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연월일 2026-04-2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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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욜로(YOLO)’의 시대를 넘어, 부활의 참된 소망으로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욜로(YOLO)’라는 말이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이 말은 “인생은 한 번뿐이니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며 살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 땅의 삶이 전부인 양, 오늘을 마음껏 소비하고 즐기라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길어진 100세 시대라 할지라도 지나고 보면 인생은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날아가는 화살과 같이 쏜살같이 흘러갑니다. 만약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이 땅의 삶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면 그 짧은 여정의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지독한 허무와 공허 그리고 죽음 앞의 우울함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인 ‘부활’은 이 허무한 인생의 마침표를 영원한 생명의 쉼표로 바꾸어 놓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겨울이 되어 얼어붙었던 가지에 봄이 되면 다시 잎새가 싹트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영원한 삶이 예비되어 있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단지 죽음 이후의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는 강력한 원동력입니다. 슬픔을 사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 릴런드 스탠퍼드는 수재였던 외아들을 갑자기 잃고 극도의 슬픔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으니 저 대신 세상의 청년들을 도와주세요”라는 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그의 인생관은 완전히 바뀝니다. 아들이 천국에 살아있다는 부활의 소망을 품게 된 그는 당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헌납해 오늘날의 명문 스탠퍼드 대학을 세웠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개인의 절망을 넘어 수많은 젊은이를 살리는 위대한 헌신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어느 호스피스 병동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젊은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 남긴 편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가, 엄마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향해 가는 문이란다. 기나긴 겨울을 이기고 봄에 피어나는 저 꽃들처럼 우리도 눈물 없는 그곳에서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이처럼 부활의 소망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위대한 사랑과 용기를 현재의 삶 속에 불어넣습니다. 성경은 부활한 우리가 누릴 미래에 대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라고 약속합니다. 부활은 눈물도 사망도 애통함도 없는 완벽하고 행복한 삶이 열리는 기적입니다. 이 땅의 쾌락만을 좇는 ‘욜로’의 허무함을 넘어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가는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2026년 부활절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참된 기쁨과 미래에 대한 찬란한 소망이 상처받고 지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가득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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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8
  • [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부활절을 맞이하는 믿음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세번의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ㅡ.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신 후 처음의 사람에게 1.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창1;28 하나님이 아닌 존재인 뱀이 처음의 사람에게 찾아와 그들의 욕구를 채우도록하고 뱀의 사상을 따르게 한 후..세상은 어둡게 변해 버렸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2.정녕 죽으리라..ㅡ창2;17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찌니라,ㅡ창3;19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고, 밭은 소출을 내지 않고 행복했던 가정에 행복은 간 곳 없고, 형이 동생을 해하고 장례를 치르고 부부는 갈등을 겪고,,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한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 지금도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고, 영생의 나라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 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ㅡ 요11;25-2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시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주시고 ㅡ무덤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십니다.ㅡ요528. 죽음으로 가는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ㅡ 요3;16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의 댓가를 치르고서야 우리 믿는 자들이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ㅡ그가 찔리고 그가 상하고 그가 징계를 받고, 그가 체찍에 맞음은 우리 허물과 죄와 불안과 걱정과 공포, 병 때문인 것을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ㅡ사53;5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하셨고. 사53;6.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들의 저주가 그를 믿음으로 물러가는 복된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3;13-14 이 말씀이 부활절을 맞이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힘이 되고 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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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전서 1:3) 할렐루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온 마음 다해 찬양합니다. 