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연월일 2026-04-2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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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욜로(YOLO)’의 시대를 넘어, 부활의 참된 소망으로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욜로(YOLO)’라는 말이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이 말은 “인생은 한 번뿐이니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며 살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 땅의 삶이 전부인 양, 오늘을 마음껏 소비하고 즐기라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길어진 100세 시대라 할지라도 지나고 보면 인생은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날아가는 화살과 같이 쏜살같이 흘러갑니다. 만약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이 땅의 삶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면 그 짧은 여정의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지독한 허무와 공허 그리고 죽음 앞의 우울함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인 ‘부활’은 이 허무한 인생의 마침표를 영원한 생명의 쉼표로 바꾸어 놓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겨울이 되어 얼어붙었던 가지에 봄이 되면 다시 잎새가 싹트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영원한 삶이 예비되어 있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단지 죽음 이후의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는 강력한 원동력입니다. 슬픔을 사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 릴런드 스탠퍼드는 수재였던 외아들을 갑자기 잃고 극도의 슬픔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으니 저 대신 세상의 청년들을 도와주세요”라는 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그의 인생관은 완전히 바뀝니다. 아들이 천국에 살아있다는 부활의 소망을 품게 된 그는 당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헌납해 오늘날의 명문 스탠퍼드 대학을 세웠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개인의 절망을 넘어 수많은 젊은이를 살리는 위대한 헌신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어느 호스피스 병동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젊은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 남긴 편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가, 엄마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향해 가는 문이란다. 기나긴 겨울을 이기고 봄에 피어나는 저 꽃들처럼 우리도 눈물 없는 그곳에서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이처럼 부활의 소망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위대한 사랑과 용기를 현재의 삶 속에 불어넣습니다. 성경은 부활한 우리가 누릴 미래에 대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라고 약속합니다. 부활은 눈물도 사망도 애통함도 없는 완벽하고 행복한 삶이 열리는 기적입니다. 이 땅의 쾌락만을 좇는 ‘욜로’의 허무함을 넘어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가는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2026년 부활절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참된 기쁨과 미래에 대한 찬란한 소망이 상처받고 지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가득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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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8
  • [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부활절을 맞이하는 믿음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세번의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ㅡ.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신 후 처음의 사람에게 1.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창1;28 하나님이 아닌 존재인 뱀이 처음의 사람에게 찾아와 그들의 욕구를 채우도록하고 뱀의 사상을 따르게 한 후..세상은 어둡게 변해 버렸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2.정녕 죽으리라..ㅡ창2;17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찌니라,ㅡ창3;19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고, 밭은 소출을 내지 않고 행복했던 가정에 행복은 간 곳 없고, 형이 동생을 해하고 장례를 치르고 부부는 갈등을 겪고,,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한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 지금도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고, 영생의 나라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 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ㅡ 요11;25-2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시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주시고 ㅡ무덤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십니다.ㅡ요528. 죽음으로 가는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ㅡ 요3;16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의 댓가를 치르고서야 우리 믿는 자들이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ㅡ그가 찔리고 그가 상하고 그가 징계를 받고, 그가 체찍에 맞음은 우리 허물과 죄와 불안과 걱정과 공포, 병 때문인 것을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ㅡ사53;5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하셨고. 사53;6.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들의 저주가 그를 믿음으로 물러가는 복된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3;13-14 이 말씀이 부활절을 맞이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힘이 되고 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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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전서 1:3) 할렐루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온 마음 다해 찬양합니다. 2026년의 봄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에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이웃들의 삶 위에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죽음의 권세도 이길 수 있다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처럼 온 세상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경제적인 어려움들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빈 무덤의 승리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과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거룩한 백성된 우리는 생명의 부활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이번 부활절을 시작으로 경남 지역 구석구석에 산 소망을 전하는 통로로 소외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무너진 마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 부활의 아침은 어둠이 지나고 반드시 빛이 온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자 확증입니다. 비록 현실의 고난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지라도,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신뢰하고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갈등이 있는 곳에 화해를 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다시 한번 우리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이 기쁜 소식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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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통영기연 곽만섭 목사
    사랑하는 경남신문 독자들과 경남 성도들께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아침에 선 교회와 성도들이 이 놀라운 생명의 복음을 다시 붙들며, 믿음 가운데 새 힘을 얻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나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의 상황은 여전히 우리를 흔들지만, 주님께서 살아계신 한 교회는 무너지지 않으며 우리의 믿음 또한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능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위에 부활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여, 각 가정과 삶의 자리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일상 속에서 부활의 기쁨이 실제가 되어, 지친 마음을 회복시키고 서로를 위로하는 은혜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역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흘려보내며, 말과 삶으로 복음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작은 섬김과 나눔이 모여 이웃에게는 위로가 되고, 사회에는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어둠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의 은혜로 날마다 새 힘을 얻고, 기쁨으로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여러분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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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창녕기연 안덕수 목사
