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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신사참배의 망령이 부활했는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는 자들과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사야 5:20) 지금 이 순간, 이란의 이슬람 독재 정권 아래서 10대 소녀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자유를 외쳤다는 이유로 짐승만도 못한 만행을 당하고 있다. "처녀는 곧장 천국에 간다"는 사탄적 논리로 강간을 자행해 정조를 빼앗고 교수형에 처하는 이 광기 어린 현장 앞에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참혹한 것은, 이 피의 정권에 동조하며 자금을 대는 대한민국 이재명 정권과, 그 주역을 거룩한 강단에 세워 '용비어천가'를 부른 한국 교계 지도자들의 영적 간음이다. 1. 국익도 국민도 없는 이재명 정권의 '해괴망측'한 독재 원조를 규탄한다! 이재명 정권은 지금 레바논에 이어 이란에까지 '인도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혈세를 퍼붓고 있다. 이것이 과연 누구의 돈인가? 우리 청년세대들이 짊어져야 할 빚이며 국민의 혈세다. * 배신 외교의 극치: 미국과 이란이 전쟁 중인 상황에서 적대 세력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한미 동맹의 근간을 부정하는 자폭 행위다. * 독재의 군자금: 50만 달러라는 지원금이 민간인에게 갈 것이라 믿는 바보는 없다. 이는 결국 소녀들을 살해하고 시민을 탄압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군자금이 될 뿐이다. * 주객전도의 인권: 자국민 고물가 고통과 천안함 유족의 눈물은 외면하면서, 외부 독재 정권에만 '개폼' 잡으며 생색내는 것은 국익을 팔아 자신의 사법 리스크와 정치적 폼을 사려는 비겁한 굴욕 외교다. 2. 강단을 유린한 이영훈·소강석의 '아부의 향연'과 현대판 신사참배 2026년 부활절, 거룩한 하나님의 성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단에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올라섰다. * 배교적 찬양: 이영훈 목사는 이란 정권을 돕고 교회 탄압의 중심에 선 이를 향해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신 분"이라며 찬양했다. 소강석 목사는 "박수 안 치는 사람 누구냐"며 성도를 협박하고, "아름답습니다"라는 망언으로 아부의 극치를 보였다. * 성도 유린: 권력자의 안위를 위해 성도의 노트북 비번을 풀게 하고 다이어리까지 뒤지는 만행은 이곳이 예배당인지 공산당 검문소인지 분간할 수 없게 했다. 이는 과거 일제 강점기 강단에 일장기를 걸고 천황에게 절하던 신사참배의 데자뷔다. 살아있는 우상에게 제사상을 차려준 이 목사들은 역사와 하나님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 3. 고신 저항 정신의 파산: 김홍석 전 총회장과 '기독교보'의 비겁한 변절 일제의 칼날 앞에서도 신앙의 정조를 지켰던 고신의 저항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 김홍석 전 총회장의 침묵: 이 참담한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손을 들어 축도한 행위는 악의 잔치에 하나님의 복을 비는 영적 배교다. * 기독교보의 궤변: 기독교보(2026.4.11)는 이 사태를 두고 "교단과 이념을 넘어", "교회의 연합과 일치"라 보도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좌파 독재 이념과 적그리스도적 행태가 '수용 가능한 이념'이 되었는가? 어찌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함께할 수 있는가? * 저항의 거세: "분열과 시대를 넘어"라는 표현은 자유민주주의와 교회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는 성도들의 입을 막으려는 교묘한 술책이다. 고신의 기관지라는 기독교보가 독재 조력자를 비판하기는커녕 '은혜로운 예배'라고 미화하는 것은 고신 선배들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4. 자칭 '고사모'의 선택적 정의와 위선을 고발한다! 손현보 목사가 강단에서 시대를 향해 선지자적 경고를 날릴 때는 '정교분리'와 '선거법'을 들먹이며 일간지에 광고까지 내어 정죄하던 자칭 '고사모' 목사들은 지금 어디에 숨었는가? * 손현보의 회개 촉구는 징계 대상이고, 이영훈·소강석의 굴종적 아부는 연합인가? * 거짓의 아비가 부활절 강단에 서서 성도들을 유린하는데도 '입꾹닫'하고 있는 당신들의 신학은 이미 파산했다. 당신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한상동 목사를 비판하던 가결자들과 다를 바 없는 비겁한 기회주의자들일 뿐이다. 결론: 주님, 이 땅의 촛대를 옮기지 마시옵소서! 이란의 소녀들이 처참하게 도살당하는 현실을 외면한 채, 권력자에게 강단을 팔아넘기고 '회복'과 '희망'이라는 거짓 평화를 노래하는 한국 교회는 심판의 대상이다. 이재명 정권은 즉각 독재 지원을 중단하라! 이영훈, 소강석, 김홍석과 고사모는 배교 행위를 회개하라! 기독교보는 저항 정신을 회복하고 위선적 보도를 중단하라!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선 멸망의 가증한 것들을 향해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외쳐야 한다. 그것만이 고신이 살고,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촛대는 반드시 이 땅에서 옮겨질 것이다.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잠언 31:8)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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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그렇게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도 인용을 하려니 부끄러운 한자말이 있다. 백절불굴(百折不屈)인데 백번 꺾어도 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떠한 어려움에도 결코 뜻한 바를 굽히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한국이 낳은 순교자이신 주기철목사님께서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죽음을 던지는 굳건한 의지를 남겼다. 동음이의어가 있는데 의사(義士)와 의사(醫師)의 차이가 크다. 앞의 의사(義士)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꿋꿋한 사람을 뜻하며, 뒤의 의사(醫師)는 자기가 가진 의술로 타인을 살리는 사람이다. 한 사람은 자기가 죽는 길이요, 또 한 사람은 남을 살리는 길이다.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의사(義士)와 의사(醫師) 중에 어떤 인물이 되기를 원하느냐고 물으면 자기 목숨을 내 놓는 의사(義士)가 되려는 청소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도 뜻한 바를 굽히지 않는 결연한 인물들이 더러 나온다. 가나안 땅의 분배를 두고 갈렙은 팔십오 세의 나이로 헤브론 땅을 달라고 요구를 한다. (여호수아14:12)에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라고 마치 출정식과도 같은 연설을 쏟아내었다. 이처럼 자기가 믿는 바를 끝까지 지켜나가는 행동은 쉽지 않다. 군산지방에서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귀암(龜岩)노인이라는 한말의 병사가 있다. 아무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귀암에서 살다 자결했기로 귀암노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 근위 제2연대 1대대 소속 하사졸(下士卒)로 당일 해산식장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항일의거에 참여한 저항군졸이다. 해산식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일본군은 어깨에 견장을 떼고 은사금 명목으로 80원씩 나누어 주었다. 그는 받은 은사금을 찢어버리고 다른 군졸들과 함께 무기고를 털어 당시 서소문 안에 있었던 군영을 뛰쳐나와 남대문 근처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 길로 일본군에게 쫓겨 창의문을 거쳐 삼남지방으로 내려가 약 2년 동안 의병으로 항일운동을 했다. 1909년 전라북도 줄포싸움에서 마지막으로 패하고, 이 때의 부상으로 평생 절름발이가 된 채 숨어 살았다. 그 무렵 금강하류 군산연안에 귀암이란 마을에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많이 와서 합숙을 하면서 호남지방에 선교를 하고 있었다. 쫓기던 그는 왜경들의 치외법권 지역인 이 선교사들의 숙소로 뛰어들어가 전후사정을 이야기하고 하인으로 고용해 줄 것을 애걸하였다. 이 절름발이 병사는 그날부터 여선교사들의 숙소 경호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군영에 있을 때 차고 다녔던 장도(長刀)를 보배처럼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서소문 탈영이래 한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그 장도를 뽑아 어깨에 둘러메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밤마다 숙사를 순찰했던 것이다. 귀암노인은 몸에 밴 군경 생활의 습성을 조금도 고치려 하지 않았다. 새벽 해 뜨기 전에 일어나 찬물을 끼얹고, 비록 절뚝거리지만 스스로의 구령에 따라 보조를 맞추었다. 또한 몸에 밴 군기 그대로 저녁에는 왕궁이 있는 북쪽을 향해 요배하는 것을 거르는 법이 없었다. 가까이 지내는 선교사들이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귀암노인이 급전이 필요하여 선교사에게 돈돔 빌려줄 것을 요청한다. 선교사는 이런 기회를 타서 몸에서 떼질 않는 장도를 저당으로 내놓기만 하면 돈을 빌려 주겠다고 하였다. 귀암노인은 한 사나흘 고민하다가 근 20여년 동안 잠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장도를 선교사에게 맡겼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 귀암노인은 아무말 없이 행적을 감춘 것이었다. 그의 실종과 더불어 저당으로 잡아둔 장도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장도를 놓아두었던 자리에 한 통의 편지가 놓여있었는데 펴 보니 ‘무사로서 양인 밑에 천한 삶을 이어가는 것도 치욕인데 칼마저 몸에서 떼어놓게 되었으니 이제는 잠시도 살아갈 면목이 없어졌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그날 선교사들은 귀암강 강변에서 자기의 장도로 자기 목을 찌르고 죽은 노병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한국의 무사정신에 강동한 선교사들은 귀암강 둔덕에 노인을 묻어주고 십자기를 세워 이 강골병사의 영혼이 영생할 것을 빌어주었다고 한다. 한 평생 다리를 절은 이 노인은 브니엘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이후 절었던 야곱이 떠오른다. (창세기32:31)에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라고 말씀한다. 야곱 역시 백절불굴의 기백이 있었다. (창세기32:26)에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라고 말씀한다. 백암노인이 만약 천국에 갔다면 함께 다리를 절었던 야곱과 함께 좋은 친구가 되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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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총대 파송 하지 말자 – ‘부결’
노회의 제일 중요한 사명은 목사를 양성하는 것과 그 사역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보호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회기에 부총회장으로 세움을 받아 올해 총회장이 되어야 했던 김문훈 목사는 우리 부산서부노회에 속한 우리의 동역자입니다. 노회를 넘어 고신총회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큰 일을 감당하던 포도원교회를 목회하는 우리 노회의 아들입니다. 세상에서도 내 자식이 분명히 잘못한 일이지만 부모가 일단 책임을 지고 모든 것을 안고 가는 것이 선행된 다음, 그 자녀의 잘잘못을 논합니다. 안타까웠던 것은 목사의 어머니 격인 노회도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보다는 세상 여론의 눈치를 보며 노회가 안게 될 부담부터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다 연약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세상의 눈치를 본다는 것,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세상 눈치를 보고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을 마치 복음적인 사역처럼 생각하는데, 교회가 하나님의 인정보다 세상의 평가를 우선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안타까움을 넘어 참담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더럽혀지는 것과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개인의 자리 욕심과 계파의 정치 논리로 동료 목사라는 자들이 공의와 정의라는 명분으로 동료 목사의 비리를 수집하고 세상에 발설하여, 한 목사의 잘못을 빌미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와 정의를 주장하는 것 같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욕심과 세상보다 더 비열한 정치 논리가 뱀이 꽈리를 틀 듯 그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피해를 입고 지금도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이용한 간교한 무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며, 고신총회가 반드시 밝혀내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대를 살며 목회하게 될 후배와 교회들을 위해서도 반드시 밝혀내어 교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전례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투서를 돌리고 연명하는 것조차 불법입니다. 특히 우리 고신은 세상 법정에 고발하는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아팠던 역사가 있습니다. 교회를 정화하고 공의와 정의를 원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성경에 기초한 교회법을 따라 정당한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현재 이 문제로 가장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포도원교회일 것입니다. 