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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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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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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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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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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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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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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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 칼럼
    2024-02-08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6)
    관계공동체 (1) 가정과 교회 직장은 관계공동체입니다. 공동체가 주는 유익이 많습니다. 관계가 잘 되면 공동체가 성장하고 관계가 깨지면 공동체가 무너지기도 합니다. 공동체는 인간관계입니다. 공동체가 하나 되는 데는 좋은 관계에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관계를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천국은 행복한 관계공동체입니다. 공동체는 외로움을 이기게 합니다. 관계공동체는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관계공동체는 축복의 공동체입니다. 좋은 관계공동체가 되려면 서로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섬김의 공동체가 건강한 관계공동체입니다. 섬김의 리더십은 예수님의 리더십입니다. 관계공동체에 죄가 끼지 않아야 합니다. 죄가 끼면 갈등이 생기고 관계공동체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거짓과 위선이 끼면 관계공동체에서 신뢰 관계가 깨집니다. 관계공동체에서 의와 성결, 정직이 있어야 합니다. 성결과 정직은 신뢰 얻게 되어 관계공동체가 건강하게 됩니다. 관계공동체에서 언어가 중요합니다. 말 한마디 때문에 관계공동체가 세워지기도 하고 깨지기도 합니다. 서로서로 선한 말,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 정죄하고, 비난하고, 거짓말을 하면 관계공동체가 깨질 수도 있습니다. 관계공동체적인 삶에 적응해야 합니다. 관계공동체 (2) 여러 종류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구역과 기관, 소그룹과 교회가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에서 관계가 잘되어야 합니다. 관계가 깨지면 공동체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관계가 잘 되는 공동체는 성장합니다. 공동체에서 서로 좋은 관계를 맺도록 노력하고, 기도하고,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공동체의 리더는 관계의 중요성을 알고,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공동체 훈련은 관계 훈련입니다. 좋은 관계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융통성의 리더십이 있어야 합니다. 관계공동체에서는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면 안 되고 지나친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누구와도 함께 어울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관계가 소중합니다. 독불장군이 없습니다. 서로 하나 되는데 자신을 낮추고 양보해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서로 부딪치면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관계공동체의 힘은 좋은 관계에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관계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의리를 지키고 서로 섬겨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서로의 관계가 좋으면 교회에 가고 싶어지고 교회가 성장합니다. 지혜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적응하고 관계를 잘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관계 속에 살고 목회는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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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3-09-21
  • [하수룡 장로] 행 복
    핀란드는 수년 동안 여러 문화권에 걸쳐 행복과 관련한 조사에서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주로 이야기되는 것이 바로 자신의 행복을 자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밝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사회적 비교가 심하지 않고 정신적 자유도가 매우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 우리의 삶은 하루에 몇 번이고 우울해지고 고민에 빠지기도 하여 괴로워하는 것이 사실이다.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살고 있어 실제 잘 사는 것보다 남들에게 잘 사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허황된 마음이 문제가 된다. 그러면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인데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는 쉽게 단정지울 수 없다. 