    부활에 아침에 고백할 승리의 고백 매해 맞이하는 부활절인데 올해는 더욱더 그 의미가 깊이 다가온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의 한말씀, 다이루었다(요19:30)는 말씀이 마음속에서 계속 울린다. 모든것을 하나님께맡기시고, 다 이루심의 완성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그분의 마지막은 승리와 완성의 선언이셨다. “다 이루었다.”이 한마디에는 완전한 지불의 선언이다. 예수는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값을 하나하나 치르셨다. 낮은 땅에 오심, 모욕과 조롱, 가시 면류관, 십자가의 고통까지 치르시면서 그 모든 과정은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는 길이었다. 이때 휘장이 갈라지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무너졌다.죄로 인해 닫혀 있던 길이 열렸고, 하나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다가오시는 분이 되셨다.어쩌면 우리는 이 장면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두 팔을 벌리사 안아주신 사건이다. “이제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 십자가는 단지 고난의 상징에서 용서와 초대의 상징이 된것이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고백은 죽음을 앞둔 체념이 아니다.사명을 완수한 자의 평안이며, 전적인 신뢰의 표현이다. 우리는 흔히 ‘안식’을 쉼으로 이해한다.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안식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인간은 여섯 날 동안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안식일은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날이라는 것이다.이 통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우리는 끊임없이 계획하고, 통제하려 하며, 결과를 붙잡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커진다.그러나 예수의 마지막 고백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준다. “맡겨라.”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괴로움과 눈물의 시간이 찾아올 때, 심지어 과거의 상처와 실패까지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안식을 경험한다. 부활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승리의 선언을 한다. 십자가는 겉으로 보면 패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죄와 죽음을 이긴 승리가 담겨 있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말한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따라서 믿음의 삶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삶.붙잡으려 하기보다 의탁하는 삶.그리고 그 고백은 매주 예배 속에서, 또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반복되어야 한다. 내 삶을 주께 맡김을 통해 신앙은 완성되어 간다. 참된 안식과 승리를 경험하게 되기실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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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진해기연 정용기 목사
    사랑하는 진해와 경남 지역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우리의 믿음의 핵심으로서, 절망 가운데 있는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소망입니다.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현재의 능력이며, 미래를 향한 확실한 약속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고난과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시대는 세계 각국의 이기주의와 전쟁의 소식, 경제적 어려움과 이념의 대립, 빈부와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각자의 삶에 놓인 무거운 짐들로 인해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려움 속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평강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지역사회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부활 신앙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생명을 받은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 희망을, 상처의 자리에 치유를, 분열의 자리에 화해를 이루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진해와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가 한마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나누며 이 땅 가운데 생명의 복음을 더욱 힘있게 전하는 증인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6년 부활절 진해기독교연합회 회장 정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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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박동철 장로] 바벨탑 위에 자리 잡는 AI 기술이 되나
    최근 지인이 읽고 있는 발터 벤야민이 지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비평서를 잠시 빌려 읽었다. 이 책의 저자 발터 벤야민은 독일 출신 유대인으로 철학과 미학 분야에서 저술 활동을 한 작가이다. 책의 줄거리는 작가가 20여 년 전 향후 AI 기술 시대를 예상했다는 점이다. AI 시대가 오면 예술작품에 있어 진품과 가짜의 판별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우리는 지금 AI 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생활 적응의 시대에 돌입했다. AI 기술이 작가의 예상대로 오늘날 예술품 시장에서 대혼란을 일으키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이 책에서 작가의 탁월한 예지력에 감탄할 수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AI 기술 시대에 걱정되는 바가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챗GPT, 제미나이 활용법을 배우는 붐이 일고 있고, 산업 현장은 물론 자동차와 가정 모든 곳에서 이제 로봇과 함께 살아가는 시대에 직면했다. 문제는 이것이 교회에 크고 무섭게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교회에서 AI 기술이 교회 행정을 돕고 다양한 교육 현장에 이롭게 적용되고 있다. 교회는 우리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이다. 만인이 교회에서 기도하고 찬양함으로써 주의 음성을 듣기도 한다. 주로 목사의 설교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많다. 예배의 비중과 중심에 설교자의 말씀 선포가 가장 중요시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요즘 교계를 비롯해 곳곳에서 ‘AI 설교’라는 뜨거운 담론으로 논쟁과 토론이 일고 있다. AI 기술이 설교 원고를 만들고 있다는데, 우려의 강도가 높아가고 있다. 설교자가 성도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설교문을 준비하는 데에는 다양한 준비가 필요하다. 성경 본문을 잘 전달하기 위해 여러 서적을 읽고, 사안에 대한 깊은 사유도 중요하다. 설교자가 직접 체험한 생활 영성도 필요하다. 그런데 AI 기술에 주제 설교 원고를 부탁하면 문장적으로 체계를 갖춘 완성도 높은 설교문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과연 성도에게 은혜가 되는가. 그러나 AI 기술에 의존한 설교문은 자료에 불과하다는 주류의 비판을 대부분 수긍한다. 그럼에도 시대 흐름에 민감한 설교자들은 AI 기술이 인간의 영역을 능가하게 될 때, 로봇에 의존하는 교회 예배 문화가 나타날 것이라고 비판한다. 피지컬 로봇(physical AI)이 직접 설교하는 이상한 세상까지 생각해 보아야 할까. 벤야민 작가가 예언했듯이 판별 불가능한 예술작품처럼, 교회에도 판별이 어려운 설교 문장이 침투하게 될 개연성은 있다. 설교자의 설교는 깊은 기도와 묵상, 본문 준비를 통해 성경 말씀에서 다시 들려주는 말씀의 깊이로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게 된다. 설교 준비에 AI 기술 의존이 높아지면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 오염되고, 전해지는 말씀이 성도의 영성을 혼돈케 하는 혼선이 올 수 있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또 다른 대혼란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지금 미국과 같이 로봇 기술이 발달하고 인구가 많은 나라에서는 AI끼리 종교성 플랫폼(공동체)을 만들어 수백만 가입 로봇이 모여 종교성 행사를 하는 AI 대형 종교 집단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마치 생명을 가진 인간 대용의 로봇 정체 말이다. 무서움을 불러오는 듯하다. 우리는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을 잘 알고 있다. 홍수 심판을 받은 인류가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자기 의와 지혜로 바벨탑을 쌓다가 온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사람끼리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족속과 족속의 다툼이 생겨났고, 지구촌은 전쟁과 전쟁의 땅으로 발전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2장 8절에서 경고했다. “그들의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여 절하였도다.” AI 기술이 다시 바벨탑 위에 자리 잡게 될까.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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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2
  • [이정희 목사] 3.1 운동이 현대 교회와 교인에게 주는 의미와 교훈은?
