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연월일 2026-04-2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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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욜로(YOLO)’의 시대를 넘어, 부활의 참된 소망으로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욜로(YOLO)’라는 말이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이 말은 “인생은 한 번뿐이니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며 살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 땅의 삶이 전부인 양, 오늘을 마음껏 소비하고 즐기라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길어진 100세 시대라 할지라도 지나고 보면 인생은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날아가는 화살과 같이 쏜살같이 흘러갑니다. 만약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이 땅의 삶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면 그 짧은 여정의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지독한 허무와 공허 그리고 죽음 앞의 우울함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인 ‘부활’은 이 허무한 인생의 마침표를 영원한 생명의 쉼표로 바꾸어 놓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겨울이 되어 얼어붙었던 가지에 봄이 되면 다시 잎새가 싹트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영원한 삶이 예비되어 있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단지 죽음 이후의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는 강력한 원동력입니다. 슬픔을 사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 릴런드 스탠퍼드는 수재였던 외아들을 갑자기 잃고 극도의 슬픔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으니 저 대신 세상의 청년들을 도와주세요”라는 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그의 인생관은 완전히 바뀝니다. 아들이 천국에 살아있다는 부활의 소망을 품게 된 그는 당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헌납해 오늘날의 명문 스탠퍼드 대학을 세웠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개인의 절망을 넘어 수많은 젊은이를 살리는 위대한 헌신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어느 호스피스 병동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젊은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 남긴 편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가, 엄마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향해 가는 문이란다. 기나긴 겨울을 이기고 봄에 피어나는 저 꽃들처럼 우리도 눈물 없는 그곳에서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이처럼 부활의 소망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위대한 사랑과 용기를 현재의 삶 속에 불어넣습니다. 성경은 부활한 우리가 누릴 미래에 대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라고 약속합니다. 부활은 눈물도 사망도 애통함도 없는 완벽하고 행복한 삶이 열리는 기적입니다. 이 땅의 쾌락만을 좇는 ‘욜로’의 허무함을 넘어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가는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2026년 부활절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참된 기쁨과 미래에 대한 찬란한 소망이 상처받고 지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가득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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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8
  • [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부활절을 맞이하는 믿음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세번의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ㅡ.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신 후 처음의 사람에게 1.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창1;28 하나님이 아닌 존재인 뱀이 처음의 사람에게 찾아와 그들의 욕구를 채우도록하고 뱀의 사상을 따르게 한 후..세상은 어둡게 변해 버렸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2.정녕 죽으리라..ㅡ창2;17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찌니라,ㅡ창3;19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고, 밭은 소출을 내지 않고 행복했던 가정에 행복은 간 곳 없고, 형이 동생을 해하고 장례를 치르고 부부는 갈등을 겪고,,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한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 지금도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고, 영생의 나라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 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ㅡ 요11;25-2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시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주시고 ㅡ무덤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십니다.ㅡ요528. 죽음으로 가는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ㅡ 요3;16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의 댓가를 치르고서야 우리 믿는 자들이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ㅡ그가 찔리고 그가 상하고 그가 징계를 받고, 그가 체찍에 맞음은 우리 허물과 죄와 불안과 걱정과 공포, 병 때문인 것을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ㅡ사53;5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하셨고. 사53;6.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들의 저주가 그를 믿음으로 물러가는 복된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3;13-14 이 말씀이 부활절을 맞이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힘이 되고 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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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전서 1:3) 할렐루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온 마음 다해 찬양합니다. 2026년의 봄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에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이웃들의 삶 위에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죽음의 권세도 이길 수 있다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처럼 온 세상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경제적인 어려움들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빈 무덤의 승리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과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거룩한 백성된 우리는 생명의 부활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이번 부활절을 시작으로 경남 지역 구석구석에 산 소망을 전하는 통로로 소외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무너진 마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 부활의 아침은 어둠이 지나고 반드시 빛이 온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자 확증입니다. 비록 현실의 고난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지라도,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신뢰하고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갈등이 있는 곳에 화해를 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다시 한번 우리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이 기쁜 소식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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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통영기연 곽만섭 목사