김문훈 목사도 오늘의 포도원교회가 없었다면 우리가 비난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포도원교회를 사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교회의 부름을 받아 목회하는 목사에게는 최고의 형벌입니다. 어려움과 위기에 처해 있는 포도원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포도원교회의 처절한 노력과 수고를 조금 더 지켜보십시다. 아마 많은 분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 의견이 나오고 여러 제안이 있었던 것도 모두 어머니 노회로서의 책임감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우리 노회 목사회원 1번으로서 같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금이라도 총회와 한국교회 앞에 우리 노회가 책임지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총회 총대로 나가고 총회에서 직분을 맡아 봉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회의 추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총회 총대를 추천한 노회는 총대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동시에 노회는 고신총회에 대한 책임도 있습니다. 노회가 책임을 지는데 눈 가리고 아웅하면 더 큰 웃음거리가 되고, 그렇다고 총회에 대한 책임도 회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우리 노회는 올해 총회 회계로 수고하셔야 하는 장로님이 있고, 선출직 이사도 있으며, 특별국 국원도 있고, 총회를 운영하는 상임위원회 위원장도 있습니다. 고신총회의 장자로 자부하는 우리 부산서부노회가 총회 임원과 총회 선출직 이사, 특별국 국원과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제외하고 이번 총회 회기에는 총대를 파송하지 않는 것으로, 고신총회 앞에 최소한의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였으면 합니다. 이 안이 노회에서 받아들여진다면 저는 헌법위원회 특별국 국원이지만 총대로 가지 않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총회 총대 선정에 대한 회의 진행 발언에 대해 정식으로 동의안을 냅니다. 이번 총회 회기에 우리 부산서부노회는 총회 임원 장로, 선출직 이사, 총회 특별국원, 총회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제외하고 총대를 파송하지 않기로 동의합니다.※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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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7] 이만열의 이승만 대통령 비하와 김구 성역화의 위험한 이분법
서론: 건국의 아버지를 지우고 실패한 낭만을 신격화하다 지난 연재를 통해 필자는 이만열 교수가 '친일 프레임'을 어떻게 악용하여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들을 사상적으로 숙청했는지 폭로했다. 그러나 이만열 사관의 진정한 목적지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인 이승만 대통령을 철저히 폄훼하고, 그 대척점에 서 있던 김구 선생을 신격화하여 성도들에게 그릇된 국가관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낙인찍는 자학적 사관의 핵심 동력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상적 오염이 고신 교단 내부로 깊숙이 침투했다는 점이다. 소위 '고신을 사랑하는 모임(고사모)'을 자처하는 이들이 등장하고, 수많은 목회자나 심지어 총회장까지도 제주 4.3 사건의 본질 왜곡이나 현 이재명 정권의 정교분리 오독, 차별금지법 등에 대해 침묵하거나 동조하게 만드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다. 1. 김구의 독립 투쟁과 친북적 반(反)건국 행위 사이의 엄격한 구분 이만열은 백범 김구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바친 고귀한 독립 투쟁의 헌신을 이용해, 1948년 건국 반대라는 명백한 정치적 실책까지 '민족적 정의'로 포장하는 논리를 펼친다. 그는 김구가 선택한 남북협상 노선을 분단을 막기 위한 유일한 민족적 정통성을 지닌 길로 평가하며, 반대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노선은 분단을 고착화한 행위로 비판해 왔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애국심은 오직 독립운동의 현장까지만 인정될 수 있는 것이며, 건국 과정에서의 친북적 행보는 결코 애국으로 미화될 수 없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그는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이야말로 민족 분단을 막으려 했던 정통성 있는 대안이었다고 평가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 역시 이승만의 단독정부가 아닌 김구와 김규식이 추구했던 통일 정부 수립 노력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등) 2) [비평]: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시기 헌신은 존경받아 마땅하나, 1948년 건국 과정에서의 행태는 단호히 비판받아야 한다. 당시 김구는 김일성이 쳐놓은 통일전선전술의 덫에 빠져 남북협상이라는 명분 아래 대한민국 건국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이는 소련과 김일성의 적화 야욕에 이용당한 역사적 과오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자유 민주의 기틀을 흔든 반건국적 행위에 가깝다. 이만열은 이러한 실체를 외면한 채 김구의 실패한 행보를 민족의 정통성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2. 제주 4.3 사건 왜곡: 공산 폭동을 ‘미군에 대한 항거’로 둔갑시키다 이만열식 사관이 낳은 가장 파괴적인 결과물은 제주 4.3 사건의 본질을 뒤바꾼 조직적 역사 공정이다. 그는 4.3을 단독 정부 수립에 저항한 민중들의 투쟁이자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사상은 고신 내 유력 목회자들에게까지 전염되었다. 필자는 과거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원로)가 손봉호 교수의 영향을 받은 일부 유력 목회자들과 함께 제주 전적지를 탐방하며, "제주 4.3 사건은 미군의 말발굽 아래 희생당한 제주 도민들이 미군과 이승만 정권에 항거한 저항"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사실을 한 참석자로부터 직접 듣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특히 4.3의 주동자 김달삼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1948년 4월 3일 새벽, 제주 전역의 경찰지소를 습격하며 무장 폭동을 일으켰고 수많은 경찰과 우익 인사, 양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폭동 직후 북한으로 도주한 그는 김일성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이후 6.25 전쟁 직전인 1949년 말, 다시 유격대장으로 남파되어 활동하다가 1950년 3월 20일 강원도 정선 승지골(일명 '김달삼 모가지 잘린 골')에서 광복군 출신 김관오 연대장이 이끄는 국군 제8사단에 의해 사살되었다. 김달삼이 일으킨 제주 4.3 사건이 어떻게 '민주 항쟁'인가? 이 명백한 반란 수괴를 미화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그는 제주 4.3을 통일 정부 수립을 갈망하던 민중들이 분단 노선에 저항하며 일어난 사건으로 규정하며, 그 비극의 책임을 이승만 정권과 외세인 미군에 돌린다. 또한 5.10 선거 거부를 민족 자결주의적 저항의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이만열, 『한국 현대사와 기독교』 등) 2) [비평]: 4.3의 본질은 공산 세력의 무장 반란이다. 특히 당시 공산 폭도들에 의해 자행된 '기독교 순교적 진실'을 이만열은 침묵한다. 제주 최초의 순교자 이도종 목사는 공산 폭도들에게 생매장당했고, 삼양교회 김임종 집사 등 수많은 성도가 살해되었다. 당시 제주 27개 교회 중 12개 교회가 소실된 이 참혹한 잔혹사를 외면하고 공산 반란군 주동자를 '민주 항쟁가'로 미화하는 것은 기독교 역사학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린 반역행위다. 이런 제주 4.3 사건을 민주항쟁이라며 전적지 순례를 한 이동원 목사 등 일부 귀가 얇은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이만열식 역사왜곡에서 속히 벗어나기를 촉구한다. 3. 이승만의 통찰을 거부하는 좌파적 역사 공정 이만열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며, 이를 단순히 '정부 수립'으로 폄하한다. 그는 대한민국이 1919년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이미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며 2019년을 '건국 100주년'으로 기념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쳐왔다. 그러나 이는 국제법상 국가의 3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이 실재하지 않았던 임시정부의 한계를 무시한 감성적 민족주의에 불과하다. 만약 1919년에 이미 나라가 세워졌다면, 우리 선조들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찾기 위해 왜 그토록 피 흘려 독립운동을 했단 말인가? 건국된 나라를 되찾는 것은 '광복'이지 '독립운동'이 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 ①: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민족 분단을 선택한 인물이며, 친일 세력을 비호하여 건국 정통성을 훼손했다.” (출처: 『우리 역사 500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만열의 주장 요지 ②: “대한민국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미 건국되었다.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주장하는 것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분단을 정당화하는 반역사적 행위다.” (출처: 이만열 기고 및 ‘건국 100주년’ 관련 강연 요지) 2) [비평]:이만열의 '1919년 건국설'은 듣기엔 그럴듯하나 치명적인 논리적 파탄에 직면한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 1919년에 이미 나라가 건국되었다면, 우리 선조들은 '이미 건국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왜 그토록 피 흘려 독립운동을 했단 말인가? 건국이 이미 완료되었다면 독립운동은 존재할 이유가 없으며, 이는 선조들의 고귀한 투쟁을 '이미 있는 것을 찾는' 무의미한 반복으로 격하시키는 궤변이다. 국제법적으로 국가는 국민, 영토, 주권이라는 3요소가 확립되어야 한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나라를 세우기 위한 '준비 기구'였을 뿐, 실질적인 영토를 통치하거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1948년 8월 15일 건국은 한반도 내에 실체적인 국민이 구성되고, 영토에 대한 통치권이 확립되었으며, 대외적으로 주권을 선포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실체가 완성된 기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국가의 토대 위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세웠고, '한미동맹'과 '기독교 입국론'이라는 강력한 안전판을 구축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북한의 공산 정권과 차별화되는 정통성의 근거다. 이만열은 이승만을 친일파 비호자로 매도하며 건국의 정통성을 깎아내리지만, 정작 북한 정권 핵심부에 포진했던 김영주, 강양욱, 정준택 같은 골수 친일 부역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한다. 결국, 건국을 분단의 원죄로 몰아세우는 그의 억지는 집안에 불길이 닥칠 때 남은 가족이라도 살리려 방화문을 닫은 소방관을 향해, '왜 가족이 못 만나게 가로막느냐'며 불을 지른 방화범 대신 소방관을 꾸짖는 꼴이다. 결론: 거짓된 이분법을 깨고 건국 정신을 회복하라 이만열 교수가 쳐놓은 이승만과 김구의 거짓된 이분법, 그리고 제주 4.3 사건의 왜곡은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파괴하려는 사상적 덫이다. 이 덫에 걸린 상당수 복음주의 목회자들과 '자칭 고사모' 목사들은 고신의 순결한 정신을 좌경화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다. 우리는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기 애국심은 존중하되, 1948년 건국 과정에서 김일성에게 철저히 이용당해 이승만의 건국을 방해한 그의 친북적 역사적 과오와는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자학 사관을 걷어내지 않는 한 고신과 한국 교회는 결코 바로 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승만을 통해 허락하신 자유 대한민국과 고신 교회의 정통성을 지켜내기 위해 이만열의 왜곡된 역사인식과 선전선동의 칼날을 반드시 꺾어야만 한다. 그것만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개혁주의 정절을 회복하는 길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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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6] 이만열의 친일 프레임과 역사적 살인: 건국 주역들을 향한 사상적 테러