    1. 서언(序言) 그동안 기독교인의 생활용어 바로잡기에 대해서 논해왔다. 하지만 이번 호는 잠시 이를 멈추고 제목 그대로 제107주년을 맞이한 3.1 운동이 당시 교회와 어떤 연관이 있으며, 이런 일이 오늘 현대 우리 교회와 교인들에게 어떤 의미와 교훈을 주는지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먼저 3.1운동이 일어난 시작과 당시 교회의 참여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2. 3.1운동의 배경 1910년 8월22일 한일병합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을 합병한 일제는 무단통치로 온갖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를 자행했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를 제한했으며, 너무 가혹한 처벌로 인권을 유린했다. 또한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 등으로 경제적 수탈을 자행했다. 여기에 국제적인 많은 이유가 복합되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 속에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난 만세 사건이 1919년 3월 1일의 민족 저항 운동이었다. 3. 3.1운동과 교회의 역할 1) 교회 중심의 3.1운동: 1919년 3월 1일 정오에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함으로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은 당시의 교회와 교인들이 거의 중심이었다. 그때의 한국 교인 수는 전체 인구의 1.7%였지만, 독립선언서를 선포한 민족 대표 33인 중에는 16명이 교인이었다. 또한 만세운동은 75%가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특히 이때는 코로나보다 더한 스페인 독감이 유행했던 때이다. 당시 전국 인구가 약 1천700만 정도였고, 감염자는 약 7백50만 정도였으며, 약 14만 명이 사망했다. 감염의 위험도 있었지만, 당시 참여한 교인들이 약 20만 명이었을 정도로 3.1운동의 주체는 교회와 교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각 교회와 교인들의 사례: 일시별과 참여한 교회들을 보면, 첫째로는 서울 파고다 공원 부근에 있었던 승동교회였다. 이 교회 지하실에서 작성한 독립선언서 유인물은 학생들이 3월 1일을 시점으로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시행하자는 결의를 하고 이를 전국에 배포했다. 이러한 장소 제공과 모체가 된 승동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이 교회는 당시 천대받든 백정인 박성춘 장로를 비롯한 약 20여명의 백정들이 주로 모이는 작은 교회였다. 그의 아들인 박봉출(박서양)은 에비슨 의료 선교사의 도움으로 광혜원(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에서 공부하고 1907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의사가 되었다. 그도 또한 3.1운동을 도왔고 나중에 만주에서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독립군들의 군의관이 되었다. 또한, 아버지 박성춘과 함께 천민인 백정을 비롯해서 고질적인 반상의 신분 타파에 절대적 공헌을 했다. 승동교회에서 시작된 3.1운동에 참여한 교회는 3월 6일에 전북 군산의 구암교회, 8일은 대구 제일교회와 남산교회, 4월 1일은 천안의 아우내 장터에서 유관순과 병천교회가 중심이 되었다. 4월 15일에는 화성 제암리교회의 만세운동이 있었으나 일제는 주민들을 교회 안에 몰아놓고 그대로 불태워 죽였다. 경남의 경우는, 4월 3일 진해에서 주기철 목사의 4촌인 주기용이 웅동에서, 4월 6일은 밀양 춘화교회와 밀양교회 등에서 만세운동이 있었다. 이러한 만세운동으로 전국의 교인들 630여 명의 살상과 많은 교인들이 투옥되게 되었다. 3) 기독교 중심의 3.1운동의 결과: 만세운동으로 인해 전국으로 검거령이 내려지자 이를 이끌던 지도자들은 중국 등으로 망명하여 1919년 4월 10일에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설립했다. 이때의 취지문을 보면, "우리들은 만세운동을 통하여 조선의 독립을 쟁취한 후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3.1 운동의 중심에 기독교적 가치가 중심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기독교 정신은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김구, 이승훈, 이상재, 남궁억, 조만식, 김교신, 윤치호, 김규식, 여운형 등의 많은 지도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4. 3.1운동이 현대 교회에 주는 교훈과 결론 이상으로 볼 때 3.1운동은 당시 기독교적 애국심의 가치관이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엄청난 힘이 있다. 그 당시 교인이 전체 인구의 1.7%였다면, 지금은 15~16%이다. 그러나 힘이 없다. 교회가 사회 걱정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걱정한다고 할 정도로 여러 문제가 있다. 반면 현재의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많은 분야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인 문제는 오히려 전방위적으로 교회 탄압을 시도하고 있다. 만시지탄의 차별금지법 통과와 이로 인한 동성애 문제 등, 우리 교회가 고수하고 방어해야 될 문제가 산적해 있다. 하지만 교회는 현재까지 비교적 복지부동이다. 왜 교회의 지도자들은 침묵하고 있는가? 란 비판도 많다. 하지만 3.1절의 시작은 교회의 유명 리더자들이 아니었다. 민족대표 16명도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무명의 목회자와 장로와 교인들이었고, 승동교회나 앞장섰던 이들도 학생들이거나 일반 교인들이었다. 이러한 우리의 선조들은 107년을 지난 현재의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고 본다.“우리의 후대들인 그대들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왜 침묵하고 있는가?”. 다시 한 번 우리의 선열들에 대해서 옷깃을 여미며 “나는 오늘 이 현실에서 무엇을 외쳐야 될 것인가?”를 심각한 마음으로 고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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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6-03-02
  • [기고] 고애연 창립 1주년, 침묵을 거부한 1년
    2026년 2월 28일, 우리는 고신애국지도자연합(고애연) 창립 1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우리는 실내에서 축하하지 않았다. 우리는 광장으로 나갔다. 1년 전, 두 사람의 단톡방으로 시작된 작은 모임이 오늘 광화문에서 한국교회와 전 국민 앞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조직의 확장이 아니라, 시대적 위기 속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책임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2025년 2월 28일 아침,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고명길 목사가 “손현보 목사를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옥재부 목사가 “우리 두 사람이라도 시작해 봅시다”라는 응답이 돌아왔다. 그 한마디로 단톡방이 열렸다. 원대연 목사가 합류하여 세 사람이 되었고, 이어 이일호, 노은환 목사가 함께하여 다섯 사람이 되었다. 그 다섯 사람의 결단은 열흘 만에 160명의 목회자를 모으는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2025년 3월 13일, 국회 정론관에서 첫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우리는 공적 책임의 자리로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동역의 진정성이 시험을 받았고, 침묵과 결단이 분명히 갈라지는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시간을 통해 우리를 정금같이 빚으시고 다듬으셨다. 그날의 작은 결단이 오늘의 연합을 낳았다. 1. 고애연의 지난 1년 지난 1년은 준비와 확장의 시간이었다. 신실한 회장단과 임원단이 세워졌고, 7명의 필진과 45명의 실행위원, 200여 명의 장로들이 기둥처럼 함께 서 주었다. 13차례의 실행위원회, 5회의 정치신학 세미나, 14회의 시국선언과 성명 발표, 50여 차례 집회와 기도회가 이어졌다. 120여 편의 기고와 논평이 교단과 사회를 향해 던져졌다. 54차례의 각종 집회에 1만여 명이 참여했고, 기드온 300 용사를 허락받았으며, 1천 명의 회원이 연합 안에 정착하였다. 