2026년의 봄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에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이웃들의 삶 위에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죽음의 권세도 이길 수 있다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처럼 온 세상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경제적인 어려움들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빈 무덤의 승리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과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거룩한 백성된 우리는 생명의 부활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이번 부활절을 시작으로 경남 지역 구석구석에 산 소망을 전하는 통로로 소외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무너진 마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 부활의 아침은 어둠이 지나고 반드시 빛이 온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자 확증입니다. 비록 현실의 고난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지라도,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신뢰하고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갈등이 있는 곳에 화해를 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다시 한번 우리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이 기쁜 소식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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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통영기연 곽만섭 목사
    사랑하는 경남신문 독자들과 경남 성도들께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아침에 선 교회와 성도들이 이 놀라운 생명의 복음을 다시 붙들며, 믿음 가운데 새 힘을 얻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나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의 상황은 여전히 우리를 흔들지만, 주님께서 살아계신 한 교회는 무너지지 않으며 우리의 믿음 또한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능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위에 부활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여, 각 가정과 삶의 자리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일상 속에서 부활의 기쁨이 실제가 되어, 지친 마음을 회복시키고 서로를 위로하는 은혜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역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흘려보내며, 말과 삶으로 복음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작은 섬김과 나눔이 모여 이웃에게는 위로가 되고, 사회에는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어둠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의 은혜로 날마다 새 힘을 얻고, 기쁨으로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여러분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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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창녕기연 안덕수 목사
    부활에 아침에 고백할 승리의 고백 매해 맞이하는 부활절인데 올해는 더욱더 그 의미가 깊이 다가온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의 한말씀, 다이루었다(요19:30)는 말씀이 마음속에서 계속 울린다. 모든것을 하나님께맡기시고, 다 이루심의 완성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그분의 마지막은 승리와 완성의 선언이셨다. “다 이루었다.”이 한마디에는 완전한 지불의 선언이다. 예수는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값을 하나하나 치르셨다. 낮은 땅에 오심, 모욕과 조롱, 가시 면류관, 십자가의 고통까지 치르시면서 그 모든 과정은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는 길이었다. 이때 휘장이 갈라지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무너졌다.죄로 인해 닫혀 있던 길이 열렸고, 하나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다가오시는 분이 되셨다.어쩌면 우리는 이 장면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두 팔을 벌리사 안아주신 사건이다. “이제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 십자가는 단지 고난의 상징에서 용서와 초대의 상징이 된것이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고백은 죽음을 앞둔 체념이 아니다.사명을 완수한 자의 평안이며, 전적인 신뢰의 표현이다. 우리는 흔히 ‘안식’을 쉼으로 이해한다.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안식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인간은 여섯 날 동안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안식일은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날이라는 것이다.이 통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우리는 끊임없이 계획하고, 통제하려 하며, 결과를 붙잡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커진다.그러나 예수의 마지막 고백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준다. “맡겨라.”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괴로움과 눈물의 시간이 찾아올 때, 심지어 과거의 상처와 실패까지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안식을 경험한다. 부활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승리의 선언을 한다. 십자가는 겉으로 보면 패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죄와 죽음을 이긴 승리가 담겨 있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말한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따라서 믿음의 삶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삶.붙잡으려 하기보다 의탁하는 삶.그리고 그 고백은 매주 예배 속에서, 또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반복되어야 한다. 내 삶을 주께 맡김을 통해 신앙은 완성되어 간다. 참된 안식과 승리를 경험하게 되기실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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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진해기연 정용기 목사
    사랑하는 진해와 경남 지역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우리의 믿음의 핵심으로서, 절망 가운데 있는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소망입니다.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현재의 능력이며, 미래를 향한 확실한 약속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고난과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시대는 세계 각국의 이기주의와 전쟁의 소식, 경제적 어려움과 이념의 대립, 빈부와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각자의 삶에 놓인 무거운 짐들로 인해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려움 속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평강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지역사회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부활 신앙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생명을 받은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 희망을, 상처의 자리에 치유를, 분열의 자리에 화해를 이루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진해와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가 한마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나누며 이 땅 가운데 생명의 복음을 더욱 힘있게 전하는 증인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6년 부활절 진해기독교연합회 회장 정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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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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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총장]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성탄