서론:손봉호의 윤리가 씨앗이라면, 이만열의 사관은 그 독초의 토양이다 앞선 기고(1~5번)를 통해 필자는 손봉호 교수가 기독교 윤리라는 가면을 쓰고 한국 교회를 좌경화의 늪으로 어떻게 인도했는지 파헤쳤다. 그러나 손 교수의 윤리 담론이 고신과 SFC 내부에서 독버섯처럼 번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에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치욕의 역사로 규정한 이만열 교수의 왜곡된 역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만열은 친일 청산이라는 도덕적 결벽증을 무기 삼아 건국의 정통성을 난도질했으며, 고신 정신의 본질인 순교 신앙을 좌파적 민족주의 투쟁으로 변질시킨 장본인이다. 1. 국가 상징과 호국 영웅을 향한 인격적 살인 이만열 교수가 주도한 『친일인명사전』은 객관적 사료에 근거한 학술적 결과물이 아니라 특정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사상적 숙청이자 정치적 낙인찍기의 산물이다. 그는 역사의 입체성을 무시하고 오직 '친일'이라는 단일한 잣대만을 휘둘러 대한민국 건국의 기틀을 닦은 거목들을 사상적으로 매장하는 데 몰두하였다. 이만열의 주장 ①:“백선엽은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독립군을 때려잡은 반민족 행위자다. 그의 공로를 기리는 것은 민족 정기를 훼손하는 일이다.” (출처: 이만열, 「백선엽의 친일 행적과 국립묘지 안장 문제」, 2020년 언론 기고 및 강연 요약) 이만열의 주장 ②: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는 친일파다. 친일 잔재인 애국가를 국가로 부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출처: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지식산업사, 1991) [비평]:이는 일제강점기라는 처절한 역사의 맥락을 무시한 처사이다. 6.25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백선엽 장군을 간도특설대 경력만으로 단죄하는 것은 국군의 정통성을 파괴하려는 시도이다. 당시 간도특설대의 주요 토벌 대상은 독립군이 아닌 중공군과 팔로군이었으며, 1930년대 중반 이후 만주의 독립군 세력은 이미 궤멸되거나 소련으로 이동한 상태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철저히 묵살되었다. 또한 애국가를 공격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상징 자체를 부정하려는 고도의 사상적 테러이자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역사 부정주의이다. 2. 근대화의 선구자들을 향한 주홍글씨와 '선택적 단죄'의 이중성 이만열은 교육, 언론, 문학 등 각 분야에서 대한민국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거인들을 모조리 친일 부역자로 매도하며 그들의 사회적 성취를 부정하였다. 그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려 했던 선구자들의 고뇌는 외면한 채 결과론적인 비판만을 쏟아냈다. 이만열의 주장 ①: “김성수, 김활란 등은 일제에 협력한 반민족 인사들이다. 그들이 세운 교육·언론 기관은 친일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출처: 이만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역사적 의의」, 민족문제연구소 강연, 2009) 이만열의 주장 ②: “민족 지성이라 불리는 최남선과 이광수 역시 결국 변절한 부역자들에 불과하다.” (출처: 이만열, 『우리 역사 500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바다출판사, 2000) [비평]:이들이 닦아놓은 근대 문명의 토대가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이만열의 '선택적 단죄'이다. 대한민국 건국 세력의 행적은 현미경으로 파헤치면서도, 정작 북한 정권 핵심부에 포진했던 수많은 친일 인사들(김일성의 동생 김영주, 부주석 김차승 등)에 대해서는 기이할 정도로 침묵한다. 민족정기를 말하면서 북한의 노골적인 친일파 등용은 눈감아주는 그의 역사학은 공정한 학문이 아니라 특정 진영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를 흉기로 사용한 정치 선동일 뿐이다. 3. 순교 신앙을 민족 해방 투쟁으로 격하시킨 영적 범죄 이만열 교수의 가장 큰 해악은 고신의 자랑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신앙적 성격을 왜곡하여 세속적 민족주의의 틀 안으로 가두어버린 데 있다. 그는 선배 목회자들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당했던 고난을 단순한 항일 운동의 일종으로 해석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초월적 가치를 훼손하였다. 이만열의 주장 ①: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민족 정기를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적 항일 투쟁의 연장선에 있다.” (출처: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지식산업사, 1991) 이만열의 주장 ②: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사명은 민족의 고난과 함께하며 사회를 변혁하는 데 있다.” (출처: 이만열, 「기독교 역사관의 재정립」, 기독교역사연구소 세미나 강연, 2010) [비평]:고신 선배들의 저항은 민족주의 차원의 항일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1계명을 지키기 위해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을 수호하려 했던 거룩한 '신앙 수호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만열은 이를 세속적인 민족 해방 투쟁으로 격하시켜 신앙의 본질을 변질시켰다. 이러한 영적 왜곡은 SFC 간사들과 신학생들이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보다 좌파적 민중사관에 더 열광하게 만드는 사상적 통로가 되었다. 신앙의 선배들이 피로 지킨 제단 위에 이만열은 좌파 이데올로기의 향로를 피워 올린 것이다. 결론:고신의 심장을 겨눈 이만열의 칼을 꺾어야 한다 이만열 교수는 기독교 역사학자라는 학문적 권위를 누리며 정작 고신의 뿌리인 자유민주주의와 성경적 보수 신학의 기틀을 허무는 데 앞장서 왔다. 그의 사상은 성경이 말하는 절대 진리가 아니라 특정 정치 세력의 논리를 대변하는 변증법적 역사론에 불과하다. 손봉호의 윤리가 한국 교회의 손발을 묶었다면 이만열의 사관은 한국 교회의 머리와 심장을 좌경화로 세뇌시켰다. 이제 고신 총회와 깨어있는 성도들은 직시해야 한다. 이만열 식의 자학적 역사관을 단호히 배격하고 하나님께서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허락하신 자유 대한민국과 고신 교회의 정통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 거짓된 사슬을 끊어낼 때 비로소 고신의 순교 정신이 다시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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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활절 연합예배에서의 이영훈, 소강석의 망언과 이에 대해 침묵하는 자칭 고사모를 강력 규탄한다"
고명길 목사 (고신애국지도자연합 전문위원장) 마태복음 24장,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하신 예수님의 경고가 오늘날 대한민국 강단에서 재현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2026년 4월 5일 부활절, 한국 교회의 심장부라 자부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단에서 우리는 거짓과 술수의 권력자가 등판하는 참담한 광경을 목도했다. 그러나 더 절망적인 것은, 평소 강단의 거룩함을 외치며 동료 목회자에게 돌을 던지던 자칭 고사모(고신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모임) 목사들의 굴욕적인 침묵이다. 1. 손현보 목사의 선지자적 외침: 고사모의 광기 어린 정죄 과거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는 강단에서 “이재명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외쳤다. 이는 특정 개인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고 차별금지법 등을 통해 교회를 억압하려는 거대 세력에 대한 선지자적 경고였다. 또한 그는 예배 후 교육감 후보를 소개하며 기독교적 가치를 수호할 것을 독려했다. 당시 고사모 목사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선거법 위반과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강대상에서 정치적 발언을 했다고 손 목사를 총공격했다. 심지어 고신 총회 석상에서까지 나서서 손 목사를 비판하며 징계를 요구하고, 일간지에 광고를 내며 그를 신학적 타락자로 몰아세웠다. 그들에게 손현보의 워딩은 반드시 척결해야 할 정치 선동이었다. 2. 이영훈·소강석의 아부의 향연: 부활절 거룩한 성전의 참사 그렇다면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 강단에서 벌어진 일은 무엇인가. 이영훈 목사와 소강석 목사는 차별금지법과 교회해체법을 주도하는 이재명을 강단에 세우고 아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이영훈 목사는 이재명을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시고 한국을 이끌고 계신 분"이라고 찬양적 소개를 했다. 소강석 목사는 “박수 안치는 사람 누구예요. 이따 좀 남으라"고 윽박질렀고, "실개천 출신이지만 결코 그 개천을 잊지 않으시며 국민화합과 실용정치에 올인하는 모습이 한국 교회 보기에도 참 아름답습니다”라는 망언을 쏟아냈다. 수많은 사법적 의혹과 교회 탄압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향해 ‘무거운 짐을 짊어 지셨다’, ‘아름답습니다’ 라는 찬사를 보낸 것은 아부를 넘어선 영적 배교다. 3. 성도를 유린한 살벌한 검문과 신사참배의 데자뷔 강단 아래의 풍경은 더욱 처참했다. 현장 성도의 증언에 따르면, 교회 입구에서 권력자의 안전을 위해 성도의 개인 노트북 비밀번호를 강제로 풀게 하고 개인 다이어리까지 뒤지는 만행이 저질러졌다. 예배의 주인인 하나님보다 권력자의 안위가 우선시된 현장은 중국 공산당 치하의 예배와 다를 바 없었다. 이 모습은 과거 일제 강점기, 강단에 일장기를 걸고 천황을 향해 절하던 신사참배의 현장과 겹쳐진다. 당시 친일 목사들은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명분으로 내세워 우상에게 무릎 꿇었다. 오늘날 이영훈·소강석 목사가 차별금지법과 교회해체법을 획책하는 권력자에게 강단을 내어준 것은, 형태만 다를 뿐 살아있는 우상에게 제사상을 차려준 현대판 신사참배와 다를 바 없다. 4. 고사모의 선택적 침묵: 당신들의 신학은 파산했다 우리는 묻는다. 손현보 목사의 직언에는 선거법 위반이라며 총회 석상에서까지 칼을 휘두르던 고사모 목사들은 왜 이 명백한 강단 유린 사건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는가. 손현보의 회개 촉구는 징계 대상이고, 이영훈·소강석의 굴종적 아부는 연합인가? 교육감 후보 소개는 강단 오염이고, 거짓의 아비 이재명의 축사는 한국 교회의 영광인가? 이재명의 실체를 경고하는 손현보의 말은 정치라며 정죄하더니, 이재명이 아름답다며 박수를 강요하는 이영훈·소강석의 말에는 침묵하는 고사모. 당신들의 정교분리는 신학적 원칙이 아니라, 자신들의 반성경적 논리를 강요했던 비겁한 고무줄 잣대였음이 만천하에 증명되었다. 당신들이야말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한상동 목사 등을 비판한 신사참배 가결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5. 고신 정신은 권력 앞의 비겁한 침묵이 아니다 고신 정신은 신사참배라는 거대 권력 앞에 목숨을 걸고 '아니오'를 외쳤던 선배들의 피 위에 서 있다. 교회 파괴자인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느라 성도들을 유린하고 강단을 팔아넘긴 이 못된 현대판 신사참배자들을 향해 입 닫고 침묵하는 것은 고신 정신과 선배들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고사모 목사들에게 강력히 요구한다. 손현보 목사에게 퍼부었던 그 서슬 퍼런 비판의 잣대를 이영훈·소강석 목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라. 즉각 성명서를 내고 그들의 배교적 행태에 대한 회개와 책임을 요구하라. 그리고 그들의 교회 앞에도 가서 정교분리를 어겼다는 당신들의 논리대로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가서 시위도 하고 기도회도 열라. 거짓의 아비가 부활절 강단에 선 이 엄중한 사태 앞에서 끝까지 '입꾹닫'하고 침묵한다면, 당신들은 더 이상 고신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입에 담을 자격도 없는 철부지 목사들이고 장로들일 뿐이다. 부활절 강단은 권력자의 무대가 결코 아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만이 영광받을 거룩한 곳이다. 선지자적 외침이 사라지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강단은 더 이상 교회의 강단이 아니다.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선 이재명과 그 무리들에 대해 “당신이 그 사람이라”, “저 여우에게 가서 이르라”는 경고의 말씀을 다 같이 강하게 외쳐야 한다. 그것만이 고신이 살고,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길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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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 ‘욜로(YOLO)’의 시대를 넘어, 부활의 참된 소망으로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욜로(YOLO)’라는 말이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이 말은 “인생은 한 번뿐이니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며 살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 땅의 삶이 전부인 양, 오늘을 마음껏 소비하고 즐기라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길어진 100세 시대라 할지라도 지나고 보면 인생은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날아가는 화살과 같이 쏜살같이 흘러갑니다. 만약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이 땅의 삶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면 그 짧은 여정의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지독한 허무와 공허 그리고 죽음 앞의 우울함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인 ‘부활’은 이 허무한 인생의 마침표를 영원한 생명의 쉼표로 바꾸어 놓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겨울이 되어 얼어붙었던 가지에 봄이 되면 다시 잎새가 싹트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영원한 삶이 예비되어 있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단지 죽음 이후의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는 강력한 원동력입니다. 