    사랑하는 경남신문 독자들과 경남 성도들께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아침에 선 교회와 성도들이 이 놀라운 생명의 복음을 다시 붙들며, 믿음 가운데 새 힘을 얻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나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의 상황은 여전히 우리를 흔들지만, 주님께서 살아계신 한 교회는 무너지지 않으며 우리의 믿음 또한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능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위에 부활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여, 각 가정과 삶의 자리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일상 속에서 부활의 기쁨이 실제가 되어, 지친 마음을 회복시키고 서로를 위로하는 은혜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역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흘려보내며, 말과 삶으로 복음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작은 섬김과 나눔이 모여 이웃에게는 위로가 되고, 사회에는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어둠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의 은혜로 날마다 새 힘을 얻고, 기쁨으로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여러분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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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창녕기연 안덕수 목사
    부활에 아침에 고백할 승리의 고백 매해 맞이하는 부활절인데 올해는 더욱더 그 의미가 깊이 다가온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의 한말씀, 다이루었다(요19:30)는 말씀이 마음속에서 계속 울린다. 모든것을 하나님께맡기시고, 다 이루심의 완성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그분의 마지막은 승리와 완성의 선언이셨다. “다 이루었다.”이 한마디에는 완전한 지불의 선언이다. 예수는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값을 하나하나 치르셨다. 낮은 땅에 오심, 모욕과 조롱, 가시 면류관, 십자가의 고통까지 치르시면서 그 모든 과정은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는 길이었다. 이때 휘장이 갈라지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무너졌다.죄로 인해 닫혀 있던 길이 열렸고, 하나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다가오시는 분이 되셨다.어쩌면 우리는 이 장면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두 팔을 벌리사 안아주신 사건이다. “이제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 십자가는 단지 고난의 상징에서 용서와 초대의 상징이 된것이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고백은 죽음을 앞둔 체념이 아니다.사명을 완수한 자의 평안이며, 전적인 신뢰의 표현이다. 우리는 흔히 ‘안식’을 쉼으로 이해한다.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안식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인간은 여섯 날 동안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안식일은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날이라는 것이다.이 통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우리는 끊임없이 계획하고, 통제하려 하며, 결과를 붙잡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커진다.그러나 예수의 마지막 고백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준다. “맡겨라.”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괴로움과 눈물의 시간이 찾아올 때, 심지어 과거의 상처와 실패까지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안식을 경험한다. 부활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승리의 선언을 한다. 십자가는 겉으로 보면 패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죄와 죽음을 이긴 승리가 담겨 있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말한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따라서 믿음의 삶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삶.붙잡으려 하기보다 의탁하는 삶.그리고 그 고백은 매주 예배 속에서, 또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반복되어야 한다. 내 삶을 주께 맡김을 통해 신앙은 완성되어 간다. 참된 안식과 승리를 경험하게 되기실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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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진해기연 정용기 목사
    사랑하는 진해와 경남 지역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우리의 믿음의 핵심으로서, 절망 가운데 있는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소망입니다.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현재의 능력이며, 미래를 향한 확실한 약속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고난과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시대는 세계 각국의 이기주의와 전쟁의 소식, 경제적 어려움과 이념의 대립, 빈부와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각자의 삶에 놓인 무거운 짐들로 인해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려움 속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평강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지역사회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부활 신앙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생명을 받은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 희망을, 상처의 자리에 치유를, 분열의 자리에 화해를 이루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진해와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가 한마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나누며 이 땅 가운데 생명의 복음을 더욱 힘있게 전하는 증인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6년 부활절 진해기독교연합회 회장 정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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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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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복음알기3 - ‘보리차의 비밀’로 풀어보는 복음의 핵심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가장 자주 듣는 표현 중 하나가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고백을 머리로만 알고, 실제 삶에서는 여전히 ‘내가 알아서 열심히 살아야 하는 신앙’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복음의 핵심 한가운데를 비켜가고 있는 셈이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죄 사함을 받았다는 법적 선언이나, 이전보다 조금 나아진 도덕적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이 증언하는 참된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곧 union with Christ이다. 예수님과의 연합은 복음 신학의 중심 주제이며, 우리의 신앙생활 전체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다시 해석하게 만드는 토대다. 찬물 속 보리와 끓는 보리차의 차이 ‘연합’이라는 개념은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다. 이를 일상의 예로 설명해 보자. 보리를 찬물에 넣어두면 시간이 지나도 물의 색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보리는 물속에 있지만, 물과 하나가 되지는 않는다. 함께 존재할 뿐, 본질적으로는 분리된 상태다. 그러나 물이 끓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보리가 완전히 우러나 물과 구별할 수 없는 새로운 음료, 보리차가 된다. 이제는 물과 보리를 나눌 수 없다. 이것이 연합이다. 오늘날 신자들은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찬물 속의 보리처럼 지식으로만 간직한다. 교리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삶의 실제에서는 여전히 ‘내가 주님을 붙잡아야 한다’고 애쓴다. 그 결과는 반복되는 실패와 낙심이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라는 자책이 신앙의 일상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가지가 열매를 맺는 이유는 가지가 애를 써서가 아니다. 포도나무의 생명이 가지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열매는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연결의 결과다. 복음은 우리에게 더 힘을 내라고 말하기 전에, 이미 주어진 자리 안에 거하라고 초대한다. 예수님도 연합으로 사셨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 자신도 이 땅에서 하나님과의 연합 가운데 사셨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반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능력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으로서 성부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 속에서 사셨다. 그분의 사역은 독립적인 인간의 열심이 아니라, 연합된 관계에서 흘러나온 생명의 역사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쉽게 말한다. “예수님이니까 가능했지, 나는 다르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로 말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이렇게 기도하신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누리신 연합은 그분만의 특권이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열려 있는 은혜의 현실이다. 