    탄자니아에서 맞는 성탄은 한국이나 서구에서 경험하는 성탄과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눈 내리는 겨울도 없고, 벽난로도 없고, 진한 핫초코를 마시며 캐럴을 듣는 풍경도 없다. 대신 뜨거운 햇살과 붉은 흙, 해풍이 스치는 코코넛나무들, 먼지 날리는 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아이들의 웃음이 성탄의 배경이 된다. 계절은 여름이고 기온은 높지만, 이 땅의 성탄은 놀라울 정도로 따뜻하고 깊다. 그 이유는 성탄을 구성하는 중심이 문화적 장식이나 상업적 분위기가 아니라 공동체와 생명, 그리고 은혜이기 때문이다. 탄자니아의 교회들은 12월이 되면 더욱 분주해진다.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꺼내 입고 한 해 동안 받은 은혜를 되돌아보며 감사의 찬송을 준비한다. 찬양대가 부르는 캐럴은 서구 전통과 다르다. 북과 춤, 손뼉과 화음이 어우러지며 마치 성탄의 기쁨이 온몸으로 흘러넘치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아프리카의 리듬 속에서 ‘Immanuel – God with us’라는 복음은 단지 교리적 문장이 아니라 실제 살아 있는 현실로 느껴진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이곳 사람들은 삶의 온도와 표정으로 고백한다. 성탄은 탄자니아 사람들에게 단순히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는 날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시고 낮고 천한 곳을 찾으시는 분이라는 메시지를 새롭게 경험하는 날이다. 이 나라의 많은 이들은 여전히 물과 전기가 부족한 채 살아가고 도로는 정비되지 못한 곳이 많으며 병원 시설이나 교육 환경도 열악하다. 그러나 바로 그 현실 한가운데서 성탄은 더 깊은 울림을 갖는다. 예수께서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이 땅의 낮고 고단한 자리들 속에서 조용히 빛을 비추고 계시다. 탄자니아의 성탄에서 인상적인 것은 나눔의 정신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선물이 되고자 하는 마음, 가지지 못한 이웃을 먼저 기억하는 공동체적 감수성은 성탄의 본래 정신을 되살린다. 가난한 이웃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길을 가다 만난 아이들에게 사탕 하나를 쥐여 주는 일상적 사랑이 성탄의 풍경을 만든다. 이곳에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말이 교회 강단 위의 문장이 아니라 삶의 현실이 되어 있다. 성탄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의 재점화다.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사람들은 성탄을 맞으며 다시 고백한다. “Mungu yu mwema / 하나님은 선하시다.” 성탄은 눈에 보이는 조건이 좋기 때문에 기뻐하는 축제가 아니라 어느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누리는 기쁨이다. 탄자니아의 성탄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탄자니아의 성탄을 경험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탄생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성탄은 화려함이 아니라 임재의 사건이며, 풍성함이 아니라 은혜의 증거이며, 배부름이 아니라 함께함의 기적이다. 붉은 흙먼지와 강렬한 햇살 아래에서 맞는 성탄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우리는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 탄자니아의 성탄은 우리를 다시 복음의 중심으로 데려간다. 인간의 힘과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보내신 그 아들의 은혜가 우리의 진짜 기쁨이라는 사실을 말없이 일깨운다. 그래서 이 땅의 성탄은 조용하지만 뜨겁고, 소박하지만 깊으며, 가난하지만 찬란하다. 하늘의 기쁨이 땅 위에서 피어나는 순간, 그것이 바로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성탄이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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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4
  • [성탄메시지-황권철 목사]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
    지구촌은 전쟁과 테러가 계속되고 대한민국 곳곳에 시민의 함성으로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올해도 조용히 낮은 곳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주님의 성육신하신 성탄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자를 작게 만드셨다(God makes him small)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추운 겨울밤 남의 집 구유를 빌려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성탄은 힘들고 어려운 이웃의 낮은 곳으로 찾아가는 날입니다. 주님은 천한 목수 집안으로 오셨습니다. 작고 힘없는 식민지 나라에 오셨습니다. 도성인신(道成人神, INCANATION), 인(IN) 카로(CARO)란 육신 안에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말입니다. 전능한 하나님이 친히 육신의 옷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변에 헐벗고 굶주리고 지체가 부자유한 낮은 자의 손을 잡아 주는 성탄절이 되길 바랍니다. 그 예수님을 소유할 때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분은 높은 곳이 아닌 낮은 곳으로 오셨고, 겉으로 치장하는 회칠한 무덤이 아닌 보이지 않은 중심을 보는 분입니다. 그분은 온 인류가 걸어갈 길요 진리요 생명 되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류 역사의 중심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간성을 회복시켜 남녀 간의 성차별을 없애주셨고,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혈통적인 차별을 허물고, 계층 간의 지위 고하 신분의 차별을 없애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간의 가로막힌 죄악의 담을 완전히 허물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부릅니다. 이는 예수란 그 이름이 우리에게 메시지입니다. 예수란 자연적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명적 이름 그리스도란 우리의 제사장이 되어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친히 담당해 주셨고, 사망 권세를 정복하여 부활하심으로 만왕의 왕이 되셨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길을 가르쳐 주신 선지자가 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이 한해에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임마누엘로 찾아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고 할 때 임(함께), 마누(우리와), 그리고 엘(하나님), 즉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함이요, 혹은 장막을 친다는 의미입니다. 이번 성탄에 꼭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는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위대한 발견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믿음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능력은 예수의 영인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음입니다. 경남기독신문을 애독하시는 모든 분에게 이번 성탄과 다가오는 새해에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가정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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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4
