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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동철 장로] 3일천하 ‘갑신정변 140년’ 이 땅 복음의 큰길 열었다
    1884년 12월 4일 밤 10시경. 이날은 최초로 지금의 체신청 우정국 개청식이 있는 날이었다. 행사를 마친 후 내·외 귀빈이 함께하는 저녁 연회가 열리던 시각. 갑자기 ‘불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들리고 비명소리가 진동했다. 당시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엘리트 개화파 세력들이 정변을 일으킨 현장의 이야기다. 고종 즉위 20년 되는 해 일본은 개화 후 나날이 발전하고 중국과 서양 제국들이 조선의 개화와 통상압박을 하던 혼돈의 시기였다. 조선 26대 왕 고종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은 갈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급진개화를 주장하는 김옥균 파와 점진적 개화를 주장하던 민영익 등 세력 간 갈등 속에 급진개화파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정변이었다. 올해 12월 4일은 갑신정변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갑신년 쿠데타는 성공하는 듯 했으나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개입 3일 만에 평정하고 주모자들은 멸문지화 되거나 일본으로 도피했다. 갑신정변은 당시 일본의 지원으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갑신정변이 성공했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운명이 외세 강국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는 비운의 상황이었다고 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역사적 평가와 상황을 접어두고 당시 사건의 현장을 통해 하나님이 이 나라 복음을 위해 위대한 계획을 펼치고 있었던 은혜를 찾아 보고자한다. 불을 지르고 쿠데타 세력들이 반대세력들에게 총을 쏘며 공격을 하는 통에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난자되어 중상을 입었다. 죽을 수 밖에 없던 상황에 연회에 참석했던 미국 루시어스 푸트(Lucius H. Foote) 공사가 긴급히 미국에서 두 달 전에 선교사로 입국한 한사람을 찾는다. 바로 최초의 의사선교사 호러스 알렌 선교사를 찾아 치료함으로써 민영익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알렌 선교사는 누구인가? 우리의 기독교사에 거장으로 남아있는 알렌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이즈음 1882년 조미(朝美)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선교사의 마음에 조선의 선교사가 되고 싶어 자원한다. 갑신정변 두 달 전 1884년 10월 6일에 한양으로 입국한 선교사이다. 알렌의 치료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살아남으로써 3일 천하정변은 끝이 나고 고종의 권력은 유지 될 수 있었다. 민영익을 살린 알렌에게 고종은 무엇을 원하냐고 물었다. 당연히 알렌은 병원을 지어 달라고 했다. 고종에게는 너무 쉬운 요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변의 주동자 홍영식의 가족들이 처단되고 폐허된 집을 병원으로 개원하게 했다. 바로 최초의 병원 광혜원(나중 제중원)이다. 알렌선교사가 병원을 짓고 자유롭게 선교를 하게 되는 큰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벼락처럼 전개 된다고 했다. 1885년 봄 일본에 머물러있던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조선 땅의 예수 복음이 날개를 달았다. 언더우드는 오늘의 연세대와 알렌 선교사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을 세우는 엄청난 일을 했다. 아펜젤러는 이승만을 탄생케 한 배제학당을 세운다. 뒤이어 스크렌턴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이화학당을 세우고 천대받던 조선의 여성들이 눈을 뜨게 했다. 조선역사가 망해가던 시기 비운의 시간표가 돌았지만 선교사들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게 하는 복음의 역사(役事)가 역동 했던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축복이다. 한 나라를 부흥 발전시키는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조선 5백 년의 역사는 정말 캄캄한 세상이었다. 사대부들이 타락한 유풍(儒風)의 문화 속에서 백성을 착취하고 나라의 발전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나라가 망해가는 때 나라를 살리고자 급진개혁세력들이 일으킨 정변은 사람의 위대한 뜻에도 불구하고 3일천하로 끝난다. 뒤이은 역사는 결국 일본의 36년 종살이해야 하는 비운의 역사를 겪어야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70년 종살이 후 회복의 역사를 썼다. 우리는 140년 전 위대한 영적 거장 몇 분의 선교사들이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내는 초석을 낳았던 역사를 돌아본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세계 10대강국을 자랑한다. 희망 속에 겪는 사회문화의 심각한 갈등을 보면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위기다. 이런 위기 때 그때의 역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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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5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미리암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선지자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은 후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에 발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에서의 사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모세가 없는 40년 동안 여자로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진짜 지도자인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지도자인 모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만에 나타난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절초풍할 일들을 일으킵니다. 세계 최강의 애굽과 바로도 모세 앞에 쩔쩔맵니다. 애굽을 초토화 시켜버렸고, 애굽의 장자를 죽여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여호와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대면하시고 바다까지 갈라 마른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암은 40년 동안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영도해 왔지만 40년 만에 갑자기 등장한 모세의 위용 앞에서 입도 벙긋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선지자의 위치에서 볼 때 비록 인간적으로는 누나요 동생이지만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지닌 모세였기에 고개 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들끼리, 특히 목회자들끼리 묘한 질투심과 경쟁심이 있습니다. 곁의 교회가, 다른 교회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습니다. 잘못되면 입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속은 이유 없이 고소하고 상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망각한 무서운 죄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교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곁의 성도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잘못되면 입은 위로하는 것 같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위로받고 착각합니다. 아주 나쁜 모습입니다. 악한 모습입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것이 목회자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입니다. 주변의 교회가 갑자기 성장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사람이다 보니 비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가까운 교회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면 심각한 스트레스까지 받습니다. 목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목회자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자신은 1년이 가도 전도 한 명 하지 않으면서 교회 부흥을 입에 올립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고사하고 선교나 불우이웃이나 개척교회, 농어촌교회, 은퇴하신 목사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특별헌금 한 푼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재정을 입에 올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자들의 교만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다 보니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자의 훌륭한 설교에 은혜받기는커녕 허점과 잘못을 찾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설교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모세를 대적하는 미리암의 아류들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땀방울 하나, 눈불 방울 하나 다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 대상도 아니요, 경쟁상대도 압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자들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어선 안 됩니다. 물론 아바타라 하지만 예수님의 아바타니 영광스럽습니다. 진짜 선지자, 진짜 목회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미리암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 미리암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몰라서 범한 죄도 무섭지만, 알고도 범하는 죄는 더 무섭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모세의 통치를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진행을 가로막았습니다. 감히 모세의 영적 권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감히 같은 선지자였지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 모든 영적 권위 앞에서도 원망과 비방의 고개를 들게 합니다. 