약함은 연합을 막지 않는다 많은 성도들이 연합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로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든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은 다르다. “우리는 질그릇이요, 그 안에 보배를 가졌다.” “내가 약할 그때 오히려 강하다.” 연약함은 연합의 장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드러날 통로다. 연합은 잘난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적 보상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모든 신자에게 이미 주어진 신분이다. 연합은 의무를 사랑으로 바꾼다. 신앙이 피곤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해야 한다’는 말이 너무 많아질 때다. 기도해야 하고, 말씀을 읽어야 하고, 봉사해야 하고, 전도해야 한다. 그러나 연합의 관점에서 보면 신앙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연합은 의무를 낳지 않는다. 사랑을 낳는다.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헌신은 억지로 하지 않아도 지속된다. 아내가 남편에게 밥을 해주는 이유가 의무라면 오래 가지 못하지만, 사랑이라면 자연스럽고 기쁜 것과 같다. 복음의 눈물겹도록 놀라운 진리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위해 큰일을 해내기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과 친밀해지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연합은 신앙의 기초이자 능력의 비밀이다. 메마른 광야 같던 신앙이 어느 순간부터 따뜻하게 끓어오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실제로 우리의 말과 선택과 관계 속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찬물 속 보리가 아니라, 끓어오르는 보리차처럼 말이다. 이것은 말씀대로 믿고 십자가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일 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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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2
  • [양대식 목사]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
    다윗과 요나단의 인간관계는 의리가 있는 관계입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는 것을 알면서도 사울의 편에 서지 않고 끝까지 다윗의 편에 서서 다윗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사울의 잘못된 행동을 알기에 불의의 편에 서지 않는 요나단의 인격 때문에 다윗과의 관계가 지속되었습니다. 신실한 관계, 의리가 있는 관계, 공의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인간관계입니다. 사무엘상 18:1-4  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2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3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4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사랑으로 맺는 관계요 생명적 관계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한번 맺은 관계는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관계입니다.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관계입니다.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유익을 주는 관계입니다. 변함이 없는 우정의 관계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 요나단의 도움으로 죽지 아니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도움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았습니다. 요나단의 아들 장애우 므비보셋을 다윗이 집에 데려다가 함께 살며 보살피고 먹이고 입혔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받은 은혜를 알고 갚으려 하는 다윗이 인격 이것이 인간관계의 비결입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으면 감사하고 보답하려는 자세가 관계에 필요한 것입니다. 배은망덕하고 의리가 없어 배신하면 상처를 주고 관계가 깨집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신실한 관계 의리를 지키는 인간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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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2
  • [박봉석 목사] 개인적 신앙, 이기적 신앙
    오랫동안 관계가 소원했던 두 형제의 가정이 모친의 집에서 몇 년 만에 함께 만났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고 교제를 나누며 그동안 서로를 향해 가지고 있었던 앙금을 털어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제를 하는 중에 동생 가정의 어린 아들이 할머니 무릎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형님 가정의 아들이 대뜸 “너, 왜 우리 할머니 무릎에 앉는 거니?”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동생 가정의 아들이 “우리 할머니인데.”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서로 자기 할머니라고 주장하면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런 다툼이 일어난 것일까요? 사촌지간인 두 아이는 아버지끼리의 불화로 인해서 자라오면서 서로를 보지를 못했고, 그래서 할머니가 사촌 형제의 할머니도 된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할머니는 웃으면서 두 아이에게 왜 자신이 모두에게 할머니가 되는지를 설명을 해 주었고, 그제야 두 아이는 이해를 하고 더 사이좋게 함께 놀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 가운데 이런 비슷한 일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가장 먼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개인적인 신앙이 잘못하며 이기적인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라는 생각에만 빠져서 하나님은 다른 성도의 아버지도 된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말은 유달리 ‘우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우리나라, 우리 글, 우리 민족, 또 가정에서도 우리 집, 우리 아이 등 우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심지어는 내 남편이고 내 아내인데 우리 남편, 우리 아내라고 말을 합니다. 그것은 개인주의적인 서양의 성향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하나라는 공동체 의식이 강한 민족이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런 나라가 점점 생활패턴이 서구화되면서 공동체 의식이 점점 희박해지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서 함께 하며 신앙생활 하는 것을 싫어하고 간섭받지 않고 신앙생활하고 싶은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중요시합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교회관의 기초입니다. 성경을 보면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이라고 비유하면서 교회는 한 몸임을 말합니다. 또 주님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다른 성도를 나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것이 참 교회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은 그렇습니다. 모든 신앙은 우리라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제 모습을 나타낼 수 있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 개인 개인 속에는 사실은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가능성만 있습니다. 그 사랑의 가능성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발현될 때에 비로소 진짜 사랑이 됩니다. 겸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는 겸손이 있는 것이 아니고 겸손의 가능성만 있습니다. 그 겸손의 가능성이 교회 공동체에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성도를 섬길 때에 비로소 진짜 겸손이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을 부를 때에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실 뿐만이 아니라 다른 성도의 아버지도 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한 형제자매이며 한 가족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만 신앙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신앙이 이기적인 신앙으로 변질되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성도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기에 내가 귀하게 여기고 섬기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성도를 위해서도 심지어는 내가 미워하는 성도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래서 그 사람 또한 내가 귀하게 여겨야 할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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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과 삶