슬픔을 사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 릴런드 스탠퍼드는 수재였던 외아들을 갑자기 잃고 극도의 슬픔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으니 저 대신 세상의 청년들을 도와주세요”라는 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그의 인생관은 완전히 바뀝니다. 아들이 천국에 살아있다는 부활의 소망을 품게 된 그는 당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헌납해 오늘날의 명문 스탠퍼드 대학을 세웠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개인의 절망을 넘어 수많은 젊은이를 살리는 위대한 헌신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어느 호스피스 병동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젊은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 남긴 편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가, 엄마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향해 가는 문이란다. 기나긴 겨울을 이기고 봄에 피어나는 저 꽃들처럼 우리도 눈물 없는 그곳에서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이처럼 부활의 소망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위대한 사랑과 용기를 현재의 삶 속에 불어넣습니다. 성경은 부활한 우리가 누릴 미래에 대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라고 약속합니다. 부활은 눈물도 사망도 애통함도 없는 완벽하고 행복한 삶이 열리는 기적입니다. 이 땅의 쾌락만을 좇는 ‘욜로’의 허무함을 넘어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가는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2026년 부활절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참된 기쁨과 미래에 대한 찬란한 소망이 상처받고 지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가득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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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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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 부활절을 맞이하는 믿음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세번의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ㅡ.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신 후 처음의 사람에게 1.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창1;28 하나님이 아닌 존재인 뱀이 처음의 사람에게 찾아와 그들의 욕구를 채우도록하고 뱀의 사상을 따르게 한 후..세상은 어둡게 변해 버렸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2.정녕 죽으리라..ㅡ창2;17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찌니라,ㅡ창3;19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고, 밭은 소출을 내지 않고 행복했던 가정에 행복은 간 곳 없고, 형이 동생을 해하고 장례를 치르고 부부는 갈등을 겪고,,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한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 지금도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고, 영생의 나라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 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ㅡ 요11;25-2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시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주시고 ㅡ무덤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십니다.ㅡ요528. 죽음으로 가는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ㅡ 요3;16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의 댓가를 치르고서야 우리 믿는 자들이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ㅡ그가 찔리고 그가 상하고 그가 징계를 받고, 그가 체찍에 맞음은 우리 허물과 죄와 불안과 걱정과 공포, 병 때문인 것을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ㅡ사53;5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하셨고. 사53;6.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들의 저주가 그를 믿음으로 물러가는 복된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3;13-14 이 말씀이 부활절을 맞이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힘이 되고 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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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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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전서 1:3) 할렐루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온 마음 다해 찬양합니다. 2026년의 봄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에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이웃들의 삶 위에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죽음의 권세도 이길 수 있다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처럼 온 세상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경제적인 어려움들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빈 무덤의 승리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과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거룩한 백성된 우리는 생명의 부활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이번 부활절을 시작으로 경남 지역 구석구석에 산 소망을 전하는 통로로 소외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무너진 마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 부활의 아침은 어둠이 지나고 반드시 빛이 온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자 확증입니다. 비록 현실의 고난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지라도,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신뢰하고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갈등이 있는 곳에 화해를 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다시 한번 우리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이 기쁜 소식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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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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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통영기연 곽만섭 목사
- 사랑하는 경남신문 독자들과 경남 성도들께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아침에 선 교회와 성도들이 이 놀라운 생명의 복음을 다시 붙들며, 믿음 가운데 새 힘을 얻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나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의 상황은 여전히 우리를 흔들지만, 주님께서 살아계신 한 교회는 무너지지 않으며 우리의 믿음 또한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능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위에 부활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여, 각 가정과 삶의 자리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일상 속에서 부활의 기쁨이 실제가 되어, 지친 마음을 회복시키고 서로를 위로하는 은혜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역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흘려보내며, 말과 삶으로 복음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작은 섬김과 나눔이 모여 이웃에게는 위로가 되고, 사회에는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어둠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의 은혜로 날마다 새 힘을 얻고, 기쁨으로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여러분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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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통영기연 곽만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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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녕기연 안덕수 목사
- 부활에 아침에 고백할 승리의 고백 매해 맞이하는 부활절인데 올해는 더욱더 그 의미가 깊이 다가온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의 한말씀, 다이루었다(요19:30)는 말씀이 마음속에서 계속 울린다. 모든것을 하나님께맡기시고, 다 이루심의 완성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그분의 마지막은 승리와 완성의 선언이셨다. “다 이루었다.”이 한마디에는 완전한 지불의 선언이다. 예수는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값을 하나하나 치르셨다. 낮은 땅에 오심, 모욕과 조롱, 가시 면류관, 십자가의 고통까지 치르시면서 그 모든 과정은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는 길이었다. 이때 휘장이 갈라지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무너졌다.죄로 인해 닫혀 있던 길이 열렸고, 하나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다가오시는 분이 되셨다.어쩌면 우리는 이 장면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두 팔을 벌리사 안아주신 사건이다. “이제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 십자가는 단지 고난의 상징에서 용서와 초대의 상징이 된것이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고백은 죽음을 앞둔 체념이 아니다.사명을 완수한 자의 평안이며, 전적인 신뢰의 표현이다. 우리는 흔히 ‘안식’을 쉼으로 이해한다.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안식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인간은 여섯 날 동안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안식일은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날이라는 것이다.이 통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우리는 끊임없이 계획하고, 통제하려 하며, 결과를 붙잡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커진다.그러나 예수의 마지막 고백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준다. “맡겨라.”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괴로움과 눈물의 시간이 찾아올 때, 심지어 과거의 상처와 실패까지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안식을 경험한다. 부활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승리의 선언을 한다. 십자가는 겉으로 보면 패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죄와 죽음을 이긴 승리가 담겨 있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말한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따라서 믿음의 삶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삶.붙잡으려 하기보다 의탁하는 삶.그리고 그 고백은 매주 예배 속에서, 또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반복되어야 한다. 내 삶을 주께 맡김을 통해 신앙은 완성되어 간다. 참된 안식과 승리를 경험하게 되기실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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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녕기연 안덕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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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진해기연 정용기 목사