호시탐탐 모세의 허점과 실수를 염탐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계산하는 성도가 있고, 실수와 잘못을 찾아내는 성도가 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구스 여자가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이미 정리된 문제인데도 교만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영적분력을 상실했습니다. 미리암은 십보라가 돌아오자 속에 숨겨놓았던 원망과 불평을 표출합니다. 원망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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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07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성경 어디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문제 삼은 장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실에 대해 그 어디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사건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스 여인 십보라를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통치에 십보라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것은 구스 여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이유는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것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같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습니다. 완전한 모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도 십보라는 할례언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단순히 액면가로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와 관계한 여인입니다. (마1: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우리는 우상의 신전에서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과부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지로 몰고 왕과 간음한 유부녀였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죄인인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답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제 딴에 잘 사는 줄 알지만 무익한 인생이요, 단 하나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에는 속임만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만 가득합니다. (롬3:10-1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달렸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도 부활했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이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을 것이 수두룩한 우리입니다. 아니 우리는 문제 그 자체들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십보라가 할례 언약을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여 남편을 살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보라가 할례언약을 아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십니다.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도 못합니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계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도 원망하고 비방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할례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거하며, 주일마다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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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0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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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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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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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와 세상
    2024-03-04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김성수 총장] 나의 궁극적 관심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믿음의 감정적인 요소를 아주 중요하게 보았다. 실제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감정적인 요소는 아주 중요하다. 인간의 감정은 대단한 힘과 추진력을 갖고 있다. 신앙의 지적인 요소는 정적이고 차갑다고 할 수 있지만 감정적인 요소는 동적이고 뜨거운 것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어떤 신자들은 아주 열정적이고 감정적이지만 어떤 신자들은 지적이고 다소 냉담하기까지 한 사람들도 있다. 어떤 교인들은 손뼉을 치면서 찬송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 ‘할렐루야!’라고 반응하지만, 어떤 교인들은 조용히 찬송하고, 말씀을 듣고도 속으로는 동의하면서도 겉으로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교인들도 있다. 우리는 신앙의 두 요소들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신앙에는 지적인 요소와 감정적인 요소가 모두 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프로이트가 믿음의 감정적 요소를 중요하게 간파한 것은 분명히 옳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을 감정으로만 축소한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특정 교리에 대한 감정적 고백은 믿음의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믿음은 감정적 요소로만 축소될 수는 없다. 프로이트의 전 동료이자 나중에 그의 경쟁자가 된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신앙의 핵심에 더 가까이 다가온 설명을 하고 있다. 융은 프로이트의 신앙관을 뒤집어 놓았다. 그는 믿음이란 어떤 것을 절대적이거나 이상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려는 충동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그는 믿음을 전지 전능, 전적인 희생과 사랑, 완전한 지혜의 관점에서 파악하려고 하였다. 융에 의하면 믿음은 어린이의 정서적 필요에 대한 성인 버전이 아니다. 오히려 아이는 아버지를 절대자로 생각함으로써 실제로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믿음을 설명함에 있어서 더욱 더 진리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다. 그는 믿음을 '궁극적 관심'이라고 표현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물이나 사람이다. 그것은 가장 높거나 가장 깊거나 가장 심각한 관심사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 시간, 에너지, 감정을 선점하기 때문에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종교심리학자인 제임스 파울러(James Fowler)는 궁극적인 관심에 대한 몇 가지 경쟁 관심들을 나열해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예를 들면, “일, 명예와 인정, 권력과 영향력, 부”와 같은 것들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가족, 대학, 국가, 교회 등에 투자될 수 있다. 사랑, 섹스, 사랑하는 파트너도 우리 모두의 궁극적 관심의 열정적인 중심이 될 수 있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우리가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사물, 사람, 또는 목표다. 폴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한 국가가 국가 자체의 생존과 성장을 궁극적인 관심사로 삼는다면 그 국가는 국민들의 경제적 복지, 건강과 생명, 가족, 미적 및 인지적 진실, 정의와 인간성 등 다른 모든 관심사를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자신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약간의 연습을 해 볼 수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잠시 성찰해 보기로 하자.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 자신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소망은 무엇인가? 내가 이것 빼 놓고는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그런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 아마도 자신의 가장 깊은 소망은 특정한 관계나 사람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자신의 직업일 수도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 솔직해지도록 노력해 보자. 이제 세 개의 작은 종이조각을 가지고 자신의 궁극적 관심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연습을 해 보도록 하자.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 3가지를 선택해 보기로 하자. 그것들을 종이에 적어 보자. 그리고 앞에 쓰레기통이 있다고 가상해 보자. 이 세 가지 가장 중요한 것 중 자신이 가장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적힌 종이를 찢어 쓰레기 통에 버리자. 두 번째 종이에도 똑같이 해 보자. 이제 종이 한 장만 남았다. 거기에는 나의 삶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것, 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 내가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생각할 수 있는 것 한 가지가 적혀 있다. 이것은 협상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나에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것은 궁극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너의 궁극적인 관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찬송을 부른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예수 밖에는 없네!” 아멘!!!