이 숫자는 자랑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대 속에서 우리를 사용하신 흔적일 뿐이다. 2. 1주년, 우리는 축하 대신 광화문으로 원래 오늘 우리는 함께 모여 1주년을 기념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광화문 국민대회 측의 요청이 왔다. 그리고 우리는 결단했다. “축하보다 사명이다.” 오늘 광화문 국민대회에서 고애연은 한국교회와 애국 국민들과 함께 섰다. 이성구 대표는 설교로 말씀을 선포했고, 옥재부 실행위원장은 교회의 공적 책임과 연합을 외쳤으며, 박경만 총무는 세이브코리아 자격으로 모두발언을 했다. 고애연 청년대학팀은 화투사 오창성 화백의 애국 그림 전시회를 열어 광장 한복판에서 문화적 증언을 펼쳤다. 1주년에 우리는 케이크를 자르지 않았다. 우리는 광장에서 깃발을 들었다. 3. 고신을 넘어 전국으로 확장되는 운동 불과 한 주 전, 김한식 목사는 광주 금남로에서 차별금지법과 이른바 교회해체법의 위험성을 강연했다. 울산에서 시작된 고애연은 부산과 대구, 서울을 거쳐 광화문과 광주 금남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불과 1년 만에 지역 모임이 전국적 애국신앙 네트워크로 확장되었다. 이것은 조직의 능력이라기보다, 한국교회 안에 누적된 문제의식과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이라 믿는다. 4. 1년의 평가 – 우리는 무엇을 해 왔는가 첫째, 우리는 침묵하지 않았다. 손현보 목사 징계 청원과 구속 사태에 대해 원칙적 입장을 밝히고, 검찰과 법원 앞에서 수차례 집회를 열었다. 정교분리의 왜곡, 설교 통제, 차별금지법과 교회 해체를 우려케 하는 입법 시도에 대해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둘째, 우리는 기도와 교육을 병행했다. 집회만이 아니라 기도회를 열었고, 선언만이 아니라 정치신학 세미나를 통해 목회자와 장로를 깨우는 교육을 이어왔다. 셋째, 우리는 고신의 저항 정신을 다시 호명했다. 순교 신앙은 내면적 경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불의 앞에 서는 공적 책임임을 강조해 왔다. 넷째, 우리는 세대와 직분을 아우르는 연합 구조를 세웠다. 목회자, 장로, 청년이 함께 서는 조직적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몇 사람의 모임이 아닌 지속 가능한 연합체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5. 향후 결단 그러나 우리는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우리는 분명히 선언한다. 첫째, 잠든 고신을 깨우겠다. 일제 치하에서 침묵하지 않았던 고신의 본래 저항 정신과 순교 신앙을 오늘에 되살리고, 침묵과 타협, 보신주의를 벗고 고신 정신을 회복하겠다. 둘째, 한국교회의 갱신을 돕겠다. 왜곡된 정교분리 프레임을 바로잡고, 설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지키겠다. 더 나아가 애국 신앙을 지향하는 교회와 단체들을 묶는 연합의 마중물이 되겠다. 셋째, 대한민국의 자유민주 헌정 질서를 지키겠다. 국가 정통성을 약화시키고 자유민주 체제를 흔드는 흐름에 침묵하지 않으며, 자유 시민 단체들과 연대하여 책임 있는 공적 참여를 이어가겠다. 넷째, 복음적 통일을 준비하겠다. 김일성 일가주의라는 우상적 체제를 거부하고, 한반도에 복음의 자유가 선포되는 날까지 기도하며 전진하겠다. 통일은 이념의 통합이 아니라 복음의 회복이어야 한다. 6. 맺음 선언 1년 전, 우리는 단톡방이었다. 오늘 우리는 광화문에 서 있다. 1년 전, 우리는 몇 사람이었다. 오늘 우리는 전국으로 확장된 연합이 되었다. 1년 전, 우리는 조용히 시작했다. 오늘 우리는 공개적으로 선포한다. 고애연은 멈추지 않는다. 고신을 깨우고, 한국교회를 갱신하며, 대한민국을 자유민주국가로 굳게 세우고, 복음으로 통일을 준비하는 그날까지 우리는 기도하며 연합하여 경주할 것이다. 축하가 아니라 출정이다. 1주년은 끝이 아니라, 더 깊고 더 넓은 사명의 시작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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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1
  • [기고]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 욕설 논란, 반성과 회복 그리고 교단적 성찰의 기회
    문제의 발단: 녹취 공개로 드러난 목회 리더십 논란 최근 부산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와 관련된 교역자 회의 녹취가 외부로 공개되면서 교계 안팎에 큰 파장이 일고 있다. 공개된 녹음에는 부목사와 전도사들을 향한 거친 언어와 위압적 표현이 담겨 있었고, 일부 전·현직 사역자들의 증언까지 이어지며 논란은 빠르게 확산됐다. 김문훈 목사는 포도원교회를 부산지역 대표 대형교회로 성장시킨 인물이며, 고신 교단 내에서도 영향력 있는 리더십과 연결된 목사라는 점에서 파장이 더욱 컸다. 무엇보다 교회 내부의 문제가 공적 영역으로 노출되면서 목회자의 언어가 사회적 조롱의 대상이 된 현실은 많은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1. 개인 논란을 넘어선 교단 신뢰의 문제 이번 사안은 단순한 실언이나 일회적 사건으로 보기 어렵다는 시선도 존재한다. 일부 사역자들이 장기간 언어적 압박과 상처를 경험했다는 증언이 이어지면서 문제는 개인의 성향을 넘어 구조적 질문으로 이어졌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왜 내부에서 걸러지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이다. 논란이 확산되자 교계 안에서는 상반된 반응이 나타났다. 모든 공적 직위에서 사퇴하라는 요구와 회개와 성숙의 기회를 주고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신중론이 동시에 등장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교단 전체의 공적 신뢰가 흔들린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특히 개혁주의 정체성과 신앙 양심을 강조해 온 고신 교단이라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더 큰 상징성을 갖게 됐다. 2. 언론사를 통한 사과문 발표의 의미 논란 이후 김문훈 목사는 교회 홈페이지 사과에 이어 기독교보 및 각종 언론을 통해 보다 공개적인 사과문을 발표했다. 사과문에서 김 목사는 부적절한 언어 사용을 인정하고, 상처를 입은 사역자들과 성도들에게 사과의 뜻을 밝히며 책임을 통감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교단과 기독교계의 공적 매체들을 통한 사과라는 점에서 이전보다 한 걸음 나아간 조치로 평가할 수 있다. 이는 교회 내부 차원을 넘어 공적 책임을 의식한 행보라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가 있다. 논란을 축소하거나 방어하기보다 사과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점은 갈등 수습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번 사과문에는 세 가지 분명한 메시지가 담겼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피해를 입은 부목사와 사역자들에 대한 직접 사과 의지다. 김 목사는 상처를 입은 이들을 가능하다면 공개적으로 초청해 사과하고 위로의 시간을 갖겠다고 밝혔다. 이는 단순한 유감 표명을 넘어 관계 회복을 전제로 한 사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둘째, 교단을 향한 공적 사과와 피해 회복 노력이다. 이번 일을 개인 문제가 아니라 교단 전체에 상처를 남긴 일로 규정하며 총회 앞에 공식적으로 사과했고, 피해자 회복과 건강한 목회 생태계를 위해 구체적 지원 방안을 모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과의 범위를 교회 내부에서 교단 공적 영역으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이전보다 진전된 모습으로 평가할 수 있다. 셋째, 부총회장 거취를 포함한 공적 직위에 대한 입장이다. 김 목사는 어떤 직분에도 연연하지 않겠으며 자신의 거취를 총회 임원회와 선거관리위원회의 판단에 일임하겠다고 밝혔다.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교단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선언은 공적 책임을 의식한 표현으로 읽힌다. 3. 남은 과제: 사과 이후는 행동이다 그러나 사과의 진정성은 결국 이후의 행보로 평가된다. 사과문이 발표된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다. 무엇보다 상처를 입었다고 증언한 사역자들을 향한 개별적 접근이 필요하다. 직접적인 사과, 충분한 경청, 관계 회복의 시도는 회개의 가장 기본적인 열매다. 