    2026-02-12
  • [김성수 총장] 완전한 기초 위에 세워진 불완전한 교회
    사도행전 1장 후반부는 교회의 탄생을 준비하는 놀라운 장면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가룟 유다의 배신과 죽음 이후, 사도단은 11명이 되었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제자들은 기도하며 맛디아를 제비 뽑아 사도의 수를 다시 열두 명으로 회복시킨다. 얼핏 보면 단순한 결원 보충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 사건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12’라는 숫자는 단순한 수량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상징하는 완전수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 열두 명을 택하신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구약의 열두 지파를 계승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즉 새 이스라엘을 세우시려는 의도였다. 따라서 사도들의 수가 11명인 상태는 구속사적으로 ‘기초가 결핍된’ 상태였고, 교회를 세우기 위한 완전한 구조가 준비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하나님은 결코 불완전한 기초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으신다. 그래서 베드로는 시편 말씀을 인용하여 유다의 직분을 누군가가 대신 맡아야 함을 말했고, 제자들은 기도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구하였다. 그렇게 해서 맛디아가 뽑힌다. 이로써 사도단은 다시 12명으로 완성되며, 오순절 성령 강림을 맞이할 준비가 갖추어진 것이다. 여기까지가 사도행전 1장의 역사적이고 구속사적인 의미라면, 이제 우리는 이 사건을 오늘날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오해가 자주 일어난다. 예컨대 어떤 이들은 말한다. “우리 교회에는 아직 한 사람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 하나를 채워야 성령이 역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본문에 대한 잘못된 적용이다. 왜냐하면 맛디아를 뽑아 ‘12’를 채우는 일은 단회적인 구속사적 사건이지, 반복 가능한 모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맛디아가 뽑힌 이유는 그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증인이었기 때문이며,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도직의 유일한 자격 조건이었고,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질 교회의 기초석이었다. 계시록은 이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 예루살렘 성의 기초석에 새겨져 있다고 말한다(계 21:14). 그러므로 이 기초는 한 번 놓이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중 그 누구도 다시 사도가 될 수는 없고, 그 자리에 들어갈 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본문을 오늘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답은 분명하다. 우리는 기초석이 아니라, 그 위에 세워진 살아 있는 지체들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교회의 기초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통해 완성되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 2:20) 이처럼 우리는 완전한 기초 위에,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살아 있는 돌들이다(벧전 2:5).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기초를 다시 놓는 것이 아니라, 이미 놓인 기초 위에서 자신의 자리를 충실히 감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역설이 성립한다. 바로 이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면서도, 이 땅에서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역설이다. 교회는 존재론적으로는 이미 완성되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았고, 성령의 내주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었으며, 하늘에 속한 자로 불림받았다. 이 점에서 교회는 완전하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지상에서 여전히 연약하며, 죄와 싸우고, 분열과 갈등, 냉소와 나태, 무관심과 죄악이 공존하는 현실 안에 있다. 이 점에서 교회는 불완전하다. 교회는 지금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야 하는”(엡 4:13)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교회를 바라볼 것인가? 그것은 비판과 이상화라는 두 극단을 넘어서는 시선이다. 교회를 향한 실망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신실한 눈으로 치유받아야 하며, 교회를 향한 맹목적 이상화도 회개와 진리 앞에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우리는 그 몸 안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섬기는 지체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완전한 기초 위에 세워진 불완전한 교회 속에서, 여전히 완전함을 향해 부르심을 받은 지체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누가 빠졌느냐보다, 나는 지금 나의 자리를 충실히 감당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성령은 인원수가 갖춰졌기 때문에 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주권에 따라 임하셨다. 오늘도 성령은, 교회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공동체이기에 역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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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2
  • [김경헌 목사] 반드시 내가(사43:18-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이 말씀은 인간 존재의 목적을 단정적으로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지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도의 존재 이유는 자기 실현이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찬송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본문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목적을 이루시겠다는 열심의 선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인간의 의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붙들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열심’은 단순한 부지런함이나 성실함이 아닙니다. 끓어오르는 열정, 자신을 소진해 버릴 만큼 강렬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삼킨다’는 표현은 완전히 사로잡혀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성경은 먼저 하나님의 열심을 강조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7)라는 말씀처럼, 구원의 역사도 하나님의 열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와 사랑이 죄와 사망을 집어삼켰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사건은 이 열심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요한은 이를 두고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시69:9)라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왜곡되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는 거룩한 열정, 그 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언제나 자기희생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열심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흔히 열심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것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 때, 그 열심은 쉽게 변질됩니다. 내 감정, 내 정의감, 내 분노, 내 의욕이 앞설 때 열심은 오히려 교만이 됩니다. 열왕기상 18장에서 바알 선지자들은 밤낮으로 외치며 제단 주위를 뛰었습니다. 피가 흐르기까지 몸을 상하게 하며 격렬한 열정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응답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열심은 아무리 뜨거워도 공허할 뿐입니다. “너는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창12:1)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12:4) 믿음의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고향을 떠났습니다. 계산과 안전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사로잡힌 순종이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행위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요구하셨습니다. 특히 물질은 인간이 가장 쉽게 붙드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물질을 향한 태도는 신앙의 실제를 드러내는 거울과 같습니다.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면, 물질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열심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물질은 언제든지 우상이 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히11:4) 성경은 혈통상 장자인 가인이 아니라,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아벨을 의로운 자로 증언합니다. 