사람의 행복을 결정하는 수많은 조건 가운데 물론 돈도 포함된다고 보지만 행복의 절대 조건은 아니라고 본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개인의 행복은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유력한 한 방송에서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결과가 나온 것은 유의미하다. 7개국에 1인당 1만 달러를 준 무리와 주지 않은 무리에게 3개월 동안 사용하도록 한 결과 실험군이 대조군보다 행복도가 높은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온 것을 보아도 돈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신명기에 ‘네 행복을 위해’가 나오는 것을 보아도 인간은 모두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린 언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원 성취했을 때일까? 아니면 부가 쌓일 때일까? 보통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자리 잡고 있어 그 실현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께 자신의 좋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줌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려고 하는 까닭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상을 보시고 좋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말씀은 세상을 보시고 행복해하셨다고 바꿔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의 신음을 멈추게 하고 그 자리에 행복이 자리 잡게 하려 하셨다. 이스라엘이 행복에 이르게 된 것은 자연적으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세상이 상호 작용한 결과물임이 틀림없다. 이스라엘 민족이 최고의 나라로 행복하게 된 것은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분명하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오직 자기를 경외하고 그의 길을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다. 오로지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셨다.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잘 실천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인생의 최고 목표임을 알고 온전히 지킬 때 그 결과가 행복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고 삶의 한 방법임을 깨달아야 한다. 오랜 시간 동안 배우로서 세상의 행복을 다 누렸던 김수미라는 분은 세상적인 영화는 덧없음을 깨닫고 75세의 늦은 나이에 하나님의 행복에 초대를 받았다. 믿는 우리 앞에는 이미 행복의 초대장이 도착해 있다.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으로 그 말씀을 따라가는 성도가 될 때 행복할 수 있음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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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3-09-21
  • [신재철 목사] 늦은 밤까지, 교회를 떠날 수 없더라
    개척의 세팅이 어느 정도 되었다. 테이블, 책장, 조명, 음향 등. 이제 성도만 있으면 된다. 말은 쉬운데, 가장 큰 어려움이 사람 채우는 것 아닐까? 교회 안에 성도가 채워지는 세워지는 것은 내 노력, 능력, 환경으로 장담할 수 없다. 지인들에게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야근한다고 해서 부흥이 된다면 나는 일주일의 칠일을 야근했을 것이다.” 개척교회에 사람이 들고 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제 교회 외형이 갖추어졌고 난 개척교회 목사가 되었다. 멋진 선배 목사님들의 간증처럼 밤새 기도하며 이곳을 지키면 된다. 그렇다. 나는 요즘 늦은 밤까지 교회를 지키고 있다. 행정적으로 정리할 것이 많아서? 열정적인 기도로? 전문서적을 뒤적이며, 눈을 비벼가며 만드는 좋은 설교 작성으로? 아니다. 만화에 푹 빠졌다. 이 글을 쓰면서도 조금 민망하고 부끄럽다. 예배당 세팅이 끝나고 공간을 둘러보니 온통 만화책이다. 처음에는 내가 좋아하던 만화 위주로 채우다 보니 이곳은 어느덧 천국이 되어 있었다. 내가 10대 때 좋아했던 그 책, 최근에 유행하는 웹툰까지. 만화가 가득하다. 게다가 어릴 적에는 비싸서 사지도 못했던 책이 전질로 줄을 지어 서 있다. 밤이 맞도록 만화 속 주인공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즐거움을 누린다.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정주행 할까?” 개척교회 목사인 내게 두려움은 없다. 적어도 지금은. 오늘은 소년 만화, 내일은 소녀 만화, 그리고 드라마 원작인 웹툰까지. 대학부터 치열하게 달려온 나의 삶에 하나님께서 개척의 시점에 이렇게 잠시 쉼을 허락하셨다. ‘개척했는데 진짜 만화 보고 있어도 되나?’ 나를 무겁게 누르던 약간의 불편함을 외면하며 일단은 책장을 넘긴다. 늦은 밤까지, 결코 교회를 떠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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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목회 칼럼
    2023-09-21