여기에 실질적 회복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심리적 치유를 위한 상담 지원, 사역 단절을 겪은 이들에 대한 명예 회복과 지원에 대한 노력, 공동체적 위로와 배려 등이 함께 논의될 수 있다. 이는 법적 책임을 넘어 영적 공동체의 책임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다. 또한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와 리더십 성찰도 필요하다. 건강한 목회 리더십에 대한 기준을 다시 세우고, 공동체 앞에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 줄 때 사과는 공동체적 의미를 갖게 된다. 4. 선거문화와 리더십 검증이라는 구조적 질문 이번 사건이 단순한 개인 논란을 넘어 교단적 논의로 확산된 이유 중 하나는 교단 리더십 구조와의 연관성 때문이다. 김문훈 목사가 교단 내 주요 리더십 흐름과 맞닿아 있었던 만큼, 논란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리더십이 어떻게 공적 위치까지 올라갔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이 지점에서 선거 문화와 리더십 검증 구조에 대한 성찰 요구가 등장한다. 줄 세우기, 비공식 영향력 구조, 인물 중심의 권력 재편이 반복되어 왔다면 이제는 냉정하게 돌아볼 시점이다. 고신 교단은 역사적으로 신앙 양심과 개혁주의 전통을 강조해 온 공동체다. 그렇기에 이번 사건은 특정 인물의 문제로 축소되기보다 공적 리더십 검증 구조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선거문화 개선, 윤리기준 명문화, 공적검증 강화, 리더십 책임구조 정립 등 제도적 논의가 뒤따를 때 위기는 발전과 성숙의 계기가 될 수 있다. 5. 맺음말: 사과를 넘어 성숙으로 가는 길 이번 논란은 교회와 교단에 분명한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위기는 공동체의 수준을 드러내는 동시에 방향을 재설정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에 대한 진정한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을 때 용서와 화합도 동시에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사과는 시작됐다. 남은 것은 행동과 실천이다. 피해자 회복을 위한 진정성 있는 노력, 책임 있는 리더십, 그리고 구조적 성찰이 함께 갈 때 이번 사건은 단순한 논란을 넘어 성장과 성숙의 전환점으로 기록될 수 있다. 교회는 위기 속에서 정화되고 성장해 왔다. 이번 사건 역시 부끄러움으로만 남을지, 아니면 성숙의 이정표가 될지는 지금부터 김문훈 목사와 우리 모두의 선택에 달려 있다. 꾸짖고 정죄하기 보다는 함께 고쳐가고 세워가는 고신교단이 되기를 진정으로 소망한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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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5
  • [기고] 권력의 개가 된 좌파 판사의 민낯인가?
    어제 지귀연 판사는 판결문에서 감성적인 언어로 ‘성경’과 ‘촛불’을 인용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과 일반 시민은 성경 구절과 비유가 등장하자 그 판결이 마치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것처럼 착각하며 쉽게 수긍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의 본질을 왜곡하여 정치적 목적에 이용한 극히 위험한 행태입니다. 전국의 목회자와 교회는 이 비유가 얼마나 부적절하며, 사실상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반국가적 수사(修辭)인지를 교인들에게 반드시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지 판사가 인용한 촛불 비유와 찰스 1세 사례의 무지는 대한민국 판사의 수준이 이토록 처참한가 하는 자괴감을 넘어, 사법부가 권력의 하수가 될 때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1. 사건의 본질 왜곡: ‘개인의 절도’와 ‘국가 수호’를 혼동한 무지 지 판사는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촛불을 훔치는 것은 개인의 비도덕적 범죄일 뿐입니다. 반면, 대통령의 계엄은 야당의 29회 탄핵 폭주와 대통령실 예산 0원 편성이라는 ‘입법 독재’로 인해 국정이 마비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국가 시스템을 보호하려 한 방어적 결단이었습니다. 국가를 구하려는 소방관에게 절차를 따지지 않았다고 ‘절도범’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사건의 본질조차 파악하지 못한 천박한 비유입니다. 2. 역사적 맥락 오독: ‘절대 군주’와 ‘민주제 대통령’을 구분 못한 무지 재판부는 국회에 군대를 보냈던 찰스 1세의 참수 사례를 인용했으나, 이는 역사적 실체를 완전히 왜곡한 것입니다. * 찰스 1세: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법 위에 군림하며 국회를 무력화하려 했던 절대 군주입니다. * 윤 대통령: 헌법 제77조라는 명문 규정에 근거하여 국가 위기를 타개하려 한 민주적 대통령입니다. 유혈 내전을 일으킨 폭군과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이 헌법 절차에 따라 계엄을 해제한 대통령을 동일시하는 것은 사법부의 지적 수준을 의심케 합니다. 3. 상황 판단의 오류: ‘촛불’을 꺼버린 주범이 누구인지 모르는 무지 재판부는 대통령이 촛불을 훔쳤다고 비난했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성경을 읽을 촛불(예산과 인사권)’조차 야당에 의해 꺼져버린 국가적 화재 상황이었습니다. 행정부의 숨통을 끊어놓은 입법부의 국헌문란은 외면하고, 이를 정상화하려 한 통치권자의 결단을 비아냥거리는 비유로 폄훼한 것은 재판부가 이미 정치적 편향성에 매몰되었음을 증명합니다. 4. 헌법적 월권: 계엄 판단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모르는 무지 대한민국 헌법 제77조 5항은 계엄의 적절성을 판단할 유일한 권한을 사법부가 아닌 국회에 부여하고 있습니다. 국회의 해제 요구를 대통령이 수용한 순간 법적 절차는 종결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재판부가 17세기의 초법적 법정처럼 군림하며 "민주주의는 피를 마신다"는 제퍼슨의 문구까지 인용해 형벌을 내린 것은 그 자체가 사법 독재이자 명백한 월권입니다. 결론: 역사의 심판대와 하나님의 공의가 기다린다 지귀연 판사의 비유는 대통령을 파렴치한 범죄자로 낙인찍기 위한 저급한 정치 수사에 불과합니다. 거룩한 성경의 가치를 빌려와 자신의 정치적 편향성을 정당화하려 한 시도는 신앙인들에 대한 기만이요, 하나님에 대한 오만입니다. 진정으로 촛불을 훔친 자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의 헌법적 권한을 찬탈하고 사법의 이름으로 법치를 살해한 민주당의 입법부와 그에 동조하는 우리법연구회의 사법부 세력입니다. 인간의 법정은 거짓 비유로 눈을 가릴 수 있을지 모르나, 만물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심판대는 반드시 이 무도하고 무식한 판결을 심판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이 영적, 정치적 기만술에 속지 말고 깨어 기도하며 강단에서 침묵하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것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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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0
  • [기고] 윤석열 전 대통령 무기징역 선고는 사법부의 ‘사망선고’이다