    • 오피니언
    • 논문/책
    2024-10-10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6) (민12:3, 마5:5, 11:29)
    모세를 살리는 일에 직접 앞장을 섰던 미리암입니다. 항상 모세 곁에서 모세의 그림자와 같은 삶을 살았던 미리암입니다. 모세가 비우고 간 40년의 세월을 선지자가 되어 메꾸었던 미리암이었습니다. 미리암이 대신했던 40년의 세월은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어렵고 힘든 세월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미리암이 출애굽을 하고 약속의 땅으로 가는 시작의 장면에서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그렇다면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이 일어나고 있을 때 미리암은 무엇을 했을까요? 미리암의 비방은 순간 충동으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제법 긴 시간 모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결과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미리암의 마음에서 원망과 불만이 싹트고 있을 때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10가지 재앙으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 왕도, 애굽 사람들도 살아계신 하나님과 능력을 인정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어쩌면 그 일을 가장 학수고대했던 사람이 미리암입니다. 40년 동안 여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며 모세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사람이 미리암입니다. 그런데 정작 모세가 돌아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며 출애굽의 역사를 주도하자 미리암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게 됩니다. 사명에 대한 경계선 이탈입니다. 사명의 대한 월권입니다. 사명에 대한 경계선을 이탈과 월권은 곧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연결됩니다. 성령님께서 강림하여 세워진 완전한 이스라엘, 신약의 이스라엘인 교회의 역사에서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시작의 장면에서 동일한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일어났던 10가지 재앙과 비교할 수 없는 성령 하나님께서 직접 강림하셔서 위대한 일들을 친히 이루시는 현장이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에 감화 감동했던 성도들은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역사가 펼쳐지는 반면, 한쪽 구석에서는 원망과 불평의 싹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행6:1)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삼위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와 은혜가 넘쳐나 완전한 출애굽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 다른 한 편에서는 원망과 불평의 불신앙이 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희생하고 헌신하고 도움을 주는 쪽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도움을 받고, 혜택을 보고 있는 쪽에서 말입니다. 일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잘 아는 선지자 미리암이 말입니다.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인생이라지만 너무도 많은 상황과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렇다 보니 일상생활에서 연약한 우리는 원망, 불평, 비방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고집을 피우고, 억지를 부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의 사건이 심각했던 이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데도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원망과 불평을 가슴 속에 키워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지도하는 모세는 단순히 모세의 방법, 모세의 통치가 아닙니다. 모세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러니 미리암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방법에 대해 비방하며, 정면 도전했던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미리암의 비방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10가지 재앙이라는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는 바로 그때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용납하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장막을 떠나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에게 문둥병이라는 심판, 진영으로부터 격리되는 심판을 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4-10-10
  • [정우승 목사] 옥(屋)보다 사(舍)를 택하자
    한 번은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태복음8:20)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공생애 사역 하시는 동안 정해진 거처가 없다는 의미이다. 세상 사람들 눈에 교회는 돈이 많은 단체이고, 목사는 돈이 많은 사람으로 비쳐진다. 신학교 시절 어느 교수님께서 지나가는 말씀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목사는 그 교회 장로님들이 타는 평균 정도의 차를 타면 좋고, 그 교회 장로님들이 사는 아파트 평균 정도의 평수에서 살면 무난하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한국은 좁은 땅에 비해 많은 사람이 몇몇 도시에 몰리기에 자연스럽게 아파트 문화가 발달되었다. 대한민국 사람의 약 50%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언제부터 아파트에서 살기 시작했을까 궁금해진다. 최초의 아파트형 주거는 기원전 1세기 경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아파트를 고안했던 이유는 지금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도시에서 살고 싶지만 성벽 안의 한정된 부지에 모두를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건물을 높이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아파트 형태는 산업혁명 이후에 등장한다.