- 사랑하는 진해와 경남 지역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우리의 믿음의 핵심으로서, 절망 가운데 있는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소망입니다.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현재의 능력이며, 미래를 향한 확실한 약속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고난과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시대는 세계 각국의 이기주의와 전쟁의 소식, 경제적 어려움과 이념의 대립, 빈부와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각자의 삶에 놓인 무거운 짐들로 인해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려움 속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평강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지역사회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부활 신앙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생명을 받은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 희망을, 상처의 자리에 치유를, 분열의 자리에 화해를 이루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진해와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가 한마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나누며 이 땅 가운데 생명의 복음을 더욱 힘있게 전하는 증인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6년 부활절 진해기독교연합회 회장 정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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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진해기연 정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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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성탄
- 탄자니아에서 맞는 성탄은 한국이나 서구에서 경험하는 성탄과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눈 내리는 겨울도 없고, 벽난로도 없고, 진한 핫초코를 마시며 캐럴을 듣는 풍경도 없다. 대신 뜨거운 햇살과 붉은 흙, 해풍이 스치는 코코넛나무들, 먼지 날리는 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아이들의 웃음이 성탄의 배경이 된다. 계절은 여름이고 기온은 높지만, 이 땅의 성탄은 놀라울 정도로 따뜻하고 깊다. 그 이유는 성탄을 구성하는 중심이 문화적 장식이나 상업적 분위기가 아니라 공동체와 생명, 그리고 은혜이기 때문이다. 탄자니아의 교회들은 12월이 되면 더욱 분주해진다.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꺼내 입고 한 해 동안 받은 은혜를 되돌아보며 감사의 찬송을 준비한다. 찬양대가 부르는 캐럴은 서구 전통과 다르다. 북과 춤, 손뼉과 화음이 어우러지며 마치 성탄의 기쁨이 온몸으로 흘러넘치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아프리카의 리듬 속에서 ‘Immanuel – God with us’라는 복음은 단지 교리적 문장이 아니라 실제 살아 있는 현실로 느껴진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이곳 사람들은 삶의 온도와 표정으로 고백한다. 성탄은 탄자니아 사람들에게 단순히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는 날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시고 낮고 천한 곳을 찾으시는 분이라는 메시지를 새롭게 경험하는 날이다. 이 나라의 많은 이들은 여전히 물과 전기가 부족한 채 살아가고 도로는 정비되지 못한 곳이 많으며 병원 시설이나 교육 환경도 열악하다. 그러나 바로 그 현실 한가운데서 성탄은 더 깊은 울림을 갖는다. 예수께서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이 땅의 낮고 고단한 자리들 속에서 조용히 빛을 비추고 계시다. 탄자니아의 성탄에서 인상적인 것은 나눔의 정신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선물이 되고자 하는 마음, 가지지 못한 이웃을 먼저 기억하는 공동체적 감수성은 성탄의 본래 정신을 되살린다. 가난한 이웃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길을 가다 만난 아이들에게 사탕 하나를 쥐여 주는 일상적 사랑이 성탄의 풍경을 만든다. 이곳에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말이 교회 강단 위의 문장이 아니라 삶의 현실이 되어 있다. 성탄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의 재점화다.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사람들은 성탄을 맞으며 다시 고백한다. “Mungu yu mwema / 하나님은 선하시다.” 성탄은 눈에 보이는 조건이 좋기 때문에 기뻐하는 축제가 아니라 어느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누리는 기쁨이다. 탄자니아의 성탄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탄자니아의 성탄을 경험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탄생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성탄은 화려함이 아니라 임재의 사건이며, 풍성함이 아니라 은혜의 증거이며, 배부름이 아니라 함께함의 기적이다. 붉은 흙먼지와 강렬한 햇살 아래에서 맞는 성탄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우리는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 탄자니아의 성탄은 우리를 다시 복음의 중심으로 데려간다. 인간의 힘과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보내신 그 아들의 은혜가 우리의 진짜 기쁨이라는 사실을 말없이 일깨운다. 그래서 이 땅의 성탄은 조용하지만 뜨겁고, 소박하지만 깊으며, 가난하지만 찬란하다. 하늘의 기쁨이 땅 위에서 피어나는 순간, 그것이 바로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성탄이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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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성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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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메시지-황권철 목사]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
- 지구촌은 전쟁과 테러가 계속되고 대한민국 곳곳에 시민의 함성으로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올해도 조용히 낮은 곳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주님의 성육신하신 성탄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자를 작게 만드셨다(God makes him small)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추운 겨울밤 남의 집 구유를 빌려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성탄은 힘들고 어려운 이웃의 낮은 곳으로 찾아가는 날입니다. 주님은 천한 목수 집안으로 오셨습니다. 작고 힘없는 식민지 나라에 오셨습니다. 도성인신(道成人神, INCANATION), 인(IN) 카로(CARO)란 육신 안에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말입니다. 전능한 하나님이 친히 육신의 옷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변에 헐벗고 굶주리고 지체가 부자유한 낮은 자의 손을 잡아 주는 성탄절이 되길 바랍니다. 그 예수님을 소유할 때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분은 높은 곳이 아닌 낮은 곳으로 오셨고, 겉으로 치장하는 회칠한 무덤이 아닌 보이지 않은 중심을 보는 분입니다. 그분은 온 인류가 걸어갈 길요 진리요 생명 되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류 역사의 중심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간성을 회복시켜 남녀 간의 성차별을 없애주셨고,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혈통적인 차별을 허물고, 계층 간의 지위 고하 신분의 차별을 없애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간의 가로막힌 죄악의 담을 완전히 허물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부릅니다. 이는 예수란 그 이름이 우리에게 메시지입니다. 예수란 자연적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명적 이름 그리스도란 우리의 제사장이 되어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친히 담당해 주셨고, 사망 권세를 정복하여 부활하심으로 만왕의 왕이 되셨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길을 가르쳐 주신 선지자가 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이 한해에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임마누엘로 찾아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고 할 때 임(함께), 마누(우리와), 그리고 엘(하나님), 즉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함이요, 혹은 장막을 친다는 의미입니다. 이번 성탄에 꼭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는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위대한 발견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믿음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능력은 예수의 영인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음입니다. 경남기독신문을 애독하시는 모든 분에게 이번 성탄과 다가오는 새해에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가정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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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메시지-황권철 목사]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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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국내전도위원회를 해산하라(4)
- 5. 개혁주의 선배들:총회는 시대를 분별하고 교회의 상태를 판단해야 합니다. 성경이 교회가 시대를 분별해야 함을 가르친다면, 개혁주의 전통은 그 원리를 제도적으로구현하였습니다.장로교 정치의 핵심 정신은 단순히 회의를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총회가 시대적 위기와 교회의 필요를 분석하고 교단 전체를 이끌 전략적 결정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고신 교단이 직면한 문제는 단순히 실용적 실패가 아닙니다.이는 개혁주의 교회 정치의 근본정신에서 벗어난 심각한 정체성의 이탈입니다. 아래 인용문들은 장로교 전통의 가장 중요한 문헌들이 총회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A. 존 녹스(John Knox) – 1560년 『제1치리서(First Book of Discipline)』 존 녹스와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자들은 총회를 단순한 행정 기구로 보지 않았습니다.그들은 총회를 교회의 영적·전략적 중추로 이해했습니다. 인용문: “총회는 교회의 상태를 살피며, 전체 교회의 순결과 연합을 지키기 위하여 필요한 일들을 심의해야 한다.”— First Book of Discipline, Head VII (1560), John Knox 외 여기서 두 가지 핵심 명령이 나옵니다. “교회의 상태를 살피며”(consult upon the state of the Kirk) → 인구 변화, 문화 변화, 사회적 위기 등 실제 상황을 분석하라는 뜻입니다. “필요한 일들을 심의하라”(deliberate upon things expedient) → 즉, 전략적 판단과 실행 방안을 마련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고신총회가 한국 교회의 위기와 인구 붕괴 상황을 평가하지 않는다면,이는 존 녹스가 말한 “총회의 본질적 의무”를 외면하는 것이 됩니다. B. 『제2치리서(Second Book of Discipline)』(1578) – 시대를 분별하라 스코틀랜드 장로교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 중 하나인 『제2치리서』는 총회의 책임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인용문: “총회는 각 지역 교회와 노회들 가운데 누락되었거나 잘못된 것을 처리하고 바로잡으며, 시대를 슬기롭게 분별하고 사탄의 역사와 교회의 필요를 판단해야 한다.”— Second Book of Discipline, Chapter 7 (1578) 여기서 특히 중요한 문구는 다음입니다. “시대를 슬기롭게 분별하며”(discern wisely the times) → demographic collapse, secularization, youth apostasy 등 시대적 변화에 대한 평가를 의미합니다. “교회의 필요를 판단하며”(necessities of the Kirk) → 지금 교회가 실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석하라는 명령입니다. 만약 오늘 한국 사회가 인구 붕괴, 고령화, 교세 감소라는 위기를 겪고 있다면,총회는 이 문헌에 따라 반드시 방향 전환과 재평가를 해야 합니다. C. 조지 질스피(George Gillespie, 1646) – 총회는 ‘시대의 위험’을 살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 중 하나였던 조지 질스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용문: “교회의 최고 치리회는 시대의 위험을 관찰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협하는 병에 대한 적절한 치료책을 제시해야 한다.”