  • [박동철 장로] 교단정치하는 목사 장로님들 경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대한민국 기독교 300여 교단이 있지만 70여개 교단 정치의 꽃이 피는 총회기간이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대부분 교단들이 9월과 10월 총회를 열고 총회장과 임원 등 총회 사역자들을 뽑는다. 그리고 1년 동안 집행할 중요 헌의안을 결정한다. 정말 하나님이 통치할 대한민국 6만 여 교회 정책을 위임받아 행하는 엄숙한 정치현장이 벌어진다. 교단마다 다르지만 3-4일 기간 동안 엄청난 의사결정과 일꾼들을 선임하는 복잡하고도 엄숙한 일정이 펼쳐진다. 필자는 몇 년 전 잠시 노회 총회총대를 맡아 참석한 경험이 있다. 세상의 정치판을 객관적 눈으로 살펴본 경험에서 곳곳을 관심 있게 취재를 해봤다. 교단 총회 기간이 한꺼번에 몰려있고 집중화해 있어 제대로의 정치 기능을 살리기 어렵다는 느낌이 많았다. 전문화하고 분산해 합리적 정치 기능을 살려야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이나 평신도일지라도 변하지 않는 소망은 성총회(聖總會)의 정치현장이 되길 기도한다. 우려 되는 것은 지역의 노회나 총회시즌에 대부분 개교회가 함께 기도 하지 않고 정치판이 열리는 점이다. 교회에서의 믿음과 교단 정치판 믿음이 따로 노는 듯 현장에 가면 듣지 말아야 하고 보지 말아야 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성(聖)총회·성(聖)노회를 위한 성찬과 기도와 예배로 시작하지만 회무의 시간에 고성과 야유 세속의 정치 문화가 그대로 재현된다. 무엇보다 교단 정치판에서 나타나는 직분에 대한 과잉 경쟁이 큰 문제이다. 그리고 있을 수 없는 선거 문화 등 예수 복음의 정치판에 돈이 횡행하고 모함과 지역 감정 등 정말 세상보다 못한 교단 정치 선거 문화가 지도자들의 심령 속에 파고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단 정치사에서 여러 영성 깊은 한국 대표적 목회자들이 교단 정치를 섬기다가 실족하거나 영성을 잃고 낙심해 버린 지도자들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각 교단 총회 시즌이 오면 깨끗한 선거를 올해 이뤄보자는 오피니언의 글들이 실리고 있다. 사람 사는 곳에 몇 사람에 불과할지라도 정치 기능이 없으면 안 된다. 개 교회는 교회대로, 노회는 노회대로, 총회는 총회대로 정치판이 열리지만 세상 정치판보다 못하다는 평가는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위임한 양떼를 돌보는 예수 복음에 생명 건 지도자들이 펼치는 정치 행태가 오늘날 교계에서 우선으로 혁신해야할 분야이다. 언젠가 목사·장로 몇 분과 연합회 모임자리에서 교단 총회 총회장의 임기 대부분 1년으로 해마다 나눠 먹기 하는데 대해 토론을 한 적이 있다. 필자는 그 자리에서 총회장에 선출되면 교회 담임을 내려놓고 4년 정도는 임기에 최선을 다해서 교단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이러한 담론이 담론으로 끝나버리는 우리 기독교 정치혁신이 한 발짝도 못나가는 아쉬움이 크지 않을 수 없다.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설교할 때 가장 많이 부르짖는 워딩(wording)이 교회 세속화에 대한 경계이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크게 강조한 설교가 바리세인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씀이다. 구원 받은 자들이 죄악과 싸우고 마귀를 대적하며 진보적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예수 앞에 성화의 몸을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신앙의 지도자들이 모본(模本)이 되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첫 현장이 교단 정치의 현장이 되어야 할 것은 불을 보듯 하다. 그런데 아직껏 교단 총회가 열릴 때마다 슬픈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간혹 세상의 언론매체에 부끄러운 장면이 보도 될 때도 있다. 올해는 대한민국 모든 교단 총회가 성총회가 되어 온 교회가 박수치는 정말 은혜의 모범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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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와 세상
    2023-09-13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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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3-09-06
  • [최호숙 목사] A.Q(Adversity Quotient-역경지수)를 높여라
    미국은 다종족 국가이다. 그렇다 보니 우월한 민족과 열등한 민족 간에 비교의식이 생기게 되었다. 여러 민족 중에 유대인들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월등히 두각을 나타내 보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조사해보니 I.Q(Inteligence Quotient-지능지수)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민족도 아이큐를 높였다. 그래도 여전히 유대인들에 비하여 열등했다. 재조사 결과 아이큐 문제가 아니라 E.Q(Emotional Quotient-감성지수)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일하게 E.Q도 높여 보았지만 여전히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전문가들의 새로운 연구결과 유대인들은 타민족에 비하여 S.Q(Spiritual Quotient-영성지수)가 높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신들의 신앙관을 가지고 영성을 키워 보았다. 그래도 유대인들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최종 결과 유대인들에게는 타민족에서 찾을 수 없는 A.Q(Adversity Quotient-역경지수)가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역경지수가 높기 때문에 성공할 확률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역경지수란 무엇인가?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폴 스톨츠(Paul G. Stoltz, 1960~ )가 만든 용어로 역경과 고난에 굴하지 않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목표를 성취하는 능력을 말한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세 가지 반응을 보이는데 첫째, 퀴터(quitter-포기하는 자)로 산에 오르다가 힘들거나 장애물을 만나면 그냥 등반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역경지수가 낮은 퀴터라 부른다. 둘째, 캠퍼(camper-안주하는 자)로 장애나 어려움을 만나면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현상 유지 정도로 적당히 안주하는 사람을 캠퍼라 부른다. 