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집이 무너져 내린 도시에 노동자들이 몰리자 유럽에서는 이들을 위한 집단 주거시설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 때 프랑스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기획한 ‘유니테 다비타 시옹’이다. 1922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콘크리트와 철근을 이용해 지은 거대한 공동주택으로 377세대가 살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현대식 아파트의 최초 건물이다. 우리나라 역시 전쟁의 아픔을 딛고 1960년대부터 온 국민이 힘을 모아서 경제회복에 사력을 다한다. 이 때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사람이 몰리기 시작한다. 특히 서울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정부는 주택공급정책, 즉 아파트를 도입한다. 아파트는 제한된 공간에 많은 집을 만들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구조였다. 서울의 잠실은 원래 예로부터 누에고치를 생산하는 모래섬이었다. 잠실(蠶室)의 뜻이 ‘누에고치의 집’이다. 그 곳을 헐어서 대단지 아파트를 지었다. 원래 어떤 형태이든 집은 단지 내가 살기 위한 곳이었지 요즘처럼 집을 재물시하여 사고파는 것으로 이득을 남긴다는 생각은 극히 최근의 것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집을 매매하여 돈을 남긴다는 것을 불의로 생각했기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같은 주택관과 유교의 도학사상이 몰아 온 청빈관이 조화되어 분에 넘치게 집 사치를 하거나, 살던 집을 늘리는 것마저도 불의하게 여겼다. 그래서 조선시대 선비사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유머까지 있었다. ‘큰 집을 옥(屋)이라 하고, 작은 집은 사(舍)라고 하는데 옥(屋)자를 풀이하면 송장(尸)이 이른다(至)는 말이요, 사(舍)자를 풀이하면 사람(人)이 길하다(吉)는 말이니, 큰 집에 사는 사람은 화를 입게 되고,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말이다. 이 말은 사실상 험난했던 우리 전통 사회에서 사실로 입증되었고, 따라서 집을 둔 청빈사상은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옛날 우리나라는 참 가난했다. 밥상만 봐도 그렇다. 첫 밥상은 아버지와 아들이 먹고, 먹다 남은 상은 안사람이 물려 먹고, 다시 종들이 물려 먹었다. 그래서 음식은 콩나물 하나도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유심히 살펴볼 것이요, 교인들은 목회자의 생활을 자세히 관찰할 것이다. (전도서5:15)에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라고 말씀한다. 또한 (히브리서13:5)에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라고 말씀한다. 큰 평수에 살고, 두둑한 통장을 남기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과연 하나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칭찬해 주실까? 교회에서 제공하는 목사의 집을 옥택(屋宅)이라 하지 않고 사택(舍宅)이라 함을 꼭 기억하자. 옥(屋)보다 사(舍)를 택함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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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 칼럼
    2024-10-09
  • [박동철 장로] 이승만의 기독신앙과 제임스게일 선교사 이야기
    영화 건국전쟁에서 이어지는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재조명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 그동안 정치적 공과(功過)가 무시되고 독재 부정선거의 역사에 매몰되어 왔다. 이로 인해 건국의 역사까지 국민담론애서 우왕좌왕해 왔다. 이제 정확한 역사 이해를 위한 국민정서가 확산되면서 이승만 기념관 건립 또한 추진되고 있어 고무적인 일이다. 물론 반대적 의견도 있겠지만 나라 최고 지도자에 대한 정확한 역사이해를 통해 나라의 미래 그리고 비전을 세워나가는 일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다. 필자는 2024년 10월을 맞으면서 특히 이승만의 기독신앙에 깊은 관계성을 품고 있는 제임스 게일 선교사 이야기를 함께 풀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난다. 역사 기록을 읽고 종합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서 태어난 출생기록을 두고 있다. 어릴 때 한성부로 이주한 이승만은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한학으로 과거급제의 꿈을 꾸고 살았다. 망해가는 조선의 역사격동기에 과거등급의 기회가 없었다. 20세 때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배제학당에 입학한게 큰 역사의 반전이다. 한때 신학문에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영어에 탐닉하면서 서구 신학문에 앞서나갔다. 이때 무능한 조선 왕정에 저항감을 품고 여러 주장으로 주목을 받았다. 당대 선각자 이상재 선생을 따르며 나중에 입헌군주제의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하면서 체포돼 한성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때 제임스 게일선교사와 운명적 만남으로 국가 최고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 첫걸음이 된다. 이승만은 영양대군 16대손의 전주 이씨인데도 조선의 썩은 왕조로서는 나라가 망할 것을 예언하고 강한 진보적 주장을 쏟아냈다. 1895년 배제학당을 졸업하고 민주공화정 이념의 만민공동회 적극 활동으로 1898년 한성감옥에 수감된다. 여러 동지들과 한성감옥에 있는 동안 게일선교사의 복음 활동이 왕성했다. 게일선교사는 기라성 같은 미래 지도자들을 모두 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주로 출옥과 함께 연못골교회 지금의 연동교회 교인으로 동록케 했다. 이승만은 늦게 1904년 러일전쟁과 함께 출옥하기까지 게일선교사와 깊은 교분을 가졌다. 옥중에서 함께 기도하면서 사실상 이승만과 사역을 함께했다. 옥중 진리학교 옥중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게일선교사는 1863년 캐나다서 출생 1884년 토론토대학 입학하여 학생으로서 1888년2월15일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부산에 들어온다. 곧 황해도까지 가서 선교역사의 소래마을에서 서상윤, 이창직과 함께 조선어 공부를 하면서 한글 한국역사문화에 매료되어버린다. 인문학 천재의 기질에 따라 게일은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하고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욱 사랑하는 선교사가 되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하고 구운몽을 영어로 번역하는 등 조선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온몸을 던졌다. 게일은 옥중 이승만을 주목했다. 거장은 거장을 알아봤다. 