ‘비를 가리는 집’으라는 뜻으로 ‘비우당(庇雨堂)’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옛 정승이면 지금의 장관보다 높은 벼슬이다. 높은 관직의 봉록으로 겨우 그렇게 밖에 살지 못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유관은 자기의 봉록으로 집안 자체의 지묵값, 다리는 놓는 공공사업에의 시주, 무료숙박소인 원(院)에의 기부 등으로 다 썼다고 한다. 오늘날 성도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바르게 살아야 함이 옳다. 하지만 ‘바르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성도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세상에서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구별됨을 구원받은 이후에도 구별되게, 다르게 살아가야 함이 옳다. 더 엄밀히 말하면 살아내는 것이다. 살아낸다는 것은 그 목표를 향해서 꾸준히 노력을 한다는 의미이다. 그냥을 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알아주는 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실 것이고, 그렇게 외로운 길을 걷는 자신이 잘 알 것이다. 그저 비만 피하면 족함으로 살았던 선비들의 비우당 정신을 되살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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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그저 비만 피하면 족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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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연말·연시 용어 4: 우리나라와 유대인의 설날과 세시 풍속은?
- 1. 서언(序言) 오는 17일은 올해의 설날이다. 지난 호에서는 양력이든 음력이든 새해가 되면 가장 많이 나누는 덕담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말의 의미와 유래에 대해 논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설날과 관련된 여러 가지 세시풍속과 동요, 그리고 유대인의 설날을 비교 분석하며 이에 대한 우리 기독교인의 자세를 논하고자 한다. 2. 설날과 관련된 여러 가지 상식 1) 왜 ‘까치 설날’이라 할까? : 이날이 되면 어린이들은 윤극영 선생의 동요 <설날>의 가사인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라는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왜 ‘까치 설날’은 어제라고 했을까? 이 말은 원래 까치가 아니라 ‘작다’라는 뜻의 ‘아치’에서 유래했다. 즉, 설날 하루 전인 섣달그믐을 뜻하는 ‘아치설’이 경기도 방언을 거쳐 ‘까치 설날’로 굳어진 것이다. 원뜻은 ‘작은 설날’이다. 물론 《삼국유사》에는 신라 소지왕 때 까치가 왕의 목숨을 구하여 설날 전날을 ‘까치의 날’로 정했다는 설화가 있으나 이는 정설이 아니다. 또한 우리 민족이 예부터 까치를 길조로 여겨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믿었기에 ‘아치’가 ‘까치’로 변형된 것으로 유추된다. 2) 설날의 뜻은? : ‘설’은 나이를 계산하는 단위인 ‘살’의 고어 형태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또한 설날을 ‘신일(愼日)’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신의 날’이라는 뜻이 아니라 ‘삼가다, 근신하다’라는 뜻의 ‘삼갈 신(愼)’ 자를 쓴 것이다. 즉, 새해 첫날부터 복을 받기 위해 몸가짐을 조심하고 근신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3) 설날에 복을 비는 세시풍속 : (1)제사: 조상에 대한 공경의 의미도 있지만, 조상이 내리는 복을 받으려는 목적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음복(飮福)’이다. ‘마실 음(飮)’에 ‘복 복(福)’ 자를 써서,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조상의 복을 이어받으려 하는 것이다. (2)부적: 설날에 붙이는 대표적인 부적으로 ‘삼두일족응(三頭一足鷹)’이 있다. 머리 셋, 발이 하나 달린 매를 그린 부적으로, 이 매가 화재(火災), 수재(水災), 풍재(風災)의 세 가지 재앙을 쪼아 없애준다고 믿는 기복 신앙이다. (3)복조리 걸기: 쌀을 이는 조리 한 쌍에 쌀과 엿을 넣어 기둥에 거는 풍습이다. 조리가 쌀에서 돌 등 이물질을 걸러내듯, 새해에는 나쁜 것들은 걸러내고 복만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다. 3. 유대인의 새해와 세시풍속 1) 나팔절(유대인의 4대 명절) : 로쉬 하샤나(ראש השנה) 유대인의 설날인 ‘로쉬 하샤나’는 하루로 끝나지 않는다. 이날부터 10일 후인 ‘욤 키푸르(대속죄일)’까지 회개의 기간을 갖는다. 시기적으로는 양력 9월 말이나 10월 초(티쉬리월)이며, 유대인들은 이 달을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달로 여긴다. (단, 출애굽기에서는 아빕월을 한 해의 첫 달로 규정한다.) 히브리어 ‘로쉬(ראש)’는 머리, 시작, 으뜸을 뜻하며, ‘하샤나(השנה)’는 정관사 ‘하’와 ‘해/년’을 뜻하는 ‘샤나’가 합쳐진 말이다. 즉 ‘해의 머리(시작)’라는 뜻이다. 성경에는 ‘로쉬 하샤나’라는 직접적인 명칭은 없으나, 레위기 23장 24절(“일곱째 달 곧 그 달 첫 날은 너희에게 쉬는 날이 될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과 느헤미야 8장을 근거로 오늘날까지 유대인의 4대 명절인 ‘나팔절(욤 테루아)’로 지키고 있다. 2) 나팔절(새해)의 세시풍속 : 이날 유대인들은 토라를 읽으며 “샤나 토바(שנה טובה, 좋은 새해 되세요)”라고 인사한다. 또한 사과와 석류 알갱이를 꿀에 찍어 먹는데, 이는 새해가 꿀처럼 달콤하고 석류처럼 풍성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다. 제사장이 양각 나팔(쇼파르)을 부는 것은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고 깨어 있는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하자는 신앙적 결단을 상징한다. 4. 신앙적 의미와 결론 한국과 유대인의 설날은 모두 단순한 축제를 넘어 ‘회개와 근신’을 통해 자신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복을 예비한다는 공통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제사, 부적, 복조리 등 미신적 행위에 의지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는 지난날의 과오를 회개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의 은혜 안에서 영적인 양각 나팔을 불며 믿음으로 전진하는 복된 설 명절을 보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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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연말·연시 용어 4: 우리나라와 유대인의 설날과 세시 풍속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