기준은 ‘하나님의 열심에 사로잡혔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외형이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그 중심이 하나님께 향해 있을 때, 비로소 열심은 거룩해집니다. 오늘 우리의 가장 큰 위기는 모든 판단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된 데 있습니다. 설교가 내 마음에 맞으면 은혜롭고, 맞지 않으면 은혜가 없다고 합니다. 교회가 내 기대를 충족시키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실망합니다. 신앙의 기준이 말씀과 교회가 아니라, 나의 기분과 취향이 되어 버렸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그러나 주님은 지금도 예배와 말씀을 통해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시선을 받아들이고 통곡했지만, 가롯 유다는 외면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동일하게 임하지만, 반응은 다릅니다. 그 시선을 받아들이는 자는 깨어지고, 외면하는 자는 굳어집니다. 참된 열심은 나를 드러내는 열정이 아니라, 나를 무너뜨리는 열정입니다. 자존심과 계산, 체면과 고집이 허물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삼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신 그 약속은, 우리를 억지로 끌고 가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변화시키시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게 하소서. 내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사로잡히게 하소서. 나를 높이는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열정에 소진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열심에 사로잡힌 삶, 그것이 성도의 길입니다. 그 열심 안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교회를 사랑하며,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소진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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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2
  • [독자기고] [미국 제74회 국가조찬기도회]기독교적 가치수호를 위한 트럼프 연설, 현대판 고레스라는 평가.
    1. 트럼프 대통령 연설 주요 내용 2026년 2월 5일,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 D.C.에서 열린 제74회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하여 약 1시간 동안 신앙과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1) 기도는 미국의 슈퍼파워: “기도는 위로를 주고, 치유하며, 힘을 실어줍니다. 간단히 말해서, 기도는 미국의 슈퍼파워(America's superpower)입니다.” 2) 종교적 자유의 회복: 과거 교회 등의 정치적 발언을 제한했던 ‘존슨 수정안’을 무력화한 성과를 강조하며, 신앙인들이 공적 광장에서 더 당당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3) 천국행에 대한 확신: “제가 천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한 후보는 아닐지 몰라도, 신앙인들을 위해 정말 많은 선한 일을 해냈기 때문입니다.”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행위구원론자로 비판치 말것). 4) 학교 내 기도 보호: 공립학교 내에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는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새로운 교육 지침을 발표하며 ‘하나님 아래 한 국가’의 가치를 재확인했다. 2. 미국 내 긍정적 반응: 우리 시대의 고레스왕 보수적인 기독교계와 공화당 지지층은 이번 연설에 열광하며 그를 현대판 고레스왕(Cyrus the Great)에 비유하고 있다. 현대판 고레스왕이란, 성경 속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아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도왔던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 이처럼 트럼프가 비록 전통적인 성직자 스타일은 아닐지라도, 기독교적 가치를 정책적으로 수호하고 종교적 자유를 되찾아주는 선택받은 지도자라는 믿음이 투영된 것이다.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찬사도 이어졌다. 폴라 화이트 목사 등 주요 종교 지도자들은 트럼프를 말뿐인 정치인이 아니라 행동으로 신앙을 증명하는 인물로 평가하며, 낙태 반대 정책과 이스라엘 지원, 종교 자유 확대 등을 근거로 전폭적인 지지를 표하고 있다. 지지자들은 또한 그가 정치적 올바름에 맞서 “메리 크리스마스”를 되찾아주었고, 공공장소에서 신앙의 표현을 정상화했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3. 공화당원 및 핵심 지지층의 지지율 현황 현재 트럼프 대통령은 전체 지지율의 등락과는 별개로, 당내와 핵심 종교 지지층에서는 압도적이고 견고한 지지를 유지하고 있다. 2026년 2월 초 기준 공화당원들 사이에서의 지지율은 약 73~90퍼센트에 달하며, 이는 당내에서 그의 영향력이 여전히 절대적임을 보여준다. 백인 복음주의자 가운데 약 72~76퍼센트가 그의 국정 수행을 지지하고 있으며, 응답자의 70퍼센트 이상이 그를 미국의 위대함을 회복할 강력한 리더로 신뢰하고 있다. 정책적 신뢰 측면에서도 지지층의 약 75퍼센트는 관세 정책과 연방 공무원 개혁, 그리고 교육 분야에서의 종교 자유 강화 정책에 대해 강력한 찬성 의사를 보이고 있다. 요약하자면, 이번 기도회는 트럼프 대통령이 단순히 정치인이 아닌, 보수 기독교 가치를 수호하는 현대판 고레스왕으로서의 입지를 굳히는 자리였다.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하지만, 공화당과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결집력이 강해진 모습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연설은 자신의 정치적 행보를 성경 속 인물에 투영하며 지지층의 결속을 다진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4. 트럼프의 기독교적 가치가 미칠 영향 트럼프의 종교 중시 정책은 미국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국제 관계 전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최근 한국 기독교계의 큰 관심사였던 손현보 목사의 석방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인사인 J.D. 밴스 부통령과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손 목사의 가족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면담을 진행했고, 한국 정부에 종교적 자유 침해에 대한 우려를 전달하는 등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과거 북한에 억류되었던 임현수 목사나 해외 선교사들의 석방에 관여했던 전례와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이러한 행보는 트럼프가 자신의 우방인 보수 기독교계의 목소리를 외교 정책의 우선순위에 두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종교적 자유와 보수적 가치를 공유하는 한국 내 기독교 세력과의 유대가 강화될수록, 한미 외교는 경제나 안보 중심의 동맹을 넘어 가치 동맹의 성격을 더욱 강하게 띠게 된다. 손현보 목사 사례에서 확인되듯, 트럼프 행정부는 우방국 내부의 종교적 이슈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기조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한국 정부의 대미 외교 전략에 있어 새로운 고려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에게 이번 국가조찬기도회는 자신이 신의 도구로서 미국의 위대함을 회복하고 있다는 확신을 지지자들에게 분명히 각인시킨 자리이다. 현대판 고레스왕을 자처하는 그의 리더십은 미국 대선 판도를 흔들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들과의 관계에서도 새로운 외교적 문법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변화의 방향과 파급력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https://www.facebook.com/share/p/1Umicri64o/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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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0
  • [박영선 목사] 욥기 30:16-23
    욥기 42장입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배웁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죄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기의 전체 내용은 신앙인들이 꼭 한번 확인하고 가야 될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둥과 같은 내용으로 성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하기 전에 잠깐 말씀드릴 게 있고 집중하게 하겠습니다. 지금 교회 밖에서도, 또 교회 안에서조차 저에 대한 공격이 많아서 설명할 길도 없고, 무슨 대답을 하면 전부 악의적으로 반응이 오니까 손해를 교인들이 보더라고요. 교회가 다들 오기 싫어지고, 다른 교회로 가고 하는 일들이 생겨서 제가 이 짐을 지고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결심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제 이름으로 우리 교회까지 망신당하는 자리엔 가지 말게 하자 하는 게 결심이고, 또 하나의 부탁은 그러니까 오늘 마지막으로 하는 설교니까 처절하고 진지하게 집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럼 욥기의 결론을 봅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봅니다.” 무슨 말일까요?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의 차이를 아십니까? 