셋째는, 클라이머(climber-등반하는 자)로 역경을 만나면 자신의 모든 능력과 지혜를 동원하여 기어코 이를 이겨내려고 하는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을 말한다. 예전에 웬반 티오 월남 대통령이 한국 청와대를 방문했다가 청와대에 활짝 핀 목련화를 보고 감탄하였다. 우리 정부는 부러워하는 티오 대통령에게 목련화를 선물하였다. 티오 대통령은 기쁨으로 목련화를 받아 자신의 사저(私邸)에 심었다. 1년이 지나도 꽃은 피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티오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선물 받은 목련화가 자라기는 잘 자랐는데 꽃이 피지 않는다”고 하였다. 서울대 농대 교수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목련화는 반드시 추운 겨울을 통과해야 만 꽃이 핀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코로나 후유증 이후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로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국민이 침체 상태에 있다. 이 고난의 시대를 잘 극복해야 좋고 아름다운 세상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그냥 영광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 후에 영광이 있음을 말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고 바울을 말하였다. 삶의 시련과 역경을 체험한 욥도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한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고 하였다. 영어의 격언에 “No cross, No crown” 이라는 말이 있는데 “고난의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의 면류관도 없다”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에는 “No sweat, No sweet” 땀이 없으면, 달콤한 삶도 없다. “No pain No gain” 고생 없는 수확의 결과는 없다는 뜻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이런 원리를 가지고 사역에 임하였듯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역경지수를 높여 귀한 열매들을 거두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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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살며 생각하며
    2023-09-06
  • [조희완 목사] 언제나 항상 (벧전3:13-16)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가장 큰 스님으로 존경을 받는 분이 바로 성철스님이십니다. 그가 입적하시기 전에 남긴 법어 중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법어의 내용은 알 듯 모를 듯한 유명한 말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산을 산이라고 하고 물을 물이라고 하는 것은 유치원생들도 표현할 수 있는 말인데, 그 말이 왜 그렇게 유명한 말로 회자되는 것일까요? 불교의 가장 큰 스님인 그가 유치원생 수준의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너무나 변화무상한 세상을 꼬집어서 한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산은 항상 산이어야지 물이 되면 안 됩니다. 물은 항상 물이어야지 산으로 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산을 산으로만 보아야지 물이 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고, 물을 물로만 보아야지 산이 되기를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산이 산으로 있지 않고 물이 되거나 물이 물로 있지 않고 산이 되면 이 세상은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너무나 급변하는 세대입니다. 그래서 변화하지 않거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시대에 뒤 떨어진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다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변화무상한 세상에서 성도들이 고집스럽게 변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입니다. 신앙이 변하면 모든 것이 다 끝이기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는 신앙의 기초 위에서 우리가 항상 노력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항상”이란 단어가 따라 붙는 말씀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가 소홀히 하지 않고 항상 준비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항상 대답할 소망의 말을 준비해야 합니다.(벧전3:15) 둘째는, 항상 말씀에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빌2:12) 셋째는, 항상 언제나 깨끗한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행24:16) 변화무상한 세상에서 분명한 믿음의 정체성을 가지고 일관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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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 [오성한 목사] 말씀에 주의하라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물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살기로 했다. 첫째, “내 말에 주의해야”한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라고 했다. 주의하는 것이 무엇인가? 운전을 오래하다 보면 차에 이상이 생기면 작은 소리도 들린다. 초보운전을 할 때는 안 들린다. 