장차 조선을 이끌 지도자가 될 것을 예상하고 1904년 이승만이 출옥하자 미국 유학을 권했다. 이승만 또한 인문학 천재 게일선교사를 멘토로 하여 미국유학을 알선하도록 했다. 이승만이 워싱턴대학 하버드 대학 유학길을 터주고 현지 학자금지원 받을 수 있는데도 도움을 줬다. 이승만이 미국서 유학중 게일과 편지소통을 계속 했다. 그리고 1910년 귀국 후 이승만이 YMCA에 일할 수 있도록 게일선교사가 주선을 하기도 했다. 청년 이승만이 조선말 격동기 그리고 일정시기 독립운동에 참여하는데 게일선교사가 밑자락을 깔았다. 중요한 것은 이승만이 성령을 받고 회심하고 기독교 청도교 정신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자리를 깔아나가는데 제임스 게일 선교사의 풍성한 이야기가 있다. 게일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칼빈주의 복음훈련을 받은 선교사였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건국이념을 깔아내는데 하나님의 대역을 했던 것이다. 10월7일부터 창원문화원에서 경남바른가치수호연합회 주최 이승만 사진전이 열린다. 이승만의 역사 특강행사도 열린다. 그리고 오는 10월9일은 578돌 한글날이다. 이승만과 게일선교사의 위대한 복음역사를 알게하는 하나님의 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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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30
  • [박동철 장로] 한라에서 백두까지,백두에서 땅끝까지
    2024년9월8일 오후. 부산해운대 한국 최대 광활한 백사장에는 일찍부터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다. 2024년 9.8 해운대성령대집회현장. 가을 날씨의 계절을 잊은 듯 35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이 계속됐다. 마침 성령의 바람이듯 먼 바다에서 파도를 타고 불어오는 옅은 바람이 백사장 집회를 견딜만하게 했다. 10킬로에 가까운 먼 거리 군데군데 설치된 대형 영상이 현장감 있게 찬양의 열기를 끌어올렸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백두에서 땅끝까지’ 슬로건을 실감하듯 탄성과 외침 부르짖음, 기도의 열기가 초입부터 온 땅을 뒤덮었다. 한반도 복음화의 초석이 되었던 1907년 평양 대부흥의 현장이 오버랩 되며 점차 찬양과 기도가 뜨거워졌다. 이 땅의 우상은 무너지고 주님만 높이는 나라 되게 하소서. 대집회가 열릴 때 마다 주최 측은 마음이 졸인다. 과연 10만 명이 모여들 것인가? 예배의 시작시간 광활했던 백사장은 인파로 뒤덮였다. 부산광역시 1800여 교회가 참여하고 부·울·경 교회들이 함께하면서 인파의 열기, 기도의 열기, 감동의 시간 시간들로 이어졌다. 예람워십과 제이어스 오프닝 찬양과 부산 18000교회 연합찬양으로 뜨거운 찬양의 시간이 끝나고 말씀선포의 시간. 분당 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의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제하의 설교가 이어지는 시간 10만 성도들은 숨소리 죽이고 광야가 조용해졌다. 말씀 선포의 권능이 한라에서 파도처럼 일어나 해운대 앞바다를 밀려와 일어나는듯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주님향한 처음 사랑을 잊어버리는것’이라고 강조했다. 회개의 기도가 터지고 일제히 모래밭에 무릎을 꿇었다. 회심의 탄성이 터지고 다시 대한민국 부흥의 소망을 외쳤다. 이어서 제주 성안교회 류정길목사님의 '흐름이 바뀌다'제하의 설교에서 ‘우리가 죄에서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영적 어둠의 시대를 끝내고 새시대를 열어간 사무엘처럼 다음세대를 일으키자’고 외쳤다. 해운대성령대집회는 10년 전 2014년 개최된 후 두 번째 큰 집회로 열린 대회이다. 부산성시화본부(이사장 이규현 목사, 본부장 박남규 목사)가 주최하고 부산지역과 경남 울산지역 교회들이 적극 참여한 이번 대집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회를 이어간다. 이날은 날로 위축되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를 살리고 이어 복음통일을 위한 불쏘시개가 되길 선포한 날이다. 이날 말씀을 통해서 선언문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하나 됨을 선언하고 복음통일의 완성을 이어가자는 대선포의 장이었다. 3시간여 진행된 시간 속에 다섯 번 뜨거운 기도의 물결 속에서 어둠이 내려앉아도 10만 성도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것이 성령님의 역동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온성도가 함께한 ‘9.8 해운대 선언’과 ‘7가지 약속’이 선포됐다. 전문을 다 할 수 없지만 소개하고자한다. 우리는 한국교회와 민족죄악을 회개하며 진정한 변화와 부흥만이 회복임을 천명한다. 지난 1907년 평양대부흥의 은혜를 잊고 한국교회는 세속화했으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망각했다. 진정한 변화를 통해 우리는 하나가 되어 한국교회가 통일시대를 대비하는 우리 모두 한국교회가 되길 선언한다. 2024년 9월8일 해운대를 뜨겁게 달군 이날 대성령집회는 거룩한 한국교회 기도의 방파제가 되어 나아가길 이날 선언문에 담았다. 한나절 대집회가 무슨 힘이 날까. 아니다. 이제 저 옛날 미스바 광장의 기도가 이스라엘 미래를 꿈꾸었듯이 이제 성경대로 더욱 성숙하는 한국사회를 이끄는 시작이 될 것이 분명함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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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9
  • [박동철 장로] 손원일 선교센터 후원회 1박2일 수련회 참가기
    지난 8월 20일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진해 손원일선교센터 후원자 비전트립 행사가 있었다. 우리 지역 경남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이창교 목사를 비롯 임원 목사 장로들과 후원자 관계자 등 40여명이 참석, 해군관리 휴양소 진해 저도에서 일정을 가졌다. 첫날 오후 진해 제황산 아래 새롭게 단장한 손원일선교센터를 방문 역사관을 둘러보고 센터사역목표인 소그룹리더양성의 생활관도 함께 보았다. 손원일선교센터는 광복 후 곧이어 해군을 창설하고 군 복음화를 제도화한 손원일 제독의 선교정신을 이어가기위해 태동했다. 지난 74년 해군 장교 군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옥포 다락방이란 공간을 마련 예배로 시작된 연대기가 오늘의 손원일선교센터이다. 손원일 제독을 두고 군 복음화 공로를 어떻게 말해야할까. 이후 국방장관까지 역임한 손원일은 아버지 손정도 목사(서울정동교회 담임, 항일독립운동 참여,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역임)의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강력한 복음정신에 기인한다. 기독 사명자 손정도 목사·손원일 장로 부자는 광복 전·후 격동의 시대 믿음의 사람으로 교회와 애국에 온몸을 던진 선각자들이다. 손원일선교센터는 그동안 열정으로 군 복음화를 위해 김덕수 예비역 소장을 중심으로 크리스찬 믿음의 형제들이 개인이 출연하고 모금 운동을 통해 많은 교회들이 동참해서 오늘까지 이어왔다. 재단법인 손원일선교재단이 서울에서 운영되면서 서울의 유수 교회들이 참여하는등 3년여 동안 선교센터를 완공하는데 함께 땀을 흘렸다. 