— George Gillespie, Aaron’s Rod Blossoming(1646) 즉, 총회는: 시대가 교회에 어떤 위험을 주는지 분석해야 하고 그 위험을 치료할 구체적 처방을 제시해야 한다. 오늘 한국 교회의 위험은 명백합니다. 출생률 최하 청년 불신앙 목회자 고령화 교회 과포화 개척의 남발 교회 간 ‘빼오기’로 인한 약화 이 시대에 총회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질스피의 기준에서 “총회가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습니다. D. 새뮤얼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1644) – ‘시대를 위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러더포드는 장로교 정치의 기초를 세운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총회의 본질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용문: “총회는 교회의 전체 상태를 판단하고, 시대에 맞는 방향을 제시하며, 현재의 필요에 따라 적절한 질서를 정해야 한다.”— Samuel Rutherford, The Due Right of Presbyteries(1644) 여기에서 우리는 총회의 3대 핵심 책임을 다시 확인합니다. “교회의 전체 상태를 판단하라” → 지금 한국 교회가 어떤 상태인지 총회가 분석해야 합니다. “시대에 맞는 방향을 제시하라”(direction for the times) → 오늘 시대에 맞는 전략을 제시하라는 뜻입니다. “현재의 필요에 맞는 질서를 세우라”(present necessity) → 예: 교회 개척이 아니라, 교회 통합/강화 전략. 러더포드는 오늘 고신총회가 해야 할 말을 이미 400년 전에 말해 놓았습니다. E. 웨스트민스터 총회(1645) – “여러 시대를 위하여” 판단하라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중 『교회정치 형태』는 총회의 역할을 이렇게 규정합니다. 인용문: “총회(혹은 회의)는 신앙의 논쟁, 양심의 문제, 실제적 사안에 대하여, 여러 시대(divers ages)의 교회를 위하여 조언하고 결정해야 한다.”— Westminster Assembly, Form of Presbyterial Church Government(1645) 이것은 명확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교회는 모든 시대에 같은 전략을 사용할 수 없다. 시대가 바뀌면 총회도 ‘지금 시대의 필요’를 따라 판단해야 한다. 오늘 고신총회에 이 문장을 적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70–90년대에 효과적이었던 교회 개척 전략을 2025년에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정신에 반한다.” F. 결론: 총회가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에서의 탈선입니다. 개혁주의 전통 전체를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총회는 교회의 상태를 분석해야 하고(녹스) 시대를 분별해야 하며(제2치리서) 시대의 위험을 평가해야 하고(질스피) 시대에 맞는 방향을 제시해야 하며(러더포드) 시대마다 다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웨스트민스터) 즉, “교회 개척을 무조건적으로 계속하는 것”은 개혁주의가 아닙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전략을 재구성하는 것”이 개혁주의입니다. 고신총회가 현재의 방향을 계속 유지한다면,이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멀어지는 것이며,한국 교회의 현실을 무시한 위험한 신학적·전략적 맹목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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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국내전도위원회를 해산하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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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동북아 신냉전, 오직 복음만이 이길 수 있다
- 신라가 3국 통일을 이루고 천년 역사를 이을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다. 그것은 나라의 큰 정신적 기반이 되었던 화랑정신과 정치적 화백제도이다. 화랑정신은 어릴 때 건강한 인격을 기르고 선공후사의 국가관을 다음 세대로 이어왔다. 화랑정신은 충효와 애국, 살생 금지 등 청소년기 최고의 인격을 위한 율법, ‘화랑도 훈련’을 받게 한 데서 나왔다. 이것이 튼튼한 나라 기반이 된 것이다. 어쩜 성경 속의 십계명을 보는 듯 사람이 지켜야 할 계명 훈련이 뚜렷했다. 3국 통일의 주역 김유신 또한 화랑 출신이다. 화백제도는 진골 중심의 왕족·귀족들이 정책 결정에 만장일치의 민주적 절차를 밟게 함으로써 권력을 견제해 왔다. 이 때문에 전술과 전략이 뛰어난 김춘추, 김유신, 문무왕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지도자가 되었고, 3국 통일 이후 나당전쟁까지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왜구의 끊임없는 침략과 노략질에도 한반도를 지킬 수 있었다. 근현대에 와서 조선 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쳐 왔던 거친 역사도 이에 오버랩된다. 근세에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사회주의의 첨예한 냉전이 싹이 텄다. 일제 36년의 비운의 역사가 있었지만, 해방 후 이어지는 미·중·러의 각축 속에서 다시 한번 나라가 백척간두에 있었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공산 세력을 이기고 자유민주주의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등 걸출한 선각자들이 돋보였다. 이어진 박정희 군사혁명 정권의 강한 경제 성장 정책과 이병철, 정주영 같은 철저한 기업가 정신을 가진 인물들이 오늘의 세계 속 대한민국을 이루어 냈다. 공과를 두고 찬반의 갈등은 있다. 그러나 경제 중심 사회로 급변한 세계 속에서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이들이 주역임을 부인하겠는가. 역사의 궤적을 우리는 긍정적으로 살펴야 한다. 무한 경쟁 시대에 접어든 이 시대는 또다시 신냉전 시대를 맞고 있다. 동북아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계 강대국들의 패권 전쟁이 한반도에서 진행 중이다. 세계 중심의 나라 미국이 아직 세계 경제 주도권에 있다. 중국이 그 지형을 빼앗으려는 각축과 러시아의 옛 영화를 다시 세우려는 야욕, 이러한 것들이 한반도에서 작용하고 있다. 최근 일본이 그동안 패전의 그늘에서 70여 년 오직 경제 강국만 꿈꾸어 왔던 여정을 풀고 패권 전쟁에 뛰어들고 있다. 지난 11월 7일 일본 중의원에서 신임 다카이치 총리는 대만 유사 시 일본의 존립 사태가 올 수 있다며 일본 자위대 개입 가능성을 밝혔다. 난리가 났다. 일본이 대만에 대해 금기시돼 있던 관행을 깨고 위험한 발언이 나오자 중국 외교관은 “참수당해야 할 발언”이라고 극단적인 표현을 써 가며 비판했다. 북한은 어떠한가. 이제 ‘적대적 두 국가론’을 들고나오며 영구 분단으로 독재 영구 집권의 마각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 겪고 있는 동북아 지역은 곧 전쟁이 시작될 것 같은 신냉전 분위기다.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 강국이 되었고, 세계 각 나라에 첨단 무기를 수출하는 군사 강국이 되었다. 그야말로 ‘세계 속 보물섬’이 된 대한민국의 사정이 더욱 신냉전의 분위기를 일촉즉발로 몰고 갈까 걱정이다. 기독교 강국으로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하는 대한민국의 교회들은 어떠한가. 오직 복음 통일을 꿈꾸고 있다.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극동 지역 선교에 애쓰고 있다. 작은 나라에서 두 번째로 선교사를 세계 각국에 파송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복음의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나라의 위기 상태에 대한 감각이 약해져 간다. 신냉전 시대 주변국들의 교회 핍박은 심해지고 있다. 중국은 여전히 교회와 예배를 통제하고 있고, 북한은 많은 선교사들을 억류해 놓고 예배를 방해하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복음의 행진에 변함이 있겠는가. 한 생명, 한 생명 영혼 구원에도 눈물의 기도와 도전이 필요하다. 구국의 대열에 참여할 화랑도 같은 다음 세대 훈련이 강해져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 교회에서 새로운 복음 운동으로 일어나야 할 것이다. 자유 방임적 문화의 물결이 지금 대한민국 땅에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복음 통일을 위해 한국교회가 깨어나야 할 것이다. 시편 146편에 “여호와는 나라를 영원히 다스리시며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여호와는 약한 자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을 굽게 하시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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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동북아 신냉전, 오직 복음만이 이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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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국내전도위원회를 해산하라(3)
- 4. 성경이 요구하는 교회의 시대적 분별과 전략적 판단 교회가 전략을 세우는 문제는 단순한 행정이나 프로그램 차원의 논의가 아닙니다.이는 성경적 순종의 문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영적 책임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결정하고 움직여야 하는지 명확하고 일관된 원리를 제시합니다.그 핵심은 바로 “시대를 분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는 것”입니다. 아래는 고신총회가 반드시 붙들어야 할 성경적 근거들입니다. A. 사도행전 15장 — 예루살렘 공의회는 ‘총회적 전략 판단’의 성경적 모델입니다. 사도행전 15장은 초대교회가 첫 번째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줍니다.당시 교회는 이방인 선교의 확산으로 인해 교리적 혼란과 내부적 분열 가능성이 생겼습니다.이 문제는 개별 교회가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였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사도행전 15:6) 이 모임은 단순한 토론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진로를 결정하는 회의체였습니다. 그들은 다음을 행했습니다 : -상황을 분석하고(위기 진단) -성경을 해석하고(신학적 판단) -교회 전체가 따라야 할 지침을 제시하고(전략 결정) -이를 전국 교회에 시행했다(전 교회적 실행) “성령과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필수 사항 외에는 아무 부담도 주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사도행전 15:28) 그리고 그 결정은 전체 지역 교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이 되었습니다. “각 성으로 다닐 때에 … 예루살렘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사도행전 16:4) 즉, 사도행전 15장은 오늘날 장로교의 총회가 시대적 도전 속에서 전략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가장 강력한 성경적 모델입니다. 고신총회가 인구 붕괴와 교회 쇠퇴라는 시대적 위기를 평가하지 않는다면,이는 성경의 모범적 지침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B. 대상 12:32 — 잇사갈 자손: “때를 알고 이스라엘이 할 일을 아는 자들” 성경은 지도자를 평가할 때 단지 지식, 경건, 용기만을 칭찬하지 않습니다.하나님께서 특별히 높이 평가하신 것은 “시대를 분별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잇사갈 자손 중에 시대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들이 있으니”(대상 12:32) 이 구절이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 -시대적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는 능력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능력 -단순한 분석이 아니라, 실제적인 방향 제시 이것이 성경적 리더십입니다. 오늘 한국 사회의 저출산, 인구 감소, 청년 불신앙, 교회 이탈의 흐름을 보며 아무런 전략적 변화 없이 기존 방식을 반복하는 것은 잇사갈의 지혜를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C. 디도서 1:5 — “남은 일을 정리하여 각 성에 장로를 세워라” = 구조 개편의 명령 바울은 디도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라.”(딛 1:5) 여기서 “남은 일을 정리”한다는 말은 : -지역 교회들의 실제 상황을 평가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구조를 재정비하고 -현재 필요에 맞게 인력을 재배치하며 -가장 효과적인 형태로 교회를 조직하라 는 의미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은 “남은 것을 정리”해야 할 때입니다.교회를 더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교회를 정리하고 강화해야 합니다. D. 잠언 11:14 — 다수의 지도자들이 함께 판단할 때 안전 “지도가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잠 11:14) 장로교 총회는 바로 이 잠언의 원리 위에 세워진 제도입니다 : -많은 장로가 모여 -시대를 분석하고 -교회가 갈 길을 정하며 -공동의 지혜를 모아 결정하는 구조 그런데 공동의 지혜를 모으지 않고,단순히 과거의 방식을 자동 반복한다면,그 총회는 성경적 총회가 아니라 형식적 총회일 뿐입니다. E. 에베소서 4:11–13 — 교회의 지도력은 ‘연합’과 ‘성숙’을 이루기 위한 것 바울은 교회의 직분이 존재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가 되어…”(엡 4:11–13 요약) 즉, 교회의 지도력은: -교회를 하나로 모으고 -성도를 성숙하게 하며 -전체적인 구조를 강화하고 -분열이 아닌 연합을 추구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한국의 교회 개척은 연합보다 분열, 강화보다 약화, 부흥보다 재편성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F. 결론 — 성경은 ‘더 많이 세우라’가 아니라 ‘지혜롭게 판단하라’고 말한다. 성경은 명확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지도자들이 모여 문제를 논의하라.(행 15:6)시대를 분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라.(대상 12:32)남은 것을 정리하고 교회를 바로 세우라.(딛 1:5)지혜를 모아 교회를 안전하게 이끌라.(잠 11:14)교회를 하나로 모으고 강하게 하라.(엡 4:11–13) 그러므로… 급격한 인구 감소와 청년 불신앙 속에서 계속 교회를 세우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지금 고신총회가 해야 할 일은 ‘개척’이 아니라 ‘분별’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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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국내전도위원회를 해산하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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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종 점