    오늘 대한민국 사법부는 스스로 존재 이유를 부정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지귀연 재판장)가 12·3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국가 원수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것은,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고유권한과 통치행위의 특수성을 전면 부인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사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이 '정치적 단죄'를 강력히 규탄하며, 판결의 모순을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1. 삼권분립의 모순: ‘견제’ 없는 ‘침탈’은 독재다 대한민국은 입법, 행정, 사법이 균형을 이루는 삼권분립 국가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이 균형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렸다. 1) 비대칭적 권력 구조의 모순 입법부는 탄핵소추권을 통해 행정부를 마비시킬 수 있다. 진정한 삼권분립 국가라면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에게도 이에 상응하는 '국회 해산권'이 보장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국회 해산권이 삭제된 기형적 구조 속에서, 대통령이 입법 독재에 맞서 꺼낸 계엄권은 무너진 국가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헌법적 자구책이었다. 2) 고유권한의 정당성과 절박한 상황 재판부는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칠 수 없다"는 비유로 대통령의 결단을 폄훼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단순히 촛불을 훔친 것이 아니라, 야당이 29차례의 무분별한 탄핵으로 행정부의 심장을 멈추고, 대통령실 예산을 '0원'으로 만들어 국가의 기능을 완전히 고사시키려던 ‘국가적 화재’ 상황이었다. 또한, 끊임없이 제기된 부정선거 의혹을 해소하여 선거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대통령의 노력을 사법부는 '명분'일 뿐이라며 일축했다. 화재를 진압하려는 소방관에게 절차를 따지지 않았다고 방화범의 멍에를 씌우는 것이 과연 정의인가. 2. "대통령의 고유권한을 사법부가 재단할 수 있는가?" 헌법 제77조는 대통령의 계엄권을 명시하고 있으며, 그 적절성을 판단할 유일한 기관으로 '국회'를 지정했다(헌법 제77조 5항). 1) 판단 주체의 오류 국회의 해제 요구를 수용한 순간 정치적·헌법적 절차는 종료된 것이다. 재판부가 "군을 국회에 보낸 것이 핵심"이라며 국회 권한 침해를 내란으로 몰아세운 것은, 대통령의 통치행위를 일반 형사범죄의 잣대로 끌어내린 명백한 월권이다. 2) 폭동 개념의 억지 확대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기물 파손도 없었던 상황을 '한 지역의 평온을 해칠 정도의 위력' 즉, 폭동이라 규정한 것은 내란죄를 무한정 확대 해석한 것이다. "선진국에서 사례를 찾기 어렵다"는 재판부의 고백은 역설적으로 이번 판결이 얼마나 전례 없는 사법적 과잉인지를 스스로 자인한 꼴이다. 3. 수사 절차의 위법성 묵인 재판부는 공수처와 검찰의 내란죄 수사가 '관련 범죄'라는 이유로 적법하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수사권이 없는 기관이 현직 대통령을 겨냥해 벌인 별건 수사를 용인한 것은 법치주의의 기본인 절차적 정의를 사법부가 스스로 내팽개친 것이다. 결론: 역사의 심판대,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대가 남아 있다 오늘 사법부는 정권의 시녀가 되어 헌법을 유린하고, 국가 수호를 위한 결단을 내란으로 둔갑시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사법 정의가 땅에 떨어진 이 비극적인 날을 국민은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권력은 짧고 진실은 영원하다. 인간의 법정이 거짓으로 눈을 가릴지라도, 우리에게는 역사의 심판대가 남아 있으며, 그 위에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불꽃 같은 눈동자로 살피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대가 엄중히 기다리고 있다. 역사는 언제나 정의로 회귀하며,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인의 득세를 방관하지 않으실 것이다. 자유 우파 국민 여러분,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오늘의 판결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투쟁의 시작입니다. 이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은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결코 좌절하지 말고, 대한민국에 반드시 법치가 바로 세워지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날이 올 것임을 굳건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실은 가둘 수 없으며, 정의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우리는 이 땅의 자유와 헌법 가치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멈추지 않고 이 선한 싸움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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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0
  • [하수룡 장로] 정 구 죽 천(丁口竹天)
    옛날 선비가 살고있는 집에 손님이 찾아와 머물면서 아침 밥시간이 되었는데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참다못한 하인이 집주인에게 인량복일(人良卜一)하오리까 하니까 주인은 월월산산(月月山山)이라 답했다. 그말을 엿들은 손님은 정구죽천(丁口竹天)이라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정구(丁口)자가 합치면 가(可)자가 되고 죽천(竹天)자도 합치면 소(笑)자가 되어 가소(可笑)롭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세 사람이 주고받은 말처럼 선진국이 되어 많은 나라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대한민국의 현재의 현실에서 일반인인 우리가 생각해도 참으로 가소롭게 여겨지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가소롭다는 영어로 ridiculous(가소롭다) 또는 laughable(우스꽝스럽다)로 번역된다. 가소롭다의 제주 방언은 하가수하다로 사용하기도 한다. 가소롭다는 표현은 비현실적이거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되지만 흔히 누군가의 행동이나 주장이 상식에 어긋날 때 사용되며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경시하거나 비난할 때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 헌법이 존재하고 있는데도 정략적으로 집권 세력의 구미에 맞게 개정하려고 한다면 그것 가소로운 일이고 국민이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한국은 선진국이라 행복하게 잘 살고있지만 지금 북한은 핵으로 무장한 상태이고 우릴 적으로 간주하고 이를 갈고 있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찬양하는 종북세력이 국회나 각종 단체에 활동하고 있다면 더욱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국가인 애국가도 부르지 않고 태극기를 밟는 행위로 행사를 치루는 그런 같잖은 사람들을 강제라도 북송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의 두 얼굴을 꼭 기억해야 한다. 벚꽃이 필 때에는 평범한 시민들이 행락객으로 붐빈다. 신사 곳곳에는 군국주의 망령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욱일기의 잔재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 가소로움을 넘어 너무 섬뜩한 느낌이 마저 든다. 그러면 내가 믿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독교는 어떠한가? 정말 기가 찰 정도로 부패하고 엉망이다. 옛날에는 타 총회에서 총회장을 맡으려면 엄청난 재정이 든다고 비판했는데 작금의 우리 고신 총회도 그 이상이 되어버렸으니 정구죽천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역할과 호칭은 교회에서 목사님! 장로님! 이라고 불려지지만 종교지도자는 제대로 낮은 자의 자리에서 섬겨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하고 예수님의 자리에 앉아 왕 노릇을 하려고 한다면 정말 가소롭지 않는가. 목사도 장로도 총회나 노회의 주요 직책을 맡아 단체를 위해 힘을 많이 쓰는 것이 마땅하지만 자질이 함양 미달이고 사회적 평판은 물론 교계 내에서도 형편이 없는 사람을 교권이나 물질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같잖은 조직의 모임이 되어버린다면 어찌 가소롭지 않은가! 필자가 청년입문 직전에 친구가 잘못 처신하면 ‘정구죽천! 정구죽천!’이라고 말하면서 핀잔을 주었던 때를 기억한다. 부쩍 요즈음에 정구죽천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는 건 사회에 가소로운 정치인, 가소로운 종교지도자, 가소로운 어른, 가소로운 친구나 선배가 많다는 의미일까? 2026.02.07. 경남기독신문 초장컬럼 원고
    • 오피니언
    • 초장칼럼
    2026-02-12
  • [조희완 목사] 타협의 내용 (출8:25-32)