이제 완공 운영에 들어간 손원일선교센터는 바다에 떠있는 함정과 잠수정에서 예배를 인도할 리더를 양성하는데 사역의 목표를 두고 있다. 200개함정에 500명의 소그룹리더 파송자를 양성해내자는데 분명한 목표를 두고 있다. 그동안 선교센터를 완공하는데 거액을 헌금한 최영수 장로(주식회사 크레텍 회장)를 비롯 기도와 헌신하신 지역의 후원자들을 위해 이번 수련회를 갖게 된 것이다. 일행들은 첫날오후 해군기지를 방문 군함과 잠수정을 견학했다. 현장을 돌아보면서 장병들의 나라지킴을 위한 헌신이 대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저 넓은 바다 위 비좁은 함정공간에서 영육의 고독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복음정신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 뿐이다. 참여자 모두 무거운 마음으로 함정견학을 마치고 저도휴양기지에 입도했다. 주변 환경을 돌아본 후 저녁 세미나를 가졌다. 첫날 피로도 잊고 모든분들이 손원일선교센터 운영을 위해 의견을 쏟아냈다. 이제부터 많은 교회가 연합하고 성도들이 군 복음화의 사명을 깨닫는다면 더욱 선교센터는 복음의 열정으로 가득찰 것이다. 선교센터 완공과 함께 숙식을 원하는 군 지휘관리더들이 늘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이들이 생활관에서 숙식하면서 일정기간 리더교육을 받고 함정으로 파송된다. 이후 함정에서 예배를 인도할 때도 복음을 위한 기도와 후원이 필요하다. 이제부터 더욱 열정으로 해군 복음화에 사명을 받은 선교센터로서 빛을 발해야할 때임을 강하게 느꼈다. 또한 지역에서 손원일선교센터를 일정 개방하여 다음세대 청소년들의 기독교 세계관을 체험할 수 있는 기능도 살려야할 것이다. 손원일은 신앙인이자 6.25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위인이기도하다. 그래서 창원특례시도 선교센터 주변도로를 ‘손원일도로’로 명기하는 일도 검토되고 있다.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말씀을 깨닫는 유익한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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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2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 하느님인가, 하나님인가?(1)
    I. 서언(序言) 어떤 용어이든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말들의 유래는 한자이거나 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것이다. 이는 우리 기독교 용어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용어는 원래 구약은 히브리어, 신약은 헬라어로 되어 있었지만, 이를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였고, 우리 한국교회의 용어는 주로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영어권 용어들이 많다. 또한 이를 전통적인 한자로 번역하다 보니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기독교 용어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이 신학적으로나 한글의 문법적으로 적절하지 않은 경우들도 많다. 이런 이유로 때로는 그 적절성을 두고 논란이 일어나는 경우들도 많다. 그중의 하나가 지난 호에서 언급한 귀신 신(神)자였고, 또 이번 호에서 논하고자 하는 하나님과 하느님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의미는 거의 같으나 사용은 다른 이 두 용어의 유래와 그 적법성을 논하고자 한다. 먼저 이하의 내용들은 서울 장로회 신학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김중은 교수의 “하느님인가, 하나님인가?”와 기타 몇 가지 자료를 참조하면서 필자의 소견을 더하였음을 밝혀 둔다. II. 두 용어의 국어 사전적 의미 두 용어 다 어원은 같으며, ‘하늘’의 옛말인 ‘하ᄂᆞᆯ’에 ‘-님’이 더해져 나타났다. 본디 지역을 가리지 않고 ‘하ᄂᆞ님’이라고 하였으나 아래아(ㆍ)가 소멸함에 따라 '하나님'과 ‘하느님’으로 분화한 것이다. ①하느님 1)범 종교적-신앙의 대상. 인간을 초월한 위력을 가진 절대자로서 명명(冥冥)한 가운데 존재하며 우주를 창조하고 주제(主帝)하며 불가사의한 능력으로 인간의 善과 惡을 판단하고, 화복(禍福)을 내리는 존재. 2)가톨릭- 전지 전능하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로 다스리는 유일한 주제자이다. ②하나님: 하느님과 어원이 같으며, ‘하늘’의 옛말인 ‘하ᄂᆞᆯ’에 ‘-님’이 더해져 나타났다. 원래는 구분없이 ‘하ᄂᆞ님’이라고 하였으나 아래아(ㆍ)가 소멸함에 따라 ‘하나님’과 ‘하느님’으로 분화되었다가 개신교의 용어로 정착됐다. III. 한글 성경 번역사에서 본 하나님의 명칭의 유래 한국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신(神)의 명칭 중에 하느님은 가톨릭과 정교회, 성공회 등이고, 개신교는 하나님을 사용한다.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그 유래와 의미를 논하면 다음과 같다. 1. 1882년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이며, 한글 띄어쓰기를 최초로 도입한 이는 존 로스이다. 그가 번역한 최초의 한글 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에서 처음 사용한 神의 명칭이 바로 ‘하늘의 님’이란 뜻의 ‘하느님’이었다. 이는 당시 중국어 성경이 상제(上帝)였던 것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에 큰 의미가 있다. 그다음 1883년부터는 ‘하나님’으로, 1887년부터의 발행에서는 공식적인 명칭으로 ‘하나님’이라고 했다. 2. 1884년 이후 언드우드 등의 본격적인 선교활동과 성경번역 활동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이는 그동안의 로스와 이수정의 역본이 개인적인 성격이 강했다면, 1893년 ‘공인번역위원회’의 출범 후부터는 공식적인 역본이 되면서 ‘하ᄂᆞ님’이라고 했다. 하지만 언드우드는 위원으로서 ‘하ᄂᆞ님’을 반대하고 ‘샹뎨, 샹쥬, 턴쥬, 챰신’등으로 표기했으나 1906년 런던의 영국성서공회가 한국어 성경에는 ‘하ᄂᆞ님’을 사용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대해서 위원이었던 ‘게일’ 선교사는 ‘하ᄂᆞ님’의 의미는 ‘하늘의 주’(主)란 의미와 ‘하나’와 ‘크다’란 의미로 ‘유일하신 창조주’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했다. 이러한 명칭으로 계속 되어오다가 1938년 출간한 “셩경개역”에서 ‘개혁철자법’을 적용해서 ‘하ᄂᆞ님’을 하나님으로 표기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IV. 한글 성경 번역사에서 본 하느님의 명칭과 결어(結語) 이상에서 논한 대로 하느님과 하나님의 명칭은 가톨릭의 ‘천주’와 함께 같이 사용했으나, 대한성서공회가 1977년 구교와 신교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성서에서 ‘천주’도 ‘하나님’도 아닌 제3의 어휘인 ‘하느님’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당시의 공동번역성서를 채택한 천주교와 한국 성공회와 한국 정교회도 '하느님'을 표준 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수정의 神자에 대한 논란이나 “하느님”과 “하나님”의 논란 등은 결국 어원적으로는 동일하기 때문에 이러한 논쟁은 불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다음호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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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2