- 어느 가수가 불렀던 종점이라는 노래는 오랜 시간까지 사랑을 받고 불리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개인이나 단체에 생명이나 직분에 언젠가는 꼭 오고 마는 마지막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노래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감을 준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지 모든 것이 단계 단계마다 분명히 마지막이 있어 종점이라는 말이나 노래에 관심을 갖고 이것을 자기의 처지와 형편에 견주어 보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슈베르트의 마지막 3개의 피아노 소나타는 죽음이 오기 전 두 달 전에 완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당시 불치병이던 매독이 악화되어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인생의 종점에 장기와 중추신경계가 무너져 내리는 고통 속에서도 이전에 없었던 엄청난 속도로 작품을 썼던 것이다. 그의 친구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나는 죽음을 반긴다고 했다. 그러나 고통은 두렵다고 했다.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소나타를 비롯한 여러 개의 작품들이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는 것은 슈베르트의 슬픈 장조에 늘 눈물방울이 맺혀있기 때문일까? 한없이 나약하고 헛되이 보이는 한 개인의 삶의 종점에서 그의 마지막을 끝이라 보지 않고 공포와 고통이 오히려 시작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쓴 작품들이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이라 믿어진다. 요즘 들어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자꾸만 나의 마음에 와닿아 잠간 멈칫하는 때가 간혹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새벽에 일어나 내가 자주 사용하는 물건들을 쳐다보면서 내가 없어지면 이것들은 어떻게 될까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직장을 그만 둘 때에는 그런 마음이 없었는데 30년 동안 봉사한 장로의 직을 마감하여 은퇴한 후에 나의 머릿속이 복잡했었다. 그러나 누구든지 분명히 종착점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준비하는 습관만 있으면 그것 때문에 동력을 얻고 인생의 종점이 와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인생의 종착점이 이르기 전에 내가 낳은 자녀들이 경건한 가정을 이루어 제대로 모든 생활을 잘 감당하고 후손들을 잘 키우면 그것으로 감사해야 한다. 정말 인생은 아름답고 만족스럽다고 할 때 머릿속의 행복감과 뿌듯한 가슴속의 기쁨은 그 속도감이 매우 빨라 그야말로 잠간이라는 사실이다. 노년에 감사의 나날로 일상을 보낼 시기가 되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하루하루가 엄청난 속도감으로 비명을 지를 정도다. 이제 곧 마지막이 올 것이라는 느낌마저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소위 종점이란 다 마무리하고 그 단계에서는 마지막의 시간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마지막에 이르기 전에 참 좋은 날이 많아 행복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기억하고 싶은 모든 순간은 예쁜 모래를 가득 채운 모래시계처럼 계속 유지하고 싶지만 잠간이면 모두 흘려 내리고 만다. 그것을 허무로 돌릴 것이 아니라 슈베르트처럼 인생의 종점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인생의 마지막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일에 임하면 불안감이나 두려움이 없어질 것이다. 마지막을 시작처럼, 그 시작을 마지막처럼 생각하고 살면 나의 존재감이 더욱 두드려지게 나타나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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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종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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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흩어진 광야교회 (벧전1:1-12)
- ‘신이 보낸 사람’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북한에서 신앙을 지키는 성도들의 처절한 실상과 무자비한 북한의 인권 실태를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출연진들이 다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배우들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이 영화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UN과 영국 국회에서도 상영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재하는 50여 개국 대사관 관계자들과 외신 기자들을 초청해서 상영이 되기도 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 놓고 하는 것입니다. 깜깜한 동굴 속에 숨어서 예배하는 모습과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죽여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그 성도들의 애절한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에 큰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렇게 신앙을 지키다가 발각이 되어서 잔인하게 고문을 당하고 공개 처형을 당하는 장면을 보면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열심을 다하지 못하는 우리를 너무 부끄럽게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은 목숨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신데 반드시 그들의 애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앞으로 평화적인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것인데 그것은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 된 결과일 것입니다. 성경에 이르시기를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 있으면 반드시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사6:13) 고난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지키는 그들이 북한 땅에 그루터기들입니다. 로마제국의 엄청난 박해를 피하여 광야로 흩어진 가운데서 신앙을 지킨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그들을 일컬어서 흩어진 광야교회라고 합니다. 첫째로, 그들은 믿음으로 고난을 이겨낸 교회입니다.(벧전1:1-2) 둘째로, 그들은 하늘에 산 소망을 간직한 교회입니다.(벧전1:3-4) 셋째로, 그들은 금보다 귀한 믿음을 가진 교회입니다.(벧전1:6,7) 우리도 그런 믿음을 간직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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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흩어진 광야교회 (벧전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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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 우리나라 가훈(家訓)에서 제일 많은 것 중의 하나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일 것이다. 즉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되어간다는 뜻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화목(和睦)은 개인과 가정 그리고 사회에서 최고의 덕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예수님 역시 예물보다 우선시되는 것은 화목이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5:24)에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특히 중국은 예로부터 화(和)를 인간관계에서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논어(論語)에 ‘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말이 있다. 군자는 사람과 화합하는 것이지 뇌동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타인과 진실로서 화목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맹자(孟子)에도 ‘하늘의 별은 땅의 이(利)에 미치지 못하고, 땅의 이(利)는 화(和)에 미치지 못 한다’고 했다. 또한 중용(中庸)에는 ‘화이부류(和而不流)’라 곧 <모든 사람과 조화를 갖는다는 것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 가는 것은 아니다>는 의미이다. 인간사회도 자신의 활동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 밖의 어떤 다른 힘과의 조화 때문에 움직이고 있음을 모른다. 곧 인간 사회는 이 자신에의 집착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으며, 항상 어떤 관계 이상의 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승패가 중요한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도, 아무리 전승에의 좋은 기회를 잡았다 해도 사람의 화(和)만은 못하다고까지 생각했다. 오자(吳字)는 ‘싸움에 이써 화(和)한 것보다 더 이기는 것이 없다’ 하였고, ‘도를 얻은 왕자는 그 백성을 다스리는데 먼저 화하고, 그 후에 큰일을 이룬다’고 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화를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설득을 아주 중요시 여긴다. 중국인은 무슨 일이든지 설득을 하려 한다. 중국인들은 오른쪽을 가리키며, 오른쪽으로 가라 한다 해서 모두가 그에 따르는 법은 없다. 왜 오른쪽으로 가는가 잘 설명을 듣고 납득하지 않고는 안 간다. ‘호떡 집에 불 난 것 같다’는 속담도 중국인이 말이 많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의 명장 이시송(李始松)은 ‘궁적물추(窮寂勿追)’의 전력으로 유명한데 이는 ‘너무 몰아붙이면 오히려 반항심 때문에 세력이 커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도망가는 왜군을 다 섬멸하기보다 공격을 중지하고, 성 밖으로 적군을 철수시키고, 적이 도망갈 길을 터주었다. 그렇다면 화목(和睦)에 대한 성경은 가르침은 어떠한가? 성경도 화목하기가 정말 어렵다고 인정하고 있다. (잠언18:19)에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 라고 말씀한다. 사도 바울에 화목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로마서12:18)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라고 말씀한다. 그럼 화목에 대한 예수님의 지혜를 들어보자. (마가복음9:50)에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는 소금을 ‘청결’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예로부터 이 세상에서 소금보다 청결한 물건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소금은 두 개의 가장 깨끗한 것, 즉 ‘태양과 바다’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소금이 비추는 흰 색깔 그 자체가 청결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깨끗하게 하는 힘을 가져라. 이기심, 비통, 분노, 질투로부터 깨끗함을 받아라.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너희는 이웃과 화목할 수 있다’ 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부터 깨끗함을 받아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면 다른 사람들과 진실한 교제 안에서 살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화목’을 강조하실 수 있는 것은 본인이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로마서3:25)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라고 말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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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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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들: 세시풍속인 동지(冬至)도 불교적 용어인가?