  • [독자기고] 국내전도위원회를 해산하라(4)
    5. 개혁주의 선배들:총회는 시대를 분별하고 교회의 상태를 판단해야 합니다. 성경이 교회가 시대를 분별해야 함을 가르친다면, 개혁주의 전통은 그 원리를 제도적으로구현하였습니다.장로교 정치의 핵심 정신은 단순히 회의를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총회가 시대적 위기와 교회의 필요를 분석하고 교단 전체를 이끌 전략적 결정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고신 교단이 직면한 문제는 단순히 실용적 실패가 아닙니다.이는 개혁주의 교회 정치의 근본정신에서 벗어난 심각한 정체성의 이탈입니다. 아래 인용문들은 장로교 전통의 가장 중요한 문헌들이 총회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A. 존 녹스(John Knox) – 1560년 『제1치리서(First Book of Discipline)』 존 녹스와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자들은 총회를 단순한 행정 기구로 보지 않았습니다.그들은 총회를 교회의 영적·전략적 중추로 이해했습니다. 인용문: “총회는 교회의 상태를 살피며, 전체 교회의 순결과 연합을 지키기 위하여 필요한 일들을 심의해야 한다.”— First Book of Discipline, Head VII (1560), John Knox 외 여기서 두 가지 핵심 명령이 나옵니다. “교회의 상태를 살피며”(consult upon the state of the Kirk) → 인구 변화, 문화 변화, 사회적 위기 등 실제 상황을 분석하라는 뜻입니다. “필요한 일들을 심의하라”(deliberate upon things expedient) → 즉, 전략적 판단과 실행 방안을 마련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고신총회가 한국 교회의 위기와 인구 붕괴 상황을 평가하지 않는다면,이는 존 녹스가 말한 “총회의 본질적 의무”를 외면하는 것이 됩니다. B. 『제2치리서(Second Book of Discipline)』(1578) – 시대를 분별하라 스코틀랜드 장로교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 중 하나인 『제2치리서』는 총회의 책임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인용문: “총회는 각 지역 교회와 노회들 가운데 누락되었거나 잘못된 것을 처리하고 바로잡으며, 시대를 슬기롭게 분별하고 사탄의 역사와 교회의 필요를 판단해야 한다.”— Second Book of Discipline, Chapter 7 (1578) 여기서 특히 중요한 문구는 다음입니다. “시대를 슬기롭게 분별하며”(discern wisely the times) → demographic collapse, secularization, youth apostasy 등 시대적 변화에 대한 평가를 의미합니다. “교회의 필요를 판단하며”(necessities of the Kirk) → 지금 교회가 실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석하라는 명령입니다. 만약 오늘 한국 사회가 인구 붕괴, 고령화, 교세 감소라는 위기를 겪고 있다면,총회는 이 문헌에 따라 반드시 방향 전환과 재평가를 해야 합니다. C. 조지 질스피(George Gillespie, 1646) – 총회는 ‘시대의 위험’을 살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 중 하나였던 조지 질스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용문: “교회의 최고 치리회는 시대의 위험을 관찰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협하는 병에 대한 적절한 치료책을 제시해야 한다.”— George Gillespie, Aaron’s Rod Blossoming(1646) 즉, 총회는: 시대가 교회에 어떤 위험을 주는지 분석해야 하고 그 위험을 치료할 구체적 처방을 제시해야 한다. 오늘 한국 교회의 위험은 명백합니다. 출생률 최하 청년 불신앙 목회자 고령화 교회 과포화 개척의 남발 교회 간 ‘빼오기’로 인한 약화 이 시대에 총회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질스피의 기준에서 “총회가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습니다. D. 새뮤얼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1644) – ‘시대를 위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러더포드는 장로교 정치의 기초를 세운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총회의 본질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용문: “총회는 교회의 전체 상태를 판단하고, 시대에 맞는 방향을 제시하며, 현재의 필요에 따라 적절한 질서를 정해야 한다.”— Samuel Rutherford, The Due Right of Presbyteries(1644) 여기에서 우리는 총회의 3대 핵심 책임을 다시 확인합니다. “교회의 전체 상태를 판단하라” → 지금 한국 교회가 어떤 상태인지 총회가 분석해야 합니다. “시대에 맞는 방향을 제시하라”(direction for the times) → 오늘 시대에 맞는 전략을 제시하라는 뜻입니다. “현재의 필요에 맞는 질서를 세우라”(present necessity) → 예: 교회 개척이 아니라, 교회 통합/강화 전략. 러더포드는 오늘 고신총회가 해야 할 말을 이미 400년 전에 말해 놓았습니다. E. 웨스트민스터 총회(1645) – “여러 시대를 위하여” 판단하라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중 『교회정치 형태』는 총회의 역할을 이렇게 규정합니다. 인용문: “총회(혹은 회의)는 신앙의 논쟁, 양심의 문제, 실제적 사안에 대하여, 여러 시대(divers ages)의 교회를 위하여 조언하고 결정해야 한다.”— Westminster Assembly, Form of Presbyterial Church Government(1645) 이것은 명확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교회는 모든 시대에 같은 전략을 사용할 수 없다. 시대가 바뀌면 총회도 ‘지금 시대의 필요’를 따라 판단해야 한다. 오늘 고신총회에 이 문장을 적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70–90년대에 효과적이었던 교회 개척 전략을 2025년에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정신에 반한다.” F. 결론: 총회가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에서의 탈선입니다. 개혁주의 전통 전체를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총회는 교회의 상태를 분석해야 하고(녹스) 시대를 분별해야 하며(제2치리서) 시대의 위험을 평가해야 하고(질스피) 시대에 맞는 방향을 제시해야 하며(러더포드) 시대마다 다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웨스트민스터) 즉, “교회 개척을 무조건적으로 계속하는 것”은 개혁주의가 아닙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전략을 재구성하는 것”이 개혁주의입니다. 고신총회가 현재의 방향을 계속 유지한다면,이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멀어지는 것이며,한국 교회의 현실을 무시한 위험한 신학적·전략적 맹목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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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3
  • [박동철 장로] 동북아 신냉전, 오직 복음만이 이길 수 있다