  • [오성한 목사] 나에게 능력이 있다!
    이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에서부터 정복한 모습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5:19)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 우리와 동일한 사람으로 오셨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표적과 기사를 베풀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셨다. 믿음으로 하신 것이다. 믿음으로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먼저 보셨다. 보신 것을 그대로 따라 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복잡하지 않다. 단순하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을 먼저 보신 후 행하셨다. 우리도 먼저 보여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충격을 주기 전에 먼저 내가 충격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먼저 보면 그렇게 된다. 우리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먼저 본다면 믿음과 담대함이 말씀으로 풀어지게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믿음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육의 눈에는 안 보여도, 영의 세계는 현실과 동일하다. 지금도 우리 곁에 천사들이 즐거워하고 있다. 하나님의 보좌는 우리 몸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임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살고 있다. 나는 자주 자주 이 세계를 그려 본다. 실재이기에 믿음으로 실재를 본다. 바른 정체성의 회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임마누엘의 정체성은 필수다. 영원히 함께하시는 성령의 사람인 바른 정체성 말이다. 어떤 것을 명할 때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생긴다. 당연히 생겨야 된다. "아, 내가 부족한데 될까"라는 생각이 없어지고, 오히려 분명한 확신이 온다. 의심을 품고 기도하는 것은 바다 물결이 요동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응답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는데 온전한 복음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져 버린다. 너무 간단한 것 같지만 사실이다. 기도하면 기도한대로 모든 것이 움직이게 되어 있다. 복음이 믿어지면 온전한 정체성과 더불어 자녀에게 주신 권세를 알게 되고, 예수 믿는 것은 실재가 된다.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분명히 믿고, 받아들이게 되면 정체성이 분명해 지는데 바른 정체성은 우리를 능력 있는 크리스천이 되게 한다. 십자가 부활로 이루신 온전한 복음의 소식을 얻은 사람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을 보고 행한다. 이 땅에서 예수를 믿고 능력 있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다. 꼭 그렇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정체성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자녀가 아닌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자녀인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이 땅에서 삶이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자녀에게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을 보라고 하신다. 보고 너도 따라하라고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삶이다. 그렇다면 이제 바른 정체성을 갖고, 능력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에겐 엄청난 능력이 있다. 예수능력은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의 능력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면 이 땅의 삶이 아주 명랑하고, 밝고, 사회에 나가서도 주눅 들지 않고,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원활해진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정체성이 좋은 어린이는 인사도 잘한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에게 친구처럼 다가온다. 명랑하다. 담대함이 있다. 밝은 얼굴이 있다. 세계적인 글로벌리더가 될 수가 있고, 뛰어난 리더십을 가지고 세계를 이끌어 갈 수 있다. 이것은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와는 다른 문제다. ‘많이 가졌는가, 가난한가?’와도 다른 문제다. ‘지금 내가 부자인가, 가난한가?’와는 다른 이야기다. 잘 살고 못 살고가 정체성의 기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이 필요하다. 그래야 이미 주신 능력의 삶을 살 수 있다. 자신이 자신을 아는 정체성과 남들이 나를 알아주는 정체성은 항상 변한다. 시간과 환경에 따라 항상 바뀐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는 것을 기반으로 둔 정체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날이 갈수록 더욱 확고해 지고 믿음이 더 생긴다. 감사와 감격의 삶을 살게 하고, 승리의 깃발을 흔들며 살게 한다. 거듭난 정체성을 말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아는 정체성이다. 항상 힘이고 능력이 있다. 정체성을 바로 알고 확신할 때 능력 있는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새롭게 새우신 새 언약을 통해 내가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바른 정체성이 더욱 확고해 진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통해서 새 언약을 맺으셨다. 바른 정체성을 갖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새 언약의 비밀을 몰라서 그렇다. 새 언약의 비밀을 깨달으면 어떤 일 앞에서도 하나님의 완벽한 인도를 보고 담대해 진다. 어떤 질병 앞에서도 담대해 진다. 질병 앞에서 ‘어떻게 할까’가 아니다. 가난 앞에서도 담대해 진다. 항상 자유를 누린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실재가 된다. 기쁨과 감사와 환희가 마음에서 항상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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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2