귀로 들으려면 순서대로 들어야 되고, 보는 건 한꺼번에 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 속에서 우리가 신앙을 쌓아갈 때 시간 속에서 쌓아간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면 다음 단계가 나타나서 이제껏 가졌던 신앙으로는 답이 되지 않는 일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발전해야 되는데 다음 단계로 발전해야 되는데, 한국 교회는 교회사가 짧은 관계로 미처 그 다음 설명, 해설을 하는 일을 아직까지 잘 못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제가 이 인물을 맡아서 여기까지 오늘 하게 돼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욥은 아시는 바와 같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당대의 최고의 의인입니다. 복을 받고 있고 사람들한테 존경을 받는 사람인데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자녀들이 죽고 본인은 병들어 눕게 됩니다. 그가 당한 불행에 대하여 본인도 이해할 수 없고 주변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먼 곳에서 친구들 셋이 찾아와서 그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너무 실상이 처참해서 위로를 못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근데 그 기다리는 모습에서 뭔지 욥이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욥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히 이겁니다. “하나님, 제가 뭘 잘못했길래 이러십니까?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 말을 하는 게 된 동기는 그 옆에 와서 들어온 친구들의 눈빛이 편을 들어오는 게 아니라 “야, 너… 빨리 회개해라. 잘못한 거 회개하면 형통해진다” 그 말로 째려봤으니까, 이제 욥이 분통을 터뜨려서 화를 내고 “죽여 주십시오”까지 갑니다. 그 친구들이 “너 그건 말이 되냐? 하나님이 어찌 네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화를 내리시겠느냐? 너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 봐라.” 욥은 “난 잘못한 거 없다.” 그러자 “그 다음으로 말하는 것만 봐도 너는 교만한 거다.” 이렇게 되지요. 그러는 과정에서 7장에 집에 가서 보시면 “하나님, 내가 뭐길래 이렇게 나한테 집중하십니까? 하나님 더 큰 일 보시고 나는 버려 두십시오. 내가 죽으면 어떻고 내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덕이 되겠습니까? 내버려 둬 주십시오.” 이렇게까지 얘기를 해서, 제가 즐겨 사용했던 본문에 의하면 “어찌 나 같은 것을 침 삼킬 동안도 놓아두지 않으십니까?” 이게 제가 신학교 들어갔을 때 처지였습니다. 근데 하나님이 이제 앞으로 답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 세 친구가 돌아가면서 그를 궁박하고 도전하고 또 (회개를) 얻어내려고 하는데 도무지 말을 안 듣자 나중에 나가떨어지고 그 다음 타자로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엘리후는 뭘 가지고 욥을 구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너에게 주인이시며 너는 그가 만든 한 작품에 불과한데 네가 어떻게 전능자한테 감히 누가 맞냐 따져보자 그런 말을 할 수 있냐, 말이 되는 소리냐”라고 권세와 지위의 차이로 욥을 항복시키려고 합니다. 그러자 38장에 하나님이 이렇게 등장하십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동이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이게 누구한테 호통을 치는 것 같습니까? 욥의 불평에 대해서 호통을 치는 것 같습니까? 욥을 공박하는 친구들에 대해서 호통을 치는 것 같습니까? 이것은 친구들에게 하는 호통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답을 내려고 하지 마라.” 그리고 욥에겐 뭐라고 얘기해요?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동이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라.” 무슨 뜻이죠? 욥은 그의 목적이고 그의 첫 번째 대상이고, 하나님이 그에게 하나님이 되시고, 그가 하나님의 자녀요 복된 존재인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다른 말, 잘잘못으로, 규칙으로 그를 심판하고 권세로 그를 심판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쳐 들어오시는 것이 “폭풍 가운데”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욥에게 자신을, 혹은 욥의 지금 현실을 어떻게 납득시키느냐 하면 38장과 39장 두 장에 걸쳐서 창조 세계를 보이십니다. 창조 세계의 장엄함을 보라. 그 무궁무진한 존재들의 가치와 그 존재들의 영광을 보라. 그리고 그들의 존재에 있는 질서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보라. 이게 38장과 39장의 얘기입니다. 그리고 나서 40장 1절.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이르시되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내가 나와 싸우자 그러고 네가 옳고 내가 틀리다 그러는데, 할 말 있으면 해 봐라”라고 얘기하자 욥의 답이 신기합니다. “겁 주시면 저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한테 기회를 주셔야지 공간 협박으로 저를 짓눌러 버리시겠다고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신기하죠? 그래서 6절에 “그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이르시되” 다시 폭풍 가운데서 벼락같이, 38장에서 친구들의 말이 안 되는 증거를 쳐 보신 것처럼, 욥의 침묵으로 말미암는 반항과 항복하지 않는 고집을 내려면서 뭐라고 말을 하느냐 하면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동이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라고 대화를 드십니다. 굉장하죠. 그러니까 욥에겐 겁을 주고 그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욥을 세우기 위해서 앞에서 친구들을 후려치신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서 “네가 전능자와 다투겠단 말이냐? 너 그럴 수 있느냐?” 하니까, “맘대로 하세요. 저는 그렇게 항복 못 합니다”라고 하자, 그의 허리띠를 잡아 일으켜 세우면서 “너만 내 자식이야. 내가 말할 테니까 들어봐.” 이렇게 그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폭풍 가운데서 임하시는 하나님의 현전이요 임재요, 우리의 질문에 답하시는 주인이십니다. 10절부터 보시죠.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 짓밟을지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묘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영광을 입어라. 존귀해져라. 그리고 도덕을 지켜라. 그리고 악당들을 다 심판해라.”라고 얘기하십니다. 우리 세상 살면서, 우리 역사 속에서 듣는 하나님의 질문이 바로 이겁니다. 우리는 언제나 현실에 불의가 많고 부패가 많고 거짓이 많아서 정의를 원합니다. 평등을 원합니다. 하나님이 이걸 약속하셨고, 우리도 우리 인생 속에서 이걸 만들고 싶어 해서 언제나 부패한 정권은 뒤집어집니다. 그때 뒤집는 세력이 언제나 내거는,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명분이 뭐냐 하면 “정의를 실현하자”입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에서 보듯이 부패한 정권을 없애고 혁명이 일어나자 무엇부터 합니까? 악당들을 다 죽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영광을 얻고 우리가 도덕을 지킴으로써 받는 보상은, 악당을 죽이는 것 외에는 다른 보상이 없지 않느냐, 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무슨 얘기를 하느냐 하면 하마와 악어 얘기를 길게 하는데, 하마와 악어 얘기가 왜 길어지냐면 “너 하마를 길들여서 밭을 갈 수 있느냐? 너 악어를 길들여서 집에 반려…(반려를) 삼겠느냐?” 그렇게 묻습니다. “모든 것을 힘으로 평정하거나 답을 얻을 수 없느니라.”라고 얘기함으로써, 욥이 이제 항복하는 42장에 이릅니다.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창조 세계와 우리가 조작할 수 없는 힘의 실체들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보는 것 같이, 우리가 우리의 인생과 우리가 소원하는 것을 힘으로 만들어낼 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뭐라고 말하죠?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린 자가 누구니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나도 이해가 안 가서 그렇습니다. 내가 소원하는 것이 뭔지조차 정할 수가 없습니다. 밤낮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서만 헤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십시오.” 이게 우리 인생의 소원인데, 내가 얼마나 인간답고 존재 가치가 있는가는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결론이 뭐냐면 “답을 얻었다”가 아니라 “물어보겠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죄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가 무슨 말이냐면, 내가 아는 건 나 하나에게도 답이 되지 못합니다. 나는 다 타버린 재와 같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셨고 나를 하나님 믿게 하셨으니 내가 묻고 하나님 답해 주십시오. 그것이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결론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뭘 묻고 뭘 답을 얻었는지는 건너뛰고 7절로 갑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대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친구들은 하나님 대신에 규칙이었고, 하나님 대신 권력이었습니다. 욥은 끝까지 상대로 하나님을 모셨습니다. 여기가 다른 겁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답을 찾고 있는 겁니다.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수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뭐죠? 답이 “용서”하랍니다. 일차적으로 네 분노를 풀려고 하지 말고 용서부터 배워라. 용서부터 배우라는 게 무슨 뜻이죠? 화해해라. 너와 네 친구들이 왜 싸우게 되었느냐?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로 싸우게 됐는데, 싸워서 등 돌리지 말고 제대로 알아서 화해해라.