    미국이라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첨단 과학과 산업문명을 달리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미국에서 모든 현대문명을 거부한 채로 300년 전 생활상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서 <아미쉬>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미국에는 약 18만 명의 <아미쉬>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자동차, 전화, 컴퓨터, TV, 라디오, 신문 등 모든 과학 문명의 이기를 멀리한 채로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과 더불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 현대문명의 모습은 일체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교통수단으로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옛날 마차를 타고 다니거나 아니면 걸어서 다닙니다. 농사를 지을 때도 트랙터나 발달된 첨단 농기구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멍에를 맨 말이 끄는 쟁기로 밭을 일굽니다. 남자들의 복장은 검정색 양복을 입고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고, 여자들은 짙은 자주색 원피스 차림에 쪽진 머리 모양을 하고 그 위에 하얀 스카프를 두르고 다닙니다. 음식은 순수 무공해 유기농자연식을 먹습니다. 그 <아미쉬>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둘러보면서 제 마음에 강하게 와 닿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미쉬>사람들처럼 모든 현대 문명을 거부하는 정도 까지는 아닐지라도 죄악이 관영한 세상과 분리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도들이 지향해야 할 삶은 세속화 되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악한 사단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실패하게 하기 위해서 가장 흔하고 쉽게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타협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다보면 결국 신앙생활을 실패하게 됩니다. 첫째로, 편하게 믿으라고 타협합니다.(출8:25) 둘째로, 적당히 믿으라고 타협합니다.(출8:28) 셋째로, 형식만 믿으라고 타협합니다.(출10:24) 마귀의 타협에 걸려 넘어지거나 신앙생활을 실패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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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2
  • [정우승 목사] 그저 비만 피하면 족하리
    대다수의 사람들은 중산층으로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각 나라마다 중산층의 정의가 조금씩 다르다. 각 나라별 중산층의 정의가 이렇습니다. 한국에서 중산층이 되기 위해서는 아파트 30평 이상에 살아야 하며, 월급 500만원 이상, 2000 CC 급 자동차를 타야 하며, 예금 잔액이 1억원 이상 보유해야 한다고 정의한다. 이에 반해 미국의 중산층은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야 하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해야 하며, 집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놓여 있어야 한다고 정의한다. 영국은 어떠한가? 영국의 중산층은 페어플레이를 해야 하며,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져야 하며,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아야 하며, 약자를 도와주고, 강자를 대응해야 하며, 불의와 불법에 대처해야 하는 계층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프랑스의 중산층은 어떠한가? 불어 외에 외국어를 하나 해야 하며,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어야 하고,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어야 하며, 남들과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가 있어야 하며, 정의를 지키며, 약자를 도우며 꾸준히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고 정의를 한다. 한국은 중산층과 관련해서 오로지 돈과 관련해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잠언22:1)에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라고 말씀한다. 하지만 한국의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커서 명예와 재물을 동시에 거머쥘 수 있는 직업군으로 보내기를 원한다. 과거 우리의 청렴한 선비들은 재물과 명예 중에서 명예를 택했다. 더 나아가 자신이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 애써 재물을 멀리하는 경향과 돈을 기피하는 습속을 가졌다. 동대문 밖을 나와서 신설동과 보문동의 경계 즈음해서 ‘우산각(雨傘閣)’ 이라는 옛 지명의 마을이 있었다. 같은 마을인데도 선비들과 식자들은 비를 피한다는 뜻으로 ‘비우당(庇雨堂)’이라고 불렀다. 그 마을에 비를 가린다는 초라한 집 하나가 있었으며 그에 유래된 지명이었다. 구한말이나 일제 초기만 해도 이 비우당의 주춧돌과 비우당을 뒤덮는 노송 한 그루가 남아 있었는데 일제 때 도시계획에 의한 신설동의 조성으로 그 흔적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비우당 터로 추정되는 그 곳 주변의 기둥에 아래의 글이 새겨져 있다. ‘현이다재 (賢而多財) 즉손기지(則損其志) 우이다재(愚而多財) 즉익기과(則益其過)’ <현명한 이가 큰 재물을 가지면 곧 그 뜻을 해치며, 어리석은 이가 큰 재물을 가지면 곧 그 과실을 더한다> 는 의미이다. 비우당 기둥에 새겨진 이 글은 <소학> 외편에 나오는 명언으로 우리 옛 선비들의 행동을 구제해 온 가장 영향력 있는 가르침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우산각 마을에서는 고려말 20년 간, 그리고 조선에 들어서 태조, 정종, 태종, 세종 4대에 걸쳐 35년간 나라 일을 돌봤던 정승 유관(柳寬)이 살았던 마을이다. 그는 바른 선비의 조건인 청빈을 생활화하고 살았던 많은 선비 가운데 전형적인 분이었다. 재상을 거쳐 정승이 됐을 때까지도 우산각 마을에서 담장이나 대문마저도 없는 허술한 초가에서 살았다. 그의 청빈한 성품을 잘 알고 있는 태종이 선공감으로 하여금 밤에 몰래 울타리를 둘러놓게 했던 고사는 유명하다. 집이 허술하여 장마철이면 지붕이 새어 방안에 빗물이 떨어지곤 했다. 정승 유관은 그가 과거에 급제했을 때 받은 일산을 방 안에서 펴들고 비를 피했다. 후세에 조선시대 실학자 이수광 선생이 물려받으면서 ‘비를 가리는 집’으라는 뜻으로 ‘비우당(庇雨堂)’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옛 정승이면 지금의 장관보다 높은 벼슬이다. 높은 관직의 봉록으로 겨우 그렇게 밖에 살지 못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유관은 자기의 봉록으로 집안 자체의 지묵값, 다리는 놓는 공공사업에의 시주, 무료숙박소인 원(院)에의 기부 등으로 다 썼다고 한다. 오늘날 성도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바르게 살아야 함이 옳다. 하지만 ‘바르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성도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세상에서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구별됨을 구원받은 이후에도 구별되게, 다르게 살아가야 함이 옳다. 더 엄밀히 말하면 살아내는 것이다. 살아낸다는 것은 그 목표를 향해서 꾸준히 노력을 한다는 의미이다. 그냥을 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알아주는 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실 것이고, 그렇게 외로운 길을 걷는 자신이 잘 알 것이다. 그저 비만 피하면 족함으로 살았던 선비들의 비우당 정신을 되살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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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2
  • [이정희 목사] 연말·연시 용어 4: 우리나라와 유대인의 설날과 세시 풍속은?