    신라가 3국 통일을 이루고 천년 역사를 이을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다. 그것은 나라의 큰 정신적 기반이 되었던 화랑정신과 정치적 화백제도이다. 화랑정신은 어릴 때 건강한 인격을 기르고 선공후사의 국가관을 다음 세대로 이어왔다. 화랑정신은 충효와 애국, 살생 금지 등 청소년기 최고의 인격을 위한 율법, ‘화랑도 훈련’을 받게 한 데서 나왔다. 이것이 튼튼한 나라 기반이 된 것이다. 어쩜 성경 속의 십계명을 보는 듯 사람이 지켜야 할 계명 훈련이 뚜렷했다. 3국 통일의 주역 김유신 또한 화랑 출신이다. 화백제도는 진골 중심의 왕족·귀족들이 정책 결정에 만장일치의 민주적 절차를 밟게 함으로써 권력을 견제해 왔다. 이 때문에 전술과 전략이 뛰어난 김춘추, 김유신, 문무왕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지도자가 되었고, 3국 통일 이후 나당전쟁까지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왜구의 끊임없는 침략과 노략질에도 한반도를 지킬 수 있었다. 근현대에 와서 조선 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쳐 왔던 거친 역사도 이에 오버랩된다. 근세에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사회주의의 첨예한 냉전이 싹이 텄다. 일제 36년의 비운의 역사가 있었지만, 해방 후 이어지는 미·중·러의 각축 속에서 다시 한번 나라가 백척간두에 있었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공산 세력을 이기고 자유민주주의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등 걸출한 선각자들이 돋보였다. 이어진 박정희 군사혁명 정권의 강한 경제 성장 정책과 이병철, 정주영 같은 철저한 기업가 정신을 가진 인물들이 오늘의 세계 속 대한민국을 이루어 냈다. 공과를 두고 찬반의 갈등은 있다. 그러나 경제 중심 사회로 급변한 세계 속에서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이들이 주역임을 부인하겠는가. 역사의 궤적을 우리는 긍정적으로 살펴야 한다. 무한 경쟁 시대에 접어든 이 시대는 또다시 신냉전 시대를 맞고 있다. 동북아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계 강대국들의 패권 전쟁이 한반도에서 진행 중이다. 세계 중심의 나라 미국이 아직 세계 경제 주도권에 있다. 중국이 그 지형을 빼앗으려는 각축과 러시아의 옛 영화를 다시 세우려는 야욕, 이러한 것들이 한반도에서 작용하고 있다. 최근 일본이 그동안 패전의 그늘에서 70여 년 오직 경제 강국만 꿈꾸어 왔던 여정을 풀고 패권 전쟁에 뛰어들고 있다. 지난 11월 7일 일본 중의원에서 신임 다카이치 총리는 대만 유사 시 일본의 존립 사태가 올 수 있다며 일본 자위대 개입 가능성을 밝혔다. 난리가 났다. 일본이 대만에 대해 금기시돼 있던 관행을 깨고 위험한 발언이 나오자 중국 외교관은 “참수당해야 할 발언”이라고 극단적인 표현을 써 가며 비판했다. 북한은 어떠한가. 이제 ‘적대적 두 국가론’을 들고나오며 영구 분단으로 독재 영구 집권의 마각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 겪고 있는 동북아 지역은 곧 전쟁이 시작될 것 같은 신냉전 분위기다.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 강국이 되었고, 세계 각 나라에 첨단 무기를 수출하는 군사 강국이 되었다. 그야말로 ‘세계 속 보물섬’이 된 대한민국의 사정이 더욱 신냉전의 분위기를 일촉즉발로 몰고 갈까 걱정이다. 기독교 강국으로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하는 대한민국의 교회들은 어떠한가. 오직 복음 통일을 꿈꾸고 있다.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극동 지역 선교에 애쓰고 있다. 작은 나라에서 두 번째로 선교사를 세계 각국에 파송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복음의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나라의 위기 상태에 대한 감각이 약해져 간다. 신냉전 시대 주변국들의 교회 핍박은 심해지고 있다. 중국은 여전히 교회와 예배를 통제하고 있고, 북한은 많은 선교사들을 억류해 놓고 예배를 방해하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복음의 행진에 변함이 있겠는가. 한 생명, 한 생명 영혼 구원에도 눈물의 기도와 도전이 필요하다. 구국의 대열에 참여할 화랑도 같은 다음 세대 훈련이 강해져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 교회에서 새로운 복음 운동으로 일어나야 할 것이다. 자유 방임적 문화의 물결이 지금 대한민국 땅에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복음 통일을 위해 한국교회가 깨어나야 할 것이다. 시편 146편에 “여호와는 나라를 영원히 다스리시며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여호와는 약한 자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을 굽게 하시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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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2
  • [독자기고] 국내전도위원회를 해산하라(3)
    4. 성경이 요구하는 교회의 시대적 분별과 전략적 판단 교회가 전략을 세우는 문제는 단순한 행정이나 프로그램 차원의 논의가 아닙니다.이는 성경적 순종의 문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영적 책임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결정하고 움직여야 하는지 명확하고 일관된 원리를 제시합니다.그 핵심은 바로 “시대를 분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는 것”입니다. 아래는 고신총회가 반드시 붙들어야 할 성경적 근거들입니다. A. 사도행전 15장 — 예루살렘 공의회는 ‘총회적 전략 판단’의 성경적 모델입니다. 사도행전 15장은 초대교회가 첫 번째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줍니다.당시 교회는 이방인 선교의 확산으로 인해 교리적 혼란과 내부적 분열 가능성이 생겼습니다.이 문제는 개별 교회가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였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사도행전 15:6) 이 모임은 단순한 토론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진로를 결정하는 회의체였습니다. 그들은 다음을 행했습니다 : -상황을 분석하고(위기 진단) -성경을 해석하고(신학적 판단) -교회 전체가 따라야 할 지침을 제시하고(전략 결정) -이를 전국 교회에 시행했다(전 교회적 실행) “성령과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필수 사항 외에는 아무 부담도 주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사도행전 15:28) 그리고 그 결정은 전체 지역 교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이 되었습니다. “각 성으로 다닐 때에 … 예루살렘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사도행전 16:4) 즉, 사도행전 15장은 오늘날 장로교의 총회가 시대적 도전 속에서 전략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가장 강력한 성경적 모델입니다. 고신총회가 인구 붕괴와 교회 쇠퇴라는 시대적 위기를 평가하지 않는다면,이는 성경의 모범적 지침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B. 대상 12:32 — 잇사갈 자손: “때를 알고 이스라엘이 할 일을 아는 자들” 성경은 지도자를 평가할 때 단지 지식, 경건, 용기만을 칭찬하지 않습니다.하나님께서 특별히 높이 평가하신 것은 “시대를 분별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잇사갈 자손 중에 시대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들이 있으니”(대상 12:32) 이 구절이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 -시대적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는 능력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능력 -단순한 분석이 아니라, 실제적인 방향 제시 이것이 성경적 리더십입니다. 오늘 한국 사회의 저출산, 인구 감소, 청년 불신앙, 교회 이탈의 흐름을 보며 아무런 전략적 변화 없이 기존 방식을 반복하는 것은 잇사갈의 지혜를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C. 디도서 1:5 — “남은 일을 정리하여 각 성에 장로를 세워라” = 구조 개편의 명령 바울은 디도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라.”(딛 1:5) 여기서 “남은 일을 정리”한다는 말은 : -지역 교회들의 실제 상황을 평가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구조를 재정비하고 -현재 필요에 맞게 인력을 재배치하며 -가장 효과적인 형태로 교회를 조직하라 는 의미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은 “남은 것을 정리”해야 할 때입니다.교회를 더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교회를 정리하고 강화해야 합니다. D. 