차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운전을 반복해서 한 능숙한 사람은 들린다. 다른 소리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들을 수 있는 것이 주의하는 것이다. 반복해서 차 소리를 들었던 사람은 아무리 시끄러워도 이상한 소리를 구별할 수 있다. 시끄러움 속에서도 이상이 있어 나는 소리만 크게 듣는 것이다. 그것이 주의하는 것이다. 세상 소리가 시끄럽다. 환경이 시끄럽다. 주변이 시끄럽다. 혼란스럽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가 익은 사람은 들린다. 말씀에 주의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하나님의 말씀이 크게 들린다. 단체사진을 찍은 아이들 중에 내 아이가 있으면 내 아이만 뚜렷하게 보지 않는가! 이것이 주의하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집중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저절로 주의하여 집중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만 밝고 맑게 보인다. 내가 보려고 하는 것만 툭 튀어 오른다. 이렇게 되게 하는 것이 주의하는 것이다. 내 말에 ‘주의하다(attend)’라는 것은 우선권을 둔다는 말이다. 치유를 원한다면 치유에 대한 말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말씀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 “아!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얻었다고 하는구나! 그렇구나! 창조주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구나!” 주변의 다른 소리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내 마음에 말씀이 있게 된다. 말씀이 이미 이루어진 불 믿고 내 것으로 딱 와 있게 된다. 치유의 말씀에 주의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을 말하자면 치유를 원하면서도 몸의 치유에 대한 가르침에 관심을 가지 않는다. 자신에게 기도를 해 주기만을 원하지만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찬송가를 뒤적이거나 마음이 집중되지 않는 경우를 본다. 기도 받기를 원하면서도 눈빛이 다른 곳에 있다. 초점이 다른 곳에 있다. 그냥 “기도한번 해줘보세요. 효과가 있으면 다행입니다.”는 태도로 굉장히 성의가 없다. 성의가 없는 모습을 보면서도 기도를 안 해주면 안 될 상황이기 때문에 기도를 해 주지만 지도하는 자의 마음에도 확신이 없는 기도를 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도 죽은 자를 살리시러 들어가실 때도 제자 세 명과 부모만 데리고 들어갔다. 다른 사람은 데려 들어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었다(마가복음 6장). 고향에 가셔서는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었다고 했다. 믿음으로 해야 한다. 주의하라고 했다. 기도 받으면서 자신은 믿음을 가지지 않고 기도해 주는 사람의 믿음으로만 해라는 식의 태도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런 태도를 가져선 안 된다. 많은 분들이 기도를 그냥 한 번 해 보는 정도로 한다. 의사 앞에 가도 태도가 달라지는데 안 그런가? 의사 앞에서도 우리의 태도가 달라진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기대나 태도가 어떠해야겠는가?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한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아기가 배가 고프면 어떤가? 손가락만 가까이 가도 입을 갖다 댄다. 그러면 배고픈 줄 알게 된다. 이것이 사모하는 것이다. 갓난아이처럼 사모하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으로 성장해서 기도생활과 말씀 생활에 발전하여 스스로 서길 원하신다. 다른 사람이 시켜서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가 아니라 스스로 서길 원하신다. 믿음의 리더들은 건축할 때 비계와 같습니다. 건축을 마친 후 비계가 필요하지 않다. 성도들을 세운 후 걷어치우는 것이다. 성도들도 다른 사람을 세울 때 비계와 같은 자가 되어야 한다. 그 사람을 세운 후 철수해야 한다. 내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비계와 같은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을 세워가는 스스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 성장해서 다른 사람의 비계가 되길 원한다. 스스로 서고 능력 있는 주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세워 놓고 가시길 원하셨다. 그래서 스스로 서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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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 [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5)
    격려와 관계 인간은 누구나 격려가 필요합니다. 격려해 주고 격려 받으면서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격려는 관계의 열쇠입니다. 관계 목회는 ‘격려’ 목회입니다. 격려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생을 격려해 주십니다. 말씀으로 격려해 주십니다.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격려의 말씀입니다. 격려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목회자는 격려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히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격려는 식어 냉한 가슴에 불을 붙여줍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낙심했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인간은 약하고 병들고 고난이 있고 낙심하는 자이기에 격려가 필요합니다. 