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하나님의 자기 증명은 이 욥기에서도, 집에 가서 보세요. “하나님께 내가 묻겠사오니 겁 주지 마시고 대답 좀 해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이 대답을 안 하셔서, 23장에 가면 “내가 하나님을 찾고 찾으나 앞으로 가도 없고 오른쪽으로 가도 없고 뒤돌아서도 없더라.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이게 욥의 고난, 고통입니다. 친구들은 “빨리 회개하라.” 엘리후는 “빨리 무릎꿇어라.”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그게 아니라 “나를 알아라. 나를 알아라. 그리고 네가 나에게 누구인가 알아라.”입니다. 우리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모든 질문의 시작은 뭐냐 하면, 우리 모두가 겪는 것 같이 인생을 살면서 당하는 말이 안 되는 고난 속에서 이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난 뭐야? 나라는 존재는 뭐야?” 예수를 믿으니까 그다음 질문이 나오죠.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왜 이렇게 하십니까? 어쩌란 말입니까?” 현실은 어떻죠? 그 둘을 이을 수가 없죠. 왜 이을 수가 없죠? 내 기대와 다르니까. 정성을 바쳐도, 모든 종교 행위를 해도 바라는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약 성경 내내 왜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겼지요? 자기가 원하는 걸 해 주는 신을 만들었지요. 하나님은 안 해 주시니까. 왜 안 하시죠? 하나님이 목적한 것이 우리의 운명이니까, 내가 해 달라는 것으로 타협하거나 떼울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 다 아는 구절들이니까 신약의 설명들이 이 배경 속에서 어떻게 터지나 봅시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보여 주시면 족하겠나이다.” 왜 그런 질문이 나왔죠? 예수님이 죽은 자도 살리고 폭풍도 가라앉히고 문둥병도 고치고 소경의 눈도 뜨게 하셨는데, 로마를 뒤집지 않아요. 세상 권력이 되질 않아요. 자기에게 필요한 현실적 해답이 되시질 않아요.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답이 뭐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아버지가 십자가에 죽는 모습으로 우리 편을 들고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대상과 목적으로 만들겠다가 예수의 성육신입니다. 신이 인간이 되어 인간 보고 신성에 참여하라고 붙잡으러 온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 확신이 중요한 눈금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어디까지 밀고 올라가야 되냐? 이런 정체론, 존재론, 그리고 현실—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가는 현실에 대하여 분별과 지혜로 우리에게 열매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오심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이렇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제발 형통, 안심, 승부에서 이기는 것에 팔아먹지 말라고 말합니다. 잘 아시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뭐였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으면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를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안 믿어도 됩니다. 안 믿고 못 배기게 하겠다.” 17절.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인하여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내가 믿지 않아도 된다”라고 왜 고함을 질러야 했느냐? 믿었으니까 “다다” 그러고 있지 말고 그러란 말이에요. 믿은 자의 변화와 새 사람과 새 생명이 되란 말이에요. 꼭 고함을 질러야 돼요. 누가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자리에서 누가 더 크냐?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때 누가 좌편에 앉고 누가 오른편에 앉을 것인가 싸웁니다.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나라다. 세상은 다스리는 나라지만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나라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에 함께한 자들인즉 하나님이 내게 그 나라를 맡기신 것처럼 내가 너희에게 하늘 나라를 맡기노라.” 예수님의 시험은 뭐였습니까? 십자가에서 보여줬죠. “네가 남은 살렸으면서 너는 왜 못 살리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와 보라.”를 겪으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기에 와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에 있었던 이 중요한 말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시옵고 사랑하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 이게 교회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손가락질하는 일 맞지 마시고, 끌어안는 일로 여러분의 인생과 여러분 자신의 존재에 명예와 영광을 담으셔서 하나님 영광의 찬송이 되시기 바랍니다. ※ 위 설교문은 남포교회 주일예배 (26.02.01) 설교를 남포교회 유튜브를 통해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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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3
  • [논단] “병사 적금도 못 주는 나라, 이게 국가인가?” 국방 예산 파탄 낸 이재명 정부의 무능과 안보 포기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안보다. 성경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디모데전서 5장 8절)고 말한다. 국가라는 공동체를 책임진 정부가 나라를 지키는 젊은 장병들의 먹거리와 미래를 위한 적금조차 챙기지 못한다면, 그 정부는 국가로서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다. 최근 이재명 정부의 국정 운영은 임계점을 넘어 ‘안보 파탄’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장성민 전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창군 이래 전례가 없던 국방 예산 미지급 사태가 현실화되었다. 1. 창군 이래 초유의 국방 예산 미지급 사태 지난달 말, 정부는 한국은행으로부터 이른바 ‘마이너스 통장’ 방식의 일시 대출로 5조 원에 달하는 급전을 사용했다. 그러나 정작 국방 예산 집행에는 1조 3천억 원 규모의 심각한 공백이 발생했다. 이는 단순한 행정 착오가 아니라, 국가 재정 운용의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2. 군인 밥값과 적금까지 체불한 나라 이 예산 공백으로 인해 최전방에서 복무하는 병사들의 봉급과 적금 지급이 지연되었고, 심지어 급식 조달 비용까지 제때 지급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가는 부르면 응답한 청년들의 헌신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현 정부는 그 최소한의 책무조차 저버렸다. 나라를 믿고 청춘을 바친 장병들에게 돌아가야 할 기본적 보상마저 지키지 못하는 정부를 국민이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3. 방산 업체 대금 미지급, K-방산의 근간을 흔들다 문제는 병영 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국방 예산 체불은 방위산업체 대금 미지급으로 직결되며, 대한민국 안보의 또 다른 축인 방위산업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전 세계가 K-방산의 경쟁력과 신뢰성에 주목하는 시점에, 정부의 예산 집행 불능은 우리 방산 기업들을 내부에서부터 고사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는 단순한 재정 문제가 아니라, 국가 방위 역량을 스스로 훼손하는 행위다. 4. 군 무력화의 우연인가, 의도인가 더욱 심각한 것은 현 정부의 일관된 안보 인식이다. 보안법 약화 시도, 북한 노동신문 개방, 대북 접촉의 무분별한 허용 등은 이미 국민적 우려를 낳아 왔다. 여기에 전방 장병들에게 총 대신 삼단봉을 지급하고, 대북 자극 자제만을 강조하는 현실은 이번 국방 예산 사태가 단순한 실수인지, 아니면 체계적인 군 무력화의 일환인지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5. 결론: 위정자는 하나님과 국민 앞에 책임져야 한다 위정자는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통해 공동체를 보호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현 정부는 5조 원의 급전을 어디에 사용했기에, 국가의 최후 보루인 국방 예산마저 지급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 명확히 답해야 한다. 군 통수권자로서 대통령은 이 사태에 대해 국민 앞에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 성벽 위를 지키는 파수꾼이 잠들거나, 파수꾼에게 줄 양식이 없어 그를 굶긴다면 그 성은 머지않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재명 정부는 지금이라도 안보 무능과 예산 파탄의 현실을 직시하고, 국가의 근간을 허무는 일련의 행위들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두려움 없이 행하는 정부의 끝은 결코 평안하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독자의 논단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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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30
  • [김성수 총장] 예배 공동체의 신비와 은혜