잠언 11:14 — 다수의 지도자들이 함께 판단할 때 안전 “지도가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잠 11:14) 장로교 총회는 바로 이 잠언의 원리 위에 세워진 제도입니다 : -많은 장로가 모여 -시대를 분석하고 -교회가 갈 길을 정하며 -공동의 지혜를 모아 결정하는 구조 그런데 공동의 지혜를 모으지 않고,단순히 과거의 방식을 자동 반복한다면,그 총회는 성경적 총회가 아니라 형식적 총회일 뿐입니다. E. 에베소서 4:11–13 — 교회의 지도력은 ‘연합’과 ‘성숙’을 이루기 위한 것 바울은 교회의 직분이 존재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가 되어…”(엡 4:11–13 요약) 즉, 교회의 지도력은: -교회를 하나로 모으고 -성도를 성숙하게 하며 -전체적인 구조를 강화하고 -분열이 아닌 연합을 추구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한국의 교회 개척은 연합보다 분열, 강화보다 약화, 부흥보다 재편성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F. 결론 — 성경은 ‘더 많이 세우라’가 아니라 ‘지혜롭게 판단하라’고 말한다. 성경은 명확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지도자들이 모여 문제를 논의하라.(행 15:6)시대를 분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라.(대상 12:32)남은 것을 정리하고 교회를 바로 세우라.(딛 1:5)지혜를 모아 교회를 안전하게 이끌라.(잠 11:14)교회를 하나로 모으고 강하게 하라.(엡 4:11–13) 그러므로… 급격한 인구 감소와 청년 불신앙 속에서 계속 교회를 세우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지금 고신총회가 해야 할 일은 ‘개척’이 아니라 ‘분별’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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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7
  • [하수룡 장로] 종 점
    어느 가수가 불렀던 종점이라는 노래는 오랜 시간까지 사랑을 받고 불리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개인이나 단체에 생명이나 직분에 언젠가는 꼭 오고 마는 마지막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노래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감을 준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지 모든 것이 단계 단계마다 분명히 마지막이 있어 종점이라는 말이나 노래에 관심을 갖고 이것을 자기의 처지와 형편에 견주어 보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슈베르트의 마지막 3개의 피아노 소나타는 죽음이 오기 전 두 달 전에 완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당시 불치병이던 매독이 악화되어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인생의 종점에 장기와 중추신경계가 무너져 내리는 고통 속에서도 이전에 없었던 엄청난 속도로 작품을 썼던 것이다. 그의 친구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나는 죽음을 반긴다고 했다. 그러나 고통은 두렵다고 했다.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소나타를 비롯한 여러 개의 작품들이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는 것은 슈베르트의 슬픈 장조에 늘 눈물방울이 맺혀있기 때문일까? 한없이 나약하고 헛되이 보이는 한 개인의 삶의 종점에서 그의 마지막을 끝이라 보지 않고 공포와 고통이 오히려 시작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쓴 작품들이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이라 믿어진다. 요즘 들어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자꾸만 나의 마음에 와닿아 잠간 멈칫하는 때가 간혹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새벽에 일어나 내가 자주 사용하는 물건들을 쳐다보면서 내가 없어지면 이것들은 어떻게 될까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직장을 그만 둘 때에는 그런 마음이 없었는데 30년 동안 봉사한 장로의 직을 마감하여 은퇴한 후에 나의 머릿속이 복잡했었다. 그러나 누구든지 분명히 종착점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준비하는 습관만 있으면 그것 때문에 동력을 얻고 인생의 종점이 와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인생의 종착점이 이르기 전에 내가 낳은 자녀들이 경건한 가정을 이루어 제대로 모든 생활을 잘 감당하고 후손들을 잘 키우면 그것으로 감사해야 한다. 정말 인생은 아름답고 만족스럽다고 할 때 머릿속의 행복감과 뿌듯한 가슴속의 기쁨은 그 속도감이 매우 빨라 그야말로 잠간이라는 사실이다. 노년에 감사의 나날로 일상을 보낼 시기가 되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하루하루가 엄청난 속도감으로 비명을 지를 정도다. 이제 곧 마지막이 올 것이라는 느낌마저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소위 종점이란 다 마무리하고 그 단계에서는 마지막의 시간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마지막에 이르기 전에 참 좋은 날이 많아 행복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기억하고 싶은 모든 순간은 예쁜 모래를 가득 채운 모래시계처럼 계속 유지하고 싶지만 잠간이면 모두 흘려 내리고 만다. 그것을 허무로 돌릴 것이 아니라 슈베르트처럼 인생의 종점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인생의 마지막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일에 임하면 불안감이나 두려움이 없어질 것이다. 마지막을 시작처럼, 그 시작을 마지막처럼 생각하고 살면 나의 존재감이 더욱 두드려지게 나타나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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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5-12-12
  • [조희완 목사] 흩어진 광야교회 (벧전1:1-12)
    ‘신이 보낸 사람’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북한에서 신앙을 지키는 성도들의 처절한 실상과 무자비한 북한의 인권 실태를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출연진들이 다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배우들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이 영화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UN과 영국 국회에서도 상영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재하는 50여 개국 대사관 관계자들과 외신 기자들을 초청해서 상영이 되기도 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 놓고 하는 것입니다. 깜깜한 동굴 속에 숨어서 예배하는 모습과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죽여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그 성도들의 애절한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에 큰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렇게 신앙을 지키다가 발각이 되어서 잔인하게 고문을 당하고 공개 처형을 당하는 장면을 보면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열심을 다하지 못하는 우리를 너무 부끄럽게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은 목숨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신데 반드시 그들의 애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앞으로 평화적인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것인데 그것은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 된 결과일 것입니다. 성경에 이르시기를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 있으면 반드시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사6:13) 고난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지키는 그들이 북한 땅에 그루터기들입니다. 로마제국의 엄청난 박해를 피하여 광야로 흩어진 가운데서 신앙을 지킨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그들을 일컬어서 흩어진 광야교회라고 합니다. 첫째로, 그들은 믿음으로 고난을 이겨낸 교회입니다.(벧전1:1-2) 둘째로, 그들은 하늘에 산 소망을 간직한 교회입니다.(벧전1:3-4) 셋째로, 그들은 금보다 귀한 믿음을 가진 교회입니다.(벧전1:6,7) 우리도 그런 믿음을 간직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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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5-12-12