  • [조희완 목사] 중단과 지속 (행4:23-35)
    옛말에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은 것을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돈은 꼭 필요하고, 또한 명예가 귀한 것이지만 건강을 잃어버리고 나면 돈도 명예도 다 소용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건강을 잃지 않도록 건강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한 사람이 참 부럽게 여겨집니다. 병원에 가서 보면 수많은 환자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환자들 중에는 참 안타까운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치료와 회복이 가능한 병으로 고생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치료와 회복이 불가능한 진단을 받고 실의에 빠져 있는 분들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다양한 지체들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조금 덜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소중한 지체이긴 하지만 잘라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잠간이라도 멈추면 죽음에 이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손가락을 하나 절단한다든지 아니면 다리를 한쪽 절단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장이 멈춘다든지, 아니면 호흡이 멈춘다든지, 혈액 순환이 멈추게 되면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렇듯이 신앙생활에도 절대로 중단되거나 멈추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 멈추어 있거나 중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 중단되어 있으면 죽은 신앙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절대로 중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중단하지 말아야 할 것을 중단하면 죽은 신앙이 되고, 중단하지 말아야 할 것을 힘쓰면 건강한 신앙이 됩니다. 첫째로, 어떤 압력이 있어도 예배와 기도를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23,24) 둘째로, 전도와 선교를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29,31) 셋째로, 교제와 친교를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32,34) 소중한 것을 중단하지 말고 지속함으로 건강한 교회를 세우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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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2
  • [하수룡 장로] 빈둥지
    둥지란 주로 새가 알을 낳거나 깃들이는 곳을 말하지만 사람이 사는 집을 말하거나 사랑을 말할 때 강한 자의 품을 말하기도 한다. 보통 새들은 자기 가족을 위해 높은 나무의 파인 곳의 안쪽에 둥지를 틀기도 하고 어떤 새들은 바위 암초 위에 짓기도 하며 또 다른 새들은 땅 위나 굴 안에 둥지를 짓 는다. 부부가 자기 새끼를 낳아 기를 때에는 서로 번갈아 가며 돌보기도 하 여 잘 성장시킨 후에는 모두 독립시켜 멀리 날려 보내고 빈 둥지만 남아 있 는 것을 주위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신문에서 철원 동소 읍에 있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천연기념물이지만 멸종 위기에 있는 두루미를 위해 인공 황새 둥지를 세웠다는 보도를 보았다. 이날 세워진 황새 둥지는 높이만 11미터로 지주대 위에 철제 육각형 상판으로 제작됐다. 철원을 찾는 황새를 위해 둥지 만들기 사업 취지를 공감하는 철원 지역 주민 59명이 자발적으로 모금한 자금을 갖고 황새 둥지를 만든 것이다. 철새들이 갈 곳이 없어 멸종 위기에 빠진 것을 철원주민이 서식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다른 곳에서 방사한 암컷 황새 한 마리가 많은 알을 산란하여 번식시켜 텃새화를 위해 운동을 시작한 것이 황새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사는 스위트 홈을 만든 쾌거를 이룬 것이다. 물론 이곳에 사는 황새도 철새이기 때문에 조금 지내다가 훌쩍 떠나면 많이 붐비던 둥지도 빈 둥지로 남아있을 것이 확실하다. 올해 48세의 주부가 외동딸을 애지중지하여 긴 시간 동안 올인할 정도로 기쁨을 맛보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잘 키워 대학을 보내고 나니 집안이 텅텅 비워있는 빈집으로 마음이 허전하여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불혹의 나이에 자식 하나라도 이런 허전한 마음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순이나 고희의 나이에 많은 자식들과 같이 살다가 대학 진학이나 결혼으로 인하여 모두 멀리 떠나가 있다면 그 마음은 오죽할까? 아이들이 장성했기 때문에 짝을 찾아 떠나고 다 큰 성인으로 학업에 매진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 생각한다. 물론 자식들이 다 떠난 텅 빈 집은 빈둥지처럼 어떤 사람이든 허전하고 공허한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언제든지 건강하게 잘 키운 자식들은 둥지에서 떠나 독립하는 것이 맞고 자기네끼리 오순도순 잘 살아가는 것이 순리이고 행복이라 믿는다. 사람의 둥지는 가정을 이루었던 집이 최고의 보금자리라 할 것이다. 전적으로 인간의 건축물에다 둥지를 짓는 제비는 그 보금자리에서 새끼들과 잘 산다. 어느 날 갑자기 훌쩍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날아 가버리고 나면 그 시끄러웠던 둥지는 빈 채로 홀로 동그마니 남아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식들을 키웠던 칠순이 넘은 부모님은 더더욱 텅 빈 집에서 허전함을 느낄 것이 틀림없다. 자식들이 훌쩍 떠나버린 둥지가 텅 빈 허전함이 있다 할지라도 기쁨으로 변화시키는 믿음이 절대 필요하다. 자녀들이 잘 성장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며 건강하게 살면서 교회를 충성되이 잘 봉사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보람은 없다. 그래서 자식 떠난 빈 둥지는 누구에게든지 행복이요 기쁨이며 감사라 여기고 사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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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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