힘들고 지친 인생들을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따뜻한 말로 격려하고 섬겨주면서 격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리더’는 격려자입니다. 교회는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격려는 관계의 열쇠이고 서로 격려해 주는 교회가 성장합니다. ‘성령’은 ‘격려의 영’입니다. 편지로 이메일로 전화나 문자로 격려해야 합니다. 서로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격려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격려가 없고, 서로 비난하는 교회는 침체 됩니다. 격려를 연습해야 합니다. 목회하면서 격려의 중요성을 가르쳐야 합니다. 관계 목회는 격려 목회입니다. 겸손과 관계 그리스도인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이 인격이고, 최고의 덕목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은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의 열쇠입니다. 교만하면 관계가 깨집니다. 목회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용하십니다. 겸손한 자는 누구나 좋아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묵상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배우려 합니다. 모세는 수많은 연단을 받은 후에 겸손하고 온유해졌습니다. 사도바울도 모든 일에 겸손했고 겸손함으로 목회하고 선교했습니다. 겸손은 온유의 성품이고, 온유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다윗과 세례 요한은 겸손했습니다. 겸손이 인간관계, 관계 목회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베드로 사도도 겸손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벧전5:5-6)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겸손의 중요성을 가르쳐야 합니다. 겸손히 목회해야 목회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겸손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겸손해야 인내하고,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이깁니다. 겸손한 자는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존경합니다. 겸손한 자는 비난이나 정죄하는 것, 비판하지 않습니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선택해야 합니다. 겸손히 섬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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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 [신재철 목사] 만화냐, 봉고차냐. 그것이 문제로다
    ‘덕스럽게 하자!’ 담임목사님 방에서 나오며 혼자 중얼거려 본다. 개척 계획과 사임 시기를 의논하며 조금 미루기로 결정했다. 교회 내부 사정과 담임목사님의 안식년 문제로 그리하기로 했다. 물론 고집부리며 사임하고 개척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는 신호를 주시지 않았는데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모든 것을 덕스럽게 하자며 마음을 다독여 본다. 결과적으로는 계획보다 많이 미루어졌지만 괜찮다. 좋아하는 목사님 곁에서 행복한 부목사로 살았으니 이 정도 욕구는 잠시 접을 수 있다. 급히 사임하지 않고 부목사로 사역하며 개척을 준비할 시간을 배려받은 것은 득이 되었다. 쫓기지 않고 기도하며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볼 수 있고 다른 교회 사례를 살펴보며 탐방도 하고 차근히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여유롭게 교회 개척을 주변에 알리며 기도와 후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다. 개척 시기를 연기시킨 것은, 하나님의 큰 그림이었을까? 담임 목사님의 배려였을까? “만화책 좀 채워주세요.” 마음먹었던 ‘만화방 교회’ 프로젝트를 지인들과 공유하며 후원을 요청했다. 누군가에게는 황당한 이야기였겠지만 간절했던 나의 마음이 전달되었나 보다. 지인들을 통해 크고 작은 후원이 이어졌다. 보던 만화책을 교회로 보내주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만화책 구매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며 후원금을 주시는 분도 생겼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평생 만져보지 못한 재정이 쌓였다. 「만화책? 봉고차?」 2천만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후원금을 쥐게 된다. 내 마음이 흔들린다. 개척하면 승합차 하나는 필요할 건데, 이 돈이면 깨끗한 중고차 한 대를 살 수 있는데. 만화책 사라고 주신 분도 있지만, 개척을 응원하며 주신 분도 있기에 승합차 한 대 구매한다고 따져 물을 사람도 없다. 욕심이 생긴 걸까? 고민이 깊어진다. ‘그래, 결심했어!’ 만화책이 승리했다. 봉고차는 앞으로 필요하면 하나님 주실 날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화책은 지금 못 사면 만화방 교회 프로젝트가 어그러질 것 같았다. 그리고 만화는 우리 교회의 소중한 선교 도구가 될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만화로 선교하는 게 맞나?’ 확신은 있는데 고개는 왜 갸웃거려질까. 여하튼 그런 확신으로 우리 교회는 책장을 짜고 2천 권이 넘는 만화를 채우게 된다. 그리고 개척교회 목사에게 큰 꿈이 생겼다. “대한민국에서 만화책 가장 많이 가진 교회가 되리라!” 에필로그 개척 1년 후, 우리 교회는 차량을 구매하게 된다. 하얀색 카니발은 지금 우리 교회의 발이 되어 잘 쓰임 받고 있다. 물론 5년 할부라는 족쇄가 너무 무겁기도 하지만 카니발은 할부 갚는 내 마음도 모른 체 잘만 달린다. 만화도 봉고차도 모두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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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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