    성도들은 주일이 되면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예배의 자리로 나아온다. 이 복된 자리로 나아오는 우리의 발걸음은 분명 가볍고 즐거운 걸음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예배당으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이 언제나 경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복잡한 내면을 안고 있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때도 많이 있다.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는 자들이 완전한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흔들리고, 사랑이 미약하며,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영적 감각이 둔해진 상태로 예배당의 문턱에 들어선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죄의 흔적이 요동치며, 영적 실패의 기억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영적으로 깊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부패와 결함을 더 예민하게 감지하며 스스로를 정죄하는 고통 속에 빠져들기도 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곧 ‘성도’라 불리지만 그 이름을 감당하기엔 자신이 너무도 부적합하다고 여길 때가 많이 있다. “성도”라고 불리지만, 본능적으로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성도’에 포함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배의 자리에 모인 이 무리는 바로 “성도의 교제”라는 사실이다. 이 모순은 신학적으로 실로 깊은 신비를 품고 있다. 사도 바울은 각 지역 교회를 향하여 서신을 쓸 때마다, 그들이 비록 수많은 문제와 결함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호칭한다. 고린도 교회처럼 분열과 음행, 영적 혼란이 만연한 교회조차도 여전히 하나님의 성도들로 불렸다. 에베소, 골로새, 그리고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이 만약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고 그들과 하나라면 사도는 어떻게 이들을 “거룩한 백성”이라고 부를 수 있었는가? 그 근거는 너무도 분명하다. 이는 곧 ‘성도됨’이 인간의 도덕적 완성이나 경건의 성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신학적 긴장을 목도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회중은 죄 많고 연약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거룩한 무리요,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다. 이 긴장은 인간의 자기 인식과 하나님의 선언 사이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자기 안의 죄악과 결핍을 바라보며 “나는 성도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너는 내 거룩한 백성”이라고 선언하신다. 이러한 긴장은 단지 심리적 불편함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이 드러나는 자리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격이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가 회중을 성도로 세우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요,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예배는 완전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가 아니라, 불완전한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신비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대속의 죽음, 부활, 그리고 하늘 성소로의 승천은 회중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화목제물이시고, 교회의 머리이시다. 회중은 오직 이 한 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이며, 그분의 피로 정결케 되며, 그분을 통해 아버지께 인도함을 받는다. 이 신학적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의 본질을 다시 보게 만든다. 예배는 감정적 고양의 시간이 아니며, 단순한 종교 행위도 아니다. 예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거룩함을 받은 회중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나아가는 신비로운 은혜의 시간이다. 회중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와 예배가 이루어질 수 있는 근거는 단 하나,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이 신비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으며,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 눈앞에 드러나지 않지만, 매 예배 속에서 그는 여전히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회중의 결함을 보며 낙심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중보를 바라보며 소망해야 한다. 진정한 회중은 도덕적 엘리트의 집합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모인 죄인들의 교제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의 거룩한 백성을 세우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예배는 회중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된 존재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다. 우리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성도로 부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모이게 하신다. 이 신비는 우리에게 참된 겸손과 동시에 무한한 은혜와 큰 용기를 준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모든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 은혜를 따라, 믿음의 눈을 들어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안에서 진정한 ‘화해된 회중’으로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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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6-01-29
  • [최호숙 목사] 훈제(燻製) 고구마를 먹어 보았는가?
    성경을 영안으로 자세히 보면 잠언 32:1(?)에 “훈제 고구마를 먹어 보지 못하고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 훈제(燻製)란 말은 한자로 “연기 훈(燻)” 자를 넣어 음식의 재료를 연기와 열에 노출시켜 수분을 제거하고 향을 입히며 보존성을 높이는 조리 방법을 말한다. 훈제의 기원은 언제부터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옛날 시골에 불을 때는 아궁이나 모닥불 또는 동굴 속에서 고기나 생선을 훈제하면 맛이 있고 오래 보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자연히 유행된 조리법이다. 요즘에는 고급 요리법으로 오리 훈제, 연어 훈제 등 다양하게 훈제 음식들이 소개되고 있다. 훈제하면 대부분 육류 훈제, 아니면 생선 훈제를 떠올린다. 그러나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훈제 고구마를 직접 만들어 먹었다. 그것도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에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궁금해 할 것이다. 지금은 문화가 발달해서 어린이들이 노는 문화가 고급화되고 수준이 높지만 옛날 50~60년대(그 이전에도 그렇게 놀았겠지만) 시골 아이들은 노는 곳이 뻔했다. 논, 밭, 들, 산, 바다... 특히 가을 고구마밭에서 생고구마를 캐서 날것으로 씹어 먹었다. 그렇게 먹고 나면 입술은 새까맣게 물들어 있고 고구마에서 나오는 진(sap, resin)은 옷에 다 묻고 정말 장난 아니었다. 동네 아이들이 개구쟁이처럼 놀면서 단순히 생고구마를 먹을 것이 아니라 색다른 고구마를 만들어 보자는 발상을 했었다. 방법은 빈 밭 공터에 땅을 파고 나뭇가지를 갖다가 불을 피우고 열기가 올라갈 때 그 위에 생소나무 가지를 덮으면 연기가 피어오른다. 소나무 가지 위에 떡갈잎을 펼치고 고구마를 올려놓고 연기 나는 상태에서 흙으로 덮어버리면 연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속에서 연기와 열기 속에 고구마는 익게 된다. 이것이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훈제 고구마이다. 말도 안 되는 것이라 반박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필자의 어린 시절 경험이요 팩트(fact)다. 훈제 고구마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목회를 하면서 가끔 훈제 고구마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훈제 고구마는 자신을 희생하여 아이들에게 간식거리가 되었다. 불과 연기를 통과한 고구마가 진한 향기를 내어 유익한 존재가 되듯이 우리 인생도 불과 연기를 통한 인내의 연단이 있어야 정금 같이 나오게 된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흙 속에 묻혀있는 고구마처럼 답답하고 질식할 것 같은 삶이지만 그 과정이 연기의 아름다운 향이 고구마에 배이듯 나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가 몸에 배이는 시간이고 신앙 인격이 다듬어지는 시간인 것이다. 훈제 고구마를 만들면서 또 깨달은 것이 있다. 불에 너무 오래 두면 타버린다는 것과 덮은 흙을 너무 일찍 제거하면 고구마가 익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빨리 먹고 싶은 욕심에 아이들이 너무 일찍 흙을 파헤치고 먹으려다 실패한 적이 많다. 인생에게 기다림의 시간이 꼭 필요한 이유는,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라 성숙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너무 조급해도 안 되며 너무 지체해도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늘 빠름에 익숙해 있다. 그래서 기다림은 손해처럼 느껴지고, 빠른 속도는 능력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빠름’이 답이 아니라 ‘바름’이 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잘 익은 훈제 고구마의 삶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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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며 생각하며
    202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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