    1. 서언(序言) 오는 17일은 올해의 설날이다. 지난 호에서는 양력이든 음력이든 새해가 되면 가장 많이 나누는 덕담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말의 의미와 유래에 대해 논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설날과 관련된 여러 가지 세시풍속과 동요, 그리고 유대인의 설날을 비교 분석하며 이에 대한 우리 기독교인의 자세를 논하고자 한다. 2. 설날과 관련된 여러 가지 상식 1) 왜 ‘까치 설날’이라 할까? : 이날이 되면 어린이들은 윤극영 선생의 동요 <설날>의 가사인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라는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왜 ‘까치 설날’은 어제라고 했을까? 이 말은 원래 까치가 아니라 ‘작다’라는 뜻의 ‘아치’에서 유래했다. 즉, 설날 하루 전인 섣달그믐을 뜻하는 ‘아치설’이 경기도 방언을 거쳐 ‘까치 설날’로 굳어진 것이다. 원뜻은 ‘작은 설날’이다. 물론 《삼국유사》에는 신라 소지왕 때 까치가 왕의 목숨을 구하여 설날 전날을 ‘까치의 날’로 정했다는 설화가 있으나 이는 정설이 아니다. 또한 우리 민족이 예부터 까치를 길조로 여겨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믿었기에 ‘아치’가 ‘까치’로 변형된 것으로 유추된다. 2) 설날의 뜻은? : ‘설’은 나이를 계산하는 단위인 ‘살’의 고어 형태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또한 설날을 ‘신일(愼日)’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신의 날’이라는 뜻이 아니라 ‘삼가다, 근신하다’라는 뜻의 ‘삼갈 신(愼)’ 자를 쓴 것이다. 즉, 새해 첫날부터 복을 받기 위해 몸가짐을 조심하고 근신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3) 설날에 복을 비는 세시풍속 : (1)제사: 조상에 대한 공경의 의미도 있지만, 조상이 내리는 복을 받으려는 목적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음복(飮福)’이다. ‘마실 음(飮)’에 ‘복 복(福)’ 자를 써서,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조상의 복을 이어받으려 하는 것이다. (2)부적: 설날에 붙이는 대표적인 부적으로 ‘삼두일족응(三頭一足鷹)’이 있다. 머리 셋, 발이 하나 달린 매를 그린 부적으로, 이 매가 화재(火災), 수재(水災), 풍재(風災)의 세 가지 재앙을 쪼아 없애준다고 믿는 기복 신앙이다. (3)복조리 걸기: 쌀을 이는 조리 한 쌍에 쌀과 엿을 넣어 기둥에 거는 풍습이다. 조리가 쌀에서 돌 등 이물질을 걸러내듯, 새해에는 나쁜 것들은 걸러내고 복만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다. 3. 유대인의 새해와 세시풍속 1) 나팔절(유대인의 4대 명절) : 로쉬 하샤나(ראש השנה) 유대인의 설날인 ‘로쉬 하샤나’는 하루로 끝나지 않는다. 이날부터 10일 후인 ‘욤 키푸르(대속죄일)’까지 회개의 기간을 갖는다. 시기적으로는 양력 9월 말이나 10월 초(티쉬리월)이며, 유대인들은 이 달을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달로 여긴다. (단, 출애굽기에서는 아빕월을 한 해의 첫 달로 규정한다.) 히브리어 ‘로쉬(ראש)’는 머리, 시작, 으뜸을 뜻하며, ‘하샤나(השנה)’는 정관사 ‘하’와 ‘해/년’을 뜻하는 ‘샤나’가 합쳐진 말이다. 즉 ‘해의 머리(시작)’라는 뜻이다. 성경에는 ‘로쉬 하샤나’라는 직접적인 명칭은 없으나, 레위기 23장 24절(“일곱째 달 곧 그 달 첫 날은 너희에게 쉬는 날이 될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과 느헤미야 8장을 근거로 오늘날까지 유대인의 4대 명절인 ‘나팔절(욤 테루아)’로 지키고 있다. 2) 나팔절(새해)의 세시풍속 : 이날 유대인들은 토라를 읽으며 “샤나 토바(שנה טובה, 좋은 새해 되세요)”라고 인사한다. 또한 사과와 석류 알갱이를 꿀에 찍어 먹는데, 이는 새해가 꿀처럼 달콤하고 석류처럼 풍성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다. 제사장이 양각 나팔(쇼파르)을 부는 것은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고 깨어 있는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하자는 신앙적 결단을 상징한다. 4. 신앙적 의미와 결론 한국과 유대인의 설날은 모두 단순한 축제를 넘어 ‘회개와 근신’을 통해 자신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복을 예비한다는 공통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제사, 부적, 복조리 등 미신적 행위에 의지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는 지난날의 과오를 회개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의 은혜 안에서 영적인 양각 나팔을 불며 믿음으로 전진하는 복된 설 명절을 보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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