- 1. 서언(序言) 불교 용어나 불교적 사고와 철학과 의식, 그리고 문화가 우리의 생활 속에 내면화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의 많은 기고에서 논한 대로 이는 동아시아를 포함한 우리 한국에 근 2천 년 동안 삶의 신앙과 철학으로 불교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결국 우리 고유의 세시풍속 속에서도 그대로 뿌리내렸으며 일상 언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세시풍속 중에 오는 22일(월)은 오랜 전통을 가진 동지(冬至)이다. 이에 동지의 유래와 팥죽을 끓여 먹는 풍속 등을 살펴보고 불교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논하고자 한다. 2. 동지란 어떤 세시풍속인가? 1) 24절기와 동지는 무엇인가? : (1) 24절기: 기원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 등의 동아시아 지역과 우리나라가 주로 행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1년을 24절기로 나누며, 주로 계절의 변화를 세분화한 것으로 약 15일 간격으로 나눈다. 주로 계절의 변화와 농사 시기를 알려주는 농사력(農事曆) 역할을 한다. 또한 이 절기들은 태양력에 기초하지만, 양력과 음력의 차이에 따라 날짜가 달라지기도 한다. (2) 동지: 이는 24절기 중 22번째 절기이며, 일 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기 때문에 음기(陰氣)가 가장 높다고 보지만, 낮이 다시 길어지면서 양기(陽氣)가 시작되기 때문에 좋은 날로 여기고 있다. 또한 이때는 태양이 적도 이남 23.5도의 동지선(남회귀선), 곧 황경(黃經) 270도의 위치일 때로, 주로 양력 12월 22일이나 23일경이 된다. 또한 양력으로 동지가 음력 동짓달 초순에 들면 애동지(兒冬至), 중순이면 중동지(中冬至), 그믐 무렵이면 노동지(老冬至)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려시대에는 9대 명절의 하나로 지켰으며, 조선시대와 민간에서는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라 하여 작은설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태양이 부활한다는 큰 의미가 있어서 설을 앞둔 작은설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동지 때 팥죽을 먹어야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라는 동지첨치(冬至添齒)의 풍속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이날은 날씨가 춥고 밤이 길어서 호랑이가 교미한다고 하여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도 한다. 2) 동지에는 왜 팥죽을 끓여 먹는가? : 이때는 팥으로 죽을 쑤고, 찹쌀로 새알만 한 단자를 만들어 넣어 끓인다. 팥죽이 완성되면 먼저 사당에 올려 천신의 뜻을 기리며 동지고사(冬至告祀)를 지낸다. 그다음 집안의 악귀를 다 쫓아낸다는 의미에서 각 방과 장독, 헛간 같은 집안의 여러 곳에 놓아두었다가 식은 다음에 식구들이 모여서 먹는다. 그리고 악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팥죽을 대문이나 문 근처의 벽에 뿌려 놓는다. 이는 모두 주술 행위로서 기독교 신앙과는 배치되는 일이다. 또한 동지가 음력 11월 10일 안에 들면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애동지라 하여 팥죽을 먹지 않으며, 가족이 괴질로 죽어도 팥죽을 먹지 않는다. 3. 불교에서 동지 팥죽의 유래 불교에서는 동짓날의 전야와 다음 날을 중요시 여긴다. 이때는 연말연시를 맞아 젊은 승려들이 스승 승려들을 찾아가 한 해 동안의 지도를 감사하는 날로 여겼고, 세 가지 재난을 물리치는 동지불공을 올렸다. 이는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음에 있어서 잡귀와 재앙을 멀리하고 참회하며 복을 구하는 행위이다. 또한 승려들은 사찰을 찾아오는 이들이나 동지불공을 하는 불자들에게 팥죽을 제공하였고, 입고 있던 헌 옷을 태우면서 액을 소멸하고 새해 복을 기원하는 의미인 소대의식(燒臺儀式)을 행한다. 또한 불자들은 불공이 끝난 후에는 절에서 팥죽을 가져와 이웃과 나누어 먹으면서 건강과 안녕을 발원한다. 4. 기독교적 관점과 제언 먼저 지금의 동지는 과거의 동짓날 제사나 대문에 팥죽을 뿌리는 의식 등은 거의 사라졌지만, 팥죽을 끓여 먹는 일이나 절에서 동지불공을 하는 행위는 계속되고 있다. 그다음 동지의 유래는 불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민간신앙과 주술적 신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하지만 동지의 세시풍속을 그들의 가치와 의미를 포함시킴으로써 불교적 행사로 승화되었다. 이는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의미를 둘 수 있지만, 주술 행위가 내포되어 있는 동지의 풍속까지 받아들여 기복적인 동지불공을 공식적으로 행함으로써 불교의 변질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우리 기독인들은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될 것인가? 앞에서 기술한 대로 동지의 기원은 태양숭배와 농경생활에 도움을 얻으려는 우상숭배와 주술적인 신앙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무관한 절기이다. 하지만 현재는 팥죽을 먹는 수준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에 크게 거부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불교의 절기라고 할 정도로 사찰에서는 동지제례가 구체화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동지는 한국의 전통문화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주술적이거나 잘못된 불교화된 우상문화는 절대 금기하며 조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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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들: 세시풍속인 동지(冬至)도 불교적 용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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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빛 안에 있기에 보려고 하면 보인다.
-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더 빛에 거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법 안에 들어오면 빛이다. 불을 켜면 그 밝기 안에 있게 되듯이 우리는 그 생명의 빛 안에 그냥 살게 되었다. 그냥 그 밝기 속에 사는 것이다. 아무리 어두움을 빛 안으로 밀어 넣어도 빛의 밝기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빛 안에 있다는 말은 무엇을 했기 때문에 점점 더 맑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빛 안에 우리는 있다. 우리는 빛 자체다. 물론 우리 자신이 빛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빛이신데 그 분이 우리 안에, 우리가 그 분 안에 있게 되어 하나가 되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장20절) 우리가 빛 안에 있음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어두움은 빛 안으로 절대 들어 올 수 없다. 이것은 어둠을 이기는 놀라운 능력이다. 어둠을 이기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빛 안에 있을 알고 눈만 뜨면 모든 것이 보인다. 아무리 큰 어두움이 빛 안으로 들어온다 해도 빛의 밝기는 변하지 않는다. 빛이 없어질 때 어두워지는 것이지 어두움이 빛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어두움은 빛 안에서는 존재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빛이고, 빛 안에 있다. 우리는 본래 빛이 아니었다. 그런데 빛이 우리에게 임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머리 위에 임했다. 자고 일어나서 기도를 열심히 하고 나야 빛이 임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이 아니다. 자고 일어나마말자 빛은 당신 머리 위에 항상 있었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당신 머리 위에 머물러 있다. 그러기에 일어나 빛을 발하기만 하면 된다. 빛이 있으면 저절로 빛나는 것이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사야 60장1절) 우리의 빛은 완벽하게 밝은 빛이다. 꺼질 수 없는 영원한 빛이다. 빛 안에 있으면 빛의 영향력 안에 있는 것이다. 어두움은 빛에 영향을 줄 수 없다. 당신은 어둠의 영향을 받을 수 없는 당신은 빛임을 확신하라. 빛 안에 있는 자는 보려고 하면 보인다. 가려고 하면 자유롭게 갈 수가 있다. 예수님의 빛 안에 있는 자는 빛을 더 받을 필요가 없다. 다른 빛을 더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은 내가 무엇을 더 받거나 무엇을 해아서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것이다. 바울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생명의 힘을 더 받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생명의 힘 안에 있다. 전에는 우리도 어두움이었다. 어두움 안에 있을 때는 그냥 어두움 그 자체였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칠흑같이 깜깜한 어두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빛 안에 있는 빛이다. 세상에 빛이 없다는 말, 정말 어둡다는 말은 영적으로 빛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보려고 노력한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 갈 수도 없다. 우리가 이런 어두움 가운데 살았는데, 빛의 사람으로 바뀌었다.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졌다. 우리는 생명이 있다. 우리는 생명이다. 생명이 있고 없음의 차이를 아는가? 병원에서 생명이 있을 때와 없을 때는 완전히 다르다. 생명이 딱 떨어지면 모든 것을 멈춘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빛 안에선 자유가 있다. 빛 안에선 하나님 나라를 본다. 빛 안에선 하나님나라 안에 있다. 이제 빛 안에 있는 우리를 개발해야 한다. 빛 안에 있는 우리를 인정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워가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육체로 보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린도후서 5장16절) 당신이 빛임을 확신하라. 스스로 빛이 되려고 하는 산소마스크를 벗어라. 우리는 빛이다. 우리의 빛을 적극적으로 개발한다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빛 안에서는 보려고 하면 보인다. 눈을 떠라. 지금을 보고 미래를 보아라. 우리는 빛이기 때문에 갈 곳을 미리 보는 자다. 이제 답답하고 제한하던 마스크를 벗어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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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빛 안에 있기에 보려고 하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