  • [정우승 목사]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우리나라 가훈(家訓)에서 제일 많은 것 중의 하나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일 것이다. 즉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되어간다는 뜻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화목(和睦)은 개인과 가정 그리고 사회에서 최고의 덕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예수님 역시 예물보다 우선시되는 것은 화목이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5:24)에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특히 중국은 예로부터 화(和)를 인간관계에서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논어(論語)에 ‘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말이 있다. 군자는 사람과 화합하는 것이지 뇌동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타인과 진실로서 화목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맹자(孟子)에도 ‘하늘의 별은 땅의 이(利)에 미치지 못하고, 땅의 이(利)는 화(和)에 미치지 못 한다’고 했다. 또한 중용(中庸)에는 ‘화이부류(和而不流)’라 곧 <모든 사람과 조화를 갖는다는 것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 가는 것은 아니다>는 의미이다. 인간사회도 자신의 활동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 밖의 어떤 다른 힘과의 조화 때문에 움직이고 있음을 모른다. 곧 인간 사회는 이 자신에의 집착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으며, 항상 어떤 관계 이상의 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승패가 중요한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도, 아무리 전승에의 좋은 기회를 잡았다 해도 사람의 화(和)만은 못하다고까지 생각했다. 오자(吳字)는 ‘싸움에 이써 화(和)한 것보다 더 이기는 것이 없다’ 하였고, ‘도를 얻은 왕자는 그 백성을 다스리는데 먼저 화하고, 그 후에 큰일을 이룬다’고 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화를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설득을 아주 중요시 여긴다. 중국인은 무슨 일이든지 설득을 하려 한다. 중국인들은 오른쪽을 가리키며, 오른쪽으로 가라 한다 해서 모두가 그에 따르는 법은 없다. 왜 오른쪽으로 가는가 잘 설명을 듣고 납득하지 않고는 안 간다. ‘호떡 집에 불 난 것 같다’는 속담도 중국인이 말이 많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의 명장 이시송(李始松)은 ‘궁적물추(窮寂勿追)’의 전력으로 유명한데 이는 ‘너무 몰아붙이면 오히려 반항심 때문에 세력이 커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도망가는 왜군을 다 섬멸하기보다 공격을 중지하고, 성 밖으로 적군을 철수시키고, 적이 도망갈 길을 터주었다. 그렇다면 화목(和睦)에 대한 성경은 가르침은 어떠한가? 성경도 화목하기가 정말 어렵다고 인정하고 있다. (잠언18:19)에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 라고 말씀한다. 사도 바울에 화목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로마서12:18)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라고 말씀한다. 그럼 화목에 대한 예수님의 지혜를 들어보자. (마가복음9:50)에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는 소금을 ‘청결’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예로부터 이 세상에서 소금보다 청결한 물건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소금은 두 개의 가장 깨끗한 것, 즉 ‘태양과 바다’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소금이 비추는 흰 색깔 그 자체가 청결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깨끗하게 하는 힘을 가져라. 이기심, 비통, 분노, 질투로부터 깨끗함을 받아라.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너희는 이웃과 화목할 수 있다’ 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부터 깨끗함을 받아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면 다른 사람들과 진실한 교제 안에서 살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화목’을 강조하실 수 있는 것은 본인이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로마서3:25)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라고 말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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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2
  • [이정희 목사]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들: 세시풍속인 동지(冬至)도 불교적 용어인가?
    1. 서언(序言) 불교 용어나 불교적 사고와 철학과 의식, 그리고 문화가 우리의 생활 속에 내면화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의 많은 기고에서 논한 대로 이는 동아시아를 포함한 우리 한국에 근 2천 년 동안 삶의 신앙과 철학으로 불교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결국 우리 고유의 세시풍속 속에서도 그대로 뿌리내렸으며 일상 언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세시풍속 중에 오는 22일(월)은 오랜 전통을 가진 동지(冬至)이다. 이에 동지의 유래와 팥죽을 끓여 먹는 풍속 등을 살펴보고 불교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논하고자 한다. 2. 동지란 어떤 세시풍속인가? 1) 24절기와 동지는 무엇인가? : (1) 24절기: 기원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 등의 동아시아 지역과 우리나라가 주로 행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1년을 24절기로 나누며, 주로 계절의 변화를 세분화한 것으로 약 15일 간격으로 나눈다. 주로 계절의 변화와 농사 시기를 알려주는 농사력(農事曆) 역할을 한다. 또한 이 절기들은 태양력에 기초하지만, 양력과 음력의 차이에 따라 날짜가 달라지기도 한다. (2) 동지: 이는 24절기 중 22번째 절기이며, 일 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기 때문에 음기(陰氣)가 가장 높다고 보지만, 낮이 다시 길어지면서 양기(陽氣)가 시작되기 때문에 좋은 날로 여기고 있다. 또한 이때는 태양이 적도 이남 23.5도의 동지선(남회귀선), 곧 황경(黃經) 270도의 위치일 때로, 주로 양력 12월 22일이나 23일경이 된다. 또한 양력으로 동지가 음력 동짓달 초순에 들면 애동지(兒冬至), 중순이면 중동지(中冬至), 그믐 무렵이면 노동지(老冬至)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려시대에는 9대 명절의 하나로 지켰으며, 조선시대와 민간에서는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라 하여 작은설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태양이 부활한다는 큰 의미가 있어서 설을 앞둔 작은설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동지 때 팥죽을 먹어야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라는 동지첨치(冬至添齒)의 풍속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이날은 날씨가 춥고 밤이 길어서 호랑이가 교미한다고 하여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도 한다. 2) 동지에는 왜 팥죽을 끓여 먹는가? : 이때는 팥으로 죽을 쑤고, 찹쌀로 새알만 한 단자를 만들어 넣어 끓인다. 팥죽이 완성되면 먼저 사당에 올려 천신의 뜻을 기리며 동지고사(冬至告祀)를 지낸다. 그다음 집안의 악귀를 다 쫓아낸다는 의미에서 각 방과 장독, 헛간 같은 집안의 여러 곳에 놓아두었다가 식은 다음에 식구들이 모여서 먹는다. 그리고 악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팥죽을 대문이나 문 근처의 벽에 뿌려 놓는다. 이는 모두 주술 행위로서 기독교 신앙과는 배치되는 일이다. 또한 동지가 음력 11월 10일 안에 들면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애동지라 하여 팥죽을 먹지 않으며, 가족이 괴질로 죽어도 팥죽을 먹지 않는다. 3. 불교에서 동지 팥죽의 유래 불교에서는 동짓날의 전야와 다음 날을 중요시 여긴다. 이때는 연말연시를 맞아 젊은 승려들이 스승 승려들을 찾아가 한 해 동안의 지도를 감사하는 날로 여겼고, 세 가지 재난을 물리치는 동지불공을 올렸다. 이는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음에 있어서 잡귀와 재앙을 멀리하고 참회하며 복을 구하는 행위이다. 또한 승려들은 사찰을 찾아오는 이들이나 동지불공을 하는 불자들에게 팥죽을 제공하였고, 입고 있던 헌 옷을 태우면서 액을 소멸하고 새해 복을 기원하는 의미인 소대의식(燒臺儀式)을 행한다. 또한 불자들은 불공이 끝난 후에는 절에서 팥죽을 가져와 이웃과 나누어 먹으면서 건강과 안녕을 발원한다. 4. 기독교적 관점과 제언 먼저 지금의 동지는 과거의 동짓날 제사나 대문에 팥죽을 뿌리는 의식 등은 거의 사라졌지만, 팥죽을 끓여 먹는 일이나 절에서 동지불공을 하는 행위는 계속되고 있다. 그다음 동지의 유래는 불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민간신앙과 주술적 신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하지만 동지의 세시풍속을 그들의 가치와 의미를 포함시킴으로써 불교적 행사로 승화되었다. 이는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의미를 둘 수 있지만, 주술 행위가 내포되어 있는 동지의 풍속까지 받아들여 기복적인 동지불공을 공식적으로 행함으로써 불교의 변질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우리 기독인들은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될 것인가? 앞에서 기술한 대로 동지의 기원은 태양숭배와 농경생활에 도움을 얻으려는 우상숭배와 주술적인 신앙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무관한 절기이다. 하지만 현재는 팥죽을 먹는 수준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에 크게 거부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불교의 절기라고 할 정도로 사찰에서는 동지제례가 구체화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동지는 한국의 전통문화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주술적이거나 잘못된 불교화된 우상문화는 절대 금기하며 조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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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2
  • [오성한 목사] 빛 안에 있기에 보려고 하면 보인다.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더 빛에 거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법 안에 들어오면 빛이다. 불을 켜면 그 밝기 안에 있게 되듯이 우리는 그 생명의 빛 안에 그냥 살게 되었다. 그냥 그 밝기 속에 사는 것이다. 아무리 어두움을 빛 안으로 밀어 넣어도 빛의 밝기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빛 안에 있다는 말은 무엇을 했기 때문에 점점 더 맑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빛 안에 우리는 있다. 우리는 빛 자체다. 물론 우리 자신이 빛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빛이신데 그 분이 우리 안에, 우리가 그 분 안에 있게 되어 하나가 되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장20절) 우리가 빛 안에 있음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어두움은 빛 안으로 절대 들어 올 수 없다. 이것은 어둠을 이기는 놀라운 능력이다. 어둠을 이기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빛 안에 있을 알고 눈만 뜨면 모든 것이 보인다. 아무리 큰 어두움이 빛 안으로 들어온다 해도 빛의 밝기는 변하지 않는다. 빛이 없어질 때 어두워지는 것이지 어두움이 빛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어두움은 빛 안에서는 존재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빛이고, 빛 안에 있다. 우리는 본래 빛이 아니었다. 그런데 빛이 우리에게 임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머리 위에 임했다. 자고 일어나서 기도를 열심히 하고 나야 빛이 임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이 아니다. 자고 일어나마말자 빛은 당신 머리 위에 항상 있었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당신 머리 위에 머물러 있다. 그러기에 일어나 빛을 발하기만 하면 된다. 빛이 있으면 저절로 빛나는 것이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사야 60장1절) 우리의 빛은 완벽하게 밝은 빛이다. 꺼질 수 없는 영원한 빛이다. 빛 안에 있으면 빛의 영향력 안에 있는 것이다. 어두움은 빛에 영향을 줄 수 없다. 당신은 어둠의 영향을 받을 수 없는 당신은 빛임을 확신하라. 빛 안에 있는 자는 보려고 하면 보인다. 가려고 하면 자유롭게 갈 수가 있다. 예수님의 빛 안에 있는 자는 빛을 더 받을 필요가 없다. 다른 빛을 더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은 내가 무엇을 더 받거나 무엇을 해아서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것이다. 바울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생명의 힘을 더 받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생명의 힘 안에 있다. 전에는 우리도 어두움이었다. 어두움 안에 있을 때는 그냥 어두움 그 자체였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칠흑같이 깜깜한 어두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빛 안에 있는 빛이다. 세상에 빛이 없다는 말, 정말 어둡다는 말은 영적으로 빛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보려고 노력한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 갈 수도 없다. 우리가 이런 어두움 가운데 살았는데, 빛의 사람으로 바뀌었다.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졌다. 우리는 생명이 있다. 우리는 생명이다. 생명이 있고 없음의 차이를 아는가? 병원에서 생명이 있을 때와 없을 때는 완전히 다르다. 생명이 딱 떨어지면 모든 것을 멈춘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빛 안에선 자유가 있다. 빛 안에선 하나님 나라를 본다. 빛 안에선 하나님나라 안에 있다. 이제 빛 안에 있는 우리를 개발해야 한다. 빛 안에 있는 우리를 인정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워가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육체로 보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린도후서 5장16절) 당신이 빛임을 확신하라. 스스로 빛이 되려고 하는 산소마스크를 벗어라. 우리는 빛이다. 우리의 빛을 적극적으로 개발한다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빛 안에서는 보려고 하면 보인다. 눈을 떠라. 지금을 보고 미래를 보아라. 우리는 빛이기 때문에 갈 곳을 미리 보는 자다. 이제 답답하고 제한하던 마스크를 벗어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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